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브리지트 바르도는 파리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발레에 대한 열정으로 예술적 재능을 키웠다. 그러나 엄격한 가정 교육과 부모님의 반대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섰고, 이는 훗날 그녀의 반항적인 삶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
1.1. 출생과 가족
브리지트 바르도는 1934년 9월 28일 파리 15구에서 루이 바르도(1896-1975)와 안마리 뮈셀(1912-1978)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리그니앙바루아 출신으로, 파리에서 여러 산업 공장을 소유한 엔지니어이자 사업가였다. 또한 시인이기도 하여 시집을 출판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수상했으며, 영화, 연극, 잡지 감독들과 친분이 깊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보험 회사 이사의 딸이었다. 바르도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약시를 앓아 왼쪽 눈의 시력이 좋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여동생 미자누 바르도(1938년 5월 5일 출생)가 있는데, 미자누는 1956년부터 배우로 활동하다 1970년 은퇴 후 가구 제작을 했으며, 1960년대 배우 파트리크 보쇼와 결혼하여 딸을 두었다.
1.2. 어린 시절과 교육
바르도의 어린 시절은 유복했다. 그녀는 파리의 호화로운 16구에 위치한 가족의 7개 침실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린 시절에 분노를 느꼈다고 회고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좋은 식사 예절과 적절한 옷차림을 포함한 엄격한 행동 기준을 따를 것을 요구했다. 어머니는 그녀의 친구 선택에 매우 신중하여, 바르도는 어린 시절 친구가 거의 없었다. 바르도는 어린 시절 겪었던 충격적인 사건을 언급했는데, 그녀와 여동생이 집에서 놀다가 부모님이 가장 아끼는 꽃병을 깨뜨리자 아버지가 자매를 20대 때리고 이후 그들을 "낯선 사람"처럼 대하며, 부모님에게 격식 있는 프랑스어 대명사 "vous"를 사용하도록 요구했다. 이 사건은 바르도가 부모님에게 깊은 반감을 갖게 되었고, 훗날 그녀의 반항적인 삶의 태도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리가 나치 독일에 점령되면서 민간인 감시가 엄격해지자 바르도는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음반에 맞춰 춤을 추는 데 몰두했고, 어머니는 이를 발레 경력의 가능성으로 보았다. 바르도는 7세에 사립 학교 쿠르 아테메르에 입학했다. 그녀는 일주일에 3일 학교에 다녔고, 이는 어머니의 주선으로 지역 스튜디오에서 춤 레슨을 받을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1949년, 바르도는 파리 국립 고등 음악 무용원에 합격했다. 그녀는 러시아 안무가 보리스 크냐제프의 발레 수업을 3년 동안 들었다. 그녀는 또한 집 근처의 사립 가톨릭 고등학교인 앵스티튀 드 라 투르에서도 공부했다.
1.3. 모델 활동과 영화계 입문
1949년, 잡지 《엘르》와 《르 자르댕 데 모드》의 편집장이었던 엘렌 고르동라자레프는 바르도를 "주니어" 패션 모델로 고용했다. 1950년 3월 8일, 15세의 바르도는 《엘르》 표지에 등장했고, 이는 감독 마르크 알레그레로부터 영화 《잘린 월계수》의 출연 제안을 받게 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배우가 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할아버지는 "이 작은 아이가 창녀가 될지 말지는 영화 때문이 아닐 것"이라며 지지했다. 오디션에서 바르도는 로제 바딤을 만났는데, 그는 나중에 그녀가 배역을 얻지 못했다고 통보했다. 그들은 이후 사랑에 빠졌다. 그녀의 부모는 그들의 관계를 맹렬히 반대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그녀가 영국에서 교육을 계속할 것이며 다음 날 기차표를 사두었다고 말했다. 바르도는 가스레인지에 머리를 넣는 것으로 반응했고, 부모는 그녀를 막았으며 결국 그녀가 18세에 바딤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관계를 받아들였다. 1952년 12월 21일, 바르도가 18세가 되자 그녀의 아버지는 로제 바딤과의 결혼을 허락했고, 두 사람은 결혼했다.
2. 연기 경력
브리지트 바르도는 1950년대 초반 작은 역할들로 연기 경력을 시작했지만, 곧 국제적인 스타로 발돋움하며 프랑스 영화계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활약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은퇴 전까지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2.1. 초기 경력 (1952-1955)
바르도는 1952년 다시 《엘르》 표지에 등장했고, 이는 같은 해 장 부아예 감독의 코미디 영화 《사랑에 미치다》에서 작은 역할을 제안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주연의 사촌 역을 맡아 20.00 만 FRF를 받았다. 바르도는 윌리 로지에 감독의 1952년 영화 《비키니를 입은 소녀 마니나》에서 두 번째 영화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또한 1953년 영화 《긴 이빨》과 《아버지의 초상》에도 출연했다.

1953년, 바르도는 파리에서 촬영 중인 할리우드 투자 영화 《사랑의 행위》에서 커크 더글러스와 함께 작은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1953년 4월 칸 영화제에 참석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바르도는 1954년 이탈리아 멜로드라마 《음모의 콘서트》와 프랑스 어드벤처 영화 《카롤린과 반군들》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녀는 1955년 마르크 알레그레 감독의 영화 《사랑을 위한 학교》에서 장 마레와 함께 요염한 학생 역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바르도는 1955년 영화 《바다의 의사》에서 더크 보가드의 연인 역으로 첫 상당한 영어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는 그 해 영국에서 세 번째로 인기 있는 영화였다. 바르도는 르네 클레르 감독의 1955년 영화 《대기동》에서 제라르 필리프와 미셸 모르강을 지원하는 작은 역할을 맡았다. 조르주 라콤브 감독의 1956년 영화 《길 건너편의 빛》에서는 더 큰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또 다른 할리우드 영화 《트로이의 헬렌》에서 헬렌의 시녀 역을 맡았다. 1956년 이탈리아 영화 《네로의 주말》에서 갈색 머리였던 바르도는 감독의 요청으로 금발로 등장했다. 그녀는 가발을 쓰는 대신 머리를 염색했고, 그 결과에 너무 만족하여 그 색깔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2.2. 스타덤으로의 부상 (1956-1962)


바르도는 이후 그녀를 스타로 만든 네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첫 번째는 뮤지컬 영화 《말괄량이 소녀》(1956)로, 바르도는 말썽 많은 여학생 역을 맡았다. 미셸 부아롱 감독이 연출하고 로제 바딤이 공동 각본을 쓴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며 프랑스에서 그 해 12번째로 인기 있는 영화가 되었다. 이어서 바딤이 각본을 쓴 코미디 영화 《데이지 따기》(1956)가 나왔다. 다음은 루이 주르당과 함께 출연한 《신부는 너무 아름답다》(1956)였다.
마지막으로 멜로드라마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1956)가 있었다. 이 영화는 바딤의 감독 데뷔작으로, 바르도는 장루이 트랭티냥과 쿠르트 위르겐스와 함께 주연을 맡았다. 도덕적으로 방탕한 십대 소녀가 존경받는 작은 마을에서 소란을 피우는 내용의 이 영화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1957년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 10편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미국에서는 이 영화가 개봉된 외국 영화 중 가장 높은 수익인 400.00 만 USD를 벌어들였는데, 작가 피터 레브는 이를 "당시 외국 영화로서는 놀라운 금액"이라고 묘사했다. 이 영화는 바르도를 국제적인 스타로 만들었다. 1956년부터 그녀는 "섹스 키튼"으로 칭송받았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스캔들을 일으켰고, 일부 극장 매니저는 영화를 상영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라이프》지(1958년 6월)의 폴 오닐은 바르도의 국제적인 인기를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의 명성을 얻는 데 있어 브리지트 바르도는 타고난 것 외에 몇 가지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 스포츠카처럼, 그녀는 미국 대중이 익숙한 국내 제품보다 더 경쾌하고 현실적인 것을 갈망하는 시기에 미국 무대에 등장했다."
초기 경력 동안 전문 사진작가 샘 레빈의 사진들은 바르도의 관능적인 이미지에 기여했다. 영국 사진작가 코넬 루카스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바르도의 대중적 이미지를 대표하는 사진들을 찍었다.
바르도는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에 이어 부아롱 감독의 코미디 영화 《파리지엔》(1957)에 샤를 부아예와 공동 주연으로 출연했다. 그녀는 또 다른 멜로드라마 《밤하늘이 무너졌다》(1958)에서 바딤과 재회했으며, 《불행한 경우》(1958)에서는 장 가뱅을 유혹하는 범죄자 역을 맡았다. 후자는 그 해 프랑스에서 13번째로 많이 본 영화였다. 1958년, 바르도는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는 여배우가 되었다.

줄리앙 뒤비비에 감독의 《암컷》(1959)은 인기가 있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코미디 영화 《바베트 전쟁에 가다》(1959)는 프랑스에서 그 해 네 번째로 큰 흥행작이었다. 부아롱 감독의 《나와 함께 춤출래?》(1959) 또한 널리 상영되었다.
바르도의 다음 영화는 앙리조르주 클루조 감독의 법정 드라마 《진실》(1960)이었다. 이 영화는 크게 홍보된 작품으로, 바르도가 불륜을 저지르고 자살을 시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영화는 프랑스에서 바르도의 가장 큰 상업적 성공작으로, 그 해 세 번째로 큰 흥행작이었으며,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바르도는 이 영화에서의 역할로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최우수 외국 여배우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바딤과 함께 코미디 영화 《제발, 지금은 안돼요!》(1961)를 만들었고, 올스타 출연작인 《유명한 사랑 이야기》(1962)에도 출연했다. 바르도는 루이 말 감독의 영화 《아주 사적인 일》(1962)에서 그녀의 삶에서 영감을 받은 영화에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와 함께 주연을 맡았다. 이보다 더 인기가 있었던 것은 《베개 위의 사랑》(1962)에서의 그녀의 역할이었다.
2.3. 국제 영화 및 가수 활동 (1962-1968)
1960년대 중반, 바르도는 국제 시장을 겨냥한 영화들을 만들었다. 그녀는 조지프 E. 레빈이 제작하고 잭 팰런스가 주연을 맡은 장뤼크 고다르 감독의 영화 《경멸》(1963)에 출연했다. 이듬해 그녀는 코미디 영화 《매력적인 바보》(1964)에서 앤서니 퍼킨스와 공동 주연을 맡았다.
바르도의 첫 할리우드 영화인 《디어 브리지트》(1965)는 아들이 바르도에게 반하는 학자 역의 제임스 스튜어트가 주연을 맡은 코미디였다. 이 영화에서 바르도의 출연은 비교적 짧았고,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루이 말 감독의 서부 버디 코미디 영화 《비바 마리아!》(1965)는 잔 모로와 함께 출연하여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는 프랑스와 전 세계적으로 큰 히트를 쳤지만, 미국에서는 기대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고다르 감독의 《남성, 여성》(1966)에 카메오 출연한 후, 그녀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완전히 실패한 영화인 프랑스-영국 합작 영화 《9월의 두 주》(1968)에 출연했다. 그녀는 올스타 출연작인 《죽은 자들의 영혼》(1968)에서 알랭 들롱과 함께 작은 역할을 맡았고, 다시 할리우드 영화를 시도했다: 숀 코너리가 주연을 맡은 서부 영화 《샬라코》(1968)는 또 다른 흥행 실패작이었다. 그녀는 이 영화 촬영 중 숀 코너리의 구애를 거절하며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제임스 본드 걸이 아니었으니까! 그의 매력에 넘어간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여러 뮤지컬 쇼에 참여하고 많은 인기곡을 녹음했으며, 대부분 세르주 갱스부르, 밥 자구리, 사샤 디스텔과 협업했다. 여기에는 "할리 데이비슨",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를 바친다", "버블껌", "연락", "나는 항상 너에게 돌아갈 거야", "슬롯 머신", "라 마드라그", "이사", "시도니", "원해, 원하지 않아?", "내 삶의 태양"(스티비 원더의 "유 아 더 선샤인 오브 마이 라이프" 커버곡), 그리고 "주 템므... 무아 농 플뤼"가 포함된다. 바르도는 갱스부르에게 이 듀엣곡을 발매하지 말라고 간청했고 그는 그녀의 뜻을 따랐다. 다음 해, 그는 영국 태생의 모델이자 배우 제인 버킨과 함께 다시 녹음한 버전을 발매했고, 이는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히트곡이 되었다. 바르도와의 버전은 1986년에 발매되었고, 2006년 유니버설 뮤직이 백 카탈로그를 온라인 구매 가능하게 만들었을 때 다운로드 히트곡이 되었으며, 이 버전의 노래는 세 번째로 인기 있는 다운로드 순위에 올랐다.

2.4. 말기 영화 활동 (1973년까지)
1969년부터 1972년까지 바르도는 프랑스의 자유를 상징하는 마리안의 공식적인 얼굴이었다.
그녀의 다음 영화 《여성들》(1969)은 실패작이었지만, 스크루볼 코미디 《곰과 인형》(1970)은 더 나은 성과를 보였다. 그녀의 마지막 몇 편의 영화는 대부분 코미디였다: 《초심자들》(1970), 《럼 대로》(1971, 리노 벤투라와 함께). 《프렌치 킹의 전설》(1971)은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와 바르도가 공동 주연을 맡아 더 인기가 있었다.

그녀는 바딤과 함께 한 편 더 영화를 만들었다. 《돈 후안, 또는 만약 돈 후안이 여자였다면》(1973)에서 주연을 맡았다. 바딤은 이 영화가 "사람들이 '바르도 신화'라고 부르는 것 아래에 흥미로운 무언가가 있었다. 비록 그녀가 세계에서 가장 전문적인 여배우로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수년 동안, 그녀가 나이가 들면서 바르도 신화는 그저 추억이 되었지만... 나는 여성으로서 그녀에게 호기심을 느꼈고, 그녀 안에서 내가 느꼈던 많은 것들을 끌어내고 표현해야 했다. 브리지트는 항상 성적 자유의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어떤 공격성도 없이 완전히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남자 역할을 주었다. 그것이 나를 즐겁게 했다"고 말했다.
바르도는 촬영 중 "만약 《돈 후안》이 내 마지막 영화가 아니라면, 그것은 내 마지막 전 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약속을 지켰고, 단 한 편의 영화 《콜리노의 교훈적이고 즐거운 이야기》(1973)만을 더 만들었다. 1973년, 바르도는 "우아하게 은퇴하는 방법"이라며 연기 은퇴를 선언했다.
3. 가수 활동
브리지트 바르도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여러 인기곡을 발표하며 가수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세르주 갱스부르와의 협업은 그녀의 음악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1961년 프랑스 영화 《사생활》의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시도니"를 시작으로 음악 활동을 펼쳤다. 1963년에는 첫 LP 앨범 《브리지트 바르도 노래》를 발매했는데, 여기에는 갱스부르가 작곡한 "슬롯 머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를 바친다"와 클로드 볼링, 장마스 리비에르 등이 참여한 "음악의 친구들", "라 마드라그" 등의 곡이 포함되었다. 1964년에는 앨범 《B.B.》를 발표했으며, 1965년에는 영화 《비바 마리아!》의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아! 파리의 작은 여인들"을 잔 모로와 듀엣으로 불렀다.
1967년에는 갱스부르가 작곡한 "할리 데이비슨", "콘택트" 등의 싱글을 발표했고, 1968년 초에는 갱스부르와의 공동 앨범 《보니 앤 클라이드》를 발매했다. 이 앨범에는 "버블껌", "코믹 스트립" 등의 곡이 수록되었다. 특히 갱스부르와 함께 부른 "주 템므... 무아 농 플뤼"는 노골적인 가사와 바르도의 신음 소리 연기로 인해 당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바르도는 이 곡의 발매를 거부했고, 갱스부르는 다음 해 제인 버킨과 재녹음하여 발표했다. 바르도와의 버전은 1986년에야 발매되었고, 2006년 온라인에서 다시 인기를 얻었다.
1970년에는 "원해, 원하지 않아?", "태양 아래 벌거벗은", 1971년에는 영화 《럼 대로》의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럼 대로"를 기 마르샹과 듀엣으로 불렀다. 1973년에는 사샤 디스텔과 함께 "내 삶의 태양"을 불렀으며, 1982년에는 동물 보호를 위한 노래 "모든 동물은 사랑받아야 한다"를 발표하며 동물 권리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3.1. 스튜디오 앨범
연도 | 원제 | 번역 | 작곡가 | 레이블 | 주요 트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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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 Et dieu... créa la femme (로제 바딤 영화 음악) |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 | 폴 미스라키 | 베르사유 | |
1963 | Brigitte Bardot Sings | 세르주 갱스부르 클로드 볼링 장마스 리비에르 페르낭 보니파이 스펜서 윌리엄스 제라르 부르주아 | 필립스 | "슬롯 머신" "인비탕고" "음악의 친구들" "라 마드라그" "엘 쿠치페" | |
1964 | B.B. | 앙드레 포프 장미셸 리바 장마스 리비에르 페르낭 보니파이 제라르 부르주아 | "나는 놀아요" "해변 이야기" "마리아 닝구엠" "나는 춤춘다 고로 존재한다" "침대 캐노피" | ||
1968 | 보니 앤 클라이드 (세르주 갱스부르와 함께) | 세르주 갱스부르 알랭 고라게르 스펜서 윌리엄스 장마스 리비에르 | 폰타나 | "보니 앤 클라이드" "버블껌" "코믹 스트립" | |
쇼 | 세르주 갱스부르 프랑시스 레 장마스 리비에르 | AZ | "할리 데이비슨" "아! 비바 상그리아" "콘택트" | ||
3.2. 기타 주요 싱글
연도 | 원제 | 번역 | 작곡가 | 레이블 |
---|---|---|---|---|
1962 | "시도니" (루이 말 영화 사생활 음악) | 피오렌초 카프리 샤를 크로스 장마스 리비에르 | 바클레이 | |
1965 | "비바 마리아!" (루이 말 동명 영화 음악) (잔 모로와 함께) | 장클로드 카리에르 조르주 들르뤼 | 필립스 | |
1966 | "태양" | "태양" | 장마스 리비에르 제라르 부르주아 | AZ |
1969 | "짚으로 만든 소녀" | "짚으로 만든 소녀" | 프랑크 제랄드 제라르 레노르망 | 필립스 |
1970 | "원해, 원하지 않아?" "(Nem Vem Que Nao Tem)" | "원해, 원하지 않아?" | 피에르 쿠르 카를루스 임페리알 | 바클레이 |
"태양 아래 벌거벗은" | "태양 아래 벌거벗은" | 장 프레데누치 장 슈미트 | ||
1972 | "사랑하는 당신이 왔어요" / "당신, 내 숙녀" (로랑 베르제와 함께) | "사랑하는 당신이 왔어요" / "당신, 내 숙녀" | 위그 오프레 에디 마르네 에디 바클레이 | |
"럼 대로" (기 마르샹과 함께) (로베르 앙리코 영화 음악) | "럼 대로" | 프랑수아 드 루베 장폴에지드 마르티니 | ||
1973 | "내 삶의 태양" (사샤 디스텔과 함께) | "내 삶의 태양" | 스티비 원더 장 브루솔 | 파테 |
1982 | "모든 동물은 사랑받아야 한다" | "모든 동물은 사랑받아야 한다" | 장마스 리비에르 | 폴리도르 |
1986 | "주 템므... 무아 농 플뤼" (세르주 갱스부르와 함께) (1968년 발매 및 보류) | "사랑해... 나도 아니야" | 세르주 갱스부르 | 필립스 |
4. 동물 권리 운동
브리지트 바르도는 1973년 연기 활동 은퇴 후, 자신의 명성을 동물 권리 보호에 바치며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재단을 설립하고 다양한 캠페인을 통해 동물 학대에 반대하며 전 세계에 동물 복지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4.1. 브리지트 바르도 재단 설립
바르도는 1977년 폴 왓슨을 만나 캐나다 유빙에서의 물범 새끼 도살과 물범 사냥을 규탄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그녀는 왓슨의 초청으로 유빙에 직접 가서 물범 새끼들 옆에 누워 포즈를 취했고, 이 사진들은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 바르도와 왓슨은 이후에도 친구로 지냈다.
4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하고 여러 음악 앨범을 녹음한 후, 바르도는 자신의 명성을 동물 권리 증진에 활용했다. 1986년, 그녀는 동물 복지 및 보호를 위한 브리지트 바르도 재단을 설립했다. 그녀는 채식주의자가 되었고, 재단 기금 마련을 위해 보석과 개인 소지품을 경매에 부쳐 300.00 만 FRF를 모금했다.
4.2. 주요 캠페인 및 옹호 활동
바르도는 강력한 동물 권리 운동가이자 말고기 소비의 주요 반대자였다. 그녀는 프랑스 TV 시청자들에게 말고기 불매 운동을 촉구했으며, 1994년 1월에는 살해 위협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프랑스 농업부 장관 장 퓌에슈에게 말고기 판매 금지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1989년, 그녀는 이웃의 당나귀를 돌보던 중, 자신의 암컷 당나귀가 이웃 당나귀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자 자신의 암컷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우려로 이웃 당나귀를 거세시켰다. 이웃은 바르도를 고소했지만, 바르도는 승소했고 법원은 이웃에게 "거짓 스캔들"을 일으킨 대가로 2.00 만 FRF를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1999년, 바르도는 프랑스 잡지 《VSD》에 게재된 장쩌민 중국 주석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중국이 "곰을 고문하고 세계의 마지막 호랑이와 코뿔소를 죽여 최음제를 만든다"고 비난했다. 2001년에는 부쿠레슈티의 들개 30만 마리로 추정되는 대규모 불임 수술 및 입양 프로그램에 2년 동안 14.00 만 USD 이상을 기부했다.
2010년 8월, 바르도는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2세 여왕에게 페로 제도에서의 돌고래 살육을 중단해달라고 호소하는 서한을 보냈다. 서한에서 바르도는 이 활동을 "끔찍한 광경"이자 "덴마크와 페로 제도의 수치... 이것은 사냥이 아니라 대량 학살... 오늘날 세계에서 용납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전통"이라고 묘사했다. 2011년 4월 22일, 프랑스 문화부 장관 프레데리크 미테랑이 투우를 프랑스의 문화유산으로 공식 포함시키자, 바르도는 그에게 매우 비판적인 항의 서한을 보냈다. 2011년 5월 25일, 시 셰퍼드 보존 협회는 그녀의 지원에 감사하며 고속 요격선 MV 고질라를 MV 브리지트 바르도로 개명했다.
2013년부터 브리지트 바르도 재단은 인도 카규파 국제 몬람 트러스트와 협력하여 매년 수의학 진료 캠프를 운영했다. 바르도는 수년간 보드가야의 동물 복지 대의에 헌신했다. 2015년 7월 23일, 바르도는 호주 정치인 그레그 헌트가 검은 옆구리 바위왈라비와 밤앵무와 같은 멸종 위기종을 구하기 위해 200만 마리의 고양이를 박멸하려는 계획을 비난했다.
2001년 12월 3일, 그녀는 대한민국 문화방송의 프로그램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한국의 개고기 문화에 대해 "다른 고기라면 속지 않는 한 먹지 않는다. 자주 거짓말을 하는 한국인과는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다", "개고기를 먹는 것은 야만인"이라고 발언하며 한국의 개고기 문화를 비판했다. 2016년 3월에는 브리지트 바르도 보호 단체가 태국의 개들을 구출하는 활동을 펼쳤다. 아시아 국가인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태국, 베트남 등에서는 개와 고양이가 식육으로 간주된다. 도난당하거나 상품과 교환된 개들이 심각한 상태로 불법 거래된다. 동물 보호 헌법이 강화된 이후 태국 정부도 단속을 강화했다. 경찰과 협력하여 베트남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식육으로 운송되던 중 지역 soi dog 보호 단체와 협력하여 약 500마리를 보호했다. 오랫동안 soi dog과 교류하며 약품, 음식, 울타리 제작 등을 지원하고 있다. 그 중 12마리는 프랑스로 운송되어 노르망디 지방의 보호 시설에서 입양을 기다리고 있다.
90세의 나이인 2024년 7월, 일본이 그린란드에 구금된 왓슨의 범죄인 인도를 요청하자 바르도는 왓슨의 석방을 호소했다. 2024년 10월 중순, 그녀의 변호사와 시 셰퍼드 프랑스를 통해 바르도는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에게 왓슨에게 정치적 망명을 허용해달라고 요청했다. 바르도는 마크롱에게 "약간의 용기"를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그 달 동안 그녀는 파리 시청 앞에서 왓슨을 지지하는 시위를 시작했다. 바르도는 또한 덴마크 총리 메테 프레데릭센에게 "바다의 무덤을 파는 자들의 편을 선택하지 말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5. 개인사
브리지트 바르도의 개인사는 여러 차례의 결혼과 연인 관계, 그리고 대중의 시선 속에서 겪은 건강 문제와 어려움으로 점철되었다. 그녀는 열정적인 사랑을 추구했으며, 이는 복잡한 관계와 아들 니콜라와의 단절로 이어지기도 했다.
5.1. 결혼과 관계
바르도는 네 번 결혼했으며, 현재의 결혼 생활이 이전 세 번의 결혼 생활을 합친 것보다 훨씬 길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총 17번의 연애 관계를 가졌다. 바르도는 "현재의 관계가 미지근해지면" 다른 관계로 떠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녀는 "나는 항상 열정을 찾았다. 그래서 자주 불성실했다. 그리고 열정이 끝나면 나는 짐을 쌌다"고 말했다.
1952년 12월 20일, 18세의 바르도는 감독 로제 바딤과 결혼했다. 그들은 1956년 영화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의 공동 주연 장루이 트랭티냥과 관계를 맺은 후 1957년 이혼했다. 트랭티냥은 당시 배우 스테판 오드랑과 결혼한 상태였다. 바르도와 바딤은 자녀가 없었지만, 평생 연락을 유지했으며 나중 프로젝트에서도 협력했다. 바르도와 트랭티냥은 바르도가 바딤과 이혼하기 전후 약 2년 동안 동거했지만 결혼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관계는 트랭티냥의 잦은 군 복무 부재와 바르도의 음악가 질베르 베코와의 불륜으로 복잡해졌다.
바딤과 헤어진 후, 바르도는 칸에 16세기부터 내려온 역사적인 건물인 르 카스틀레를 구입했다. 무성한 정원, 올리브 나무, 포도원으로 둘러싸인 14개 침실의 이 빌라는 여러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58년 초, 그녀는 생트로페에 위치한 라 마드라그라는 두 번째 부동산을 구입했다. 1958년 초, 트랭티냥과의 결별에 이어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 신경 쇠약을 겪었다고 한다. 이틀 전 수면제로 자살을 시도한 사실도 언급되었지만, 그녀의 홍보 담당자는 이를 부인했다. 그녀는 몇 주 안에 회복되었고, 배우 자크 샤리에와 관계를 시작했으며, 그들이 1959년 6월 18일 결혼하기 훨씬 전에 임신했다.

바르도의 유일한 자녀인 아들 니콜라자크 샤리에는 1960년 1월 11일에 태어났다. 그녀와 샤리에가 1962년 이혼한 후, 니콜라는 샤리에 가족에 의해 양육되었고 성인이 될 때까지 친어머니와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 사미 프레이는 샤리에와의 이혼 사유로 언급되었다. 바르도는 프레이에게 매료되었지만, 그는 곧 그녀를 떠났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그녀는 음악가 밥 자구리와 동거했다.

바르도의 세 번째 결혼은 독일 백만장자 플레이보이 군터 작스와 1966년 7월 14일부터 1969년 10월 7일까지 지속되었는데, 그들은 이미 전년도에 별거했다. 1968년, 그녀는 영화 《곰과 인형》(1970)에 함께 출연한 패트릭 질과 데이트를 시작했지만, 1971년 봄에 그들의 관계를 끝냈다.
그 후 몇 년 동안 바르도는 바텐더/스키 강사 크리스티앙 칼트, 나이트클럽 주인 루이지 "지지" 리치, 싱어송라이터 세르주 갱스부르, 작가 존 길모어, 배우 워런 비티, 그리고 영화 《돈 후안, 또는 만약 돈 후안이 여자였다면》의 공동 주연인 로랑 베르제와 데이트했다.
1974년, 바르도는 4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플레이보이》 잡지에서 누드 사진 촬영을 했다. 1975년, 그녀는 예술가 미로슬라프 브로제크와 관계를 맺었고 그의 조각품 모델이 되었다. 브로제크는 또한 가끔 배우로 활동했으며, 그의 예명은 장 블레즈였다. 두 사람은 4년 동안 동거했으며, 1979년 12월에 헤어졌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바르도는 프랑스 TV 프로듀서 알랭 부그랭뒤부르와 동거 관계를 가졌다. 1983년 9월 27일, 그녀의 49번째 생일 전날, 바르도는 수면제 또는 진정제를 레드 와인과 함께 과다 복용하고 해변으로 나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발견되었다. 그녀는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위세척을 통해 약물을 제거한 후 생명을 구했다.
5.2. 자녀
바르도의 유일한 자녀인 아들 니콜라자크 샤리에는 1960년 1월 11일에 태어났다. 니콜라는 바르도와 자크 샤리에의 아들이다. 바르도와 샤리에가 1962년 이혼한 후, 니콜라스는 샤리에 가족에 의해 양육되었고 성인이 될 때까지 친어머니와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
5.3. 건강 문제 및 개인적 어려움
1958년 초, 장루이 트랭티냥과의 빠른 결별에 이어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 신경 쇠약을 겪었다고 한다. 이틀 전 수면제로 자살을 시도한 사실도 언급되었지만, 그녀의 홍보 담당자는 이를 부인했다.
1983년 9월 27일, 그녀의 49번째 생일 전날, 바르도는 수면제 또는 진정제를 레드 와인과 함께 과다 복용하고 해변으로 나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발견되었다. 그녀는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위세척을 통해 약물을 제거한 후 생명을 구했다. 바르도는 1984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화학요법 치료를 거부하고 방사선 치료만 받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1986년에 회복되었다.
바르도의 네 번째이자 현재 남편은 베르나르 도르말이며, 그들은 1992년 8월 16일부터 결혼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2018년, 《르 주르날 뒤 디망슈》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조니 할리데이, 지미 헨드릭스, 믹 재거와의 관계 루머를 부인했다.
6. 정치적 견해 및 논란
브리지트 바르도는 연예계 은퇴 후 적극적인 동물 권리 운동가로 활동했지만, 동시에 이민, 이슬람, 동성애 등 사회 문제에 대한 극우적 발언으로 끊임없이 논란을 야기했다. 그녀의 발언은 여러 차례 법적 제재를 받았으며, 이는 그녀의 공적인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6.1. 정치적 지지 및 성명
바르도는 1960년대 샤를 드 골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녀는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전선(현 국민연합)의 전 대표 장마리 르펜의 전 고문이었던 베르나르 도르말과 결혼했다. 바르도는 국민전선(국민연합)의 대표인 마린 르펜을 "21세기의 잔 다르크"라고 부르며 지지했다. 그녀는 2012년과 201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르펜을 지지했다.
6.2. 이민, 이슬람, 인종차별 관련 발언
1999년 그녀의 저서 《플루톤의 광장》에서 바르도는 이슬람 축제인 이드 알아드하 동안 양을 의례적으로 도살하는 절차를 비판했다. 또한 책의 "잃어버린 프랑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이라는 섹션에서 그녀는 "내 조국 프랑스, 내 고향, 내 땅은 다시 외국인, 특히 무슬림의 과잉 인구로 침략당하고 있다"고 썼다. 이 발언으로 인해 2000년 6월 프랑스 법원은 그녀에게 3.00 만 FRF의 벌금을 부과했다. 그녀는 1997년 《르 피가로》에 이 공개 서한을 처음 게재한 것에 대해, 그리고 1998년 유사한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다시 벌금을 부과받았다.
2003년 그녀의 저서 《침묵 속의 외침》에서 그녀는 친한 게이 친구들과 "엉덩이를 흔들고, 새끼손가락을 세우고, 거세된 듯한 목소리로 끔찍한 이성애자들이 자신들에게 가한 고통에 대해 신음하는" 동성애자들을 대조하며, 일부 현대 동성애자들이 "유원지 괴물"처럼 행동한다고 말했다. 바르도는 자신을 변호하며 프랑스 게이 잡지에 보낸 편지에서 "남편을 제외하고는 (언젠가 그도 넘어올지 모르지만) 나는 완전히 동성애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수년 동안 그들은 나의 지지자이자 친구, 입양된 자녀, 그리고 내 비밀을 털어놓는 상대였다"고 썼다.
그녀의 책에서 그녀는 혼혈, 이민, 정치에서의 여성의 역할, 그리고 이슬람을 비판했다. 이 책에는 또한 그녀가 "유전자 혼합"이라고 부르는 것을 공격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녀가 말하기를 침략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전 세대들을 칭찬했다. 2004년 6월 10일, 바르도는 프랑스 법원에서 인종적 증오 선동 혐의로 네 번째 유죄 판결을 받고 5000 EUR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바르도는 인종적 증오 혐의를 부인하고 법정에서 사과하며 "나는 결코 고의로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려 한 적이 없다. 그것은 내 성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2008년, 바르도는 자신이 작성한 편지(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에게 사본을 보냄)와 관련하여 인종/종교적 증오 선동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편지에는 프랑스 무슬림들이 양을 의례적으로 도살할 때 마취 없이 목을 베는 것에 대한 그녀의 반대 의견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녀는 또한 무슬림들을 언급하며 "우리를 파괴하고, 우리 나라를 파괴하며, 그들의 습관을 강요하는 이 인구의 지배를 받는 것에 지쳤다"고 말했다. 재판은 2008년 6월 3일에 유죄 판결과 1.50 만 EUR의 벌금으로 마무리되었다. 검사는 인종적 증오와 관련된 혐의로 바르도를 기소하는 것에 지쳤다고 말했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바르도는 공화당 부통령 후보 세라 페일린을 "멍청하고" "여성에게 불명예스러운"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그녀는 전 알래스카 주지사의 지구 온난화와 총기 규제에 대한 입장을 비판했다. 그녀는 또한 페일린의 북극 석유 탐사 지지와 북극곰 보호에 대한 무관심에 더욱 불쾌감을 표했다.
2010년 8월 13일, 바르도는 미국 영화 제작자 카일 뉴먼이 자신에 대한 전기 영화를 제작하려는 계획을 비판했다. 그녀는 그에게 "내가 죽을 때까지 내 삶에 대한 영화를 만들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불꽃이 튈 것"이라고 말했다.
2014년, 바르도는 프랑스에서 유대교 의례 도살인 셰히타를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공개 서한을 작성했다. 이에 대해 유럽 유대인 의회는 "바르도는 서한의 내용과 스타일로 소수 집단에 대한 명백한 무감각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그녀는 동물 복지에 대해 걱정할지 모르지만, 극우에 대한 오랜 지지와 프랑스 내 소수 민족에 대한 차별은 인권에 대한 끊임없는 경멸을 보여준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2015년, 바르도는 자신의 얼굴이 들어간 제품을 판매하는 생트로페 부티크를 고소하겠다고 위협했다. 2018년, 그녀는 노란 조끼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2019년 3월 19일, 바르도는 레위니옹 지사 아모리 드 생캉탱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인도양 섬 주민들이 동물 학대를 저지른다고 비난하며 그들을 "야만인의 유전자를 간직한 원주민"이라고 지칭했다. 동물 학대와 관련하여 그녀의 재단을 통해 보낸 서한에서 그녀는 축제 기간 동안 "염소와 숫염소의 참수"를 언급하며 이러한 관행을 "지난 세기의 식인 풍습의 잔재"와 연관시켰다. 공공 검사는 다음 날 소송을 제기했다.
6.3. 법적 문제 및 벌금
바르도는 인종적 증오 선동 혐의로 여러 차례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2021년 11월 기준으로 여섯 차례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2000년 6월, 그녀의 저서 《플루톤의 광장》에 담긴 이슬람 관련 발언으로 프랑스 법원으로부터 3.00 만 FRF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이는 1997년 《르 피가로》에 이 공개 서한을 처음 게재한 것과 1998년 유사한 발언을 한 것에 대한 추가 벌금이었다.
2004년 6월 10일, 바르도는 프랑스 법원에서 인종적 증오 선동 혐의로 네 번째 유죄 판결을 받고 5000 EUR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2008년 6월 3일, 그녀는 니콜라 사르코지에게 보낸 편지 내용으로 인해 인종/종교적 증오 선동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1.50 만 EUR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2021년 6월, 86세의 바르도는 2019년 말 자신의 재단 웹사이트에 사냥꾼과 그들의 전국 회장 윌리 슈라엔을 "열등한 인간", "술주정뱅이", "원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잔인한 야만성의 유전자"를 가진 자들이라고 비난하며 슈라엔을 모욕하는 글을 올린 혐의로 아라스 법원으로부터 공개 모욕죄로 5000 EUR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공판 당시 그녀는 웹사이트에서 해당 발언을 삭제하지 않았다.
2019년 레위니옹 지사에게 보낸 서한과 관련하여, 그녀는 2021년 11월 4일 프랑스 법원에서 공개 모욕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2.00 만 EUR의 벌금을 부과받았는데, 이는 그녀가 받은 벌금 중 가장 큰 금액이었다.
7. 유산과 영향력
브리지트 바르도는 20세기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자 섹스 심벌로서 패션, 미용, 음악,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시대를 앞서가는 스타일과 자유분방한 이미지로 수많은 예술가와 대중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7.1. 문화적 아이콘 및 섹스 심벌
《가디언》지는 바르도를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가장 상징적인 얼굴, 모델, 배우 중 한 명"으로 꼽았다. 그녀는 "스타일 아이콘"이자 "디올, 발망, 피에르 가르뎅의 뮤즈"로 불렸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바르도를 "여성 역사의 기관차"로 묘사했다. 배우 메이미 밴 도렌은 2000년에 "그 시절 가장 위대했던 것 중 하나는 브리지트 바르도라는 여성이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와 함께 등장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검열과 싸우고 있었고, 가슴을 보여줄 수도 없었죠. 모든 것을 가려야 했는데, 바르도 영화가 로스앤젤레스의 아트하우스에서 개봉했을 때, 세상에, 사람들이 윌셔 대로를 따라 줄을 서서 보러 왔습니다. 저도 줄을 섰고, '왜 나는 저렇게 할 수 없을까?' 생각했죠."라고 회고했다.
7.2. 패션 및 미용에 미친 영향
패션계에서 '바르도 네크라인'(양쪽 어깨를 드러내는 넓게 파인 목선)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바르도는 이 스타일을 대중화시켰는데, 특히 니트 스웨터나 점퍼에 많이 사용되지만 다른 상의와 드레스에도 적용된다. 바르도는 《비키니를 입은 소녀 마니나》(1952)와 같은 초기 영화에서 비키니를 대중화시켰다. 이듬해 그녀는 칸 영화제 기간 동안 프랑스 남부의 모든 해변에서 비키니를 입고 사진을 찍히기도 했다. 1950년대에 비키니는 프랑스에서 비교적 잘 받아들여졌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1959년까지도 미국 최대 수영복 디자이너 중 한 명인 앤 콜은 "그것은 그저 G-스트링에 불과하다. 품위의 칼날 위에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한 자크 에스테렐이 디자인한 체크무늬 분홍색 드레스를 샤리에와의 결혼식에서 입은 후, choucroute슈크루트프랑스어 (양배추 절임) 헤어스타일(벌집 헤어스타일과 유사)과 깅엄 의류를 유행시켰다. 《엘르》지의 이사벨라 비덴하른은 바르도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수천(수백만?) 명의 여성들이 머리를 부풀리거나 날개형 아이라인을 시도하도록 영감을 주었다"고 썼다. 1960년경 촬영된 상징적인 모델링 초상화 중 하나는 "바르도 포즈"로 알려져 있는데, 바르도가 검은색 팬티스타킹만 입고 다리를 꼬고 팔로 가슴을 가린 채 포즈를 취한 모습이다. 이 포즈는 린제이 로한, 엘르 맥퍼슨, 지젤 번천, 리아나와 같은 모델과 유명인들에 의해 수없이 모방되었다. 1960년대 후반, 바르도의 실루엣은 프랑스 공화국의 상징인 마리안 동상의 흉상을 디자인하고 모델링하는 데 사용되었다.
7.3.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바르도는 비키니 수영복을 대중화시킨 것 외에도 생트로페와 브라질의 아르마상두스부지우스를 대중화시킨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그녀는 1964년 당시 남자친구였던 브라질 음악가 밥 자구리와 함께 부지우스를 방문했다. 그녀가 부지우스에 머물렀던 곳은 오늘날 작은 호텔인 포우사다 두 솔과 프랑스 레스토랑 시갈롱이 되었다. 이 마을에는 크리스티나 모타가 만든 바르도 동상이 있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젊은 시절 바르도를 숭배했다. 그들은 비틀즈와 바르도가 출연하는 영화를 《하드 데이즈 나이트》와 비슷하게 촬영할 계획을 세웠지만, 그 계획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레논의 첫 번째 아내 신시아 파월은 바르도와 더 비슷해 보이기 위해 머리 색깔을 밝게 염색했고, 조지 해리슨은 바르도와 자신의 첫 번째 아내 패티 보이드를 비교했다고 신시아가 나중에 《레논의 반전》에서 썼다. 레논과 바르도는 1968년 메이페어 호텔에서 비틀즈 홍보 담당자 데릭 테일러의 소개로 한 번 만났다. 긴장한 레논은 도착하기 전에 LSD를 복용했고, 두 스타 모두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레논은 회고록에서 "나는 LSD에 취해 있었고, 그녀는 떠나려 했다"고 회상했다. 음악가 밥 딜런은 그의 첫 번째 (자신의 이름을 딴) 앨범의 라이너 노트에 따르면, 그가 쓴 첫 번째 노래를 바르도에게 헌정했다. 그는 또한 그의 두 번째 앨범 《프리휠린 밥 딜런》에 수록된 "아이 셸 비 프리"에서 그녀의 이름을 언급했다. 바르도의 영향과 유산을 조명하는 최초의 공식 전시는 그녀의 75번째 생일 다음 날인 2009년 9월 29일 불로뉴비양쿠르에서 열렸다. 호주의 팝 그룹 바르도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카일리 미노그는 2003년 발매된 그녀의 앨범 《보디 랭귀지》의 표지에서 바르도풍의 "섹스 키튼 룩"을 채택했다. 바르도를 모방하고 영감을 받은 여성들로는 클라우디아 시퍼, 엠마누엘 베아르, 엘케 좀머, 케이트 모스, 페이스 힐, 이사벨 아자니, 다이앤 크루거, 라라 스톤, 미노그, 에이미 와인하우스, 조지아 메이 재거, 자히아 드하르, 스칼렛 요한슨, 루이즈 부르구앵, 패리스 힐튼 등이 있다. 바르도는 "아무도 내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레티시아 카스타는 조안 스파르 감독의 2010년 프랑스 드라마 영화 《갱스부르: 영웅적인 삶》에서 바르도를 연기했다.
7.4. 기념 및 찬사
2011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매거진》은 그녀를 "영화 속 가장 아름다운 여성 50인" 목록에서 2위로 선정했다. 2015년, 암웨이의 영국 미용 회사가 2,000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바르도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성 톱 10" 중 6위에 올랐다. 2020년, 《보그》는 바르도를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 여배우" 1위로 선정했다. 영화 역사 속 여성들을 회고하는 기사에서 《글래머》는 그녀를 "역사상 가장 유능하고 재능 있으며 아름다운 여배우" 중 한 명으로 꼽았다.
1974년 작스가 의뢰한 앤디 워홀의 바르도 초상화는 2012년 5월 22일과 23일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판매되었다. 400.00 만 GBP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작스 사망 1년 후 경매에 나온 그의 미술 컬렉션의 일부였다.
2013년, 니콜 키드먼은 2013년 영국 브랜드 지미 추 캠페인에서 "바르도풍" 헤어스타일을 채택하며 그녀에게서 영감을 받았음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드라마 TV 시리즈 《바르도》는 2023년 프랑스 2에서 방영되었다. 줄리아 드 누네즈가 주연을 맡았으며, 바르도의 15세 첫 캐스팅부터 10년 후 영화 《진실》 촬영까지의 경력을 다룬다. 2023년, 그녀는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앨범 《거츠》에 수록된 노래 "레이시"와 채플 로안의 앨범 《미드웨스트 프린세스의 흥망성쇠》에 수록된 "레드 와인 슈퍼노바"에서 언급되었다.
2017년, 생트로페 중심부에 그녀를 기리기 위해 700 kg 무게와 2.5 m 높이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 동상은 에로틱 만화의 이탈리아 거장 밀로 마나라의 수채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2021년, 생트로페에 있는 그녀의 동상은 각각 23.75 캐럿의 금박 1400장으로 덮였다.
2019년, 벨기에 동물 권리 보호 협회 GAIA로부터 GAIA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8. 작품
브리지트 바르도는 배우로서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며, 가수로서도 여러 앨범과 싱글을 발표했다. 또한 동물 권리 운동가로서 자신의 신념을 담은 책들을 저술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8.1. 영화 출연 목록
연도 | 제목 | 배역 | 감독 |
---|---|---|---|
1952 | 훌륭한 유산 | 자보트 르무안 | 장 부아예 |
1952 | 비키니를 입은 소녀 마니나 | 마니나 | 윌리 로지에 |
1952 | 긴 이빨 | 신부 하객 | 다니엘 제랭 |
1953 | 아버지의 초상 | 도미노 | 앙드레 베르트미유 |
1953 | 사랑의 행위 | 미미 | 아나톨 리트박 |
1954 | 만약 베르사유에서 내게 이야기했더라면 | 마드무아젤 드 로지유 | 사샤 기트리 |
1954 | 음모의 콘서트 (증오, 사랑, 배신) | 안나 | 마리오 보나르드 |
1955 | 카롤린 셰리의 아들 | 필라르 다론다 | 장 드베브르 |
1955 | 미래의 스타들 | 소피 | 마르크 알레그레 |
1955 | 바다의 의사 | 엘렌 콜베르 | 랠프 토마스 |
1955 | 대기동 | 뤼시 | 르네 클레르 |
1955 | 길 건너편의 빛 | 올리비아 | 조르주 라콤브 |
1956 | 트로이의 헬렌 | 안드라스테 | 로버트 와이즈 |
1956 | 거룩한 말괄량이 | 브리지트 라투르 | 미셸 부아롱 |
1956 | 나의 아들 네로 | 포파이아 | 스테노 |
1956 | 데이지 따기 | 아녜스 뒤몽 | 마르크 알레그레 |
1956 | 신부는 너무 아름답다 | 카트린 라보 / 슈슈 | 피에르 가스파르 위 |
1956 |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 | 쥘리에트 아르디 | 로제 바딤 |
1957 | 파리지엔 | 브리지트 로리에 | 미셸 부아롱 |
1958 | 달빛의 보석상 | 우르술라 | 로제 바딤 |
1958 | 불행한 경우 | 이베트 모데 | 클로드 오탕라라 |
1959 | 여자와 꼭두각시 | 에바 | 줄리앙 뒤비비에 |
1959 | 바베트 전쟁에 가다 | 바베트 | 크리스티앙 자크 |
1959 | 나와 함께 춤출래? | 비르지니 당디외 | 미셸 부아롱 |
1959 | 오르페우스의 유언 | 본인 | 장 콕토 |
1960 | 하룻밤의 사건 (요염한 점) | 레스토랑의 여성 | 앙리 베르누이 |
1960 | 진실 | 도미니크 마르소 | 앙리조르주 클루조 |
1961 | 지금은 안돼요! | 소피 | 로제 바딤 |
1961 | 유명한 사랑 이야기 | 아녜스 베르나워 | 미셸 부아롱 |
1962 | 사생활 | 질 | 루이 말 |
1962 | 전사의 휴식 | 주느비에브 르텔 | 로제 바딤 |
1963 | 경멸 | 카미유 자발 | 장뤼크 고다르 |
1963 | 파파라치 | 본인 | 자크 로지에 |
1964 | 매력적인 바보 | 페넬로페 라이트페더 | 에두아르 몰리나로 |
1965 | 내 사랑 비비 | 본인 | 헨리 코스터 |
1965 | 비바 마리아! | 마리아 2세 | 루이 말 |
1966 | 마리 솔레유 | 본인 | 앙투안 부세예 |
1966 | 남성, 여성 | 여배우 | 장뤼크 고다르 |
1967 | 세시르의 환희 | 세시르 | 세르주 부르기뇽 |
1968 | 죽음의 영혼 | 주세피나 | 루이 말 |
1968 | 샬라코 | 백작부인 이리나 라자르 | 에드워드 드미트릭 |
1969 | 여성들 | 클라라 | 장 오렐 |
1970 | 곰과 인형 | 펠리시아 | 미셸 드빌 |
1970 | 초심자들 | 아녜스 | 기 카사릴 |
1971 | 럼 대로 | 린다 라뤼 | 로베르 앙리코 |
1971 | 후렌치킹의 후예 | 루이즈 | 크리스티앙 자크 |
1973 | 돈 후안, 또는 만약 돈 후안이 여자였다면 | 잔 | 로제 바딤 |
1973 | 콜리노의 교훈적이고 즐거운 이야기 | 아라벨 | 니나 콤파네즈 |
8.2. 음반 목록
바르도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여러 앨범과 싱글을 발표했다.
- 1961년: Stanislas (프레르 자크 그룹과 함께)
- 1962년: Sidonie (영화 《사생활》 사운드트랙 싱글)
- 1962년: Tiens, c'est toi ! (장마스 리비에르와 듀엣), La Leçon de guitare (올리비에 데팍스와 듀엣)
- 1963년: 브리지트 바르도 (LP 앨범) - "슬롯 머신", "음악의 친구들", "엘 쿠치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를 바친다", "탱고로 초대", "그것은 매우 우스꽝스럽다", "라 마드라그", "더 이상은 안 돼", "모두 내 아기를 사랑해", "물장미", "흑백", "잠들기 위해 만들어졌다"
- 1963년: 슬롯 머신 (싱글) - "엘 쿠치페", "라 마드라그", "음악의 친구들"
- 1964년: Invitango (싱글) - "흑백", "모두 내 아기를 사랑해", "그것은 매우 우스꽝스럽다"
- 1964년: Ça pourrait changer (싱글) - "여름 끝에", "나는 춤춘다 고로 존재한다", "셋이 없으면 넷도 없다"
- 1964년: B.B. (LP 앨범) - "나는 놀아요", "해변 이야기", "변할 수 있어", "여름 끝에", "그를 사랑하게 두지 마", "마리아 닝구엠", "나는 춤춘다 고로 존재한다", "멜라니", "침대 캐노피", "다른 날처럼",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셋이 없으면 넷도 없다"
- 1964년: 해변 이야기 (싱글) -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그를 사랑하게 두지 마", "멜라니"
- 1965년: Bubble gum (싱글) - "나는 형용사가 부족해", "잠자는 남자들", "옴니버스"
- 1965년: Viva Maria ! (영화 사운드트랙 LP 앨범) - "파리, 파리, 파리", "마리아, 마리아", "아! 파리의 작은 여인들" (잔 모로와 듀엣)
- 1966년: 태양 (싱글) - "이사 중", "갱 갱", "나는 항상 너에게 돌아갈 거야"
- 1967년: Je t'aime... moi non plus (1986년 발매 싱글, 세르주 갱스부르와 듀엣)
- 1967년: Harley Davidson (싱글) - "콘택트"
- 1968년: Bonnie and Clyde (LP 앨범) - "보니 앤 클라이드", "버블껌", "코믹 스트립", "다른 날처럼", "가엾은 롤라" (S.G.), "라 마드라그", "취한 남자" (S.G.), "모두 내 아기를 사랑해", "보들레르" (S.G.),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S.G.)
- 1968년: Bonnie and Clyde (영어 싱글) - "코믹 스트립"
- 1968년: 브리지트 바르도 쇼 (LP 앨범) - "할리 데이비슨", "마르세예즈 제네릭", "미스터 선", "아! 비바 상그리아",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갱 갱", "생트로페", "그리모 항구", "오! 그가 얼마나 못생겼는지", "파리", "나는 항상 너에게 돌아갈 거야", "이사 중", "악마는 영국인", "다비드 B", "콘택트"
- 1969년: 짚으로 만든 소녀 (싱글) - "나는 기억을 잃고 싶어"
- 1970년: Tu veux ou tu veux pas (싱글) - "내 표범과 나", "존과 미셸", "네가 날 떠난 이후로"
- 1970년: Nue au soleil (싱글) - "그것은 보사노바"
- 1970년: Les Novices (영화 사운드트랙 싱글) - "각자의 남자" (아니 지라르도와 듀엣)
- 1971년: Boulevard du rhum (영화 사운드트랙 싱글) - "럼 대로에서", "사랑의 기쁨" (기 마르샹과 듀엣)
- 1973년: Vous ma lady (싱글) - "사랑하는 당신이 왔어요" (로랑 베르제와 듀엣)
- 1973년: Le Soleil de ma vie (싱글) - "내 삶의 태양" (사샤 디스텔과 듀엣)
- 1982년: Toutes les bêtes sont à aimer (싱글) - "사냥"
8.3. 저술
바르도는 다섯 권의 책을 저술했다.
- 《누노아: 작은 흰 물범》 (Grasset, 1978)
- 《이니셜 B.B.》 (자서전, Grasset & Fasquelle, 1996)
- 《플루톤의 광장》 (Grasset & Fasquelle, 1999)
- 《침묵 속의 외침》 (Editions Du Rocher, 2003)
- 《왜?》 (Editions Du Rocher, 2006)
9. 수상 및 영예
브리지트 바르도는 배우로서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받아 다수의 영화상을 수상했으며, 은퇴 후에는 동물 권리 운동가로서 인도주의적 공로를 인정받아 다양한 영예를 안았다.
9.1. 수상 및 후보 지명
- 1957년: 제12회 프랑스 영화 빅투아르상 최우수 여배우상 (영화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의 줄리에트 아르디 역)
- 1958년: 제11회 밤비상 최우수 여배우상 후보 (영화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의 줄리에트 아르디 역)
- 1959년: 제14회 프랑스 영화 빅투아르상 최우수 여배우상 (영화 《불행한 경우》의 이베트 모데 역)
- 1960년: 브뤼셀 유럽상 최우수 여배우상 (영화 《진실》의 도미니크 마르소 역)
- 1961년: 제5회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최우수 외국 여배우상 (영화 《진실》의 도미니크 마르소 역)
- 1966년: 제12회 프랑스 영화 아카데미 크리스탈 스타상 최우수 여배우상 (영화 《비바 마리아!》의 마리 피츠제럴드 오말리 역)
- 1967년: 제18회 밤비상 인기상
- 1967년: 제20회 BAFTA 최우수 외국 여배우상 후보 (영화 《비바 마리아!》의 마리 피츠제럴드 오말리 역)
9.2. 영예
- 1980년: 트리에스테 시 메달
- 1985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여되었으나 불참)
- 1985년: 릴 시 메달
- 1989년: 인도주의 공로 평화상
- 1992년: 유엔 환경 계획의 글로벌 500 명예의 전당 헌액
- 1992년: 할리우드에서 제네시스 어워드의 일환으로 브리지트 바르도 국제상 제정
- 1994년: 파리 시 메달
- 1995년: 생트로페 시 메달
- 1996년: 라 볼 시 메달
- 1997년: 그리스 유네스코 생태학상
- 1997년: 아테네 시 메달
- 1999년: 소행성 17062 바르도 명명
- 2001년: PETA 인도주의상
- 2008년: 스페인 알타리바 재단상
- 2017년: 생트로페 중심부에 그녀를 기리는 동상 건립 (700 kg, 2.5 m 높이)
- 2019년: 벨기에 동물 권리 보호 협회 GAIA 평생 공로상
- 2021년: 생트로페 동상에 23.75캐럿 금박 1400장 부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