1. 개요

에이드리언 마틴 뉴이(Adrian Martin Newey, Adrian Newey에이드리언 뉴이영어)는 1958년 12월 26일 영국에서 태어난 영국의 엔지니어, 공기역학자, 자동차 디자이너이자 모터스포츠 경영자이다. 그는 2025년부터 애스턴 마틴의 기술 파트너 겸 공동 소유주로 활동할 예정이다. 뉴이는 이전에도 레턴 하우스와 맥라렌의 기술 감독, 마치와 윌리엄스의 수석 디자이너, 레드불 레이싱의 최고 기술 책임자(CTO)를 역임했다.
그는 포뮬러 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엔지니어 중 한 명으로 널리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설계는 1991년부터 2024년까지 12번의 컨스트럭터 챔피언십 타이틀과 218번의 그랑프리 우승을 기록했다. 특히 윌리엄스와 맥라렌에서 챔피언십 우승 차량을 설계한 후, 2006년 레드불 레이싱으로 이적하여 2010년부터 2013년까지, 그리고 2022년과 2023년에 드라이버 및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연속으로 우승시켰고, 2021년에는 드라이버 챔피언십을 우승시켰다. 뉴이가 설계한 RB19는 출전한 22번의 레이스 중 21번(95.45%)을 우승하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포뮬러 원 차량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그의 디자인은 1985년과 1986년 CART 타이틀도 획득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에이드리언 뉴이는 어린 시절부터 학업에 이르기까지 모터스포츠에 대한 깊은 열정을 보였다.
2.1. 어린 시절 및 학업
에이드리언 마틴 뉴이는 1958년 12월 26일 영국 워릭셔주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리처드 뉴이와 에드위나 뉴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수의사였고, 어머니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구급차 운전사였다. 아버지가 로터스 엘란 키트카를 만들 정도로 자동차를 좋아했던 것이 뉴이의 디테일을 추구하는 기질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Autosport오토스포츠영어 잡지를 즐겨 읽었으며, 12세에는 레이싱카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14세에는 중고 카트를 직접 엔진을 수리하고 프레임을 용접하며 자동차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그는 명문 기숙학교인 렙튼 스쿨에 다녔으나, 16세에 학교를 떠나야 했다. 이는 학교에서 열린 Greenslade그린슬레이드영어 콘서트에서 밴드의 믹서 사운드 레벨을 너무 높여 학교 건물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깨뜨린 사건 때문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 사건이 자신의 학업 경력을 방해했다고 인정했다. 이후 폴리테크닉에 등록하여 1977년 공학 분야에서 D3 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에는 사우샘프턴 대학교에서 항공공학을 전공하여 최우수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래에 레이싱 분야에서 일하기 위해 기계공학 대신 항공우주공학을 선택했으며, 그라운드 이펙트 카가 등장하여 레이싱카의 공기역학 연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에 "스포츠카에 대한 그라운드 이펙트 공기역학의 적용"이라는 학사 논문을 썼다.
3. 경력
에이드리언 뉴이의 모터스포츠 경력은 포뮬러 원과 CART를 넘나들며 혁신적인 디자인과 수많은 챔피언십 우승을 통해 그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3.1. 모터스포츠 입문 및 초기 경력
대학 졸업 직후인 1980년, 뉴이는 하비 포슬스웨이트가 이끄는 피티팔디 포뮬러 원 팀에 합류하여 공기역학 부문 책임자로 F8 신차 개발에 참여하며 모터스포츠 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팀의 재정난으로 인해 곧 운영이 중단되면서 피티팔디를 떠났다.
1981년, 그는 마치 팀에 합류했다. 이곳에서 유럽 포뮬러 2에서 조니 체코토의 레이스 엔지니어로 활동하면서 레이싱카 디자인을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프로젝트인 마치 GTP 스포츠카는 매우 성공적인 디자인으로 평가받았으며, IMSA GTP 타이틀을 2년 연속(1983년, 1984년) 획득했다. 1984년 데이토나 24시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이 시기에 마치의 대표인 로빈 허드와 함께 요코하마 고무의 TV 광고에도 출연했다.
3.1.1. IMSA 및 CART 경력

1984년, 뉴이는 마치의 인디카 프로젝트로 이동하여 트루스포츠 팀의 바비 레이홀을 위한 디자이너이자 레이스 엔지니어로 활동했다。 뉴이는 레이홀과 깊은 우정을 쌓았는데, 이는 15년 후 그들의 경력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뉴이의 마치 85C 디자인은 1985년 알 언서의 손에서 CART 챔피언십을, 대니 설리번과 함께 인디애나폴리스 500을 우승했다. 1986년 뉴이는 크라코로 옮겨 마이클 안드레티의 차량을 엔지니어링했으며, 그의 마치 86C 디자인은 바비 레이홀과 함께 CART 타이틀과 인디애나폴리스 500을 우승했다.
1986년 말, 뉴이는 하스 롤라 F1 팀에 합류하여 팀의 부진을 개선하려 했으나, 팀은 1986년 시즌을 끝으로 철수했다. 1987년 뉴먼-하스에서 마리오 안드레티의 레이스 엔지니어로 잠시 활동한 후, 뉴이는 마치에 재고용되어 이번에는 수석 디자이너로서 포뮬러 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3.2. 포뮬러 1 경력
에이드리언 뉴이는 포뮬러 원에서 여러 팀을 거치며 혁신적인 차량 디자인으로 수많은 챔피언십을 이끌었다.
3.2.1. 마커스/레턴 하우스 (March/Leyton House)

뉴이의 첫 F1 디자인인 1988년 881은 많은 이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경쟁력을 보였다. 이반 카펠리는 포르투갈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일본 그랑프리에서는 잠시 알랭 프로스트의 맥라렌-혼다 터보 차량을 추월하여 선두를 달리기도 했다. 이로써 뉴이는 로리 번과 함께 '공기역학 디자이너'로 주목받았다.
마치가 1990년 레턴 하우스로 바뀌면서 뉴이는 기술 감독으로 승진했다. 그는 일본 자본의 지원을 받아 완성된 자체 풍동에서 보다 선진적인 공기역학 디자인을 연구했다. 그러나 CG891은 차체의 자세 변화에 따라 다운포스 양이 급격히 변하는 다루기 어려운 차량이 되었다. 1990년 프랑스에서 카펠리가 레이스 대부분을 선두로 달리다 프로스트의 페라리에 막판 추월을 허용하며 2위를 차지했지만, 이는 그 해의 유일한 밝은 순간이었고 팀의 성적은 계속 하락했다. 결국 1990년 여름, 뉴이는 해고되었다. 그는 나중에 "해고되었지만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팀이 회계사에 의해 운영되면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자신감이 상실되었지만 윌리엄스에서 접근해왔다"고 회고했다.
3.2.2. 윌리엄스 (Williams)


뉴이는 1989년부터 그를 영입하려던 윌리엄스와 계약을 맺고 수석 디자이너로 합류했다. 그는 기술 감독 패트릭 헤드와 함께 공동 개발 체제를 시작했다. 헤드는 구동계와 서스펜션을 담당하고 뉴이는 섀시와 공기역학을 담당하며, 두 사람의 개성이 잘 어우러져 윌리엄스 차량의 경쟁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1991년, 뉴이가 새롭게 투입한 FW14 섀시는 세미오토매틱 변속기 문제로 시즌 초반 아일톤 세나의 맥라렌에 밀렸으나, 중반부터 신뢰성과 성능이 향상되며 나이젤 만셀이 시즌 막판까지 타이틀 경쟁을 벌였다. 1992년에는 액티브 서스펜션과 트랙션 컨트롤 시스템을 장착한 FW14B를 선보여 16경기 중 10승, 15번의 폴 포지션을 기록하며 만셀에게 첫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안겨주었고, 뉴이에게도 첫 컨스트럭터 타이틀을 선사했다. 1993년에는 FW15C를 통해 알랭 프로스트와 데이먼 힐이 두 번째 더블 타이틀을 획득했다.
1994년, FW16은 액티브 서스펜션 등 첨단 기술 장비가 규정으로 금지되면서 성능이 일시적으로 하락했다. 특히 리어 서스펜션 설계가 역효과를 내어 공기역학적 불안정성을 겪었다. 같은 해 산마리노 GP에서 윌리엄스에 새로 합류한 아일톤 세나가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뉴이는 이 사고로 인해 과실치사죄 혐의로 기소되어 2005년 무죄가 확정될 때까지 오랜 법정 싸움을 벌였다. 윌리엄스는 3년 연속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차지했지만, 드라이버 챔피언십은 미하엘 슈마허의 베네통에 내주었다.
1995년, FW17은 베네통 스타일의 하이 노즈를 처음으로 채택했지만, 피트 전략 미숙으로 베네통에 더블 타이틀을 빼앗겼다. 1996년에는 힐의 레이스 엔지니어를 겸하며 힐의 챔피언십 획득을 도왔다. 그러나 다음 시즌 FW19 설계를 마친 후, 뉴이는 11월 8일 윌리엄스가 계약을 불이행했다고 주장하며 출근을 중단했다.
뉴이의 윌리엄스 이탈은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연봉 200.00 만 GBP와 기술 감독으로서의 역할 보장이라는 보도도 있었지만, 뉴이는 팀 수뇌부인 프랭크 윌리엄스와 패트릭 헤드가 드라이버 인사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특히 1996년 드라이버 선택에서 자크 빌뇌브를 기용하고, 개인적으로 친했던 힐을 내보내고 하인츠-하랄트 프렌첸을 영입한 것을 사후 통보받으면서, 윌리엄스의 개인 상점 같은 팀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시기에 메르세데스 엔진 개발을 담당하는 일모어의 대표 마리오 일리엔 (마치 시절 친구)으로부터 메르세데스 엔진을 사용하는 맥라렌 합류 제안을 받았다. 페라리에서도 기술 감독 제안이 있었으나 거절했다. 후에 프랭크 윌리엄스는 뉴이가 팀 지분 소유를 원했던 것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이탈의 원인이었으며, 자신의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뉴이가 윌리엄스에서 설계한 차량들은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총 59번의 우승을 기록했다.
3.2.3. 맥라렌 (McLaren)

1997년, 뉴이는 윌리엄스와 맥라렌 간의 합의가 이루어진 후 8월부터 맥라렌 팀에 합류하여 실질적인 휴가 기간을 보냈다. 그는 닐 오틀리가 디자인한 MP4/12의 개선 작업을 하면서, 1998년 출시될 MP4/13 개발에도 참여했다. 뉴이 본인은 MP4/13의 설계는 이미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세부적인 부분에만 적용했으며, MP4/14 이후의 차량부터는 자신이 처음부터 설계했다고 언급했다.
이후 미카 해키넨은 1998년과 1999년에 2년 연속 월드 챔피언이 되었고, 맥라렌은 1998년 컨스트럭터 타이틀을 획득했다. 2000년에는 해키넨이 미하엘 슈마허와 드라이버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지만 아쉽게 3년 연속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했다. 컨스트럭터 타이틀 역시 신뢰성 문제로 1999년과 2000년 2년 연속으로 페라리에게 빼앗겼다.
2001년, MP4-16은 시즌 초반부터 기계적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할 시기인 5월, 뉴이가 재규어 팀으로 이적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뉴이는 재규어의 매니저인 바비 레이홀의 제안을 받아 계약서에 서명했지만, 론 데니스 맥라렌 대표의 설득으로 이적을 철회했다. 데니스가 뉴이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뉴이에게 아메리카스컵 요트를 디자인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거래가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뉴이의 마음 변화는 재규어의 소유주였던 포드에 대한 레이홀의 체면을 사실상 구겨버렸고, 몇 달 후 레이홀은 재규어에서 해고되었다.
뉴이가 맥라렌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소문은 계속되었고, 2004년 말에는 그가 윌리엄스로 돌아가거나 아예 F1에서 은퇴할 것이라는 추측이 돌면서 그의 미래는 불확실해 보였다. 론 데니스가 강력히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2004-2005년 오프시즌 동안 뉴이의 이탈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계속 퍼졌다. 2005년 4월에는 그의 계약이 6개월 연장되어 그 해 말까지 유효하며, 그 후 안식년을 갖거나 F1 디자인에서 완전히 은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7월 19일, 그는 "이 단계는 기다릴 수 있다"며 2006년에도 맥라렌에 남을 것이라고 밝혔다.
뉴이는 나중에 맥라렌에 대해 "팀 내부의 정치적 움직임이 점점 더 까다로워졌다"며 "맥라렌을 좀 더 일찍 떠났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맥라렌 시절 후반기는 내가 이 세상에서 보낸 시간 중 가장 힘든 나날이었다"고 말하며 2000년 이후 동기 부여가 크게 저하되었음을 밝혔다. 당시 팀 매니저였던 마틴 휘트마시는 맥라렌의 경영 체제에도 한 원인이 있었다며, 매트릭스 시스템 도입으로 니콜라스 톰바지스나 닐 오틀리 등과 뉴이가 대립하게 되었고, 자신이 닐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자 뉴이가 자신을 스파이로 생각했다고 언급했다。 뉴이가 맥라렌에서 설계한 차량들은 총 43번의 우승을 기록했다.
3.2.4. 레드불 레이싱 (Red Bull Racing)



맥라렌을 떠난 뉴이는 장기 휴가를 갖거나 F1 디자인 업무에서 완전히 은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2005년 11월 8일, 레드불 레이싱은 뉴이가 2006년 2월부터 팀에 합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뉴이는 최고 기술 책임자(CTO)로 임명되었으며, 맥라렌이 계약 갱신 협상에서 그의 연봉 인상을 주저하자 레드불 레이싱에서 연간 약 1000.00 만 USD를 받을 것이라고 보도되었다.
레드불에서 뉴이는 즉각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디자인에 대한 재량권을 부여받고 자신을 중심으로 한 엔지니어링 팀을 구축했다. 2006년 차량 디자인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시즌 초반 6경기에서 2점만 획득하는 등 부진한 성적을 보였다. 그러나 데이비드 쿨사드는 모나코 GP에서 3위를 차지하며 6점을 획득했다. 2007년 뉴이 디자인의 레드불 차량은 르노 RS26 엔진을 사용했으며, 합리적인 속도를 가졌으나 신뢰성이 부족하여 각 드라이버가 17경기 중 7번이나 리타이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드불은 2007년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서 목표했던 5위를 달성했다. 뉴이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레드불의 자매 팀인 토로 로소 섀시도 설계했다. 2008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세바스티안 페텔이 STR3를 통해 토로 로소의 첫 승리를 안겨주었다.

2009년, 공기역학 규정의 대폭 개정에 맞춰 RB5를 개발했다. 레드불은 중국 GP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며(드라이버는 페텔) 우승을 다투는 선두 팀 중 하나로 부상했다. 같은 해 브라질 GP에서 마크 웨버가 우승하며 뉴이가 설계한 차량이 통산 100승을 달성했다. 레드불은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서 2위를 기록했다.
2010년 이후에는 RB5를 기반으로 한 진화형 차량을 투입했다. 풀 로드 서스펜션 채택과 블로운 디퓨저 개발 등 차량 후미의 공기역학 설계에서 독창성을 발휘했다. 같은 해 RB6를 통해 레드불은 더블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뉴이는 1998년 맥라렌 시절 이후 처음으로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다시 차지했다. 뉴이는 세 개의 다른 F1 팀에서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우승한 유일한 F1 디자이너가 되었다. 2011년에도 RB7은 RB6의 속도를 계승하며 신뢰성까지 갖춰 압도적인 성능을 보였다. 19경기 중 18번의 폴 포지션을 획득하고 12번의 레이스에서 우승했다. 2011년 10월 9일, 레드불은 세바스티안 페텔을 F1 역사상 최연소 더블 챔피언으로 만들며 드라이버 챔피언십을 우승했다. 레드불은 10월 16일 코리아 그랑프리에서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확보하며 이 타이틀을 이어갔다.
다음 해인 2012년, 맥라렌 MP4-27과의 우위성 및 페르난도 알론소의 F2012와의 치열한 경쟁에도 불구하고, 레드불과 세바스티안 페텔은 극적인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다시 한번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2013년에는 RB9와 세바스티안 페텔이 여름 휴식기 이후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인도 그랑프리에서 드라이버와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모두 방어했다. 페텔은 벨기에 그랑프리부터 시즌 마지막 브라질 그랑프리까지 9연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014년 6월 8일, 레드불 레이싱은 뉴이가 향후 몇 시즌 동안 계약을 연장했다고 발표하며, "새로운 레드불 기술 프로젝트"를 포함한 더 넓은 책임을 부여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레드불은 페라리의 2000.00 만 GBP 계약 제안을 물리쳤다. 2014년 V6 터보 하이브리드 파워 유닛이 도입된 후, 뉴이의 차량들은 르노 및 혼다 파워 유닛의 성능에 발목이 잡혔지만, 2019년 혼다 파워로 전환하면서 결국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는 파워 유닛을 갖게 되었다. 2014년부터 2020년 사이에 RB11 (2015년)을 제외한 모든 차량이 최소 두 번의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했으며, RB10, RB12, RB16은 2014년, 2016년, 2020년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에서 2위를 차지했다.
2021년 시즌에는 RB16B 디자인으로 막스 페르스타펀이 드라이버 챔피언십을 우승하며 팀이 다시 타이틀 경쟁에 복귀했다. 2022년에는 RB18이 강력한 경쟁력을 입증하며 페르스타펀에게 일본 그랑프리에서 두 번째 드라이버 챔피언십을 안겨주었고, 레드불에게는 2013년 이후 첫 컨스트럭터 챔피언십을 선사했다. 이어서 RB19는 역사상 가장 지배적인 F1 차량 중 하나가 되어, 1988년 맥라렌 MP4/4가 세운 93.8%의 이전 기록을 깨고 95.45%의 우승률을 기록했다.
2023년 캐나다 그랑프리에서 페르스타펀은 레드불의 100번째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는 뉴이의 포뮬러 원 통산 200번째 우승이기도 했다. 그 해 후반, 레드불은 헝가리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맥라렌의 11연승 기록을 깼고, 이탈리아에서는 페르스타펀이 페텔의 9연승 기록을 깼다. 이 우승은 레드불 레이싱의 15연승이기도 하여 두 개의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2024년 4월 25일, 모터스포츠 언론 매체들은 뉴이가 레드불 레이싱을 떠날 의향이 있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레드불 레이싱은 처음에 이 보도에 대해 "에이드리언은 최소 2025년 말까지 계약되어 있으며, 그가 다른 팀에 합류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5일 후, 뉴이의 이탈이 완료되었으며 마이애미 그랑프리 이전에 공식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보도되었다. 뉴이는 2025년 1분기 동안 레드불 레이싱을 떠나 포뮬러 원 업무에서 물러나면서도, 그들의 첫 하이퍼카인 RB17 개발에 계속 집중할 예정이다.
3.2.5. 애스턴 마틴 (Aston Martin)
뉴이는 애스턴 마틴과 계약을 맺고 팀의 주주이자 매니징 기술 파트너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2025년 3월 1일에 팀에 합류할 예정이며, 이는 2026년 규정에 맞춰 팀에 합류하는 시기이다. 뉴이는 애스턴 마틴으로 이적한 후에도 RB17 하이퍼카 개발에 계속 관여할 예정이며, 2025년 여름 이후로 계획된 RB17의 트랙 테스트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4. 모터스포츠 외 활동
에이드리언 뉴이는 포뮬러 원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그의 기술적 재능과 모터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4.1. 비디오 게임 및 기타 프로젝트
2010년 6월 15일, 소니의 E3 언론 간담회에서 뉴이가 플레이스테이션 3용 비디오 게임인 그란 투리스모 5의 최고 기술 책임자로 협력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다. 게임 트레일러에서는 뉴이가 레이싱 드라이버 세바스티안 페텔과 함께 영국 레드불 테크놀로지 건물에서 폴리포니 디지털의 CEO이자 그란 투리스모 시리즈의 제작자인 야마우치 가즈노리와 논의하는 모습이 담겼다. 이 세 사람의 협력은 나중에 게임에 등장하는 콘셉트카인 레드불 X2010과 레드불 X2011의 완성으로 이어졌다。
2018년 10월 10일, 뉴이는 다가오는 W 시리즈의 자문 위원회 멤버로 발표되었다. W 시리즈는 포뮬러 3 규격의 타투스 T-318 섀시를 기반으로 하는 여성 전용 레이싱 챔피언십이다. 또한 그는 장-에릭 베르뉴 등과 함께 2021년 개최 예정인 전동 SUV 레이스 시리즈인 익스트림 E에 참가할 신생 팀 Veloce Racing벨로체 레이싱영어을 공동 설립하기도 했다.
4.2. 개인 레이싱 및 수집 활동
뉴이는 열렬한 스포츠카 수집가이자 드라이버로, 몇 년 동안 르망 레전드 레이스에 참가했다. 2006년에는 경쟁 중이던 포드 GT40을 파손시켰지만, 손가락이 베이는 경미한 부상만 입었다. 이후 굿우드 리바이벌 미팅에서 재규어 E-타입을 파손시키기도 했다.

2007년, 그는 현대 레이싱으로 전환하여 르망 24시에 AF 코르세 팀의 페라리 F430 드라이버 라인업에 포함되었다. 뉴이와 공동 드라이버인 벤 오코트, 조 마카리는 종합 22위, 클래스 4위로 완주했다.
2010년 7월 2일, 뉴이는 2007년 레드불 레이싱에 합류한 이후의 업적을 인정받아 자신의 RB5를 선물 받았다. 뉴이는 2010년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에서 이 차량을 처음으로 언덕 위로 운전했다.
2010년 8월 8일, 뉴이는 스네터턴 서킷에서 게스트 드라이버로 지네타 GT 슈퍼컵에 참가하던 중 사고에 휘말렸다. 그는 스핀하여 토니 휴즈의 차량 경로로 진입했고, 그의 차량은 측면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예방 차원에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심각한 부상은 입지 않았다. 크리스티안 호너 레드불 대표는 뉴이가 독특한 사람이며 자유가 필요하다며 그의 레이싱 활동을 금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뉴이는 몇 대의 클래식카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로터스 49B도 있다. 2024년 5월에는 이 49B로 모나코 히스토릭 그랑프리에 참가하여 시리즈 D 클래스 4위를 차지했다.
5. 개인적인 삶
에이드리언 뉴이는 세 번 결혼했으며, 네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5.1. 가족 및 결혼
뉴이의 첫 번째 아내는 간호사 아만다였으며, 두 명의 딸을 두었다. 그들은 1983년에 결혼하여 1989년에 헤어졌다. 그는 1992년에 두 번째 아내 매리골드와 결혼했으며, 2010년에 헤어졌다. 그들은 딸 한 명과 아들 해리슨 뉴이를 두었다. 해리슨은 레이싱 드라이버가 되어 2016-17년 MRF Challenge Formula 2000 ChampionshipMRF 챌린지 포뮬러 2000 챔피언십영어과 2017-18년 아시안 르망 시리즈에서 우승했다. 해리슨 뉴이는 2019년부터 슈퍼 포뮬러에 출전하기도 했다. 에이드리언 뉴이는 해리슨의 슈퍼 포뮬러 루키 테스트 참가를 위해 일본을 방문하여 아들의 SF 차량을 스케치하고 팀 관계자들과 미팅을 가지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해리슨이 슈퍼 포뮬러에서 3위를 차지했을 때 뉴이가 현장에서 지켜보며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뉴이는 2017년 8월부터 아만다 "맨디" 스메르차크와 결혼했다. 그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배우 론 스메르차크의 딸이다. 그녀는 현재 잉글랜드 수영 관련 경기를 총괄하는 Swim England스윔 잉글랜드영어의 '인사이트 오피서'로 재직 중이다.
6. 수상 및 영예
에이드리언 뉴이는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수많은 모터스포츠 챔피언십과 개인적인 영예를 얻었다.
6.1. 포뮬러 1 챔피언십
뉴이가 설계한 섀시는 12번의 컨스트럭터 챔피언십과 14번의 드라이버 챔피언십을 획득했으며, 여기에는 2010년부터 2013년까지 레드불과 함께 획득한 4년 연속 컨스트럭터 타이틀이 포함된다. 뉴이는 2024년 기준으로 포뮬러 원에서 수석 디자이너로 40번 출전하여 15번의 월드 챔피언십과 31번의 그랑프리 우승을 기록했다.


뉴이가 윌리엄스에서 설계한 FW14B는 1992년 나이젤 만셀에게 첫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안겨주었으며, 맥라렌에서 설계한 MP4/13은 1998년 미카 해키넨에게 첫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선사했다.


레드불 레이싱으로 이적한 후, 뉴이의 RB6는 2010년 세바스티안 페텔과 함께 더블 타이틀을 획득하며 레드불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2024년 시즌을 위한 RB20 또한 그의 최신작 중 하나이다.
시즌 | 월드 챔피언십 | 섀시 | 엔진 | 통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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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스트럭터 | 드라이버 | 레이스 | 우승 | 폴 포지션 | 최고 랩 | 포디움 | 컨스트럭터 챔피언십 순위 | |||
1988 | 뉴이, 마치의 수석 디자이너로 부임 | |||||||||
- | 881 | 저드 | 18 | 0 | 0 | 0 | 3 | 6위 | ||
1989 | CG891 | 14 | 0 | 0 | 1 | 0 | 12위 | |||
1990 | 마치가 레턴 하우스로 변경, 뉴이 기술 감독으로 승진 | |||||||||
- | CG901 | 저드 | 16 | 0 | 0 | 0 | 1 | 7위 | ||
1991 | 뉴이, 윌리엄스의 수석 디자이너로 이적 | |||||||||
- | FW14 | 르노 | 16 | 7 | 6 | 8 | 17 | 2위 | ||
1992 | 윌리엄스 | 나이젤 만셀 | FW14B | 16 | 10 | 15 | 11 | 21 | 1위 | |
1993 | 윌리엄스 (2) | 알랭 프로스트 | FW15C | 16 | 10 | 15 | 10 | 22 | 1위 | |
1994 | 윌리엄스 (3) | - | FW16 | 16 | 7 | 6 | 8 | 13 | 1위 | |
1995 | - | FW17 | 17 | 5 | 12 | 6 | 17 | 2위 | ||
1996 | 윌리엄스 (4) | 데이먼 힐 | FW18 | 16 | 12 | 12 | 11 | 21 | 1위 | |
1997 | 윌리엄스 (5) | 자크 빌뇌브 | FW19 | 17 | 8 | 11 | 9 | 15 | 1위 | |
1998 | 뉴이, 맥라렌의 기술 감독으로 이적 | |||||||||
맥라렌 | 미카 해키넨 | MP4/13 | 메르세데스 | 16 | 9 | 12 | 9 | 20 | 1위 | |
1999 | - | 미카 해키넨 (2) | MP4/14 | 16 | 7 | 11 | 9 | 16 | 2위 | |
2000 | - | MP4/15 | 17 | 7 | 7 | 12 | 22 | 2위 | ||
2001 | MP4-16 | 17 | 4 | 2 | 6 | 13 | 2위 | |||
2002 | MP4-17 | 17 | 1 | 0 | 2 | 10 | 3위 | |||
2003 | MP4-17D | 16 | 2 | 2 | 3 | 13 | 3위 | |||
2004 | MP4-19 | 18 | 1 | 1 | 2 | 4 | 5위 | |||
2005 | MP4-20 | 19 | 10 | 7 | 12 | 18 | 2위 | |||
2006 | MP4-21 | 18 | 0 | 3 | 3 | 9 | 3위 | |||
2007 | 뉴이, 레드불의 최고 기술 책임자(CTO)로 이적 | |||||||||
- | RB3 토로 로소 STR2 | 르노 페라리 | 17 | 0 | 0 | 0 | 1 | 5위 | ||
2008 | RB4 토로 로소 STR3 | 18 | 1 | 1 | 0 | 2 | 6위 | |||
2009 | RB5 토로 로소 STR4 | 17 | 6 | 5 | 6 | 16 | 2위 | |||
2010 | 레드불 | 세바스티안 페텔 | RB6 | 르노 | 19 | 9 | 15 | 6 | 20 | 1위 |
2011 | 레드불 (2) | 세바스티안 페텔 (2) | RB7 | 19 | 12 | 18 | 10 | 27 | 1위 | |
2012 | 레드불 (3) | 세바스티안 페텔 (3) | RB8 | 20 | 7 | 8 | 7 | 14 | 1위 | |
2013 | 레드불 (4) | 세바스티안 페텔 (4) | RB9 | 19 | 13 | 11 | 12 | 24 | 1위 | |
2014 | - | RB10 | 19 | 3 | 0 | 3 | 12 | 2위 | ||
2015 | RB11 | 19 | 0 | 0 | 3 | 3 | 4위 | |||
2016 | RB12 | 태그호이어 | 21 | 2 | 1 | 5 | 16 | 2위 | ||
2017 | RB13 | 20 | 3 | 0 | 2 | 13 | 3위 | |||
2018 | RB14 | 21 | 4 | 2 | 6 | 13 | 3위 | |||
2019 | RB15 | 혼다 | 21 | 3 | 2 | 5 | 9 | 3위 | ||
2020 | RB16 | 17 | 2 | 1 | 3 | 13 | 2위 | |||
2021 | - | 막스 페르스타펀 | RB16B | 22 | 11 | 10 | 8 | 23 | 2위 | |
2022 | 레드불 (5) | 막스 페르스타펀 (2) | RB18 | RBPT | 22 | 17 | 8 | 8 | 28 | 1위 |
2023 | 레드불 (6) | 막스 페르스타펀 (3) | RB19 | 혼다 RBPT | 22 | 21 | 14 | 11 | 30 | 1위 |
2024 | - | 막스 페르스타펀 (4) | RB20 | 24 | 9 | 8 | 4 | 18 | 3위 | |
2025 | 뉴이, 레드불을 떠나 가드닝 휴가에 돌입 | |||||||||
6.2. 기타 수상 및 영예
뉴이는 포뮬러 원 외에도 다양한 모터스포츠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국가로부터 공식적인 영예를 받았다.
- IMSA GT 챔피언십**: 1983년, 1984년 (디자이너로서)
- 데이토나 24시**: 1984년 (디자이너로서)
- CART 인디카 월드 시리즈**: 1985년, 1986년 (디자이너로서)
- 인디애나폴리스 500**: 1985년, 1986년 (디자이너로서)
2012년 대영 제국 훈장 4등급(OBE)을 수훈했다. 또한, 2013년에는 서식스 대학교에서 명예 과학 박사 학위를, 옥스퍼드 브룩스 대학교에서 명예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7. 저술
에이드리언 뉴이는 2017년에 그의 첫 저서인 How to Build a Car: The Autobiography of the World's Greatest Formula 1 Designer를 출판했다. 그는 출판사로부터 "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10대의 차량을 선택하여 그 설계 철학과 발상을 이야기하는" 기획에 흥미를 느껴 집필을 시작했으며, 동시에 자서전적인 내용도 담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만들고 싶다"는 이유로 자동차 업계 경험이 없는 작가를 기용하여 공동 집필했지만, 결과적으로 "몇몇 영역에서 부정확한 이해에 빠졌다"며 전체의 3분의 1가량을 직접 다시 썼다고 한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은 2020년에 에이드리언 뉴이 HOW TO BUILD A CAR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8. 영향 및 평가
에이드리언 뉴이는 모터스포츠 산업, 특히 포뮬러 원의 공기역학 디자인과 차량 설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경력 중 발생했던 비판과 논란도 존재한다.
8.1. 기술적 기여 및 혁신

뉴이는 컴퓨터 설계(CAD)가 보편화된 후에도 제도판을 사용하여 연필과 자로 도면을 그리는 방식을 고수했다. 그는 제도판을 계속 사용하는 이유로 지속성 유지(CAD를 처음부터 배우는 데 시간이 걸림)와 모니터 화면 크기에 제한받지 않고 모든 것을 같은 스케일로 눈앞에 놓고 볼 수 있으며, 자유롭게 선을 긋거나 고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공기역학적 완성도를 위해 타협을 싫어했다. 마치 시절에는 리어 윙 뒷면에 스폰서 스티커를 붙이는 것을 싫어했는데, 이는 윙 표면의 요철이 기류를 방해하여 다운포스 발생 효율을 떨어뜨리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레이싱 슈트 어깨에 달린 비상 구조용 스트랩조차 신경 쓸 정도였다. 이반 카펠리가 "콕핏이 너무 좁아 기어 변속이 어렵다"고 불평하자, 뉴이는 변속 레버를 구부려 해결했다. 카펠리는 콕핏이 너무 좁아 레이스가 끝나면 온몸에 멍투성이였다고 회고했다. 또한, 레턴 하우스 시절에는 엔진 카울을 타이트하게 디자인하기 위해 저드에 뱅크각을 75도로 좁힌 EV 엔진 개발을 요청하기도 했다.
1998년 맥라렌이 브리지스톤 타이어로 전환할 때, 뉴이는 새로 개발된 와이드 프런트 타이어가 공기역학에 방해가 된다며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브리지스톤의 하마시마 히로히데와 논쟁을 벌였고, 테스트 결과 뉴이가 물러섰다. 맥라렌과 브리지스톤 진영은 시즌 초반부터 빠른 속도를 보여주었고, 굿이어도 급히 와이드 프런트 타이어를 투입했다. 그는 레이스 시작 전 더미 그리드를 돌아다니며 다른 팀의 차량을 면밀히 관찰하기도 한다.
뉴이의 특징적인 디자인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 프런트 윙의 3D 윙 엔드플레이트: 프런트 윙의 윙 엔드플레이트를 프런트 타이어 안쪽까지 연장하여 타이어 주변의 난류를 제어한다. 1988년 마치 881에서 시작되어 이후 보텍스 제너레이터 추가 등 개발 경쟁이 과열되었다.
- 오각형 콕핏 개구부: 모노코크 개구부를 비스듬히 잘라내어 드라이버의 양 어깨가 노출되는 디자인이다. 위에서 보면 야구의 홈 플레이트와 같은 오각형으로 보인다. 마치 881부터 FW16 (1994년)까지의 특징이었으나, 1995년 콕핏 측면 보호대 장착 의무화로 사라졌다.
- 터널형 디퓨저: 리어 엔드의 개방부가 반원형으로 굽어진 대형 디퓨저이다. 마치(레턴 하우스) 시절 차량의 특징으로, 1990년 맥라렌 MP4/5B와 1991년 조던 191에서도 유사한 디자인이 보였다.
- 굴뚝 덕트 (Chimney Duct): 사이드포드 상부에 굴뚝과 같은 덕트를 설치하여 카울 내부의 열 배출을 촉진한다. 2000년 맥라렌 MP4/15에서 시작되어 2009년 공기역학 규정 개정 전까지 일반적인 공기역학 아이템이 되었다.
- 제로 킬 (Zero Keel): 프런트 로어 위시본의 모노코크 쪽 접합부에 돌기(킬)를 만들지 않고 모노코크 하단에 직접 부착하는 디자인이다. 2005년 맥라렌 MP4-20부터 채택되었으며, 현재 F1 차량에서는 일반화되어 있다.
- V-노즈: 모노코크 상단 양쪽 어깨 부분이 솟아오르고 아래쪽으로 가늘게 좁아져 모노코크 단면이 "V"자 형태로 보이는 디자인이다. 2009년 RB5의 특징 중 하나이다. 프런트 노즈 하단을 곡선으로 만들기 위한 디자인이며, 양쪽 어깨 부분에 "혹"이 있는 것은 최소 단면적 규정을 충족하기 위함이다.
- 리어 풀 로드 서스펜션: 리어 서스펜션을 일반적인 푸시 로드 방식에서 풀 로드 방식으로 변경하여 댐퍼 유닛을 아래쪽으로 옮겨 리어 엔드의 높이를 낮추고 공기역학 효율을 높인다. RB5 이후 F1 차량의 일반적인 디자인이 되었다.
- 블로운 디퓨저: 2010년 RB6부터 도입되었다. 고속의 엔진 배기를 리어 타이어 부근으로 배출하여 디퓨저의 효율을 높인다. 2011년 RB7에서는 르노와 협력하여 엔진의 "오프 스로틀 블로잉"도 개발했으며, 사용 금지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 하이 레이크 콘셉트: 1996년 FW18 이후, 차량의 프런트 차고를 낮게, 리어 차고를 비교적 높게 하여 차량 전체가 앞쪽으로 기울어진 자세를 취하는 "고 레이크 각(하이 레이크)"을 콘셉트로 도입했다. 뉴이는 하이 레이크 각을 채택함으로써 차량의 다운포스가 증대되는 이점이 있다고 보았지만, 2020년 현재 규정에서는 차량 균형을 잡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8.2. 비판 및 논란
뉴이의 경력 중 가장 큰 논란은 1994년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 발생한 아일톤 세나의 사망 사건과 관련된 법적 문제였다. 뉴이가 설계에 참여한 차량에서 세나가 사망한 후, 뉴이는 윌리엄스 팀의 여러 구성원들과 함께 과실치사죄로 기소되었다.
1997년 12월의 초기 판결에서 뉴이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무죄 판결은 1999년 11월 항소심에서도 유지되었다. 그러나 2003년 1월, 이탈리아 대법원은 "중대한 오류"를 이유로 사건을 재개했다. 최종적으로 2005년 5월, 법원은 뉴이에게 완전한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뉴이의 경력에 큰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그에게 오랜 법정 싸움의 부담을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