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베르나르도는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수도사로서의 삶을 열망했으며, 훗날 시토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1.1. 출생과 가족

베르나르도는 1090년 프랑스 디종 근처 퐁텐레디종의 테셀랭 드 퐁텐과 알레트 드 몽바르 사이에서 일곱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부르고뉴의 최고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베르나르도는 여섯 명의 아들 중 한 명이었다.
1.2. 교육과 초기 신앙적 성향
9세에 샤티용쉬르센에 있는 성 보를 수도회 소속 재속 참사회원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보내져 교육을 받았다. 그는 문학 과 수사학에 관심을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수도사로서의 삶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특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사제가 되려는 생각을 자주 했다.
1.3. 시토회 입회
1098년 로베르 드 몰렘이 디종 근처 시토 수도원을 설립하여 성 베네딕토 수도규칙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생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새로운 수도회인 시토회를 창설하였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베르나르도는 시토 수도원에 입회하기로 결심했다. 1113년, 그는 자신을 포함한 부르고뉴의 젊은 귀족 30명과 함께 시토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의 설득력 있는 모범은 많은 사람(심지어 그의 아버지도 포함)이 수도 생활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그는 종교적 소명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진다.
2. 클레르보 수도원장과 시토회 개혁
베르나르도는 클레르보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원장으로서 시토회 확장에 크게 기여하며 수도회 개혁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2.1. 클레르보 수도원 설립
시토 수도원의 작은 공동체는 빠르게 성장했다. 입회한 지 3년 만에 베르나르도는 열두 명의 수도사들과 함께 랑그르 교구의 압생트 계곡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1115년 6월 25일, 베르나르도는 이곳을 '클레르 발레'(Claire Vallée) 또는 '클레르보'(Clairvaux)라고 명명했으며, 이후 베르나르도와 클레르보라는 이름은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샬롱쉬르마른의 주교인 기욤 드 샹포는 베르나르도를 수도원장으로 임명했으며, 이후 수도원장과 주교 사이에 굳건한 우정이 형성되었다. 기욤 주교는 파리 노트르담 대학교의 신학 교수이자 생 빅토르 수도원의 설립자였다.
클레르보 수도원의 시작은 매우 엄격했고, 베르나르도 자신은 더욱 그러했다. 그는 수련 수사 시절부터 극심한 단식으로 자주 병을 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 생활을 원하는 지원자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클레르보는 곧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118년에는 샬롱쉬르마른 교구에 트루아퐁텐 수도원, 1119년에는 오툉 교구에 퐁트네 수도원, 1121년에는 베르뱅 근처에 푸아니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베르나르도 생전에는 60개 이상의 수도원이 시토회에 합류하거나 새로 설립되었다.
2.2. 시토회 확산과 영향력 증대
베르나르도의 지도 아래 시토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여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는 수도원 외부에서도 설교자이자 교황을 섬기는 외교관으로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장바티스트 쇼타르는 그를 "그 시대의 가장 관상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활동적인 인물"이라고 묘사했으며, 베르나르도 자신은 상반되는 자신의 면모를 "그 시대의 키메라"라고 불렀다.
2.3. 수도 생활과 금욕주의
베르나르도는 엄격한 수도 생활과 금욕적 실천을 추구했다. 그는 자기 부정과 삶의 성스러움을 강조하며, 사람들에게 세상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그의 엄격함은 처음에는 수도회 내에서도 비판을 받았으나, 기도를 위한 시간을 단축하고 식사를 개선하며 지역 주교의 도움으로 수도원의 일치를 강화하여 수도원 전반의 상태를 크게 향상시켰다.
2.4. 시토회 변호

클뤼니 수도회의 베네딕토회 수도사들은 시토회가 급속도로 부상하고 많은 베네딕토회 수도사들이 시토회로 전향하는 것을 불만스러워하며 시토회의 생활 방식을 비판했다. 기욤 드 생티에리의 권유에 따라 베르나르도는 자신의 저서 『기욤 수도원장에게 보내는 변명』(Apologia ad Guillelmum Sancti Theoderici Abbatem라틴어)을 통해 시토회를 변호했다. 클뤼니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었던 베드로는 베르나르도에게 존경과 우정을 표하며 화답했고, 이후 클뤼니는 자체적인 개혁을 시작했으며 베르나르도는 쉬제르 수도원장과도 친분을 맺었다.
3. 신학 및 영성적 기여
베르나르도는 신비주의, 성모 마리아론, 그리고 스콜라 철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통해 중세 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3.1. 신비주의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
베르나르도는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이고 체험적인 관계를 강조한 신비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그는 겸손을 통해 인간이 관상에 이르고 하느님과 합일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이는 인간이 하느님과 동일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하느님의 의지와 합치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사랑의 과학"을 주창하며 사랑에 기반한 영적 가르침을 많이 남겼다.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느님 자신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도는 헤아릴 수 없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3.2. 마리아론

베르나르도는 성모 마리아의 역할과 신학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마리아 신심을 열렬히 설교했다. 그는 마리아가 협구원자이자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원죄 없는 잉태 교리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 없이 잉태되었다고 주장했다.
3.3. 스콜라 철학 비판
베르나르도는 이성 중심의 스콜라 철학을 비판하고, 감성적이며 체험적인 신앙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의 지식이나 추론보다는 삶의 변화와 하느님 앞에서 겸손함을 강조하는 데 집중했다. 그의 관점에서 아벨라르와 같은 스콜라학자들의 신학은 이성에 너무 의존하여 믿음의 신비적이고 체험적인 측면을 간과한다고 보았다.
3.4. 주요 신학 저술
베르나르도의 신학적, 영성적 사상은 많은 저술에 담겨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수도사들에게 설교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가장 유명한 저술인 《아가 강론》(Sermones super Cantica Canticorum라틴어, 86편)이 있다. 이 강론집에는 동생 제라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전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그의 다른 중요한 저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겸손과 교만의 단계》(De gradibus humilitatis et superbiae라틴어, 약 1120년)
- 《기욤 수도원장에게 보내는 변명》(Apologia ad Guillelmum Sancti Theoderici Abbatem라틴어, 약 1125년) - 클뤼니 수도회의 비판에 맞서 시토회를 변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성직자 개종에 관하여》(De conversione ad clericos sermo seu liber라틴어, 1122년)
- 《은총과 자유 의지》(De gratia et libero arbitrio라틴어, 약 1128년)
- 《하느님을 사랑함에 관하여》(De diligendo Dei라틴어)
- 《새로운 기사도에 관하여》(Liber ad milites templi de laude novae militiae라틴어, 1129년) - 성전 기사단을 옹호하는 내용이다.
- 《교훈과 분배에 관한 서》(De praecepto et dispensatione libri라틴어, 약 1144년)
- 《고려할 점에 관하여》(De consideratione라틴어, 약 1150년) -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 보낸 것으로, 교회 개혁은 교황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경건과 명상이 행동에 선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아일랜드 주교 성 말라키의 삶과 업적》(Liber De vita et rebus gestis Sancti Malachiae Hiberniae Episcopi라틴어)
- 《주교의 생활과 직무에 관하여》(De moribus et officio episcoporum라틴어) - 상스 대주교 앙리 상글리에에게 보낸 주교의 의무에 관한 서신이다.
4. 교회 정치 및 교황 분열에서의 역할
베르나르도는 교회 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특히 교황 분열 사태 해결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4.1. 외교 활동과 교회 통치
베르나르도는 당대의 국왕들과 제후들의 침해로부터 교회의 권리를 수호하고, 상스 대주교 앙리 상글리에와 파리 주교 스테파노 드 상리스에게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교황을 위한 설교자이자 외교관으로서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밀라노 대주교 자리를 제의받았으나 거절하고 클레르보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4.2. 교황 분열 사태 해결
1130년 교황 호노리우스 2세가 사망하자, 교황 인노첸시오 2세와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의 선출로 교회에 교황 분열이 발생했다. 아나클레투스 2세에 의해 로마에서 추방당한 인노첸시오 2세는 프랑스로 피신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6세는 에탐프에서 프랑스 주교 회의를 소집했고, 베르나르도는 이 회의에 소환되어 경쟁하는 두 교황 사이에서 판단을 내릴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는 인노첸시오 2세의 손을 들어주었다.
베르나르도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피사와 제노바, 그리고 밀라노를 인노첸시오 2세와 화해시켰다. 같은 해 그는 랭스 공의회에서 인노첸시오 2세를 보좌했다. 이후 아키텐으로 가서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를 아나클레투스 2세의 지지에서 돌려세웠다. 아나클레투스 2세에 관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에게 보낸 서신에서 베르나르도는 "유대인이 성 베드로의 옥좌에 앉아 있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비난했으며, "아나클레투스는 친구들에게조차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지만, 인노첸시오는 의심할 여지 없이 저명하다"고 주장했다. (아나클레투스의 증조부 중 한 명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으나, 아나클레투스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었으며 그의 가족은 세대 동안 기독교인이었다.)

1132년, 베르나르도는 인노첸시오 2세를 따라 이탈리아로 갔다. 그들은 클뤼니에서 클레르보가 클뤼니 수도원에 지불하던 관습적인 세금을 폐지했다. 이로 인해 '백의 수도사'(시토회)와 '흑의 수도사'(클뤼니회) 사이에 20년간의 논쟁이 발생했다. 그 해 5월, 로타르 3세의 군대 지원을 받은 교황은 로마에 입성했지만, 로타르 3세는 아나클레투스 지지자들의 저항에 맞서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느껴 알프스 너머로 퇴각했고, 인노첸시오는 1133년 9월 피사로 피신했다. 베르나르도는 6월에 프랑스로 돌아와 1130년부터 시작한 평화 유지 활동을 계속했다.
1134년 말, 그는 다시 아키텐으로 두 번째 여정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기욤 10세는 다시 교황 분열에 빠져 있었다. 베르나르도는 기욤을 라 쿨드르 교회에서 자신이 거행한 미사에 초대하여 성체성사 중 "하느님의 종들을 경멸하듯이 하느님을 경멸하지 말라"고 훈계했다. 결국 기욤은 굴복했고 교황 분열은 끝났다.
베르나르도는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시칠리아의 로제르 2세가 인노첸시오 2세에 대한 피사 시민들의 충성을 철회시키려 하는 것을 막았다. 그는 폐위된 밀라노 대주교 안셀무스 5세를 따르던 밀라노 시를 교황에게 다시 복종시켰다. 이 공로로 그는 밀라노 대주교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고 클레르보로 돌아왔다. 그는 마침내 수도원에 안심하고 머무를 수 있다고 믿고, 자신에게 '교회 박사'라는 칭호를 안겨준 저술 작업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그는 아가 강론을 저술했다.
1137년, 베르나르도는 로타르 3세와 시칠리아의 로제르 간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교황의 명령으로 다시 수도원을 떠나야 했다. 팔레르모에서 열린 회의에서 베르나르도는 로제르에게 인노첸시오 2세의 권리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또한 분열을 지지하던 마지막 지지자들을 침묵시켰다. 아나클레투스는 1138년 "슬픔과 실망"으로 사망했고, 그와 함께 교황 분열은 종식되었다.
1139년, 베르나르도는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에 참석하여 분열의 잔존 지지자들이 최종적으로 단죄되는 것을 도왔다. 거의 같은 시기에 아일랜드의 대주교인 말라키가 클레르보를 방문했고, 그들 사이에 매우 가까운 우정이 형성되었다. 말라키는 시토회 수도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교황은 허락하지 않았고, 말라키는 1148년 클레르보에서 사망했다.
4.3. 황제 및 국왕과의 관계
베르나르도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 시칠리아의 로제르 2세 등 당대 권력자들과 상호 작용하며 교회의 권리를 옹호하고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로타르 3세에게 인노첸시오 2세 지지를 설득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냈으며, 이는 교황 분열 종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5. 갈등과 지적 논쟁
베르나르도는 당시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과 신학적 논쟁을 벌이고, 이단 사상에 맞서 싸우며 교회의 정통성을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5.1. 피에르 아벨라르와의 논쟁
11세기 말에는 철학과 신학 학교 내에서 독립적인 정신이 발달했으며, 이 운동은 피에르 아벨라르라는 열정적이고 강력한 지지자를 만났다. 아벨라르의 삼위일체에 관한 논문은 1121년 이단으로 단죄되었고, 그는 자신의 책을 불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벨라르는 논란이 되는 가르침을 계속 발전시켰다. 베르나르도는 아벨라르와 만나 그의 저술을 수정하도록 설득하려 했고, 아벨라르는 회개하고 수정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베르나르도의 면전에서 벗어나자 약속을 어겼다고 전해진다.
베르나르도는 아벨라르를 교황과 교황청의 추기경들에게 고발했다. 아벨라르는 베르나르도와 논쟁을 요청했지만, 베르나르도는 처음에는 그러한 중요한 문제들이 논리적 분석으로 해결되어서는 안 된다며 거절했다. 기욤 드 생티에리에게 보낸 베르나르도의 편지에서도 그는 저명한 논리학자와 대면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냈다. 아벨라르는 공개 토론을 계속 요구했고, 그의 도전이 널리 알려지면서 베르나르도가 거절하기 어려워졌다. 1141년, 아벨라르의 요청에 따라 상스 대주교는 주교 회의를 소집하여 아벨라르와 베르나르도가 각자의 주장을 제시하고 아벨라르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갖도록 했다.
베르나르도는 토론 전날 밤 주교들에게 로비를 펼쳐 많은 이들을 자신의 입장으로 설득했다. 다음 날, 베르나르도가 개회사를 마친 후 아벨라르는 답변을 시도하지 않고 퇴장하기로 결정했다. 회의는 베르나르도의 편을 들어주었고, 그들의 판결은 교황에 의해 확정되었다. 아벨라르는 저항 없이 순종했고, 공경자 베드로의 보호 아래 클뤼니로 은퇴하여 2년 후 사망했다.
5.2. 이단 사상과의 투쟁
베르나르도는 과밀해진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을 독일, 스웨덴, 잉글랜드,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위스, 이탈리아로 파견하는 데 전념했다. 이들 중 일부는 인노첸시오 2세의 명령으로 트레 폰타네 수도원을 차지했으며, 1145년에는 그곳에서 에우제니오 3세가 선출되었다. 인노첸시오 2세는 1143년에 사망했다. 그의 두 후계자인 교황 첼레스티노 2세와 교황 루치오 2세는 짧은 기간 동안만 재위했으며, 이후 베르나르도는 자신의 제자인 피사의 베르나르도가 성 베드로의 옥좌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 제자는 이후 에우제니오 3세로 알려지게 되었다. 베르나르도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자주 인용되는 『고려할 점에 관하여』(De consideratione라틴어)를 포함한 다양한 지침을 그에게 보냈다. 이 저서의 주요 주장은 교회 개혁이 교황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속적인 문제는 부수적인 것이며, 베르나르도는 경건과 명상이 행동에 선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전에 교회 내부의 분열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던 베르나르도는 이제 이단과의 싸움에 나서야 했다. 전 클뤼니 수도원 수도사였던 로잔의 앙리는 피에르 드 브뤼의 추종자들인 페트로브루시안주의의 가르침을 채택하여 피에르 사망 후 변형된 형태로 퍼뜨렸다. 로잔의 앙리의 추종자들은 헨리코주의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1145년 6월, 오스티아의 추기경 알베리크의 초청으로 베르나르도는 프랑스 남부를 여행했다. 그의 설교는 금욕적인 외모와 소박한 복장에 힘입어 새로운 종파들을 쇠퇴시키는 데 기여했다. 헨리코주의와 페트로브루시안주의는 그 해 말까지 소멸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로잔의 앙리는 체포되어 툴루즈 주교 앞에 끌려갔고, 아마도 종신형에 처해졌다. 1146년 말에 작성된 것이 분명한 툴루즈 시민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르나르도는 이단 잔재를 완전히 뿌리 뽑을 것을 촉구했다. 그는 또한 카타리파에 대항하여 설교했다. 1148년 랭스 공의회에서 푸아티에의 질베르에 대한 두 번째 심리가 있기 전, 베르나르도는 참석자들과 개인적인 만남을 갖고 질베르를 단죄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는 참석한 추기경들의 불쾌감을 샀고, 그들은 자신만이 이 사건을 심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질베르에 대한 이단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다.
6. 설교와 십자군 운동
베르나르도의 열정적인 설교는 제2차 십자군 운동을 촉발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나, 십자군의 실패는 그의 명성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6.1. 수도원 및 성직자 대상 설교
수도원장이었던 베르나르도는 자신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다른 수도사들에게도 자주 강론했으며, 특히 유명한 사례로는 파리의 신학도들에게 한 설교가 있다. 그는 1139년 또는 1140년 초에 학자들과 성직자 지망생들에게 『개종하는 성직자에게』(Ad clericos de conversione라틴어)라는 설교를 했다. 그의 많은 아가 강론은 클레르보의 수도사들에게 행해진 설교 중 자주 연구되는 설교이다.
6.2. 제2차 십자군 선동

이 시기에 성지에서 기독교 세계를 경악하게 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에데사에서 기독교도들이 패배하고 대부분의 에데사 백국 영토가 셀주크 투르크족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예루살렘 왕국과 다른 십자군 국가들은 유사한 재앙에 직면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주교단의 사절들이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프랑스 국왕도 사절을 보냈다. 1144년, 에우제니오 3세 교황은 베르나르도에게 제2차 십자군을 설교하도록 위임했으며,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제1차 십자군에게 부여했던 것과 동일한 대사를 허락했다.
처음에는 1095년의 제1차 십자군 때와 같은 대중적 열기가 거의 없었다. 베르나르도는 십자가를 취하는 것이 죄의 사함과 은총을 얻는 강력한 수단임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3월 31일,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참석한 가운데 그는 베즐레의 한 들판에서 엄청난 군중에게 "인생 최고의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수많은 청중이 참전을 신청했고, 새로 입대하는 사람들에게 줄 십자가 천이 바닥났다고 전해진다.
제1차 십자군과 달리 새로운 원정에는 프랑스 왕비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수많은 고위 귀족 및 주교를 포함한 왕족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더 큰 지지는 일반 대중으로부터 나왔다. 베르나르도는 며칠 후 에우제니오 3세 교황에게 "도시와 성들은 이제 텅 비었습니다. 남자 7명당 여자 1명도 채 남지 않았고, 곳곳에 아직 살아있는 남편을 둔 과부들이 있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베르나르도는 이후 독일로 건너갔으며, 기적들이 그의 선교 활동 성공에 기여했다고 전해진다. 독일 국왕 콘라트 3세와 그의 조카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베르나르도에게서 십자가를 받았다. 에우제니오 3세 교황은 직접 프랑스로 와서 이 원정을 독려했다. 제1차 십자군 때처럼 설교는 유대인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라둘프라는 광신적인 프랑스 수도사는 라인란트의 쾰른, 마인츠, 보름스, 슈파이어에서 유대인 학살을 선동했는데, 그는 유대인들이 성지 구출에 재정적으로 기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쾰른 대주교와 마인츠 대주교는 이러한 공격에 격렬히 반대하며 베르나르도에게 이를 비난해 달라고 요청했다. 베르나르도는 그렇게 했지만, 유대인 박해가 계속되자 그는 플랑드르에서 독일로 직접 가서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마인츠에서 라둘프를 찾아내 침묵시키고 그를 수도원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베르나르도의 말년은 자신이 설교했던 제2차 십자군의 실패와 그에 대한 모든 책임 때문에 슬픔에 잠겼다. 베르나르도는 교황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으며, 이 편지는 그의 저서 『고려할 점에 관하여』 2부에 실려 있다. 그는 그곳에서 십자군들의 죄가 그들의 불행과 실패의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6.3. 반도(Wends) 십자군 옹호
베르나르도는 실제로 반도 십자군을 직접 설교하지는 않았지만, 제2차 십자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서슬라브족을 진압할 것을 옹호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이들을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들이 개종하거나 제거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발표된 칙령은 이 편지가 널리 선포되고 낭독되어야 한다고 명시했으며, 이는 "편지가 설교의 기능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6.4. 십자군 선동의 영향과 비판
베르나르도의 십자군 운동에 대한 열정적인 참여는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제2차 십자군의 참패로 이어져 그에게 큰 실망과 역사적 비판을 안겼다. 그의 설교가 유대인 학살을 촉발시킨 점, 그리고 "개종 또는 제거"와 같은 과격한 언어를 사용한 점은 그의 신학적 열정이 때로는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십자군의 실패를 참가자들의 죄 탓으로 돌린 그의 해석은 그가 십자군의 종교적 정당성을 얼마나 강하게 믿었는지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현실적 문제에 대한 그의 한계도 보여주었다. 이러한 비판적인 시각은 베르나르도의 유산에 대한 복합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7. 말년과 죽음

7.1. 말년과 성찰
동시대 인물들의 죽음은 베르나르도에게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상기시키는 경고가 되었다. 1152년에 쉬제르 수도원장이 가장 먼저 사망했는데, 베르나르도는 에우제니오 3세에게 "왕 중 왕의 궁전을 장식하는 귀한 그릇이 있다면, 그것은 존경스러운 쉬제르의 영혼이다"라고 썼다. 콘라트 3세와 그의 아들 앙리도 같은 해에 사망했다. 말년에 그는 여러 실패와 논쟁, 그리고 친한 친구들의 죽음으로 인해 몸이 쇠약해졌으나, 그의 마지막 저작인 『고려할 점에 관하여』에서 드러나듯이 죽음의 순간까지도 명석한 지성을 유지했다.
7.2. 죽음과 매장
베르나르도는 1153년 8월 20일, 63세의 나이로 40년간의 수도 생활을 마감하고 사망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클레르보 수도원에 묻혔다. 프랑스 혁명 정부에 의해 1792년 수도원이 파괴된 후, 그의 유해는 트루아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8. 유산과 평가
베르나르도의 사상, 저술, 그리고 활동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성인이자 교회 박사로서의 위상을 얻었으나 동시에 비판적인 평가도 받았다.
8.1. 중세 및 후대 사상에 미친 영향
베르나르도의 신학과 마리아론은 이후 수세기 동안 중요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그의 글은 시토회 공동체에서 필수 독서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그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서 천국을 여행하는 단테의 마지막 안내자가 되었다. 장 칼뱅과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 베르나르도를 여러 차례 인용했다. 칼뱅은 또한 외적인 칭의, 즉 전가된 의 교리를 설명할 때 그를 인용했다. 베르나르도는 중세 신학에 "근본적인 재정향"이라는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퐁텐레디종에 있는 생베르나르 수도원과 성당은 12세기, 17세기, 19세기에 걸쳐 지어진 건물들로 베르나르도에게 헌정되었다. 수많은 교회와 예배당이 성 베르나르도를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8.2. 성인 및 교회 박사로서의 인정
베르나르도는 사망한 지 불과 21년 만인 1174년 1월 18일,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1830년 교황 비오 8세는 그를 교회 박사로 선포했다. 1953년, 그의 사망 800주년을 기념하여 교황 비오 12세는 그에게 헌정하는 회칙 『꿀처럼 감미로운 박사』(Doctor Mellifluus라틴어)를 발표하며 그를 "교부들의 마지막 인물"이라고 칭했다.
8.3. 수도원 설립과 시토회 확산
베르나르도는 유럽 각지에 163개의 수도원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시토회 수도사들은 그를 시토회 초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기린다. 그의 축일은 8월 20일이다.
8.4. 비판과 역사적 평가
베르나르도는 "어려운 성인"으로도 불린다. 그에 대한 비판은 주로 제2차 십자군 선동의 실패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에 대한 책임 문제, 그리고 피에르 아벨라르나 푸아티에의 질베르와의 지적 논쟁에서 보인 완고하고 때로는 압제적인 태도에 집중된다. 그의 열정적인 신념과 카리스마가 때로는 광신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그의 역사적 유산에 대한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평가를 요구한다.
9. 저작
베르나르도의 광범위한 저술은 그의 신학적 깊이와 영성적 가르침을 보여준다.
9.1. 주요 논문
현대 비판판은 장 르클레르크가 편집한 『성 베르나르도 전집』(Sancti Bernardi opera라틴어, 1957-1977)이다. 베르나르도의 주요 논문은 다음과 같다.
- 《겸손과 교만의 단계》(De gradibus humilitatis et superbiae라틴어)
- 《기욤 수도원장에게 보내는 변명》(Apologia ad Guillelmum Sancti Theoderici Abbatem라틴어) - 클뤼니 수도사들의 주장에 맞서 시토회를 변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성직자 개종에 관하여》(De conversione ad clericos sermo seu liber라틴어)
- 《은총과 자유 의지》(De gratia et libero arbitrio라틴어)
- 《하느님을 사랑함에 관하여》(De diligendo Dei라틴어)
- 《새로운 기사도에 관하여》(Liber ad milites templi de laude novae militiae라틴어)
- 《교훈과 분배에 관한 서》(De praecepto et dispensatione libri라틴어)
- 《고려할 점에 관하여》(De consideratione라틴어) -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 보내는 글이다.
- 《아일랜드 주교 성 말라키의 삶과 업적》(Liber De vita et rebus gestis Sancti Malachiae Hiberniae Episcopi라틴어)
- 《주교의 생활과 직무에 관하여》(De moribus et officio episcoporum라틴어) - 상스 대주교 앙리 상글리에에게 보낸 주교의 의무에 관한 서신이다.
9.2. 설교집
베르나르도의 가장 유명한 설교집은 『아가 강론』(Sermones super Cantica Canticorum라틴어)이다. 이 설교들은 클레르보의 수도사들에게 설교된 것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 이 설교집에는 그의 동생 제라르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전적인 구절(강론 26)이 포함되어 있다. 베르나르도 사망 후, 영국 시토회 수도사 길베르트 드 호이랜드가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아가에 대한 86편의 설교 시리즈를 이어받아 완성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설교집들이 남아 있다.
- 전례력에 따른 설교집인 『연중 설교집』(Sermones per annum라틴어) 125편이 현존한다.
- 다양한 주제에 대한 설교집인 『다양한 설교집』(Sermones de diversis라틴어)도 있다.
9.3. 서신
베르나르도가 남긴 547편의 서신들이 현존하며, 이는 그의 사상과 당시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9.4. 위서 및 잘못된 귀속 작품
수많은 서신, 논문 및 다른 작품들이 베르나르도에게 잘못 귀속되거나 위서로 판명되었다.
- 『회랑의 사다리』(L'échelle du cloître프랑스어, 약 1150년)
- 『명상』(Meditatio라틴어) - 13세기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중세 시대에 베르나르도의 이름으로 널리 유통되었고 후기 중세의 가장 인기 있는 종교 서적 중 하나였다. 지혜의 시작으로서 자기 인식을 주제로 하며 "많은 것을 아는 자는 많으나, 자신을 아는 자는 없다"는 문구로 시작된다.
- 『내적 집의 교화』(L'édification de la maison intérieure프랑스어)
- 찬송가 《예수님의 달콤한 기억》(Jesu dulcis memoria)
- "지옥은 선의와 의지로 가득하다"는 격언도 베르나르도의 말이라고 전해지지만, 그가 쓴 어떤 저작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