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세예드 모하마드 하타미(سید محمد خاتمیSeyyed Mohammad Khātamī페르시아어)는 이란의 저명한 정치인이자 시아파 성직자로, 1997년 8월 3일부터 2005년 8월 3일까지 이란의 제5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 전 1982년부터 1992년까지 문화이슬람지도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국제적으로는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97년 첫 대통령 선거에서 약 70%의 득표율을 얻으며 당선되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타미는 자유화와 개혁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으며, 선거 운동 중 새뮤얼 P. 헌팅턴의 1992년 이론인 '문명의 충돌'에 대한 대안으로 '문명 간 대화' 개념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에 따라 유엔은 2001년을 '문명 간 대화의 해'로 선포하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하타미는 표현의 자유, 관용, 시민 사회의 육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했으며, 아시아 및 유럽 연합 국가들을 포함한 다른 국가들과의 건설적인 외교 관계를 강조했다. 또한 자유 시장과 외국인 투자를 지지하는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퇴임 후에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후임 대통령의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2009년 이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으나, 오랜 친구이자 고문인 미르호세인 무사비를 지지하기 위해 3월 16일 후보직에서 사퇴했다. 2009년 논란이 된 재선에서 패배한 개혁주의 후보들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테헤란 검찰의 명령에 따라 이란 언론은 하타미의 사진을 게재하거나 그의 발언을 인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모하마드 하타미는 이란의 종교적이고 학구적인 환경에서 성장하며 그의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2.1. 어린 시절과 가족

하타미는 1943년 10월 14일(일부 기록에는 9월 23일 또는 9월 29일로 기록됨) 야즈드 주의 작은 도시 아르다칸에서 사이드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루홀라 하타미 아야톨라는 이란 혁명 초기에 야즈드 시의 고위 성직자이자 금요 예배 설교자(카티브)였으며, 루홀라 호메이니의 친구이자 개명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타미는 1974년(31세) 종교법 교수이자 무사 알사드르의 조카인 조흐레 사데기와 결혼하여 두 딸(라일라, 1975년생; 나르게스, 1980년생)과 한 아들(에마드, 1988년생)을 두었다. 그의 형제자매들도 정치 및 사회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형인 모하마드 레자 하타미는 제6대 의회에서 테헤란의 첫 번째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부의장을 지냈으며, 이란 최대 개혁주의 정당인 이란 이슬람 참여 전선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모하마드 레자는 여성 인권 운동가이자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창건자인 루홀라 호메이니의 손녀인 자흐라 에슈라기와 결혼했다. 또 다른 형제인 알리 하타미는 브루클린 폴리테크닉 대학교에서 산업 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사업가로, 하타미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동안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으나 매우 낮은 프로필을 유지했다. 하타미의 누나인 파테메 하타미는 1999년 이란의 시 및 마을 의회 선거에서 아르다칸(하타미의 고향) 주민의 첫 번째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강경파 성직자이자 테헤란의 임시 금요 예배 지도자인 아흐마드 하타미와는 혈연관계가 없다.
2.2. 교육 및 초기 사상 형성

모하마드 하타미는 이스파한 대학교에서 서양 철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나, 테헤란 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 과정을 공부하던 중 학업을 중단하고 쿰으로 가서 이슬람 학문 연구를 마쳤다. 그는 쿰에서 7년 동안 공부하며 최고 수준의 이즈티하드 과정(이슬람 법학에서 독립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을 이수했다. 이후 1978년부터 1980년까지 함부르크 이슬람 센터의 의장을 맡기 위해 잠시 독일에 거주했다.
하타미는 이스파한 대학교에서 서양 철학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배우며 넓은 시야를 갖게 되었고, 동시에 이스파한 대학교 무슬림 학생 협회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쿰에서의 이슬람 학문 연마 기간 동안 그는 이슬람 운동의 주요 지도자들과 가까워졌다. 그의 주요 연구 분야는 정치 철학이며, 이란의 정치 철학자 자바드 타바타바이는 그의 학문적 멘토 중 한 명이었다. 하타미는 이후 타르비아트 모다레스 대학교에서 정치 철학을 가르치는 대학 강사가 되기도 했다.
3. 초기 경력 및 정치 활동
모하마드 하타미는 대통령 취임 전 다양한 공직과 사회 활동을 통해 개혁적 성향의 성직자이자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3.1. 대통령 취임 전 활동
하타미는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의회 대표를 지냈으며, 1981년부터 1988년까지 케이한 연구소의 감독관을 역임했다. 이후 1982년부터 1986년까지, 그리고 1989년부터 1992년 5월 24일 사임할 때까지 문화이슬람지도부 장관을 두 차례 역임했다. 문화부 장관 재임 중 그는 문화 전반에 걸친 검열을 완화하고 여성 가수의 콘서트를 허용했으며, 국내에서 서구 출판물의 판매를 허용하는 등 문화 개방 정책을 추진하여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군사 선전 본부장으로도 활동했다.
문화부 장관직을 사임한 후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이란 국립 도서관장을 지냈으며, 문화 혁명 최고 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했다. 이러한 경력들은 그가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운영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3.2. 개혁 성향 성직자로서의 활동
하타미는 온건 개혁파 성향의 성직자로 평가받으며, 전투원 성직자협회의 중앙 평의회 위원이자 의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테헤란의 투쟁 성직자 집단'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당시 이란 정치에서 바자르 상인과 고위 울라마를 지지 기반으로 하는 엄격한 이슬람 체제 유지를 주장하는 자유 경제파와, 중간층 및 중하위 울라마를 지지 기반으로 문화 개방을 주장하는 통제 경제파 사이에서 후자에 속했다.
문화부 장관으로서 그는 문화 전반에 걸친 검열 완화, 여성 가수의 콘서트 허용, 서구 출판물 국내 판매 허용 등 개혁적인 정책을 펼쳐 보수파의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동시에 폭넓은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활동들은 그가 이란 사회의 변화와 개방을 지향하는 개혁적 성직자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4. 대통령 재임 (1997-2005)
모하마드 하타미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이란 사회에 개혁과 변화의 희망을 불어넣었으나, 동시에 보수 세력과의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많은 도전에 직면했다.
4.1. 선거 및 대통령직 수행

하타미는 개혁 의제를 내세워 1997년 5월 23일(이란력 1376년 2월 2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이는 많은 이들이 놀라운 선거 결과로 평가했다. 투표율은 약 80%에 달했으며, 보수파 의회 의장이자 유력 후보였던 알리 아크바르 나테그 누리에게 대부분의 TV 방영 시간이 할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타미는 7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심지어 이란 신학 교육의 중심지이자 보수파의 거점인 쿰에서도 유권자의 70%가 하타미에게 투표했다.
그는 2001년 6월 8일 두 번째 임기를 위해 재선되었으며, 이란 이슬람 공화국 헌법에 따라 최대 두 번의 연속 임기를 마친 후 2005년 8월 3일 퇴임했다. 하타미 지지자들은 전통적인 좌파, 경제 개방과 외국인 투자를 원하는 기업인, 그리고 젊은 유권자들을 포함하는 "이상한 동맹"으로 묘사되었다. 하타미의 등장은 이란 사회에 희망을 불어넣고, 1980년대 이라크와의 8년간의 전쟁과 전후 재건 비용으로 침체되었던 국가를 활성화시키는 역동적인 개혁 추진의 서막이었다. 그의 등장은 젊은 이란인들의 정치적 어휘에 이전에는 국가 담론에 포함되지 않았거나 대다수 국민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용어들을 도입했다.
그가 당선된 날인 이란력 1376년 2월 2일은 이란에서 "개혁"의 시작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의 지지자들은 일반적으로 "2월 2일 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하타미는 법치, 민주주의, 그리고 모든 이란인의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 참여에 초점을 맞춘 캠페인을 벌였기 때문에 이란의 첫 번째 개혁주의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개혁 정책은 최고 지도자가 임명하는 수호자 평의회와 같은 강력한 정부 기관을 통제하는 이란 정부 내 강경 보수 이슬람주의자들과 반복적인 충돌을 야기했다.
이란 정치 체제에 따르면 대통령인 하타미는 최고 지도자보다 낮은 서열이었다. 따라서 하타미는 군대, 경찰, 혁명 수비대, 국영 라디오 및 텔레비전, 교도소와 같은 주요 국가 기관에 대한 법적 권한이 없었다. 하타미는 재임 기간 동안 소위 "쌍둥이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 두 법안은 이란의 국가 선거법에 작지만 핵심적인 변화를 도입하고, 국가 기관의 헌법 위반을 방지하기 위한 대통령의 권한을 명확히 정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타미 자신은 "쌍둥이 법안"을 이란 개혁 진전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이 법안들은 의회에서 승인되었으나, 결국 수호자 평의회에 의해 거부되었다.
4.2. 정치 개혁 및 시민 사회
하타미는 언론의 자유, 관용, 시민 사회, 여성 인권, 종교적 관용, 대화 및 정치 발전을 자신의 이념의 핵심으로 삼았다. 성직자로서 그는 자신이 옹호하는 변화에 대해 정통 신학자들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압력에 직면했다. 그는 법치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모든 이란인의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 참여를 강조했다.
그는 "내일을 위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정부는 권력의 신성함이 그 권력에 대한 비판과 비난의 정당성으로 바뀌는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권력은 국민의 신뢰 속에 있으며, 국민은 투표를 통해 대표로서 기능하도록 위임받았습니다. 따라서 한때 신성한 은혜로 여겨지던 그런 권력은 이제 지상의 존재들이 비판하고 평가할 수 있는 지상의 권력으로 축소되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독재적 배경의 흔적 때문에 권력자들에 대한 공정한 비판조차 하지 못했지만, 민주주의의 여명기에 무관심하게 남아 자유가 납치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사회, 특히 엘리트와 지식인들에게 부여된 의무입니다."
4.3. 경제 정책
하타미의 경제 정책은 이전 정부의 산업화에 대한 의지를 계승했다. 거시 경제 수준에서 하타미는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가 국가의 첫 5개년 경제 개발 계획(1990-1995)에서 시작했던 자유주의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2005년 4월 10일, 하타미는 경제 발전, 민간 부문의 대규모 경제 활동, 그리고 6%의 경제 성장을 자신의 정부의 성과로 꼽았다. 그는 경제 활성화를 위해 민간 부문에 50.00 억 USD를 할당했으며, 이와 관련하여 체결된 계약의 가치는 100.00 억 USD에 달했다고 덧붙였다.
대통령 첫 임기 1년 만에 하타미는 이란의 경제적 어려움을 인정하며, 경제가 "만성적으로 병들어 있으며, 근본적인 구조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계속 그럴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의 임기 대부분 동안 이란의 제2차 5개년 개발 계획이 시행되었다. 1999년 9월 15일, 하타미는 의회에 새로운 5개년 계획을 제출했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를 목표로 하는 이 계획은 사회 및 정치 발전의 더 넓은 맥락에서 경제 재건을 요구했다. 구체적인 경제 개혁에는 "몇몇 주요 산업을 민영화하는 야심찬 프로그램... 연간 750,000개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 기간 동안 연평균 6%의 실질 GDP 성장, 기본 생필품에 대한 보조금 삭감... 그리고 광범위한 재정 및 구조 개혁"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실업률은 여전히 큰 문제였고, 하타미의 5개년 계획은 일자리 창출에서 뒤처졌다. 계획 첫 해에 300,000개의 새로운 일자리만이 창출되었는데, 이는 계획에서 요구했던 750,000개에 훨씬 못 미치는 수치였다. 2004년 세계은행의 이란 보고서는 "24년간의 내부 혁명 후 분쟁, 국제적 고립, 깊은 경제적 변동성 이후, 이란은 오랜 불확실성과 불안정의 시기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거시 경제 수준에서 실질 GDP 성장은 1997년 2.4%에서 2000년 5.9%로 증가했다. 실업률은 노동력의 16.2%에서 14% 미만으로 감소했다. 소비자 물가 지수는 17% 이상에서 13% 미만으로 떨어졌다. 에너지 부문, 건설 산업 및 국가 산업 기반의 다른 부문에서 공공 및 민간 투자가 모두 증가했다. 국가의 대외부채는 121.00 억 USD에서 79.00 억 USD로 줄어들었으며, 이는 이란-이라크 휴전 이후 최저 수준이었다. 세계은행은 약 7년 만에 보건 및 하수 프로젝트에 2.32 억 USD를 지원했다. 정부는 1979년 전면적인 금융 국유화 이후 처음으로 두 개의 민간 은행과 하나의 민간 보험 회사 설립을 승인했다. OECD는 이란에서 사업을 하는 위험 요소를 6에서 4로 낮췄다(7단계 척도).
정부 자체 수치에 따르면 2001년 절대 빈곤선 이하 인구는 전체 인구의 15.5%로, 1997년 18%에서 감소했으며, 상대 빈곤 이하 인구는 25%로, 전체 인구의 약 40%가 빈곤층으로 분류되었다. 민간 추정치는 더 높은 수치를 나타낸다. 2001년 세계 조사에서 이란은 155개국 중 세계 경제 개방도에서 150위를 기록했다. 유엔 인간 개발 지수에서 이란은 162개국 중 90위를 기록했는데, 4년 전 175개국 중 97위였던 것보다 약간 개선된 수치였다. 이란에서 사업을 하는 전반적인 위험은 "D"에서 "C"로 미미하게 개선되었다. 그의 경제 전략 중 하나는 경제 민영화를 위해 외국 및 국내 자본 자원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2001년 민영화 기구가 설립되었다. 또한 정부는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사람들이 민간 기업의 주식을 매입하도록 장려했다. 이란은 또한 세계은행이 총 4320.00 억 USD의 대출을 승인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4.4. 외교 정책 및 국제 관계

하타미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이란의 외교 정책은 대결에서 화해로 전환되는 과정을 시작했다. 하타미의 외교 정책 개념에는 "문명의 충돌"이 없었으며, 대신 "문명 간 대화"를 선호했다. 미국과의 관계는 상호 불신과 의심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하타미의 두 임기 동안 테헤란은 페르시아만 지역 및 그 외 지역에서 더 큰 역할을 하기 위한 노력을 점차 늘려갔다.
대통령으로서 하타미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마쓰우라 고이치로, 자크 시라크, 요하네스 라우, 블라디미르 푸틴,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마하티르 모하맛, 우고 차베스 등 많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만났다. 2003년에는 이라크의 강경 성직자 무크타다 알사드르와의 만남을 거부했다. 그러나 2000년 하페즈 알아사드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새로운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에게 "이란 정부와 국민이 그를 지지하고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1998년 8월 8일,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마자르이샤리프에서 약 4,000명의 시아파를 학살했다. 또한 이란 외교관 11명과 이란 언론인 1명을 공격하여 살해했다. 나머지 외교관들은 인질로 잡혔다. 알리 하메네이 아야톨라는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하여 탈레반과 싸우기 위해 이란-아프가니스탄 국경 근처에 군대를 집결시키도록 명령했다. 70,000명 이상의 이란 군대가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따라 배치되었다. 하타미는 침공을 중단시키고 유엔에 도움을 요청했다. 곧 그는 협상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후 이란은 탈레반과 협상에 들어가 외교관들이 석방되었다. 하타미와 그의 고문들은 이란이 탈레반과의 전쟁에 돌입하는 것을 막는 데 성공했다.
2003년 밤 지진 이후 이란 정부는 이스라엘의 지원 제안을 거부했다. 2005년 4월 8일, 하타미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에서 알파벳 순서에 따라 이란 태생의 이스라엘 대통령 모셰 카차브 옆에 앉았다. 이후 카차브는 하타미와 악수하고 대화를 나눴다. 카차브 자신은 원래 이란계 유대인이며, 하타미의 고향과 가까운 이란 지역 출신이다. 그는 둘이 고향 지역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밝혔다. 이는 1979년 외교 관계가 단절된 이후 이란과 이스라엘 간의 첫 공식적인 정치적 접촉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란으로 돌아온 후 하타미는 이스라엘 대통령과 대화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보수파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이후 국영 언론은 하타미가 카차브와 악수하고 대화한 사실을 강력히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2003년 이란은 핵 문제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인 두 국가 해결책을 포함한 모든 미해결 문제를 협상하기 위한 제안을 미국에 전달했다.
2006년, 전 대통령으로서 그는 뉴욕 유엔 본부로의 연례 외교 여행을 제외하고 미국을 방문한 최고위 이란 정치인이 되었다. 그는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연설했으며, 하버드 대학교, 조지타운 대학교,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연설하며 미국 순방을 이어갔다.
4.5. 문화 정책 및 사회적 영향
하타미의 온건한 정책은 보다 엄격한 이슬람 통치를 추구했던 강경파 반대자들의 정책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따라서 하타미의 포괄적이고 다원적인 메시지는 혁명 초기 수십 년간의 반동적인 입장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1979년에 경험했던 것과는 다른 성격의 변화를 원하면서도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체제를 보존하기를 바랐던 대중에게 희망을 상징했다.
그의 대통령 재임 초기에는 국내에 상대적인 언론 자유가 형성되었고, 1981년 여름 이후 처음으로 일부 야당 세력이 고위 관리들의 활동을 비판하는 출판물이나 기사를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인 1997년 10월, 하타미 취임 후 이란 언론인 전국 연합인 이란 언론인 협회가 설립되었다. 이란 국립 도서관 및 기록 보관소는 하타미의 노력으로 완공되었고, 금지되었던 책들도 출판이 허용되었다. 바흐람 베이자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 저명한 영화 제작자들이 이 시기에 활발히 활동하며 국내 영화계가 더욱 개방되었다. 이 시기를 보면 대부분의 영화 제작자들이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영화 제작에 관심을 돌렸음을 알 수 있다. 이란 음악의 집과 이란 지역 음악 축제 기관이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이란 국립 오케스트라는 1998년 파르하드 파크레디니의 지휘 아래 창단되었다.
하타미는 현대 세계에서 이란의 젊은이들이 새로운 사상에 직면하고 외국 습관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이해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젊은이들에 대한 제한이 그들을 정권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사탄적 문화"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더 나아가 젊은이들이 MTV 문화를 배우고 받아들일 것이며, 이러한 사실이 세속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슬람 가치 측면에서 하타미는 영화 제작자들이 자기희생, 순교, 혁명적 인내와 같은 주제를 포함하도록 장려했다. 문화부 장관 시절 하타미는 영화가 모스크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종교적 측면에만 한정하지 않고 영화의 오락적 측면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믿었다.
4.6. 보수 세력과의 갈등 및 도전
하타미의 개혁 정책은 이란 정부 내 강경 보수 이슬람주의자들과 반복적인 충돌을 야기했다. 이들은 수호자 평의회와 같은 강력한 정부 기관을 통제하며 하타미의 개혁 시도를 제약했다.
2004년 2월 2004년 이란 의회 선거에서 수호자 평의회는 의회의 개혁주의 의원 대부분과 이란 이슬람 참여 전선 당의 모든 후보를 포함하여 수천 명의 후보 출마를 금지했다. 이는 보수파가 의석의 최소 70%를 차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유권자 자격을 가진 인구의 약 60%가 선거에 참여했다.
하타미는 자신의 정부가 불공정하고 자유롭지 않다고 본 선거 개최에 강력히 반대했음을 회고했다. 그는 또한 의회 대변인과 함께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방문하여 선거를 개최하기 전에 전달했던 조건 목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그 목록이 이후 수호자 평의회에 전달되었는데, 수호자 평의회는 최근 몇 년간 자유롭고 경쟁적인 선거를 개최하는 데 주요 장애물이자 법적 감독 기관이라고 말했다. 수호자 평의회 구성원들은 최고 지도자가 직접 임명하며, 그의 의지를 따르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하타미는 "수호자 평의회는 최고 지도자의 말도, 자신들의 말도 지키지 않았다 [...] 그리고 우리는 선거를 치르거나 엄청난 불안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 이는 정권을 손상시킬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 시점에서 학생 시위대들은 수호자 평의회 의장을 지칭하며 "잔나티는 민족의 적이다"라는 구호를 반복적으로 외쳤다. 하타미는 "만약 당신들이 민족의 대표라면, 우리는 민족의 적이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하타미가 아닌 잔나티"라고 명확히 밝히자, 그는 이란의 높은 자유도를 주장할 기회로 삼았다.
수호자 평의회가 1월 30일 최종 후보 명단을 발표하자, 125명의 개혁주의 의원들은 선거를 보이콧하고 의원직을 사퇴하겠다고 선언했으며, 개혁주의 내무부 장관은 선거가 예정된 2월 20일에 치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하타미는 선거가 제때 치러질 것이라고 발표하고, 내각 장관들과 주지사들의 사표를 반려했다. 이러한 행동들은 선거가 치러지도록 길을 열었으며, 개혁주의 운동 내 급진파와 온건파 사이의 분열을 시사했다.
5. 사상 및 철학
모하마드 하타미의 사상과 철학은 그의 정치적 행보와 정책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는 특히 '문명 간 대화'라는 개념을 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5.1. 문명 간 대화
다리우시 샤예간의 초기 연구에 이어, 1997년 초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하타미는 새뮤얼 P.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이론에 대한 대안으로 '문명 간 대화'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1998년 유엔에서 이 개념을 소개했다.
그 결과, 1998년 11월 4일 유엔은 하타미의 제안에 따라 2001년을 유엔의 '문명 간 대화의 해'로 선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하타미는 정치의 도덕화를 주장하며 "문명 간 대화의 정치적 번역은 문화, 도덕, 예술이 정치를 지배해야 한다는 주장에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하타미 대통령의 문명 간 대화 요청은 미국 작가 앤서니 J. 데니스(Anthony J. Dennis)로부터 출판된 답변을 이끌어냈다. 데니스는 2001년 7월 미국에서 출판된 '하타미에게 보내는 편지: 이란 대통령의 문명 간 대화 요청에 대한 답변'이라는 제목의 역사적이고 전례 없는 서한집의 기획자, 기여자, 편집자였다. 이 책은 현재까지 하타미가 서방 세계로부터 받은 유일한 출판된 답변이다.
5.2. 자유, 관용, 민주주의에 대한 견해
하타미는 언론의 자유, 시민 사회, 여성 인권, 종교적 관용, 정치 발전을 자신의 이념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는 성직자로서 자신이 옹호하는 변화에 대해 정통 신학자들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압력에 직면했다. 그는 법치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모든 이란인의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 참여를 강조했다.
그는 "내일을 위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정부는 권력의 신성함이 그 권력에 대한 비판과 비난의 정당성으로 바뀌는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권력은 국민의 신뢰 속에 있으며, 국민은 투표를 통해 대표로서 기능하도록 위임받았습니다. 따라서 한때 신성한 은혜로 여겨지던 그런 권력은 이제 지상의 존재들이 비판하고 평가할 수 있는 지상의 권력으로 축소되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독재적 배경의 흔적 때문에 권력자들에 대한 공정한 비판조차 하지 못했지만, 민주주의의 여명기에 무관심하게 남아 자유가 납치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사회, 특히 엘리트와 지식인들에게 부여된 의무입니다."
5.3. 학술 활동
하타미의 주요 연구 분야는 정치 철학이다. 이란의 정치 철학자 자바드 타바타바이는 하타미의 학문적 멘토 중 한 명이었다. 하타미는 이후 타르비아트 모다레스 대학교에서 정치 철학을 가르치는 대학 강사가 되었다. 하타미는 1999년에 정치 철학에 관한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가 다루는 영역은 자바드 타바타바이가 다룬 것과 동일하다. 즉, 파라비 (950년 사망)에 의한 고대 그리스 정치 철학의 플라톤적 적용, 아불하산 아미리 (991년 사망)와 무슈쿠야 라지 (1030년 사망)에 의한 페르시아 국가 통치술의 "영원한 지혜"의 종합, 알마와르디와 알가잘리의 법학 사상, 그리고 니잠 알물크의 국가 통치론 등이다. 그는 17세기 후반 사파비 왕조 이스파한에서 정치 철학의 부활에 대한 논의로 끝을 맺는다.
또한 하타미는 타바타바이와 함께 파라비 이후부터 무슬림 정치 사상의 "쇠퇴"가 시작되었다는 생각을 공유한다. 타바타바이와 마찬가지로 하타미는 무슬림 정치 사상의 단점을 부각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치관을 날카롭게 대비시킨다. 하타미는 또한 이슬람 역사에서 "강압적 지배"(taghallub)의 만연으로 인해 정치 철학이 왕실 정책(siyasat-i shahi)으로 전환되면서 무슬림 정치 사상이 쇠퇴했다는 주제로 강연하기도 했다.
6. 대통령 퇴임 후 활동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모하마드 하타미는 다양한 비정부기구 활동과 국제적 참여를 통해 자신의 사상과 비전을 계속해서 전파했다.
6.1. 비정부기구 설립 및 운영
하타미는 대통령직을 마친 후 현재 자신이 이끌고 있는 두 개의 비정부기구(NGO)를 설립했다.
- 문화 및 문명 간 대화 국제 연구소 (موسسه بین المللی گفتگوی فرهنگها و تمدنها페르시아어): 이 연구소는 하타미가 대통령직을 마친 후 설립한 사설(비정부) 기관으로, 이란 외무부가 운영하는 유사한 이름의 센터와는 다르다. 하타미 연구소의 유럽 지부는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문명 간 대화 재단'으로 등록되어 있다.
- 바란 재단 (بنیاد آزادی، رشد و آبادانی ایران - باران페르시아어): '바란'은 페르시아어로 "비"를 의미하며, "이란의 자유, 성장, 발전을 위한 재단"의 약자이다. 이 또한 하타미가 대통령직을 마친 후(2005년 9월 9일 등록 발표) 전직 동료들과 함께 설립한 사설(비정부) 기관이다. 이 연구소는 국제 활동보다는 국내 활동에 중점을 둔다.
6.2. 국제 활동 및 대중 연설

하타미의 대통령 퇴임 후 경력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 2005년 9월 2일, 당시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은 모하마드 하타미를 문명 연대의 회원으로 임명했다.
- 2005년 9월 28일, 하타미는 29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 은퇴했다.
- 2005년 11월 14일, 하타미는 모든 종교 지도자들에게 핵무기와 화학 무기 폐지를 위해 싸울 것을 촉구했다.
- 2006년 1월 30일, 하타미는 정부 퇴임 후 자신이 이끌게 될 이란과 유럽에 사무실을 둔 비정부기구인 "문화 및 문명 간 대화 국제 연구소"의 사무실을 공식적으로 개소했다.
- 2006년 2월 15일, 언론 인터뷰에서 하타미는 자신의 문명 간 대화 연구소의 유럽 사무실이 제네바에 공식 등록되었음을 발표했다.
- 2006년 2월 28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문명 연대 회의에 참석하여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언급했으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 민족 박해로 이 역사적 사실을 나쁘게 이용했다"고 덧붙였다.
- 2006년 9월 7일, 워싱턴 D.C. 방문 중 하타미는 미국과 이란 간의 대화를 촉구했다.
- 2007년 1월 24일부터 28일까지 하타미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 경제 포럼 연례 회의에 참석했다. 당시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당시 미국 상원의원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부통령 앨 고어, 당시 부통령 딕 체니, 전 미국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와 콜린 파월 등이 참석했다. 하타미와 당시 미국 상원의원 존 케리는 다보스 세계 경제 포럼에서 유사한 의견을 표명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 2008년 10월, 하타미는 현대 세계에서 종교의 위치에 대한 국제 회의를 조직했다.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셸 마그네 본데비크 전 노르웨이 총리, 로마노 프로디 전 이탈리아 총리, 리오넬 조스팽 전 프랑스 총리, 요제프 다이스 전 스위스 대통령, 조르제 삼파이우 전 포르투갈 대통령,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전 스리랑카 대통령, 페데리코 마요르 전 유네스코 사무총장 등 여러 학자들이 회의에 초청 연사로 참석했다. 이 행사는 페르시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 중 하나이자 하타미의 출생지인 역사적인 도시 야즈드의 축하 행사로 이어졌다. 하타미는 또한 문화 간 대화를 촉진하기 위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 2009년 10월, 글로벌 대화상 위원회는 하타미와 이란의 문화 이론가 다리우시 샤예간을 초대 수상자로 공동 선정했다. 이는 "문화적 주체성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자 국제 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문화 및 문명 간 대화' 개념을 개발하고 촉진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글로벌 대화상은 인문학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인정 중 하나로, "가치에 대한 전 지구적 문화 간 대화의 조건과 내용에 대한 연구 및 연구 소통의 우수성"을 기린다. 2010년 1월, 하타미는 "상을 받을 입장이 아니다"라고 밝혀, 상은 다리우시 샤예간 단독으로 수여되었다.
6.3. 퇴임 후 정치적 입장

2009년 2월 8일, 하타미는 2009년 이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08년 12월에는 샤리프 공과대학교 동문 194명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에 맞서 "국가를 구하기 위해" 출마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 3월 16일, 하타미는 이란의 보수 기득권에 맞서 진정한 변화와 개혁을 이룰 더 나은 기회를 가질 것이라고 주장한 다른 개혁주의 후보인 미르호세인 무사비를 지지하기 위해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2010년 12월, 2009-2010년 이란 선거 시위가 진압된 후, 하타미는 정치 "내부자"로서 "개혁주의자들이 다가오는 의회 선거에 참여하기 위한" "전제 조건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묘사되었다. 이는 이란 대중에게는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정부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일부(아타올라 모하제라니)는 이를 "영리하다"고 평가했으며, "시스템이 자체 민주적 보수주의를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조치조차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아자데 모아베니)고 보았다. 이에 대해 케이한 신문은 하타미를 "스파이이자 반역자"로 비난하며 그의 처형을 요구하기도 했다.
2013년 6월에 열린 대통령 선거를 몇 달 앞두고, 이란의 여러 개혁주의 단체들은 하타미에게 출마를 요청했다. 개혁주의자들은 또한 2012년 12월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 지도자에게 하타미의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 참여에 관한 서한을 보냈다. 전통 보수주의 이슬람 연합당의 아사둘라 바담치안은 그들의 서한에서 개혁주의자들이 최고 지도자에게 하타미의 다가오는 선거 참여 허용을 감독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전 테헤란 시장 골람호세인 카르바스치는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가 대통령 선거에서 하타미를 지지할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
하타미 자신은 여전히 국내의 긍정적인 변화를 기다리고 있으며, 적절한 시기에 자신의 결정을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 6월 11일, 하타미는 개혁주의자 협의회와 함께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온건파 하산 로하니를 지지했다. 이는 하타미가 모하마드 레자 아레프에게 2013년 6월 선거에 계속 참여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한 후 아레프가 경선에서 사퇴한 데 따른 것이다.
7. 개인사
모하마드 하타미의 개인사는 그의 가족 관계와 언어 능력 등을 통해 그의 삶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7.1. 가족 및 결혼
하타미는 1974년 종교법 교수이자 무사 알사드르의 조카인 조흐레 사데기와 결혼했다. 부부는 두 딸(라일라, 나르게스)과 한 아들(에마드)을 두었다. 그의 형제인 모하마드 레자 하타미는 루홀라 호메이니의 손녀인 자흐라 에슈라기와 결혼하여, 하타미 가문은 호메이니 가문과도 인척 관계를 맺고 있다.
7.2. 언어 및 기타 배경
모하마드 하타미는 모국어인 페르시아어 외에도 아랍어, 영어, 독일어를 구사한다. 그는 여러 편의 논문을 저술하기도 했다.
8. 평가 및 영향
모하마드 하타미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이란 사회에 큰 변화와 희망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많은 한계와 비판에 직면했다.
8.1. 긍정적 평가
하타미는 이란의 첫 번째 개혁주의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집권은 이란 사회에 희망을 불어넣었고, 1980년대 이라크와의 전쟁과 전후 재건으로 침체되었던 국가를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는 젊은 이란인들의 정치적 어휘에 이전에는 국가 담론에 포함되지 않았던 새로운 용어들을 도입했다.
그는 유럽 연합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서방 세계와의 매력적인 외교 공세를 펼쳤고,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 그리스,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페인을 방문한 최초의 이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서부터 세계 경제 포럼과 유네스코 본부에 이르기까지 저명한 장소에서 강연을 요청받아 새로운 이란의 비전을 명확히 하고 국민의 열망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썼다.
8.2. 비판 및 논란
하타미의 두 차례 대통령 임기는 일부 이란 야권 인사들에게 이란을 더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만드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불완전하거나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그는 다양한 정책과 견해로 인해 보수파, 개혁파, 야권 단체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47페이지 분량의 "내일을 위한 편지"에서 하타미는 자신의 정부가 숭고한 원칙을 지지했지만 실수를 저질렀고, 성직자 기득권 내 강경파 요소들의 방해에 직면했다고 밝혔다. 그의 경제 정책은 침체된 이란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실패했고, 실업률 증가와 함께 국내에 실망감을 확산시켰다. 사법부의 보수파 지배를 무너뜨리지 못했으며, 정치 개혁에서도 보수파에게 많은 타협을 강요당했다. 이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보수파가 세력을 회복하면서 그의 정치적 기반이 더욱 흔들렸다. 또한 두 번째 임기 후반에는 핵 문제가 불거져 국제 사회와의 협력과 국내 정치의 균형 유지가 더욱 어려워졌다. 하타미의 좌절은 압도적인 인기를 얻어 당선된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개혁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이란 국민에게 정치적 무관심을 초래하고 2005년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의 승리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9.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 득표수 | % | 순위 | 비고 |
---|---|---|---|---|---|
1980 | 1980년 이란 총선 | 32,942 | 82.1 | 1위 | 당선 |
1992 | 1992년 이란 총선 | - | 실격 | ||
1997 | 1997년 이란 대통령 선거 | 20,078,187 | 69.6 | 1위 | 당선 |
2001 | 2001년 이란 대통령 선거 | 21,659,053 | 77.1 | 1위 | 당선 |
10. 저술 및 출판물
하타미는 페르시아어, 아랍어, 영어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페르시아어 저서
- 파도의 두려움(بیم موج)
- 도시의 세계에서 세계의 도시로(از دنیای شهر تا شهر دنیا)
- 전제정치에 갇힌 믿음과 사상(آیین و اندیشه در دام خودکامگی)
- 민주주의(مردم سالاری)
- 문명 간 대화(گفتگوی تمدنها)
- 내일을 위한 편지(نامه ای برای فردا)
- 이슬람, 성직자, 그리고 이슬람 혁명(اسلام، روحانیت و انقلاب اسلامی)
- 정치 발전, 경제 발전, 그리고 안보(توسعه سیاسی، توسعه اقتصادی و امنیت)
- 여성과 청년(زنان و جوانان)
- 정당과 평의회(احزاب و شوراها)
- 내재된 종교적 진실의 부활(احیاگر حقیقت دین)
영어 저서
- 이슬람, 자유, 그리고 발전 (Islam, Liberty and Development)
아랍어 저서
- 종교, 이슬람, 그리고 시대에 대한 연구 (مطالعات في الدين والإسلام والعصر)
- 정치의 도시 (مدينة السياسة)
11. 수상 및 영예

모하마드 하타미는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다음과 같은 주요 상과 명예 학위를 받았다.
- 아테네 대학교 금메달
- 스페인 하원 및 상원의 특별 메달, 마드리드 열쇠
- 모스크바 국제 관계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 모스크바 대학교 철학 명예 박사 학위
- 도쿄 공업대학 명예 박사 학위
- 델리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 아제르바이잔 국립 과학 아카데미 명예 박사 학위
- 레바논 대학교 정치학 명예 학위
- 파키스탄 최고 시민 훈장
- 국제 부모 교육 연맹 명예패 및 특별 메달
- 알닐라인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법학 명예 박사 학위
- 베네수엘라 해방자 훈장
2009년에는 다리우시 샤예간과 함께 '글로벌 대화상'의 초대 공동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하타미는 수상을 거부하여 샤예간 단독으로 수상했다.
12. 관련 항목
- 2월 2일 운동
- 1997년 이란 대통령 선거
- 2001년 이란 대통령 선거
- 2009년 이란 대통령 선거
- 2013년 이란 대통령 선거
- 이슬람 내 자유주의 운동
- 현대 이슬람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