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빈센트 미넬리(Vincente Minnelli)는 Lester Anthony Minnelli레스토 니 앤서니 미넬리영어라는 본명으로 1903년 2월 28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나 1986년 7월 25일 83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주 비벌리힐스에서 사망한 미국의 영화 감독이자 연극 감독이다. 반세기 이상에 걸친 그의 경력 동안 그는 뮤지컬 영화에 대한 세련된 혁신과 예술성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2024년 기준으로 그의 영화 6편이 미국 국립영화등기부에 보존작으로 선정되었다.
미넬리는 아버지가 공동 설립한 미넬리 브라더스 텐트 극단에서 연극 배우로 데뷔했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시카고의 마셜 필드 백화점에서 쇼윈도 디자이너로 일하며 예술적 감각을 키웠다. 이후 뉴욕으로 옮겨 라디오 시티 뮤직홀의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다 1935년 연극 연출가로 데뷔하며 브로드웨이에서 명성을 쌓았다.
1940년 MGM 스튜디오에 합류하여 영화 감독 경력을 시작했으며, 1943년 영화 '하늘의 오두막'으로 감독 데뷔했다. 특히 배우 주디 갈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1944)와 같은 걸작을 만들었으며, 이 인연으로 결혼하여 딸 라이자 미넬리를 두었다. 1950년대는 미넬리 감독의 전성기로, '파리의 미국인'(1951)과 '지지'(1958)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특히 '지지'로는 아카데미 감독상까지 수상하며 그의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뮤지컬 영화뿐만 아니라 '악인과 미녀'(1952)와 같은 멜로드라마, '삶에 대한 열정'(1956)과 같은 전기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도 뛰어난 연출을 선보였다. 말년에는 스튜디오와의 갈등과 일부 작품의 상업적 부진을 겪기도 했으나, 영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2. 초기 생애
2.1. 출생과 가족 배경
빈센트 미넬리는 1903년 2월 28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마리 에밀리 오딜 르보(Marie Émilie Odile Lebeau)와 빈센트 찰스 미넬리(Vincent Charles Minnelli)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례를 받았고, 알려진 네 아들 중 막내였으나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들은 두 명뿐이었다. 그의 어머니 마리 에밀리 오딜 르보는 무대 이름인 미나 제넬(Mina Gennell)로 활동했으며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프랑스계 캐나다인 혈통이었으며, 어머니를 통해 미시간주 매키나크섬에서 태어났기에 애니시나베족 혈통일 가능성이 있다.
그의 아버지 빈센트 찰스 미넬리는 미넬리 브라더스 텐트 극단(Minnelli Brothers' Tent Theater)을 공동 설립하고 음악 지휘자로 활동했다. 두 사람은 뮤지컬 리뷰에서 처음 만났으며, 처음에는 반주를 두고 다투었으나 점차 가까워져 1894년 11월에 결혼했다. 결혼 후 그의 어머니는 미넬리 브라더스 극단에 합류했다.
그의 친할아버지 빈첸초 미넬리(Vincenzo Minnelli)와 큰아버지 도메니코 미넬리(Domenico Minnelli)는 시칠리아 출신의 혁명가들이었으며, 페르디난도 2세와 부르봉가의 지배에 대항한 1848년 시칠리아 독립 혁명으로 발생한 임시 시칠리아 정부가 붕괴한 후 시칠리아를 떠나야 했다. 도메니코 미넬리는 1848년 1월 12일 팔레르모 봉기를 조직하는 데 도움을 줄 당시 팔레르모의 그란 코르테 치빌레(Gran Corte Civile)의 부총장이었다. 부르봉 왕조가 다시 집권한 후 빈첸초는 18개월 동안 팔레르모 카푸친 카타콤베에 숨어 지내다 뉴욕행 증기선에 성공적으로 밀입국했다고 전해진다.
2.2. 어린 시절과 교육
미넬리는 세 살 때 아버지가 공동 설립하고 큰아버지와 함께 운영했던 미넬리 브라더스 텐트 극단에서 연극 '이스트 린'에 리틀 윌리 역으로 출연하며 무대 데뷔를 했다. 이 공연에서 그의 어머니는 레이디 이사벨과 마담 바인이라는 이중 역할을 연기했다. 흥미롭게도 미넬리는 자신의 역할이 죽는 장면에서 '배역에 몰입하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려' 캐릭터를 깨뜨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가족은 오하이오주 델라웨어로 이주했으며, 그는 세인트 메리 고등학교에서 3년을 보냈다. 세인트 메리 고등학교에는 12학년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마지막 학년을 델라웨어의 윌리스 고등학교에서 보냈고, 16세에 졸업했다. 재학 중 그는 학교 연극 'H.M.S. 피나포어'에 출연했으며, 델라웨어 오페라 하우스에서 '더 포춘 헌터'의 주연을 맡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미넬리는 시카고로 이주하여 어머니 쪽 할머니와 이모와 잠시 살았다. 직업을 구하던 중 그는 자신의 수채화 포트폴리오를 마셜 필드 백화점에 가져갔고, 쇼윈도 디스플레이 디렉터인 아서 발레르 프레이저(Arthur Valair Fraser)는 그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즉시 견습 쇼윈도 디자이너로 그를 고용했다. 마셜 필드 백화점에서는 1년에 네 번씩 계절에 맞춰 정교한 테마로 쇼윈도를 바꿨다. 미넬리는 처음에는 남성복 매장의 디자인을 맡았지만, 대신 가구와 장식용 골동품이 자주 재배치되는 와바시가의 쇼윈도 디자인을 요청했다.
이와 함께 미넬리는 시카고 미술 연구소에 등록하여 개인적으로 화가가 되려는 포부를 품었다. 그러나 그는 업무 일정과 교육 과정에 대한 흥미 부족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마셜 필드 백화점에서 일하는 동안, 한 시각장애인 여성이 래디컬 플레이하우스에서 연극 소품을 빌리러 왔고, 그녀는 미넬리에게 유진 오닐의 단막극을 공연하는 연기 그룹에 합류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넬리는 동의하여 오닐의 '십자가가 만들어진 곳'에서 은퇴한 선장 역할을 맡아 읽었다. 그는 이 연기 직업을 싫어했지만, 시카고의 극장가에 자주 드나들었다. 여가 시간에는 이나 클레어와 메리 내쉬를 비롯한 당대 극장 배우들의 수채화 스케치를 그렸고, 친구들의 격려로 백스테이지에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만큼 돈을 벌었다. 어느 날 백스테이지에서 그림을 팔던 중, 폴 스톤(Paul Stone)이라는 사진작가가 미넬리의 그림 구성에 감탄하여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훌륭한 사진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넬리는 마셜 필드 백화점 직장을 그만두고 스톤의 조수 사진작가로 일했다. 스톤은 시카고 극장가의 배우들과 사교계 인사들을 촬영하는 데 전문이었는데, 특히 연극계 유명인사, 사교계 부인, 결혼식 피로연을 촬영했다. 스톤의 레이모어 스튜디오에서 미넬리는 이나 클레어를 포함한 수많은 유명 인사들을 촬영하며 그들의 가장 좋은 각도를 포착했다. 미넬리는 "스톤의 사진은 부드러웠지만 초점이 선명하여 인쇄물로 재현될 수 있었다. 이는 나에게 분위기를 연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회상했다. 몇 달 후 스톤이 신경쇠약에 걸리자 미넬리가 그의 사진 업무를 인계받았다. 사진이 자신에게 적합한 직업이 아니라고 느낀 미넬리는 불만을 느끼기 시작했고, 미국의 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1911년 전기인 엘리자베스 로빈스 페넬과 조지프 페넬의 저작을 읽기 시작했다. 휘슬러의 예술 기법에 영감을 받은 미넬리는 인상주의와 초현실주의 화가들인 앙리 마티스, 마르셀 뒤샹,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에 몰두했다. 그는 또한 장 콕토와 루이스 부뉴엘의 실험 영화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술을 존경했다. 이 무렵 미넬리는 자신의 이름에서 레스터(Lester)를 빼고 "빈센트"(Vincente)로 바꿨는데, 마지막 'e'는 더 세련되고 우아하게 보이도록 추가된 것이었다.
3. 연극 경력
할리우드로 진출하기 전, 빈센트 미넬리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연극 연출가 및 디자이너로서 활발히 활동하며 그의 독특한 시각적 스타일을 확립했다.
3.1. 시카고 시기
미넬리는 고등학교 졸업 후 시카고로 이주하여 마셜 필드 백화점에서 견습 쇼윈도 디자이너로 일하며 예술적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이 백화점에서 1년에 네 번 바뀌는 정교한 계절별 테마의 쇼윈도 디자인을 담당했는데, 처음에는 남성복 매장을 맡았으나 나중에는 가구와 장식용 골동품이 자주 재배치되는 와바시가의 쇼윈도 디자인을 요청했다. 이 시기 그는 시카고 미술 연구소에 등록하여 화가의 꿈을 키웠으나, 바쁜 업무와 교육 과정에 대한 흥미 부족으로 중도에 그만두었다.
마셜 필드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래디컬 플레이하우스의 연기 그룹에 합류해 유진 오닐의 단막극에 출연했지만, 연기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그는 시카고 극장가를 자주 드나들며 당대 배우들의 수채화 스케치를 그렸고, 이를 백스테이지에서 팔아 수입을 얻었다. 이때 폴 스톤이라는 사진작가에게 발탁되어 그의 조수로 일하며 배우와 사교계 인물들을 촬영했다. 그는 스톤에게서 '분위기를 연출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회상했다. 스톤이 건강 문제로 일을 중단하자 미넬리가 그의 업무를 이어받았으나, 사진작가라는 직업에 만족하지 못했다. 이 시기 그는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전기를 읽고 앙리 마티스, 마르셀 뒤샹,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등 인상주의와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에 심취했으며, 장 콕토와 루이스 부뉴엘의 실험 영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술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본명인 레스터(Lester) 대신 "빈센트"(Vincente)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미넬리는 발라반 앤 카츠 극장 체인의 시카고 극장을 운영하는 프랭크 캄브리아(Frank Cambria)에게 접근하여 자신만의 의상 부서를 열고 자신이 운영하게 해달라고 제안했다. 캄브리아는 미넬리를 A. J. 발라반(A. J. Balaban)의 사무실로 데려갔고, 그는 의상 및 무대 디자이너로 고용되었다. 극장 프로덕션에 "맞춤형 터치"를 부여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의상 부서가 매우 적은 예산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에 놀랐다. 당시 시카고 극장의 연극 프로덕션은 일주일간 상연되었으며, 무대 세트와 의상은 해체되어 티볼리 극장과 업타운 극장에서 재사용되었다.
3.2. 뉴욕 브로드웨이 활동
1931년, 발라반 앤 카츠가 파라마운트 픽처스의 파라마운트-퍼블릭스 극장 체인과 합병되면서 미넬리는 주당 150 USD를 받고 뉴욕 연극 프로덕션에서 일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시카고를 떠나 그리니치 빌리지의 작은 아파트에 거주했다. 파라마운트에서 미넬리는 의상 분야에서만 일했으며, 무대 디자이너 조합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 무대 디자인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명한 무대 디자이너인 J. 우드먼 톰슨(J. Woodman Thompson)의 후원으로 마침내 조합원이 될 수 있었다.
그의 첫 브로드웨이 과제는 얼 캐롤의 1931년 뮤지컬 리뷰 '더 얼 캐롤 바니티즈'의 쇼 커튼을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발레 루스의 레옹 박스트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미넬리는 아르데코 양식의 극장 스타일과 어울리도록 91 m (300 ft) 높이의 녹색과 은색 커튼을 제작했다. 감명을 받은 캐롤은 1932년 '바니티즈'의 의상 및 무대 디자이너로 미넬리를 재고용했다.
이 무렵 그레이스 무어는 미넬리에게 오페레타 '더 두바리'의 아트 디렉션을 감독해달라고 요청했다. 리허설 중 미넬리와 무어는 창작적인 차이를 보였지만,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오페레타는 보스턴에서 시연회를 가졌고, 1932년 11월 뉴욕에서 초연되어 87회 공연되었다. 그의 성공에 힘입어 파라마운트 경영진은 1933년 '지그펠드 폴리스'의 의상 및 무대 디자인을 위해 그를 선택했다. 그러나 1933년에 파라마운트-퍼블릭스가 파산 보호를 신청하면서 아돌프 주커는 스튜디오의 제작 책임자인 B. P. 슐버그를 해고하고 기업 구조 조정을 시작했다. 파라마운트의 동부 해안 스튜디오는 뉴욕주 아스토리아로 이전되었지만, 그들의 순회 극단은 더 이상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순회 빅 밴드에 집중하기 위해 폐쇄되었다.
미넬리는 1932년 12월 개장한 라디오 시티 뮤직홀의 무대 디자이너로 고용되었다. 리허설 중 극장 사업가 새뮤얼 "록시" 로사펠은 미넬리, 아트 디렉터 클라크 로빈슨, 댄스 디렉터 러셀 마커트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또 다른 격렬한 논의 끝에 로빈슨이 즉시 사임했고, 미넬리가 로빈슨의 이전 직책을 맡게 되었다. 1933년 7월, 미넬리의 첫 아트 디렉션 임무는 '워터 릴리' 발레를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이는 닭싸움 배경, 서커스 장면을 위한 빅 톱 내부, 그리고 록시츠를 선보이기 위한 파리 평화의 거리 드레스 숍이 포함된 쿠바풍의 작품이었다. 1933년 12월, 미넬리는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헤라자데' 모음곡 제작의 아트 디렉터를 맡았다. 그의 노력은 '뉴욕 타임스'와 '뉴욕 헤럴드 트리뷴'을 비롯한 주요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사펠은 나중에 해고되고 W. G. 반 슈무스(W. G. Van Schmus)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1934년, 슈무스는 미넬리에게 10월 25일에 개막한 첫 무대 쇼 '코스트 투 코스트'(Coast to Coast)를 제작해달라고 요청했다. E. Y. 하버그와 듀크 엘링턴의 음악이 곁들여진 이 쇼는 프랑스 리비에라, 영국 골드 코스트, 코트디부아르, 바르바리 코스트를 묘사하는 여러 세트를 선보였다. 백스테이지에서 미넬리는 리 슈버트로부터 자신의 극단에 합류하여 연출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제안에도 불구하고 미넬리는 1935년 4월에 떠날 때까지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계속 일했다. 몇 달간의 숙고 끝에 그는 슈버트의 조직에 합류하여 18개월 동안 세 편의 뮤지컬 쇼를 제작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미넬리는 아서 슈워츠와 하워드 디츠가 음악을 작곡한 그의 첫 연출 프로젝트 '앳 홈 어브로드'를 맡게 되었다. 베아트리스 릴리, 에셀 워터스, 엘리너 파월이 출연한 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미국을 벗어나 유럽, 아프리카, 일본, 서인도 제도를 여행하는 기혼 부부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뮤지컬은 보스턴에서 시연회를 가졌고, 1935년 9월 19일 윈터 가든 극장에서 개막했다. '뉴욕 타임스'의 브룩스 앳킨슨은 미넬리의 노력을 칭찬하며 "호화로움에 의존하지 않고 그는 무대를 풍부하고 빛나는 색상으로 채워 전체 작품에 특별한 아름다움을 부여했다. 슈버트의 작품 중에서 이만큼 활기찬 것은 이전에는 없었다"고 평했다.
'앳 홈 어브로드'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이어가는 동안, 미넬리는 패니 브라이스가 주연한 '지그펠드 폴리스'의 의상 및 무대 디자인으로 돌아갔다. 존 머레이 앤더슨이 연출을 맡았지만, 리허설 중 미넬리에게 연출을 넘겼다. 미넬리는 현대적인 모습을 위해 1880년대의 헤어스타일과 우아한 의상에서 영감을 얻었다. 1936년 1월 30일에 개막한 '지그펠드 폴리스'는 상업적으로 성공하여 5개월간 공연되었고, 여름 휴지기 후 다시 5개월간 재개되었다. 미넬리는 재공연에는 참여하지 않고, 대신 '더 쇼 머스트 고'(The Show Must Go)라는 뮤지컬 리뷰를 연출하기로 했다. 미넬리는 틴 팬 앨리의 작사가 팀이 만든 새로운 노래들을 특징으로 하는 독창적인 이야기를 구상했다. 이 쇼는 1936년 크리스마스에 초연되어 초기 공연에서 237회 상연되었다. 1937년 9월에 재공연이 열려 2주간 공연되었다.
그의 브로드웨이 성공을 바탕으로 할리우드는 미넬리를 떠오르는 감독으로 주목했다. 새뮤얼 골드윈은 잠정적으로 미넬리에게 '골드윈 폴리스'(1938) 연출을 제안했고, 1937년 파라마운트 픽처스는 그에게 영화 제작 및 연출 계약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미넬리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주당 2500 USD를 받았다. 그의 첫 프로젝트는 브로드웨이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영화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s)였다. 레오 비린스키가 각본을 맡았으며, 줄거리는 캐릭터들이 브로드웨이 쇼의 다양한 뮤지컬 넘버들을 통해 중요한 단서들을 찾아 나가는 내용을 담았다. 미넬리는 또한 파라마운트의 계약 배우들을 활용한 초현실주의 발레를 제안했으며, 쿠르트 바일과 잠재적인 뮤지컬 영화에 대해 논의했다. 미넬리는 이 프로젝트를 파라마운트의 수장인 아돌프 주커와 논의했지만 그는 관심이 없었고, 스튜디오 제작 책임자인 윌리엄 르바론과의 논의도 프로젝트를 진전시키지 못했다.
한편, 미넬리는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주연의 1937년 영화 '셸 위 댄스'의 제목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라울 월시의 1937년 영화 '아티스트와 모델'에서 루이 암스트롱과 마사 레이가 출연하는 "퍼블릭 멜로디 1번" 시퀀스의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데 자문을 해주었다.
6개월간의 협상 끝에 미넬리는 파라마운트와의 계약에서 해지되어 브로드웨이로 돌아왔다. 리 슈버트는 그에게 에드 윈이 주연하고 해럴드 알렌과 E. Y. 하버그가 음악과 가사를 맡은 뮤지컬 '후레이 포 왓!'을 제안했다. 미넬리는 1937년 12월 1일 초연 전까지 3개월의 준비 기간만 주어졌다. 이 뮤지컬은 호평을 받았으며, '라이프'지는 이를 "올해 가장 재미있는 쇼"라고 불렀다. '타임'지 또한 "쇼의 성공에 윈과 함께 공을 나눈 유능한 빈센트 미넬리는 영화 무대 쇼의 힘든 학교에서 훈련받았으며, 연출과 무대 디자인을 모두 담당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뮤지컬 '핀과 바늘'과 '세 성인 세 막극'에 영감을 받아 미넬리는 베아트리스 릴리를 주연으로 염두에 둔 초현실주의 판타지 '더 라이트 판타스틱'(The Light Fantastic) 개발을 시작했다. 그는 그녀에게 네 개의 뮤지컬 넘버와 그의 비전을 담은 네 개의 스케치를 제공했지만, 당시 영국에 있던 릴리는 제때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 S. N. 베어먼의 희곡 '세레나 블랜디쉬'를 뮤지컬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흑인 미국인 배우들을 출연시키고자 했다. 콜 포터가 음악을 작곡하고 시드 펄먼이 대본을 썼으며, 레나 혼이 타이틀 역할을 맡아 읽었다. 6개월간의 개발 끝에 미넬리는 이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지친 미넬리는 안식년을 가졌고, 프로듀서 맥스 고든이 그에게 '베리 웜 포 메이' 연출을 제안했다.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와 제롬 컨이 각각 가사와 음악을 맡았다. 뮤지컬의 1막에 만족했던 미넬리는 2막을 재구성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뮤지컬은 1939년 11월 17일 앨빈 극장에서 개막했고, 뮤지컬 평론가 브룩스 앳킨슨은 그의 평론에서 미넬리가 "이야기의 혼란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썼다.
이 시기, 윌리엄 새러욘의 희곡 '당신 인생의 시간'이 3주 전에 개막하여 호평을 받고 있었다. 미넬리는 새러욘과 친구가 되어 리처드 로저스와 로렌츠 하트가 작곡을 맡은 흑인 초현실주의 뮤지컬 코미디에서 파트너십을 맺었다. 두 사람은 데이비드 프리먼과 함께 각본을 공동 작업했지만, 새러욘은 프로젝트에서 하차했다. 1940년 봄, 하버그는 아서 프리드를 미넬리의 이스트 54번가 스튜디오로 데려왔다. 미넬리는 "그때 아서 프리드가 내 스튜디오로 찾아와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일을 MGM에서 하게 해달라고 설득했다"고 회상했다. 논의 끝에 미넬리는 주당 300 USD를 받기로 동의했다.
4. 할리우드 영화 감독 경력
빈센트 미넬리는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MGM 스튜디오에서 그의 독특한 시각적 스타일과 섬세한 연출력을 발휘하며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켰다. 특히 뮤지컬 영화의 대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드라마와 전기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도 그의 역량을 입증했다.
4.1. 초기 MGM 시절 (1940년대)
미넬리는 1940년 4월 2일 MGM에 합류하여 영화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1941년에는 노먼 Z. 맥로드의 '레이디 비 굿'을 비평하고, 판드로 버먼에게 '리오 리타'의 시작 부분을 변경하도록 조언하는 등 소규모 자문 작업을 수행했다. 얼마 후 맥로드가 '파나마 해티'(1942)를 촬영했지만, 시사회에서 미온적인 반응을 얻자 프리드는 로이 델 루스를 고용하여 재촬영을 맡기고, 미넬리에게 레나 혼이 출연하는 뮤지컬 넘버 연출을 맡겼다.
한편, 미넬리는 미키 루니와 주디 갈랜드가 주연한 '스트라이크 업 더 밴드'(1940)의 촬영장을 방문했다. 프리드는 루니의 캐릭터가 폴 와이트먼 같은 밴드리더가 되기를 열망하는 장면에 뮤지컬 넘버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미넬리는 촬영장에서 발견한 과일 그릇을 사용하여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프리드는 그 아이디어를 좋아했고, 헨리 폭스를 고용하여 테이블탑을 만들게 했으며, 조지 팔은 과일로 만든 음악가들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을 제공했다. 촬영 중 미넬리는 막 18세가 된 갈랜드를 처음 만났다. 이후 미넬리는 버스비 버클리의 '브로드웨이의 아기들'(1941)의 "고스트 극장" 시퀀스에서 작업했으며, 루니와 갈랜드도 출연했다. 미넬리는 그들이 베테랑 브로드웨이 스타들을 모방할 것을 제안했지만 버클리는 그 아이디어를 거부했다.
4.1.1. 영화 감독 데뷔와 초기 작품
1942년, 미넬리는 프리드로부터 '하늘의 오두막'(1943) 연출 제안을 받았다. 미넬리는 이 제안을 수락하며, "과거의 기여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자유를 가지고 이 임무를 해석했다"고 썼다. 버넌 듀크와 존 라 투시의 1940년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하늘의 오두막'은 신앙심 깊은 여성 페투니아(에셀 워터스)가 도박꾼 남편 "리틀" 조 잭슨(에디 "로체스터" 앤더슨)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촬영은 1942년 8월에 시작되었으며, 워터스와 렉스 잉그램만이 브로드웨이 역할로 재출연했다. 레나 혼은 잭슨을 유혹하는 매혹적인 여성 조지아 브라운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제작 중 미넬리는 레나 혼이 거품 목욕을 하는 뮤지컬 넘버 "에인트 잇 더 트루스"를 촬영했다. 헤이즈 코드의 조지프 브린은 이 장면에 반대했고, 결국 이 장면은 영화에서 삭제되었다. 67.93 만 USD의 적당한 예산으로 제작된 '하늘의 오두막'은 박스오피스에서 160.00 만 USD를 벌어들였다.
'하늘의 오두막' 촬영을 마친 지 3주 후, 미넬리는 레드 스켈턴과 엘리너 파월이 주연한 '아이 두드 잇'(1943) 연출을 맡았다. 이 영화의 원래 감독은 로이 델 루스였으나, 그가 미국 육군에 징집되면서 영화가 미완성으로 남았고, MGM은 그의 편집본에 불만족스러워했다. 영화의 프로듀서 잭 커밍스는 미넬리가 자신의 스타일을 영화에 주입해주기를 바랐다. 감독으로 합류한 미넬리는 식 허지그와 프레드 사이디를 고용하여 각본을 다시 쓰게 했다. 1929년 영화 '스파이트 매리지'를 느슨하게 리메이크한 이 영화에서 스켈턴은 재봉사 조수로, 브로드웨이 스타 콘스턴스 쇼(파월)에게 반하여 그녀의 남북 전쟁 멜로드라마의 모든 공연에 참석한다. 쇼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연인(리처드 에인리)을 화나게 하기 위해 레놀즈와 결혼한다. 허지그와 사이디는 스켈턴의 캐릭터가 존 호디악의 캐릭터가 추축국의 스파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것으로 줄거리를 업데이트했다.
프로젝트 중간에 미넬리는 레나 혼의 '허니서클 로즈' 부분을 1943년 영화 '사우전드 치어'에서 연출했다.
4.1.2. 주디 갈랜드와의 협업 및 결혼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1944)를 위해 프리드는 다시 미넬리에게 연출을 맡겼다. 4계절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스미스 가족의 갈등을 다루며, 결말은 가족이 1904년 세인트루이스 세계 박람회를 기념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주디 갈랜드는 에스더 스미스 역으로 캐스팅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역할이 투티를 연기하는 마거릿 오브라이언에게 가려질 것이라고 느꼈다. 주요 촬영은 1943년 12월 7일에 시작되었지만, 갈랜드의 잦은 지각과 질병 주장으로 인해 촬영이 자주 지연되었다. 미넬리는 갈랜드의 외모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메이크업 아티스트 도로시 포네델(Dorothy Ponedel)을 갈랜드에게 배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포네델은 그녀의 눈썹을 늘리고 다시 만들고, 헤어라인을 바꾸고, 입술 라인을 수정하고, 코 디스크와 치아 캡을 제거하는 등 그녀의 외모를 개선했다. 촬영은 1944년 4월 7일에 마무리되었다. 촬영 중 갈랜드와 미넬리는 몇 가지 창작적인 차이를 보였지만, 갈랜드는 데일리를 본 후 그에게 더 가까워졌다. 당시 갈랜드는 데이비드 로즈와 결혼했지만, 이혼 후 조지프 L. 맨키위츠와 데이트를 시작했다. 1944년 11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고, 박스오피스 예상을 뛰어넘어 초기 상영 기간 동안 전 세계적으로 756.00 만 USD를 벌어들였다.
한편, 1945년 뮤지컬 '지그펠드 폴리스'는 조지 시드니가 원래 감독을 맡아 제작 중이었다. 이 영화는 지그펠드 폴리스 뮤지컬 리뷰의 여러 뮤지컬 넘버를 특징으로 했으며, MGM의 많은 계약 재능 있는 배우들이 출연했다. 촬영 도중 시드니가 제작을 떠나겠다고 요청했고, 미넬리가 촬영을 마무리하기 위해 고용되었다. 갈랜드의 부분은 1944년 7월에 촬영되었고, 주요 촬영은 8월에 완료되었다. 미넬리는 총 10개의 장면을 연출했으며, 나머지 4개는 시드니, 레뮤얼 에이어스, 로이 델 루스, 로버트 루이스가 연출했다.
'시계'(1945)는 갈랜드가 여러 뮤지컬 영화에 출연한 후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정통 드라마 영화였다. 프레드 진네만이 원래 영화 연출을 맡았으나, 1944년 8월까지 갈랜드의 요청으로 그들이 잘 지내지 못했고 데일리가 실망스러웠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해고되었다. 프리드가 누구로 교체하고 싶은지 묻자 갈랜드는 미넬리에게 연출을 요청했다. 미넬리는 두 가지 조건으로 이 임무를 수락했다: 진네만이 자신의 고용에 반대하지 않을 것과 갈랜드에 대한 창작 통제권을 가질 것. 뉴욕 외부 촬영을 제외하고 진네만의 영상은 폐기되었다. 펜실베이니아역은 MGM 사운드스테이지에 재현되었고, 뉴욕 현지 장소는 후방 투사를 사용하여 촬영되었다. 1945년 1월 9일, 갈랜드가 '하비 걸스'(1946)를 촬영하기 전에 미넬리와 갈랜드는 결혼을 약속했다. 두 사람은 6월 15일 로스앤젤레스 미드-윌셔에 있는 갈랜드의 어머니 집에서 결혼했다.

미넬리의 다음 영화는 프레드 아스테어와 루실 브레머가 주연한 '욜란다와 도둑'(1945)이었다. 그가 '시계'를 맡기 전, 욜란다와 도둑은 미넬리의 다음 영화가 될 예정이었다. 루트비히 베멜만스와 자크 테리의 1943년 잡지 단편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남아메리카에서 범죄인 인도에 숨어 있는 두 사기꾼(아스테어와 프랭크 모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사람은 수녀원에서 보호받는 삶을 사는 젊은 상속녀 욜란다에 대해 알게 되고 그녀를 속이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밤 욜란다는 "수호천사"를 위해 기도하고, 아스테어의 캐릭터가 이를 가장한다. 프리드는 이 잡지 이야기를 우연히 접하고 베멜만스와 테리에게 트리트먼트를, 로버트 네이선에게 최종 각본을 쓰게 했다. 촬영은 1945년 1월 15일에 시작되어 4개월 후에 마무리되었다. 개봉 후 이 영화는 각본에 대한 비판과 함께 엇갈린 평가를 받았으며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이 시점에 갈랜드는 첫 딸 라이자 미넬리를 임신했다. 제롬 컨의 뮤지컬 전기 영화 '구름이 걷힐 때까지'(1946)는 1945년 10월에 제작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갈랜드는 마릴린 밀러 역으로 캐스팅되었고 미넬리는 갈랜드의 장면 연출을 맡았다. 그녀의 장면은 2주 만에 완성되어 1945년 11월 8일에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드야 러브 미?"(D'Ya Love Me?) 넘버는 영화에서 삭제되었다.

미넬리는 다음으로 판드로 S. 버먼의 '언더커런트'(1946) 연출을 제안받았고, 캐서린 헵번과 로버트 테일러가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 셀마 스트레이블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작은 마을 대학 교수의 딸이 산업가와 결혼하여 도시로 이주하는 이야기로, 그녀는 곧 실종된 시동생에 대해 알게 되고 남편이 살해 용의자로 지목되자 그의 실종을 조사한다. 실종된 남동생 역을 맡은 로버트 미첨은 MGM에 RKO 라디오 픽처스에서 대여되어 이 영화에 공동 출연했다. 촬영 중 헵번은 처음에는 미넬리가 감독이라는 사실에 불쾌해했지만, 제작이 진행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원만해졌다. 한편, 테일러는 그들의 관계가 발전하는 것에 짜증을 느꼈고 미첨에게 가려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S. N. 베어먼의 희곡 '해적'을 각색하자는 아이디어는 미넬리에게서 나왔고, 갈랜드는 신혼여행 중 뮤지컬로 각색하자고 제안했다. 이 이야기는 카리브해의 한 지역 여성 마누엘라가 해적 마코코(맥 더 블랙으로 더 잘 알려진)를 꿈꾸는 내용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현재 뚱뚱하고 나이 많은 마을 촌장 돈 페드로로 알려진 마코코와 약혼한 상태이다. 여행하는 배우 세라핀은 마누엘라의 애정을 얻기 위해 해적 역을 맡는다. 프리드는 처음에 이 아이디어를 반대했지만, 트리트먼트를 읽은 후 마지못해 제작에 동의했다. 1942년 영화 '나를 위해, 내 사랑을 위해'의 성공을 재현하기 위해 진 켈리가 갈랜드와 다시 짝을 이루도록 캐스팅되었다.
1946년 12월 27일, 갈랜드의 병으로 인해 녹음 세션이 취소되어야 했다. 갈랜드의 잦은 부재로 인해 촬영은 1947년 2월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리허설, 촬영, 재촬영을 포함한 135일 중 갈랜드는 99일 동안 부재했다. 10월 시사회 후 미넬리는 영화의 러닝 타임을 줄이는 데 동의했다. 10월 21일부터 12월 19일 사이에 재촬영이 이루어졌으며, 뮤지컬 넘버 "부두"는 더욱 활기찬 "맥 더 블랙"의 재촬영으로 대체되었다. 촬영이 마무리되었을 때, 영화는 예산을 초과하여 370.00 만 USD의 비용이 들었다. 영화는 박스오피스에서 290.00 만 USD 이상을 벌었지만, 220.00 만 USD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4.1.3. 장르 확장과 '마담 보바리'
'해적'의 재정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미넬리는 '이스터 퍼레이드'(1948) 연출을 맡기로 되어 있었고, 갈랜드와 진 켈리가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하지만 켈리는 리허설 부상 후 프레드 아스테어로 교체되었다). 리허설은 1947년 9월 5일에 시작되었지만, 5일 후 미넬리는 프리드의 사무실로 불려가 영화에서 해고되었다. 프리드는 갈랜드의 정신과 의사의 조언에 따라 미넬리의 해고를 결정했다고 언급했다. 찰스 월터스가 그를 대신하여 고용되었다. 거의 1년 동안 미넬리는 영화 프로젝트 없이 지냈는데, 그동안 갈랜드는 '이스터 퍼레이드'와 '그리운 옛 여름날'(1949)을 촬영했다. 판드로 버먼은 미넬리의 사무실로 전화하여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의 영화 각색 연출을 제안했다. 미넬리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를 수락했다.
라나 터너는 처음에 주연 역할이 제안되었지만, 미넬리는 터너가 섹스 심벌로 인식되어 있다는 이유로 이 아이디어를 거부했다. 제작 규약 또한 터너의 스크린 이미지와 소설에서 묘사된 결혼 불륜이 지침을 위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니퍼 존스가 고려되었지만, 그녀는 남편 데이비드 O. 셀즈닉과 계약되어 있었다. 그러나 MGM의 임원인 베니 타우는 그녀를 빌려올 수 있는 규정 거래를 성공적으로 협상했다. 제임스 메이슨은 플로베르 역을 맡고 싶어 했고, 루이 주르당과 알프 키엘린 (크리스토퍼 켄트로 표기)은 셀즈닉의 호의로 영화에 대여되었다.
'마담 보바리'는 1948년 12월 중순부터 1949년 2월까지 촬영되었다. 제작 중 미넬리는 특히 정교한 왈츠 장면을 촬영했는데, 미클로스 로자의 사전 녹음된 기악 반주에 맞춰 360도 패닝 카메라 움직임을 활용했다. 전기 작가 스티븐 하비는 이를 "미넬리 영화 중 가장 대담한 계시 중 하나"라고 평했다. 1949년 8월에 개봉한 '마담 보바리'는 비평가들로부터 원작을 상당한 드라마와 분위기로 각색한 이례적으로 뛰어난 영화로 평가받았다. 시사회 관객들은 영화와 존스의 연기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영화는 박스오피스에서 200.00 만 USD를 벌어들였다.
같은 해, 미넬리는 로버트 Z. 레너드의 '뇌물'(1949)의 클라이맥스 시퀀스를 연출했다고 전해진다.
4.2. 전성기 (1950년대)
4.2.1. 뮤지컬 영화의 대가로서

미넬리의 다음 판드로 버먼과의 협업 작품은 에드워드 스트리터의 베스트셀러 1949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신부의 아버지'(1950)였다. 잭 베니가 주연 역할을 추구하여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지만, 미넬리는 스펜서 트레이시를 원했고 그를 캐스팅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조안 베넷은 각각 신부와 그녀의 어머니로 캐스팅되었다. 촬영은 1950년 1월 16일에 시작되어 한 달 하루 뒤에 마무리되었다. 1950년 5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박스오피스에서 배급사 대여 수익으로 415.00 만 USD를 벌어들였다.
비평가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으며, '뉴욕 타임스'의 보즐리 크라우더는 이 영화가 책과 비교했을 때 "동등하게 훌륭하다"며 "스트리터의 논문을 매우 사랑받게 만드는 모든 따뜻함과 애틋함, 이해를 담고 있다"고 평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아카데미 각본상 3개 부문에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파리의 미국인'(1951)의 시작은 프리드가 이라 거슈윈의 저택에서 그와 친구 관계를 맺으면서였다. 프리드는 이라에게 그의 동생 조지 거슈윈의 오케스트라 작품 '파리의 미국인'을 영화로 각색하고 잠재적으로 발레 시퀀스를 포함하고 싶다고 말했다. 1949년, MGM과 조지 거슈윈의 유산 관리 단체는 협상에 들어갔고, 스튜디오는 거슈윈의 카탈로그 권리를 15.88 만 USD에 인수했다. 이 이야기는 라이프 잡지의 기사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프리드가 기억하기로는 G.I. 법안의 후원으로 파리에서 예술을 공부하는 미국 G.I.들의 이야기였다.
영화에서 제리 멀리건(진 켈리)은 파리에서 공부하는 예술가이다. 그는 그에게 로맨틱하고 직업적인 관심을 표하는 상속녀이자 예술 후원자인 마일로 로버츠(니나 포크)를 만난다. 한편, 제리는 자신의 친구인 앙리 보렐(조르주 게타리)과 약혼한 어린 십대 소녀 리즈 부비에(레슬리 카론)와 로맨스를 펼친다. 촬영은 1950년 8월 1일 MGM 스튜디오에서 시작되었지만, 발레 시퀀스를 준비하기 위해 9월 15일에 제작이 중단되었다. 미넬리는 '신부의 작은 배당금'(1951), 즉 '신부의 아버지'의 속편을 연출하기 위해 떠났다. 촬영은 10월 9일에 시작되어 23일 후에 완료되었다. 이후 미넬리는 발레 시퀀스 촬영을 위해 돌아와 12월 6일에 시작하여 1951년 1월 8일에 마무리했다.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인기를 얻어 미국에서 800.00 만 USD 이상을 벌어들였다. 켈리와 카론은 영화 평론가들에게 찬사를 받았지만, 영화의 극적인 연속성은 비판을 받았다. 1952년 아카데미상에서 '파리의 미국인'은 8개 부문 후보에 올라 아카데미 작품상을 포함하여 6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1951년 1월 18일, 미넬리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뮤지컬 영화 각색을 연출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딘 스톡웰이 타이틀 역할로 캐스팅되었다. 윌리엄 워필드는 짐 역으로 캐스팅되었고, 진 켈리와 대니 케이는 각각 공작과 왕세자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리허설은 8월에 시작되었다. 동시에 미넬리는 머빈 르로이의 '러블리 투 룩 앳'(1952)의 패션쇼 피날레를 촬영하는 데 참여했다. 아드리안 그린버그(일명 "아드리안")와 토니 듀켓은 이 시퀀스의 의상을 디자인했으며, 10.00 만 USD 이상의 비용이 들었다. 미넬리는 이 영화에 대한 크레딧을 거부했다. 9월 21일, 켈리와 케이의 하차로 '허클베리 핀' 제작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파리의 미국인'(1951)과의 유사성 때문에 미넬리는 '릴리'(1953) 연출 제안을 거절했다. 로마노프 레스토랑에서의 점심 미팅 중, MGM 프로듀서 존 하우스먼은 미넬리에게 조지 브래드쇼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악당을 위한 기념비'(Memorial to a Bad Man)라는 각본 초안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는 나중에 '악인과 미녀'(1952)로 제목이 변경되었다. 미넬리는 연출에 동의했고, 무자비한 영화 제작자 조나단 쉴즈 역에는 커크 더글러스를 유일한 선택으로 보았다. 그러나 MGM 제작 책임자인 도레 샤리는 클라크 게이블에게 이 역할을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더글러스는 각본을 읽고 이 역할을 수락했다. 라나 터너는 "미녀"인 조지나 로리슨 역으로 고용되었다. 두 캐스팅이 발표되었을 때, 업계에서는 "이 둘이 함께하면..."이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 이야기는 조나단 쉴즈(더글러스)가 세 사람을 조종하여 할리우드에서 성공하는 과정을 다룬다: 그가 사랑을 가장하여 속이는 여배우 조지나(터너), 그가 사진을 도용한 감독 프레드 아미엘(배리 설리번), 그리고 스캔들로 아내를 잃은 각본가 제임스 바틀로(딕 파월). 개봉 후, 비평가들은 영화의 할리우드에 대한 추악한 묘사와 출연진, 특히 더글러스, 터너, 글로리아 그레이엄의 연기를 칭찬했다. 움직이는 차량 안에서 조지나가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장면이 특히 강조되었다. 1953년 아카데미상에서 '악인과 미녀'는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그레이엄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포함하여 5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시드니 프랭클린의 요청으로 미넬리는 1953년 옴니버스 영화 '세 가지 사랑 이야기'의 두 부분("마드모아젤"과 "왜 울어야 하는가") 연출을 제안받았다. 미넬리는 아놀드 필립스의 단편 소설 "루시와 낯선 사람"을 각색한 "마드모아젤" 부분을 연출하기로 동의했다. 레슬리 카론과 재회한 이 부분에는 리키 넬슨, 자 자 가보르, 팔리 그레인저, 에델 배리모어가 출연했다. 촬영은 1952년 2월에 마무리되기까지 3주간 진행되었다. "왜 울어야 하는가" 부분은 삭제되어 조안 크로포드가 주연한 '토치 송'(1953)으로 재작업되었다.

'파리의 미국인'(1951)과 '사랑은 비를 타고'(1952)의 성공으로 인해 프리드는 유명 작곡가들의 뮤지컬 카탈로그를 각색한 또 다른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밴드 웨곤'(1953)을 위해 아서 슈워츠와 하워드 디츠의 음악과 가사를 각색하기로 결정되었다. 적합한 줄거리를 쓰기 위해 미넬리는 각본 팀인 베티 콤든과 아돌프 그린에게 각본을 구상하도록 요청했다. 이 영화는 브로드웨이 쇼로 경력을 다시 시작하려는 노년의 뮤지컬 스타 토니 헌터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두 명의 작가 친구와 브로드웨이 프로듀서를 만나 뮤지컬을 제작하는데, 이 뮤지컬에는 헌터와 발레리나가 출연한다. 프레드 아스테어가 트로이 헌터 역을 맡았고, 작가 레스터와 릴리 마튼(각각 오스카 레반트와 나네트 파브레이가 연기)은 콤든과 그린을 느슨하게 바탕으로 했다. 시드 샤리스는 발레리나 가브리엘 제라르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촬영은 1952년 10월 20일에 시작되어 1953년 1월 28일에 마무리되었다. 1953년 7월에 개봉한 '밴드 웨곤'은 열광적인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고 박스오피스에서 560.00 만 USD를 벌어들였다. '뉴욕 포스트'의 아처 윈스턴은 이 영화를 "이달의, 올해의, 10년의, 또는 내가 아는 한 역대 최고의 뮤지컬"이라고 평했다. 이 영화는 최고 스토리 및 각본, 최고 의상 디자인(컬러), 최고 뮤지컬 음악 등 세 부문에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미넬리는 판드로 버먼, 그리고 각본 팀인 앨버트 해킷과 프랜시스 굿리치와 함께 루실 볼과 데시 아르나즈가 주연한 '길고 긴 트레일러'(1954)에서 다시 협업했다. 클린턴 트위스의 1951년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신혼부부 니키와 태시 콜린스가 새 여행용 트레일러 집을 구매하여 1년 동안 미국 전역을 여행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이 러브 루시'의 여름 휴식 기간 동안 촬영되었으며, 1953년 6월 18일에 촬영이 시작되어 다음 달에 마무리되었다. 1954년 2월 18일, 이 영화는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초연되어 배급사 대여 수익으로 450.00 만 USD를 벌어들였다.
1951년 3월, MGM은 알란 제이 러너와 프레더릭 로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브리가둔'의 영화 판권을 인수했다. 진 켈리와 캐스린 그레이슨이 주연으로 내정되었으나, 켈리의 사전 약속으로 인해 제작이 2년간 지연되었다. 그동안 그레이슨이 하차하고 모이라 시어러가 대체 배우로 고려되었지만, 프리드는 최종적으로 시드 샤리스를 캐스팅했다. '브리가둔'은 또한 미넬리의 첫 입체음향 녹음 영화이자 와이드스크린 시네마스코프 형식으로 촬영된 영화였는데, 미넬리는 배우들의 발이 잘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 형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1953년, 미넬리, 켈리, 프리드는 처음에는 스코틀랜드 현지에서 촬영하고 실내 장면은 보어햄우드의 MGM-영국 스튜디오에서 촬영할 계획이었다. 봄에 그들은 잠재적인 촬영 장소를 물색했지만, 미넬리는 '길고 긴 트레일러'로 바빠서 뒤에 남았다. 켈리와 프리드는 스코틀랜드 기후가 불확실하다고 확신했고, 캘리포니아주 컬버시티에 있는 MGM 백로트에서 전적으로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이 이야기는 스코틀랜드에서 사냥 여행 중 길을 잃은 두 미국인 토미 올브라이트(켈리)와 제프 더글러스(밴 존슨)에 대한 내용이다. 그들은 1세기마다 한 번씩만 보이는 마을 브리가둔으로 들어간다. 즐거운 결혼식 중에 토미는 고향에 제인 애슈턴(일레인 스튜어트)이라는 약혼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여성 피오나 캠벨(샤리스)에게 반한다. 촬영 중 미넬리는 러너의 각본을 어떻게 살려낼지 확신할 수 없어서 "영화에 좌절했다"고 인정했다. 1954년에 개봉한 '브리가둔'은 영화 평론가들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뉴욕 타임스'의 보즐리 크라우더는 이 영화를 "기묘하게 평이하고 어색하며, 사방으로 흩어져 있고 따뜻함이나 매력을 거의 불러일으키지 못한다"고 일축했다.
1953년 가을, 미넬리는 윌리엄 헨리 허드슨의 소설 '초록의 저택'을 영화로 각색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다음 해 러너가 각본을 쓰기 위해 영입되었다. 남아메리카 현지 촬영을 목표로, 미넬리는 페루, 파나마, 영국령 기아나, 베네수엘라의 촬영 장소를 물색했다. 그곳에서 그와 미술 감독 E. 프레스턴 에임스, 그리고 소수의 촬영팀은 베네수엘라 정글의 16mm 필름 테스트 영상을 촬영했다. 피어 안젤리와 에드먼드 퍼덤이 주연으로 물망에 올라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지만, 프리드는 감명을 받지 못했다. 이 프로젝트는 취소되었지만, 나중에 오드리 헵번 주연의 1959년 영화 '초록의 저택'이 되었다.
미넬리는 존 하우스먼이 윌리엄 깁슨의 1954년 소설을 건네준 후 '거미줄'(1955)을 연출했다. 이 이야기는 정신과 클리닉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도서관에 설치될 최신 커튼을 두고 분쟁에 휘말리는 내용을 다룬다. 미넬리는 존 팩스턴의 소설 각색 각본을 읽었지만, "책의 맛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는 이후 깁슨에게 각본에 추가 대사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리처드 위드마크, 로런 바콜, 글로리아 그레이엄, 릴리언 기시, 그리고 신예 존 커와 수잔 스트라스버그가 앙상블 캐스트로 출연했다. 이 영화는 1954년 12월에 시작하여 7주 동안 촬영되었다. 1955년 7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엇갈린 평가를 받았고, 박스오피스에서 150.00 만 USD의 배급사 대여 수익을 기록하며 실패했다.
'거미줄'이 편집되는 동안, 미넬리는 MGM 사장 도레 샤리와 어빙 스톤의 소설 '삶에 대한 열정'의 영화 버전을 다음 프로젝트로 논의했다. MGM은 이미 영화 판권을 획득했지만, 1955년 12월까지 유예 기간이 만료될 예정이어서 연장을 요청했다. 그동안 샤리와 아서 프리드는 미넬리가 '키스멧'의 영화 각색을 촬영하기를 원했다. 미넬리는 원작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을 싫어했기 때문에 저항했다. 샤리는 미넬리에게 '키스멧'을 먼저 촬영한다면 '삶에 대한 열정'을 촬영할 수 있는 창작 자율권을 제공했다. '키스멧'(1955)은 기회주의적인 거리 시인 하지의 이야기로, 그의 능력이 와지르에 의해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남용된다. 한편, 하지의 딸 마르시나는 젊은 칼리프와 사랑에 빠진다. 영화는 1955년 5월 23일에 촬영을 시작했다. 촬영이 완료되기 10일 전, 미넬리는 '삶에 대한 열정'(1956) 촬영을 시작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 스탠리 도넌이 영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투입되었고, 1955년 7월 22일에 완성되었다. '키스멧'은 1955년 10월 8일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초연되었고, (제작 예산 260.00 만 USD 대비) 박스오피스에서 290.00 만 USD를 벌어들였다.
동시에 커크 더글러스의 제작사 바이르나 프로덕션스는 장 네글레스코를 감독으로 하여 '삶에 대한 열정'을 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얼마 후 더글러스는 MGM으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MGM이 판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미넬리가 감독하고 더글러스가 빈센트 반 고흐 역을 맡는 타협안이 도출되었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현지에서 전적으로 촬영되었으며, 촬영은 1955년 8월에 시작되어 1955년 12월에 종료되었다. 촬영 내내 더글러스는 특히 배역에 몰입한 상태를 유지했다. 미넬리는 이 영화를 자신이 연출한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다. 1956년 9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관객들로부터 미온적인 반응을 얻어 박스오피스 대여 수익으로 약 160.00 만 USD를 벌었다. 그러나 1957년 아카데미상에서 '삶에 대한 열정'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커크 더글러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앤서니 퀸), 아카데미 각본상, 최고 미술/세트 장식 - 컬러 등 4개 부문에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퀸은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미넬리는 유럽으로 떠나 '삶에 대한 열정'을 촬영하기 전, 로버트 앤더슨의 1953년 희곡 '차와 동정'을 장편 영화로 연출하기로 동의했다. 이 이야기는 남자 기숙학교에서 동성애자로 비난받는 젊은 학생 톰에 대한 내용이다. 교장의 아내 로라는 그의 남성성을 강화시키기를 바라며 그에게 깊은 관심을 보인다. 동성애 테마 때문에 자신의 희곡을 다시 쓰도록 고용된 앤더슨은 프로덕션 코드의 규제 때문에 각본을 순화해야 했다. 데버러 커, 존 커(1955년 영화 '거미줄'에 출연한 적이 있다), 라이프 에릭슨은 연극에서 맡았던 역할을 재현했다. 1956년 개봉 당시, '차와 동정'은 영화 평론가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박스오피스 대여 수익으로 약 220.00 만 USD를 벌어들였다.
'디자이닝 우먼'(1957)은 MGM의 의상 디자이너 헬렌 로즈의 오리지널 이야기로, 1942년 영화 '올해의 여성'을 느슨하게 바탕으로 했다. 그레이스 켈리를 위한 주연 작품으로 기획되었고, 제임스 스튜어트가 남자 주연으로, 조슈아 로건이 감독을 맡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켈리는 모나코 공 레니에 3세와 결혼한 지 두 달 후 연기에서 은퇴하면서 프로젝트에서 하차했다. 스튜어트와 로건도 따라서 하차했다. 다급해진 샤리는 미넬리를 고용하여 영화를 연출하게 했다. 새로운 감독으로서 미넬리는 그레고리 펙과 로런 바콜을 새로운 주연으로 선택했다. 주요 촬영은 1956년 9월 10일에 시작되어 10주 후에 완료되었으며, 캘리포니아주 뉴포트 비치, 비벌리힐스 호텔, 마린랜드에서 현지 촬영이 이루어졌다. 1957년 5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370.00 만 USD를 벌었지만, 13.60 만 USD의 손실을 기록했다.
'지지'(1958)의 사전 제작 중, 미넬리는 W. 서머싯 몸의 소설 '그림자 없는 베일'을 각색한 영화 '일곱 번째 죄'(1957)의 촬영을 위해 로날드 님을 대신했다. 님은 MGM 프로듀서 데이비드 루이스와 창작적인 차이를 보였다. 시드니 프랭클린이 루이스를 대신하여 프로듀서가 되었다. 미넬리는 자신의 기여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크레딧을 받지 않기를 요청했다.
4.2.2. 아카데미상 수상
'지지'는 콜레트의 1944년 소설에서 시작되었으며, 1949년 영화 '지지'로 각색되어 다니엘 들로름이 주연을 맡았다. 1951년 극작가 아니타 루스는 이 소설을 희곡으로 각색했으며, 오드리 헵번이 첫 주연을 맡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다. 미넬리와 아서 프리드는 몇 년 전부터 '지지' 각색에 대해 논의했지만, 1953년 프리드는 브로드웨이 연극을 본 후 다시 흥미를 갖게 되었다. 두 사람은 '마이 페어 레이디'의 성공으로 막 유명해진 알란 제이 러너와 프레더릭 로에게 그들의 각색 작품을 위한 곡을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러너는 두 가지 조건으로 동의했다: 오노레 라샤일 역을 확장하고 모리스 슈발리에를 영화에 캐스팅할 것.
헵번은 역할을 다시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미넬리는 대신 '파리의 미국인'(1951)에서 연출했던 레슬리 카론을 캐스팅했다. 루이 주르당은 지지의 연인 가스통 역으로 캐스팅되었고, 슈발리에, 헤르미온느 진골드, 에바 가보르, 이사벨 진즈가 조연 역할을 맡았다. 현지에서 전적으로 촬영하기를 원했던 미넬리는 1957년 7월 심한 폭염 기간 동안 파리에서 영화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무겁고 시대적인 의상 때문에 출연진들은 과열되었고, 미넬리조차 백일해에 걸렸다. 미넬리와 프리드 사이에도 갈등이 발생했다. 9월에는 예산을 초과하여 제작진은 스튜디오 백로트 촬영을 위해 캘리포니아로 이동했고, 베니스 비치는 트루빌 쉬르 메르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촬영은 1957년 10월 30일에 완료되었다.
1958년 초, '지지'의 시사회는 좋지 않은 반응을 얻었고, MGM 사장 조지프 보겔은 9일간의 재촬영을 지시했다. 그러나 미넬리는 해외에서 '마지 못해 데뷔하는 소녀'(1958)를 촬영 중이어서 참여할 수 없었다. 찰스 월터스가 재촬영을 위해 투입되었다. 이 영화는 1958년 5월 15일 뉴욕의 로열 극장에서 개봉하여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959년 아카데미상에서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포함하여 9개 부문 후보에 올라 모두 수상했다. 미넬리는 이 영화로 첫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다.
'지지'의 개봉 당시 미넬리는 이미 1958년 2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 7주 동안 '마지 못해 데뷔하는 소녀'(1958)를 촬영했다. 윌리엄 더글러스 홈의 1955년 희곡을 각색한 이 이야기는 런던에 도착하여 부유한 아버지 지미 브로드벤트 경과 새어머니 실라 부인을 위해 데뷔탕트 볼에 참석하는 미국 십대 소녀 제인 브로드벤트에 대한 내용이다. 1957년 가을, 판드로 버먼은 미넬리에게 각본의 첫 초안을 보여주었는데, 미넬리는 연극을 미국화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느껴 불쾌해했다. 원래 런던 배경이 다시 각본에 포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출에 동의했고, 버먼이 추천한 대로 렉스 해리슨과 케이 켄달에게 뉴욕에서 주연 역할을 제안했다. 그럼에도 버먼은 미국 관객의 호응을 넓히기 위해 미국 여배우 산드라 디를 캐스팅했다. '마지 못해 데뷔하는 소녀'는 1958년 8월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개봉했지만, 박스오피스에서는 미온적인 반응을 얻었다.
1958년 봄, MGM은 제임스 존스의 1957년 소설 '그들이 달려왔다'의 영화 판권을 인수했다. 새로운 제작 책임자로 샤리의 뒤를 이은 솔 C. 시겔은 미넬리에게 '그들이 달려왔다'의 영화 각색을 연출하도록 고용했다. 이 소설은 육군 베테랑이자 소설가인 데이비드 허쉬가(프랭크 시나트라) 가상의 마을 인디애나주 파크먼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감정적으로 억압된 고등학교 교사 그웬 프렌치와(마사 하이어) 로맨스를 펼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젊은 여성 지니(셜리 맥레인)와 친구가 된다. 랫 팩 멤버인 딘 마틴은 바마 딜러트 역으로 출연한다. 아카데미상 후보작으로서의 잠재력 때문에 미넬리는 1958년 겨울 개봉을 목표로 6개월 안에 영화를 완성해야 했다. 인디애나주 매디슨에서 촬영하는 동안 시나트라와 마틴은 미넬리의 꼼꼼한 촬영 방식에 지쳐 촬영장을 떠났다. 그러나 시겔은 그들을 다시 데려와 영화를 마무리하게 했다.
비평가들의 반응은 대부분 긍정적이었지만, '타임'지 평론은 이 영화에 대해 엇갈린 평가를 내렸다. 평론은 전반부를 칭찬했지만, 그 이후에는 "셜리 맥레인의 가끔씩 빛나는 과잉 연기, 프랭크 시나트라가 프랭크 시나트라를 연기하는 것을 볼 기회, 그리고 빈센트 미넬리 감독의 재능이 이야기의 전반적인 혼란 속에서 마치 햇빛이 슬래그 더미에 녹아내리듯이 사라지는 광경"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아카데미상에서 '지지'(1958)와 경쟁하며 '그들이 달려왔다'는 맥레인, 하이어, 아서 케네디에 대한 남우조연상 후보를 받았다.
4.2.3. 드라마 및 전기 영화 연출
'지지'와 '그들이 달려왔다'의 성공은 미넬리의 MGM 감독으로서의 임기를 굳혔다. 1960년 2월 8일, 미넬리는 영화 산업에 대한 공헌으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별을 받았다. 해외에서는 그의 영화들이 프랑스 비평가들, 특히 '카예 뒤 시네마' 영화 잡지에 글을 쓰는 일부 비평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프랑스 비평가 자크 도니올-발크로즈는 '악인과 미녀'(1952)에 대해 장문의 비평을 썼고, 장 두셰는 '삶에 대한 열정'(1956)에 대해 썼다. 두셰와 장 도마르치는 미넬리의 영화 작품에 대한 평가 에세이를 썼고 1962년 그를 공동 인터뷰했다.
윌리엄 험프리의 1958년 동명 소설을 각색한 '언덕에서 돌아온 사람들'(1960)은 족장 웨이드 헌니컷(로버트 미첨)과 그의 냉담하고 성적으로 위축된 아내 해나(엘리너 파커), 그리고 아들 세론(조지 해밀턴)과 사생아 레이프(조지 페퍼드)로 구성된 텍사스주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미시시피주 옥스퍼드 현지에서 촬영되었고, 이어서 한 달 동안 MGM 백로트에서 촬영되었으며, 이후 텍사스주 파리에서 촬영되었다. '버라이어티'지 평론은 이 영화를 "강력하고 흡인력 있는 이야기이며, 조지 페퍼드라는 활기차고 유망한 젊은 스타를 탄생시키는 추가적인 흥미를 제공한다"고 평했다.
1958년, 아서 프리드는 베티 콤든과 아돌프 그린이 대본과 가사를 쓰고 줄 스타인이 음악을 맡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벨스 아 링잉'의 영화 판권을 구매했다. 콤든과 그린은 이 뮤지컬을 각본으로 각색하는 데 고용되었으며, 각본은 110페이지를 넘지 않아야 하며 1958년 12월 31일까지 제출되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콤든과 그린은 마감일을 맞췄지만 159페이지짜리 각본을 제출했고, 미넬리는 너무 길다고 느꼈다. 각본이 준비될 때까지 촬영은 두 번 지연되었다. 주디 홀리데이는 브로드웨이에서 맡았던 전화 교환원 엘라 피터슨 역을 다시 맡았는데, 그녀는 개인 고객들의 삶을 엿듣는다. 그녀는 극작가 제프리 모스(딘 마틴)와 관계를 맺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촬영은 1959년 10월 7일에 시작되어 12월 24일까지 이어졌다. 촬영 내내 홀리데이는 각본과 영화에 대한 그의 영화적 접근 방식을 싫어했기 때문에 미넬리와 창작적인 차이를 보였다.
'버라이어티'지 평론은 뮤지컬 각색이 "영화 매체의 친밀함에 이상적으로 적합하다"고 느꼈으며, 프리드가 "원작의 활기찬 정신과 기발한 개성을 충실히 유지했다"고 칭찬했다. 미넬리의 연출은 "뮤지컬 시퀀스에 활기와 활력을 불어넣고, 직선적인 장면에는 따뜻함과 유머를 더하며, 전환의 어색함 없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엮어냈다"고 칭찬받았다. '타임'지 평론은 홀리데이의 "쇼맨십 넘치는 스타일"을 칭찬하며, 미넬리가 "평범한 대본과 다소 잊혀질 만한 곡들을 올해 가장 활기차고 재치 있는 시네마 뮤지컬 중 하나로 만들었다"고 언급했다. 1961년 1월까지 '벨스 아 링잉'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예상 박스오피스 대여 수익으로 282.50 만 USD를 벌어들였다.
4.3. MGM 후기 및 독립 활동 (1960년대)
미넬리는 MGM의 가장 오래 재직한 감독이 되었지만, 1960년대 초반부터 스튜디오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독립적인 활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4.3.1. 상업적 부진과 MGM과의 갈등
'언덕에서 돌아온 사람들'(1960) 홍보 활동 중 미넬리는 1921년 무성 영화 '묵시록의 4기사'의 리메이크를 연출하게 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1962년 리메이크에서는 줄거리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일어나는 것으로 설정되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절정 사건들은 유지되었다. 미넬리는 이러한 변경에 동의하지 않았다. 존 게이가 각본을 다시 쓰도록 고용되었지만, 수정된 각본에는 변경된 설정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주연 역할로는 미넬리가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을 원했지만, 솔 시겔은 반대했다. 글렌 포드는 MGM과 새로운 다중 영화 계약을 체결한 후 캐스팅되었다. 미넬리 영화의 전형적인 방식대로, 영화는 파리에서 촬영되었고 실내 장면은 캘리포니아에서 촬영되었다. 1960년 10월부터 1961년 3월까지 촬영되었으며, 1961년 겨울에 개봉될 예정이었으나, 여름 동안 재촬영이 이루어졌다.
1962년 2월 개봉이 연기된 이 영화는 각본과 제작 가치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이 영화는 700.00 만 USD의 제작 예산 대비 200.00 만 USD의 배급사 대여 수익을 벌었다. 해외에서는 이 영화가 유럽 비평가들에게 높이 평가받았으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순응자'(1970)와 비토리오 데 시카의 '핀치 콘티니의 정원'(1970)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960년, MGM은 어윈 쇼의 소설 '다른 마을에서의 2주'의 영화 판권을 5.50 만 USD에 구매했다. 존 하우스먼이 프로듀서로 임명되었고 미넬리에게 연출을 제안했다. 미넬리는 이 소설이 '악인과 미녀'(1952)와 유사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 영화의 각본가 찰스 슈니와 작곡가 데이비드 락신을 고용했다. 이 이야기는 퇴물 배우 잭 안드루스(커크 더글러스)가 옛 멘토 모리스 크루거(에드워드 G. 로빈슨)를 돕고 그의 최신 영화 더빙을 감독하기 위해 로마에 도착하는 내용을 다룬다. 미넬리는 커크 더글러스에게 주연 역할을 제안했고, 에드워드 G. 로빈슨과 시드 샤리스는 각각 크루거와 잭의 전처 칼로타 역을 맡았다. 촬영은 1961년 10월 로마에서 19일간의 현지 촬영 일정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넬리는 한 달이 지나서야 촬영을 마쳤다. 촬영은 11월 9일부터 MGM 백로트에서 11주 동안 재개되었다.
미넬리는 또한 난교 장면을 촬영했는데, 이는 시겔을 격분시켰다. 1962년 봄, 이 영화는 시사회에서 좋지 않은 테스트 반응을 얻었다. 시겔은 로버트 M. 웨이트먼으로 제작 책임자 자리를 교체했고, 조지프 보겔은 스튜디오 편집자 마가렛 부스에게 영화를 대폭 재편집하도록 지시했다. 난교 장면은 축소되었고 샤리스의 마지막 독백 또한 삭제되었다. 미넬리와 하우스먼은 영화의 대부분의 후반 작업 동안 협의를 받지 못했다. 영화는 별다른 홍보 없이 개봉되었고 또 다른 박스오피스 실패작이 되었다.
1962년까지 MGM은 '시마론'(1960), '바운티 호의 반란'(1962), 그리고 미넬리 자신의 '묵시록의 4기사'(1962)를 포함한 심각한 상업적 실패로 인해 재정적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는 '다른 마을에서의 2주'(1962)의 재편집과 함께 미넬리와 MGM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스튜디오와의 계약 갱신 시점에서 미넬리는 더 큰 협상력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제작사인 베니스 프로덕션스(Venice Productions)를 설립했다. 그는 감독으로서의 급여 외에 순 박스오피스 수익의 25%를 얻고, 두 번째 시사회까지 최종 편집 권한을 유지하는 것을 협상했다. 1962년 4월, MGM과 베니스 프로덕션스는 4년 동안 6편의 영화를 공동 제작하기로 합의했다.
4.3.2. 베니스 프로덕션 설립과 공동 제작

새로운 계약에 따라 미넬리는 1961년 소설을 읽고 "따뜻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미망인 아버지가 재혼하기를 바라는 어린 아들에 대한 이야기인 '에디의 아버지의 구애'(1963)를 연출했다. 이 영화의 프로듀서 조 패스터낙은 글렌 포드와 론 하워드를 각각 아버지와 아들로 캐스팅했다. 1963년 개봉한 이 영화는 영화 평론가들로부터 감성적이고 약간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는 배급사 대여 수익으로 200.00 만 USD를 벌어들였다.
미넬리의 다음 프로젝트는 '마이 페어 레이디'(1964)가 될 예정이었지만, 워너 브라더스가 MGM보다 550.00 만 USD를 더 지불하여 영화 판권을 따냈다. 알란 제이 러너와 프레더릭 로는 잭 L. 워너에게 미넬리를 감독으로 고용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급여 문제로 협상이 결렬되었다. 대신 조지 큐커가 고용되었다.
4.3.3. MGM 이후의 작품들
1963년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넬리는 영화 프로젝트 없이 지냈다. MGM은 미넬리에게 외부 연출 작업을 허용했고, 그는 20세기 폭스의 '굿바이 찰리'(1964) 연출 제안을 선택했다. 이 영화는 그가 MGM 외부에서 제작한 첫 번째 영화였다. 조지 액설로드의 1959년 희곡을 각색한 이 이야기는 바람둥이 찰리 소렐이 질투심 많은 남편에게 총을 맞아 죽고 아름다운 금발 여성으로 환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성의 모습으로 돌아온 찰리는 친구 조지 트레이시(토니 커티스)를 만나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해 상의한다. 사전 제작 및 촬영은 1964년 1월부터 7월까지 폭스의 스튜디오 백로트와 캘리포니아주 말리부 현지 촬영에서 진행되었다.

1964년 11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영화 평론가들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보즐리 크라우더는 부정적으로 "데비 레이놀즈와 토니 커티스가 불쾌한 역할에 너무 슬프게 캐스팅되어 숙련된 영화 관객조차도 고통과 수치심에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고 평했다. 1966년 1월까지 이 영화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배급사 대여 수익으로 370.00 만 USD를 벌어들였다.
미넬리는 MGM으로 돌아와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이 주연한 '도요새'(1965)를 연출했다. 스타 커플을 위한 작품으로 기획된 이 영화는 마틴 랜소호프가 유부남 성공회 목사와 자유분방한 미혼모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오리지널 스토리로 구상했다. 이 커플은 처음에 윌리엄 와일러에게 접근했지만 그는 제안을 거절했다. 테일러와 버튼은 이전에 '신부의 아버지'(1950)와 '신부의 작은 배당금'(1951)에서 테일러를 연출했던 미넬리에게 요청했다. 박스오피스 성공이 필요했던 미넬리는 이 제안을 수락했다. 이 영화는 캘리포니아 빅서에서 현지 촬영을 한 후 파리에서 촬영되었다.
이 영화는 1965년에 개봉하여 박스오피스에서 640.00 만 USD의 배급사 대여 수익을 올리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는 MGM-베니스 프로덕션스 계약 하에 제작된 마지막 영화였다. 영화들은 적당히 성공했지만, 충분한 수익을 창출하지 못했다.
미넬리는 이후 '세이 잇 위드 뮤직'(Say It With Music)이라는 뮤지컬 영화를 제작하려 했는데, 이는 그가 몇 년 동안 구상해왔던 어빙 벌린의 전기 영화였다. 프랭크 시나트라와 줄리 앤드루스가 주연으로 고려되었지만, 제임스 T. 오드리 MGM 사장은 뮤지컬 영화의 상업적 성공 감소로 인해 1969년까지 개발을 중단시켰다. 프리드 유닛은 해체되었고, MGM과 미넬리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합의했다.
1964년, 프로듀서 아서 P. 제이콥스는 미넬리에게 렉스 해리슨을 주연으로 하는 소설 '굿바이 미스터 칩스'의 뮤지컬 각색을 연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미넬리는 거절했다. 영화 역사가 마크 해리스에 따르면, 그는 '닥터 두리틀'(1967) 연출에 동의했고, 이는 해리슨과 알란 제이 러너와 재회하는 작품이 될 뻔했다. 이 영화는 1966년 크리스마스 개봉이 잠정적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미넬리가 프로젝트에서 하차하고 리처드 플라이셔로 교체되었다.
4.4. 말년의 작품 활동 (1970년대)
4.4.1. 뮤지컬 영화 '맑은 날엔 영원히 볼 수 있어요'
러너의 최신 브로드웨이 뮤지컬 '맑은 날엔 영원히 볼 수 있어요'는 파라마운트 픽처스에 의해 영화 각색 권리가 확보되었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주연으로 고려되었다. 미넬리가 '마이 페어 레이디'(1964) 연출에 실패한 후, 러너는 미넬리가 각색 작품을 연출하도록 성공적으로 로비했다. 촬영은 1969년 1월 6일에 시작되었으며, 82일간의 촬영을 목표로 했다. 이 영화는 원래 1970년 가을 로드쇼 개봉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1969년 스트라이샌드가 주연한 '헬로, 돌리!'가 박스오피스에서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자, 영화의 개봉은 여름으로 앞당겨졌다. 영화의 러닝 타임에서 15분이 삭제되었다.
1970년 6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영화 평론가들로부터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찰스 챔플린은 이 영화가 "거의 완벽하다. 밝고, 로맨틱하며, 견고하게 제작되었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전문적인 코미디 연기와 정신과 의사 역을 맡은 이브 몽땅의 매력적이면서도 놀랍도록 설득력 없는 연기를 중심으로 하며, 독창적이고 순수하다"고 썼다. 1971년 1월까지 이 영화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박스오피스 대여 수익으로 475.00 만 USD를 벌어들였다.
4.4.2. '시간의 문제'와 최종 작품

미넬리는 다음으로 딸 라이자 미넬리가 주연할 영화 프로젝트로 눈을 돌렸다. 라이자 미넬리는 '무균 뻐꾸기'(1969)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었다. 그들은 젤다 피츠제럴드의 전기 영화를 구상했지만, 파라마운트 픽처스 사장 프랭크 야블란스와의 논의 끝에 진행되지 못했다. 그는 동시에 티나 터너를 염두에 둔 베시 스미스의 전기 영화를 개발하기 시작했지만, 이 역시 무산되었다.
1974년, 미넬리는 모리스 드루옹의 1954년 소설 '기억의 영화'('La Volupté d'être')를 각색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시간의 문제'(1976)로 제목이 바뀐 이 영화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백작 부인이 젊은 시녀를 가르치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각본가 존 게이와 프로듀서 에드먼드 그레인저를 포함한 베테랑 협력자들과 함께 작업했다. 여러 주요 스튜디오들이 거절한 후,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픽처스(AIP)가 500.00 만 USD의 제작 예산으로 영화 제작에 동의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1974)으로 세 번째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잉그리드 버그만이 백작 부인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촬영은 1975년 8월 로마와 베네치아에서 14주간의 일정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 날씨, 노동자 파업, 의무적인 촬영 시간 단축 등으로 인해 촬영은 20주간 이어졌다. 미넬리의 첫 가편집본은 3시간이 넘었다. 이후 AIP 사장 새뮤얼 Z. 아코프는 미넬리로부터 영화의 통제권을 빼앗아 여러 플래시백을 삭제하고 영화를 완전히 재구성했다. 이 소식에 경악한 마틴 스코세이지는 여러 저명한 할리우드 감독들의 서명을 받아 아코프의 미넬리 대우에 항의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지지에 고무되었지만, 미넬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1976년 10월 7일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개봉했지만 재정적으로 실패했다.
5. 개인 생활
5.1. 결혼과 자녀
미넬리는 '스트라이크 업 더 밴드'(1940) 촬영 중 주디 갈랜드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1945년 6월 15일 로스앤젤레스 윌셔에 있는 갈랜드의 어머니 집에서 결혼했다. 그들은 딸 라이자 메이 미넬리(1946년생)를 낳았다. '해적'(1948) 촬영 중 결혼 생활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1949년 미넬리와 갈랜드는 일시적으로 별거했다. 1950년 6월 16일, MGM은 갈랜드를 정직시켰고, 3일 후 갈랜드는 유리 조각으로 목을 베어 자살을 시도했다. 12월 7일, 두 사람은 법적 별거와 이혼 의사를 발표했다. 이혼은 1951년 3월 29일에 최종 확정되었고, 갈랜드가 라이자의 친권 양육권을 유지했다.
1954년 2월 16일, 미넬리는 미스 유니버스 1953 크리스티안 마르텔의 여동생인 조젯 마냐니(Georgette Magnani)와 결혼했다. 크리스티안은 미스 유니버스에서 우승한 후 유니버설 픽처스와 연기 계약을 제안받았고, 조젯은 부모님으로부터 그녀를 동반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할리우드 파티에서 버넌 듀크가 미넬리를 조젯에게 소개했다. 그녀의 외모에 반한 미넬리는 조젯에게 스크린 테스트를 제안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두 부부는 딸 크리스티안 니나 미넬리(Christiane Nina Minnelli, 1955년생)를 낳았다. 1958년 '지지'의 후반 작업 중 마냐니는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1960년 이탈리아 휴가 중 미넬리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이혼녀 다니카("데니스") 라도사블례비치 가이 줄리아넬리 드 지간테(Danica ("Denise") Radosavljević Gay Giulianelli de Gigante)를 만났다. 그녀는 '묵시록의 4기사'(1962) 촬영 중 그와 동행했으며, 두 사람은 1962년 1월에 결혼했다. 미넬리와 지간테는 공동으로 제작사 베니스 프로덕션스를 설립하고 MGM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 4년 동안 6편의 영화를 공동 제작하기로 했다. 1970년까지 미넬리는 데니스가 다른 남성들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그녀는 부인했다. 두 사람은 1971년 8월에 이혼했다.
미넬리는 세 번째 아내의 친구였던 마가레타 리 앤더슨(Margaretta Lee Anderson)을 1960년대에 만났다. 세 번째 아내가 이혼한 후, 지간테는 앤더슨이 미넬리와 함께 살도록 격려했다. 세 번의 결혼 실패 후 미넬리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두 사람은 계속 동거했다. 미넬리는 1980년부터 1986년 사망할 때까지 그녀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5.2. 성적 지향에 대한 논란
수년간 연예계에서는 미넬리가 게이 또는 양성애자라는 추측이 있었다. 미넬리의 전기 작가 에마뉘엘 레비는 미넬리가 할리우드에 오기 전 뉴욕에서 공개적으로 동성애자 생활을 했고, 할리우드에서 영화계의 전설이 되면서 그를 다시 벽장으로 몰아넣었다는 증거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레비에 따르면, "그는 뉴욕에서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였다. 우리는 동반자들의 이름과 도로시 파커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할리우드에 왔을 때, 나는 그가 자신의 그 부분을 억누르거나 양성애자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한다." 뉴욕에서 미넬리를 알았던 소매점 디스플레이 디자이너 레스터 가바는 미넬리와의 불륜 관계를 자주 주장했다고 전해지지만, 가바의 주장을 전한 같은 사람은 가바가 "과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5.3. 사망
미넬리는 1982년 크리스마스에 심박 조율기를 삽입했다. 1986년 7월 25일, 미넬리는 비벌리힐스 자택에서 83세의 나이로 폐기종과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는 말년에 반복적으로 입원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의 포레스트 론 기념 공원에 안장되었다. 미넬리는 약 110.00 만 USD 가치의 유산을 남겼으며, 대부분을 딸 라이자에게 남겼다. 그는 미망인에게 10.00 만 USD를 유증했다. 비벌리힐스 자택은 딸 라이자에게 남겼지만, 미넬리는 유언장에서 미망인이 그곳에서 계속 살 수 있도록 요청했다.
6. 평가와 유산
빈센트 미넬리는 뮤지컬 영화의 거장으로 기억되지만, 그의 예술적 기여와 감독으로서의 스타일은 영화사에서 다양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6.1. 예술가로서의 평가
뮤지컬, 코미디, 멜로드라마 등 다양한 영화 작품에도 불구하고, 미넬리는 이야기를 산만하게 만드는 정교한 카메라 앵글로 예술적 이미지를 고양시키기보다는 단지 장식적인 예술가라는 비판을 받았다. 앤드루 사리스는 1968년 그의 저서 '미국 영화'(The American Cinema)에서 미넬리를 "순수한 스타일리스트"이며 "예술보다는 아름다움을 더 믿는다"고 불렀다. 사리스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미넬리는 항상 자신의 취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비교적 호화로운 프로젝트를 필요로 했다. 예술가로서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면, 그것은 스타일이 항상 본질을 초월할 수 있으며, 세상을 보는 우리의 방식이 세상 자체보다 중요하다는 그의 순진한 믿음이다." 리처드 식켈은 1975년에 미넬리가 "타고난 이야기꾼이 아니었다. 그는 일화적인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 능숙하지도, 기억력도 좋지 않았다. 또한 분석적인 사고방식도 없었다. 그는 주로 시각적 아이디어(물론 음악적 아이디어도)에 따라 창의적인 문제 해결에 접근했으며, '문학적'이라고 할 만한 어떤 신호보다도 이 아이디어들에 더 의존했다." 미넬리의 영화는 종종 창의적인 개인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타고난 재능과 도덕적, 직업적 두려움을 탐구했다.
에마뉘엘 레비는 이에 강력히 반대하며, 미넬리가 "주제적, 스타일적, 이념적으로 오트르였다. 그의 영화는 예술과 인공성 개념이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선명하게 나타남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썼다. 1959년 알버트 존슨은 '필름 쿼터리' 기사에서 미넬리를 "장식적인 이미지의 대가"라 불렀고, 그는 "오래된 학파에도, 새로운 학파에도 속하지 않고, 특별한 성취의 위치에 남아 있으며, 이는 모든 시각 및 장식 예술 분야가 그의 영화를 장식하도록 허용한다"고 평했다. 미넬리의 회고록 '나는 잘 기억한다'의 서문에서 알란 제이 러너는 미넬리를 "스크린이 본 영화 뮤지컬의 가장 위대한 감독"이라고 불렀다. 영화 역사가 진 바신저는 미넬리를 "시각 예술가였다. 그의 영화는 재치와 매력과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영화적 스타일도 있었다. 틀 안의 모든 것을 올바르고 아름답게, 적절하고 상호 보완적으로 보이게 '장식하는' 그의 능력은 비할 데 없었다. 그는 감독에게 가장 협업적인 장르이자 성공을 위해 너무나 많은 다른 재능에 의존하는 뮤지컬이라는 어려운 장르에서 자신만의 개인적인 비전을 개발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이었다."
미넬리의 동시대인이자 뮤지컬 영화 감독인 스탠리 도넌은 한때 미넬리의 뮤지컬을 "엉성한" 이야기라고 비판하며, 미넬리의 인상주의적인 시각적 스타일과 비교하여 더 대담하고 실용적이며 사실적인 스타일을 채택했다. 스티븐 M. 실버먼 또한 두 영화 제작자의 카메라워크를 구별하며, 미넬리가 앞으로 또는 뒤로 트래킹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도넌은 이야기와 안무를 뒷받침하기 위해 수평 트래킹과 크레인 샷을 자주 사용한다고 언급했다. 반대로 미넬리는 웅장하고 시각적인 공연을 위해 이야기를 중단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MGM의 가장 주목할 만한 뮤지컬 안무가인 마이클 키드는 미넬리보다 도넌과 협업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그는 "빈센트는 소통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잘 하지 못했고, 문장을 끝맺지 못했다. 그는 영화 제작의 시각적 측면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원래 세트 디자이너였고, 사람들은 항상 '그는 풍경만 찍는다'고 불평했지만, 빈센트는 협업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2012년, 영화 역사가 로날드 버건은 대조적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미넬리를 MGM 명단의 다른 감독들과 구별했던 것은 그의 미장센, 즉 개별 프레임 내에서의 우아한 구성, 사물과 사람의 관계, 빛과 어둠의 상호 작용, 색채의 패턴이었다." 조지프 앤드루 캐스퍼는 미넬리의 미장센을 "본질적으로 표현주의적"이라고 언급하며, 그가 배경을 사용하여 "감독의 정신을 통해 걸러진, 비록 조사되고 극적으로 연관된 공간-시간 연속체를 창조한다. 그러므로 어떤 장소와 시대의 정수를 흡수하는 태도와 감정을 얻게 된다... 미넬리는 자연에 거울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램프를 놓는다. 그의 예술은 모방적인 전통이 아니라 재창조적인 전통이다." 바신저도 동의했다: "그의 영화적 우주는 환상과 현실이 혼합된, 꿈과 기만으로 가득 찬 곳이었고, 그 안의 모든 장식은 그 자체로 보람 있을 뿐만 아니라 캐릭터와 배경을 정의하는 목적을 가지고 세심하게 연구되고 디자인되고 실행되었다."
6.2. 배우들과의 협업 스타일
미넬리는 경력 동안 스펜서 트레이시, 글로리아 그레이엄, 커크 더글러스, 앤서니 퀸, 아서 케네디, 셜리 맥레인, 마사 하이어 등 7명의 배우를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게 하는 연기를 연출했다. 이 중 그레이엄과 퀸이 수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넬리는 자신의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종종 있다. '그들이 달려왔다'(1959) 촬영 중 미넬리는 배경에 관람차를 넣거나 꽃병에 적절한 종류의 꽃을 담기 위해 한 장면을 설정하는 데 몇 시간을 보냈다. 프랭크 시나트라와 딘 마틴은 짧은 장면을 여러 번 촬영하는 것에 지쳐 촬영장을 떠나기도 했다.
조지 페퍼드는 '언덕에서 돌아온 사람들'(1960) 촬영 중 미넬리와 갈등을 겪었다. 마지막 장면 촬영 중 미넬리는 페퍼드에게 "조지, 당신 안에서는 격렬한 분노가 끓어오를지 모르지만, 내가 알려줄 소식이 있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있어. 내 방식대로 해야 할 거야"라고 말했다. 1963년 '에디의 아버지의 구애'에 공동 출연한 셜리 존스는 미넬리가 촬영 중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구체적인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빈센트는 카메라로 예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항상 특정 지점으로 움직이고 이 대사를 말할 때 손을 여기 놓으라는 식이었지, 캐릭터에 대한 지시는 전혀 없었어. 그게 아쉬웠다"고 말했다.
6.3. 수상 및 영예
미넬리는 그의 뛰어난 영화적 업적을 인정받아 수많은 상과 영예를 얻었다. 그의 영화 중 '하늘의 오두막'(1943),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1944), '파리의 미국인'(1951), '악인과 미녀'(1952), '밴드 웨곤'(1953), '지지'(1958) 등 6편이 미국 국립영화등기부에 보존작으로 선정되었다.
특히 1959년에는 '지지'를 통해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이 작품은 아카데미 작품상도 함께 받았다. 이 외에도 '파리의 미국인'(1951) 역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그는 '지지'로 골든 글로브상 감독상과 미국 감독 조합상 영화 부문 감독상을 수상했다.
1947년 칸 영화제에서는 '지그펠드 폴리스'로 뮤지컬 코미디 영화상을 받았다. 그의 영화 산업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60년 2월 8일에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별이 새겨졌다. 또한 1967년에는 칸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7. 연출 작품 목록
연도 | 제목 | 스튜디오 | 장르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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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 파나마 해티 | MGM | 뮤지컬 | 크레딧에 오르지 않음 |
1943 | 하늘의 오두막 | MGM | 뮤지컬 | |
아이 두드 잇 | 뮤지컬 코미디 | 다른 제목: 바이 훅 오어 바이 크룩 | ||
1944 |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 | 뮤지컬 | ||
1945 | 시계 | 로맨틱 드라마 | 다른 제목: 언더 더 클락 | |
지그펠드 폴리스 | 뮤지컬 코미디 | 주요 감독 | ||
욜란다와 도둑 | 뮤지컬 코미디 | |||
1946 | 구름이 걷힐 때까지 | 뮤지컬 전기 | 주디 갈랜드 장면만 연출 | |
언더커런트 | 필름 느와르 | |||
1948 | 해적 | 뮤지컬 | ||
1949 | 마담 보바리 | 로맨틱 드라마 | ||
1950 | 신부의 아버지 | 코미디 | ||
1951 | 신부의 작은 배당금 | 코미디 | ||
파리의 미국인 | 뮤지컬 | |||
1952 | 러블리 투 룩 앳 | 뮤지컬 코미디 | 패션쇼 시퀀스만 연출, 크레딧에 오르지 않음 | |
악인과 미녀 | 멜로드라마 | |||
1953 | 세 가지 사랑 이야기 | 옴니버스 | "마드모아젤" 부분 | |
밴드 웨곤 | 뮤지컬 코미디 | |||
1954 | 길고 긴 트레일러 | 코미디 | ||
브리가둔 | 뮤지컬 | |||
1955 | 거미줄 | 드라마 | ||
키스멧 | 뮤지컬 코미디 | |||
1956 | 삶에 대한 열정 | 전기 | ||
차와 동정 | 드라마 | |||
1957 | 디자이닝 우먼 | 로맨틱 코미디 | ||
일곱 번째 죄 | 드라마 | 크레딧에 오르지 않음 | ||
1958 | 지지 | 뮤지컬 로맨스 | ||
마지 못해 데뷔하는 소녀 | 코미디 | |||
그들이 달려왔다 | 드라마 | |||
1960 | 언덕에서 돌아온 사람들 | 드라마 | ||
벨스 아 링잉 |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 | |||
1962 | 묵시록의 4기사 | 드라마 | ||
다른 마을에서의 2주 | MGM | 드라마 | ||
1963 | 에디의 아버지의 구애 | MGM | 로맨틱 코미디 | |
1964 | 굿바이 찰리 | 20세기 폭스 | 코미디 | |
1965 | 도요새 | MGM | 드라마 | |
1970 | 맑은 날엔 영원히 볼 수 있어요 | 파라마운트 픽처스 | 뮤지컬 코미디 드라마 | |
1976 | 시간의 문제 |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픽처스 | 뮤지컬 판타지 | 미넬리가 나중에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음 |
8. 연극 작품 목록
제목 | 공연 기간 | 극장 | 연출 | 무대 디자이너 | 의상 디자이너 | 스케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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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얼 캐롤 바니티즈 (1930) | 1930년 7월 1일 - 1931년 1월 3일 | 뉴 암스테르담 극장 | 예 | 예 | ||
더 얼 캐롤 바니티즈 (1931) | 1931년 8월 27일 - 1932년 4월 9일 | 44번가 극장 | 예 | 예 | ||
더 얼 캐롤 바니티즈 (1932) | 1932년 9월 27일 - 1932년 12월 10일 | 브로드웨이 극장 (53번가) | 예 | 예 | ||
더 두바리 | 1932년 11월 22일 - 1933년 2월 4일 | 조지 M. 코헨 극장 | 예 | 예 | ||
앳 홈 어브로드 | 1935년 9월 19일 - 1936년 3월 7일 | 윈터 가든 극장 | 예 | 예 | 예 | |
지그펠드 폴리스 | 1936년 1월 30일 - 1936년 5월 9일, 1936년 9월 14일 - 1936년 12월 19일 | 예 | 예 | 예 | ||
더 쇼 이즈 온 | 1936년 12월 25일 - 1937년 7월 17일, 1937년 9월 18일 - 1937년 10월 2일 | 예 | 예 | 예 | 예 | |
후레이 포 왓! | 1937년 12월 1일 - 1938년 5월 21일 | 예 | 예 | 예 | ||
베리 웜 포 메이 | 1939년 11월 17일 - 1940년 1월 6일 | 닐 사이먼 극장 | 예 | 예 | 예 | |
댄스 미 어 송 | 1950년 1월 20일 - 1950년 2월 18일 | 로열 극장 | 예 | |||
마타 하리 | 1967년 11월 20일 - 1967년 12월 9일 | 내셔널 극장 (워싱턴 D.C.) | 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