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샤로프 라시도프는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까지의 초기 생애와 교육 과정을 보냈다.
1.1. 출생 및 가족
샤로프 라시도비치 라시도프는 1917년 10월 24일, 러시아 혁명 전날 우즈베키스탄의 지자흐 지역에 위치한 소붕가르리크 마을에서 가난한 우즈베크인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아버지 라시드 할릴로프와 어머니 쿠이시노이는 비록 가난했지만, 당시 드물게 글을 읽을 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으며, 여섯 자녀 모두 교육받기를 원했다. 라시도프의 아버지는 키질 카르본 집단농장의 농부였다.
1.2. 교육
라시도프는 1935년 지자흐 교육 대학을 졸업한 후 중등 학교 교사로 일했다. 이후 1941년 사마르칸트 주립대학교 어문학부를 졸업했으며, 1948년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전연방 당 학교를 통신으로 졸업했다.
1.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41년 사마르칸트 주립대학교 졸업 후 같은 해 제2차 세계 대전의 동부 전선으로 배치되어 하급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모스크바 전투에 참전하여 두 개의 적성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943년 전쟁 중 심한 부상을 입고 전역했다.
2. 초기 경력
군 복무를 마친 후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온 샤로프 라시도프는 교사, 언론인, 편집자로서 다양한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사마르칸트의 레닌 욜리(Lenin yoli) 신문 편집장으로 근무했으며, 이후 사마르칸트 지역 위원회 비서로 일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는 키질 우즈베키스탄(Qizil Oʻzbekistoni)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3. 정치 경력
샤로프 라시도프는 우즈베키스탄 공산당의 핵심 인물로 성장하여 장기간 공화국을 통치했다.
3.1. 우즈베크 SSR 내 경력
라시도프는 1947년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대의원으로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으며, 2기부터 9기까지 대의원을 역임했다. 또한 소련 공산당의 19차부터 24차 당 대회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1949년에는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작가 연맹 이사장이 되었으나, 1950년 이 직책에서 물러나 1959년까지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을 역임했다. 1956년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되며 권력을 계속 확대해 나갔다.
3.2.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
1959년 3월, 샤로프 라시도프는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되었고, 1983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하며 우즈베키스탄을 통치했다. 1961년에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
4. 우즈베키스탄 지도자로서의 통치
라시도프의 통치 기간 동안 우즈베키스탄은 정치, 경제, 외교,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4.1. 정치 및 통치
라시도프는 우즈베키스탄 정치에서 사마르칸트 파벌의 실질적인 지도자였으며, 특히 타슈켄트 파벌을 비롯한 다른 파벌들과 경쟁했다. 1959년 집권 후 그는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의 지도부에서 타슈켄트 파벌과 연계된 정치인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1969년에는 타슈켄트 파벌의 야드가르 나스리디노바와 페르가나 파벌의 라피크 니쇼노프, 부하라 파벌의 라흐몬쿨 쿠르보노프가 스포츠 행사에서 벌어진 반러시아 시위를 구실로 모스크바가 라시도프를 해임하도록 시도했으나, 라시도프는 이를 저지하고 권력을 유지했다. 이 사건의 주동자들은 우즈베키스탄 정치에서 힘을 잃었으며, 나스리디노바와 니쇼노프는 연방 차원 직책으로 옮겨졌고 쿠르보노프는 투옥되었다.
라시도프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며, 브레즈네프는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산업화 프로젝트에 자원을 할당하고 라시도프를 조사로부터 보호했다. 수십 년 동안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연방 내 다른 공화국들에 비해 극도로 높은 자율성을 누렸다. 다른 소련 정치인들이 KGB와 공산당 기구에 통제를 당할까 두려워했던 것과 달리,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 이들 기관조차도 라시도프를 두려워했다. 라시도프는 브레즈네프와의 긴밀한 관계 덕분에 다른 정치인들보다 훨씬 더 당 규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라시도프에게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사람들은 심한 보복을 당했으며, 라시도프는 '분할 통치' 방식을 이용해 정보원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측근들의 충성심을 확보했다. 그의 반대자들은 그가 공화국에 행사한 통제력 때문에 그를 지난 세기의 칸에 비유하기도 했다.
4.2. 경제 개발 및 프로젝트
라시도프의 재임 기간 동안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농업 분야뿐만 아니라 도시화와 산업화에서도 급속한 경제 성장을 경험했다. V.P. 치칼로프 기념 타슈켄트 기계 공장은 세계 최대 항공기 생산 업체 중 하나가 되었으며, 1969년에는 무룬타우 광산에서 금 채굴이 시작되어 소련에서 가장 중요한 광산 중 하나가 되었다.
1966년 타슈켄트 지진 이후 타슈켄트시는 재건되었고, 타슈켄트 지하철 건설 및 도시 확장을 비롯한 여러 사회 지향적 건설 프로젝트가 공화국 전역에서 진행되며 상당한 도시화를 겪었다.

라시도프의 또 다른 프로젝트는 크림 타타르족 망명자들을 카슈카다리야 주의 황량한 무바레크(Mubarek) 지역에 '정착'시키려는 무바레크 존(Mubarek zone) 계획이었다. 무바레크 지역은 크림 타타르족이 오랫동안 갈망했던 해안가의 고향과는 전혀 달랐고, 기후도 거주하기에 부적합했다. 대부분의 크림 타타르족은 이 프로젝트를 모스크바로부터 자금을 빼내기 위한 라시도프의 또 다른 사기로 간주했으며, 중앙아시아의 어떤 곳이든 자신들의 "진정한" 고향이라는 주장을 국수주의적이라고 여겼다. 이는 노동권과 환경에 대한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소수 민족에 대한 부당한 정책의 사례로 비판받았다.
4.3. 외교 활동
라시도프는 활발한 국제 외교 활동을 펼쳤다. 1957년에는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수행하여 인도네시아, 미얀마, 중국, 베트남을 방문하며 반식민 운동 지도자들을 만났다. 1962년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 이전에 흐루쇼프가 쿠바에 파견한 소련 대표단의 일원이기도 했다.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동안 라시도프는 타슈켄트 평화 회담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 회담에서 양국은 1966년 타슈켄트 선언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협상은 공식적으로 알렉세이 코시긴이 주도했지만, 라시도프는 평화 과정에 더 깊이 관여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기간에는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학에서 아프가니스탄 학생들의 학업을 환영했으며,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정부 기관과 자주 서신을 교환하며 그들의 노력을 지지했다.
4.4. 문화 정책 및 발전
라시도프의 지도 아래 우즈베키스탄의 문화 분야는 크게 발전했다. 1966년에는 수도 타슈켄트가 재건되어 새로운 박물관, 공원, 극장, 기념물들이 건립되었다. 1970년에는 사마르칸트의 2500주년 기념 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되었고, 이를 기념하여 도시의 역사 박물관과 오페라 및 발레 극장이 개관했다. 1977년에는 중앙아시아 최초로 타슈켄트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1969년에는 사마르칸트에서 티무르 미술에 대한 국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으며, 1973년에는 저명한 학자 알비루니의 1000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열리고 장편 영화가 제작되었다. 라시도프의 지도 아래 우즈베키스탄의 연구소 수는 1960년 64개에서 1980년대 초 100개로 증가했다. 그는 중앙아시아 최초의 고고학 연구소 설립을 주도하여 1970년 사마르칸트에 문을 열었다. 1970년 우즈베키스탄에는 인구 10,000명당 192명의 학생이 있었다.
1970년부터 1980년까지 라시도프의 지원으로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세 편의 대형 역사 드라마 시리즈가 촬영되었다. 오딜 요쿠보프의 작품을 기반으로 한 "울루그베크의 보물", 아이베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10부작 비디오 영화 "알리셰르 나보이", 그리고 코밀 야신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17부작 시리즈 "불의 길" 등이 제작되었다. 또한 현대 우즈베키스탄 지역에서 태어난 세계 과학의 천재들에 대한 대형 역사 영화들도 처음으로 제작되었는데, 아비첸나에 대한 "천재의 젊은 시절"과 울루그베크에 대한 "울루그베크의 별" 등이 대표적이다.
1966년에는 우즈베크필름 스튜디오에 만화 영화 제작 워크숍이 설립되었고, 1968년에는 최초의 우즈베크 그림 만화 "용감한 참새"가 공개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애니메이션 워크숍이 인형극 및 그림 만화 연합으로 발전하여, 마브주르 마흐무도프의 "매와 별의 발라드", 나짐 툴라호자예프의 "사막의 호수", "호자 나스레딘" 등의 만화 영화가 제작되었다.
라시도프는 우즈베키스탄의 젊은 시인과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에르킨 보히도프("외즈베김" 시의 저자)와 압둘라 오리포프("외즈베키스탄" 시의 저자)와 같은 뛰어난 시인들이 우즈베크 문화계에 등장했다.
알리셰르 나보이 국립 문학 박물관, 사드리딘 아이니 가옥 박물관, 압둘리 이븐 시나 박물관(압쇼나), 레닌 박물관(타슈켄트) 등 여러 박물관이 개관했다. 1980년 라시도프의 주도로 우즈베크인과 타지크인 시인 오리프 굴하니의 100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사마르칸트에 굴하니 박물관이 개관했다. 또한 중요한 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세 개의 박물관-보호구역이 조성되었다. 히바의 "이찬 칼라"(1968년), 사마르칸트 연합 역사-건축 및 예술 박물관-보호구역(1982년), 부하라 주립 건축 예술 박물관-보호구역(1983년) 등이다.
샤로프 라시도프의 지도 아래 역사가들은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우즈베크어와 러시아어로 4권 분량의 "우즈베키스탄 역사"를 저술하고 출판했다. 라시도프 사망 이후에는 개별 시기에 대한 권을 제외하고는 다권 일반 우즈베키스탄 역사서는 더 이상 출판되지 않았다.
5. 부패 및 논란
라시도프의 통치 기간은 심각한 부패와 논란으로 얼룩졌다.
5.1. 족벌주의
소련 공산당은 라시도프의 부패와 족벌주의를 잘 알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이를 묵과했다. 그러나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광범위한 부패와 뇌물 수수에 대한 수천 통의 불만 편지가 중앙 기관에 전달되면서, 중앙 정부는 라시도프와 그의 간부들을 보다 심각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결국 라시도프는 예고르 리가초프에 의해 소환되었고, 리가초프는 그에게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민들이 그의 부패에 대해 불평하는 수많은 편지들을 보여주었다. 라시도프는 리가초프에게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리가초프는 유리 안드로포프를 대신하여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에 라시도프는 그 편지들이 중상모략이라고 주장했으나, 리가초프는 그가 조사를 받을 것이며 혐의가 거짓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라시도프는 후르산다 그푸로브나 라시도바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아들 일홈은 카라칼파크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제1서기였던 칼리베크 카몰로프의 딸과 결혼했다. 라시도프의 딸 중 한 명은 부하라 파벌의 이브로힘 무미노프(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과학 아카데미 부총재)의 조카와 결혼하여 사마르칸트-부하라 연합의 유대를 강화했다. 그의 형 사히브는 인민 감사관의 수장이었으며, 그의 아내의 조카는 타슈켄트 의과 대학 학장이었다. 라시도프는 총 족히 열네 명 이상의 친척들을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의 요직에 앉혔으며, 정부 전반에 걸쳐 임명된 친척의 정확한 수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5.2. 면화 스캔들 및 환경 문제
모스크바가 면화 생산량을 증대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라시도프 통치 하의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는 관개 및 수확된 토지의 기적적인 성장과 생산 및 효율성의 기록적인 향상을 보고하며 이에 응답했다. 그러나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주장하는 면화 생산량과 실제 생산량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모스크바의 면화 생산량 증대 압박은 공화국, 특히 카라칼파크스탄 지역에 심각한 생태적 파괴를 초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랄해로 흘러드는 강물은 면화밭 관개를 위해 전환되었고, 이로 인해 아랄해는 급격히 수축했다. 생태 상황이 악화되면서 면화 생산량은 감소했지만, 모스크바는 계속해서 더 많은 면화를 요구했다. 이러한 할당량을 충족하는 환상을 만들기 위해 공물, 뇌물, 위조 등 복잡한 시스템이 사용되었다. 우즈베키스탄 지도부는 이러한 과장된 수치를 이용하여 소련 중앙 기금에서 상당량의 부를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라시도프 가문으로 이전했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그의 사위가 스캔들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이 상황을 묵과했다. 브레즈네프 사망 후, 이 계획을 알고 있던 유리 안드로포프는 "면화 마피아"를 해체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이 스캔들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라시도프 사망 직후, 그가 곧 망신을 당할 것을 깨닫고 자살했다는 소문이 퍼졌으나, 이는 확인된 바 없다. 라시도프 사후 10년 동안 모스크바는 이전 10년 동안 약해졌던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중앙 통제권을 되찾으려 시도했다. 1986년, 공화국의 거의 모든 당 및 정부 지도부가 면화 생산량 수치를 조작하는 데 공모했다고 발표되었다. 모스크바에서 검찰이 파견되어 우즈베키스탄 지도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고, 이는 체포, 처형, 자살로 이어졌다. 브레즈네프의 사위인 유리 추르바노프가 사건에 연루되면서 부패가 얼마나 크게 확대되었는지는 결코 알려지지 않았다. 소련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이러한 부패가 연방 전체에 만연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즈베키스탄은 부패의 대명사가 되었다.
6. 개인 생활
샤로프 라시도프의 개인적인 삶은 가족 관계와 종교적 신념을 포함한다.
6.1. 가족
샤로프 라시도프는 후르산다 그푸로브나 라시도바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6.2. 종교관
우즈베키스탄은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라시도프는 소련 지도자로서 기대되는 세속적인 생활 방식을 따랐으며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주장하고 종교를 미신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는 공화국 내 종교에 대해 매우 관용적이었으며, 종교 기관의 발전뿐만 아니라 종교적 성격의 공개적인 축하 행사도 허용하여 타슈켄트를 소련 내 이슬람의 주요 중심지로 만들었다. 1980년 9월에는 헤지라 기념일을 맞아 대규모 국제 회의가 타슈켄트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이전 행정부에서 체육관이나 창고와 같은 세속적인 목적으로 전환되었던 많은 모스크가 복원되었다.
7. 문학 활동
샤로프 라시도프는 정치 경력과 병행하여 활발한 문학 창작 활동을 펼쳤다. 그의 첫 작품인 서사시 "체갈라치"(Chegarachi)는 1937년에 출판되었다. 1945년에는 대조국전쟁(Great Patriotic War영어,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시집을 발표했다. 이어서 미개간지 개발에 대한 단편 소설 "골리블라르"(Gʻoliblar)를 집필했다. 이후 그는 소설 "부론단 쿠칠리"(Boʻrondan kuchli), "쿠드라틀리 톨킨"(Qudratli toʻlqin), "골리블라르"(Gʻoliblar)를 각각 1958년, 1964년, 1972년에 출판했다.
8. 사망
샤로프 라시도프는 1983년 10월 31일 카라칼파크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방문하던 중 사망했다. 대부분의 자료는 그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보고 있으며, 계속되는 부패 조사의 스트레스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추정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가 부패 혐의를 피하기 위해 자살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이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의 뒤를 이어 이남존 우스만호자예프가 공산당 제1서기직을 맡았다.
9. 유산 및 평가
샤로프 라시도프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9.1. 긍정적 평가 및 복권
라시도프는 사망 직후에는 추앙받았으나, 곧 모스크바와 타슈켄트의 고위 정치인들로부터 비판이 허용되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 타슈켄트의 레닌 광장에 묻혔지만, 면화 스캔들이 더 큰 주목을 받고 그의 기록 말살형이 진행되면서 1986년 광장에서 유해가 발굴되어 그의 고향에 재매장되었다.
소련 해체 후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면서 라시도프의 이미지는 이슬람 카리모프에 의해 회복되었고, 그는 우즈베키스탄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기념되기 시작했다. 샤로프 라시도프 구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면화 스캔들은 러시아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지만, 우즈베크인들은 대체로 그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스캔들 때문에 라시도프를 지지했다. 이는 모스크바에 대한 승리로 간주되었으며, 많은 이들은 그의 부패가 공화국에 이롭고 우즈베키스탄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지자흐에는 그의 기념 박물관이 있다.
9.2. 비판 및 논쟁
라시도프의 통치 기간 동안 발생한 심각한 부패,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 그리고 아랄해의 환경 파괴는 그의 주요 비판 대상이다. 특히, 과도한 면화 생산 목표 달성을 위한 통계 조작과 이로 인한 강물의 전환은 아랄해를 심각하게 고갈시켰고, 이는 지역 사회와 환경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또한, 크림 타타르족 망명자들을 황량한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킨 무바레크 존 프로젝트는 소수 민족 정책에 대한 논쟁의 여지를 남겼다. 그의 족벌주의 또한 권력 남용과 친족 등용을 통해 정부 내 영향력을 확장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소련 중앙 정부는 라시도프의 부패와 족벌주의를 초기에는 묵인했지만, 수많은 시민 불만 제기 이후 조사에 착수했으며, 그의 사망 후 대규모 숙청이 이어지기도 했다.
10. 수상 경력
샤로프 라시도프는 생전에 수많은 영예와 상을 받았다.
- 사회주의 노동영웅 2회 (1974년 12월 30일, 1977년 11월 4일)
- 레닌 훈장 10회 (1950년 1월 16일, 1957년 1월 11일, 1965년 3월 1일, 1967년 11월 4일, 1971년 12월 2일, 1973년 12월 10일, 1974년 12월 30일, 1976년 12월 25일, 1977년 11월 4일, 1980년 3월 6일)
- 10월 혁명 훈장 (1982년 3월 5일)
- 노동적기훈장 (1951년 12월 6일)
- 적성훈장 2회 (1942년 8월 28일, 1946년 1월 23일)
- 명예의 휘장 훈장 (1944년 12월 25일)
- 레닌상 (1980년)
- 알리셰르 나보이 이름을 딴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국립 건축상 (1994년 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