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알레산드로 칼리오스트로(본명: 주세페 발사모)는 1743년 6월 2일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태어나 1795년 8월 26일 사망한 이탈리아의 저명한 오컬티스트이자 모험가, 자칭 마술사이다. 그는 유럽 전역의 왕실과 사교계에서 심령 치료, 연금술, 투시 등 다양한 신비주의 활동을 펼치며 명성을 얻었으며, 스스로 '칼리오스트로 백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초기에는 빈곤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그리스인 연금술사 알토타스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하며 신비주의와 화학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이후 로렌차 세라피나 펠리치아니와 결혼하여 유럽을 함께 여행하며 마술사, 치유사, 연금술사로서 활동했다. 1777년 런던에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그는 '이집트 의례'를 창시하고 유럽 전역에 전파하며 영매술과 강령술을 시연하기도 했다.
그의 명성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드 로앙 추기경이 연루된 프랑스의 유명한 사기 사건인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에 휘말리면서 크게 실추되었다. 이 사건으로 바스티유 감옥에 9개월간 수감되었으나 무죄로 풀려난 뒤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로마에서 이단 및 프리메이슨 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고, 종신형을 선고받아 산 레오 요새에 수감된 채 1795년 사망했다.
칼리오스트로는 당대에 '사기꾼 중의 사기꾼'으로 평가받았지만, 뛰어난 위조 능력과 빈민층에 대한 자선 활동 의혹 등 복합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그의 신비롭고 모험적인 삶은 오컬트와 프리메이슨 역사뿐만 아니라 문학, 연극, 음악, 영화, TV 드라마, 만화, 비디오 게임 등 다양한 대중문화 매체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주세페 발사모는 1743년 6월 2일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알베르게리아 지역, 과거 유대인 거주지였던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재정적으로 불안정했지만, 할아버지와 삼촌들의 도움으로 견고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고, 이후 성 요한 하느님의 형제회라는 가톨릭 수도원의 수련 수사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수도원에서 추방당했다. 수련 수사 시절, 발사모는 화학과 일련의 영적 의례를 배웠다.
1764년, 스물한 살이 되던 해, 그는 부유한 금세공사 빈첸초 마라노에게 수백 년 전 펠레그리노 산에 숨겨진 보물이 존재한다고 설득했다. 마라노는 젊은 발사모의 오컬트 지식이 보물을 지키는 마법 생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데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펠레그리노 산으로의 탐험을 준비하면서 발사모는 마라노에게 은화 70닢을 요구했다.
두 사람이 보물을 파내려던 순간, 발사모는 마라노를 공격했고, 마라노는 피를 흘리며 자신이 당한 폭행이 진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마라노는 발사모의 집을 찾아갔으나 그가 이미 도시를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발사모는 두 명의 공범과 함께 메시나로 도주했다. 1765년에서 1766년경, 발사모는 몰타섬에 도착하여 몰타 기사단의 보조원(donato)이 되었고, 숙련된 약사로 활동했다.
칼리오스트로 자신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이후의 재판에서 자신이 몰타섬에서 고아로 버려진 귀족 기독교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린 시절 메디나, 메카, 카이로를 여행했으며, 몰타로 돌아온 후 몰타 기사단에 입단하여 연금술, 카발라, 마법을 공부했다고 주장했다.
3. 유럽 여행 및 활동

1768년 초, 발사모는 로마로 떠나 오르시니 추기경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이 일은 발사모에게 지루하게 느껴졌고, 그는 곧 이중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마법의 '이집트' 부적과 그림처럼 보이도록 판에 붙여 채색한 판화를 팔았다. 이 시기에 만난 많은 시칠리아 출신 망명자 및 전과자들 중 한 명이 그를 14세 소녀 로렌차 세라피나 펠리치아니(1751년 4월 8일경 - 1794년)에게 소개해주었고, 그녀는 '세라피나'로 불렸다. 발사모는 1768년에 그녀와 결혼했다.
부부는 로렌차의 부모님과 오빠가 사는 비콜로 델레 크립테(vicolo delle Cripte)로 이사했다. 발사모의 거친 언행과 로렌차에게 신체를 드러내도록 부추기는 방식은 그녀의 부모님의 깊은 종교적 신념과 크게 대조되었다. 격렬한 논쟁 끝에 젊은 부부는 그곳을 떠났다. 이때 발사모는 위조범이자 사기꾼인 아글리아타와 친구가 되었는데, 아글리아타는 발사모에게 편지, 졸업장, 기타 수많은 공식 문서를 위조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대가로 아글리아타는 발사모의 어린 아내와의 성관계를 요구했고, 발사모는 이를 승낙했다.
부부는 함께 런던으로 여행을 떠났고, 발사모는 이때부터 여러 가명과 자칭 칭호 중 '알레산드로 디 칼리오스트로 백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는 런던에서 생제르맹 백작을 만났다고 전해진다. 칼리오스트로는 이후 쿠를란트 공국, 러시아, 폴란드, 독일, 그리고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그의 명성은 파리에 머무는 동안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의사로 추천될 정도로 커졌다.

그는 유럽 각국의 사교계에 잠입하여 수상한 사업을 반복했다. 말년에는 부유층으로부터 갈취한 돈을 빈민층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4. 프리메이슨 및 이집트 의례
1777년 4월 12일, "조제프 칼리오스트로"는 런던 소호의 제라드 스트리트에 위치한 에스페랑스 로지 289호에서 프리메이슨으로 입문했다. 1777년 12월, 칼리오스트로와 세라피나는 본토로 떠났고, 이후 여러 독일 주를 여행하며 '엄격 준수 의례'의 로지들을 방문하여 칼리오스트로의 "이집트 프리메이슨"으로 개종할 사람들을 찾았다. 1779년 2월, 칼리오스트로는 현재 라트비아에 위치한 옐가바로 여행하여 시인 엘리자 폰 데어 레케를 만났다. 1780년 9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의 후원을 얻는 데 실패한 후, 칼리오스트로 부부는 당시 프랑스에 있던 스트라스부르로 향했다.
1784년 10월, 칼리오스트로 부부는 리옹으로 여행했다. 1784년 12월 24일, 그들은 리옹에서 자신들의 이집트 프리메이슨 의례의 코메이슨리 본부 로지인 라 사제스 트라이옴판테(La Sagesse Triomphante)를 설립했다. 1785년 1월, 칼리오스트로와 그의 아내는 로앙 추기경의 간청에 따라 파리로 갔다.
이집트 프리메이슨 모임에서는 소년 소녀들을 영매로 삼아 강령술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칼리오스트로는 여러 곳에서 강령술을 시연했는데, 이러한 현상에 영감을 받아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프리드리히 실러는 그의 강령술을 소재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5.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칼리오스트로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드 로앙 추기경이 연루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으로 기소되었다. 그는 바스티유 감옥에 9개월 동안 수감되었으나, 사건과 그를 연결할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루이 16세의 명령으로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잉글랜드로 떠났다.
잉글랜드에서 그는 프랑스 망명객 샤를 테브노 드 모랑드로부터 주세페 발사모라는 본명을 폭로당했다. 칼리오스트로는 자신의 출판물인 영국 국민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Open Letter to the English People)에서 이를 부인했고, 결국 모랑드는 철회와 사과를 해야 했다.
6. 몰락, 수감 및 죽음
칼리오스트로는 잉글랜드를 떠나 로마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종교재판소의 스파이 두 명을 만났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내가 처음으로 그를 종교재판소에 밀고했다고 한다. 1789년 12월 27일, 그는 로마에서 프리메이슨 로지를 설립하려던 혐의로 체포되어 산탄젤로 성에 수감되었다.
그는 재판을 받고 처음에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형량이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산 레오 요새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1795년 8월 26일 사망했다. 하지만 사후에도 그가 살아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러시아까지 유포되는 등 그의 죽음에 대한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7. 유산 및 평가
칼리오스트로의 역사는 소문, 선전, 신비주의에 둘러싸여 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을 때 그의 진정한 신원을 확인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그의 저서 이탈리아 기행에서 팔레르모의 변호사가 공식 요청에 따라 관련 문서 사본이 담긴 서류를 프랑스로 보냈으며, 이를 통해 칼리오스트로가 주세페 발사모와 동일 인물임이 확인되었다고 기록했다. 괴테는 1787년 4월 이 변호사를 만나 문서와 발사모의 가계도를 보았다. 괴테는 칼리오스트로가 유대계 출신일 수 있다고 언급했으며, '발사모'라는 이름이 히브리어 '바알 셈'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칼리오스트로는 당대에 '사기꾼 중의 사기꾼'으로 평가받았다. 토머스 칼라일은 1833년 그의 저서에서 칼리오스트로를 "사기꾼 중의 사기꾼"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이러한 인식을 굳혔다. 그러나 W. R. H. 트로브리지의 칼리오스트로: 마법의 대가의 영광과 비참(1910)과 같은 후대 작품들은 그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비범한 위조범이었다. 자코모 카사노바는 자서전에서 칼리오스트로가 카사노바의 편지를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위조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오컬트 역사가 루이스 스펜스는 칼리오스트로에 대한 글에서 그 사기꾼이 자신의 부당하게 얻은 부를 대륙 전역에 산부인과 병원과 고아원을 설립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데 잘 사용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불운했던 로마 여행 중에 연금술 원고인 가장 신성한 삼지혜서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그가 이 책을 썼다고 전해진다. 오컬티스트 앨리스터 크롤리는 칼리오스트로가 자신의 전생 중 하나였다고 믿었다.
포르투갈의 작가 카밀루 카스텔루 브랑쿠는 칼리오스트로에게 프리메이슨의 이집트 의례를 창시하고 유럽 전역에 로지를 개설하며 여성의 공동체 수용을 도입함으로써 프리메이슨 확산에 집중적으로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이집트 프리메이슨'의 개념은 1813년 유대인 베다리드 형제들이 설립한 미스라임 의례와 1838년 자크 에티엔 마르코니 드 네그르가 프랑스에서 설립한 멤피스 의례를 통해 이탈리아에서 유지되었다. 이들은 1881년 주세페 가리발디 아래에서 고대 원시 멤피스-미스라임 의례로 통합되었다.
8. 영향
칼리오스트로는 오컬트, 프리메이슨 역사, 예술, 문학 등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신비주의적 활동과 프리메이슨의 '이집트 의례' 창시, 그리고 영매술 시연은 당대 지식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프리드리히 실러 같은 유명 작가들이 그의 강령술을 소재로 작품을 발표한 것은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의 삶은 사기꾼이자 신비주의자, 자선가라는 복합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며 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특히 그의 환생에 대한 믿음이나, 그가 남긴 것으로 알려진 신비주의 문헌들은 오컬트 분야에서 계속해서 연구되고 회자되었다. 그의 모험적인 삶과 신비로운 능력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세대에 걸쳐 전파되며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의 원형이 되었다.
9. 대중문화 속 칼리오스트로
칼리오스트로의 삶과 신비로운 이미지는 문학, 연극, 음악, 영화, TV 드라마, 만화, 비디오 게임 등 다양한 대중문화 매체에서 묘사되고 활용되었다.
9.1. 문학 및 연극

- 예카테리나 2세는 칼리오스트로를 대략적으로 기반으로 한 인물을 풍자하는 두 편의 스키트를 썼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칼리오스트로의 삶을 바탕으로 한 희극 대 코프타(Der Groß-Cophta)를 1791년에 출판했다. 이 작품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을 언급하기도 한다.
- 라트비아의 극작가 마르틴슈 지베르츠는 1967년에 연극 빌체에서의 칼리오스트로(Kaļostro Vilcē)를 썼다.
-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는 여러 소설에서 칼리오스트로를 등장시켰다. 특히 조제프 발사모와 왕비의 목걸이에서는 그가 3,000살이 넘었으며 트로이의 헬레네를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 조르주 상드는 역사 소설 루돌슈타트 백작 부인(1843)에 칼리오스트로를 조연으로 포함시켰다.
-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초자연적인 연애 소설 칼리오스트로 백작을 썼는데, 여기서 칼리오스트로 백작은 오래전에 죽은 러시아 공주를 초상화에서 물질화시켜 되살려낸다. 이 이야기는 1984년 소련 TV 영화 사랑의 공식으로 제작되었다.
- 칼리오스트로는 라파엘 사바티니의 세 편의 단편 소설, 즉 "시간의 군주", "죽음의 가면", "연금술의 알"에 등장하며, 이들은 사바티니의 단편집 격동의 이야기들에 수록되어 있다.
- E. T. A.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에서 슈팔란차니는 호도비에츠키의 칼리오스트로 초상화와 닮았다고 언급된다.
- 로버트 아서 주니어의 단편 소설 "책과 야수"에서는 칼리오스트로에게 귀속된 마도서가 그것을 감히 들여다본 어리석은 자들에게 끔찍한 죽음을 초래하다가 화재로 파괴된다.
- 킬번 홀의 소설 쿤룬(2014)에서는 알레산드로 칼리오스트로, 조제프 발사모, 주세페 발사모가 생제르맹 백작이 역사상 사용했던 여러 이름 중 일부에 불과하다고 밝혀진다.
- 프리드리히 실러는 1786년에서 1789년 사이에 그에 관한 소설 유령 사나이(Der Geisterseher)를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 해리 스티븐 킬러는 그의 소설 칼리오스트로 씨의 안경에서 그 마법사에게 경의를 표했다.
- 그는 로버트 앤턴 윌슨의 역사적 일루미나투스 연대기의 등장인물이다.
- 그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푸코의 진자에서 자주 언급된다.
- 미하일 쿠즈민은 주세페 발사모, 칼리오스트로 백작의 경이로운 삶(1916)이라는 노벨라를 썼다.
- 그는 알프레드 베스터와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 사이코숍의 등장인물이다.
- 자신을 칼리오스트로 백작 부인이라고 부르는 조제프 발사모의 후손인 조제핀 발사모는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소설에 등장한다.
- 칼리오스트로는 킴 뉴먼의 안노 드라큘라 소설 시리즈에서 뱀파이어로 여러 번 등장한다.
- 존 딕슨 카의 1946년 탐정 소설 속삭이는 자(He Who Whispers)에는 칼리오스트로에 대한 수많은 언급이 있다. 이 책에서 프랑스 교수 조르주 앙투안 리고는 칼리오스트로의 삶이라는 역사를 썼다. 속삭이는 자에서 시도된 살인 사건은 칼리오스트로가 비밀 결사 로지에 입문할 때 겪은 의식의 일부와 기술적으로 유사하다. 칼리오스트로 거리는 카의 1935년 소설 세 개의 관에 등장하는 장소이다.
- 그는 데이비드 앰브로즈의 1997년 소설 미신의 등장인물이며, 가상의 아담 와이어트의 지인이다.
- 윌리엄 디트리히의 소설 나폴레옹의 피라미드에서 프리메이슨과 고대 이집트 유물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된다.
-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영광의 길에서 스타는 "발사모"를 가명으로 사용하며 주세페를 자신의 삼촌이라고 언급한다.
- 윌리엄 볼리토 라이얼의 신에 대항하는 열두 명에는 칼리오스트로에 대한 부분이 있다.
9.2. 영화 및 TV
- 칼리오스트로는 여러 영화에서 다음과 같은 배우들에 의해 연기되었다.
- 프리데리크 야로시 (칼리오스트로, 1918)
- 라인홀트 쉬운첼 (칼리오스트로 백작, 1920)
- 한스 슈튀베 (칼리오스트로, 1929)
- 페르디난트 마리안 (뮌히하우젠, 1943)
- 오슨 웰스 (흑마법, 1949)
- 하워드 버넌 (프랑켄슈타인의 에로틱한 의식, 1972)
- 장 마레 (조제프 발사모, 1973, TV 미니시리즈)
- 베킴 페미우 (칼리오스트로, 1975)
- 노다르 므갈로블리슈빌리 (사랑의 공식, 1984, TV 영화)
- 니콜 윌리엄슨 (스폰, 1997)
- 크리스토퍼 워컨 (목걸이 사건, 2001)
- 로버트 잉글런드 (칼리오스트로의 귀환, 2003)
- 1943년 독일의 서사 영화 뮌히하우젠에서 칼리오스트로는 강력하고 도덕적으로 모호한 마법사로 등장하며, 페르디난트 마리안이 연기했다.
- 프랑스 영화감독 조르주 멜리에스는 1899년 영화 칼리오스트로의 거울(Le Miroir de Cagliostro)을 연출했다.
- 보리스 칼로프 주연의 미이라(1932)는 니나 윌콕스 푸트넘의 원작 이야기 "칼리오스트로"에서 각색되었다. 칼리오스트로를 바탕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한 이 이야기는 3000년 된 마법사가 질산염을 주사하여 살아남는 내용이다.
- 칼리오스트로와 그의 아내 로렌차는 2006년 애니메이션 슈발리에에서 적대자로 등장한다. 칼리오스트로는 주로 어리숙한 돈벌레로 묘사되지만, 로렌차는 신비로운 마법 능력을 가진 것으로 그려진다.
-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칼리오스트로는 마법사이며, 닥터 스트레인지(2016)에서 자주 언급된다. 칼리오스트로의 책: 시간 연구는 여러 어둠의 주문을 담고 있는 고대 유물이다. 스핀오프 디즈니+ 시리즈 왓 이프...?에서는 그를 절대적인 시간 지점을 깨뜨릴 수 있는 존재로 언급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칼리오스트로의 잃어버린 책들을 읽고 책의 저자처럼 절대적인 시간 지점을 되돌렸다.
- TV 애니메이션 전희절창 심포기어 AXZ에서는 변덕스러운 악당 연금술사 캐릭터로 등장한다.
- 1960년대 시리즈 스릴러의 에피소드 "거울 속 죄수"에 악당 마법사로 등장하며, 헨리 다니엘과 로이드 보크너가 연기했다.
- 1978년 TV 시리즈 원더우먼의 에피소드 "다이애나의 사라지는 마법"에서 칼리오스트로의 후손(딕 고티에 연기)이 악당으로 등장한다. 그는 연금술을 시도하여 납을 일시적으로 금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지만, 곧 원래 형태로 되돌아간다. 장수하는 원더우먼은 자신이 과거에 그의 조상인 원조 백작과 대결했다고 말한다.
- 제시카의 추리극장의 1984년 에피소드 "죽음이 마법을 걸다"에서 칼리오스트로라는 이름의 마술사가 살해된다.
- 사무라이 잭(세 번째 시즌의 일곱 번째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은 칼리오스트로의 수정(crystal)을 찾아 나선다. 이 에피소드는 다이스케 지겐을 직접적으로 기반으로 한 도둑의 도움을 받는 방식으로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 대한 오마주를 담고 있다.
- 2016년 루팡 3세 연간 스페셜에서는 칼리오스트로의 보물을 찾는 내용이 다루어졌다. 이전에 1979년 루팡 3세 극장판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도 이 이름이 사용되었지만, 역사적 칼리오스트로와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 환상특급 (2002년 TV 시리즈)의 36화 "파라오의 저주"에서 떠오르는 마술사가 수세기 된 환상의 비밀을 배우려 노력하는데, 이 환상은 해리 후디니, 프레데릭 유진 파월, 그리고 원래 칼리오스트로 자신에게서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9.3. 만화 및 비디오 게임
- 팬텀 만화책(동명의 만화 스트립 기반)은 1988년 노먼 워커가 쓰고 카를로스 크루즈가 그린 "칼리오스트로 미스터리" 이야기에서 칼리오스트로를 캐릭터로 등장시켰다.
- 1946년에 출판된 세 번째 키드 이터니티 만화책에는 부활한 칼리오스트로의 영혼이 등장한다.
- DC 코믹스 세계관에서 칼리오스트로는 불멸의 존재로 묘사되며(JLA Annual 2),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후손이자 자타라와 자타나의 조상이다(Secret Origins 27).
- 마블 코믹스의 드라큘라의 무덤과 드라큘라 라이브즈 만화책에서 칼리오스트로는 드라큘라의 빈번한 적이다. 아이언맨 149호에서는 칼리오스트로가 닥터 둠에게 마법을 가르친다.
- 만화 로젠 메이든에서는 칼리오스트로 백작이 전설적인 인형 제작자 로젠이 사용한 여러 가명 중 하나로 나온다. 그는 감옥에서 나무를 깎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 그는 토드 맥팔레인의 만화책 스폰의 등장인물이다。 그는 작가 닐 게이먼에 의해 시리즈에 소개되었다. 여기서 코글리오스트로는 한때 말레볼기아라는 악마에게 묶인 지옥의 스폰이었다. 연금술과 마법을 통해 저주에서 벗어난 그는 시리즈 내내 스폰에게 같은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 칼리오스트로는 일본 모바일 게임 그랑블루 판타지의 플레이어블 캐릭터이다.
- 오버킬과 스타브리즈 스튜디오의 페이데이 2에서는 칼리오스트로의 원고가 핵심 스토리 아이템으로 등장하며, 게임 내에서 비밀 결사, 불멸, 네피림과 관련된 깊은 미스터리를 열어준다.
- 칼리오스트로는 스파이더스의 비디오 게임 스틸라이징의 악당이다. 그의 마법과 대체의학에 대한 취향이 언급되는데, 예를 들어 한 장면에서는 그가 최면술을 진자로 연습하는 모습이 나온다.
- 칼리오스트로는 페이트/그랜드 오더에 프리텐더 클래스 서번트로 등장한다.
- 칼리오스트로는 카드 속임수 게임 카드 샤크에서 상대로 등장한다.
9.4. 음악
- 그는 1794년 오페라 왕들의 의회(Le congrès des rois)의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다. 이 작품은 12명의 작곡가가 공동 작업한 것이다.
- 프랑스 작곡가 빅토르 두를렌은 1810년 11월 27일 초연된 칼리오스트로, 또는 조명된 자들(Cagliostro, ou Les illuminés)의 1막을 작곡했다. 2막과 3막은 안톤 라이하가 작곡했다.
- 아일랜드 작곡가 윌리엄 마이클 루크는 미공연 작품 칼리오스트로를 썼다.
- 아돌프 아당은 1844년 2월 10일 초연된 오페라 코미크 칼리오스트로를 썼다.
- 알베르트 로르칭은 1850년에 3막짜리 코믹 오페라 칼리오스트로의 대본을 썼지만, 음악은 작곡하지 않았다.
-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875년 오페레타 빈의 칼리오스트로(Cagliostro in Wien)를 썼다.
-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테라스는 1904년 초연된 르 칼리오스트로(Le Cagliostro)를 썼다.
- 폴란드 작곡가 얀 마클라키에비치는 1938년 초연된 3장짜리 발레 바르샤바의 칼리오스트로(Cagliostro w Warszawie)를 썼다.
- 루마니아 작곡가 이안쿠 두미트레스쿠는 1975년 합창단, 플루트, 타악기를 위한 작품 칼리오스트로의 거울(Le miroir de Cagliostro)을 썼다.
- 미국 작곡가 존 존은 2015년 솔로 비올라를 위한 칼리오스트로를 작곡했다. 연주자는 오른손에 두 개의 활을 사용하여 작품 전체에서 네 개의 현을 동시에 연주한다.
- 이탈리아 작곡가 일데브란도 피체티의 오페라 칼리오스트로는 1952년 RAI에서, 1953년 1월 24일 라 스칼라에서 공연되었다.
- 코믹 오페라 그라프 칼리오스트로는 미카엘 타리베르디예프가 1983년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