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만프레트 뵈르너는 어린 시절 슈투트가르트에서 성장했으며, 법학을 전공하며 행정 및 법률 분야에서 초기 경력을 쌓았다.
1.1. 어린 시절과 가족
만프레트 헤르만 뵈르너는 1934년 9월 24일 독일 슈투트가르트 근교의 바트 칸슈타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육점 주인인 조부 알프레트 알딩거의 집에서 자랐다. 뵈르너의 조부와 동명이인인 에르빈 롬멜 원수의 부관은 그와 다른 인물이다. 뵈르너는 1972년 12월 안나-마리아 시저와 결혼했으며, 이후 198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엘피 뵈르너(본명 라인슈, 1941년-2006년)와 결혼 생활을 했다. 엘피 뵈르너는 여러 독일군 관련 인도주의 단체를 지원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2006년에 종양으로 사망했다.
1.2. 교육 및 초기 경력
뵈르너는 슈투트가르트의 요하네스-케플러 김나지움에서 교육받았고, 1953년 아비투어(대학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파리 대학교, 뮌헨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57년에는 제1차 사법 시험에 합격했고, 1961년에는 제2차 사법 시험에 합격했다. 1961년에는 국제법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여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그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 행정부에서 근무했으며, 1962년까지 외링겐 군청에서, 1965년까지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의회에서, 그리고 이후 괴핑겐 군청에서 일했다.
2. 군 복무
만프레트 뵈르너는 독일 연방군 공군의 예비역 장교이자 제트기 조종사로 복무했으며, 최종 계급은 대령이었다. 이러한 군 경력은 그의 국방부 장관 및 NATO 사무총장 재임 시 군사 안보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
3. 정치 경력
만프레트 뵈르너는 독일 기독민주연합(CDU) 소속으로 독일 연방의회 의원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며 독일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3.1. 독일 연방의회 의원
뵈르너는 1953년 CDU의 청년 조직인 유어 웅니온(Junge Union)에 가입했고, 1956년에는 CDU에 정식 입당했다. 1965년에는 괴핑겐 지역구에서 독일 연방의회 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어 1988년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연방의회에서 그는 1969년부터 1972년까지 기독민주연합/기독사회연합(CDU/CSU) 의원단 부단장을 지냈고, 1976년부터 1980년까지는 연방의회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3.2. 국방부 장관
1982년 10월 4일, 뵈르너는 헬무트 콜 내각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서방 연합국과 소련 간의 군비 축소 회담 이후, 소련의 SS-20 중거리 탄도 미사일 배치를 역전시키기 위한 NATO의 중거리 탄도 미사일 배치 결정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1983년, 뵈르너는 독일군 고위 장교인 귄터 키슬링(Günter Kießling) 장군을 둘러싼 스캔들로 비판에 직면했다. 독일 군사정보국은 키슬링이 동성애자라고 비난했으나, 이는 후에 오인으로 밝혀졌다. 당시 동성애는 안보 위험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뵈르너는 키슬링 장군의 조기 전역을 명령했다. 키슬링은 자신에 대한 징계 절차를 주장했고, 결국 복직을 이뤄냈다. 뵈르너는 이 사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1984년 5월 18일 사임을 제안했으나, 헬무트 콜 총리는 이를 거부했다. 뵈르너는 NATO 사무총장에 임명되면서 1988년 5월 국방부 장관직을 사임했다.
4. NATO 사무총장
만프레트 뵈르너는 1988년 NATO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어 냉전 종식과 독일 통일이라는 전환기 속에서 NATO의 역할을 이끌었다.
4.1. 재임 기간 및 주요 활동
1987년 12월, NATO 16개 회원국은 뵈르너를 새로운 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이 직책에 임명된 최초의 독일인이었다. 그는 독일 정부의 직책을 사임하고 1988년 7월 1일 NATO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냉전이 종식되고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는 등 유럽 안보 질서에 큰 변화가 있었다. 뵈르너는 이 시기에 NATO의 역할 변화와 유럽의 평화와 안보에 기여했다. 그러나 1990년 브레멘 타바크 콜레기움에서의 연설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07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제43차 뮌헨 안보 정책 회의에서 이 연설을 인용하며 NATO가 냉전 종식 후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주장했다.
4.2. 재임 중 질병과 사망
만프레트 뵈르너는 1994년 대장암 진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질병에도 불구하고 NATO 사무총장으로서의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그는 1994년 8월 13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재임 중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괴핑겐 근처 호헨슈타우펜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5. 평가 및 유산
만프레트 뵈르너는 유럽의 평화와 자유를 위한 그의 공헌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만, 일부 결정과 발언에 대해서는 비판과 논란이 존재한다.
5.1. 주요 업적 및 긍정적 평가
만프레트 뵈르너는 NATO 사무총장으로서 냉전 종식과 독일 통일이라는 역사적 전환기에 NATO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는 유럽의 평화와 자유에 기여했으며,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질병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직무를 완수하려 했던 그의 헌신은 높이 평가된다. 그가 트랜스아틀란틱 대화와 이해 증진에 기여한 공로 또한 인정받고 있다.

5.2. 비판 및 논란
뵈르너의 결정이나 행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는 그의 1990년 연설이 블라디미르 푸틴에 의해 NATO의 동방 확장에 대한 '약속 위반'의 증거로 인용된 사건이다. 이 외에도 국방부 장관 재임 시절 귄터 키슬링 장군 스캔들 처리 방식이 논란이 된 바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뵈르너가 그의 경력 동안 직면했던 정치적, 외교적 복잡성을 보여준다.
6. 기념 및 영예
만프레트 뵈르너를 기리기 위해 여러 상과 세미나가 제정되었으며, 지명이 명명되기도 했다.
6.1. 만프레트 뵈르너 메달
1996년부터 독일 국방부는 매년 "유럽의 평화와 자유에 특별한 공로를 세운" 공인들에게 만프레트 뵈르너 메달을 수여하고 있다. 이 메달은 뵈르너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되었다.
역대 주요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 1996년: 리처드 홀브룩, 미국 외교관이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및 코소보 특사
- 1997년: 에발트-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슈멘친, 뮌헨 안보 정책 회의 창립자
- 1998년: 게르트 바그너 박사(사후), 데이턴 협정 이행에 기여
- 1999년: 야누시 오니슈키에비치 박사, 폴란드 국방부 장관
- 2000년: 엘리자베스 폰드, 미국 언론인
- 2001년: 카르스텐 포크트, 독일-미국 협력 담당 독일 외무부 조정관
- 2002년: 하비에르 솔라나, 유럽 연합 외교 정책 책임자 및 전 NATO 사무총장
- 2003년: 캐서린 맥아들 켈러허 교수, 미국 해군대학 및 전 아스펜 연구소 베를린 책임자
- 2005년: 한스 코슈니크
- 2006년: 크리스티안 슈바르츠-실링
- 2007년: 마르티 아흐티사리
- 2009년: 외르크 쇤봄
- 2011년: 한스-프리드리히 폰 플뢰츠, 독일 외교관
6.2. 기타 기념
독일 국방부에서 주관하는 만프레트-뵈르너-세미나는 독일, 미국, 기타 유럽 국가의 젊은 민간 고위 인사들을 위한 안보 정책 정보 세미나이다. 이 세미나는 대서양 횡단 대화와 상호 이해에 대한 뵈르너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남극 사우스셰틀랜드 제도의 리빙스턴섬에 있는 뵈르너 갭 또한 뵈르너의 유럽 통합에 대한 기여를 인정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