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기원전 85년 ~ 기원전 42년 10월 23일)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저명한 정치인이자 웅변가이며,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의 주동자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에게 입양된 후 법적으로는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브루투스'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흔히 '브루투스'로 불린다. 그의 삶은 공화주의적 이상과 그가 살았던 시대의 격동적인 정치적 격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한다. 브루투스는 공화정을 수호하려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으며, 이는 그를 역사적으로 '배신자'와 '폭군에 맞선 영웅'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게 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2.1. 가문 및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동명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로, 기원전 83년 호민관을 지냈으나 술라의 숙청 대상이 되었다. 이후 기원전 77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반란에서 레가투스로 복무하던 중 폼페이우스에게 살해당했다. 브루투스의 어머니는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로, 소 카토의 이복 누이였으며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부가 되었다. 일부 고대 문헌에서는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의 친아버지일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으나, 카이사르가 브루투스 출생 당시 15세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연대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고 대부분 부정한다.
아버지의 숙청으로 인해 브루투스는 정치 경력을 시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기원전 59년 친척인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에게 사후 입양되면서 이러한 제약이 풀렸다. 이로 인해 그는 공식적으로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브루투스'로 알려졌으나, 이 법적 이름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기원전 59년, 카이사르가 집정관이던 시절, 브루투스는 루키우스 베티우스 사건에 연루되어 포룸에서 폼페이우스를 암살하려던 음모의 일원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베티우스는 무기 소지 혐의로 구금되었고, 다음 날 진술을 번복하며 브루투스의 이름을 혐의에서 제외했다.
2.2. 교육 및 초기 영향
브루투스는 키프로스 총독으로 임명된 외삼촌 소 카토의 보좌관으로 기원전 58년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브루투스는 키프로스 속주 행정(특히 이전 왕의 재산을 사용 가능한 돈으로 전환하는 작업)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그의 역할은 "거의 확실히 과장되었다"고 평가된다. 그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스토아 철학의 사상과 외삼촌 소 카토의 엄격한 공화주의적 가르침이 그의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 정치 경력 및 활동
3.1. 재무관 및 소아시아 활동
기원전 54년, 브루투스는 세 명의 화폐 주조관 중 한 명인 트리움비르 모네탈리스로 재직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조상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아할라의 초상화를 새긴 데나리우스를 주조했는데, 이들은 각각 왕을 축출하고 스푸리우스 마엘리우스를 살해함으로써 공화정의 자유를 수호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또한 자유의 여신인 리베르타스와 루키우스 브루투스를 묘사한 두 번째 종류의 주화를 만들었다. 이 주화들은 브루투스가 초기 공화정의 폭군 살해자들을 존경했음을 보여주며, 폭군에 반대하는 그의 입장을 드러내는 선전의 역할을 했다.
기원전 54년경, 브루투스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딸 클라우디아와 결혼했다. 기원전 53년에는 재무관으로 선출되어 원로원에 자동으로 입성했다. 이후 그는 장인과 함께 킬리키아로 가서 기원전 52년까지 프로콰이스토르로 활동했다. 킬리키아에 머무는 동안 그는 고리대금업에 종사했으며, 이는 2년 후 키케로가 기원전 51년에서 50년 사이에 프로콘술로 임명되었을 때 밝혀졌다. 브루투스는 키케로에게 자신이 빌려준 두 건의 빚을 회수하는 데 도움을 요청했다. 하나는 카파도키아의 왕 아리오바르자네스 3세에게, 다른 하나는 살라미스 시에 빌려준 것이었다. 살라미스에 대한 대출은 더 복잡했는데, 공식적으로는 브루투스의 친구 두 명이 대출한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연 48%의 이자를 요구하여 키케로가 이전에 부과했던 12%의 이자 상한선을 훨씬 초과했다. 이 대출은 기원전 56년 브루투스가 키프로스에서 로마로 돌아온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렉스 가비니아 법에 따라 로마인이 수도에서 속주민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불법이었지만, 브루투스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상원의 승인을 받아 "친구들"을 통해 이 돈을 빌려줄 수 있었다. 브루투스는 자신의 친구 명의로 된 이 계약이 상원에서 확인되도록 했다. 키케로는 브루투스와의 우정을 해치고 싶지 않았지만, 대출에 대한 브루투스의 오해와 엄청난 이자율에 실망하고 분노했다.
3.2. 폼페이우스에 대한 반대
기원전 52년, 브루투스는 장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형제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죽음 이후,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으로 만들려는 요구에 반대하는 소책자 De Dictatura Pompei (폼페이우스의 독재에 대하여)를 썼다. 그는 이 책에서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 아무도 다스리지 않는 것이 낫다. 권력 없이도 명예롭게 살 수 있지만, 노예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에 그는 기원전 52년 폼페이우스의 단독 집정관 승격을 지지했던 소 카토보다 더 급진적인 입장을 보였다. 폼페이우스가 단독 집정관이 된 직후, 그는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를 겨냥한 렉스 폼페이아 데 비 법을 통과시켰고, 이에 키케로는 프로 밀로네라는 연설을 썼다. 브루투스 또한 밀로를 변호하는 (현재는 소실된) 프로 T. 안니오 밀로네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밀로의 클로디우스 살해를 국가의 안녕과 명확히 연결시키고 폼페이우스의 권력 남용을 비판했다. 이 연설 또는 소책자는 당시에 매우 호평을 받았으며, 훗날 수사학 교육자들에게도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기원전 50년대 후반, 브루투스는 공공 사제 중 한 명인 폰티펙스로 선출되었다. 이는 카이사르가 그의 선출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카이사르는 이전에 브루투스에게 재무관 임기 후 갈리아에서 자신의 레가투스로 합류할 것을 제안했으나, 브루투스는 거절하고 아피우스 풀케르와 함께 킬리키아로 갔다. 기원전 50년, 브루투스는 폼페이우스, 퀸투스 호르텐시우스와 함께 자신의 장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를 반역 및 선거 부정 혐의로부터 변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기 직전의 정치적 위기 동안 브루투스의 견해는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기원전 52년까지 폼페이우스에 반대했지만, 단순히 전술적 침묵을 지켰을 수도 있다. 키케로의 편지들은 내전 직전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의 아버지 죽음에 대한 복수를 언급하며 브루투스를 회유하려 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4. 카이사르의 내전과 용서
4.1. 카이사르의 용서와 총독 임명
브루투스가 이어진 디르라키움 전투와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전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부하들에게 브루투스가 자발적으로 항복하면 그를 포로로 잡되, 계속 싸우려 하면 해를 입히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명령했다고 전한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에서 폼페이우스군이 대패한 후, 브루투스는 습지를 가로질러 라리사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카이사르에게 편지를 썼으며, 카이사르는 그를 자신의 진영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플루타르코스는 또한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이집트 철수 계획을 알려주었다고 암시하지만,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로 가기로 결정했을 때 브루투스는 그 자리에 없었으므로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48년에서 47년 사이에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알렉산드리아로 간 동안, 브루투스는 다양한 폼페이우스파와 카이사르 사이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기원전 47년 12월 로마로 돌아왔다. 카이사르는 카토와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추격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나면서 브루투스를 키살피나 갈리아의 총독(아마도 레가투스 프로 프라에토레)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46년 4월 6일 탑수스 전투에서 패배한 후 카토가 자살하자, 브루투스는 카토라는 소책자를 써서 카토의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카이사르의 클레멘티아(관용)를 강조하며 카토를 추모했다.
기원전 45년 3월, 카이사르가 공화주의 잔당과의 마지막 전투를 벌인 후, 브루투스는 6월에 아내 클라우디아와 이혼하고 같은 달 말 포르키아, 즉 카토의 딸이자 자신의 사촌과 재혼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브루투스가 포르키아와 결혼하고 싶다는 이유 외에 클라우디아와의 이혼에 대한 유효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결혼은 작은 스캔들을 일으켰다. 브루투스가 포르키아와 결혼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그가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고, 카토의 지지자들에게 브루투스를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정치적 동기의 결혼이었을 수도 있다. 비록 이 시점에도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포르키아는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키케로는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불만을 매우 공개적으로 드러냈다고 언급했다.
브루투스는 또한 기원전 44년의 명망 높은 법무관직을 약속받았고, 기원전 41년에는 집정관직 후보로 지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5. 카이사르 암살 음모와 실행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을 결심하게 된 과정을 묘사하는 다양한 고대 기록들이 있다. 플루타르코스, 아피아노스, 카시우스 디오 등 모두 제정 시대에 글을 쓴 역사가들은 동료들의 압력과 브루투스가 자신의 조국과 가문의 명예에 대한 철학적 의무를 인식한 점에 초점을 맞췄다.
5.1. 암살 동기와 음모
기원전 45년 가을 무렵, 카이사르에 대한 여론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플루타르코스, 아피아노스, 디오 모두 브루투스의 조상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찬양하는 낙서가 나타나고, 카이사르의 왕정 야망을 비난하며, 로마의 야외 법정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게 그의 조상들의 명예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모욕적인 발언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디오는 이러한 대중적 지지가 로마 시민들로부터 나왔다고 보고하는 반면, 플루타르코스는 엘리트들이 브루투스를 행동으로 이끌기 위해 낙서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동기가 무엇이든, 현대 역사가들은 기원전 44년 초까지 대중 여론의 상당 부분이 카이사르에게 등을 돌렸다고 믿는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1월 말, 자신의 조각상에서 왕관을 제거한 두 명의 호민관을 해임했다. 이는 기원전 49년 내전을 시작한 주요 명분 중 하나였던 호민관의 권리 수호를 훼손하는 행위였다. 기원전 44년 2월,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세 번이나 제안한 왕관을 환호하는 군중 앞에서 거절했지만, 나중에 딕타토르 페르페투오(종신 독재관) 칭호를 수락했다. 이 칭호는 라틴어로 '평생 독재관' 또는 '무기한 독재관'으로 번역될 수 있었다.
키케로 또한 브루투스에게 카이사르와의 관계를 재고할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카시우스 디오는 브루투스의 아내 포르키아가 브루투스의 음모를 부추겼다고 주장하지만, 그녀의 영향력에 대한 증거는 불분명하다. 그 해의 법무관 중 한 명이자 카이사르의 전 레가투스였던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또한 음모 형성에 관여했다. 플루타르코스는 브루투스가 아내의 권유로 카시우스에게 접근했다고 기록하는 반면, 아피아노스와 디오는 카시우스가 브루투스에게 접근했다고 기록한다.
정치 체제에 대한 카이사르의 통제 범위는 브루투스 세대의 많은 귀족들의 야망을 좌절시켰다. 카이사르의 독재는 로마인들이 인정했던 성공의 많은 길을 막았다. 원로원이 고무 스탬프 역할로 전락하면서 카이사르의 원로원에서는 정치적 논의가 사라졌다. 카이사르를 설득하는 것 외에는 누구도 정책을 형성할 여지가 없었고, 정치적 성공은 경쟁을 통해 민중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카이사르의 허락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되었다. 브루투스가 적극적인 작가이자 사상가였던 플라톤 철학 전통 또한 정의를 회복하고 폭군을 전복할 의무를 강조했다.
음모가 어떻게 처음 형성되었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카이사르의 가까운 동맹이자 브루투스의 사촌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와 함께 기원전 44년 2월 말부터 음모에 가담할 사람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스카,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등을 모집했다. 음모 후반에는 안토니우스를 죽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브루투스는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플루타르코스는 브루투스가 안토니우스를 폭군 살해자 편으로 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반면, 아피아노스는 브루투스가 폭군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카이사르파 엘리트를 숙청하는 것에 대한 여론을 고려했다고 말한다.
다양한 계획들이 제안되었다. 비아 사크라에서의 매복, 선거에서의 공격, 검투사 경기에서의 살해 등이 논의되었고, 결국 음모는 이데스 오브 마르치(3월 15일)의 원로원 회의에서 실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날짜는 상징적인 중요성을 지녔는데,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 집정관들이 이 날(1월 초 대신) 취임했기 때문이다. 이데스 오브 마르치를 선택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는 원로원 회의가 카이사르를 지지 세력으로부터 고립시킬 것이라고 가정했지만, 아피아노스는 다른 원로원 의원들이 암살자들을 도울 가능성을 언급했다. 카이사르의 원로원 확장과 전체 원로원 의원 수에 비해 적은 수의 공모자들을 고려할 때, 두 가능성 모두 "가능성이 낮다". 디오의 제안이 더 가능성이 높은데, 원로원 회의에서 무기를 몰래 들여와 공모자들만이 무장할 수 있다는 전술적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5.2. 이데스 오브 마르치
고대 문헌들은 이데스 오브 마르치 사건을 불길한 징조가 무시되고, 예언자들이 경멸당하며, 음모를 폭로하는 카이사르에게 전달되지 않은 쪽지 등 극적이고 비극적인 이야기로 꾸몄으며, 이 모든 것이 카이사르 죽음의 선전적 서사에 기여했다. 음모의 구체적인 실행은 트레보니우스가 카이사르와 공동 집정관으로 재직 중이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원로원 밖에서 붙잡아두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거의 즉시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암살의 구체적인 세부 사항은 저자마다 다르다.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는 약 80명의 공모자를 보고했고, 아피아노스는 15명만을 나열했으며, 카이사르의 상처 수는 23개에서 35개에 이른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의 참여를 본 후 공격에 굴복했다고 보고한다. 디오는 카이사르가 그리스어로 "카이 수 테크논" (καὶ σύ, τέκνον;너마저, 아이야?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이라고 외쳤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은 카이사르의 친구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가 독재관이 침묵 속에 쓰러졌다고 말했으며, 카이사르가 "카이 수 테크논"을 후기처럼 말했을 가능성도 있다. 극적인 죽음의 인용문은 로마 문학의 주요 요소였기 때문에 이 인용문의 역사성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고전학자 제임스 러셀과 제프리 테이텀에 따르면, "카이 수"의 사용은 저주를 의미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5.3. 암살 직후와 로마에서의 상황
카이사르가 죽은 직후, 원로원 의원들은 혼란 속에 도망쳤다. 아무도 카이사르를 돕거나 그의 시신을 옮기려 하지 않았다.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동상 발치에 쓰러졌다고 보고했다. 그의 시신은 밤이 되어서야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의 집으로 옮겨졌다. 공모자들은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향했다. 카이사르의 독재관 대리였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테베레 강 섬에서 군단 병력을 도시로 이동시켜 포룸을 포위했다. 수에토니우스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처음에는 카이사르의 재산을 압류하고 그의 법령을 취소할 계획이었으나, 레피두스와 안토니우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체했다고 보고한다.
레피두스의 병력이 포룸에 도착하기 전, 브루투스는 콘티오에서 대중 앞에서 연설했다. 그 연설의 내용은 소실되었다. 디오는 리베라토레스(해방자들)가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사람들에게 해를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아피아노스는 리베라토레스가 단순히 서로를 축하하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최근 해임했던 호민관들의 복귀를 권고했다고 전한다. 다른 연설들이 폭군 살해를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지지는 미온적이었다. 며칠 후인 3월 18일에 집정관이 될 예정이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는 즉시 불법적으로 집정관직을 맡기로 결정하고, 대중 앞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지지하며 카피톨리움 언덕의 리베라토레스에 합류했다.
키케로는 폭군 살해자들에게 원로원 회의를 소집하여 지지를 얻을 것을 촉구했지만, 브루투스는 대신 카이사르파에게 대표단을 보내 협상 타결을 요청했다. 이는 가족 관계 때문일 수 있다. 레피두스는 브루투스의 누이 중 한 명과 결혼했다. 또는 브루투스가 안토니우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믿었을 수도 있다. 카이사르파는 하루 동안 지체하며 병력을 이동시키고 가능한 충돌에 대비하여 무기와 보급품을 모았다.
카이사르 사망 후, 디오는 "명백히 환상적"이며 허구일 가능성이 높은 일련의 징조와 기적적인 사건들을 보고한다. 일부 이른바 징조들은 실제로 일어났지만, 실제로는 카이사르의 죽음과 무관했다. 키케로의 동상은 다음 해에야 넘어졌고, 에트나 화산은 시칠리아에서 폭발했지만 동시대는 아니었으며, 혜성은 하늘에서 보였지만 몇 달 후에야 보였다.
5.4. 화해와 로마 이탈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초기 계획은 평온기를 확립하고 일반적인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이사르파는 수도 근처에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리베라토레스는 곧 동방의 광대한 속주를 장악하게 될 것이었고, 이는 1년 안에 그들에게 대규모 군대와 자원을 제공할 것이었다. 군사적 상황이 처음에는 문제가 있음을 인지한 리베라토레스는 자신들의 행정관직과 속주 임명을 유지하여 자신들을 보호하고 공화주의 전선을 재건하기 위해 카이사르의 법령을 비준하기로 결정했다.
키케로는 정직한 중개인 역할을 하여 타협안을 도출했다. 이는 암살자들에 대한 일반 사면, 카이사르의 법령과 향후 2년간의 임명에 대한 비준, 그리고 카이사르의 퇴역병들에게 약속된 토지 지급 보장 등이었다. 카이사르는 또한 공공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 만약 이 합의가 유지되었다면, 공화정은 일반적으로 재개되었을 것이다. 데키무스는 그 해 갈리아로 가서 기원전 41년의 집정관으로 확정되었을 것이며, 그곳에서 41년의 선거를 치렀을 것이다. 사람들은 화해를 축하했지만, 일부 강경 카이사르파는 내전이 뒤따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카이사르의 장례식은 3월 20일에 거행되었으며, 안토니우스의 감동적인 연설은 독재관을 애도하고 폭군 살해자들에 대한 반대 여론을 고조시켰다. 다양한 고대 문헌들은 군중이 원로원 건물을 불태우고 폭군 살해자들에 대한 마녀사냥을 시작했다고 보고하지만, 이는 티. 피. 위즈먼에 따르면 리비우스가 추가한 허위적인 과장일 수 있다. 플루타르코스의 보고와는 달리, 암살자들은 장례식 후 4월까지 몇 주 동안 로마에 머물렀는데, 이는 폭군 살해자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어느 정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스스로 마리우스라고 칭하며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한 인물이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매복 공격할 계획을 시작했다. 도시 법원을 담당하는 법무관으로서 브루투스는 10일 이상 수도를 떠날 수 있는 특별 허가를 받아 로마 남동쪽으로 32187 m (20 mile) 떨어진 라누비움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물러났다. 이 가짜 마리우스는 4월 중순 또는 하순에 폭군 살해자들(그리고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기반)에 대한 위협 때문에 타르페이아 바위에서 던져져 처형되었다. 다른 집정관인 돌라벨라는 독자적인 판단으로 카이사르에게 헌정된 제단과 기둥을 파괴했다.
5월 초, 브루투스는 망명을 고려하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의 도착과 가짜 마리우스 사건으로 인해 안토니우스는 일부 퇴역병들의 지지를 잃었고, 그는 이에 대응하여 캄파니아를 순회하며(공식적으로는 카이사르의 퇴역병들을 정착시키기 위함이었으나 실제로는 군사적 지지를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군사적 기반을 다졌다. 이 시기에 돌라벨라는 리베라토레스 편에 있었고 로마의 유일한 집정관이기도 했다. 안토니우스의 형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유언 조건을 이행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을 도왔고, 이는 시민들에게 막대한 부를 넘겨주는 것이었다. 브루투스 또한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여러 연설문을 대중에게 배포했는데, 카이사르가 어떻게 로마를 침공하고 저명한 시민들을 살해하며 민중의 주권을 억압했는지를 강조했다.
5월 중순까지 안토니우스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키살피나 갈리아 총독직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원로원을 우회하여 6월에 이 문제를 민회에 상정하고 법률로 갈리아 속주 재배치를 시행했다. 동시에 그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그들의 속주에서 해임하고 대신 아시아와 시칠리아에서 곡물을 구매하도록 제안했다. 키케로, 브루투스, 카시우스(그리고 그들의 아내들), 브루투스의 어머니가 참석한 브루투스의 집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카시우스는 시리아로 갈 의사를 밝혔고 브루투스는 로마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결국 그리스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로 가려던 그의 초기 계획은 7월 초에 자신의 조상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기념하고 자신의 대의를 홍보하기 위한 경기를 개최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대신 친구에게 경기를 위임했다. 옥타비아누스 또한 그 달 말에 카이사르를 기념하는 경기를 개최했다. 이 무렵, 리베라토레스는 내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6. 해방자들의 내전
카이사르 암살 이후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동방에서 군대를 모집하고, 제2차 삼두정치 세력과 대립하며 '해방자들의 내전'을 벌였다.
6.1. 동방에서의 준비
기원전 8월 초, 원로원은 브루투스를 크레타섬에 (카시우스는 키레네에) 배정했는데, 이들은 병력이 거의 없는 작고 중요하지 않은 속주였다. 그 달 말, 브루투스는 이탈리아를 떠나 동방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의 젊은 로마인들에게 환영받았고, 아테네에서 교육받던 젊은 로마 귀족들로부터 많은 지지자들을 모집했다. 그는 마케도니아 총독과 속주를 자신에게 넘겨주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 로마에서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형제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에게 속주를 할당했지만, 브루투스는 연말에 퇴임하는 두 명의 재무관이 모금한 자금으로 힘을 얻어 군대와 함께 마케도니아 북부로 이동했다.
기원전 43년 1월, 브루투스는 군대를 이끌고 마케도니아에 진입하여 안토니우스의 형제 가이우스를 포로로 잡았다. 동시에 로마의 정치 상황은 키케로가 필리피카를 전달하면서 안토니우스에게 불리하게 돌아섰다. 다음 몇 달 동안 브루투스는 그리스에서 병력을 증강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이탈리아에서는 키케로의 요청에 따라 원로원이 무티나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와 싸웠고, 이 전투에서 두 집정관(아울루스 히르티우스와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이 모두 전사했다. 이 기간 동안 공화주의자들은 원로원의 지지를 받았으며, 원로원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마케도니아와 시리아에 대한 지휘권을 각각 확인해 주었다.
기원전 43년 돌라벨라는 입장을 바꿔 시리아에서 트레보니우스를 살해하고 카시우스에 대항하는 군대를 일으켰다. 5월 초 브루투스는 시리아로 이동하며 키케로에게 안토니우스에 대항하여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하는 키케로의 정책을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 동시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다. 5월 말, 브루투스의 이복 누이와 결혼한 레피두스는 아마도 자신의 병력에 의해 강요되어 키케로, 옥타비아누스, 원로원에 대항하여 안토니우스에 합류했고, 이에 브루투스는 키케로에게 자신과 레피두스의 가족을 모두 보호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다음 달, 브루투스의 아내 포르키아가 사망했다.
키케로가 옥타비아누스와 원로원을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에 대항하여 통합하려던 정책은 5월에 실패하기 시작했다. 그는 6월 중순 브루투스에게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와서 자신을 도울 것을 요청했다. 동방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상당한 통신 지연을 겪었으며, 무티나 전투 이후의 초기 보장과는 달리 안토니우스가 패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6월부터 8월 19일까지 다음 몇 달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진군하여 강제로 자신을 집정관으로 선출시켰다. 얼마 후,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동료 퀸투스 페디우스는 독재관 살해를 소급하여 불법으로 규정하고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을 궐석 재판으로 유죄 판결하는 렉스 페디아를 통과시켰다. 새로운 집정관들은 또한 레피두스와 안토니우스에 대한 원로원의 법령을 해제하여 카이사르파의 일반적인 화해의 길을 열었다. 그 법에 따라 데키무스는 가을 어느 시점에 서방에서 살해되어 서방 공화주의의 대의를 좌절시켰다. 기원전 43년 11월 27일까지 카이사르파는 완전히 갈등을 해결하고 렉스 티티아를 통과시켜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일련의 잔혹한 숙청을 단행했다. 이 숙청으로 키케로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삼두정치와 그들의 숙청 소식이 동방의 브루투스에게 전해지자, 그는 헬레스폰토스를 건너 마케도니아로 진군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트라키아의 여러 도시들을 정복했다. 기원전 42년 1월 스미르나에서 카시우스를 만난 후, 두 장군 모두 남부 소아시아를 통해 적을 도왔던 도시들을 약탈하는 원정을 벌였다.
아피아노스와 같은 일부 저자들의 브루투스 묘사는 이 동방 원정으로 인해 상당히 부정적으로 변했다. 이 원정에서 브루투스는 크산토스와 같은 도시들을 침공하여 주민들을 노예로 삼고 재물을 약탈했다. 플루타르코스를 포함한 다른 고대 역사가들은 더 변명적인 어조를 취하며, 브루투스가 저지른 폭력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다고 묘사한다. 이는 약탈과 같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변명하고 칭찬하기 위한 고대 문학의 흔한 장치였다. 이 원정은 약탈을 줄이고 강제적인 지불을 늘리는 방식으로 계속되었다. 이 전환에 대한 고대 기록 또한 나뉘는데, 아피아노스는 크산토스의 파괴 이야기가 동방의 항복 의지를 불러일으켰다고 보는 반면, 카시우스 디오와 플루타르코스는 원정의 후반부를 브루투스의 절제, 정의, 명예라는 미덕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소아시아 원정 말기까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사르디스에서 다시 만나 기원전 42년 8월 트라키아로 진군했다.
7. 필리피 전투와 죽음
7.1. 필리피 제1차 전투

카이사르파 또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루키우스 스타이우스 무르쿠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해군 순찰을 피해 그리스로 진군했다. 리베라토레스는 네아폴리스 서쪽에 위치하여 동방의 보급선과 명확한 통신선을 확보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카이사르파 병력은 운이 좋지 못했는데, 그들의 보급선은 우세한 공화주의 함대에 의해 괴롭힘을 당했고, 이는 리베라토레스가 소모전 전략을 채택하게 만들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약 95,000명의 보병과 13,000명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약 85,000명의 보병과 20,000명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막대한 현금을 보유한 리베라토레스는 상당한 재정적 이점도 가지고 있었는데, 전투 전에 병사들에게 1인당 1,500 데나리우스를 지급하고 장교들에게는 더 많은 금액을 지급했다. 안토니우스는 공화주의 좌익을 고정시키는 늪지대 안으로 어둠을 틈타 둑길을 건설하며 즉시 교전을 강요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공화주의 좌익을 지휘하던 카시우스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병력으로부터 차단되고 자신의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 벽을 건설하여 맞섰다.
이어진 필리피 전투의 시작은 불분명하다. 아피아노스는 안토니우스가 카시우스를 공격했다고 말하는 반면, 플루타르코스는 전투가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보고한다. 브루투스의 병력은 공화주의 우익에서 옥타비아누스의 병력을 격파하고 옥타비아누스의 진영을 약탈하여 젊은 카이사르를 후퇴시켰다. 카시우스의 병력은 안토니우스의 병력에 맞서 잘 싸우지 못했고, 카시우스는 언덕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피아노스는 카시우스가 브루투스의 승리 소식을 듣고 수치심에 자살했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문헌들은 카시우스의 레가투스 중 한 명이 브루투스의 승리 소식을 전달하지 못하여 카시우스가 브루투스가 패배했다고 믿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가 자살하게 되었다고 묘사한다.
7.2. 필리피 제2차 전투와 자결
첫 번째 전투 후, 브루투스는 상당한 현금 보상을 약속하며 카시우스의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병사들에게 승리 후 테살로니키와 스파르타를 약탈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이라고 약속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 도시들이 삼두정치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이탈과 안토니우스가 보급선을 끊을 가능성을 두려워한 브루투스는 한동안 적을 굶겨 죽이려는 원래 전략을 계속 시도한 후 전투에 참여했다. 그 결과로 벌어진 필리피 제2차 전투는 정면 대결이었으며, 문헌들은 전술적 기동은 거의 없고 특히 저명한 공화주의 가문들 사이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보고한다.
패배 후, 브루투스는 약 4개 군단과 함께 인근 언덕으로 도주했다. 자신의 군대가 패배했고 자신이 붙잡힐 것을 알았기에, 그는 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 말 중 하나는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도망쳐야 하지만, 발이 아니라 손으로 도망쳐야 한다"였다. 브루투스는 또한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에서 인용된 잘 알려진 구절인 "오 제우스여, 이 모든 고통을 초래한 자를 잊지 마소서"라는 저주를 내뱉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브루투스가 아피아노스의 주장처럼 안토니우스를 언급했는지, 아니면 캐서린 템페스트가 믿는 것처럼 옥타비아누스를 언급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친구들이 자신을 버리지 않은 것에 대해 칭찬한 후 그들에게 스스로를 구하라고 격려했다.
일부 문헌들은 안토니우스가 브루투스의 시신을 발견하자, 큰 존경의 표시로 자신의 가장 값비싼 자주색 망토로 시신을 감싸고 화장한 후, 재를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에게 보낼 것을 명령했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브루투스의 머리를 잘라 카이사르 동상 앞에 전시할 계획이었으나, 아드리아해에서 폭풍우 중에 바다에 던져졌다고 보고한다.
8. 연표
- 기원전 85년: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세르빌리아 사이에서 태어남.
- 기원전 58년: 키프로스 총독 카토의 보좌관으로 활동하며 정치 경력 시작.
- 기원전 54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딸 클라우디아와 결혼.
- 기원전 53년: 킬리키아에서 재무관으로 활동.
- 기원전 52년: 폼페이우스에 반대하고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 사망 후 밀로를 변호.
- 기원전 49년: 1월 내전 시작.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폼페이우스파에 합류, 킬리키아에서 푸블리우스 섹스티우스의 레가투스로 복무하다가 연말에 그리스에서 폼페이우스에게 합류.
-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에서 폼페이우스 패배; 카이사르에게 용서받음.
- 기원전 46년: 카이사르가 브루투스를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으로 임명. 4월 탑수스에서 폼페이우스파 잔당 격파.
- 기원전 45년: 카이사르가 그를 기원전 44년의 법무관으로 임명.
-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딕타토르 페르페투오 칭호 취득. 브루투스와 다른 리베라토레스가 3월 15일 카이사르 암살. 8월 말 아테네로 떠나 마케도니아로 이동.
- 기원전 42년: 1월 남부 소아시아에서 성공적인 원정을 벌임. 9월과 10월, 그의 군대가 삼두정치에 의해 패배하고 자살.
9. 가족
브루투스의 가계는 로마 공화정의 중요한 인물들과 얽혀 있다.
- 부모**:
- 아버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기원전 83년 호민관).
- 어머니: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 (소 카토의 이복 누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부).
- 양아버지**:
-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어머니의 동복 형제).
- 배우자**:
- 클라우디아 풀케라 (기원전 54년경 결혼,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딸). 기원전 45년 이혼.
- 포르키아 카토니스 (기원전 45년 결혼, 사촌이자 소 카토의 딸).
- 주요 친척**:
-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공화정을 수립한 전설적인 집정관이자 브루투스의 조상.
-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아할라: 폭군을 죽여 자유를 수호한 것으로 알려진 브루투스의 조상.
- 소 카토: 어머니의 이복 동생이자 브루투스의 외삼촌. 엄격한 공화주의 사상으로 브루투스에게 큰 영향을 미침.
- 율리우스 카이사르: 어머니의 정부이자 브루투스의 후원자.
-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브루투스의 매형이자 카이사르 암살의 주요 공모자.
-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 브루투스의 사촌이자 카이사르 암살의 주요 공모자.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제2차 삼두정치 구성원 중 한 명으로, 브루투스의 누이 중 한 명인 유니아 세쿤다와 결혼.
10. 평가 및 유산
브루투스의 역사적 인물상은 수많은 재평가를 거쳤으며,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많다. 브루투스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10.1. 고대 및 중세의 평가
고대 세계에서 브루투스의 유산은 상당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그의 시대와 사망 직후부터 그는 시기나 증오가 아닌 미덕적인 이유로 카이사르를 살해한 것으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의 "브루투스전"에서 브루투스의 적들조차 그를 존경했다고 언급하며, 안토니우스가 "브루투스는 그 행위의 장엄함과 고귀함에 이끌려 카이사르를 죽인 유일한 인물이었고, 나머지 공모자들은 그를 증오하고 질투하여 음모를 꾸몄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가 살아있을 때부터 브루투스의 문학적 저술, 특히 기원전 52년 폼페이우스의 독재에 반대하는 소책자 (De dictatura Pompei)와 밀로를 지지하는 소책자 (Pro T. Annio Milone)는 그를 철학적으로 일관되고 오직 원칙에 의해서만 동기 부여된 인물로 묘사했다. 키케로는 의무론에서 브루투스를 포함한 공모자들의 행위가 도덕적 의무였다고 표현했다. 고대 세계에서 그에 대한 주된 비난은 배은망덕이었다.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의 호의와 지지를 받고도 그를 살해한 것을 은혜를 모르는 행위로 본 것이다. 심지어 더 부정적인 역사학적 전통은 브루투스와 그의 동료들을 범죄적인 살인자로 보았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도 역사가들은 브루투스와 다른 공모자들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아우구스투스 자신도 브루투스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를 용인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 포룸에는 카토, 키케로, 브루투스, 카시우스와 같은 인물들의 동상이 제외되었다.
초기 원수정 시대에 브루투스에 대한 분열된 견해는 티베리우스 치세에도 거의 변하지 않았고, 사실상 분위기는 더욱 불관용적으로 변했다. 역사가 크레무티우스 코르두스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 너무 우호적인 역사를 썼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황제 정권의 지지를 받으며 글을 쓴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브루투스의 기억이 "돌이킬 수 없는 저주"로 고통받았다고 믿었다. 이 시기에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 대한 존경이 제정 체제에 대한 항의의 외침으로 더욱 불길하게 해석되었다." 소 세네카는 카이사르가 좋은 군주였으므로 브루투스의 두려움은 근거가 없었고, 그가 카이사르의 죽음의 결과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가 실제로 "브루투스전"을 쓸 무렵에는 "구전 및 문헌 전통이 브루투스의 동기에 대한 간결하고 대체로 긍정적인 서사를 만들기 위해 다듬어졌다." 소 플리니우스와 타키투스를 포함한 일부 고대 제정 시대 작가들도 그의 수사학적 기술을 칭찬했으며, 타키투스는 "내 생각에 그들 중 브루투스만이 악의나 앙심 없이 솔직하고 기발하게 자신의 마음속 신념을 드러냈다"고 썼다.
12세기 영국의 작가 솔즈베리의 존은 키케로의 의무론 사본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키케로의 신념을 본받아 폭군 살해를 도덕적 의무로 옹호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또한 처음에는 키케로의 브루투스 옹호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자신의 신념을 바꾸어, 특정 상황에서는 폭군을 전복해야 하지만, 온건한 폭군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중 지옥편에서는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배신한 죄로 지옥의 가장 낮은 곳에 배치되어, 그(카시우스, 이스카리옷 유다와 함께)가 사탄에게 직접 고통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단테의 견해는 더 나아가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카이사르를 죽임으로써 브루투스는 "하느님의 '역사적 설계'" 즉, 로마 제국의 발전과 기독교 및 당시의 기독교화된 군주정과의 융합에 "저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작가들은 브루투스를 더 긍정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카이사르 암살이 고대 공화주의 이데올로기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와 근세 시대에 다양한 인물들이 브루투스라는 이름을 불리거나 채택했다. 1537년 "피렌체의 브루투스" 로렌치노 데 메디치는 피렌체를 해방시키기 위해 사촌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공작을 살해했다고 알려져 있다. 프랑스 소책자 Vindiciae contra tyrannos는 1579년 스테파누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라는 필명으로 출판되었다. "영국의 브루투스" 앨저넌 시드니는 1683년 찰스 2세에 대한 음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브루투스는 근세 시대 예술에서도 자주 등장했는데, 특히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서는 그를 "공적인 상징이라기보다는 번민하는 영혼... [그리고] 종종 동정적인" 인물로 묘사했다.
10.2. 현대의 관점
공화주의의 상징으로서 브루투스에 대한 견해는 현대 시대에도 이어져 왔다. 예를 들어, 1787년 반연방주의 문서는 "브루투스"라는 필명으로 작성되었다. 유사한 반연방주의 서한과 소책자들은 카토, 포플리콜라와 같은 다른 로마 공화주의 이름으로도 작성되었다.
18세기 후반의 코니어스 미들턴과 에드워드 기번은 브루투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다. 미들턴은 키케로와의 서신에서 브루투스의 동요가 그의 철학적 일관성 주장을 배신했다고 믿었다. 기번은 브루투스의 행동을 그 결과, 즉 공화정의 파괴, 내전, 죽음, 그리고 미래의 폭정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브루투스의 행동에 대한 이러한 목적론적 견해는 오늘날 역사가들에 의해 회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 로널드 사임은 "브루투스를 실패했다는 이유로 판단하는 것은 단순히 결과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19세기 후반 테오도어 몸젠의 영향력 있는 로마사는 기원전 46년 카이사르의 개혁으로 끝을 맺음으로써 "브루투스에 대한 혹독한 판결을 내렸다." 동시에 카이사르가 "로마의 성장하는 제국을 다루는 문제에 대한 어떤 종류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이에 대한 현존하는 설명은 없다). 유사하게, 브루투스에 대한 견해는 공화정이 구원할 가치가 없었거나 피할 수 없는 쇠퇴기에 있었다고 믿는 견해와도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사후 판단에 의해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브루투스의 행동 전반에 대해서는 여전히 합의된 바가 거의 없다.
11. 대중문화에서의 모습
브루투스는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묘사되고 해석되어 왔다.
- 조너선 스위프트의 1726년 풍자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는 글럽더브드립 섬에 도착하여 마법사의 초대로 죽은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 중 카이사르와 브루투스가 소환되는데, 카이사르는 자신의 모든 영광이 브루투스가 자신을 살해함으로써 얻은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 콜린 매컬로의 로마의 대가들 소설 시리즈에서 브루투스는 소심한 지식인으로 묘사되며, 카이사르와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그는 카이사르가 자신의 딸 율리아와의 결혼 약속을 깨고 폼페이우스 대왕과 결혼하게 한 것에 대해 카이사르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 대항하는 공화주의 군대와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사면을 받은 후 카이사르의 총애를 받는다. 3월 15일 이데스 직전, 카시우스와 트레보니우스는 공화정의 창시자와의 가문적 연고 때문에 그를 명목상의 지도자로 이용한다. 그는 포춘스 페이버리츠, 카이사르의 여인들, 카이사르, 10월의 말에 등장한다.
- 아스테릭스 만화에서 브루투스는 가끔 조연으로 등장하며, 특히 아스테릭스와 아들에서는 주요 악당으로 나온다. 이 캐릭터는 처음 세 편의 아스테릭스 실사 영화에 등장하는데, 처음 두 편에서는 짧게 등장하고 아스테릭스와 오벨릭스: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디디에르 코시 분)와 아스테릭스 올림픽 게임에 가다에 나온다. 후자 영화에서는 벨기에 배우 브누아 풀보르드가 코믹한 악당으로 묘사한다. 그는 원래 아스테릭스 올림픽 게임에 가다 만화책에는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중심 인물이며, 이 영화에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아들로 암시된다.
- TV 시리즈 ROME에서 토비아스 멘지스가 연기한 브루투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과 자신에게 아버지와 같았던 인물에 대한 충성심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젊은이로 묘사된다. 이 시리즈에서 그의 성격과 동기는 다소 부정확한데, 브루투스는 정치에 마지못해 참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초기 에피소드에서는 자주 술에 취해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모습으로 나온다. 브루투스와 카토의 관계는 언급되지 않으며, 그의 세 누이와 아내 포르키아는 생략된다.
- 더 하이브스의 노래 "B is for Brutus"에는 유니우스 브루투스에 대한 제목 및 가사적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
-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2011년 앨범 아임 위드 유에 수록된 "Even You Brutus?"라는 곡은 브루투스와 이스카리옷 유다를 언급한다.
- 비디오 게임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에는 브루투스가 쓴 "로물루스의 두루마리" 형태의 작은 사이드 스토리가 등장하는데, 카이사르가 템플 기사단이었고 브루투스와 공모자들이 로마 암살단 형제단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 사이드 퀘스트의 끝에서 플레이어는 브루투스의 갑옷과 단검을 얻을 수 있다. 나중에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스에서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아야의 초기 신병으로 등장하며, 카이사르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인물로 나오지만, 브라더후드에 등장했던 그의 갑옷은 여기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12. 관련 항목
- 브루투스, 너마저
- 내란의 1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