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1916년 4월 17일 영국령 실론 라트나푸라의 엘라왈라 월라와(Ellawala Walawwa)에 있는 이모의 집에서 시리마 라트와테(Sirima Ratwatte)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로잘린드 힐다 마하왈라텐네 쿠마리하미(Rosalind Hilda Mahawalatenne Kumarihamy)로, 비공식적인 아유르베다 의사였다. 아버지는 지역 유지이자 정치인이었던 바네스 라트와테(Barnes Ratwatte)였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마하왈라텐네와 이후 그녀의 아버지는 발랑고다의 지역 유지인 라테 마하트마야(Rate Mahatmaya)로 봉사했다. 그녀의 부계는 캔디 왕국의 족장이었던 라달라 라트와테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의 친척 중에는 캔디 출신으로 영국 기사 작위를 받은 최초의 인물인 제이아틸라카 쿠다 라트와테 경도 있었으며, 신할라족 군주를 섬기던 궁정 신하들도 있었다. 이들 중 마탈레의 디사바(Dissawa)였던 라트와테는 1815년 캔디 협약의 서명자 중 한 명이었다.
시리마는 6남매 중 장녀였다. 그녀에게는 바네스 주니어, 시발리, 매키, 클리포드라는 네 명의 남동생과 패트리샤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패트리샤는 실론 육군 중앙 사령부의 창설자인 에드워드 제임스 디비토타웰라 대령과 결혼했다. 가족은 처음에는 시리마의 외할아버지 마하왈라텐네의 월라와(식민지 시대의 저택)에서 살다가, 나중에는 발랑고다에 있는 자신들의 월라와로 이사했다. 어린 시절부터 시리마는 할아버지의 방대한 문학 및 과학 서적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다.
1.1. 교육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발랑고다의 사립 유치원에 처음 다녔고, 1923년 잠시 라트나푸라의 퍼거슨 고등학교 초등반에 다녔다. 이후 콜롬보의 성 브리짓 수녀원 기숙학교로 보내졌다. 가톨릭 학교 시스템에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리마는 평생 독실한 불교도로 남았으며 영어와 신할라어 모두에 능통했다.
1.2. 사회 활동
19세에 학업을 마친 후, 시리마 라트와테는 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그녀는 정글 마을에 음식과 의약품을 배포하고, 진료소를 조직하며, 농촌 여성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농촌 산업을 창출하는 데 기여했다. 그녀는 1940년까지 사회봉사연맹의 재무로 활동했다.
이후 6년 동안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결혼을 준비했다. 두 명의 구혼자(친척 한 명과 실론의 첫 번째 가문의 아들 한 명)를 거절한 후, 라트와테의 부모는 당시 실론 국무원의 지방 행정부 장관이었던 솔로몬 웨스트 리지웨이 디아스 반다라나이케(S.W.R.D. 반다라나이케)와의 결혼을 제안한 중매쟁이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처음에는 라트와테 가문이 전통 왕실을 섬기던 귀족 가문이었던 반면, 반다라나이케 가문은 수세기 동안 식민 통치자들을 섬기던 부유한 저지대 가문이었기 때문에 S.W.R.D. 반다라나이케는 "수용 가능한" 가문 출신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점성술사들이 그들의 별자리가 호환된다고 보고했고, 가문 통합의 이점이 고려된 후, 라트와테 가문의 승인이 주어졌다. 이전에 만난 적이 있던 두 사람은 이 선택에 동의했다.
2. 결혼과 가족

1940년 10월 2일, 라트와테와 반다라나이케는 마하웰라텐네 월라와에서 결혼했다. 이 결혼식은 그 웅장함으로 인해 언론으로부터 "세기의 결혼식"으로 불렸다. 신혼부부는 콜롬보 길드포드 크레센트의 '웬트워스'로 이사하여 1946년까지 살았다. 그곳에서 딸 수네트라 반다라나이케(1943년)와 찬드리카 쿠마라퉁가(1945년)가 태어났다. 1946년 S.W.R.D.의 아버지가 콜롬보 로즈미드 플레이스에 있는 '틴타겔 콜롬보'라는 저택을 사주면서 그곳으로 이사했다. 이때부터 가족은 한 해의 일부는 '틴타겔'에서, 다른 일부는 S.W.R.D.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저택인 호라고라 월라와에서 살았다. 아들 아누라 반다라나이케는 1949년 '틴타겔'에서 태어났다. 이후 20년 동안 시리마 반다라나이케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을 양육하고 남편의 많은 정치적 지인들을 접대하는 데 보냈다.
반다라나이케의 세 자녀는 모두 해외에서 교육을 받았다. 수네트라는 옥스퍼드에서, 찬드리카는 파리 대학교에서, 아누라는 런던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들 모두 나중에 스리랑카로 돌아와 정부에서 봉사하게 된다.
1941년 반다라나이케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여성 자원봉사 단체인 '랑카 마힐라 사미티'(Lankan Women's Association)에 가입했다. 그녀는 농촌 여성의 역량 강화와 재난 구호를 위해 '마힐라 사미티'가 시작한 많은 사회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녀의 첫 프로젝트 중 하나는 식량 생산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농업 프로그램이었다. 조직의 비서로서 그녀의 첫 임무는 쌀 생산량 증대를 위한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농업 전문가들과 만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반다라나이케는 '마힐라 사미티'의 재무, 부회장, 그리고 결국 회장으로 봉사하며 여아 교육, 여성의 정치적 권리, 가족 계획 문제에 중점을 두었다. 그녀는 또한 올 실론 불교 여성 협회, 암 협회, 실론 결핵 예방 전국 협회, 간호사 복지 협회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반다라나이케는 S.W.R.D.의 국내외 공식 출장에 자주 동행했다. 1942년 부활절 주일 공습 중 일본군이 앙고다의 정신병원을 폭격하여 많은 사람이 사망했을 때, 그녀와 남편 모두 현장에 있었다. 1947년 실론이 자치를 향해 나아가면서 S.W.R.D.는 민족주의 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아타나가야 선거구에서 실론 하원 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실론 의회 대표로 봉사했지만, 통일국민당의 내부 운영과 정책에 점점 더 좌절감을 느꼈다. S.W.R.D.는 반다라나이케가 정치적 주제에 참여하는 것을 격려하지 않았고 동료들 앞에서 그녀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녀의 판단력을 존중하게 되었다.
1951년, 그녀는 남편에게 통일국민당에서 사임하고 스리랑카 자유당을 설립하도록 설득했다. 반다라나이케는 1952년 실론 의회 선거 동안 S.W.R.D.의 아타나가야 선거구에서 선거 운동을 벌였고, 남편은 전국을 돌며 지지를 모았다. 자유당은 그 선거에서 단 9석만을 얻었지만, S.W.R.D.는 의회에 당선되어 야당 당수가 되었다.
1956년 존 코텔라왈라 경 총리가 새로운 선거를 소집하자, S.W.R.D.는 기회를 감지하고 1956년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광범위한 4당 연합인 마하자나 엑사트 페라무나 (MEP)를 결성했다. 반다라나이케는 다시 한번 아타나가야, 고향 발랑고다, 그리고 라트나푸라에서 자유당을 위해 남편을 위한 선거 운동을 벌였다. 마하자나 엑사트 페라무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S.W.R.D.는 총리가 되었다.
1957년 말레이시아 독립 기념일 국빈 방문 중, 반다라나이케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부부는 급히 귀국해야 했다. 그는 급히 귀국한 지 2주 만에 사망했다.
1959년 9월 25일 아침, 반다라나이케는 로즈미드 플레이스 자택에 있었다. 이때 S.W.R.D. 반다라나이케는 전통 의학에 대한 지지 부족에 불만을 품은 한 불교 승려에게 여러 차례 총격을 받았다. 반다라나이케는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갔지만, 그는 다음 날 상처로 사망했다.
위제야난다 다하나야케의 임시 정부 하에서 이어진 정치적 혼란 속에서 많은 내각 장관들이 해임되었고, 일부는 암살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S.W.R.D.의 영향력이 사라지자 마하자나 엑사트 페라무나 연합은 붕괴되었고, 1960년 3월 아타나가야 선거구의 의석을 채우기 위한 선거가 소집되었다. 반다라나이케는 마지못해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는 데 동의했지만, 선거가 열리기 전에 의회가 해산되었고, 그녀는 그 의석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60년 3월 선거가 열렸을 때, 통일국민당은 스리랑카 자유당에 4석 차이로 승리했다. 새로운 총리 더들리 세나나야케는 한 달 안에 불신임 투표에서 패배했고, 1960년 7월에 두 번째 총선이 소집되었다.
3. 정치 입문

1960년 5월, 반다라나이케는 7월 선거 출마 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집행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6월 초까지 그녀는 공산주의자 및 트로츠키주의자들과의 이전 당 관계를 부인하며, 남편의 정책을 계승하겠다는 약속으로 선거 운동을 벌였다. 특히 공화국 수립, 신할라어를 국가지정 언어로 확립하는 법률 제정, 불교의 우위 인정(다만 농장 타밀족의 언어와 힌두교 신앙은 용인) 등을 공약했다.
수세기 동안 스리랑카에 타밀족이 거주했지만, 대부분의 농장 타밀족은 영국 당국에 의해 농장 노동자로 인도에서 실론으로 이주해 왔다. 많은 실론인들은 그들이 실론에서 여러 세대 동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임시 이민자로 간주했다. 실론의 독립과 함께 1948년 실론 시민권법은 이 인도 타밀족을 시민권에서 배제하여 무국적자로 만들었다. S.W.R.D.의 무국적 타밀족에 대한 정책은 온건하여 일부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생산적인 노동자들이 남아 있도록 허용했다. 그의 후임자인 더들리 세나나야케는 이 인구에 대한 강제 송환을 처음으로 권고했다. 반다라나이케는 전국을 순회하며 감정적인 연설을 했고, 종종 눈물을 흘리며 고인이 된 남편의 정책을 계속 이어나가겠다고 맹세했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반대자들로부터 "우는 과부"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4. 총리 재임 (1960-1965)

1960년 7월 21일, 자유당의 압도적인 승리 후, 반다라나이케는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국방 및 외무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당시 그녀는 선출된 국회의원이 아니었지만, 의회에서 다수당의 대표였기 때문에 헌법에 따라 총리직을 계속 수행하려면 3개월 이내에 국회의원이 되어야 했다. 그녀를 위해 마나멜두라 피야다사 드 조이사가 상원의원직을 사임했다. 1960년 8월 5일, 올리버 구나틸라케 총독은 반다라나이케를 실론 상원에 임명했다.
초기에는 그녀는 내각 구성원이자 조카인 펠릭스 디아스 반다라나이케에게 의존하며 국가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반대자들은 그녀의 "부엌 내각"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으며, 그녀는 재임 기간 동안 계속해서 유사한 성차별에 직면하게 된다.
4.1. 주요 정책 및 개혁
남편의 핵심 경제 부문 국유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반다라나이케는 공공-민간 주주가 참여하는 기업을 설립하여 7개 신문을 통제했다. 그녀는 은행, 대외 무역, 보험 및 석유 산업을 국유화했다. 실론 은행을 인수하고 새로 설립된 인민 은행의 지점을 설립함으로써, 반다라나이케는 이전에 은행 시설이 없던 지역사회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역 비즈니스 개발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60년 12월, 반다라나이케는 국가 자금을 지원받는 모든 교구 학교를 국유화했다. 이를 통해 그녀는 경제 및 정치 엘리트의 구성원이었던 가톨릭 소수 민족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불교 단체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1961년 1월, 반다라나이케는 영어를 대체하여 신할라어를 공식 언어로 만드는 법률을 시행했다. 이 조치는 200만 명 이상의 타밀어 사용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불만을 야기했다. 연방당 의원들의 촉구로 타밀족이 다수인 주에서 시민 불복종 운동이 시작되었다. 반다라나이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61년부터 노동조합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세금에 항의하여 일련의 파업을 시작했다. 그러한 파업 중 하나는 운송 시스템을 마비시켰고, 이는 반다라나이케가 운송 위원회를 국유화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4.2. 사회 및 민족 문제
1962년 1월, 기존 엘리트(주로 우익 성향의 서구화된 도시 기독교인, 대규모 버거족과 타밀족 포함)와 새롭게 부상하는 토착 엘리트(주로 좌익 성향의 신할라어 사용 불교도)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반다라나이케의 정책으로 인한 변화는 영국화된 계급 체제, 권력 구조, 통치 방식에서 즉각적인 전환을 가져왔고, 공무원, 군대, 경찰의 장교단 구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4.3. 국내외 정치
일부 군 장교들은 반다라나이케와 그녀의 내각 구성원들을 스리랑카 육군 본부에 구금할 계획을 포함한 쿠데타를 계획했다. 경찰 고위 관계자 스탠리 세나나야케가 쿠데타 지도부의 신임을 얻었을 때, 그의 장인 패트릭 드 실바 쿨라트네가 경찰청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펠릭스 디아스 반다라나이케와 형사수사국 요원들은 즉시 모든 군 지휘관과 하급 장교들을 템플 트리스에서 긴급 회의에 소집하여 군 관계자들을 심문하고 음모를 밝혀냈다. 쿠데타가 시작되기 전에 중단되었기 때문에, 24명의 피고인 음모자들에 대한 재판 과정은 길고 복잡했다. 음모자들의 유죄 판결을 돕기 위해 전문 증거를 허용하는 소급 적용 '1962년 형법 특별 조항법'이 통과되었다. 올리버 구나틸라케 총독에 대한 소문이 돌았지만, 그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는 없었으며 따라서 그를 기소할 방법도 없었다. 그는 "직위에서 해임되지도 않았고 사임하지도 않았다." 그는 후임자가 교체된 후 자신의 의심되는 연루에 대해 답변하기로 동의했다. 2월에 반다라나이케의 삼촌인 윌리엄 고팔라와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구나틸라케는 공항으로 호송되어 실론을 떠나 자발적인 망명길에 올랐다.
동서양의 이해관계를 균형 있게 맞추고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반다라나이케는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동시에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녀는 인도 및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차 수출을 통해 영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세계은행과의 연계를 지지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비난하며, 반다라나이케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사를 임명하고 관계를 모색했다. 1961년, 그녀는 런던에서 열린 영연방 총리 회의와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비동맹 운동 제1차 정상회담에 모두 참석하여 스리랑카를 비동맹 운동의 창립 회원국 중 하나로 만들었다.
그녀는 1962년 국경 분쟁이 중인전쟁으로 비화된 후 인도와 중국 간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해 11월과 12월, 반다라나이케는 콜롬보에서 버마, 캄보디아, 실론, 가나, 아랍 연합 공화국 대표들과 함께 분쟁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다. 그녀는 이어서 가나 법무부 장관 코피 오포리-아타와 함께 인도와 베이징을 방문하여 평화를 중재하려 노력했다. 1963년 1월, 반다라나이케와 오포리-아타는 뉴델리에서 인도 총리 자와할랄 네루가 반다라나이케가 주장했던 합의를 권고하는 동의안을 인도 의회에 제출하는 데 동의하면서 보상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었다. 해외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반다라나이케는 중국과의 관계와 경제 개발 정책의 부재로 비판을 받았다. 신할라어를 사용하는 실론 불교도에 대한 정부의 명백한 편애로 인해 긴장은 여전히 높았다. 인플레이션으로 악화된 수입-수출 불균형은 중산층과 하층 계층 시민들의 구매력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중반기 보궐선거에서 반다라나이케는 다수 의석을 유지했지만, 통일국민당이 의석을 얻으면서 그녀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긴축 정책, 특히 주식인 쌀을 충분히 수입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한 지지 부족으로 펠릭스 디아스 반다라나이케 장관은 사임했다. 실론 석유 공사 설립 후 진전된 소련과의 무역 파트너십으로의 전환을 막기 위해 다른 내각 장관들이 재배치되었다. 석유 공사는 1961년 중동 석유 수입에 부과되는 독점적 가격을 우회하기 위해 설립되어 실론이 아랍 연합 공화국과 소련에서 석유를 수입할 수 있게 했다. 서방 석유 회사들의 일부 저장 시설은 보상 합의를 통해 공동 이용되었지만, 불지급에 대한 지속적인 분쟁으로 1963년 2월 미국으로부터의 해외 원조가 중단되었다. 원조 중단에 대한 반응으로, 의회는 1964년 1월부터 국내 대부분의 석유 제품의 유통, 수출입, 판매 및 공급을 모두 국유화하는 '실론 석유 공사 개정법'을 통과시켰다.
또한 1964년, 반다라나이케 정부는 독립적인 실론 공무원 제도를 폐지하고 정부의 영향을 받는 스리랑카 행정 서비스로 대체했다. 1963년 말 스리랑카 공산당, 혁명 사회주의, 트로츠키주의 정당들 간의 연합좌익전선 연합이 결성되자, 반다라나이케는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좌익으로 기울었다. 1964년 2월,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는 실론의 반다라나이케를 방문하여 원조, 쌀과 직물 선물, 그리고 무역 확대를 위한 논의를 제안했다. 양측은 또한 중인 국경 분쟁과 핵 군축에 대해 논의했다. 반다라나이케의 최근 동독 공식 인정으로 인해 서독으로부터의 원조가 중단되었고, 보험 산업 국유화는 호주, 영국, 캐나다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는 매력적이었다.
제2차 비동맹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반다라나이케는 1964년 3월 콜롬보에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 대통령과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을 초청했지만, 계속되는 국내 불안으로 인해 7월까지 의회 회기를 중단해야 했다. 그동안 그녀는 연합좌익전선과 연합하여 간신히 3석 차이로 다수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64년 9월, 반다라나이케는 실론에 거주하는 97만 5천 명의 무국적 타밀족의 송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인도로 대표단을 이끌었다. 그녀는 인도 총리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와 함께 양국 외교 정책의 획기적인 합의인 시리마보-샤스트리 협정의 조건을 조율했다. 이 협정에 따라 실론은 타밀족 30만 명과 그 후손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인도는 무국적 타밀족 52만 5천 명을 송환하기로 했다. 의무 이행에 할당된 15년 동안 양측은 나머지 15만 명에 대한 조건을 협상하기로 합의했다. 10월, 반다라나이케는 카이로에서 열린 비동맹 회의에 참석하고 공동 후원했다.
1964년 12월, 그녀의 연합전선 정부는 국내 신문을 국유화하려는 시도로 "언론 인수 법안"을 제출했다. 야당과 반다라나이케의 비평가들은 이 조치가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그녀의 주요 비평가인 언론 재벌 에스몬드 위크레마싱헤가 이끄는 레이크 하우스 그룹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크레마싱헤는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총리직에서 해임하려는 캠페인으로 맞섰다. 1964년 12월 3일, 한때 S.W.R.D. 반다라나이케의 부총리였던 C. P. 드 실바는 13명의 SLFP 의원들을 이끌고 언론 인수 법안을 언급하며 야당으로 넘어갔다. 시리마 반다라나이케 정부는 시정 연설에서 한 표 차이로 패배했고, 1965년 3월에 총선이 소집되었다. 그녀의 정치 연합은 1965년 선거에서 패배하여 첫 번째 총리 임기를 마쳤다.
5. 야당 지도자 (1965-1970)
1965년 선거에서 반다라나이케는 아타나가야 선거구에서 실론 하원 의석을 얻었다. 그녀의 당이 41석을 얻으면서, 그녀는 야당 당수가 되었는데, 이 직책을 맡은 최초의 여성이었다. 더들리 세나나야케는 1965년 3월 25일 총리로 취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다라나이케의 국회의원 지위는 그녀가 재임 중 자동차 형태의 뇌물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도전을 받았다. 조사를 위해 위원회가 임명되었고, 그녀는 나중에 혐의에서 벗어났다.
5년간의 야당 임기 동안 그녀는 좌익 정당들과의 연합을 유지했다. 1966년 11월부터 1967년 4월 사이에 열린 7번의 보궐선거 중 6번은 반다라나이케의 지도 아래 야당이 승리했다.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무역 불균형, 실업, 그리고 예상되었던 해외 원조의 불발은 광범위한 불만을 초래했다. 이는 주간 쌀 배급량을 줄이는 긴축 조치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1969년까지 반다라나이케는 권력을 되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벌였다. 다른 공약들 중 그녀는 가구당 두 척의 쌀을 지급하고, 외국 은행과 수출입 산업을 국유화하며, 기업 및 정부 부패를 감시할 감시단을 설립하고, "제국주의" 파트너로부터 벗어나는 외교 정책으로 돌아가며, 새로운 헌법 초안 작성을 담당할 제헌 의회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했다.
6. 총리 재임 (1970-1977)

1970년 5월, 공산당, 랑카 사마 사마자당, 그리고 그녀 자신의 자유당 간의 연합전선 연합이 1970년 선거에서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차지한 후 반다라나이케는 다시 권력을 잡았다. 7월까지 그녀는 영국이 초안한 헌법을 실론인이 초안한 헌법으로 대체하기 위해 제헌 의회를 소집했다. 그녀는 정부 부처의 상임 비서들이 해당 부서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도록 요구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예를 들어, 주택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훈련된 엔지니어여야 했고, 보건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의사여야 했다. 모든 공무원들은 노동자 평의회에 가입할 수 있었고, 지방 차원에서는 정부 행정에 대한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인민 위원회를 설립했다. 이러한 변화는 영국의 식민지적 요소와 외국의 영향력을 국가 기관에서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6.1. 제2기 집권과 헌법 개정
1972년 5월, 새로운 헌법이 비준된 후 실론 자치령은 스리랑카 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 비록 국가는 영연방 내에 남아 있었지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더 이상 주권자로 인정되지 않았다. 헌법의 조건에 따라 1971년부터 중단되었던 상원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행정, 사법, 입법부의 권한을 하나의 기관에 통합한 새로운 단원제 국가 의회가 창설되었다. 헌법은 불교의 우월성을 인정했지만, 불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에 대한 동등한 보호를 보장했다. 헌법은 인권 장전을 제공하지 않았고, 신할라어를 유일한 공식 언어로 인정했으며, "연방주의 요소"를 포함하지 않았다. 새로운 헌법은 또한 반다라나이케의 임기를 2년 연장하여, 총리의 의무적인 5년 임기를 공화국 수립과 일치시켰다. 이러한 제한은 인구의 다양한 부문, 특히 권위주의적 통치에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과 타밀어 사용 인구에게 우려를 야기했다. 그 달이 끝나기 전에 불만은 고조되었고, 이는 이전 해에 투옥된 반군들을 다루기 위한 별도의 재판소를 설립하는 사법 위원회 법안 통과로 이어졌다. 재판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인권 원칙을 위배한다고 주장했다. 7월까지 산발적인 폭력 사건이 다시 발생했으며, 연말까지는 두 번째 반란의 물결이 예상되었다. 광범위한 실업은 정부에 대한 대중의 환멸을 심화시켰는데, 이는 농업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사유지 규모를 제한하기 위해 제정된 토지 재분배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현상이었다.
1972년, 반다라나이케는 '1972년 토지 개혁법 제1호'를 제정하여 스리랑카에서 대대적인 토지 개혁을 단행했다. 이 법은 사유지에 20 ha의 상한선을 부과했으며, 이후 1975년에는 공기업 소유의 플랜테이션을 국유화하는 토지 개혁 (개정) 법이 뒤따랐다. 이러한 토지 개혁의 목적은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비평가들은 두 번째 개혁 물결이 전통적으로 통일국민당을 지지했던 부유한 지주들을 겨냥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개혁의 결과로 국가는 가장 큰 플랜테이션 소유주가 되었고, 스리랑카 국영 플랜테이션 공사, 자나타 농장 개발 위원회(인민 농장 개발 위원회), USAWASAMA(고지대 협동 농장 개발 위원회)라는 두 개의 기관이 이러한 농장들을 관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러한 토지 개혁 이후 몇 년 동안 스리랑카가 외화 유입을 위해 의존했던 주요 수출 작물의 생산량이 감소했다.
6.2. 경제 정책 및 위기
1973년 석유 파동은 스리랑카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여전히 해외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반다라나이케는 호주, 캐나다, 중국, 덴마크, 헝가리, 그리고 세계은행으로부터 물품 및 금전적 원조를 받으며 소비재 수입을 제한하는 긴축 프로그램을 완화했다. 미국은 상환이 필요 없는 원조 보조금을 중단하고 해외 대출 제공 정책으로 전환했다. 스리랑카 통화의 평가절하와 인플레이션, 높은 세금은 경제 성장을 둔화시켰고, 이는 다시 더 높은 세금과 긴축 조치로 적자를 해결해야 하는 순환적인 압력을 야기했다. 1973년과 1974년 사이의 통제 불능 인플레이션은 경제적 불확실성과 대중의 불만을 초래했다.
1974년, 반다라나이케는 마지막 독립 신문 그룹인 '더 선'의 폐쇄를 강제했다. 그녀는 그들의 비판이 불안을 부추긴다고 믿었다. 1974년과 1975년 내내 랑카 사마 사마자당이 노동조합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파업 위협을 가하면서 연합전선 연합에 균열이 나타났다. 새로 몰수된 농장들이 랑카 사마 사마자당이 통제하는 농업 및 토지부 아래 놓이자, 그들이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을 조직할 것이라는 우려로 반다라나이케는 그들을 정부 연합에서 축출했다.
1975년 세계 여성의 해를 기념하여 반다라나이케는 여성 문제에 중점을 둔 기관을 설립했는데, 이는 나중에 여성 및 아동부가 되었다. 그녀는 스리랑카 내각에 최초의 여성 장관인 시바 오베예세케레를 임명했는데, 처음에는 보건부 제1국무장관으로, 나중에는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녀는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1975년 세계 여성 회의에서 자력으로 선출된 유일한 여성 총리로서 환영받았다. 반다라나이케는 1976년 콜롬보에서 열린 제5차 비동맹 국가 회의에서 1년 임기의 의장직을 맡았다.
6.3. 사회 불안과 진압
반다라나이케가 국가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업과 인플레이션은 통제되지 않았다. 집권 16개월 만에 반다라나이케 정부는 좌익 청년들의 1971년 자나타 비묵티 페라무나 봉기로 거의 전복될 뻔했다. 자나타 비묵티 페라무나(인민 해방 전선)의 무장적 입장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다라나이케 행정부는 처음에는 그들을 임박한 위협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상주의자들로 일축했다.
3월 6일, 무장 세력이 콜롬보의 미국 대사관을 공격했고, 이는 3월 17일 비상사태 선포로 이어졌다. 4월 초, 경찰서에 대한 공격은 실론의 소규모 군대가 대처하기 어려운 잘 계획된 반란임을 보여주었다. 동맹국들에게 지원을 요청한 정부는 반다라나이케의 중립 외교 정책 덕분에 크게 구원받았다. 소련은 실론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항공기를 보냈고, 영국, 아랍 연합 공화국, 미국,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무기와 장비가 도착했다. 동독과 서독, 노르웨이, 폴란드로부터 의료품이 제공되었으며, 인도로부터 순찰정이 파견되었고,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군대를 파견했다. 5월 1일, 반다라나이케는 정부의 공세를 중단하고 사면을 제안하여 수천 명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다음 달에는 두 번째 사면이 제안되었다. 반다라나이케는 민간 권한을 재확립하고 체포되거나 항복한 반군들을 다루기 위한 전략 계획을 제공하기 위해 국가 재건 위원회를 설립했다. 분쟁 후 반다라나이케의 첫 조치 중 하나는 급진적인 불만을 조장했다고 의심되는 북한 외교관들을 추방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 그녀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그녀에게 붙인 "그녀는 내각에서 유일한 남자였다"는 말은 반란이 한창일 때 다시 떠올랐는데, 이는 반다라나이케가 "강력한 정치적 세력"이 되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6.4. 국제 관계
1970년 9월, 반다라나이케는 잠비아 루사카에서 열린 제3차 비동맹 회의에 참석했다. 그 달, 그녀는 국제 무역을 논의하기 위해 파리와 런던으로도 여행했다. 아시아 재단과 평화 봉사단 대표들에게 출국을 명령한 반다라나이케는 전임자가 협상했던 무역 협정과 제안들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스라엘이 아랍 이웃 국가들과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정부가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녀는 동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 그리고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반다라나이케는 인도양에 영국-미국 통신 센터를 건설하는 것에 반대하며, 그 지역이 "중립적이고 핵 없는 지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2월에는 100명 이상의 직원을 둔 모든 기업을 국유화할 수 있도록 하는 사업 인수법이 통과되었다. 명목상 이 조치는 주요 차와 고무 생산에 대한 외국 통제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산업 및 개발에 대한 국내외 투자를 모두 위축시켰다.
1975년 세계 여성의 해를 기념하여 반다라나이케는 여성 문제에 중점을 둔 기관을 설립했는데, 이는 나중에 여성 및 아동부가 되었다. 그녀는 스리랑카 내각에 최초의 여성 장관인 시바 오베예세케레를 임명했는데, 처음에는 보건부 제1국무장관으로, 나중에는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녀는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1975년 세계 여성 회의에서 자력으로 선출된 유일한 여성 총리로서 환영받았다. 반다라나이케는 1976년 콜롬보에서 열린 제5차 비동맹 국가 회의에서 1년 임기의 의장직을 맡았다.
7. 정치적 침체와 야당 지도 (1977-1994)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국내에서 부패와 족벌주의 혐의로 계속 어려움을 겪었으며, 경제는 계속해서 하락했다. 인정을 위한 투쟁에서 불만을 품은 타밀족은 분리주의로 돌아섰다. 1976년 5월, 타밀 연합 해방 전선은 독립 국가와 주권적 자치권을 요구하는 바두코드다이 결의안을 채택했다. 1977년 총선에서 연합전선은 단 6석만을 얻으며 참패했다.
7.1. 선거 패배와 권리 박탈
반다라나이케는 1977년 총선에서 아타나가야 지역구 의석을 유지했다. 1977년 11월, 그녀의 국회의원 지위를 문제 삼는 청원은 콜롬보 고등법원에 의해 기각되었다. 1978년에는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프랑스식 대통령제로 대체하는 새로운 헌법이 비준되었다. 이 헌법에 따라 행정부 또는 대통령은 국민 투표로 6년 임기로 선출되었다. 대통령은 내각을 주재할 총리를 선택했고, 이는 입법부의 승인을 받았다. 처음으로 기본권 선언을 제공하여 시민의 평등을 보장했으며, 타밀어를 국가 언어로 인정했지만, 행정 언어는 신할라어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조항들은 타밀 분리주의자들을 달래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타밀족과 신할라족 간의 폭력을 멈추지 못했고, 이는 1979년 대테러법 통과로 이어졌다.
1980년, J. R. 자야와데네 대통령은 반다라나이케가 총리 재임 중 권력을 남용한 혐의를 조사하기 위해 특별 대통령 위원회를 임명했다. 보고서가 자야와데네에게 제출된 후, 통일국민당 정부는 1980년 10월 16일 의회에서 반다라나이케와 그녀의 조카 펠릭스 디아스 반다라나이케(부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음)의 시민권을 7년간 박탈하는 동의안을 채택했다. 그녀는 의회에서 축출되었지만, 당 대표직은 유지했다. 이 동의안은 찬성 139표, 반대 18표로 통과되어 필요한 3분의 2 문턱을 쉽게 넘었다.
7.2. 정당 재건과 야당 지도자 활동
당 대표였음에도 불구하고 반다라나이케는 자유당을 위해 선거 운동을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그녀의 아들 아누라가 의회 당 대표로 활동했다. 아누라 아래에서 자유당은 우익으로 이동했고, 반다라나이케의 딸 찬드리카는 남편 비자야 쿠마라퉁가와 함께 스리랑카 인민당을 결성하며 탈퇴했다. 새 당의 목표는 타밀족과의 화해와 관련이 있었다.
1980년부터 정부와 타밀 호랑이, 타밀 엘람 인민 해방 기구, 타밀 엘람 해방군, 타밀 엘람 해방 조직을 포함한 다양한 경쟁 집단 분리주의자들 간의 갈등은 더욱 빈번하고 폭력적으로 변했다. 1981년 지방 선거 운동 중, 타밀 극단주의자들은 저명한 통일국민당 정치인 아루무감 티아가라자를 암살했다. 타밀 연합 해방 전선은 1982년 대통령 선거 보이콧을 촉구했다. 반군들은 정부와의 협력이 정부 정책을 합법화하고 독립적인 타밀 국가를 달성하려는 열망과 충돌한다고 주장하며 보이콧을 지지했다.
1983년, 반군 타밀족이 군대 순찰대를 매복 공격하여 13명의 군인을 살해했다. 신할라족 폭도들의 보복 폭력은 전국적으로 비반군 타밀족과 그들의 재산에 대한 폭동을 촉발시켰고, 이는 나중에 검은 7월로 불리게 되었다.
자야와데네의 자유 시장 지향과 경제 성장에 대한 집중은 무역 보호를 제거함으로써 북부의 타밀 농민들에게 해를 끼쳤다. 마찬가지로, 이 정책은 인도 시장과의 경쟁에 직면한 남부 신할라족 기업뿐만 아니라 식량 보조금이 크게 줄어든 도시 빈민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경제 개발을 위한 막대한 정부 지출은 예산 적자와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여 세계은행과 국제 통화 기금 관리들을 경악시켰다. 이에 따라 원조 기관들은 정부가 지출을 통제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원조를 줄였다. 마하웰리 개발 프로그램의 가속화는 고용을 증가시키고 식량 공급을 안정화시켰으며, 4개의 수력 발전 시설 완공으로 외국 에너지 공급에 대한 의존도를 줄였다.
경제 및 인프라 구축에 대한 집중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1984년까지 약 10만 채의 새 주택을 건설한 농촌 주택 이니셔티브는 주택이 필요에 따라가 아니라 정치적 동맹에 따라 배분되었기 때문에 지역사회를 양극화시켰다. 1982년 이후 산업 민영화는 부자와 빈자 사이에 상당한 격차를 만들었고 인플레이션이 다시 발생하여 물품 조달을 어렵게 하고 생활 수준을 낮췄다.
1986년 1월, 반다라나이케의 시민권은 자야와데네가 발행한 대통령령에 의해 회복되었다. 1983년 이후 고조된 정부와 분리주의자들 간의 갈등은 1987년까지 스리랑카 내전으로 변모했다. 자야와데네는 타밀족의 우려 사항에 대해 거의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고, 대신 불안을 정부 전복을 꾀하는 좌익 파벌의 탓으로 돌렸다. 반군과의 협상 결렬은 결국 자야와데네가 인도 정부의 개입을 승인하게 만들었다. 1987년에 서명된 인도-스리랑카 협정은 스리랑카 정부와 반군 간의 휴전 조건을 명시하고, 인도 평화유지군이 무장 해제를 촉진하기 위해 스리랑카를 점령하도록 승인했다.
반다라나이케와 자유당은 인도군의 도입에 반대했는데, 이는 정부가 타밀족을 대신하여 인도가 개입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자국민을 배신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승인한 폭력과 민족주의적 초점에 대한 열망에 대한 반응으로, 자나타 비묵티 페라무나 무장 세력은 남부에서 다시 나타났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반다라나이케는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자야와데네의 후임 대통령이 된 라나싱헤 프레마다사에게 간발의 차이로 패배했다.
8. 총리 재임 (1994-2000)

1989년 2월 6일, 1989년 총선에서 자유당을 위해 선거 운동을 하던 중, 반다라나이케는 폭탄 테러에서 살아남았다. 그녀는 무사했지만, 그녀의 보좌관 중 한 명은 다리 부상을 입었다. 19일 최종 결과에서 자유당은 라나싱헤 프레마다사 휘하의 통일국민당에게 패배했지만, 67석을 얻어 반다라나이케가 두 번째 야당 당수직을 맡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감파하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재선되었다. 같은 해, 정부는 자나타 비묵티 페라무나 반군을 진압하여 약 3만에서 7만 명을 살해했는데, 이는 반다라나이케가 1971년에 했던 재판이나 투옥 대신 선택한 방법이었다.
1990년, 타밀 호랑이에 의해 13개월간의 휴전이 깨진 후, 다른 민병대들이 무기를 내려놓자 정부는 타밀 호랑이와의 협상을 중단하고 군사적 해결책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아누라는 이 움직임을 지지했지만, 그의 어머니인 반다라나이케는 이 계획에 반대했다. 대통령이 비상 권한을 행사하자, 그녀는 정부가 인권 침해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하며 비상사태 해제를 요구했다.
야당 지도자 재임 기간 동안, 그녀는 1991년 랄리트 아툴라트무달리와 가미니 딧사나야케와 같은 통일국민당 고위 인사들이 주도한 프레마다사 탄핵을 지지했다. 프레마다사가 의회를 휴회시키고 M. H. 모하메드 의장이 탄핵 동의안을 기각하면서 탄핵은 실패했다. 1988년 남편이 암살된 후 런던에서 자발적 망명 생활을 하던 반다라나이케의 딸 찬드리카 쿠마라퉁가는 1991년 스리랑카로 돌아와 자유당에 재가입했다. 같은 해, 관절염으로 인해 점점 더 몸이 불편해지던 반다라나이케는 뇌졸중을 겪었다.
1992년, 특수 작전국장 프레마다사 우두감폴라는 인권 침해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이 불거진 후 강제 퇴직했다. 우두감폴라는 반군에 사용된 죽음의 부대가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는 서면 진술을 제공했다. 반다라나이케는 그의 증거를 지지했지만, 우두감폴라는 정부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을 조장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1993년 5월 1일, 프레마다사 대통령이 자살 폭탄 테러로 암살되자, 그의 총리 딩기리 반다 위제퉁가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여 1995년 1월 2일까지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채우도록 지명되었다. 국회의원들은 한 달 이내에 후임자를 투표로 선출해야 했다. 건강 악화로 인해 반다라나이케는 대통령직에 출마하지 않고 야당 지도자로 계속 활동하기로 결정했으며, 위제퉁가는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위제퉁가는 반다라나이케의 아들 아누라를 설득하여 통일국민당으로 이탈하게 했고, 그에게 고등교육부 장관직을 부여하여 보상했다. 그의 이탈로 반다라나이케와 쿠마라퉁가가 자유당을 이끌게 되었다. 어머니의 건강 악화로 인해 쿠마라퉁가는 1993년 5월 스리랑카 서부주 지방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새로운 연합인 인민연합(PA) 결성을 주도했다. 이 연합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쿠마라퉁가는 1993년 수석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어서 쿠마라퉁가가 이끄는 연합은 남부 지방 의회 선거에서도 승리했다. 쿠마라퉁가는 어머니가 수술에서 회복 중이었기 때문에 1994년 총선에서 인민연합 선거 운동을 이끌었다. 연합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반다라나이케는 쿠마라퉁가가 총리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때 찬드리카는 자유당 대표로서 그녀의 뒤를 이었다. 정신적으로는 명료했지만 발 질환과 당뇨병 합병증으로 고통받던 반다라나이케는 휠체어에 의존했다. 국회의원으로 재선된 그녀는 1994년 8월 19일 취임식에서 딸의 내각에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8.1. 세 번째 총리 임기
11월에 이어진 1994년 대통령 선거에서 쿠마라퉁가의 주요 정치적 경쟁자인 가미니 딧사나야케는 선거 2주 전에 암살되었다. 그의 미망인 스리마 딧사나야케가 통일국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정되었다. 쿠마라퉁가의 지지율은 암살 전에도 약 100만 표 차이로 예측되었으며, 그녀는 압도적인 차이로 선거에서 승리했다. 스리랑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된 쿠마라퉁가는 어머니를 총리로 임명했는데, 1978년 헌법에 따라 반다라나이케는 국방 및 외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총리직은 주로 의례적인 직책이 되었지만, 자유당 내에서 반다라나이케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했다. 2000년까지 쿠마라퉁가는 더 젊은 총리를 원했고, 반다라나이케는 건강상의 이유로 2000년 8월 사임했다.
9. 사망 및 유산

반다라나이케는 2000년 10월 10일, 콜롬보 자택으로 향하던 중 카다와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녀는 그날 열린 총선에서 투표를 막 마친 참이었다. 스리랑카는 이틀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고, 국영 라디오 방송국들은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장례 애가를 틀었다. 반다라나이케의 유해는 국회의사당에 안치되었고, 장례식은 이후 호라고라 월라와에서 거행되었으며, 그녀는 원래 남편을 위해 지어진 호라고라 반다라나이케 사마디 영묘에 안장되었다.
역사상 여성이 국가를 이끄는 것이 거의 상상할 수 없었던 시기에, 반다라나이케는 여성의 역량에 대한 세계적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스리랑카에 대한 그녀 자신의 기여 외에도, 그녀의 자녀들은 국가 발전에 참여했다. 세 자녀 모두 전국적으로 저명한 직책을 맡았다. 아누라와 찬드리카의 정부 내 역할 외에도, 반다라나이케의 딸 수네트라는 1970년대에 그녀의 정치 비서로 일했으며 나중에 자선사업가가 되었다. 반다라나이케 부부의 결혼은 그들이 제정한 사회주의 정책을 통해 수년 동안 스리랑카의 사회적 장벽을 허무는 데 도움이 되었다.
9.1. 정치적·사회적 유산
세 번의 총리 임기 동안 반다라나이케는 스리랑카를 식민지 과거에서 벗어나 공화국으로서의 정치적 독립으로 이끌었다. 냉전 기간 동안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그녀는 경제의 핵심 부문을 국유화하고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토착민들에게 혜택을 주려 했으며, 서구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누리던 정치적 특혜를 종식시키고자 했다. 그녀 정책의 주요 목표는 국가 내의 민족적, 사회경제적 불균형을 줄이는 것이었지만, 타밀족 인구의 요구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한 것은 수십 년간의 갈등과 폭력으로 이어졌다. 비동맹 운동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서, 반다라나이케는 초강대국의 영향력에 중립을 유지하려 했던 국가들 사이에서 스리랑카를 부각시켰다. 그녀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 간의 동맹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핵 확장에 반대했다.
9.2. 여성 정치 참여에 미친 영향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로서 반다라나이케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정치 학자들은 반다라나이케가 상징적으로 강력했지만, 스리랑카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에 궁극적으로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반다라나이케는 여성 지도자로서의 지위에 자부심을 표현하며 자신을 "인민의 어머니"로 여겼지만, 여성 문제에 개인적 또는 정치적 중점을 두지 않았으며, 그녀의 총리 선출이 스리랑카 정치에서 여성의 수를 크게 늘리지는 못했다. 1976년 그녀가 스리랑카 내각에 최초의 여성 장관인 시바 오베예세케레를 임명한 것은 오베예세케레가 반다라나이케의 친척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혁명적이지 못했다. 이러한 임명은 반다라나이케가 가족 구성원을 고위 공직에 임명하는 패턴을 따랐다.
1994년까지 반다라나이케와 그녀의 딸 쿠마라퉁가가 총리와 대통령이라는 최고 정치 직책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는 여전히 아시아 국가들 중 여성의 정치 참여율이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였다. 2010년, 반다라나이케가 세계 최초의 여성 총리로 선출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에, 스리랑카 국회의원 로지 세나나야케는 언론에 스리랑카가 정치적 성 평등을 향한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지 못했으며, 국회의원 중 여성은 4.5%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세나나야케는 이전에 더 나은 성별 대표성을 달성하기 위해 "특별 할당제"를 요구했으며, 모든 입법부 의석의 25%를 여성에게 할당하는 이러한 할당제는 2016년에 통과되었다.
2023년에는 그녀의 삶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 총리: 시리마보'가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그녀의 두 딸 수네트라와 찬드리카, 그리고 두 손주와의 대화를 통해 그려졌다. 또한 그녀의 내각의 일원이었던 실론 행정 서비스의 오랜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담겨 있다. 이 영화는 제21회 다카 국제 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10. 비판과 논란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의 재임 기간 동안 그녀의 정책과 통치 방식에 대한 여러 비판과 논란이 제기되었다.
10.1. 경제 정책 비판
반다라나이케의 첫 두 총리 임기 동안 스리랑카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세금,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식량 수입 의존도, 높은 실업률로 고통받았다. 그녀의 임기는 국가적 차원에서 불충분한 경제 개발로 특징지어졌다. '사업 인수법'의 통과로 인해 주요 산업에 대한 국내외 투자가 위축되었다. 스리랑카 통화의 평가절하, 인플레이션, 높은 세금은 경제 성장을 둔화시켰고, 이는 다시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더 높은 세금과 긴축 조치를 취해야 하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토지 개혁 이후 주요 수출 작물의 생산량이 감소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10.2. 민족 갈등 관련 비판
반다라나이케는 신할라 민족주의적이고 반타밀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은 타밀족 인구 사이에서 불만을 악화시켰고, 신할라족과 타밀족 인구 간의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그녀가 타밀족 인구의 요구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한 것은 스리랑카에서 수십 년간의 분쟁과 폭력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0.3. 권위주의적 통치 비판
반다라나이케는 재임 중 권력 남용 혐의로 1980년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그녀는 1974년 마지막 독립 신문 그룹인 '더 선'의 폐쇄를 강제했으며, 이는 언론 탄압으로 비판받았다. 또한 그녀는 부패와 족벌주의 혐의로 국내에서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의 가족 구성원을 고위 공직에 임명하는 패턴은 족벌주의 비판의 근거가 되었다.
11. 영향력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는 스리랑카 국내 정치와 국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1.1. 스리랑카 정치에 미친 영향
그녀는 국가를 식민지 과거에서 벗어나 공화국으로서의 정치적 독립으로 이끌었다. 냉전 기간 동안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경제의 핵심 부문을 국유화하고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토착민들에게 혜택을 주려 했으며, 서구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누리던 정치적 특혜를 종식시키고자 했다. 그녀의 리더십과 정책은 스리랑카의 정치 지형과 후대 정치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세 자녀 모두 스리랑카 정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으며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11.2.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
반다라나이케는 비동맹 운동의 창립 회원 중 한 명이자 주요 지도자였다. 그녀는 스리랑카를 초강대국의 영향력에 중립을 유지하려 했던 국가들 사이에서 부각시켰다. 그녀는 협상가이자 비동맹 국가들의 지도자로서 국제 무대에서 스리랑카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녀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 간의 동맹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핵 확장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976년에는 콜롬보에서 제5차 비동맹 국가 회의를 주최하며 의장직을 맡았다.
12. 기념 및 추모
반다라나이케의 유해는 남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를 위해 지어진 호라고라 반다라나이케 사마디 영묘에 안장되었다. 2023년에는 그녀의 삶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 총리: 시리마보'가 개봉되어 제21회 다카 국제 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13. 관련 항목
- 솔로몬 반다라나이케
-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 아누라 반다라나이케
- 스리랑카의 총리
- 스리랑카 자유당
- 비동맹 운동
- 스리랑카 내전
14.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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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선거 | 스리랑카의 대통령 | 3대 | 자유당 | 44.95% | 2,289,860표 | 2위 | 낙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