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사이토 마코토(斎藤 実사이토 마코토일본어)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이자 관료, 정치인이다. 1858년 무쓰국 이사와군 미즈사와번(현 이와테현 오슈시 미즈사와)의 몰락한 사족(士族)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도미고로(富五郎)였으나, 해군병학교 졸업 후 마코토(實)로 개명했다. 그는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통해 국제적인 안목과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추며 자수성가했다.
사이토는 청일 전쟁에서 두 척의 순양함 함장으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빠르게 승진하여 1900년에는 해군 소장, 1904년 러일 전쟁 중에는 해군 중장에 올랐다. 1906년부터 1914년까지 약 8년간 해군대신을 역임하며 일본 해군의 확장을 주도했으나, 지멘스 사건에 연루되어 사임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총독을 지냈다. 3·1 운동 직후인 1919년부터 1927년까지 제3대 총독으로 재임하며 이른바 '문화통치'를 추진했다. 이는 무단 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강렬한 저항을 무마하고 식민 지배를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기만적 유화책으로 평가된다.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제5대 총독으로 다시 재임하며 조선 통치에 깊이 관여했다.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암살된 후 제30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여 1934년까지 재임했다. 그의 내각은 만주국 승인과 국제연맹 탈퇴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총리 사임 후 1935년부터 1936년까지 내대신으로 재직했으나, 1936년 2·26 사건 당시 황도파 청년 장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는 다카하시 고레키요와 함께 쇼와 시대 일본의 주요 정치인이자 마지막으로 암살당한 전직 총리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사이토 마코토는 안세이 5년 음력 10월 27일(1858년 12월 2일) 무쓰국 이사와군 시오가마촌(현 이와테현 오슈시 미즈사와 요시코지)에서 센다이번의 가신이자 미즈사와 다테씨를 섬기던 사족 사이토 고요(斎藤高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이토 가문은 미즈사와 다테씨 가신단 808가 중 15위의 높은 서열을 가진 명문가인 '니방차쿠자(二番着坐)' 10가문 중 하나였다. 그의 부친 고요는 미즈사와번의 메쓰케(目付)와 고쇼가시라(小姓頭)를 지었고, 메이지 유신 후에는 이와테현 경찰관으로 일했다. 사이토 씨족의 시조는 사이구료의 후지와라노 노리모치의 5세손인 다케다 시로 요리모토(竹田四郎頼基)의 일족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봉행인(奉行人)을 많이 배출했다. 사이토 마타시로 모토나가(斎藤又四郎基長)가 가마쿠라 함락 후 오슈로 가서 루스씨(후의 미즈사와 다테씨)의 휘하에 들어간 것이 시조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은 도미고로(富五郎)였으나, 해군병학교 졸업 후 마코토(實)로 개명했다. 그는 1873년(메이지 6년) 10월 27일 해군병학료(후의 해군병학교)에 입학했다. 일찍이 1872년(메이지 5년) 육군유년학교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한 이력이 있다. 1879년(메이지 12년) 해군병학교 6기생으로 졸업했으며, 17명 중 3등을 차지하며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 동기생으로는 야마우치 만주지, 사카모토 도시야쓰 등이 있으며, 이들은 '해군의 3천재'라고 불렸다. 1882년 9월 8일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3. 군인 경력
사이토 마코토는 탁월한 능력과 주변의 추천을 바탕으로 빠른 승진을 거듭하며 해군 내에서 중요한 보직들을 역임했다.
3.1. 초고속 승진 및 러일 전쟁

1884년 2월 25일 해군 중위로 승진했으며, 같은 해 9월 19일부터 1888년 10월 26일까지 4년간 미국에 유학하며 주미공사관 부무관을 겸임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유창한 영어 실력과 국제적인 시야를 갖추게 되었다. 1888년 일본으로 돌아온 후 군령부 해군 참모본부원으로 근무했다. 1886년 7월 14일 해군 대위, 1893년 12월 20일 해군 소좌로 진급했다.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1894년 9월 7일 시종무관으로 임명되었고, 1895년 5월에는 상비함대 참모를 지냈다. 1896년 11월 6일 전함 후지의 회항 위원(후지 부함장)으로 임명되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 1897년 10월 31일 요코스카시에 도착했다. 1897년 12월 1일 해군 중좌, 그리고 한 달 뒤인 12월 27일에는 해군 대좌로 파격적인 초고속 승진을 기록하며 방호순양함 아키쓰시마 함장을 맡았다. 이후 1898년 10월 1일에는 2등 순양함 이쓰쿠시마 함장을 역임했다.
1898년 11월 10일 제1차 오쿠마 내각의 야마모토 곤노효에 해군대신의 추천으로 해군 차관에 취임하여 1906년 1월까지 재임했다. 1900년 5월 해군 소장으로, 1904년 6월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러일 전쟁 당시 많은 해군 간부들이 전선에 배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군성 군무국장과 함정본부장을 겸임하며 야마모토 해군대신을 보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05년 2월부터 11월까지 해군 교육본부장까지 겸임하는 등 해군 내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3.2. 해군대신 역임
러일 전쟁 종전 후,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뒤를 이어 1906년 1월 7일 제1차 사이온지 내각에서 해군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제2차 가쓰라, 제2차 사이온지, 제3차 가쓰라, 제1차 야마모토 내각에 걸쳐 1914년 4월 16일까지 8년간 연속으로 해군대신직을 수행하며 해군력 확장에 지속적으로 힘썼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일본 해군은 강력한 해군으로 성장했다.
1907년 9월 21일에는 화족 제도에 따라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1912년(다이쇼 원년) 10월 16일에는 해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1914년 4월 16일, 지멘스 사건이라는 해군 내의 독직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해군대신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4. 정치 경력
사이토 마코토는 해군 퇴역 후에도 정치 활동을 이어가며 일본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특히 그는 조선총독과 내각총리대신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역임하며 일본의 식민 통치 및 대외 정책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4.1. 조선총독 재임

1919년(다이쇼 8년) 무단 통치가 비판받던 하세가와 요시미치 육군대신에 이어, 현역 해군대장으로 복귀하여 제3대 조선총독에 취임했다. 이는 3·1 운동 이후 조선인의 독립 운동이 격화되자, 일본이 기존의 강압적이고 무단적인 통치 방식으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부임 직후인 1919년 9월 2일 조선의 남대문역에 내리던 중 강우규 의사로부터 폭탄 테러를 당했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사이토는 조선총독으로서 이른바 '문화통치'를 추진했다. 이는 기존의 헌병 경찰제를 폐지하고 일반 경찰제를 도입하며, 조선인에게도 명목상 관료 임용의 기회를 주고, 교육 및 언론 활동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는 등의 유화적인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표면적으로는 조선인의 불만을 달래는 것처럼 보였지만, 본질적으로는 조선인의 민족 운동을 분열시키고, 일제의 식민 지배를 더욱 교묘하고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기만적인 정책이었다. 그의 정책은 조선 사회에 대한 일본의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조선의 자원 수탈을 용이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25년(다이쇼 14년) 4월에는 자작으로 작위가 높아졌다.
사이토는 1919년부터 1927년까지 1차 재임 기간을 마친 후, 1927년 제네바 해군 군축 회의에 일본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했으며 이후 추밀고문관이 되었다. 1929년(쇼와 4년) 다시 조선총독으로 재임명되어 1931년(쇼와 6년)까지 제5대 조선총독을 역임하며 조선 통치에 깊이 관여했다.
4.2. 내각총리대신 재임

1932년(쇼와 7년) 5월 15일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극단적인 해군 청년 장교들에 의해 암살당하는 5·15 사건이 발생했다.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는 군부의 정부 장악을 막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사이토 마코토가 이누카이의 후임자로 선택되었다. 그는 타협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5월 26일 제30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으며, 같은 해 7월 6일까지 외무대신을 겸임했다.
사이토 내각은 입헌정우회와 입헌민정당 양측에서 대신을 영입한 거국 일치 내각(연립 내각)이었다. 이 내각은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대장대신으로 유임되어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지속했다. 그 결과 1933년(쇼와 8년)에는 다른 주요 국가들에 앞서 쇼와 공황 이전의 경제 수준을 회복하며 국내 안정에 기여했다.
사이토 내각은 1931년 9월 발발한 만주사변으로 혼란스러운 정국에 대처해야 했다. 1932년 9월 15일 일만 의정서를 체결하여 만주국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이후 국제연맹 총회에서 일본의 주장이 거부되자 1933년 3월 27일 일본 정부는 국제연맹 탈퇴를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일부 군인들은 사이토가 본래 자유주의 성향이 강하고,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이 육군 예산 협상에서 아라키 사다오 육군대신을 따돌린 것에 반발하여 각료들의 스캔들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4년(쇼와 9년), 데이진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스즈키 상점의 파산으로 타이완 은행의 담보가 된 자회사 제국 인조 견사 주식과 관련하여, 재계 그룹 '반초카이(番町会)'가 주식 매입 후 제국 인조 견사의 증자로 주식 이익을 얻은 문제로, 제국 인조 견사 사장 다카기 후쿠테이(高木復亨) 등 16명이 기소된 사건이었다. 사이토 내각은 이 사건에 대한 기강상의 책임을 지고 1934년 7월 8일 총사퇴했으며, 오카다 게이스케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 데이진 사건은 265차례의 공판 끝에 1937년 10월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는 히라누마 기이치로 파 검찰, 육군 장교, 입헌정우회 우익 인사들이 내각을 전복시키기 위해 꾸민 음모였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4.3. 내대신 재임
총리 사임 후 사이토는 1935년 12월 26일 내대신에 취임하여 궁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1936년 2월 26일 암살당하기 전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다. 내대신으로서 그는 천황을 보좌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5. 인물과 사상

사이토 마코토는 매우 강인한 체력과 친화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 젊은 시절에는 말랐던 그는 미국 유학 당시 하숙집에 매일 맥주를 배달시켜 마시며 강인한 체력을 길렀다. 조선총독 시절에도 일본에서 도착한 당일 오후부터 곧바로 집무를 시작할 만큼 그의 근면함은 뛰어난 체력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는 술을 즐겼으며, 청일 전쟁 당시 히로시마에 설치된 대본영에서 해군 참모본부 참모로 근무할 때 밤샘하여 술을 마신 후 다음 날 아무렇지 않은 듯 메이지 천황 앞에 출사했다는 일화가 있다. 메이지 천황은 휴식 시간에 사이토를 불러 좋아하는 게마리 상대를 하라고 했고, 술이 덜 깬 사이토는 그만 허둥대다 움직이지 못했다. 메이지 천황은 사이토의 밤샘 음주를 알아챘지만 아무런 질책 없이 웃기만 했다고 한다. 사이토는 이 사건 이후 한동안 금주했으며, 메이지 천황의 관대한 태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사이토는 또한 뛰어난 영어 실력을 자랑했다. 역대 총리들 중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영어 구사 능력을 지녔으며, 공식 회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요인과의 대화를 통역 없이 진행했다. 심지어 일기까지 영어로 쓸 정도였다. 친영미파였던 그와 마찬가지로 미국 체류 경험이 있고 친영미파였던 다카하시 고레키요와는 개인적으로도 매우 친한 친구 사이였다.
1914년(다이쇼 3년), 해군대신을 사임한 후 지바현 이치노미야정(一宮町) 신지에 별장을 소유하게 되었다. 구주쿠리 해변에 인접한 이 별장에서 그는 1년의 대부분을 보냈다. 낡은 양복에 짚신을 신고 수건을 허리에 매달고 소나무 가지치기나 울타리 수리 등 정원 가꾸기를 주로 하며 지냈다. 한 번은 현지 서장이 그를 보고 '할아버지'라고 불렀다가, 그가 뒤돌아보는 얼굴을 보고 크게 당황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별장 소유와 관련된 인연으로 근처의 타마사키 신사에는 그가 봉납한 편액이 걸려 있다.
사이토는 매우 꼼꼼하여 선물에 대해서는 반드시 답장을 보냈으며, 휘호를 자주 부탁받았지만 본래 성격상 거절하지 못하고 주말에는 별장에 틀어박혀 글을 쓰는 날들이었다고 한다. 자신에게 온 서신이나 서류를 꼼꼼하게 보관하는 성격으로, 분류 작업도 모두 직접 처리했다. 이 때문에 개인의 세부 사항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실수를 거의 하지 않았다. 사이토가 정리, 보관한 서한류는 대부분 국립국회도서관에 기증되어 근대사의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5.1. 조선총독 시대의 평가
사이토 마코토의 조선총독 재임 기간은 일본의 식민 통치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그는 기존의 무단적이고 강압적인 통치에서 벗어나 '문화통치'를 내세웠다. 1926년 영국의 식민지 연구 전문가인 앨런 아일랜드는 사이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1922년 조선에서는 반일 급진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사이토 총독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총독은 공명정대하고 관대한 정책으로 조선을 통치하려는 진실한 마음으로 생기 넘쳤으며, 그는 탁월한 개혁을 이루었다. 교육 문제에 있어서는 사람들의 교양에 대한 의지에 아낌없이 힘을 보탰고, 정치적 야심에 대해서는 무익하게 독립을 바라는 마음을 부추기는 어떤 것도 단호히 반대하는 한편, 열렬히 지방 자치를 촉진하고, 일본인과 조선인 관계에 우호와 협력의 정신을 스며들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사이토의 '문화통치'는 조선인에 대한 강압적 지배를 보다 은밀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전환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크다. 이는 조선 민족의 독립 의지를 약화시키고,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며 장기화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이었다. 특히, 조선인의 민족 운동을 탄압하고 조선의 자원을 수탈하는 식민 통치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선인에게 더욱 교묘한 형태로 차별과 억압을 가했다는 점에서 비판적 평가가 지배적이다.
6. 최후
총리 사임 후 내대신에 취임한 사이토 마코토는 황도파 육군 중견 및 청년 장교들로부터 천황을 현혹시키는 중신 블록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제거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사이토가 본래 자유주의 성향이 강하고, 입헌정우회와 입헌민정당의 합당 내각을 주도하며 군부의 영향력을 제한하려 했다고 판단했다. 특히 친영미파 인사로 간주되었던 점도 암살의 표적이 된 배경 중 하나였다.
사건 며칠 전, 경시청은 사이토에게 "육군 일부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으니, 사저로 돌아가지 않거나 사저 경비를 대폭 강화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경고했다. 2·26 사건은 기본적으로 비밀리에 계획되었지만, 정보의 일부가 유출되어 경찰은 육군 청년 장교들이 곧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음을 예상하고, 그들의 주요 표적 중 하나인 사이토에게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그러나 사이토는 "걱정할 것 없다. 나는 죽어도 괜찮다. 죽어도 상관없지 않은가"라고 침착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사건 전날 밤, 사이토는 지일파인 조지프 그루 주일대사의 초대로 미국 대사 공저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공저 내에서 미국 영화 《떠오르는 공주(浮かれ姫君)》를 감상했다. 원래는 중간에 자리를 떠 별장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그루 대사와의 즐거운 대화가 이어져 결국 영화를 끝까지 보고 늦은 밤에 귀가하여 별장행은 다음 날로 미루었다. 만약 사이토가 예정대로 도쿄를 떠났더라면 사건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936년 2월 26일 새벽, 사카이 나오(坂井直) 중위, 다카하시 다로(高橋太郎) 소위, 야스다 유우(安田優) 소위가 이끄는 150명의 병사들이 중기관총 4정, 경기관총 8정, 소총, 권총 등을 들고 사이토의 저택을 두 갈래로 나누어 습격했다. 자신의 방에 있던 사이토는 저항할 틈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살해당했다.
사이토 마코토의 양자인 사이토 히토시(斎藤斉)의 처남이자 작가인 아리마 요리요시(有馬頼義)는 사건 당일 옆집 의형의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사이토의 아내 사이토 하루코(斎藤春子)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아리마에 따르면, 병사들은 침대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있던 사이토에게 경기관총을 발사했고,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시체에 다시 총격을 가했다. 하루코 여사는 총격 당시 사이토의 몸을 덮치며 "나도 쏴라!"라고 외쳤고, 사이토의 죽음을 확인하려던 병사의 총검에 부상을 입었다. 하루코 여사는 이후 1971년 98세의 나이로 장수했지만, 말년까지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사이토의 유체에는 47군데의 탄흔과 수십 군데의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향년 79세였다. 그가 신임하던 중신들이 살해당하자 쇼와 천황은 크게 격노하여 반란군 진압을 명령했다. 사이토는 다마 영원과 고향인 오야마자키 사이토 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와 영결식은 같은 해 3월 22일 쓰키지 혼간지에서 거행되었으며, 기도 고이치는 "국민장과 같은 분위기"라고 기록했다. 쇼와 천황은 사이토의 장례식에 이례적인 조의를 표했다. 그의 생전 서신과 집무 자료는 이와테현 오슈시 미즈사와의 사이토 실 기념관과 도쿄도 지요다구 나가타초의 국립국회도서관에 분산 보존되어 있다.
7. 사후 평가와 비판
사이토 마코토는 일본의 해군 장성과 정치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7.1. 긍정적 평가
사이토 마코토는 해군 차관 및 해군대신으로서 일본 해군의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러일 전쟁 당시 해군 전선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후 제네바 해군 군축 회의에서는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국제적인 외교력을 발휘했다. 그의 유창한 영어 실력과 국제적인 시야는 외교 무대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총독으로 재임 시에는 '문화통치'를 통해 기존의 무단적이고 강압적인 통치 방식에서 벗어나 유화적인 정책을 시도했다. 이에 대해 1926년 영국의 식민지 연구 전문가 앨런 아일랜드는 "사이토 총독은 공명정대하고 관대한 정책으로 조선을 통치하려는 진실한 마음으로 생기 넘쳤고, 탁월한 개혁을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교육에 대한 의지에 아낌없이 힘을 보탰고, 지방 자치를 촉진하며 일본인과 조선인 관계에 우호와 협력의 정신을 심어주려 했다"고 덧붙였다.
내각총리대신 재임 기간 동안에는 5·15 사건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고,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과 함께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통해 쇼와 공황 이전의 경제 수준을 회복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경제 안정에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당시 군부의 강경한 태도에 대항하여 민간 정치의 쇠퇴를 늦추려 노력했던 중도 온건파의 한 인물로도 평가된다.
7.2. 비판과 논란
사이토 마코토의 행적은 여러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그의 조선 통치와 관련된 역사적 비판이 두드러진다.
첫째, 조선총독으로서 추진한 '문화통치'는 표면적으로는 유화적이었으나, 본질적으로는 조선 민족의 독립 의지를 약화시키고 식민 지배를 합리화 및 장기화하기 위한 기만적인 정책이었다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헌병 경찰제를 폐지하고 일반 경찰제를 도입했으나 경찰력은 오히려 증강되었고, 조선인 관리 임용 기회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언론의 자유도 허울뿐이었으며, 민족 분열을 조장하고 친일 세력을 양성하는 데 활용되었다. 이는 조선인의 민족 운동을 효율적으로 탄압하고 일본의 경제적 수탈을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였다는 점에서 식민 지배의 폭력성을 더욱 은밀하게 포장한 것으로 평가된다.
둘째, 군인 경력에서는 1906년부터 1914년까지 8년간 해군대신을 역임하며 일본 해군의 확장을 주도한 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과 침략 전쟁 준비에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14년에는 해군 내 지멘스 사건에 연루되어 사임했으며, 이는 그의 도덕성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셋째, 내각총리대신 재임 시 만주국 승인과 국제연맹 탈퇴를 단행한 것은 일본의 고립주의와 군국주의로의 전환을 가속화하는 중요한 결정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데이진 사건으로 내각이 총사퇴한 것 역시, 검찰 내 히라누마 기이치로 파, 육군 장교, 입헌정우회 우익 인사들이 내각을 전복시키기 위해 꾸민 음모였다는 시각이 제기되면서, 그의 내각이 당시 일본 정치의 불안정과 혼란 속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된다.
8. 영예
사이토 마코토는 평생 동안 일본 국내외에서 수많은 작위와 훈장, 기념장을 수여받으며 그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 분류 | 시기 | 내용 |
|---|---|---|
| 작위 | 1907년 9월 21일 | 남작 |
| 1925년 4월 9일 | 자작 | |
| 일본 훈장 | 1893년 5월 26일 | 훈6등 서보장 |
| 1896년 5월 23일 | 공4급 금치훈장, 욱일장 | |
| 1906년 4월 1일 | 훈1등 욱일대수장, 공2급 금치훈장 | |
| 1924년 2월 11일 | 욱일동화대수장 | |
| 1936년 2월 26일 (사후) | 대훈위국화대수장 | |
| 일본 기념장 | 1895년 11월 18일 | 메이지 27·8년 종군기장 |
| 1902년 5월 10일 | 메이지 33년 종군기장 | |
| 1906년 4월 1일 | 메이지 37·8년 종군기장 | |
| 1912년 8월 1일 | 한국 병합 기념장 | |
| 외국 훈장 | 1893년 6월 19일 | 프랑스: 아카데미 기장 오피시에 |
| 1901년 4월 4일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 | |
| 1906년 6월 19일 | 영국: 바스 훈장 그랜드크로스 | |
| 1907년 2월 26일 | 프로이센 왕국: 적수리 훈장 1등 훈장 | |
| 1907년 7월 1일 | 이탈리아 왕국: 성 마우리치오 & 라자로 훈장 1등 훈장 | |
| 1907년 12월 17일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 | |
| 1908년 3월 3일 | 대한제국: 이화대훈장 | |
| 1908년 5월 1일 | 러시아 제국: 백수리 훈장 | |
| 1911년 5월 31일 | 네덜란드: 오라녜 나사우 훈장 1등 훈장 | |
| 1913년 3월 22일 | 칠레: 공로 훈장 1등 기장 | |
| 1922년 5월 1일 | 교황청: 성 실베스테르 교황 기사단 훈장 그란크로아 | |
| 1932년 7월 7일 | 교황청: 비오 9세 훈장 그란크로아 |
9. 대중문화 속의 사이토 마코토
사이토 마코토는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일본 근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에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 《천황·황후와 청일전쟁》(1958년 영화) - 호소카와 도시오 연기
- 《연회》(1967년 영화) - 아오노 헤이기 연기
- 《대목욕탕》(1970년 NHK 드라마) - 다나베 야스오 연기
- 《아내들의 2·26 사건》(1976년 NHK 드라마) - 사가 젠베이 연기
- 《바다는 되살아난다》(1977년 TBS 드라마) - 구사나기 고지로 연기
- 《동란》(1980년 영화) - 야마모토 다케시 연기 (내대신 역)
- 《산하 불타다》(1984년 NHK 대하드라마) - 야마모토 다케시 연기
- 《226》(1989년 영화) - 다카기 신 연기
- 《야인시대》(2002년 SBS 드라마) - 전무송 연기
- 《그 전쟁은 무엇이었나 미일개전과 도조 히데키》(2008년 TBS 드라마) - 모리시타 아키라 연기
- 《낙일 불타다》(2009년 TV 아사히 드라마) - 오리모토 준키치 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