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playing career
브라이언 키드는 맨체스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시작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소년 아카데미에 입단했고, 이후 여러 클럽에서 활약하며 이름을 알렸다.
1.1. Early life and youth career
키드는 1949년 5월 29일 맨체스터의 콜리허스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1964년 8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카데미에 입단하며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며, 2년 후에는 해당 클럽에서 프로 선수로 전향했다.
1.2. Club career
키드는 선수 시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비롯해 아스널, 맨체스터 시티 등 여러 팀을 거치며 공격수로 활약했다.
1.2.1. Manchester United
키드는 1967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성인 팀으로 승격되어 1974년까지 뛰었다. 그는 1968년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벤피카를 상대로 4대1 승리를 거둘 때 자신의 19번째 생일에 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이 골은 그의 선수 생활에 있어 상징적인 순간으로 남아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총 203번의 리그 경기에 출전하여 52골을 기록했다.
1.2.2. Arsenal
1974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2부 리그로 강등된 후, 키드는 11.00 만 GBP의 이적료로 아스널로 이적했다. 그는 레스터 시티와의 데뷔전에서 득점을 기록했으며, 이후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두 골을 넣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는 1974-75 시즌 동안 40경기에서 19골을 기록하며 아스널의 최고 득점자가 되었다. 다음 시즌인 1976년 3월 20일에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6대1 승리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아스널에서 총 90경기에 출전하여 34골을 기록했다.
1.2.3. Manchester City and later clubs
1976년 7월, 키드는 10.00 만 GBP의 이적료로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했다. 그는 데니스 로에 이어 맨체스터의 두 주요 클럽에서 모두 뛴 두 번째 선수가 되었다. 맨체스터 시티에서 그는 1977-78 시즌 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3대1 승리(홈 구장 메인 로드)와 2대2 무승부(원정 구장 올드 트래퍼드)를 기록하며 세 골을 넣었다. 맨체스터 시티에서 98경기에 출전하여 44골을 기록했다.
그는 1979년 3월에 15.00 만 GBP의 이적료로 에버턴으로 이적하여 44경기에서 12골을 기록했으며, FA컵 준결승전에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퇴장당하기도 했다. 이어서 1980년 5월에 11.00 만 GBP의 이적료로 볼턴 원더러스에 합류하여 43경기에서 13골을 기록했다. 1981년에는 NASL 팀인 애틀랜타 치프스로 임대되어 29경기에서 23골을 넣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82년 1월, 키드는 볼턴을 떠나 NASL로 돌아갔고,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와 계약했으며 2년 뒤에는 미네소타 스트라이커스로 이적했다. 두 팀에서 모두 득점력이 좋았으나, 1984년에 축구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2. International career
브라이언 키드는 1970년에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아 두 경기에 출전했다.
|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 득점 |
|---|---|---|---|
| 잉글랜드 | 1970 | 2 | 1 |
| 합계 | 2 | 1 |
스코어 및 결과는 잉글랜드의 득점수를 먼저 기록하며, 스코어 열은 키드의 각 골 이후의 스코어를 나타낸다.
| 번호 | 날짜 | 경기장 | 상대 | 스코어 | 결과 | 대회 |
|---|---|---|---|---|---|---|
| 1 | 1970년 5월 24일 | 에스타디오 올림피코 아타우알파, 키토, 에콰도르 | 에콰도르 | 2-0 | 2-0 | 친선 경기 |
3. Managerial and coaching career
브라이언 키드는 선수 은퇴 후 감독 및 코치로서 오랜 경력을 쌓았으며, 유소년팀 코치부터 수석 코치, 그리고 감독까지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3.1. Early coaching roles (1984-2008)
1984년, 키드는 배로에서 코치 경력을 시작했다. 1986년에는 잠시 프레스턴 노스 엔드의 감독을 맡아 몇 경기를 이끌었다. 이후 키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돌아와 1988년 알렉스 퍼거슨 감독에 의해 유소년 팀 코치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라이언 긱스, 대런 퍼거슨 등 재능 있는 선수들을 발굴하고 성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1년 여름 퍼거슨의 수석 코치였던 아치 녹스가 레인저스로 떠나자, 키드는 수석 코치로 승진했다. 그는 퍼거슨 감독을 도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1992년 EFL컵 우승, 1993년 프리미어리그 우승, 1994년과 1996년 더블 우승, 그리고 1997년 또 한 번의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1998년 12월, 키드는 블랙번 로버스의 감독직을 맡기 위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났다. 당시 블랙번은 시즌 초반 부진으로 강등권에 놓여 있었고, 로이 호지슨 감독이 경질된 상태였다. 키드는 블랙번에서 프리미어리그 이달의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유망한 출발을 보였고, 취임 후 4개월 동안 거의 2000.00 만 GBP에 달하는 거액을 투자하여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했다. 그러나 그는 팀이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1999년 11월 3일 블랙번이 1부 리그 19위에 머물자 경질되었다.
2000년 5월, 키드는 리즈 유나이티드로 옮겨 유소년 코치로 일했으나, 2001년 3월에는 데이비드 오리어리와 테리 비너블스 감독 아래에서 헤드 코치로 승진했다. 그러나 피터 리드가 감독으로 부임한 후 2003년 5월에 리즈를 떠났다. 그 사이에 2003년 1월에는 스벤예란 에릭손 감독의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수석 코치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2004년 5월, 유로 2004를 몇 주 앞두고 전립선암 수술을 받게 되어 이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키드는 2006년 2월까지 회복을 완료했다.
2006년 8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 선수였던 로이 킨이 선덜랜드의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킨이 키드를 자신의 수석 코치로 원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키드는 대신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셰필드 유나이티드에서 닐 워녹 감독의 수석 코치 제안을 수락했다. 셰필드 유나이티드가 강등되고 워녹이 사임한 후에도 키드는 브래몰 레인에 남아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인 브라이언 롭슨 신임 감독 아래서 일했지만, 롭슨 감독이 2008년 2월 떠나자 그도 클럽을 떠났다.
3.2. Manchester City (2009-2021)
2009년 2월 11일, 키드는 프리미어리그 소속 포츠머스의 임시 감독 폴 하트의 수석 코치로 임명되었다. 그는 2009년 8월까지 머물다가 새로운 계약 제안을 거절하고 팀을 떠났다.
2009년 9월, 키드는 맨체스터 시티의 기술 개발 매니저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19일 마크 휴즈 감독이 경질된 후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한 로베르토 만치니의 수석 코치가 되었다. 처음에는 만치니의 유일한 수석 코치였으나, 1년 뒤에는 아틸리오 롬바르도, 데이비드 플랫과 함께 공동 수석 코치로 활동했다.
2011년 2월, 키드는 알렉스 퍼거슨과의 1990년대 후반 갈등에 대해 퍼거슨에게 "의심의 여지를 주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키드는 2004년 전립선암으로 투병 중일 때 퍼거슨으로부터 전화 한 통 없었지만, 이제는 경기 후 퍼거슨과 다시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언급했다.
2011 FA컵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시티는 스토크 시티를 1대0으로 꺾고 35년 만에 첫 주요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어 2011-12 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1968년 이후 처음으로 리그 챔피언에 등극했다. 시즌의 극적인 최종전에서 맨체스터 시티는 퀸스 파크 레인저스를 상대로 추가 시간에 두 골을 넣어 3대2로 역전승을 거두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골득실차로 제치고 극적으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키드는 만치니 감독과 팀의 수석 코치인 데이비드 플랫과 함께 세르히오 아궤로의 우승 결정골을 축하하기 위해 필드로 달려 나갔다.
만치니 감독이 팀을 떠난 후, 키드는 2012-13 시즌 마지막 두 경기를 임시 감독으로서 이끌었다. 이후 마누엘 페예그리니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수석 코치로 돌아왔고, 페예그리니와 그의 후임인 펩 과르디올라 감독을 모두 보좌했다. 그는 2020-21 시즌이 끝난 후 맨체스터 시티를 떠났다.
4. Relationship with Alex Ferguson
브라이언 키드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관계는 1999년 퍼거슨의 자서전 나의 삶을 관리하며에 키드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실리면서 틀어졌다. 퍼거슨은 키드가 자신의 수석 코치 시절 드와이트 요크 영입에 의문을 제기한 것에 분노했으며, 책에서 "나는 브라이언 키드를 복잡하고 종종 불안정하며 특히 건강에 대해 불안해하는 사람으로 보았다"고 썼다.
키드는 퍼거슨의 공격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월트 디즈니가 퍼거슨 책의 영화 판권을 사서 환타지아의 속편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믿는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2011년 2월, 키드는 이 분쟁에서 퍼거슨에게 "의심의 여지를 주겠다"고 밝히며 화해의 의지를 보였다. 키드는 2004년 전립선암 투병 중에는 퍼거슨으로부터 전화 한 통 받지 못했지만, 이후 경기 후에는 다시 퍼거슨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말했다.
5. Personal life and health
브라이언 키드는 2004년 5월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이로 인해 그는 유로 2004를 몇 주 앞두고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코치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는 2006년 2월까지 건강을 회복했다.
6. Honours
브라이언 키드는 선수와 감독/코치로서 다양한 영예를 안았다.
6.1. Player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유러피언컵: 1967-68
- FA 채리티 실드: 1967
6.2. Manager
개인
- 프리미어리그 이달의 감독상: 1998년 12월
7. Career statistics
브라이언 키드의 감독/코치로서의 통계 기록은 다음과 같다.
7.1. Managerial statistics
| 팀 | 국적 | 부임 | 경질 | 기록 | ||||
|---|---|---|---|---|---|---|---|---|
| 경기 | 승 | 무 | 패 | 승률 % | ||||
| 프레스턴 노스 엔드 | 잉글랜드 | 1986년 1월 24일 | 1986년 3월 1일 | 6 | 0 | 2 | 4 | 0.00 |
| 블랙번 로버스 | 잉글랜드 | 1998년 12월 4일 | 1999년 11월 3일 | 44 | 12 | 18 | 14 | 27.27 |
| 맨체스터 시티 | 잉글랜드 | 2013년 5월 13일 | 2013년 6월 14일 | 2 | 1 | 0 | 1 | 50.00 |
| 합계 | 52 | 13 | 20 | 19 | 25.0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