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비어 고든 차일드는 1892년 4월 14일 시드니에서 태어나 중산층 영국 이민자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는 아버지가 성공회 사제이자 엄격한 보수주의자였던 것과 달리 무신론과 사회주의를 신봉하며, 평생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학업 기간 동안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병약한 체질과 독특한 외모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사회주의 활동으로 인해 학계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정치인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런던으로 이주한 뒤 왕립 인류학 연구소에서 일하며 유럽 선사시대 연구에 몰두했다. 에든버러 대학교와 런던 UCL 고고학 연구소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활발한 연구와 집필 활동을 이어갔으며, 은퇴 후 호주로 돌아와 생을 마감했다.
1.1. 유년기와 교육
비어 고든 차일드는 1892년 4월 14일 시드니에서 영국계 호주인 중산층 부부인 스티븐 헨리 차일드 목사(1844~1923)와 해리엇 엘리자 차일드(본명 고든, 1853~1910)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성공회 사제였던 그의 아버지 스티븐 차일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1867년 잉글랜드 성공회 사제로 서품되었다. 1871년 메리 엘런 래치포드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으나, 메리가 사망하자 1886년 11월 22일 어린 시절 호주로 이주한 부유한 영국인 해리엇 고든과 재혼했다. 고든 차일드는 시드니 서쪽 블루마운틴의 웬트워스 폭포에 있는 아버지의 호화로운 시골 저택인 '샬레 퐁트넬'에서 다섯 이복 형제자매와 함께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성 토마스 교구의 목사로 일했지만, 교인들과 자주 다투고 불규칙한 휴가를 가는 등 인기가 좋지 않았다.
어린 시절 병약했던 고든 차일드는 수년간 자택 교육을 받은 후 노스 시드니의 사립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07년 시드니 성공회 문법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 주니어 매트리큘레이션, 1910년 시니어 매트리큘레이션을 취득했다. 학교에서 고대사, 프랑스어, 그리스어, 라틴어, 기하학, 대수학, 삼각법을 공부했으며 모든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신체적 외모와 운동을 못하는 체형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1910년 7월 그의 어머니가 사망했고, 아버지는 곧 재혼했다. 차일드와 아버지의 관계는 특히 어머니의 죽음 이후 더욱 악화되었는데, 경건한 기독교인이자 보수주의자였던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무신론자이자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1.2. 초기 활동과 정치적 신념
차일드는 학창 시절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급진적인 정치적 신념을 형성했고, 이는 그의 학문적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호주에서 사회주의 활동으로 인해 학계 진출이 좌절된 후 정치인의 비서로 일했으며, 이후 런던으로 이주하여 유럽 선사시대 연구를 시작하면서도 노동당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1.2.1. 호주 시기
1911년 시드니 대학교에서 고전학 학위를 공부한 차일드는 고대 문헌에 집중했지만, 하인리히 슐리만과 아서 에번스의 작업으로 처음 고전 고고학을 접했다. 대학에서 그는 토론회의 적극적인 구성원이 되었고, 한때 "사회주의는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그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저작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큰 영향을 미친 G. W. F.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저작도 읽었다. 대학에서 그는 동료 학부생이자 미래의 판사이자 정치인이 될 허버트 비어 에바트와 평생 우정을 이어갔다. 1913년 학업을 마치고, 이듬해 차일드는 철학 교수 프랜시스 앤더슨의 상을 비롯한 다양한 명예와 상을 받으며 졸업했다.
계속 교육을 받고자 했던 그는 200 파운드의 쿠퍼 졸업 고전학 장학금을 받아 옥스퍼드 대학교의 퀸즈 칼리지 학비를 낼 수 있게 되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그는 SS 오르소바 호를 타고 영국으로 향했다. 퀸즈 칼리지에서 차일드는 고전 고고학 디플로마 과정에 등록한 후 리테라에 후마니오레스 학위를 취득하려 했으나, 디플로마는 끝내 마치지 못했다. 그곳에서 그는 존 비즐리와 아서 에번스 밑에서 공부했으며, 에번스는 차일드의 지도 교수였다. 1915년 그는 첫 학술 논문인 "미니안 토기의 연대와 기원에 관하여"를 헬레닉 연구 저널에 발표했고, 이듬해에는 어문학적 증거와 고고학적 증거를 결합하려는 그의 관심을 보여주는 B.Litt. 학위 논문인 "선사시대 그리스에서 인도유럽인의 영향"을 작성했다.
옥스퍼드에서 그는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보수적인 대학 당국을 적대시했다. 좌익 개혁주의 성향의 옥스퍼드 대학교 파비안 사회의 저명한 회원이 되었고, 1915년 파비안 사회와의 분열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 사회주의 사회로 이름을 변경할 때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룸메이트는 열렬한 사회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 라자니 팔메 더트였다. 둘은 밤늦게까지 함께 술을 마시며 고전 역사 지식을 시험하곤 했다. 영국이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당시, 많은 영국 기반 사회주의자들은 정부의 징병제에도 불구하고 군 입대를 거부했다. 그들은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 계급이 노동 계급의 희생을 대가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벌인다고 믿었다. 이들 사회주의자들은 계급 투쟁만이 자신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유일한 갈등이라고 생각했다. 더트는 전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차일드는 그와 다른 사회주의자, 평화주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의 석방을 위해 운동했다. 차일드는 건강과 시력 문제로 인해 군에 입대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반전 감정은 당국을 우려하게 만들었고, 정보기관 MI5는 그에 대한 파일을 개설하고, 그의 우편물을 가로채고, 그를 감시했다.

차일드는 1917년 8월 호주로 돌아왔다. 알려진 사회주의 선동가였던 그는 보안 서비스의 감시를 받았고, 그의 우편물은 가로채졌다. 1918년 그는 시드니 대학교 세인트 앤드루스 칼리지의 선임 상주 교사가 되었고, 시드니의 사회주의 및 반징병 운동에 참여했다. 1918년 부활절에 그는 빌리 휴스 총리의 징병 계획에 반대하는 단체인 '전쟁 회피를 위한 호주 민주 통제 연합'이 주최한 제3차 주간 평화 회의에서 연설했다. 이 회의는 사회주의적 강조가 두드러졌으며, 그 보고서는 국제 전쟁을 끝낼 최고의 희망은 "자본주의 체제의 폐지"라고 주장했다. 차일드의 참여 소식이 세인트 앤드루스 칼리지 교장에게 전달되었고, 교장은 많은 직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차일드를 사임하도록 강요했다.
교수들은 그에게 강의반 고대사 강사 자리를 얻어주었지만, 대학 총장 윌리엄 포터스 컬렌은 그가 학생들에게 사회주의를 조장할 것을 우려하여 그를 해고했다. 좌파 공동체는 이를 차일드의 시민권 침해로 규탄했고, 중도 좌파 정치인 윌리엄 매켈과 T.J. 스미스는 이 문제를 호주 의회에서 제기했다. 1918년 10월 퀸즐랜드주 매리버러로 이주한 차일드는 매리버러 주립 고등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그의 학생 중에는 P. R. 스티븐슨도 있었다. 이곳에서도 그의 정치적 소속이 알려지면서 지역 보수 단체와 지역 신문 매리버러 크로니클의 반대 운동에 시달렸고, 일부 학생들로부터 욕설을 듣기도 했다. 그는 곧 사임했다.
대학 당국에 의해 학문적 경력이 차단될 것을 깨달은 차일드는 좌익 운동 내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1919년 8월, 그는 당시 뉴사우스웨일스주의 내셔널리스트당 정부에 반대하는 중도 좌파 노동당의 저명한 구성원이었던 정치인 존 스토리의 개인 비서이자 연설문 작성자가 되었다. 뉴사우스웨일스주 의회에서 발메인 교외를 대표하던 스토리는 노동당이 1920년 선거에서 승리하자 주 총리가 되었다. 노동당에서 일하면서 차일드는 그 작동 방식에 대해 더 깊은 통찰력을 얻었다. 그가 더 깊이 관여할수록, 그는 노동당에 대해 더욱 비판적이 되었다. 일단 정치적 직책을 맡으면 그들이 사회주의적 이상을 배반하고 중도적인 친자본주의적 입장으로 나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호주에서 금지되어 있던 급진 좌파 조직인 세계산업노동자연맹에 가입했다. 1921년 스토리는 차일드를 런던으로 보내 뉴사우스웨일스주의 발전에 대해 영국 언론에 업데이트하도록 했지만, 스토리는 12월에 사망했고 이어진 뉴사우스웨일스 선거에서 조지 풀러를 총리로 하는 내셔널리스트당 정부가 복구되었다. 풀러는 차일드의 직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여 1922년 초 그의 고용을 해지했다.
1.2.2. 런던 정착과 초기 저술
호주에서 학문적 일자리를 찾지 못한 차일드는 영국에 머물렀고, 센트럴 런던의 블룸스버리에 방을 임대하여 영국 박물관과 왕립 인류학 연구소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런던 사회주의 운동의 적극적인 구성원으로서 그는 소호의 1917 클럽에서 좌파들과 교류했다. 그는 영국 공산당 (CPGB)의 구성원들과 친구가 되었고 그들의 출판물인 레이버 먼슬리에 기고했지만, 아직 마르크스주의를 공개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선사학자로서 좋은 평판을 얻었기에 그는 선사시대 유물을 연구하기 위해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초청받았다. 1922년 그는 빈으로 여행하여 부코비나의 스키페니츠에서 발견된 채색 신석기 토기에 대한 미공개 자료를 자연사 박물관의 선사시대 부서에서 조사했고, 그의 연구 결과는 1923년 왕립 인류학 연구소 저널에 발표되었다. 차일드는 이 여행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의 박물관을 방문했으며, 1922년 맨에 기고한 기사에서 이들을 영국 고고학자들에게 알렸다. 런던으로 돌아온 후 1922년 차일드는 존 홉 심슨과 프랭크 그레이를 포함한 세 명의 의원의 개인 비서로 일했는데, 둘 다 중도 좌파 자유당 소속이었다. 이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차일드는 케간 폴, 트렌치, 트뤼브너 & 컴퍼니 출판사의 번역가로 일했고 때때로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선사시대학 강의를 했다.
1923년 런던 노동회사가 그의 첫 책인 하우 레이버 거번스(How Labour Governs)를 출판했다. 이 책은 호주 노동당과 호주 노동운동과의 관계를 다루며, 일단 당선되면 정치인들이 개인적인 안락함을 위해 사회주의적 이상을 버린다는 차일드의 노동당에 대한 환멸을 반영한다. 차일드의 전기 작가 샐리 그린은 하우 레이버 거번스가 영국 노동당이 영국 정치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여 보수당과 자유당의 양당 지배를 위협하던 시기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1923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첫 정부를 구성했다. 차일드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확장한 속편을 계획했지만, 출판되지는 않았다.
1923년 5월 그는 로잔, 베른, 취리히의 박물관을 방문하여 선사시대 유물 컬렉션을 연구했으며, 그해 왕립 인류학 연구소의 회원이 되었다. 1925년 그는 연구소의 사서가 되었는데, 이는 영국에서 유일하게 고고학 관련 직업 중 하나였으며, 이를 통해 유럽 전역의 학자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의 직업은 영국의 작은 고고학 공동체에서 그를 잘 알려지게 했고, 그는 O. G. S. 크로포드 육군 측량국 고고학 담당관과 깊은 우정을 쌓았으며, 크로포드가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로 나아가도록 영향을 미쳤다.
1925년 케간 폴, 트렌치, 트뤼브너 & 컴퍼니는 차일드의 두 번째 책인 유럽 문명의 여명(The Dawn of European Civilisation영어)을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수년간 탐구해 온 유럽 선사시대에 대한 데이터를 종합했다. 중요한 저작이었던 이 책은 유럽 전역에 전문 고고학자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박물관이 지역에 초점을 맞추던 시기에 출판되었으며, 여명은 대륙 전체의 큰 그림을 본 드문 사례였다. 이 책의 중요성은 또한 대륙 학계에서 고고학적 문화의 개념을 영국에 도입하여 문화-역사 고고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차일드는 나중에 이 책이 "고고학적 유물에서 기존의 정치-군사사 대신 문화가 행위자이고 전투 대신 이주가 일어나는 문해 전 시대의 대체를 증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말했다. 1926년 그는 후속작인 아리아인: 인도유럽인의 기원 연구(The Aryans: A Study of Indo-European Origins영어)를 출판했는데, 이 책은 인도유럽어족의 일원인 아리아인을 통해 근동에서 유럽으로 문명이 북쪽과 서쪽으로 확산되었다는 이론을 탐구했다. 그러나 이후 나치 독일이 "아리아인"이라는 용어를 인종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차일드는 이 책의 언급을 피했다. 이들 저작에서 차일드는 확산주의의 온건한 버전을 받아들였다. 즉, 문화적 발전이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경향이 있지만, 동일한 특성이 여러 곳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래프턴 엘리엇 스미스의 과도한 확산주의와 달리, 차일드는 대부분의 문화적 특성이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퍼져나가지만, 동일한 특성이 다른 곳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3. 에든버러 대학교 교수 시기
1927년부터 1946년까지 차일드는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애버크롬비 고고학 교수로 재직하며 연구 및 교육 활동을 수행했다. 이 시기에 그는 소련을 방문한 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심화된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더욱 확고히 했다.
1927년, 에든버러 대학교는 차일드에게 선사학자 애버크롬비 경의 유증으로 설립된 새로운 직책인 애버크롬비 고고학 교수직을 제안했다. 런던을 떠나는 것이 아쉬웠지만, 차일드는 그 직책을 수락하고 1927년 9월 에든버러로 이사했다. 35세의 차일드는 "스코틀랜드에서 유일한 교육직 선사시대 고고학자"가 되었다. 스코틀랜드 고고학자 중 상당수는 차일드를 스코틀랜드 선사시대에 대한 전문성이 없는 외부인으로 여겨 그를 싫어했다. 그는 친구에게 "나는 여기서 증오와 질투의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고 편지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에든버러에서 W. 린지 스콧, 알렉산더 컬리, J. G. 캘린더, 월터 그랜트와 같은 고고학자들과 물리학자 찰스 갤턴 다윈과 같은 비고고학자들과 친구가 되었고, 다윈의 막내아들의 대부가 되었다. 처음에는 리버턴에 머물다가 에글린턴 크레센트의 준주거 호텔 드 베레로 이사했다.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차일드는 강의보다 연구에 집중했다. 그는 학생들에게는 친절했지만, 대중 강연에는 어려움을 겪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많은 학생들은 그의 고고학 학사 과정이 철기 시대부터 시작하여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연대기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혼란스러워했다. 그는 에든버러 선사학자 연맹을 설립하고, 열정적인 학생들을 발굴 현장에 데려가고 초청 강사를 초빙했다. 실험 고고학의 초기 주창자였던 그는 학생들을 자신의 실험에 참여시켰다. 1937년에는 이 방법을 사용하여 북부 영국의 여러 철기 시대 성채에서 나타난 유리화 과정을 조사했다.
차일드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정기적으로 런던을 방문했는데, 그중에는 차일드의 뒤를 이어 에든버러의 애버크롬비 교수가 된 또 다른 영향력 있는 영국 고고학자 스튜어트 피곳이 있었다. 또 다른 친구는 그레이엄 클라크였는데, 차일드는 그와 친구가 되어 그의 연구를 격려했다. 이 세 사람은 이스트 앵글리아 선사학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5년 클라크의 제안으로 그들은 영향력을 행사하여 이를 전국적인 조직인 선사학회로 전환했고, 차일드는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단체의 회원 수는 빠르게 증가하여 1935년에는 353명이었고 1938년에는 668명에 달했다.
차일드는 유럽 대륙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여러 유럽 언어를 독학으로 배웠다. 1935년 그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여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12일을 보냈다. 그는 사회주의 국가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특히 소련 고고학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가졌다. 영국으로 돌아와 그는 열렬한 소련 동조자가 되었고 영국 공산당 기관지 데일리 워커를 열심히 읽었지만, 독소 불가침 조약과 같은 특정 소련 정책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적이었다. 그의 사회주의 신념은 유럽 파시즘에 대한 초기 비난으로 이어졌고, 그는 나치 독일이 자신들의 아리아인 인종 유산을 찬양하기 위해 선사시대 고고학을 도용한 것에 분노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 정부가 파시스트 세력과 싸우기로 한 결정에 지지적이었던 그는 자신이 나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고, 나치가 영국을 점령할 경우 운하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파시스트 독일과 이탈리아에 반대했지만, 그는 영국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정부도 비판했다. 그는 후자를 "끔찍한 파시스트 하이에나들"로 반복해서 묘사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미국 방문을 막지는 못했다. 1936년 그는 하버드 대학교 300주년 기념 예술 과학 회의에서 연설했고, 그곳에서 대학은 그에게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39년 그는 다시 방문하여 하버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강연했다.
1.3.1. 주요 발굴 조사
차일드의 교수직은 그에게 고고학 발굴을 수행할 의무를 부여했지만, 그는 발굴을 몹시 싫어했고 자신이 잘 못한다고 생각했다. 학생들도 그의 발굴 실력에 동의했지만, "증거를 해석하는 그의 천재성"은 인정했다. 다른 많은 동시대인들과 달리, 그는 발굴 결과를 꼼꼼하게 정리하고 출판했으며, 거의 매년 스코틀랜드 고대 유물 학회 회보에 보고서를 제출했고, 특이하게도 모든 발굴자의 도움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발굴은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오크니 제도의 스카라 브레에서 이루어졌다. 잘 보존된 신석기 시대 마을을 발굴한 후, 1931년 그는 발굴 결과를 스카라 브레(Skara Brae)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그러나 그는 이 유적지를 철기 시대로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발굴 도중 차일드는 현지 주민들과 특히 잘 지냈다. 주민들에게 그는 그의 괴짜 같은 외모와 습관 때문에 "모든 면에서 교수"였다. 1932년 차일드는 인류학자 C. 데릴 포드와 협력하여 베릭셔 해안의 언스 휴(Earn's Hugh)에 있는 두 개의 철기 시대 산성을 발굴했다. 1935년 6월에는 북아일랜드 녹소기(Knocksoghey) 근처 라리반(Larriban)에 있는 곶성을 발굴했다. 스코틀랜드 고대 유물 학회 회원인 월리스 쏜이크로프트와 함께 차일드는 스코틀랜드 앵거스의 피나본(Finavon, 1933~1934)과 아르길셔의 라호이(Rahoy, 1936~1937)에 있는 두 개의 유리화된 철기 시대 성채를 발굴했다. 1938년 그와 월터 그랜트는 신석기 시대 정착지 리뇨(Rinyo) 발굴을 감독했다. 그들의 조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중단되었지만, 1946년에 재개되었다.
1.3.2. 주요 저서 활동
차일드는 고고학 서적을 계속 집필하고 출판했으며, 유럽 문명의 여명과 아리아인에 이어 유럽 전역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종합하는 일련의 저작들을 시작했다. 첫 번째는 메소포타미아와 인도의 정보를 모아 농업 및 기타 기술의 유럽 전파를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을 제시한 가장 오래된 근동(The Most Ancient Near East, 1928)이었다. 이어서 1929년에는 다뉴브강을 따라 고고학을 조사한 선사시대의 다뉴브(The Danube in Prehistory)를 출판했는데, 다뉴브강을 근동과 유럽을 나누는 자연적인 경계로 인식했다. 차일드는 새로운 기술이 다뉴브강을 통해 서쪽으로 이동했다고 믿었다. 차일드가 이전 출판물에서 문화-역사적 접근법을 사용했지만, 선사시대의 다뉴브는 그가 고고학적 문화의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를 제공한 첫 번째 출판물로, 영국 고고학의 이론적 접근 방식을 혁신했다.
차일드는 선사시대의 다뉴브에서 "우리는 토기, 도구, 장신구, 매장 의례, 가옥 형태와 같은 특정 유형의 유물들이 지속적으로 함께 나타나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규칙적으로 연관된 특성들의 복합체를 우리는 '문화 집단' 또는 단순히 '문화'라고 부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복합체가 오늘날 '민족'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의 물질적 표현이라고 가정합니다."라고 정의했다.
차일드의 다음 책인 청동기 시대(The Bronze Age, 1930)는 유럽의 청동기 시대를 다루었으며, 사회가 어떻게 기능하고 변화하는지 이해하는 수단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더욱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금속이 최초의 필수적인 상업 품목이며, 따라서 금속 세공업자들이 잉여 생산물로 생활하는 전업 전문가라고 믿었다. 1933년, 차일드는 이라크("매우 즐거웠다")와 인도("덥고 극심한 빈곤 때문에 혐오스러웠다")를 방문하며 아시아를 여행했다. 두 나라의 고고학 유적지를 둘러본 그는 가장 오래된 근동에서 자신이 썼던 많은 내용이 구식이라고 생각하고, 1935년에 가장 오래된 근동에 대한 새로운 빛(New Light on the Most Ancient Near East)을 집필하여 경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영향을 받은 아이디어를 결론에 적용했다.
스코틀랜드 선사시대(Prehistory of Scotland, 1935)를 출판한 후, 차일드는 그의 경력을 대표하는 책 중 하나인 인간은 자신을 만든다(Man Makes Himself, 1936)를 집필했다.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의 영향을 받아, 차일드는 (문해 이전의) 선사시대와 (문해 이후의) 역사의 일반적인 구분이 잘못된 이분법이라고 주장하며, 인류 사회는 일련의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혁명을 통해 발전했다고 보았다. 여기에는 수렵-채집인들이 영구적인 농업 공동체에 정착하기 시작한 신석기 혁명부터 작은 마을에서 최초의 도시로 사회가 이동한 도시 혁명, 그리고 생산의 본질을 바꾼 산업 혁명에 이르기까지가 포함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차일드는 유럽을 여행할 수 없게 되자 영국 제도 선사시대 공동체(Prehistoric Communities of the British Isles, 1940)를 집필하는 데 집중했다. 전쟁 결과에 대한 차일드의 비관론은 그가 "유럽 문명-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 모두-은 돌이킬 수 없이 암흑 시대로 향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러한 심리 상태에서 그는 인간은 자신을 만든다의 속편인 역사에서 일어난 일(What Happened in History, 1942)을 저술했는데, 이는 구석기 시대부터 로마 제국의 몰락에 이르는 인류 역사를 다룬 책이었다.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가 이 책의 출판을 제안했지만, 그는 펭귄 북스를 통해 출판했는데, 더 저렴한 가격에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이는 그가 "대중"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데 중요하다고 믿는 바였다. 이어서 두 권의 짧은 저작인 진보와 고고학(Progress and Archaeology, 1944)과 도구 이야기(The Story of Tools, 1944)가 출판되었는데, 후자는 청년 공산주의 연맹을 위해 작성된 명백히 마르크스주의적인 텍스트였다.
1.4. 런던 고고학 연구소 소장 시기
1946년, 차일드는 에든버러를 떠나 런던 UCL 고고학 연구소 (IOA)의 유럽 선사시대학 소장 겸 교수로 취임했다.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그는 직책을 얻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정부 정책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는 햄프스테드 근처의 아이소콘 건물에 거주했다.

리젠트 파크 내부 원형 도로의 세인트 존스 로지에 위치한 IOA는 주로 고고학자 모티머 휠러에 의해 1937년에 설립되었지만, 1946년까지는 주로 자원봉사 강사에게 의존했다. 보수적인 휠러와 차일드의 관계는 긴장 상태였다. 그들의 성격이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휠러는 외향적이고 주목받기를 추구하며 효율적인 행정가였고 타인의 결점을 용납하지 않았지만, 차일드는 행정 능력이 부족하고 타인에게 관대했다. 차일드는 연구소 학생들 사이에서 친절한 괴짜로 인기가 많았다. 학생들은 마조리 메이틀랜드 하워드에게 차일드의 흉상을 의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강의는 종종 중얼거리고, 말을 하면서 인접한 방으로 무언가를 찾으러 가는 등 서툴렀다. 그는 또한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을 공식 명칭으로 언급하고, 도시들을 영어로 더 잘 알려진 이름 대신 슬라브어 이름으로 언급하여 학생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그는 튜토리얼과 세미나에서는 학생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교류했기 때문에 더 나은 평가를 받았다. 소장으로서 차일드는 발굴을 할 의무가 없었지만, 오크니의 신석기 시대 매장 무덤인 퀴네스 통로무덤 (1951년)과 매스하우 (1954~1955년)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1949년, 그와 크로포드는 런던 고대 유물 학회의 회원직을 사임했다. 이는 런던 타워의 무기고 관리인이었던 제임스 만이 학회 회장으로 선정된 것에 항의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들은 휠러(전문 고고학자)가 더 나은 선택이라고 믿었다. 차일드는 1952년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이 창립한 정기 간행물 과거와 현재의 편집위원회에 합류했다. 1950년대 초반에는 모던 쿼털리-이후 마르크스주의 쿼털리-의 이사회에도 참여하여 옥스퍼드 시절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룸메이트였던 라자니 팔메 더트와 함께 일했다. 그는 팔메 더트의 사회주의 저널 레이버 먼슬리에 가끔 기사를 기고했지만, 1956년 헝가리 혁명에 대해서는 그와 의견이 달랐다. 팔메 더트는 소련이 군사력을 사용하여 혁명을 진압한 결정을 옹호했지만, 차일드는 많은 서구 사회주의자들처럼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이 사건으로 차일드는 소련 지도부에 대한 믿음을 버렸지만,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믿음은 버리지 않았다. 그는 여러 차례 방문했던 소련에 대한 애정을 유지했으며, 영국 공산당의 위성 기구인 소련 문화 관계 협회에 참여했고, 1950년대 초부터 사망할 때까지 그 협회의 국립 역사 및 고고학 섹션 회장을 역임했다.
1956년 4월, 차일드는 고고학에 대한 공로로 고대 유물 학회 금메달을 수상했다. 그는 로버트 브레이드우드, 윌리엄 던컨 스트롱, 레슬리 화이트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미국 강연 초청을 받았지만, 미국 국무부는 그의 마르크스주의 신념 때문에 그의 입국을 금지했다. 연구소에서 일하는 동안 차일드는 고고학 관련 서적을 계속 집필하고 출판했다. 역사(History, 1947)는 과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을 제시하고 선사시대와 문해 이전의 역사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차일드의 믿음을 재확인했으며, 유럽 선사시대 이주(Prehistoric Migrations, 1950)는 온건한 확산주의에 대한 그의 견해를 보여주었다. 1946년 그는 남서부 인류학 저널에 "고고학과 인류학"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고고학과 인류학 학문이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 접근 방식은 그의 사망 후 수십 년 동안 널리 받아들여졌다.
1.5. 은퇴와 사망
1956년 중반, 차일드는 IOA 소장직에서 예정보다 1년 일찍 은퇴했다. 1950년대에 유럽 고고학이 급속도로 확장되어 전문화가 심화되면서 차일드가 알려진 통합 작업이 점점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해 연구소는 블룸스버리의 고든 스퀘어로 이전할 예정이었고, 차일드는 후임인 W. F. 그림스에게 새로운 환경에서 신선한 시작을 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선사학회 회보는 그의 소장 재임 마지막 날 전 세계 친구들과 동료들의 기고문이 담긴 헌정 논문집(Festschrift)을 출판했고, 이는 차일드를 깊이 감동시켰다.
은퇴 후 그는 많은 친구들에게 호주로 돌아가 친척들을 방문한 후 자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늙고 노쇠해져 사회에 짐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암에 걸렸을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이후 평론가들은 그의 자살 욕구의 주요 원인이 헝가리 혁명과 니키타 흐루쇼프의 이오시프 스탈린 비판 이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믿음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브루스 트리거는 이러한 설명을 일축하며, 차일드가 소련의 외교 정책에 비판적이었지만 국가와 마르크스주의를 동일시하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차일드는 자신의 일을 정리하면서 대부분의 서재와 모든 재산을 연구소에 기증했다. 1957년 2월 지브롤터와 스페인의 고고학 유적지를 방문한 휴가를 보낸 후, 그는 호주로 항해하여 65세 생일에 시드니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한때 그를 고용을 거부했던 시드니 대학교는 그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 그는 6개월 동안 전국을 여행하며 가족과 오랜 친구들을 만났지만, 호주 사회에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는 호주 사회가 반동적이고 점점 더 교외화되며 교육 수준이 낮다고 믿었다. 호주 선사시대를 조사하면서 그는 이를 유망한 연구 분야로 여겼으며, 이 주제와 다른 주제에 대해 고고학 및 좌익 단체에서 강연하고, 호주 라디오에 출연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 대한 학문적 인종차별을 비판했다.
그는 많은 친구들에게 개인적인 편지를 썼고, 그 중 하나는 그림스에게 보낸 것으로 1968년까지 열지 말라고 요청했다. 편지에서 그는 노화에 대한 두려움을 묘사하며 자신의 삶을 끝내려는 의도를 밝혔고, "행복하고 강할 때 삶이 가장 잘 끝난다"고 말했다. 1957년 10월 19일, 차일드는 자신이 자란 블루마운틴 지역인 블랙히스의 고베츠 리프 지역으로 향했다. 그는 절벽에 모자, 안경, 나침반, 파이프, 매킨토시 레인코트를 남겨두고 300 m 아래로 떨어져 사망했다. 검시관은 그의 사망을 사고사로 판정했지만, 1980년대 그림스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면서 그의 죽음은 자살로 인정되었다. 그의 유해는 노던 서버브스 화장터에서 화장되었고, 그의 이름은 화장터 정원의 작은 가족 명판에 추가되었다. 그의 사망 후 고고학 공동체에서는 "전례 없는" 수준의 추모와 기념 행사가 이어졌으며, 루스 트링험에 따르면 이는 그가 유럽의 "가장 위대한 선사학자이자 훌륭한 인간"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2. 고고학 이론과 사상
차일드의 전기 작가 샐리 그린은 차일드의 신념이 "결코 독단적이지 않았고, 항상 특이했으며", "평생 동안 끊임없이 변화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확산주의, 그리고 구조 기능주의의 요소를 혼합한 이론적 접근법을 사용했다. 차일드는 19세기 동안 지배적이었던 진화론적 고고학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이를 따르는 고고학자들이 유물을 만든 인간보다는 유물 자체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고 믿었다. 당시 서유럽과 미국의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처럼, 차일드는 인간을 본래 창의적이거나 변화를 추구하는 존재로 보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사회 변화를 내부적 발전이나 문화적 진화보다는 확산과 이주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차일드가 활동하던 수십 년 동안,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덴마크 골동품학자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이 처음 개발한 삼시기 시대 구분법을 따랐다. 이 체계는 선사시대를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나누는 진화론적 연대기에 기반했지만, 차일드는 세계의 많은 사회가 여전히 기술적으로는 실질적으로 석기 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모델이 마르크스주의적 틀과 결합될 때 사회경제적 발전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모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선사시대를 세 시대로 나누는 데 기술적 기준을 사용했지만, 석기 시대를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로 세분화하는 데는 경제적 기준을 사용했으며, 중석기 시대의 개념은 쓸모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비공식적으로 엥겔스가 사용했던 "야만", "미개", "문명"의 틀을 과거 사회를 나누는 데 채택했다.
2.1. 문화-역사 고고학
차일드는 경력 초기에 문화-역사 고고학 접근법의 주창자였으며, 그 "창립자이자 주요 주창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문화-역사 고고학은 인류학에서 채택된 "고고학적 문화"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고고학자들이 과거를 시간적 역동성보다는 공간적 역동성을 통해 바라볼 수 있게 한 "학문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차일드는 "문화" 개념을 독일의 언어학자이자 고고학자인 구스타프 코시나로부터 채택했는데, 이 영향은 코시나의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차일드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폴란드 고고학자 레온 코즈워프스키를 통해 전달되었을 수도 있다. 트리거는 차일드가 코시나의 기본 개념을 채택하면서도 코시나가 부여했던 "인종차별적 함의"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차일드의 문화-역사 모델에 대한 고수는 그의 세 권의 책-유럽 문명의 여명(1925), 아리아인(1926), 가장 오래된 근동(1928)-에서 분명히 드러나지만, 이들 중 어느 책에서도 그는 "문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하지 않았다. 오직 나중에 선사시대의 다뉴브(1929)에서야 차일드는 "문화"에 고고학적인 정의를 부여했다. 이 책에서 그는 "문화"를 특정 지역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물질문화-즉, "토기, 도구, 장신구, 매장 의례, 가옥 형태"-에서 "규칙적으로 연관된 특징들"의 집합으로 정의했다. 그는 이러한 점에서 "문화"가 "민족"의 고고학적 등가물이라고 말했다. 차일드의 용어 사용은 비인종적이었다. 그는 "민족"을 생물학적 인종이 아닌 사회적 집단으로 간주했다. 그는 당시 유럽 전역의 다양한 민족주의자들이 그러했듯이 고고학적 문화를 생물학적 인종과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나치 독일의 고고학 사용을 맹렬히 비판하며 유대인이 별개의 생물학적 인종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1935년, 그는 문화가 "살아있는 기능하는 유기체"처럼 작동한다고 제안했으며 물질문화의 적응 잠재력을 강조했다. 이 점에서 그는 인류학적 구조 기능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차일드는 고고학자들이 물질적 기준의 주관적인 선택에 기반하여 "문화"를 정의한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이러한 견해는 나중에 콜린 렌프루와 같은 고고학자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
경력 후반에 차일드는 문화-역사 고고학에 싫증을 느꼈다. 1940년대 후반에는 고고학적 개념으로서 "문화"의 유용성과 문화-역사적 접근법의 기본적인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맥네어른은 "문화"라는 용어가 당시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차일드가 했던 물질문화뿐만 아니라 모든 학습된 행동 양식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면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940년대까지 차일드는 특정 고고학적 집합체 또는 "문화"가 공유된 언어와 같은 다른 통합적 특성을 가진 사회 집단을 실제로 반영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1950년대에 차일드는 선사학자들 사이에서 문화-역사 고고학이 차지하는 역할을 역사가들 사이에서 전통적인 정치-군사적 접근법이 차지하는 위치와 비교했다.
2.2. 마르크스주의 고고학
차일드는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 고고학자로 간주되며, 서구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자신의 연구에 사용한 최초의 고고학자였다. 마르크스주의 고고학은 1929년 소련에서 고고학자 블라디슬라프 라브도니카스가 "소련 물질문화사를 위하여"라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등장했다. 이 보고서는 고고학 학문이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적이며 따라서 반사회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이오시프 스탈린 통치 하의 학문 개혁의 일환으로 친사회주의적 마르크스주의적 고고학 접근법을 요구했다. 차일드가 자신의 연구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중반, 즉 그가 소련을 처음 방문했을 무렵이었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정치적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역사적 유물론적 철학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물질적인 것이 관념보다 더 중요하며, 특정 시기의 사회적 조건이 기존의 물질적 조건, 즉 생산 양식의 결과라는 생각을 강조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모든 기술 발전이나 변화의 사회적 맥락을 전면에 내세운다.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또한 학문의 편향된 본질, 즉 각 학자가 자신만의 뿌리 깊은 신념과 계급적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인이 자신의 학문적 사고를 정치적 행동과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린은 차일드가 "과거 모델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인 것은 그들이 "경제, 사회학,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문화에 대한 구조적 분석과 경제를 통한 문화 변화의 원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맥네어른은 마르크스주의가 "차일드의 사상에서 주요한 지적 원동력"이었다고 언급했으며, 트리거는 차일드가 마르크스의 이론에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 동일시했다고 말했다.
1938년 라자니 팔메 더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든 차일드는 "나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적, 고고학적 자료를 해석하는 접근 방식이자 방법론적 도구를 의미하며, 그것이 작동하기 때문에 그리고 작동하는 한에서 나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일반적인 공산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 모두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일련의 교리를 의미한다-중세 학자들이 그러했듯이, 과학자들이 실험과 관찰을 통해 추론하기를 바라는 진실을 스승의 말씀으로부터 추론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차일드는 과거를 해석할 때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그것이 작동하기 때문에" 사용했다고 말했으며, 많은 동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정치 이론을 교리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차일드의 마르크스주의는 종종 동시대인들의 마르크스주의와 달랐는데, 이는 그가 후대의 해석보다는 헤겔, 마르크스, 엥겔스의 원본 텍스트를 참조했고, 그들의 저작을 선별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맥네어른은 차일드의 마르크스주의를 "인기 있거나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개별적인 해석"으로 보았으며, 트리거는 그를 "창의적인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라고 불렀다. 개더콜은 차일드의 "마르크스에 대한 빚은 분명했지만", 그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태도는 때때로 양가적"이었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훗날 차일드를 "나의 젊은 시절 이래 가장 독창적인 영국 마르크스주의 작가"라고 묘사했다. 냉전의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와의 제휴가 자신에게 위험할 수 있음을 인지한 차일드는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독자들이 더 받아들이기 쉽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의 고고학 저술에서 그는 마르크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아꼈다. 그의 생애 후반에 출판된 작품들에는 명백히 마르크스주의적인 것과 마르크스주의적 사상과 영향이 덜 분명한 것 사이에 구별이 있다. 많은 차일드의 동료 영국 고고학자들은 그의 마르크스주의 신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가 충격 효과를 위해 한 행동으로 여겼다.
1979년에 출판된 고든 차일드의 글에서 그는 "역사와 선사시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은 분명히 물질 결정론적이고 유물론적이다. 그러나 그 결정론이 기계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은 사실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역사적 과정이 설명할 수 없거나 기적적인 사건들의 단순한 연속이 아니라, 모든 구성 요소들이 서로 연관되어 지적인 패턴을 형성한다고 가정하는 한에서 결정론적이다."라고 언급했다.
차일드는 소련 고고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소련 정부가 고고학자들에게 데이터를 분석하기 전에 결론을 가정하도록 부추기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또한 소련 고고학에서 유형론에 대한 부실한 접근 방식이라고 본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온건한 확산주의자로서 차일드는 조지아 언어학자 니콜라스 마르의 이론에 기반한 소련 고고학의 "마리즘"(Marrist) 경향에 대해 강하게 비판적이었다. 마리즘은 확산주의를 거부하고 일원적 진화론을 선호했다. 그의 견해로는, 확산주의를 통해 가축화된 식물, 동물, 사상의 확산을 이해하는 것은 "비마르크스주의적일 수 없다"고 보았다. 차일드는 이러한 소련 동료들에 대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공산주의 친구들을 불쾌하게 하거나 우익 고고학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소련의 고고학 및 유산 관리 시스템을 공개적으로 칭찬했으며, 영국과 비교하여 고고학자들 간의 경쟁보다는 협력을 장려한다는 점에서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1935년 처음 소련을 방문한 후, 그는 1945년, 1953년, 1956년에 다시 방문하여 많은 소련 고고학자들과 친구가 되었지만, 자살 직전 소련 고고학 공동체에 "방법론적으로 서유럽과 북미에 뒤처져 매우 실망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조지 더웬트 톰슨과 닐 포크너와 같은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차일드의 고고학 작업이 계급 투쟁을 사회 변화의 수단으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핵심 원리이다. 차일드는 자신의 고고학 작업에서 계급 투쟁을 고려하지 않았지만, 역사가와 고고학자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통해 과거를 해석하며, 동시대 학자들 대부분이 내재된 부르주아적 의제를 가지고 연구를 수행한다고 인정했다. 차일드는 방법론에서 변증법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더욱 멀어졌고, 인류 사회의 미래 발전을 예측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능력을 부정했으며, 다른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인류의 진보가 순수 공산주의로 필연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대신 사회가 화석화되거나 멸종할 수 있다고 보았다.
2.3. 신석기 혁명과 도시 혁명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차일드는 사회가 산업 혁명과 같은 현대적 사례를 인용하며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안에 광범위한 변화를 겪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초기 저작에는 없었다. 유럽 문명의 여명과 같은 연구에서는 사회 변화를 "혁명"보다는 "이행"으로 언급했다. 1930년대 초반의 저작들, 예를 들어 가장 오래된 근동에 대한 새로운 빛에서는 사회 변화를 "혁명"이라는 용어로 묘사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이러한 아이디어를 완전히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이 시점에서 "혁명"이라는 용어는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으로 인해 마르크스주의적 연관성을 얻었다. 차일드는 1935년 선사학회 회장 연설에서 자신의 "혁명"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표했다. 그는 이 개념을 삼시기 시대 구분법에 대한 기능적-경제적 해석의 일부로 제시하면서, "신석기 혁명"이 신석기 시대를 시작했으며, 다른 혁명들이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고 주장했다. 이듬해 인간은 자신을 만든다에서 그는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 혁명을 단일한 "도시 혁명"으로 통합했는데, 이는 인류학자 루이스 헨리 모건의 "문명" 개념과 대체로 일치했다.
차일드에게 신석기 혁명은 급진적인 변화의 시기였는데, 이때 인간(당시 수렵-채집인)은 식량을 위해 식물을 경작하고 동물을 사육하기 시작하여 식량 공급과 인구 성장을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도시 혁명이 주로 청동 야금술의 발달로 인해 발생했다고 믿었으며, 1950년 논문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에서 발견되었다고 믿는 10가지 특징을 제시했다. 이들은 초기 정착지보다 크고, 전업 장인 전문가가 있으며, 잉여 생산물이 수집되어 신이나 왕에게 바쳐지고,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증축되었으며, 사회적 잉여의 불평등한 분배가 있었고, 문자가 발명되었으며, 과학이 발달했고, 자연주의 예술이 발달했으며, 해외와의 무역이 증가했고, 국가 조직이 친족 관계보다는 거주지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이다. 차일드는 도시 혁명에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계급으로의 사회적 계층화와 권력 엘리트에 의한 다수의 억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고고학자들이 인류 사회 발전의 틀을 일련의 변혁적인 "혁명"으로 이해하는 차일드의 틀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은 농업 및 도시 개발 과정이 점진적인 변화였기 때문에 "혁명"이라는 용어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믿었다.
2.4. 후대 고고학에 미친 영향
차일드의 연구는 그의 사망 후 수십 년 동안 발전한 영미 고고학의 두 가지 주요 이론적 흐름인 과정 고고학과 탈과정 고고학에 기여했다. 과정 고고학은 1950년대 후반에 등장했으며, 고고학이 인류학의 한 분야여야 한다는 생각을 강조하고, 사회에 대한 보편적인 법칙의 발견을 추구했으며, 고고학이 과거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탈과정 고고학은 1970년대 후반에 과정 고고학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으며, 고고학이 과거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모든 해석의 주관성을 강조했다.
과정 고고학자 콜린 렌프루는 차일드를 "선사시대의 경제적, 사회적 주제를 발전시킨" 공로로 "과정적 사고의 아버지 중 한 명"이라고 묘사했으며, 이는 포크너도 동의하는 바였다. 트리거는 차일드의 연구가 두 가지 방식으로 과정적 사고를 예고했다고 주장했다. 사회 발전에서 변화의 역할을 강조하고, 과거에 대한 엄격하게 유물론적인 시각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그러했으며, 이 두 가지 모두 차일드의 마르크스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연결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미국 과정 고고학자들은 차일드의 연구를 무시했는데, 그를 사회 행동의 일반화된 법칙을 찾는 자신들의 연구와 관련 없는 특수주의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따라, 차일드는 그러한 일반화된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했으며, 행동이 보편적이지 않고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해 조건화된다고 믿었다. 런던 고고학 연구소 소장으로 차일드의 후임 중 한 명이었던 피터 우코는 차일드가 고고학적 해석의 주관성을 받아들였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는 고고학적 해석이 객관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과정 고고학자들의 주장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결과적으로 트리거는 차일드를 "원형적인 탈과정 고고학자"로 보았다.
3. 개인 생활
차일드의 전기 작가 샐리 그린은 차일드가 진지한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으며, 동성애적 매력의 증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이성애자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반대로 그의 학생 돈 브로스웰은 그가 동성애자였다고 생각했다. 그는 남녀 불문하고 많은 친구를 두었지만, 여전히 "서투르고 무례했으며, 어떠한 사회적 우아함도 없었다". 타인과 관계 맺는 데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학생들과 교류하고 사교하는 것을 즐겼으며, 종종 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도 했다. 그는 수줍음이 많았고 종종 개인적인 감정을 숨겼다. 브로스웰은 이러한 성격 특성이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받지 않은 것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차일드는 과거 연구가 인간이 현재와 미래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급진 좌익 견해로 유명했으며, 학부 시절부터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여러 좌익 단체의 위원회에 참여했지만, 공산당 내의 마르크스주의 지적 논쟁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하우 레이버 거번스를 제외하고는 그의 비고고학적 견해를 인쇄물로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많은 정치적 견해는 개인 서신에 언급된 내용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렌프루는 차일드가 사회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적인 사고를 가졌지만, 인종차별을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 간의 뚜렷한 차이에 대한 만연한 19세기적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언급했다. 트리거 또한 차일드의 초기 문화-역사 저술에서 노르딕 민족이 "신체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을 포함한 인종차별적 요소가 있었음을 지적했지만, 차일드는 나중에 이러한 아이디어를 부인했다. 개인적인 편지에서 차일드는 고고학자 크리스토퍼 호크스에게 자신이 유대인을 싫어한다고 썼다.
차일드는 무신론자였고 종교를 비판했으며, 종교를 지배 엘리트의 이익에 봉사하는 미신에 기반한 허위 의식으로 보았다. 역사(History, 1947)에서 그는 "마법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방법인 반면, 종교는 그들이 얻는 것을 원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시스템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를 (그가 보기에) 원시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여겼으며, "사랑의 종교로서 기독교는 긍정적인 미덕을 자극하는 데 다른 모든 종교를 능가한다"고 언급했다. 1930년대에 쓴 편지에서 그는 "극도로 심기가 불편한 날에만 사람들의 종교적 신념을 해치고 싶다"고 말했다.
차일드는 자동차 운전을 좋아했으며, 자동차에서 얻는 "힘의 느낌"을 즐겼다. 그는 런던 피카딜리를 새벽 세 시에 순전히 즐거움을 위해 고속으로 질주하다가 경찰에게 붙잡혔던 이야기를 종종 했다. 그는 장난을 좋아했으며, 소매치기를 속이기 위해 주머니에 하프 페니를 보관했다고 한다. 한번은 선사학회 회의의 대표단에게 신석기 기념물인 우드헨지가 졸부 추장이 스톤헨지를 모방하여 건설되었다는 이론을 강연하여 장난을 치기도 했는데, 일부 청중은 그가 농담하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여러 유럽어를 구사할 수 있었는데, 젊은 시절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독학으로 배웠다.
차일드의 다른 취미로는 영국 언덕을 걷는 것, 클래식 음악 콘서트에 참석하는 것, 카드 게임 컨트랙트 브리지를 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시를 좋아했으며,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존 키츠였고, 가장 좋아하는 시는 윌리엄 워즈워스의 "의무에 바치는 송가"와 로버트 브라우닝의 "문법학자의 장례식"이었다. 그는 소설 읽기에 특별히 관심이 없었지만,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D. H. 로렌스의 캥거루(1923)였는데, 이 책은 호주에 대한 차일드 자신의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는 양질의 음식과 음료를 좋아했으며, 레스토랑에 자주 다녔다. 낡고 해진 의상으로 유명했던 차일드는 항상 센트럴 런던의 저민 스트리트에 있는 모자 가게에서 구입한 넓은 챙의 검은 모자와 주로 붉은색의 넥타이를 매고 다녔는데, 이는 그의 사회주의 신념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그는 검은색 매킨토시 레인코트를 정기적으로 입었으며, 종종 팔에 걸치거나 망토처럼 어깨에 걸쳤다. 여름에는 양말, 양말 서스펜더, 큰 부츠와 함께 반바지를 자주 입었다.

4. 평가와 영향
차일드는 20세기 가장 잘 알려지고 많이 인용되는 고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되며, 그의 방대한 저술과 독창적인 이론은 후대 고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특히 근동과 유럽 선사시대를 통합한 "위대한 통합자"로 기억되지만,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과 같은 새로운 발견으로 인해 그의 일부 해석은 재평가되거나 부정되기도 했다. 대중문화에서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그의 학문적 업적이 언급되기도 한다.
4.1. 학술적 평가
차일드가 사망하자 그의 동료 스튜어트 피곳은 그를 "영국 그리고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사학자"라고 칭송했다. 고고학자 랜들 H. 맥과이어는 훗날 그를 "아마도 20세기 가장 잘 알려지고 많이 인용된 고고학자"라고 묘사했으며, 브루스 트리거도 동의했다. 바버라 맥네어른은 그를 "학문에서 가장 뛰어나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라고 불렀고, 고고학자 앤드루 셰럿은 차일드가 고고학 "역사에서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묘사했다.
셰럿은 또한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차일드의 저술량은 엄청났다"고 언급했다. 그의 경력 동안 차일드는 20권이 넘는 책과 약 240편의 학술 논문을 출판했다. 고고학자 브라이언 패건은 그의 책들을 "단순하고 잘 쓰인 서사"로 묘사하며 "1930년대와 1960년대 초반 사이에 고고학의 표준"이 되었다고 말했다. 1956년까지 그는 역사상 가장 많이 번역된 호주 작가로 언급되었으며, 그의 책들은 중국어, 체코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힌디어, 헝가리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스웨덴어, 터키어 등 다양한 언어로 출판되었다. 2005년 데이비드 루이스-윌리엄스와 데이비드 피어스는 차일드를 역사상 "아마도 가장 많이 언급된" 고고학자라고 평가하며, 그의 책들이 2005년에도 여전히 이 분야의 "필수 독서"였다고 언급했다. 2024년 현재 시드니 대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서 비어 고든 차일드 센터를 명명했다.
1958년 고든 차일드는 "내가 선사시대에 기여했을지 모르는 가장 독창적이고 유용한 공헌은 화려한 발굴로 흙 속에서 또는 인내심 있는 연구로 먼지 쌓인 박물관 케이스에서 구출된 새로운 자료도 아니고, 잘 정립된 연대기적 체계나 새롭게 정의된 문화도 아니며, 오히려 해석적 개념과 설명 방법이다"라고 언급하며 자신의 주요 기여가 해석적 틀에 있음을 강조했다.
"위대한 통합자"로 알려진 차일드는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지역 유적지와 순서에 집중하던 시기에 유럽과 근동 선사시대를 종합한 연구를 발전시킨 공로로 주로 존경받는다. 그의 사망 이후,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의 발견으로 인해 이러한 틀은 크게 수정되었고, 그의 해석은 "대부분 거부"되었으며,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유럽에 대한 그의 많은 결론은 부정확한 것으로 밝혀졌다. 차일드 자신은 고고학에 대한 자신의 주요 기여가 해석적 틀에 있다고 믿었으며, 앨리슨 래베츠와 피터 개더콜도 이러한 분석에 동의했다. 셰럿에 따르면: "그의 해석에서 영구적인 가치를 지닌 것은 그가 묘사한 자료에서 패턴을 인식하는 것과 관련된 더 상세한 수준의 글쓰기이다. 그의 설명이 부적절하다고 인정될 때조차도 유럽 선사시대의 고전적 문제로 남아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패턴들이다." 차일드의 이론적 연구는 그의 생애 동안 대체로 무시되었고, 사망 후 수십 년 동안 잊혀졌지만,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다시 부활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20세기 후반 내내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핵심 이론적 흐름으로 남아있던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었다.
그의 전 세계적인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차일드의 연구는 미국에서는 잘 이해되지 못했다. 그의 유럽 선사시대 연구는 미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미국에서 그는 줄리안 스튜어드와 레슬리 화이트와 함께 신진화론의 창시자이자 근동 전문가라는 잘못된 평판을 얻었지만, 그의 접근 방식은 그들의 것보다 "더 미묘하고 미묘했다". 스튜어드는 자신의 "다계통" 진화론적 접근법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과 구별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차일드를 일선 진화론자로 반복적으로 오해했다. 이러한 미국의 무시와 오해와 대조적으로, 트리거는 미국의 고고학자 로버트 매코믹 애덤스 주니어가 차일드의 "가장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사후에 가장 많이 발전시켰다고 믿었다. 차일드는 또한 1940년대에 프란츠 보아스의 특수주의가 학문 내에서 지배적이었던 수년간의 기간 이후에 유물론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 아이디어를 연구에 다시 도입하기를 원했던 소수의 미국 고고학자 및 인류학자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그의 이름이 2008년 블록버스터 영화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에서도 언급되었다.
4.2. 학술 대회 및 출판
차일드의 사망 후, 그의 고고학적 영향력을 분석하는 여러 논문이 발표되었다. 1980년 브루스 트리거의 고든 차일드: 고고학의 혁명(Gordon Childe: Revolutions in Archaeology)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차일드의 고고학적 사상에 영향을 미친 요소들을 연구한 책이었다. 같은 해 바버라 맥네어른의 V. 고든 차일드의 방법과 이론(The Method and Theory of V. Gordon Childe)이 출판되어 그의 방법론적 및 이론적 고고학 접근법을 다루었다. 이듬해 샐리 그린은 선사학자: V. 고든 차일드의 전기(Prehistorian: A Biography of V. Gordon Childe)를 출판했으며, 이 책에서 그녀는 그를 "20세기 유럽 선사시대에서 가장 저명하고 영향력 있는 학자"라고 묘사했다. 피터 개더콜은 트리거, 맥네어른, 그린의 연구가 "극도로 중요했다"고 생각했으며, 트링햄은 이를 "차일드를 더 잘 알자" 운동의 일부로 간주했다.
1986년 7월, 인간은 자신을 만든다 출판 50주년을 기념하여 멕시코시티에서 차일드의 연구에 전념하는 콜로키움이 개최되었다. 1990년 9월, 퀸즐랜드 대학교 호주 연구 센터는 브리즈번에서 차일드의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조직하여 그의 학술적 및 사회주의적 작업을 검토하는 발표가 진행되었다. 1992년 5월, 런던 UCL 고고학 연구소에서 연구소와 선사학회(모두 그가 이전에 이끌었던 조직)가 공동 후원하는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학술대회의 논문집은 연구소 소장 데이비드 R. 해리스가 편집한 1994년판 V. 고든 차일드의 고고학: 현대적 관점(The Archaeology of V. Gordon Childe: Contemporary Perspectives)으로 출판되었다. 해리스는 이 책이 "차일드 사상의 역동적인 특성, 그의 학문의 폭과 깊이, 그리고 현대 고고학 문제에 대한 그의 연구의 지속적인 관련성"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말했다. 1995년에는 또 다른 학술대회 논문집이 출판되었다. 차일드와 호주: 고고학, 정치, 사상(Childe and Australia: Archaeology, Politics and Ideas)이라는 제목으로 피터 개더콜, T. H. 어빙, 그레고리 멜리시가 편집했다. 이후에도 차일드에 관한 추가 논문들이 그의 개인 서신과 최종 안식처와 같은 주제를 다루며 발표되었다.
4.3. 대중문화 속의 이미지
영화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2008)에서는 주인공 인디아나 존스가 고든 차일드에게서 영향을 받은 설정이 언급되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업적이 대중적으로 인식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5. 주요 저서
비어 고든 차일드의 대표적인 학술 및 비학술 저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저서 제목 | 연도 | 출판사 |
---|---|---|
The Most Ancient East | 1922, 1928 | Kegan Paul (London) |
How Labour Governs: A Study of Workers' Representation in Australia | 1923 | The Labour Publishing Company (London) |
The Dawn of European Civilization | 1925 | Kegan Paul (London) |
The Aryans: A Study of Indo-European Origins | 1926 | Kegan Paul (London) |
The Most Ancient East: The Oriental Prelude to European Prehistory | 1929 | Kegan Paul (London) |
The Danube in Prehistory | 1929 |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
The Bronze Age | 1930 |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
Skara Brae: A Pictish Village in Orkney | 1931 | Kegan Paul (London) |
The Forest Cultures of Northern Europe: A Study in Evolution and Diffusion | 1931 |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London) |
The Continental Affinities of British Neolithic Pottery | 1932 |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London) |
Skara Brae Orkney. Official Guide | 1933, [https://archive.org/details/skarabaeofficialguidethirdedition1950images Second Edition 1950] | His Majesty's Stationery Office (Edinburgh) |
New Light on the Most Ancient East: The Oriental Prelude to European Prehistory | 1934 | Kegal Paul (London) |
The Prehistory of Scotland | 1935 | Kegan Paul (London) |
Man Makes Himself | 1936, slightly revised 1941, 1951 | Watts (London) |
Prehistoric Communities of the British Isles | 1940, second edition 1947 | Chambers (London) |
What Happened in History | 1942 | Penguin Books (Harmondsworth) |
The Story of Tools | 1944 | Cobbett (London) |
Progress and Archaeology | 1944 | Watts (London) |
Scotland before the Scots, being the Rhind lectures for 1944 | 1946 | Methuen (London) |
History | 1947 | Cobbett (London) |
Social Worlds of Knowledge | 1949 | Oxford University Press (London) |
Prehistoric Migrations in Europe | 1950 | Aschehaug (Oslo) |
Magic, Craftsmanship and Science | 1950 | Liverpool University Press (Liverpool) |
Social Evolution | 1951 | Schuman (New York) |
Illustrated Guide to Ancient Monuments: Vol. VI Scotland | 1952 | Her Majesty's Stationery Office (London) |
Society and Knowledge: The Growth of Human Traditions | 1956 | Harper (New York) |
Piecing Together the Past: The Interpretation of Archeological Data | 1956 | Routledge and Kegan Paul (London) |
A Short Introduction to Archaeology | 1956 | Muller (London) |
The Prehistory of European Society | 1958 | Penguin (Harmondswort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