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야코프 몰레스홋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학업을 마친 후 주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며 학술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1. 출생 및 초기 배경
야코프 알베르투스 빌레브로르두스 몰레스홋은 1822년 8월 9일 네덜란드의 스헤르토헨보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인 요하네스 프란시스쿠스 가브리엘 몰레스홋(1793~1857)이었고,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안토니아 반 데르 몬데(1795~1866)였다. 그의 아버지는 종교에 회의적이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아들에게 자연과학을 장려했다. 몰레스홋은 클레베에서 학교를 다니며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익혔고, 학교 교장인 페르디난트 헬름케의 격려를 받았다. 그의 라틴어 및 그리스어 교사인 모리츠 플라이셔는 그에게 헤겔 철학을 소개하기도 했다.
1.2. 교육
몰레스홋은 아버지와 달리 라이덴 대학교가 아닌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그는 테오도어 비쇼프에게서 식물학을, 빌헬름 델프에게서 화학을 배웠다. 프리드리히 티데만은 해부학을, 레오폴트 그멜린은 생리학을 가르쳤다. 그는 야코프 헨레의 지도 아래 1845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시기에 그는 요한 크리스티안 카프의 학술 모임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기센에서 유스투스 폰 리비히를, 베른에서 로렌츠 오켄을 만나며 학술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요하네스 물더의 저작을 번역하여 가브리엘 구스타프 발렌틴에게 선물했고, 발렌틴의 저작을 티데만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1.3. 초기 경력 및 독일 활동
1845년 몰레스홋은 위트레흐트로 이동하여 물더의 조수로 일했으며, 프란시스쿠스 코르넬리스 돈더스와 함께 시각 생리학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곧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돌아와 사강사로 활동하며 물더의 영양학 연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몰레스홋은 또한 사람들의 영양 상태를 개선하는 데 사회주의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에 관심을 가졌다. 리비히와 물더 사이의 논쟁은 리비히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는데, 리비히는 탄수화물만이 신체의 연료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 반면, 몰레스홋은 단백질과 지방의 역할도 포함시켰다.
그는 1847년부터 생리학을 강의하기 시작했으며, 1850년에는 《영양학의 생리학》(Physiologie der Nahrungsmittel)을 출판하여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비롯한 많은 이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는 또한 실험 방법론을 특히 강조했다. 이후 그는 실험 방법을 통해 인류학을 다루는 일련의 공개 강연을 진행했다. 바덴 내무부의 명령에 따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는 몰레스홋의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 "잔혹한 유물론", 그리고 무신론을 이유로 그를 질책했고, 결국 그는 1854년 사임하게 되었다. 카를 포크트와 루트비히 뷔히너와 함께 몰레스홋은 1850년대 독일에서 유물론에 대한 공개 토론의 중심에 섰다.

몰레스홋은 학술직 없이 2년을 보냈으며, 15권 분량의 《인간과 동물의 자연 과학 연구》(Untersuchungen zur Naturlehre des Menschen und der Thiere)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게오르크 포스터의 전기를 썼는데, 포스터를 "인민의 과학자"로 묘사했다. 1856년 빌헬미네 뤼리그가 출판한 인기 있는 요리책인 《프랑크푸르트 요리책》(Frankfurter Kochbuch)은 나중에 《독일 가정을 위한 요리책》(Kochbuch fürʼs Deutsche Haus)으로 재출판되었는데, 이는 리비히와 몰레스홋의 영양학 이론에 기반을 두었다. 몰레스홋은 매일 단백질 섭취를 권장했다. 또 다른 여성인 마틸데 라이히하르트-스트롬베르크는 몰레스홋의 《생명의 순환》을 인용하여 종교보다는 합리적 사고를 통한 도덕성에 대한 에세이를 썼다.
1.4. 이탈리아 활동 및 시민권
1856년 몰레스홋은 취리히 대학교 생리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취리히에 머무는 동안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어를 배웠다. 1861년 그는 토리노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스위스, 독일, 이탈리아 연구자들 간의 학술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특히 활발히 활동했다. 1867년 그는 이탈리아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는 계속해서 과학, 특히 생리학을 대중화하는 데 힘썼다. 1876년 그는 이탈리아 상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878년 그는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로 옮겨 1879년부터 실험 생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2. 철학 및 사상
야코프 몰레스홋의 사상은 생명 현상과 인간의 사고를 물리적, 화학적 과정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적 유물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2.1. 과학적 유물론
몰레스홋은 동물들의 기원과 상태를 물리적 원인의 작용으로 설명했다. 그는 생명 현상과 인간의 사고 과정이 모두 화학적 과정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무신론적 입장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해고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2.2. 영양학 및 생리학
그는 영양과 신체 대사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특히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의 역할에 대한 관점을 제시했다. 그는 리비히가 탄수화물만을 신체의 연료로 보았던 것과 달리 단백질과 지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영양학 이론은 당시 대중적인 요리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2.3. 주요 과학적 명제
몰레스홋의 특징적인 명제는 "생각은 인(燐)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뇌는 간이 담즙을 분비하듯 생각을 분비한다"이다. 이 명제들은 그의 생리학적 유물론의 핵심을 보여주며, 인간의 정신 활동이 순전히 물질적인 과정의 결과임을 주장하는 그의 입장을 명확히 드러낸다.
3. 주요 저술
야코프 몰레스홋은 다양한 저술을 통해 자신의 과학적, 철학적 사상을 전파했으며, 이는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3.1. 《생명의 순환》
그의 주요 저서 중 하나인 《생명의 순환》(Der Kreislauf des Lebens)은 1852년에 출판되었으며, 당시 독일의 급진적인 시민들 사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생명 현상이 화학적 과정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그의 유물론적 관점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체사레 롬브로소는 이 책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3.2. 기타 주요 저술
몰레스홋의 다른 중요한 저술들은 다음과 같다.
- 《인민을 위한 영양학》(Lehre der Nahrungsmittel. Für das Volk, 1850년)
- 《영양학의 생리학》(Physiologie der Nahrungsmittel, 1850년; 2판 1859년)
- 《식물과 동물의 물질대사 생리학》(Physiologie des Stoffwechsels in Pflanzen und Thieren, 1851년)
- 《인민의 자연과학자 게오르크 포스터》(Georg Forster, der Naturforscher des Volkes, 1854년)
- 《인간과 동물의 자연 과학 연구》(Untersuchungen zur Naturlehre des Menschen und der tiere, 1856년~1893년), 그의 사망 후 콜로산티와 푸비니가 계속 집필
- 《인간의 삶에 대하여》(Sulla vita umana, 1861년~1867년), 에세이 모음집
- 《생리학 스케치북》(Physiologisches Skizzenbuch, 1861년)
- 《콜레라 시대의 조언과 위로》(Consigli e conforti nei tempi di colera, 1864년; 3판 1884년)
- 《동물 유기체의 탄산가스 배출에 대한 혼합광 및 색광의 영향에 대하여》(Sull' influenza della luce mista e cromatica nell' esalazione di acido carbonico per l'organismo animale, 1879년), 푸비니와 공저
- 《소규모 저술》(Kleine Schriften, 1880년~1887년), 수집된 에세이 및 강연록
- 《내 친구들을 위하여》(Für meine Freunde, 1894년)
야코프 몰레스홋의 기록물은 볼로냐의 아르키진나시오 시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4. 사회 및 정치 참여
몰레스홋은 학문적 활동 외에도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과 사회 운동 참여를 통해 인권과 사회 정의 실현에 기여했다.
4.1. 정치적 입장 및 활동
몰레스홋은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와 무신론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그가 해고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과학자들이 정치적 사유에 참여하고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1876년 이탈리아 상원 의원으로 임명된 후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활용하여 사회 개혁을 지지했다.
4.2. 사회 운동 및 인권 옹호
그는 여성 변호사 리디아 포엣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변호사 자격을 거부당하자 그녀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또한 반유대주의에 반대했고, 곡물에 부과되는 세금인 그릿세(Macinato)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1889년 6월 9일, 그는 바티칸에서 조르다노 브루노 동상 제막식에서 가에타노 트레차의 연설과 함께 공개 강연을 진행하며, 교회의 불관용에 맞서 합리적 사고의 역할을 옹호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그의 진보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5. 개인 생활
몰레스홋은 1849년 소피 슈트레커와 결혼하여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소피는 아마추어 시인이었으며 몰레스홋의 저술 편집을 도왔다. 그러나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우울증을 앓다가 1891년 자살했다.
6. 사망
야코프 몰레스홋은 1893년 5월 20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사망했다.
7. 평가 및 영향
야코프 몰레스홋은 그의 과학적 업적과 사회 참여를 통해 당대와 후대에 걸쳐 다양한 평가와 영향을 남겼다.
7.1. 긍정적 평가
몰레스홋은 생리학 및 영양학 분야에 대한 기여로 인정받았다. 그의 저서 《영양학의 생리학》은 알렉산더 폰 훔볼트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그의 영양학 이론은 대중적인 이해와 실제 식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성의 권리 옹호(리디아 포엣 지지), 반유대주의 반대, 불합리한 세금(그릿세) 반대, 그리고 종교적 편협함에 맞선 합리적 사고 지지 등 그의 사회 개혁 노력과 인도주의적 활동은 그의 진보적인 입장을 반영하며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7.2. 비판 및 논란
그의 "잔혹한 유물론"과 무신론적 입장은 당대 사회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결국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해고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1850년대 독일에서 유물론 논쟁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이러한 비판은 그의 급진적인 사상이 당시의 주류 사상과 충돌했음을 보여준다.
7.3. 후대에 미친 영향
그의 주요 저서인 《생명의 순환》은 독일의 급진적인 시민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상과 과학적 방법론은 후대 학자들과 사회 운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특히 생명 현상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 방식의 확산에 기여했다. 그의 기록물은 볼로냐의 아르키진나시오 시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어 후대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8. 기념 및 추모
1893년 6월 9일, 토리노 대학교에는 에토레 페라리가 제작한 야코프 몰레스홋의 청동 흉상이 설치되었다. 몰레스홋의 《생명의 순환》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던 체사레 롬브로소가 이 자리에서 기념 연설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