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과 교육

매슈 벙커 리지웨이는 1895년 3월 3일 버지니아주 포트 먼로에서 포병 장교인 토마스 리지웨이 대령과 루스 스타벅 (벙커) 리지웨이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내내 다양한 군사 기지에서 생활했다. 리지웨이는 훗날 자신의 "가장 오래된 기억들은 총과 행진하는 군인들이며, 기상나팔 소리에 일어나 밤에는 '탭스'의 감미롭고 슬픈 음이 공식적으로 하루를 마감할 때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1912년 보스턴의 잉글리시 하이 스쿨을 졸업한 뒤,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아버지의 뜻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웨스트포인트에 지원했다. 리지웨이는 수학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첫 입학 시험에서는 떨어졌으나, 집중적인 자율 학습 끝에 두 번째 시험에서는 합격했다. 웨스트포인트 재학 중에는 축구팀 매니저로 활동했다. 그는 1917년 4월 20일,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2주 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으며, 미국 육군 보병 병과의 소위로 임관했다. 그의 동기 중에는 리지웨이처럼 훗날 장성이 될 J. 로턴 콜린스, 마크 W. 클라크, 노먼 코타, 어니스트 N. 하먼 등 여러 인물이 있었다.
2.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군 경력
리지웨이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멕시코 국경의 3보병연대에서 복무한 뒤, 웨스트포인트 교수로 돌아와 스페인어 강사로 일했다. 그는 전쟁 중에 전투 임무에 배정되지 못한 것에 대해 실망감을 표하며 "선과 악의 마지막 위대한 승리에 참여하지 못한 군인은 망가질 것"이라고 느꼈다.
1924년과 1925년, 리지웨이는 조지아주 포트 베닝에 있는 미국 육군 보병학교에서 장교 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중국 톈진의 15보병연대에서 중대장으로 복무했다. 이어서 니카라과로 파견되어 1927년 자유 선거 감독을 도왔다.
1930년에는 필리핀 총독의 고문이 되었다. 그는 1935년 캔자스주 포트 리븐워스에 있는 육군 지휘참모대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컬럼비아 특별구 포트 레슬리 J. 맥네어에 있는 육군참모대학교를 졸업했다. 1930년대 동안 그는 6군단 부참모장, 제2군 부참모장, 제4군 부참모장을 역임했다. 육군 참모총장 조지 C. 마셜 장군은 1939년 9월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직후 리지웨이를 전쟁 계획국에 배정했다.
3.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7월 1일 중령으로 진급한 리지웨이는 1942년 1월까지 전쟁 계획국에서 근무했으며, 그 직전인 12월 11일 대령으로 임시 진급한 후 같은 달 준장으로 진급했다. 1941년 12월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격과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리지웨이는 단 4개월 만에 중령에서 소장으로 빠르게 진급했다. 1942년 2월, 그는 당시 창설 중이던 82보병사단의 사단 부사령관으로 배정되었다. 이 사단은 리지웨이가 매우 존경하는 보병 동료인 오마 브래들리 소장의 지휘 아래 있었다. 두 사람은 다음 몇 달 동안 사단에 합류하는 수천 명의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8월, 브래들리가 28보병사단 사령관으로 재배치된 지 두 달 후, 리지웨이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82사단의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82사단은 기본 훈련을 모두 마쳤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미 훌륭한 전투 기록을 세웠기에, 육군의 다섯 개 신규 공수사단 중 하나로 선택되었다. 보병 사단 전체를 공수 부대로 전환하는 것은 미 육군에 전례 없는 조치였으며, 많은 훈련, 시험 및 실험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942년 8월 15일, 사단은 82공수사단으로 재지정되었다.
처음에는 325보병연대, 326보병연대, 327보병연대로 구성되어 모두 글라이더 보병으로 전환될 예정이었으나, 327연대는 곧 82사단에서 전출되어 윌리엄 C. 리 소장이 지휘하는 101공수사단 편성에 기여했다. 리지웨이는 부하들과 달리 공수 훈련을 먼저 거치지 않고 사단에 합류했다. 그는 82사단을 전투 준비가 완료된 공수사단으로 성공적으로 전환시켰으며 계속 지휘권을 유지하여 마침내 공수부대원 윙을 획득했다. 327연대를 대체하기 위해 리지웨이는 시어도어 던 대령이 지휘하는 504공수보병연대를 받았으며, 이후 루벤 헨리 터커 3세 중령이 지휘를 맡았다. 1943년 2월에는 326연대도 전출되고 제임스 M. 개빈 대령이 지휘하는 505공수보병연대로 대체되었다. 4월, 리지웨이는 82사단이 대부분의 사단에 비해 3분의 1밖에 훈련 시간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시칠리아 침공을 준비하기 위해 북아프리카로 파견되었다.
3.1. 이탈리아 전역

리지웨이는 시칠리아 침공의 공수 작전 계획을 도왔다. 1943년 7월에 시작된 이 침공은 개빈 대령의 505공수보병연대(터커의 504연대 3대대에 의해 505공수연대 전투단으로 강화됨)가 선봉에 섰다. 일부 성공에도 불구하고 시칠리아는 공수사단의 종말을 맞을 뻔했다. 주로 리지웨이의 통제 밖의 상황으로 인해 82사단은 시칠리아에서 막대한 사상자를 입었고, 여기에는 사단 부사단장인 찰스 L. 키어런스 준장도 포함되었다. 7월 9일 아침 504연대의 강하 작전 중 아군 오인 사격으로 인해 병력이 널리 흩어졌고, 리지웨이는 미 제7군 사령관(조지 S. 패튼 중장 지휘 하에 82사단이 소속되어 있었다)에게 5,300명 이상의 82공수사단 공수부대원 중 자신의 통제 하에 있는 병력이 400명 미만이라고 보고해야 했다.
이탈리아 본토 침공 계획 중 82사단은 '자이언트 II 작전'에서 쿠데타를 통해 로마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리지웨이는 두 독일 중사단 한가운데 이탈리아 수도 로마 외곽에 82사단을 강하시키는 이 비현실적인 계획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 작전은 시작 몇 시간 전에 취소되었다. 그러나 82사단은 9월 살레르노에서 연합군의 이탈리아 침공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만약 리지웨이의 두 공수연대가 강하하지 않았다면 연합군은 바다로 밀려났을 수도 있었다. 82공수사단은 이후 이탈리아 전역 초기 단계에서 짧은 기간 동안 복무하며 10월 볼투르노 전선을 돌파하는 것을 도왔다. 사단은 그 후 최근 해방된 이탈리아 도시 나폴리에서 점령 임무로 돌아와 추가적인 전투를 거의 겪지 않았으며, 11월에는 북아일랜드로 향했다. 미 제5군 사령관인 마크 W. 클라크 중장은 리지웨이를 "뛰어난 전투 군인이자, 총명하고 용감하며 충성스러운 인물"이며 "가장 훌륭한 제5군 부대 중 하나를 훈련시키고 배출했다"고 언급하며, 리지웨이나 82사단을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 타협안으로 터커 대령의 504공수보병연대는 지원 부대와 함께 이탈리아에 남겨졌고, 최대한 빨리 82공수사단의 나머지 부대와 합류하기로 했다.
3.2. 서부 전선과 독일 침공

1943년 말 82공수사단이 북아일랜드로 파견된 후, 그리고 1944년 초 몇 달 동안, 리지웨이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코드명인 오버로드 작전의 공수 작전을 계획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작전에서 그는 성공적으로 두 미국 공수사단, 즉 82사단과 미숙한 101사단(당시 윌리엄 C. 리 소장이 지휘했으며, 이후 82공수사단 포병 사령관이었던 맥스웰 D. 테일러 준장으로 교체됨)의 병력을 두 개의 공수연대와 하나의 글라이더 연대(두 개 대대뿐이었지만)에서 세 개의 공수연대로, 그리고 글라이더 연대는 세 개 대대 규모로 증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르망디 전투에서 그는 그의 부대와 함께 강하했으며, 셰르부르오크트빌 근처의 생소뵈르르비콩트로 진격하기 위해 33일간 싸웠다(생소뵈르는 1944년 6월 14일에 해방되었다). 7월 초 최전선 임무에서 해제된 82공수사단은 노르망디의 보카주 지대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 중 46%의 사상자를 냈다.
1944년 8월, 리지웨이는 18공수군단의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82공수사단의 지휘권은 리지웨이의 부사단장이었던 제임스 M. 개빈 준장에게 넘어갔다. 리지웨이가 참여한 첫 번째 작전은 그의 101공수사단이 아른헴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아인트호벤과 베헬 사이의 교량을 확보하기 위해 아인트호벤 근처에 강하한 마켓 가든 작전이었다. 리지웨이는 그의 부대와 함께 강하하여 사단의 전투 최전선에 있었다. 18공수군단은 12월 벌지 전투 동안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밀어내는 데 기여했다. 1945년 3월, 영국 6공수사단과 미국 17공수사단의 지휘 하에 그는 플런더 작전의 공수 구성 요소인 바시티 작전 중 독일로 군단을 이끌었다. 1945년 3월 24일 독일군 수류탄 파편에 어깨를 다쳤다. 그는 서부 연합군의 독일 침공에서 군단을 지휘했다. 1945년 6월 4일, 그는 육군 중장으로 임시 진급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리지웨이는 태평양 전쟁 전구의 새로운 임무를 위해 비행기에 탑승하여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휘하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에서 대위 시절 맥아더와 함께 복무한 적이 있었다.
리지웨이는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 육군 원수를 매우 높이 평가하며, 몽고메리 휘하에서 복무했던 시간이 "가장 만족스러웠다"고 언급했다. 그는 "몽고메리는 원하는 바의 일반적인 윤곽을 제시하고 나를 완전히 자유롭게 했다"고 덧붙였다. 리지웨이는 몽고메리가 "때로는 통제하기 약간 어려웠던 자유로운 영혼"이었다고 말하면서도, 그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일류 전문 장교... 그리고 몽고메리는 결과를 낼 수 있었다... 내가 영국군 지휘 하에 두 번 있었을 때, 몽고메리보다 더 완벽한 지원을 해준 사람을 알지 못한다... 나는 몽고메리와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언급했다.
4. 전후 군 경력
리지웨이는 1945년 10월 18공수군단이 해체될 때까지 루손에서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이후 그는 지중해 전구 미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지중해 연합군 부최고사령관 직함을 가졌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그는 유엔 군사 참모 위원회에서 미 육군 대표로 활동했다. 1948년에는 카리브해 지역 미군을 통제하는 카리브 사령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1949년에는 당시 미국 육군참모총장이었던 J. 로턴 콜린스 장군 휘하의 행정 부참모장으로 배정되었다.
1947년 12월, 리지웨이는 세 번째 부인인 메리 프린세스 "페니" 앤서니 롱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46년 뒤 리지웨이가 사망할 때까지 부부 관계를 유지했다. 1949년 4월, 두 사람의 유일한 자녀인 매슈 벙커 리지웨이 주니어가 태어났으나, 1971년 사고로 사망했다. 리지웨이의 부인은 1997년에 사망했다.
5. 한국 전쟁
5.1. 미 8군 사령관
리지웨이의 가장 중요한 지휘 임무는 1950년 12월 23일 월턴 워커 중장의 사망 이후에 주어졌다. 리지웨이는 그 해 6월 북한의 침공에 대응하여 한국에 배치되었던 미 8군의 사령관으로 워커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리지웨이가 미 8군 지휘를 맡았을 때, 미 8군은 북한으로 강력하게 진격했으나 예상치 못한 압도적인 중국인민지원군의 공세인 청천강 전투에 부딪혀 여전히 전술적 후퇴 중이었다. 리지웨이는 미 8군의 사기를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리지웨이는 당시 한국 주둔 유엔군의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의 위엄 있는 태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맥아더는 리지웨이에게 전임자에게는 주지 않았던 작전상의 자유를 허락했다. 리지웨이가 1950년 성탄절에 도쿄에 도착하여 맥아더와 작전 상황을 논의했을 때, 맥아더는 새로운 사령관에게 미 8군의 작전은 그가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대로 수행해도 좋다고 확신시켰다. 리지웨이는 당시 진행 중이던 연속적인 방어 진지로 후퇴하고, 가능한 한 서울을 사수하되, 그렇게 함으로써 미 8군이 수도 주변의 고립된 지역에 갇히는 상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격려받았다. 리지웨이는 전투 상황이 "마음에 들면" "내가 공격해도" 맥아더가 반대하지 않을지 구체적으로 물었다. 맥아더는 "미 8군은 자네 마음이다, 매슈. 자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대로 하게"라고 답했다.

리지웨이가 큰 피해를 입은 미 8군을 인계받은 후 처음 한 일 중 하나는 병사들의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지휘 체계를 재편성했다. 한국에서 I 군단에 대한 그의 첫 브리핑 중 하나에서 리지웨이는 다양한 방어 계획과 비상 상황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를 들었다. 마지막에 그는 참모들에게 공격 계획의 현황에 대해 물었고, 군단 작전 장교(G-3)는 그러한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며칠 내로 I 군단에는 새로운 작전 장교가 부임했다. 그는 또한 적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순찰을 보내지 않은 장교들을 교체하고, 지역 부대가 최근에 적과 접촉하여 적이 여전히 그곳에 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면 지휘관의 계획 지도에서 "적의 위치"를 제거하도록 지시했다. 리지웨이는 6개월 동안 전투에 참여한 사단 지휘관들을 교체하고 새로운 리더들로 대체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모든 계급의 지휘관들에게 후방의 지휘소에서 시간을 줄이고 전선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러한 조치들은 사기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개입으로 한국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 정치 지도자들은 전쟁 확대를 막기 위해 유엔군이 중국 내 보급 기지나 중국과 북한 국경의 압록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을 폭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미 육군은 공격적인 자세에서 보호적이고 지연적인 작전으로 전환했다. 리지웨이의 두 번째 큰 전술적 변화는 포병을 막대하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중국군 사상자는 급증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조직적인 포격 속으로 파상 공격을 감행하면서 사상자는 매우 높아졌다. 리지웨이의 리더십 아래 중국군의 공세는 둔화되었고, 마침내 지평리 전투와 원주 전투에서 중단되었다. 그는 이후 1951년 초 썬더볼트 작전이라는 반격 작전을 이끌었다.
특히, 리지웨이는 한국군이 미국에서 제공받은 최신예 무기와 고가 장비들을 쉽게 포기하고 도주하는 것에 대해 깊은 불만을 표했다. 그의 저서 "THE KOREAN WAR"에서 이 문제를 여러 차례 언급하며, 이러한 상황이 그를 몹시 불쾌하게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 병사들을 미국군 장비로 무장시키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하여 리지웨이의 불쾌감을 가중시켰다. 결국 리지웨이는 모든 한국군 사단을 전선에서 철수시켜 훈련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5.2. 유엔군 최고사령관 및 SCAP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4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지휘관에서 해임되자, 리지웨이는 대장으로 승진하며 한국 주둔 모든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한국 주둔 사령관으로서 리지웨이는 가슴 높이에 수류탄을 착용하는 습관 때문에 "틴 틴틴"(Tin Tits영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극동사령부 내 미국군 부대의 인종 차별 철폐와 통합을 감독했으며, 이는 광범위한 육군 전반의 인종 차별 철폐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북한의 사회기반시설 대부분을 파괴하고 많은 민간인을 사망에 이르게 한 북한 폭격을 지속했다.
1951년 리지웨이는 버지니아주 신시내티 협회의 명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리지웨이는 또한 맥아더로부터 일본의 군정 총독인 연합군 최고사령관(SCAP)의 역할도 승계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리지웨이는 1952년 4월 28일 일본의 독립과 주권 회복을 감독했다.
6. 냉전 시대 지휘 및 정책
6.1.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

1952년 5월, 리지웨이는 신생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영어)의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SACEUR)으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의 뒤를 이었다. 이 직책에서 리지웨이는 협력적인 지휘 구조를 개발하고, 병력 및 시설 확장을 감독하며, 훈련 및 표준화를 개선하는 데 진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인 참모진으로만 자신을 둘러싸면서 다른 유럽 군사 지도자들의 불만을 샀다. 그의 솔직한 성격은 항상 정치적으로 현명하지는 않았다. 1952년 합동참모의장 오마 브래들리 장군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리지웨이가 NATO를 '현실적인 단계'로 이끌었으며 '이질적인 방어군이 점차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고무적인 상황'을 만들었다"고 보고했다.
리지웨이는 영미프랑스 독일 고등판무관들에게 제2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에서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모든 독일 장교들을 사면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그는 자신이 최근 한국에서 "독일 장성들이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은 종류의" 명령을 내렸다고 언급했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명예" 때문에 "유럽군 독일 병사에게 단 하나의 명령이라도 내리기 전에" 이 장교들을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2. 미국 육군 참모총장
1953년 8월 17일, 리지웨이는 J. 로턴 콜린스 장군의 뒤를 이어 미국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그는 리지웨이에게 프랑스와의 협력 하에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에 대한 평가를 요청했다. 리지웨이는 성공을 위해 필요한 대규모 개입에 대한 포괄적인 개요를 작성하여 대통령이 개입을 단념하도록 설득했다. 한 가지 긴장 요인은 리지웨이가 공군력과 핵폭탄이 영토를 점령하고 인구를 통제하기 위한 강력하고 기동성 있는 지상군에 대한 필요성을 줄이지 않는다는 믿음이었다. 리지웨이는 아이젠하워의 육군 규모 대폭 축소 제안이 증가하는 소비에트 연방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할 수 없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러한 우려는 그의 참모총장 임기 동안 반복되는 이견으로 이어졌다. 리지웨이는 한국 전쟁을 교착 상태로 끝난 대참사로 여겨 아시아에서의 또 다른 지상전, 특히 중국과의 전쟁에 강력히 반대하는 미 육군 내 "두 번 다시는 안 돼 클럽"의 리더였다.
1954년 봄, 리지웨이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확실한 패배로부터 구하기 위해 전술 핵무기를 사용한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제안하는 독수리 작전에 강력히 반대했다. 합동참모의장 아서 W. 래드포드 제독은 독수리 작전을 지지하며 아이젠하워에게 추천했고, 베트민 공산주의자들의 프랑스에 대한 승리를 미국이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954년 3월 20일, 프랑스 참모총장 폴 엘리 장군이 워싱턴을 방문하여 래드포드가 그에게 독수리 작전 계획을 보여주었고, 미국이 이를 실행할 의지가 있다는 인상을 주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반대 의견으로 리지웨이는 공군력만으로는, 심지어 전술 핵무기를 사용하더라도 프랑스를 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 계획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리지웨이는 7개 미국 보병 사단의 투입만이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구할 수 있으며, 만약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한다면 중국도 개입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리지웨이는 만약 중국이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한다면, 미국은 베트남에 12개 사단을 투입해야 할 것이라고 썼다. 래드포드에 맞서 리지웨이는 미국이 또 다시 아시아에서 중국과 힘든 지상전에 발목 잡히는 것은 유럽에서 중요한 자원 낭비가 될 것이며, 유럽이 베트남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래드포드의 추천에 대한 아이젠하워에게 제출한 반대 보고서에서 리지웨이는 "인도차이나는 결정적인 군사 목표가 결여되어 있다"며 그곳에서 전쟁을 하는 것은 "제한된 미국의 역량에 심각한 전환이 될 것"이라고 진술했다. 리지웨이는 해군 제독인 래드포드가 중국과 싸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중국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한국 전쟁이 끝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미국이 중국과 또 다른 힘든 싸움을 벌이는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리지웨이의 '독수리 작전'에 대한 반대는 아이젠하워를 주춤하게 만들었지만, 래드포드 제독의 핵무기 배치에 대한 강력한 주장, 즉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을 포위하고 있는 베트민 병력에 전술 핵폭탄 3개를 투하하는 것으로 인도차이나를 프랑스에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대통령을 망설이게 했다. 리처드 닉슨 부통령과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 모두 '독수리 작전'을 찬성하며 아이젠하워에게 이를 받아들이도록 강력히 설득했다. 아이젠하워 자신은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한 회의에서 래드포드 제독과 공군 네이선 F. 트와이닝 장군에게 "자네들은 미쳤음에 틀림없어. 10년도 안 돼서 아시아인들에게 두 번이나 저 끔찍한 것들을 사용할 수는 없어. 맙소사!"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는 마침내 '독수리 작전'을 실행하기로 동의했지만, 의회의 승인을 먼저 받고 영국이 참여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했다. 의회 지도자들은 '독수리 작전'을 미국 단독 작전으로는 거부했지만, 영미 합동 작전이라면 지지할 의향이 있다는 모호한 답변을 내놓았다. 결국 영국 윈스턴 처칠 총리가 베트남에 대한 영국 개입을 거부하면서 '독수리 작전'은 무산되었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 남아있던 프랑스군이 항복하면서 파리의 조제프 라니엘 정부는 무너졌고, 인도차이나에서 모든 프랑스군을 철수시키는 것을 유일한 임무로 하는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새 정부가 수립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군의 60세 강제 퇴역 정책에 대한 유예를 승인하여 리지웨이가 참모총장으로서 2년 임기를 마칠 수 있도록 했다. 미국 해군과 미국 공군을 선호하여 육군을 격하시키는 행정부와의 이견으로 인해 리지웨이는 두 번째 임기에는 임명되지 못했다. 리지웨이는 1955년 6월 30일 육군에서 퇴역했으며, 그의 후임으로는 한때 82공수사단의 참모장이었던 맥스웰 D. 테일러 장군이 부임했다. 퇴역 후에도 리지웨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자였다. 1960년 10월 7일 1960년 대통령 선거 토론회의 두 번째 토론에서 존 F. 케네디는 리지웨이 장군을 진먼섬과 마쭈 열도를 중국으로부터 방어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지지하는 인물로 언급했다.
6.3. 베트남 전쟁 및 "현자 그룹"에 대한 입장
1967년 11월, 리지웨이는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 전쟁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기 위해 때때로 모이는 은퇴한 외교관, 정치인, 장성들로 구성된 "현자 그룹"(Wise Men영어)에 참여하도록 초빙되었다. 비록 딘 애치슨 전 국무장관이 비공식적 리더였던 이 "현자 그룹"은 존슨이 사진 촬영 기회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널리 치부되었지만, 대통령은 "현자 그룹"을 매우 존경했고 그들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1968년 초, 리지웨이는 제임스 M. 개빈 장군과 데이비드 M. 슈프 장군과 함께 북베트남에 대한 전략 폭격 공세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으며, 남베트남이 방어할 가치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 비판은 존슨의 강력한 국가안보보좌관 월트 로스토를 충분히 동요시켜, 그는 대통령을 위해 리지웨이, 개빈, 슈프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고 있으며 폭격 공세가 곧 북베트남을 무릎 꿇게 할 것이라고 극도의 확신을 표명하는 5페이지 분량의 메모를 작성했다.

테트 공세 이후, 존슨이 뉴햄프셔주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반전 상원의원 유진 매카시를 불과 300표 차이로 이기면서 백악관은 위기에 휩싸였다. 존슨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군사적 해결책을 계속 추구할지 아니면 외교적 해결책으로 전환할지 고민했다. 위기감을 더한 것은 합동참모의장 얼 휠러 장군이 존슨에게 외교적 해결책을 배제하고 군사적 해결책을 계속 추진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1968년 2월 23일, 휠러는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에게 존슨에게 베트남에 206,000명의 병력을 추가 파병할 것을 권고하라고 지시했고, 웨스트모어랜드는 추가 병력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행했다. 휠러의 압력에 따라 웨스트모어랜드는 206,000명의 병력 추가 요청을 했고, 그들이 없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존슨에게 보고서에서 주장했다. 휠러의 진짜 목적은 웨스트모어랜드가 병력 요청을 하게 하여 존슨이 예비군과 주 방위군을 동원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1968년까지, 이미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50만 명의 미군 외에 206,000명의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려면 유럽, 한국 등 다른 지역에 대한 미국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는 한 예비군과 주 방위군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예비군과 주 방위군을 동원하는 것은 경제에 혼란을 초래할 것이고, 이는 존슨이 평시 경제를 중단하도록 강요할 것이며,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외교적 해결책으로 전환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었다。전시 경제가 수반하는 경제적 희생은 승리할 때까지 싸운다는 목표를 말함으로써만 미국 국민에게 정당화될 수 있었다.
웨스트모어랜드의 병력 요청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일 때, 존슨의 오랜 친구이자 강경파로 알려진 클라크 클리퍼드가 3월 1일 새로 임명된 국방장관으로 국방부에 도착했다. 클리퍼드의 친구인 J. 윌리엄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은 그가 리지웨이와 개빈 장군과 비공개로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리지웨이와 개빈은 모두 클리퍼드에게 베트남에서의 승리는 불가능하며, 존슨에게 외교적 해결책을 찾도록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영향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리지웨이와 개빈의 조언은 클리퍼드를 강경파에서 비둘기파로 전환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클리퍼드 국방장관은 206,000명 추가 병력 요청의 정치적 함의를 깨달았고, 존슨에게 이를 거부하고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강력히 설득한 반면, 로스토는 그에게 이를 수락하라고 조언했다. 웨스트모어랜드가 자신의 보고서에서 추가 병력 없이는 베트남에서의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으므로, 병력 요청을 거부하는 것은 군사적 해결책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존슨은 1968년 3월 25일 "현자 그룹" 회의를 소집하여 조언을 구했다. 다음 날, "현자 그룹"의 대다수는 존슨에게 베트남에서의 승리가 불가능하며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이 조언은 그가 평화 회담을 시작하기로 설득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14명의 "현자 그룹" 중 맥스웰 테일러 장군, 로버트 머피, 에이브 포타스, 오마 브래들리 장군만이 존슨에게 군사적 해결책을 계속 추구하라고 조언했고, 나머지는 모두 외교적 해결책을 주장했다. 리지웨이가 "공산주의에 무르다"고 아무도 비난할 수 없는 전쟁 영웅으로서의 지위는 "현자 그룹"의 명성을 높였고, 존슨이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높였다. 1968년 3월 31일, 존슨은 전국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북베트남과의 평화 회담을 시작할 의사가 있으며, 북베트남 대부분에 대한 폭격을 무조건적으로 중단하고, 마지막으로 1968년 선거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7. 개인 생활

1917년 그는 줄리아 캐롤라인 블런트(1895년~1986년)와 결혼했다. 두 딸인 콘스탄스와 셜리가 있었으나 1930년에 이혼했다.
이혼 직후, 리지웨이는 웨스트포인트 졸업생(헨리 해롤드 대브니, 1915년 졸업)의 미망인이었던 마가렛 ("페기") 윌슨 대브니(1891년~1968년)와 결혼했으며, 1936년에는 페기의 딸 버지니아 앤 대브니(1919년~2004년)를 입양했다. 리지웨이와 페기는 1947년 6월 이혼했다. 그 해 말 그는 "페니"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메리 프린세스 앤서니 롱(1918년~1997년)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리지웨이가 사망할 때까지 부부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아들 매슈 주니어를 두었으나, 매슈 주니어는 버크넬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관후보생(ROTC) 소위로 임관한 직후인 1971년 사고로 사망했다.
리지웨이는 은퇴 후에도 리더십 활동과 강연자 및 저술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55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교외의 폭스 채플로 이주하여 멜론 산업 연구소 이사회 의장직과 걸프 오일 이사회 이사직 등을 수락했다. 은퇴 이듬해 그는 자서전인 『병사: 매슈 B. 리지웨이 회고록』(Soldier: The Memoirs of Matthew B. Ridgway영어)을 출간했다. 1967년에는 『한국 전쟁』(The Korean War영어)을 저술했다.
1960년 리지웨이는 멜론 연구소 직책에서 은퇴했지만, 여러 기업 이사회, 피츠버그 시민 단체, 국방부 전략 연구 위원회에서 계속 활동했다.
리지웨이는 강력한 군대가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그는 많은 연설을 하고, 글을 쓰고, 다양한 패널, 토론 및 그룹에 참여했다. 1968년 초, 그는 인도차이나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백악관 오찬에 초청되었다. 오찬 후, 리지웨이는 린든 B. 존슨 대통령 및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과 두 시간 동안 비공개로 만났다. 의견을 묻자 리지웨이는 베트남에 더 깊이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고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할 것을 조언했다. 국제관계 전문지인 『포린 어페어스』 기사에서 리지웨이는 정치적 목표는 중요한 국가 이익에 기반해야 하며 군사적 목표는 정치적 목표와 일치하고 지지해야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는 어느 쪽도 해당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리지웨이는 화학, 생물학, 방사능 무기 능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들이 현재 사용되는 무기보다 국가 목표를 더 잘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76년, 리지웨이는 소련의 증가하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더 큰 군사 대비를 촉구하는 현존하는 위험에 대한 위원회의 창립 이사회 멤버였다.
1985년 5월 5일, 리지웨이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비트부르크 근처 콜메스회에 묘지 방문에 참여했다. 당시 루프트바페의 에이스 전투기 조종사였던 요하네스 슈타인호프 (1913년~1994년)는 예정에 없던 행동으로 리지웨이의 손을 굳게 잡으며 이전 적들 간의 화해를 보여주었다.
8. 저작 및 출판물
- 『병사: 매슈 B. 리지웨이 회고록』 (Soldier: The Memoirs of Matthew B. Ridgway영어, 1956년 출간, 해럴드 H. 마틴과의 협업)
- 『한국 전쟁』 (The Korean War영어, 1967년 출간)
9. 사망 및 장례
리지웨이는 1993년 7월 26일, 98세의 나이로 피츠버그 교외의 폭스 채플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지 추도사에서 당시 합동참모의장이었던 콜린 파월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군인도 이 사람보다 자신의 의무를 더 잘 수행하지 못했다. 어떤 군인도 이 사람보다 자신의 명예를 더 잘 지키지 못했다. 어떤 군인도 이 사람보다 조국을 더 사랑하지 못했다. 모든 미군 병사는 이 위대한 인물에게 빚을 지고 있다."
10. 유산과 평가

그의 경력 내내 리지웨이는 탁월한 리더로 인정받았으며, 부하, 동료, 상사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오마 브래들리 장군은 한국 전쟁의 판도를 바꾼 리지웨이의 업적을 "육군 역사상 개인 리더십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노르망디의 한 병사는 중요한 다리를 건너기 위한 격렬한 전투에 대해 "그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리지웨이, 개빈, 말로니가 가장 치열한(가장 많은 포격이 쏟아지는) 그곳에 서 있던 것이었다. 핵심은 그 제방을 넘어간 모든 병사가 모든 장교와 연대 및 대대 지휘관들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영감을 주는 노력이었다"고 언급했다.
벌지 전투에서 독일군이 가장 깊숙이 진격했던 날, 리지웨이는 18공수군단 휘하 장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황은 정상적이고 완전히 만족스럽다. 적은 모든 기동 예비군을 투입했으며, 이것이 이번 전쟁에서 그들의 마지막 주요 공격 노력이다. 우리 군단이 그들의 노력을 저지할 것이며, 그 다음에는 공격하여 그들을 분쇄할 것이다."
리지웨이는 리더십에 세 가지 주요 요소가 있다고 보았다. 바로 인격, 용기, 그리고 역량이다. 그는 자기 훈련, 충성심, 이타심, 겸손, 책임을 받아들이고 실수를 인정하려는 의지 등을 포함하는 인격을 "리더십 전체 구조가 놓이는 기반"이라고 묘사했다. 그의 용기에 대한 개념은 육체적 용기와 도덕적 용기를 모두 포함했다. 역량에는 신체적 건강, 위기가 발생할 시점을 예상하고 해결을 위해 현장에 있는 것, 그리고 부하들과 가까이 지내며 명확하게 소통하고 그들이 잘 대우받고 공정하게 지휘받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10.1. 긍정적 평가 및 기여
리지웨이는 그의 뛰어난 리더십, 전략적 통찰력, 그리고 군사 역사에 대한 기여로 폭넓은 찬사와 인정을 받았다. 특히 한국 전쟁에서 위기에 처한 유엔군을 재건하고 전세를 역전시킨 그의 역할은 "미국 육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적 리더십의 위업"으로 평가받는다.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하며 보여준 그의 용감한 모습과 지휘관으로서의 존재감은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북돋았으며, 이는 전투의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미국 육군 내 인종 차별을 철폐하고 통합을 추진하여 군의 현대화에 기여했으며, 냉전 시기에는 미국의 과도한 군사 개입, 특히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그의 신중한 입장은 후세에 그의 선견지명과 국가 이익을 위한 책임감 있는 판단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10.2. 비판 및 논란
리지웨이는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일부 비판과 논란에 직면하기도 했다. 특히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 재임 시절, 그는 다른 유럽 군사 지도자들의 불만을 무릅쓰고 미국인 참모진으로만 자신의 팀을 구성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 전선에서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독일 장교들을 사면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자신이 한국에서 내린 명령들이 그들의 행위와 유사하다고 언급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입장은 당시 전쟁 범죄에 대한 엄격한 정의와 책임 추궁을 요구하는 국제 사회의 분위기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11. 훈장 및 포상
11.1. 미국 휘장, 훈장 및 메달
휘장 및 메달 | 설명 |
---|---|
전투보병 휘장 (리지웨이는 조지프 스틸웰 장군, 윌리엄 F. 딘 소장, 오마 브래들리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와 함께 장군 신분으로 명예 CIB를 수여받은 다섯 명의 장성 중 한 명이다. 장군은 CIB를 수여받을 수 없으며, CIB는 대령 이하에게만 수여된다.) | |
![]() | 공수부대원 휘장 (하나의 동성 점프 스타 포함) |
![]() | 육군 참모 식별 휘장 |
![]() | 프랑스 푸라게르 훈장 (제2차 세계 대전 색상) |
6개의 해외 근무 휘장 |
훈장명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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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수훈 십자장 | (참나무잎 클러스터 포함) |
육군 수훈 훈장 | (참나무잎 클러스터 4개 포함) |
실버 스타 | (참나무잎 클러스터 2개 포함) |
공로 훈장 | (참나무잎 클러스터 포함) |
브론즈 스타 메달 | (V자 장식 및 참나무잎 클러스터 포함) |
퍼플 하트 훈장 | |
대통령 표창 (미국) | |
대통령 자유 훈장 | |
제1차 세계 대전 승리 메달 | |
제2차 니카라과 전역 메달 | |
미국 방어 근무 메달 | (하나의 동성 서비스 스타 포함) |
미국 전역 메달 | |
유럽-아프리카-중동 전역 메달 | (화살촉 장식 및 전역 스타 8개 포함) |
아시아-태평양 전역 메달 | |
제2차 세계 대전 승리 메달 | |
점령군 메달 | (독일 걸쇠 포함) |
국방 근무 메달 | |
한국 근무 메달 | (전역 스타 7개 포함) |
11.2. 국제 및 외국 훈장, 장식 및 메달
훈장명 (국가)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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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 (프랑스, 1953년) | |
왕관 훈장 (벨기에) 그랑크루아 (벨기에) | |
성 마우리치오 & 라자로 기사단 훈장 기사 그랑크루아 (이탈리아) | |
요르요스 1세 훈장 그랑크루아 (그리스) | |
오크 왕관 훈장 그랑크루아 (룩셈부르크) | |
아즈텍 독수리 훈장 그랑크루아 (멕시코) | |
오라녜 나사우 훈장 기사 그랑크루아 (네덜란드) | |
아비스 군사 훈장 그랑크루아 (포르투갈) | |
성 샤를 훈장 그랑 오피시에 (모나코) |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기사 그랑크루아 (이탈리아) | |
백상 훈장 1등급 (태국) | |
바스 훈장 나이트 커맨더 (영국) | |
붉은 기 훈장 (소련) | |
보야카 훈장 그랑 오피시에 (콜롬비아) | |
사보이 군사 훈장 그랑 오피시에 (이탈리아) | |
필리핀 공로 훈장 총사령관 (필리핀) | |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훈장 그랑 오피시에 (파나마) | |
레오폴드 2세 훈장 지휘관 (야자잎 포함) (벨기에) | |
남십자성 훈장 장교 (브라질) | |
크루아 드 게르 훈장 (프랑스) (1939-1945) | (동성 야자잎 포함) (프랑스) |
크루아 드 게르 훈장 (벨기에) (1940-1945) | (동성 야자잎 포함) (벨기에) |
유엔 한국 근무 메달 | |
미주 국방위원회 메달 | |
한국 전쟁 참전 메달 |
11.3. 기타 영예
- 미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 미국 보병 협회의 연례 도우보이 상을 수상했다.
- 리지웨이는 1951년 4월 30일과 1952년 5월 12일자 『라이프』 잡지 표지에 실렸다.
- 리지웨이는 1951년 3월 5일과 1951년 7월 16일자 『타임』 잡지 표지에 실렸다.
12. 명칭 및 기념물
- 리지웨이는 그의 고향인 피츠버그에 있는 군인 및 선원 기념관 입구에 "리지웨이 코트"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어 영예를 안았다.
- 피츠버그 대학교에는 그의 이름을 딴 매슈 B. 리지웨이 국제안보연구센터가 있다.
-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싱글 A 야구팀인 페이엣빌 우드페커스의 마스코트는 리지웨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미국 육군 유산 및 교육 센터 특별 소장 자료 열람실은 리지웨이 홀이라고 불린다.
13. 진급 내역
계급장 | 계급 | 구성 부대 | 날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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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nsignia | 사관생도 | 미국 육군사관학교 | 1913년 6월 14일 |
소위 | 미국 정규군 | 1917년 4월 20일 | |
중위 | 정규군 | 1917년 5월 15일 | |
대위 | 국가군 | 1917년 8월 5일 | |
대위 | 정규군 | 1919년 7월 18일 | |
소령 | 정규군 | 1932년 10월 1일 | |
중령 | 정규군 | 1940년 7월 1일 | |
대령 | 미국 육군 | 1941년 12월 11일 | |
준장 | 미국 육군 | 1942년 1월 15일 | |
소장 | 미국 육군 | 1942년 4월 6일 | |
중장 | 미국 육군 | 1945년 6월 4일 | |
준장 | 정규군 | 1945년 11월 1일 | |
소장 | 정규군 | 1942년 4월 6일 (소급 적용) | |
대장 | 미국 육군 | 1951년 5월 11일 | |
대장 | 정규군, 퇴역 | 1955년 6월 3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