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아세프 샤우카트는 1950년 1월 15일 시리아 타르투스주 알마델레흐 마을에서 알라위파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비교적 평범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1968년 다마스쿠스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하여 바트당 당원이 되었다. 이후 1972년부터 1976년까지 동 대학에서 역사학을 계속 전공했으며, 1925년 시리아 대봉기에 대한 박사 논문을 집필하기도 했다. 1978년에는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2. 군 경력
샤우카트는 1970년대 초 시리아군에 입대한 후 빠르게 진급했다. 1973년 라마단 전쟁에 보병 장교로 참전했으며, 1982년에는 당시 시리아 대통령 하페즈 알아사드의 동생 리파트 알아사드가 이끄는 방위 여단이라는 준군사 조직의 장교로 복무했다. 방위 여단은 1982년 하마시에서 발생한 이슬람주의자 봉기를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3년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이 심장마비 증세를 겪은 후, 리파트 알아사드가 다마스쿠스 장악을 시도하며 거의 내전으로 비화될 뻔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시기 샤우카트는 하페즈 알아사드에게 충성을 유지했으며, 이에 대한 보상으로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후 그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시리아군 부참모총장을, 201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방부 차관을 역임하며 시리아 군부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3. 결혼 및 가족
1980년대 초, 샤우카트는 당시 다마스쿠스 대학교에서 약학을 공부하던 부쉬라 알아사드를 만났다. 부쉬라는 하페즈 알아사드의 첫째 자녀이자 유일한 딸이었으며, 아버지와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 그러나 하페즈 알아사드와 그녀의 남동생 바셀 알아사드는 샤우카트와의 관계를 강력히 반대했다. 샤우카트는 부쉬라보다 10살 연상이었고, 이미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둔 평범한 배경의 이혼남이었기 때문이다. 바셀은 1993년에 두 사람의 관계를 막기 위해 샤우카트를 잠시 투옥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보고서에서는 그의 투옥이 비리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1994년 1월, 바셀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후, 1년 뒤인 1995년 샤우카트와 부쉬라 알아사드는 가족의 동의 없이 결혼했다. 하페즈 알아사드는 결혼 전에는 축복하지 않았지만, 샤우카트를 가족으로 받아들였고 곧 그를 소장으로 진급시켰다. 아세프와 부쉬라는 부쉬라, 아니사, 바셀, 나야, 하페즈 등 부쉬라 가족의 이름을 딴 다섯 자녀를 두었다.
부쉬라 알아사드와의 결혼 후, 샤우카트는 바셀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후계자로 양성되기 위해 런던에서 소환된 그녀의 남동생 바샤르 알아사드와도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 부쉬라가 이 관계를 적극적으로 육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 그는 부쉬라와 바샤르의 또 다른 남동생인 마헤르 알아사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1999년 마헤르가 대통령궁 안에서 샤우카트의 복부를 총으로 쏘아 중상을 입혔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아사드 가문 내에서는 샤우카트를 '벼락출세한 자'라며 싫어하는 이들도 있었다.
4. 주요 직책 및 정치 활동
아세프 샤우카트는 시리아의 최고 권력층에서 핵심적인 군사 및 정보 직책을 역임하며, 알아사드 정권의 안정과 통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특히 시리아 정보 기관의 주요 인물로서 국내외 정치적 문제에 깊이 관여했다.
4.1. 군사 정보국장
2000년 6월 바샤르 알아사드가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의 사망 후 시리아 대통령이 되었을 때, 샤우카트는 시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2001년, 샤우카트는 시리아 정보 기관의 주요 부서 중 하나인 군사 정보국 부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주요 업무는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운동과 같은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들과 연락하는 것이었으며, 그는 레바논에 대한 시리아의 지배력을 확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9.11 테러 이후, 샤우카트는 미국과 유럽의 정보 기관들과의 주요 연락책이었으며, 시리아 내 미국 정보 작전을 조율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국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면서 이 작전은 중단되었다. 2005년 2월, 샤우카트는 하산 할릴 장군을 대신하여 군사 정보국장으로 승진했다. 할릴의 퇴임은 공식적으로는 정년 도달 때문이었으나, 레바논 총리 라피크 하리리 암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추측도 제기되었다.
4.2. 국방부 차관
2009년 7월, 샤우카트는 이마드 무그니야 암살 사건과 알키바르 핵시설 공습에 대한 책임으로 군사 정보국장직에서 해임되었다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그는 육군대장 계급을 유지한 채 군 참모부 차장이라는 한직으로 밀려났다. 이 직책은 2011년 9월까지 유지되었고, 이후 그는 다우드 라자 장관 휘하의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비록 시리아 국방부는 사실상 마헤르 알아사드의 통제하에 있었지만, 샤우카트의 국방부 차관 취임은 그가 국방부 내에서 지배권을 확보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는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 후 시리아 정부군의 대응 및 진압 작전에 깊이 관여하며 군대를 지휘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5. 논란 및 의혹
아세프 샤우카트는 시리아 정권의 핵심 인물로서 다양한 논란과 의혹에 휩싸였으며, 이는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5.1. 라피크 하리리 암살 연루 의혹
2005년 2월 14일, 전 레바논 총리 라피크 하리리가 베이루트에서 차량 폭탄 테러로 암살되었다. 폭발에 사용된 장치의 규모와 정교함은 국가 정보 기관의 개입을 시사했으며, 유엔 조사관들은 샤우카트가 이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지목했다. 2006년, 미국 재무부는 샤우카트를 특별 지정 국가(SDN) 명단에 올려 미국 내 그의 자산을 동결시켰다. 미 재무부는 그를 하리리 암살과 시리아의 레바논 점령의 '핵심 설계자'로 규정했다.
5.2. 기타 비판 및 제재
샤우카트는 2008년 2월 12일 다마스쿠스에서 발생한 헤즈볼라 사령관 이마드 무그니야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또한 이스라엘의 알키바르 핵시설 공습(Operation Orchard)에 대한 책임도 그에게 있다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2009년 7월 그가 군사 정보국장직에서 해임되고, 이후 행정 구금되었으며, 군 참모부 차장이라는 한직으로 좌천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마헤르 알아사드와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1999년 마헤르가 샤우카트의 복부를 총으로 쏘아 중상을 입힌 사건은 알아사드 가문 내부의 복잡한 권력 다툼과 긴장 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비판과 국제 사회의 제재는 샤우카트가 시리아 정권의 어두운 면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6. 시리아 내전에서의 역할
2011년 3월 시리아 봉기가 시작된 후 내전으로 격화되면서, 샤우카트는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과 그의 동생 마헤르 알아사드와 함께 시위 진압 작전의 주요 설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알아사드 대통령이 창설한 군사 위기 관리 기구의 일원이었다. 이 기구에는 다우드 라자 국방부 장관, 히샴 베크티야르 정보국장, 알리 맘루크 특별 안보 보좌관, 압델 파타 쿠드시야 군사 정보국장, 그리고 하페즈 알아사드 시대부터 활동해온 베테랑 공작원 모하메드 나시프 케이르베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2012년 5월, 자유 시리아군의 다마스쿠스 지부는 자신들의 요원 중 한 명이 아세프 샤우카트를 포함한 바샤르 알아사드 군사 위기 관리 기구의 8명 구성원을 독살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샤우카트가 사망했다는 오보가 나오기도 했다.
7. 사망
2012년 7월 18일, 샤우카트는 다마스쿠스 라오다 광장에 위치한 시리아 국가보안기구 청사에서 열린 중앙 위기 관리 회의(CCMC)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그는 폭탄 테러로 사망했으며, 함께 참석했던 다우드 라자 국방부 장관과 전 국방부 장관이자 파루크 알샤라아 부통령의 군사 고문이었던 하산 투르크마니도 목숨을 잃었다. 이 공격은 자유 시리아군과 이슬람 조직 리와 알이슬람이 조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의 아사드 아부할릴 교수는 샤우카트가 암살당한 그룹의 핵심 인물이었다고 주장했다.
시리아 국영 텔레비전은 2012년 7월 20일 다마스쿠스 무명 용사의 묘에서 샤우카트, 투르크마니, 라자를 위한 명예로운 국장 장례식이 거행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과 그의 동생 마헤르 알아사드는 이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파루크 알샤라아 부통령이 바샤르 알아사드를 대표하여 참석했다. 샤우카트는 타르투스 지역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아내 부쉬라 알아사드와 장모인 하페즈 알아사드의 미망인 아니사 알아사드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라크 대통령 잘랄 탈라바니는 아세프 샤우카트의 사망에 대해 바샤르 알아사드에게 조의를 표했다.
8. 평가 및 영향
아세프 샤우카트는 바샤르 알아사드 시대 시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널리 평가받았다. 그는 정권의 '음지의 집행자'로 묘사되었으며, 그의 생애는 시리아 정권의 복잡한 권력 구조와 내부 역학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평범한 배경에서 시작하여 초기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아사드 가문의 핵심 인물로 부상한 그의 경력은 정치적 수완과 바샤르와의 긴밀한 관계 덕분이었다. 특히 그는 군사 및 정보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정권의 안정과 반대 세력 진압에 기여했다.
라피크 하리리 암살 사건과 이마드 무그니야 암살 연루 의혹, 그리고 시리아 봉기 진압에서의 주도적인 역할은 그가 정권 유지에 필요한 잔혹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작전들에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행동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영향을 강조하며, 정권의 억압적인 통치 방식을 대변한다.
2012년 시리아 내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생한 그의 사망은 알아사드 정권의 핵심 안보 인물 한 명을 잃은 중대한 타격이었다. 바샤르와 마헤르 알아사드가 그의 장례식에 불참한 것은 집권층 내부의 복잡하고 때로는 긴장된 관계를 시사한다. 샤우카트의 생애는 알아사드 왕조 하의 시리아 정치 지형을 특징짓는 가족 관계, 군사력, 정보 작전의 복잡한 연결망을 반영하며, 그의 행동은 시리아 사회와 중동 지역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비판적 관점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