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밀턴 그레이 캠벨(Milton Gray Campbell영어, 1933년 12월 9일 ~ 2012년 11월 2일)은 1950년대의 저명한 미국인 10종 경기 선수이자 다재다능한 운동선수였다. 그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10종 경기 금메달을 획득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이 종목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쥔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획득하며 두 대회 연속 메달을 획득하는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육상 외에도 미식축구, 수영, 유도 등 다양한 스포츠에서 탁월한 기량을 선보였으며, 특히 NFL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백인 여성과의 결혼으로 인해 부당하게 NFL에서 방출되는 등 당시 스포츠계에 만연했던 인종차별적 관행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러한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다른 유명 선수들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가 낮았으며, 이는 그가 겪었던 사회적 불평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밀턴 그레이 캠벨은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였으며, 특히 형 톰과 경쟁하며 기량을 갈고닦았다. 그의 운동 능력은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2.1. 출생 및 성장 배경
캠벨은 1933년 12월 9일 뉴저지주 플레인필드에서 태어났다. 흔히 '밀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2. 고등학교 시절
그는 플레인필드 고등학교(1953년 졸업)에 재학하며 육상, 미식축구, 수영 등 다양한 스포츠 활동에 참여했다. 특히 당시 스포츠계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수영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캠벨은 수영 선수로서의 탁월한 기량을 통해 이러한 편견에 도전했다. 그는 미식축구와 수영에서 '올스테이트(All-State)' 선수로 선정될 만큼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2.3. 대학 시절
고등학교 졸업 후 캠벨은 인디애나 대학교 블루밍턴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고등학교 시절과 마찬가지로 대학에서도 미식축구와 육상 경기에 참여하며 운동선수로서의 기량을 꾸준히 발전시켰다. 이는 1956년 올림픽을 위한 중요한 준비 과정이 되었다.
3. 육상 경력
밀턴 캠벨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올림픽 무대까지 육상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며 세계적인 10종 경기 선수로 이름을 알렸다.
3.1.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아직 고등학생이던 18세의 캠벨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 10종 경기 미국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이는 그가 10종 경기 종목에 처음으로 참가한 대회였다. 그는 이 대회에서 6975점을 기록하며 1948년 런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밥 마티아스에 이어 은메달을 획득했다. 비록 메달을 획득하고 고향 뉴저지에서 환영을 받았지만, 캠벨 자신은 우승을 목표로 했기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다음 4년 동안 더욱 열심히 훈련하여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반드시 우승하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3.2. 1956년 멜버른 올림픽
1952년 올림픽 이후 4년간의 꾸준한 훈련을 통해 캠벨은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완벽하게 대비했다. 그는 멜버른 트랙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10종 경기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대회에서 그는 7937점을 기록하며 세계 기록에 근접했고, 당시 세계 기록 보유자였던 레이퍼 존슨을 큰 점수 차이로 따돌렸다. 또한 120야드 허들에서 13.4초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금메달은 그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올림픽 10종 경기에서 우승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3.3. 고등학교 육상 성과
플레인필드 고등학교 재학 시절, 캠벨은 1952년 올림픽 10종 경기 대표팀에 선발될 정도로 뛰어난 육상 실력을 자랑했다. 그는 뉴저지주립 기록을 높이뛰기, 그리고 높고 낮은 허들 종목에서 세웠다. 1952년에는 트랙 앤 필드 뉴스로부터 '올해의 고등학생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코치는 캠벨이 올림픽 10종 경기에서 우승한다면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며, 이는 캠벨이 10종 경기에 도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3.4. 주요 기록 및 성과
밀턴 캠벨의 주요 국제 대회 성과는 다음과 같다.
4. 미식축구 경력
밀턴 캠벨은 육상에서의 성공 외에도 미식축구 선수로서의 뛰어난 운동 능력을 보여주었다.
4.1. NFL 경력 및 방출
1957년, 캠벨은 NFL의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에 드래프트되어 입단했다. 그는 짐 브라운과 함께 하프백 포지션에서 뛰었으며, 7번의 러시를 통해 총 23 yd의 야드를 기록했다. 짐 브라운은 당시 MVP이자 올해의 신인 러닝백이었다. 그러나 캠벨의 NFL 경력은 부당하게 짧게 끝났다.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구단주 폴 브라운은 그의 운동 능력보다 인종차별주의적 신념을 우선시하여, 백인 여성인 바바라 마운트와의 결혼을 이유로 캠벨을 팀에서 방출했다. 캠벨의 증언에 따르면, 방출 전날 폴 브라운이 그를 사무실로 불러 결혼 이유를 물었고, 캠벨은 "구단주님과 같은 이유로 결혼했습니다. 구단주님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다음 날 그는 브라운스에서 더 이상 그의 서비스가 필요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4.2. CFL 경력
NFL에서 방출된 후에도 미식축구 경력을 이어가고 싶었던 캠벨은 캐나다로 건너가 CFL에 합류했다. 그는 해밀턴 타이거-캐츠에서 8경기를 뛰며 468 yd의 러싱 야드를 기록했고, 키치너-워터루 더치멘, 몬트리올 알루에츠(3경기), 토론토 아르고노츠(9경기) 등 여러 팀에서 활약했다. 그는 1964년 미식축구 선수 경력을 마무리했다.
5. 기타 스포츠 활동
밀턴 캠벨은 육상과 미식축구 외에도 다양한 스포츠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며 그의 다재다능함을 입증했다.
5.1. 수영
캠벨은 청소년 시절부터 뛰어난 수영 선수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수영에서 '올스테이트' 선수로 선정될 만큼 두각을 나타냈다. 이는 당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수영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편견이 만연했던 시기에 그의 재능이 더욱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5.2. 유도
대부분의 스포츠 경력을 마친 후에도 활동적인 삶을 추구했던 밀턴은 유도를 시작했다. 그는 요시사다 요네스카의 지도를 받으며 빠르게 실력을 향상시켰다. 요네스카는 캠벨이 1972년 올림픽 유도 대표팀에 선발될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AAU 관계자가 그의 선수 카드를 압수하며 프로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던 경력 때문에 올림픽 유도 경기에 참가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캠벨은 프로 육상 선수들은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데 자신은 미식축구 선수였다는 이유로 출전이 금지된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다. 이는 당시 스포츠 규정의 불평등한 적용과 프로 선수에 대한 이중 잣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6. 개인사 및 사회적 영향
밀턴 캠벨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스포츠 경력과 마찬가지로 당시 사회의 인종차별적 관행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백인 여성인 바바라 마운트와의 결혼은 그의 NFL 경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구단주 폴 브라운의 인종차별적 신념으로 인해 팀에서 부당하게 방출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단순히 개인적인 불운을 넘어, 당시 미국 사회와 스포츠계에 만연했던 인종차별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캠벨은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피부색 때문에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으며, 이는 그의 사회적 인지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이야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선수들이 단순히 경기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편견과도 싸워야 했던 시대적 배경을 조명한다.
7. 유산 및 평가
밀턴 캠벨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다재다능한 운동선수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다른 유명 선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로 남아있다. 이는 그가 겪었던 인종차별적 관행과 사회적 인식 부족이 그의 유산 평가에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
7.1. 명예의 전당 헌액 및 수상
캠벨은 그의 뛰어난 스포츠 업적을 인정받아 여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1982년: 인디애나 대학교 운동 명예의 전당
- 1992년: 미국 올림픽 명예의 전당
- 1997년: 뉴저지주립학교간육상협회 명예의 전당
- 2012년 6월: 뉴저지 명예의 전당
- 미국 육상 명예의 전당
- 국제 수영 명예의 전당
그는 육상 명예의 전당과 수영 명예의 전당에 동시에 헌액된 유일한 인물로 남아있다. 또한 2008년에는 몬머스 대학교로부터 명예 공공 서비스 박사 학위(Doctor of Public Service, honoris causa)를 수여받았다.
7.2. 사회적 인식 부족
캠벨은 비범한 운동선수로서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이름이 되지 못했으며, 동시대 다른 유명 선수들처럼 정당한 보상을 받지도 못했다. 밥 마티아스나 브루스 제너와 같은 다른 올림픽 10종 경기 선수들은 우승 후 상당한 후원 계약을 맺고 '위티스(Wheaties)' 시리얼 상자에 얼굴이 실리는 등 큰 명성을 얻었지만, 캠벨은 1956년 시상대에서 내려온 후 현금, 후원사, 또는 방송사 관계자들의 연락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대우의 차이에 대해 캠벨은 "미국은 흑인이 세계 최고의 운동선수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후 "유명해지지 못한 것으로 유명한" 올림픽 슈퍼스타로 여겨지기도 한다.
2000년 ESPN은 '가장 위대한 흑인 운동선수 50인'과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 100인' 등의 목록을 발표했지만, 캠벨은 이 두 목록 중 어느 곳에도 포함되거나 언급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회적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그의 경험은 소수자 운동,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권리 신장에 대한 함의를 가지며, 스포츠계에 내재된 인종차별적 관행이 개인의 유산 평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8. 사망
밀턴 그레이 캠벨은 2012년 11월 2일, 오랜 기간 전립선암 투병 끝에 조지아주 게인즈빌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78세였다. 사망 당시 그의 오랜 여자친구 린다 러쉬가 곁을 지켰다. 그는 딸 줄리 캠벨, 도리안 B., 모나 H.와 아들 저스틴 캠벨, 밀턴 G. 캠벨 3세(밀턴 G. 캠벨 주니어는 사망)를 남겼으며, 손녀 타리아 L. 캠벨과 증손자 나다니엘 G. 존슨도 유가족에 포함된다. 그의 유해는 게인즈빌 북부의 메모리얼 파크 묘지 및 영묘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