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파르타쿠스Spartacus라틴어, 기원전 103년경부터 기원전 71년까지 활동한 트라키아인 검투사이자 노예 출신의 지도자로, 로마 공화정에 대항하여 제3차 노예 전쟁이라는 대규모 노예 반란을 이끌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주로 그가 사망한 지 한 세기 이상 지난 후에 플루타르코스와 아피아노스 같은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이들의 기록은 때로는 상충되거나 단편적인 정보를 담고 있어 그의 삶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러나 모든 사료는 그가 전직 검투사였으며 뛰어난 군사 지도자였다는 점에 동의한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로마 공화정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으며, 이는 로마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의 투쟁은 억압받는 자들이 자유를 위해 싸우는 상징으로 해석되어 왔으며, 19세기 이후 현대 작가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많은 문학적, 정치적 영감을 주었다. 철학자 볼테르는 제3차 노예 전쟁을 "역사상 유일하게 정당한 전쟁"이라고 묘사했으며, 카를 마르크스는 스파르타쿠스를 "고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정한 대표자"이자 "고대 역사 전체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로 평가하며 그를 자신의 영웅 중 한 명으로 꼽았다. 비록 고전 역사가들의 기록에 노예제 폐지를 목표로 했다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의 반란은 노예 소유 과두정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려는 피억압 민중의 투쟁으로 인식되어 문학, 텔레비전, 영화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소재가 되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스파르타쿠스의 초기 생애와 배경에 대한 정보는 고대 사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그가 트라키아 출신이라는 점은 일치한다. 그의 출신 민족, 가족 관계, 그리고 노예가 되기 이전의 군사 경력은 그의 반란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2.1. 출신 및 민족성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인으로 태어났으며, 일부 기록에 따르면 유목 민족 출신이라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를 "유목 민족 계통의 트라키아인"으로 묘사하며, 용기와 힘뿐만 아니라 지혜롭고 온화한 성품을 지녀 자신의 민족보다 그리스인에 더 가까웠다고 전한다. 아피아노스는 그가 "트라키아 태생으로 한때 로마군 병사로 복무했으나 포로가 되어 검투사로 팔렸다"고 기록했다. 플로루스는 그를 "트라키아 용병에서 로마 병사가 되었고, 탈영하여 노예가 되었으며, 이후 그의 힘을 인정받아 검투사가 되었다"고 더 자세히 설명한다.
여러 학자들은 스파르타쿠스가 트라키아 부족 중 하나인 마에디족 출신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마에디족은 현재의 남서부 불가리아 지역, 즉 트라키아의 남서부 경계와 로마 마케도니아 속주 접경 지역에 거주했다. 이 설은 콘라트 치글러와 같은 독일 역사가들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당시 트라키아에 유목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유목 민족"이라는 표현이 마에디족을 의미한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다른 설로는 로도피 산맥 기슭에 살던 베시족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이는 스파르타쿠스와 유사한 이름이 새겨진 비문이나 유물이 이 지역에서 발견된 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폰토스 왕국의 스파르토키드 왕조와 오드리사이 왕국의 왕 중에도 스파르타쿠스와 유사한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있었던 점을 들어, 그가 왕족의 후손일 것이라는 설도 제기되었으나, 이는 로마를 괴롭힌 지도자가 천한 출신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스파르타쿠스의 정확한 출신 부족을 두고 여러 논쟁이 있지만, 그가 로마의 적이었던 미트리다테스 6세를 위해 용병으로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로마군 보조병으로 복무했을 가능성, 혹은 로마와 동맹 관계에 있던 부족 출신으로 보조병이 되었다가 탈영하여 반로마 투쟁을 벌였을 가능성 등 다양한 추측이 제기된다. 그의 생년은 불분명하지만, 반란을 시작할 당시 그의 지도력과 행동을 고려할 때 약 30세에서 40세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당시 검투사들이 대부분 20대 초반이었고 30대가 되기 전에 은퇴하거나 사망했음을 감안하면, 그가 20대 청년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2.2. 가족 관계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부족 출신의 여예언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녀는 디오니소스의 비의를 통해 영감을 받아 스파르타쿠스가 위대하고 두려운 세력이 될 것이지만, 결국 불행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이 여예언자는 반란이 시작될 때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건물에 있었고 함께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현대 연구자들 중에는 이 여성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스파르타쿠스의 아내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2.3. 초기 군사 경력 및 노예화
스파르타쿠스는 노예가 되기 전 로마군에서 병사로 복무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포로로 잡히거나 탈영병이 된 후 노예로 팔려 남부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의 카푸아에 위치한 렌툴루스 바티아투스 소유의 검투사 양성소에 소속되었다. 그는 거대한 직사각형 방패인 스쿠툼과 약 0.5 m (18 in) 길이의 넓고 곧은 칼날을 가진 검인 글라디우스를 사용하는 중무장 검투사인 무르밀로 또는 트라키아 출신 검투사인 트라엑스 스타일의 검투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가 검투사로서 어떤 전적을 남겼는지에 대한 고전 사료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3. 검투사 생활
스파르타쿠스의 검투사 생활은 그의 반란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군사적 재능이 발휘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3.1. 카푸아에서의 훈련
기원전 73년, 스파르타쿠스는 카푸아 근처의 렌툴루스 바티아투스 소유 검투사 양성소에서 훈련을 받던 중이었다. 이 양성소에는 갈리아인과 트라키아인 검투사들이 많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흥행주는 이들을 한곳에 몰아넣어 관리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약 200명의 다른 검투사들과 함께 탈출을 모의했으나, 이 계획은 밀고자에 의해 발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70명에서 78명에 달하는 검투사들이 부엌칼과 꼬챙이 같은 도구를 탈취하여 양성소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추격하는 로마 병사들을 격파하고 카푸아 주변 지역을 약탈하며 많은 노예들을 자신들의 대열에 합류시켰다. 이들은 결국 베수비오스 산의 방어에 유리한 지형으로 이동하여 거점을 확보했다.
3.2. 검투사로서의 삶
탈출에 성공한 검투사들은 스파르타쿠스와 두 명의 갈리아인 노예인 크릭수스와 오이노마오스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선출했다. 로마 역사가들은 탈출한 노예들이 스파르타쿠스를 중심으로 한 동질적인 집단이었다고 가정했지만, 이는 로마인들의 계층적 군사 지도관을 반영한 것일 수 있으며, 다른 노예 지도자들을 스파르타쿠스 아래의 부하로 격하시킨 것일 수도 있다. 오이노마오스는 초기 전투에서 사망했다.
4. 제3차 노예 전쟁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스파르타쿠스가 이끈 제3차 노예 전쟁은 기원전 73년부터 기원전 71년까지 약 2년간 지속된 로마 공화정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노예 반란이었다. 이 반란은 로마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로마의 군사력과 사회 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4.1. 탈출과 초기 성공
기원전 73년,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한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동료들은 베수비오스 산에 거점을 마련했다. 로마는 이 반란을 단순한 치안 문제로 간주하여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가 지휘하는 민병대를 파견했다. 글라베르는 베수비오스 산에 주둔한 스파르타쿠스 군을 포위하여 굶주림으로 항복을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포도나무 덩굴로 밧줄을 만들어 병사들과 함께 화산의 가파른 경사면을 내려와 로마군의 방어되지 않은 후방 진영을 기습 공격하여 대부분의 민병대를 전멸시켰다.
반란군은 이어진 두 번째 로마군 원정대도 격파했으며, 법무관 지휘관을 거의 사로잡을 뻔했고, 그의 부관들을 죽이고 군사 장비를 탈취했다. 이러한 성공으로 인해 점점 더 많은 노예들과 목동들이 스파르타쿠스 군에 합류하여 그 규모는 약 7만 명에 달했다. 스파르타쿠스 군에는 켈트족, 갈리아족 등 다양한 민족 출신이 있었으며, 이전 동맹시 전쟁 (기원전 91년-기원전 87년)의 참전 용사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도시 노예들이 주로 편안한 생활에 익숙했던 반면, 시골 노예들은 스파르타쿠스 군에서 싸울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었다.
4.2. 군대 확장 및 전술
스파르타쿠스는 이러한 교전에서 뛰어난 군사 전술가임을 입증했으며, 이는 그가 이전에 군사 경험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반란군은 정식 군사 훈련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지역의 가용한 자재를 능숙하게 활용하고 훈련된 로마군에 맞서 비정형적인 전술을 구사했다. 그들은 기원전 73년에서 72년 겨울 동안 신병들을 훈련시키고 무장시켰으며, 놀라, 누케리아, 투리이, 메타폰툼 등의 도시를 포함한 약탈 지역을 확장했다. 이들 지역 간의 거리와 이후의 사건들을 볼 때, 노예군은 스파르타쿠스와 크릭수스가 지휘하는 두 개의 독립적인 집단으로 활동했음을 시사한다.
스파르타쿠스 군은 엄격한 군기를 유지했으며, 스파르타쿠스는 약탈품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개인적인 금은 소유를 금지했다. 살루스티우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는 불필요한 폭행과 약탈 같은 일탈 행위를 금지했다.
4.3. 로마의 대응과 주요 전투

로마의 대응은 당시 히스파니아에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의 반란과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으로 인해 로마 군단이 부재하여 지연되었다. 게다가 로마는 이 반란을 전쟁보다는 단순한 치안 문제로 여겼다.
기원전 72년 봄, 반란군은 겨울 숙영지를 떠나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로마 원로원은 루키우스 겔리우스 푸블리콜라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 두 명의 집정관이 지휘하는 군단을 파견했다. 두 군단은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어 가르가누스 산 근처에서 크릭수스가 지휘하는 3만 명의 반란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후 스파르타쿠스에게 패배했다. 이 패배는 아피아노스와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라 다르게 묘사된다. 스파르타쿠스는 전사한 크릭수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로마군 포로 300명에게 검투사 시합을 시켜 희생 제물로 바쳤다.
스파르타쿠스 군은 북부 이탈리아에 도달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프스 산맥을 넘지 않고 군대를 돌려 다시 남부 이탈리아로 향했다. 반란군의 재남하 이유는 고전 사료에 명확히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다.
노예들의 지속적인 위협에 경각심을 느낀 원로원은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자 이 직책에 유일하게 자원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반란 진압을 맡겼다. 크라수스는 4만 명에서 5만 명 이상의 훈련된 로마 병사로 구성된 8개 군단을 지휘했으며, 이들을 엄격한 규율로 다루었고, 심지어는 병사들이 적보다 자신을 더 두려워하게 만들기 위해 10분의 1을 처형하는 십분의 일형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기원전 71년 초,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이탈리아 남부로 후퇴했다가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자, 크라수스는 6개 군단을 지역 경계에 배치하고, 그의 레가투스인 뭄미우스에게 2개 군단을 이끌고 스파르타쿠스의 후방을 기동하도록 지시했다. 뭄미우스는 반란군과 교전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회라고 생각되는 순간에 공격했으나, 오히려 대패했다. 이후 크라수스의 군단은 여러 차례의 교전에서 승리하며 스파르타쿠스를 루카니아를 거쳐 더 남쪽으로 몰아붙였다. 기원전 71년 말, 스파르타쿠스는 메시나 해협 근처의 레기움(레조칼라브리아)에 진을 쳤다.
4.4. 시칠리아 탈출 시도와 패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는 킬리키아 해적들과 거래하여 자신과 약 2,000명의 병사들을 시칠리아로 수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시칠리아에서 노예 반란을 선동하고 증원군을 모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해적들은 돈만 받고 반란군을 버리고 떠나 스파르타쿠스를 배신했다. 일부 소규모 사료에서는 반란군이 탈출 수단으로 뗏목과 배를 건조하려 시도했으나, 크라수스가 반란군이 시칠리아로 건너가지 못하도록 알 수 없는 조치를 취하여 그들의 노력이 좌절되었다고 언급한다.
스파르타쿠스 군은 이후 레기움으로 후퇴했다. 크라수스의 군단은 그들을 추격하여 레기움의 지협에 요새를 건설하여 반란군을 포위하고 보급을 차단했다. 반란군이 로마군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보급이 끊기자 굶주림에 시달렸다.
4.5. 최후와 죽음

이때 폼페이우스의 군단이 히스파니아에서 돌아왔고, 원로원은 그들에게 남쪽으로 향하여 크라수스를 돕도록 명령했다.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의 개입이 스파르타쿠스를 직접 물리친 공로를 빼앗을까 봐 두려워했다. 폼페이우스의 개입 소식을 들은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와 휴전을 시도했으나, 크라수스가 이를 거부했다. 이에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군대는 로마군의 요새를 뚫고 브룬디시움으로 향했고, 크라수스의 군단이 그들을 추격했다.
로마 군단이 주력군에서 분리된 반란군의 일부를 따라잡자, 스파르타쿠스 군 내부의 규율이 무너지면서 소규모 집단들이 독립적으로 로마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파르타쿠스는 군대를 돌려 전력을 다해 로마 군단에 맞서 최후의 저항을 펼쳤으나, 반란군은 완전히 격파되었고 대다수가 전장에서 사망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전 71년의 최후의 전투는 현재 세네르키아 지역의 셀레강 우안, 올리베토 치트라와의 경계선부터 칼라브리토까지, 즉 당시 루카니아의 일부였던 하이 셀레 계곡의 콰글리에타 마을 근처에서 벌어졌다. 이 지역에서는 1899년부터 로마 시대의 갑옷과 검이 발견되었다.
플루타르코스, 아피아노스, 플로루스는 모두 스파르타쿠스가 전투 중에 사망했다고 기록하지만, 아피아노스는 그의 시신이 결코 발견되지 않았다고도 전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는 결전을 앞두고 자신의 말을 끌어내어 베어버리며 "이기면 말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고, 지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한 뒤 보병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크라수스를 향해 돌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소대장 두 명을 죽인 뒤 동료들이 도망치는 와중에도 전장에 남아 많은 로마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마침내 쓰러졌다. 아피아노스는 그가 "적에게 포위되어 창에 다리를 다쳐 무릎을 꿇고서도 방패를 앞에 들고 계속 싸웠다"고 전하며, 이 전투 묘사는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이 전투를 묘사한 벽화와도 일치한다. 플로루스는 "스파르타쿠스는 마치 장군처럼 용감하게 전선에서 싸웠다"고 기록했다.
4.6. 반란 진압 이후의 보복
반란 진압 후, 크라수스의 군단에 의해 사로잡힌 약 6,000명의 반란군 생존자들은 로마에서 카푸아에 이르는 160934 m (100 mile) 이상의 아피아 가도를 따라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이 잔혹한 처벌은 로마 사회에 노예 반란의 재발을 막기 위한 경고의 메시지였다. 제3차 노예 전쟁 진압 이후 고대 로마 시대에 다시는 대규모 노예 반란이 발생하지 않았다.
5. 동기와 목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추구했던 구체적인 목적과 그에 대한 역사적 해석은 고대 사료들 사이에서도 차이를 보이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5.1. 역사적 해석의 차이
고대 역사가들은 스파르타쿠스의 동기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스파르타쿠스의 어떤 행동도 그가 로마 사회를 개혁하거나 노예제 폐지를 목표로 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지는 않는다.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쿠스가 북쪽의 갈리아 키살피나로 탈출하여 병사들을 각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를 원했다고 기록한다. 만약 이탈리아 반도를 벗어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면, 두 집정관 루키우스 푸블리콜라와 그나이우스 클로디아누스가 지휘하는 군단을 격파한 후에도 알프스 산맥을 넘어갈 수 있는 명확한 통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스파르타쿠스가 남쪽으로 향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반면 아피아노스와 플로루스는 그가 로마 자체를 공격할 의도였다고 기록한다. 아피아노스는 또한 그가 나중에 그 목표를 포기했다고 언급하는데, 이는 로마인들의 두려움을 반영한 것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기원전 73년 말과 72년 초에 일어난 사건들, 즉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탈출 노예 집단들의 존재와 플루타르코스의 진술을 바탕으로 볼 때, 일부 탈출 노예들은 알프스를 넘어 탈출하기보다는 이탈리아를 약탈하는 것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 학자들은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노예들이 자유를 위해 알프스를 넘어 탈출하기를 원했던 반면, 크릭수스 휘하의 노예들은 이탈리아 남부에 남아 계속 약탈하고 전리품을 챙기기를 원했다는 파벌 분열이 실제로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5.2. 노예 해방과 사회 개혁
스파르타쿠스의 행동이 노예 해방이나 사회 구조 개혁을 목표로 했는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의 반란은 노예 소유 과두정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려는 피억압 민중의 투쟁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노예제도 자체를 폐지하려 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증거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의 투쟁은 후대에 노예 해방과 사회 개혁 운동에 큰 영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6. 유산과 평가
스파르타쿠스는 고대 로마 시대에는 '로마의 적'으로 간주되어 악명이 높았으나, 중세에는 잊혔다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특히 카를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으며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노동 계급의 상징이 되었다.
6.1. 고대 로마에서의 평가
로마인들은 스파르타쿠스를 '로마의 적'으로 간주하며 그의 반란을 로마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그러나 일부 로마 작가들은 그의 인품과 군사적 능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소 플리니우스는 로마 사회의 타락을 한탄하는 글에서 스파르타쿠스가 군중의 금은 사유를 금지했던 이야기를 언급하며 그를 "도망 노예임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의 위대함에 얼굴색을 잃게 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는 그의 저서 《전술론》에서 스파르타쿠스를 궁핍과 어려움을 견디는 인물로, 그의 전술이 자신이 아는 모든 장군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6.2. 현대적 재해석과 상징성
스파르타쿠스는 현대에 이르러 억압받는 자들의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18세기 볼테르가 그의 반란을 "역사상 유일하게 정당한 전쟁"이라고 평한 이래, 그는 카를 마르크스에 의해 "고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정한 대표자"이자 "고대 역사 전체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로 칭송받으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6.3. 정치 및 사회 운동에 미친 영향
스파르타쿠스는 좌익 혁명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특히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독일 스파르타쿠스단 (1915년-1918년)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1919년 1월 독일에서 발생한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는 스파르타쿠스 봉기라고 불렸다. 북미에서 가장 오래 운영되는 집단 운영 좌익 서점 중 하나인 스파르타쿠스 북스도 그의 이름을 기려 명명되었다.
또한, 아이티 혁명을 이끌고 아이티 독립을 이끈 투생 루베르튀르는 "검은 스파르타쿠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바이에른 일루미나티의 창시자인 아담 바이샤우프트는 서신에서 자신을 종종 스파르타쿠스라고 칭했다. 2010년 이탈리아 로사르노에서 발생한 이주 농업 노동자들과 지역 주민들 간의 폭동과 관련하여 스파르타쿠스를 연결하는 낙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는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이 체육 분야에서도 사용되었다. 스파르타키아드는 올림픽의 소련 블록 버전이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5년마다 열리는 대규모 체조 시범 행사에도 이 이름이 사용되었다. 캐나다 오타와 세너터스 하키팀의 마스코트인 스파르타캣(Spartacat)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7. 대중문화 속의 스파르타쿠스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는 그의 비극적인 삶과 자유를 향한 투쟁이라는 극적인 요소 덕분에 수많은 문학, 영화, 텔레비전, 음악, 그리고 기타 예술 작품의 영감이 되었다.
7.1. 문학
- 하워드 패스트의 역사 소설 《스파르타쿠스》 (1951년)는 1960년 동명의 영화의 원작이 되었다. 패스트는 매카시즘 시대에 반미 조사 활동 위원회에 명단 제출을 거부하여 수감되었을 때 이 소설을 구상했으며, 출판사를 찾지 못해 자비 출판했다. 이 소설은 스파르타쿠스의 항쟁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로마 귀족과 장군들의 기억과 회상을 기준으로 전개된다.
- 아서 쾨슬러는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소설 《검투사들》을 썼다.
- 스코틀랜드 작가 루이스 그래식 기번은 소설 《스파르타쿠스》를 썼다.
- 이탈리아 작가 라파엘로 조반뇰리는 1874년에 역사 소설 《스파르타쿠스》를 썼으며, 이 소설은 이후 많은 유럽 국가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 독일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1920년 이전에 그의 두 번째 희곡인 《스파르타쿠스》를 썼으며, 이는 나중에 《밤의 북소리》로 개명되었다.
- 라트비아 작가 안드레이스 우피츠는 1943년에 희곡 《스파르타쿠스》를 썼다.
- 폴란드 작가 할리나 루드니츠카는 1951년에 소설 《스파르타쿠스의 제자들》을 썼다.
- 일라이자 켈로그 목사의 《카푸아의 검투사들에게 보내는 스파르타쿠스》는 오랫동안 학생들이 웅변 기술을 연습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 이집트 현대 시인 아말 돈콜은 《스파르타쿠스의 마지막 말》을 썼다.
- 막스 갈로는 소설 《로마인들. 스파르타쿠스. 노예들의 반란》 (2006년)을 썼다.
- 히가시데 유이치로의 라이트 노벨 시리즈 《Fate/Apocrypha》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붉은 진영이 소환한 버서커 클래스 서번트로 등장한다. 애니메이션 각색판에서는 츠루오카 사토시가 일본어 성우를, 조시 토마르가 영어 성우를 맡았다. 이 버전의 스파르타쿠스는 모바일 RPG 《Fate/Grand Order》에도 등장한다.
- 벤 케인은 2012년에 소설 《스파르타쿠스: 검투사》와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썼다.
- 사토 켄이치는 2004년에 소설 《검투사 스파르타쿠스》를 썼다.
- 카와다의 만화 《반역하라》 (2022년)가 점프 GIGA에 실렸다.
7.2. 영화 및 텔레비전
- 1953년 영화 《로마의 죄악》은 리카르도 프레다가 감독했다.
- 1960년 영화 《스파르타쿠스》는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하고 커크 더글러스가 제작 총괄 및 주연을 맡았으며, 하워드 패스트의 소설 《스파르타쿠스》를 원작으로 한다.
- 1964년 영화 《스파르타쿠스와 열 명의 검투사》는 닉 노스트로가 감독했다.
- 패스트의 소설은 2004년 USA 네트워크에서 고란 비슈니치가 주연을 맡은 《스파르타쿠스》 미니시리즈로 각색되었다.
- 2007년-2008년 BBC의 다큐드라마 《영웅과 악당》의 한 에피소드에 스파르타쿠스가 등장한다.
- 스타즈 프리미엄 케이블 네트워크에서 2010년 1월부터 2013년 4월까지 방영된 텔레비전 시리즈 《스파르타쿠스》는 앤디 휘트필드와 이후 리암 맥킨타이어가 타이틀 롤을 맡았다. 이 시리즈는 잔인하고 선정적인 장면이 많아 TV-MA 등급을 받았으나, 연인과의 사랑, 검투사 간의 우정과 배신 등 흥미로운 요소가 많아 많은 것을 시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 2011년에는 2010년 시리즈의 전일담인 《스파르타쿠스: 갓 오브 아레나》가 방영되었다.
- 2012년에는 2010년 시리즈의 속편인 《스파르타쿠스 II》 (원제: Spartacus: Vengeance)가 방영되었다.
- 2013년에는 2010년, 2012년 시리즈의 속편인 《스파르타쿠스 III: 더 파이널》 (원제: Spartacus: War of the Damned)이 방영되었다.
- 히스토리 채널의 《바바리안 라이징》 (2016년)은 두 번째 에피소드 "반란"에서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를 다룬다.
- 시트콤 《아웃넘버드》의 다섯 번째 시리즈에서 벤 브록먼(대니얼 로체)이 뮤지컬 《스파르타쿠스》에서 스파르타쿠스 역을 맡았다.
- 《DC's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 시즌 6 프리미어에 스파르타쿠스가 등장하며, 숀 로버츠가 연기했다. 그는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잡아먹힌다.
7.3. 음악 및 발레
- 1956년 발레 《스파르타쿠스》는 소련 아르메니아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이 작곡했다.
- 1863년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가 "스파르타쿠스 서곡"을 썼다.
- "스파르타쿠스"의 "사랑 테마"는 작곡가 알렉스 노스의 히트곡이었으며 재즈 스탠더드가 되었다.
- 1975년 트리움비라트는 클래식 "프로그 록" 앨범 《스파르타쿠스》를 발매하며 상업적 성공의 정점을 찍었다.
- 호주 작곡가 칼 바인은 《레드 블루스》에서 "스파르타쿠스"라는 짧은 피아노 곡을 썼다.
- 팬텀 레지먼트 드럼 앤 버글 코프스의 쇼 "스파르타쿠스"는 2008년 드럼 코프스 인터내셔널 시즌의 챔피언십 쇼였다.
- 제프 웨인은 1992년에 그의 음악적 재해석인 《제프 웨인의 스파르타쿠스 음악 버전》을 발매했다.
- 얀 반 데르 로스트는 1988년에 교향시 《스파르타쿠스》를 작곡했다.
- 안주 미라 주연의 다카라즈카 가극단 뮤지컬 《스파르타쿠스》가 1992년에 공연되었다.
7.4. 기타 예술
- 비디오 게임**: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로마의 부흥》 확장팩 IV "로마의 적들"의 캠페인 3: 스파르타쿠스에서 플레이어는 스파르타쿠스 군대와 싸운다.
- 《스파르타쿠스 레전드》에서 스파르타쿠스는 엔드게임 보스로 등장한다.
- 《글래디호퍼스》에서 플레이어가 스파르타쿠스 반란 모드를 선택하면 스파르타쿠스 전쟁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커리어 모드에서 캐릭터 이름을 스파르타쿠스로 지정하면 스파르타쿠스의 검을 얻을 수 있다.
- 보드 게임**:
- 확장 가능한 미니어처 워게임 시스템 히어로스케이프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대천사 아이나르에 의해 죽기 전에 구출된 독특한 검투사 영웅으로 등장한다.
- 조각 및 회화**:
- 이탈리아 화가 니콜라 사네시 (1818년-1889년)의 19세기 작품인 《스파르타쿠스의 몰락》.
- 헤르만 포겔 (1882년)의 《스파르타쿠스의 죽음》.
- 데니스 포야티에의 스파르타쿠스 동상 (1830년).
8.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을 딴 장소 및 단체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은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지리적 명칭과 스포츠 클럽, 단체 등에 사용되어 그의 유산을 기리고 있다.
8.1. 지리적 명칭
- 리빙스턴섬의 스파르타쿠스 봉우리.
-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주 야시누바타 라이온의 스파르타크 마을.
- 소행성 (2579) 스파르타쿠스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8.2. 스포츠 클럽
전 세계적으로, 특히 구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많은 스포츠 클럽들이 로마 검투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러시아**:
-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축구 클럽
- FC 스파르타크 코스트로마, 축구 클럽
- PFC 스파르타크 날치크, 축구 클럽
- FC 스파르타크 블라디카프카스, 축구 클럽
- H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아이스하키 팀
- 스파르타크 상트페테르부르크, 농구 팀
- 스파르타크 테니스 클럽, 테니스 훈련 시설
- WB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여자 농구 팀
- 우크라이나**:
- FC 스파르타크 수미, 축구 클럽
- 스파르타크 이바노프란키우스크, 축구 팀
- 자카르파티아 우지호로드, 축구 클럽 (이전 명칭: 스파르타크 우지호로드)
- 스파르타크 리비우
- 스파르타크 키이우
- 스파르타크 오데사, 1941년 소련 전쟁 리그에 참가한 축구 팀
- 스파르타크 하르키우, 1941년 소련 전쟁 리그에 참가한 축구 팀
- 불가리아**:
- FC 스파르타크 바르나, 축구 팀
- OFC 스파르타크 플레벤, 축구 팀
- PFC 스파르타크 플로프디프, 축구 팀
- 스파르타크 소피아, 해체된 축구 팀
- 세르비아**:
- FK 스파르타크 수보티차, 축구 팀
- FK 라드니치키, 여러 팀
- 슬로바키아**:
- FC 스파르타크 트르나바, 축구 팀
- TJ 스파르타크 미야바, 축구 팀
- FK 스파르타크 브라블레, 축구 팀
- FK 스파르타크 바노프체 나트 베브라보우, 축구 팀
- 기타 국가**:
- 바른트 그린 스파르타크 FC, 잉글랜드 축구 팀
- 스파르타크 (카보베르데), 카보베르데 축구 팀
- FC 스파르타크 세메이, 카자흐스탄 축구 팀
9. 관련 항목
- 검투사
- 제3차 노예 전쟁
- 내란의 1세기
- 투생 루베르튀르
- 스파르타쿠스단
- 파비안 칸첼라라
- 아이소포스
- 플루타르코스
- 노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