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Overview
독일 태생의 영국 생화학자 에른스트 보리스 체인(Sir Ernst Boris Chain영어)은 페니실린 연구를 통해 인류의 건강 증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입니다. 1906년 독일 베를린에서 유대인 혈통으로 태어난 그는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1933년 영국으로 이주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시련 속에서도 그는 1939년부터 하워드 플로리와 함께 알렉산더 플레밍이 발견했던 페니실린의 항균 효과를 재조명하고, 그 화학적 조성과 치료적 적용 가능성을 규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페니실린의 베타-락탐 구조 이론을 정립하고, 대량 생산의 기반을 마련하여 이 기적의 약이 널리 사용될 수 있도록 기여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업적은 수많은 생명을 구하며 의학의 역사를 바꾸었으며, 1945년 플레밍, 플로리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예로 이어졌습니다. 체인의 삶은 과학적 탁월함뿐만 아니라, 정치적 억압 속에서도 인류에 기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낸 인도주의적 면모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2. 생애 초반과 교육
에른스트 보리스 체인은 유년기와 가족 배경, 그리고 정규 교육 과정을 통해 생화학자로서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2.1. 유년기와 가족 배경
체인은 1906년 6월 19일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미하엘 체인(Michael Chain영어)은 화학 제품을 다루는 화학자이자 산업가였으며, 러시아에서 화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이주한 세파르딤 유대인과 아슈케나짐 유대인 혈통을 모두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조상은 바빌로니아 유대인 사회의 선구자이자 카탈루냐 유대인의 저명한 인물인 제라히아 벤 셸티엘 헨(Zerahiah ben Shealtiel Ḥen영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머니 마가레테 체인(혼전성: 아이스너)은 베를린 출신이었습니다. 체인이 14세이던 1920년에 아버지가 사망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인 1923년에서 1924년 사이 독일의 극심한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가족의 재산이 대부분 소실되었습니다. 그는 1930년대 베를린에서 만난 알베르트 노이베르거(Albert Neuberger영어) 교수와 평생 동안 우정을 유지했습니다.
2.2. 교육 및 초기 학업
체인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하여 1930년에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한때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길을 진지하게 고려하며 자주 공개 공연을 가졌습니다. 학위를 취득한 후에는 효소의 생화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한 후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한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츠윌리엄 칼리지에서 프레더릭 갈런드 홉킨스 경의 지도 아래 인지질 연구를 시작하며 Ph.D.를 취득했습니다. 이후 1935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병리학 강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재직 기간 동안 그는 뱀독, 종양 대사, 리소자임 등 다양한 생화학 연구 주제와 생화학 기술 개발에 몰두했습니다.
3. 영국 이주와 초기 연구
체인은 나치 정권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중요한 초기 생화학 연구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나치 정권이 1933년에 집권하자, 유대인 혈통이자 좌익 정치적 성향을 지녔던 체인은 독일에서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1933년 4월 2일 단 10 GBP를 가지고 영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영국에서 유전학자이자 생리학자인 J. B. S. 홀데인의 도움으로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병원에서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몇 달 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피츠윌리엄 칼리지의 박사 과정 학생으로 받아들여져 프레더릭 갈런드 홉킨스 경의 지도 아래 인지질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1935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병리학 강사로 자리를 옮겨 뱀독, 종양 대사, 리소자임 등 광범위한 생화학 분야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1939년 4월에는 영국 국적을 취득하여 영국 신민이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엽,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치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접했습니다.

4. 페니실린 연구
에른스트 체인은 알렉산더 플레밍의 초기 발견을 재조명하고, 하워드 플로리와의 협력을 통해 페니실린의 치료적 작용과 화학적 조성을 밝혀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체인은 1939년 하워드 플로리와 함께 미생물이 생산하는 천연 항균제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9년 전 알렉산더 플레밍이 우연히 발견했던 페니실린에 대한 연구를 재조명하게 되었습니다. 체인과 플로리는 페니실린의 치료적 작용과 화학적 조성을 밝혀냈습니다. 특히 이들은 페니실린의 살균 활성 물질을 분리하고 농축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 체인, 플로리, 그리고 플레밍은 1945년에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하게 됩니다.

4.1. 페니실린의 재발견과 치료 효과 규명
페니실린의 역사는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푸른곰팡이(Penicillium notatum라틴어, 또는 Penicillium chrysogenum라틴어)가 박테리아의 성장을 억제하는 현상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플레밍은 이 물질의 분리 및 정제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 의학적 잠재력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1939년, 에른스트 체인과 하워드 플로리는 플레밍의 연구에 주목하여 페니실린에 대한 체계적인 재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곰팡이에서 활성 성분을 추출하고 농축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페니실린의 강력한 항균 효과를 확인했습니다. 동물 실험을 통해 페니실린이 세균 감염을 치료하는 데 효과적임을 입증함으로써, 이들은 페니실린이 단순한 실험실의 호기심이 아닌 실제 질병 치료에 활용될 수 있는 의학적 가치를 지녔음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4.2. 베타-락탐 구조 이론 정립
에른스트 체인은 페니실린의 화학적 특성과 작용 방식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에드워드 에이브러햄과 함께 1942년 페니실린의 핵심적인 화학 구조인 베타-락탐 구조를 이론적으로 예측하는 데 참여했습니다. 체인이 먼저 이 구조를 가설로 제시했습니다. 이후 1945년 도로시 호지킨은 X선 결정학 연구를 통해 체인의 이론적 예측을 실험적으로 확인하며 페니실린의 정확한 3차원 구조를 규명했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이해는 페니실린의 작용 메커니즘을 밝히고, 이후 새로운 항생제 개발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4.3.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
페니실린 연구의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에른스트 체인은 194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그는 알렉산더 플레밍과 하워드 플로리와 함께 "페니실린의 발견과 다양한 감염병에 대한 치료 효과 규명"이라는 업적으로 노벨 위원회로부터 최고의 영예를 받았습니다. 이 수상은 인류의 질병 치료에 대한 새로운 장을 열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5. 노벨상 이후의 활동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 이후 에른스트 체인은 학계와 산업계에서 활발한 연구 활동을 이어갔으며, 중요한 경력 변화를 겪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무렵, 체인은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치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접했습니다. 전쟁 후 그는 영국에서의 전후 연구 개발 상황에 불만을 느끼고 1946년 이탈리아 로마로 이주하여 고등위생연구소(Istituto Superiore di Sanità이탈리아어)에서 근무했습니다.
5.1. 이탈리아에서의 활동
로마에서 체인은 국제 화학미생물학 연구센터(International Research Centre for Chemical Microbiology)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센터는 항생제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최초의 기관으로, 체인은 이곳에서 항생물질 분야의 연구를 주도했습니다. 그의 이탈리아 이주는 부분적으로는 전쟁 중 가족을 잃은 비극과 영국 과학계의 전후 발전 방향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5.2. 영국으로의 복귀와 이후의 연구
1964년 체인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서 생화학과를 설립하고 초대 학과장으로 부임하여 은퇴할 때까지 재직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산업 발효 기술의 전문화에 집중하며 생화학 연구의 산업적 응용 가능성을 탐구했습니다. 1948년 3월 17일에는 왕립학회 회원(Fellow of the Royal Society영어, FRS)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6. 개인 생활과 유대인 정체성
에른스트 체인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유대인 정체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는 그의 사상과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체인은 1948년 생화학자 앤 벨로프와 결혼했습니다. 앤 벨로프는 저명한 인물들인 맥스 벨로프, 존 벨로프, 노라 벨로프, 르네 벨로프의 자매였습니다. 체인 부부는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유대인 정체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열렬한 시온주의자였으며, 1954년 이스라엘 레호봇에 위치한 바이츠만 과학 연구소의 이사회 이사로 합류했고, 이후 집행 이사회 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녀들을 유대교 신앙 안에서 엄격하게 교육했으며, 그들을 위해 많은 과외 교육을 주선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1965년 세계 유대인 의회 지식인 회의에서 행한 "내가 왜 유대인인가(Why I am a Jew영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은퇴 후 그는 서부 아일랜드의 메이오 주 캐슬바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당시 주치의였던 아쇼카 자나비-프라사드(Ashoka Jahnavi-Prasad영어)의 헌신적인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이 의사는 훗날 양극성 장애 치료에 리튬염 대신 더 안전한 발프로산나트륨을 처음으로 제안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7. 영예와 유산
에른스트 체인은 생애 동안 여러 중요한 상과 명예를 수여받았으며, 그의 연구는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고 다양한 방식으로 추모되고 있습니다.
7.1. 수상 및 서훈
체인이 수여받은 주요 상과 서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 1945년: 알렉산더 플레밍, 하워드 플로리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 공동 수상.
- 1948년 3월 17일: 왕립학회 회원(Fellow of the Royal Society영어, FRS)으로 선정.
- 1954년: 파울 에를리히 및 루트비히 다르름슈테터상 수상.
- 1969년: 기사작위(Knight Bachelor영어) 서임.
7.2. 사망 및 추모
에른스트 체인은 1979년 8월 12일 아일랜드 캐슬바에 있는 메이오 종합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공헌을 기리기 위해 여러 추모 시설이 세워졌습니다.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생화학 건물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캐슬바에도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습니다.

8. 평가와 논란
에른스트 체인의 업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그를 둘러싼 비판적 시각이나 논란이 된 사건들도 존재합니다.
8.1. 긍정적 평가
에른스트 체인은 페니실린을 단순한 실험실 발견에서 인류에게 실질적인 치료제로 변모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하워드 플로리와 협력하여 페니실린의 정제, 농축 및 안정화 방법을 개발했으며, 이는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과 의학적 적용을 가능하게 한 핵심적인 단계였습니다. 그의 생화학적 전문성은 페니실린의 화학 구조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효능을 극대화하는 데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페니실린은 수많은 세균 감염 질환을 치료하며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했고, 현대 의학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습니다. 체인은 엄격하고 혁신적인 연구 방식으로 인류 건강 증진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8.2. 비판 및 논란
에른스트 체인의 경력 중 일부는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1950년에 제정된 미국의 매캐런 국내보안법(McCarran Internal Security Act영어)에 따라 미국 입국을 거부당하는 사건을 겪었습니다. 1951년에만 두 차례에 걸쳐 비자 발급이 거부되었는데, 이 법은 당시 미국 정부가 공산주의자나 '전복적' 인물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입국을 제한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체인의 과거 좌익 정치 성향이나 그의 유대인 정체성, 혹은 시온주의 활동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그는 성격적으로 변덕스럽고 때로는 저항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과학계의 발전 방향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9. 함께 보기
- 하워드 플로리
- 알렉산더 플레밍
- 페니실린
- 노벨 생리학·의학상
- 도로시 호지킨
- 알베르트 노이베르거
- 매캐런 국내보안법
- 유대인
- 시온주의
- 베타-락탐
- 항생제
-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 바이츠만 과학 연구소
- 왕립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