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루이스 필리프 마데이라 카에이루 피구(Luís Filipe Madeira Caeiro Figo루이시 피구포르투갈어, 1972년 11월 4일 출생)는 포르투갈의 전 축구 선수로, 주로 윙어로 활약했다. 그는 스포르팅 CP,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인테르나치오날레 등 유럽의 명문 클럽에서 뛰며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피구는 포르투갈 국가대표팀에서 127경기에 출전하여 한때 최다 출장 기록을 보유했으며, 32골을 기록하며 포르투갈 역대 득점 4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경력은 수많은 트로피로 빛나는데, 타사 드 포르투갈, 라리가 4회, 코파 델 레이 2회,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3회, UEFA 챔피언스리그 1회, UEFA 컵위너스컵 1회, UEFA 슈퍼컵 2회, 인터콘티넨털컵 1회, 세리에 A 4회, 코파 이탈리아 1회,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3회 우승 등이 포함된다. 개인적으로는 2000년 발롱도르와 2001년 FI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으며, 2004년에는 펠레가 선정한 FIFA 100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피구는 스페인 축구의 최대 라이벌인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양쪽에서 모두 뛴 몇 안 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2000년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할 당시 6200.00 만 EUR의 세계 최고 이적료를 기록하며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이적은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큰 배신감을 안겨주었으며, 이는 축구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이적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루이스 피구는 1972년 11월 4일, 포르투갈 알마다의 코바 다 피에다드라는 노동자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1970년대 초 알렌테주에서 리스본으로 이주한 안토니우 카에이루 피구와 마리아 조아나 페스타나 마데이라의 외동아들이다.
2.1. 어린 시절 및 교육
피구는 어린 시절 UFC 오스 파스틸랴스에서 거리 축구를 시작하며 축구에 대한 재능을 키웠다. 11세의 나이에 포르투갈의 명문 클럽인 스포르팅 리스본의 유소년 아카데미에 합류했다. 그의 학업적 우수성 때문에 스포르팅 입단 동의서에는 "축구에 전념할 것"이라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젊은 시절 피구는 풋살을 통해 많은 기술을 익혔는데, 이는 훗날 그의 축구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스포르팅에 입단하기 전까지 피구는 11학년(대한민국의 고등학교 2학년에 해당)까지 정규 교육을 받았다. 2011년, 38세의 나이에 그는 포르투갈의 성인 대상 특별 기술 인증 프로그램인 '노바스 오포르투니다데스'를 통해 중등 교육(12학년)을 마쳤다. 또한 마드리드의 IESE 경영대학원에서 9개월 과정의 경영 관리 수업을 수강하기도 했다.
피구는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등 5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그는 아내의 생일에 스웨덴어로 인스타그램에 축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지만, 공식적인 미디어에서는 스웨덴어를 사용한 적은 없다.
3. 클럽 경력
루이스 피구는 스포르팅 CP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하여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인테르나치오날레를 거치며 유럽 축구의 최정상에서 활약했다.
3.1. 스포르팅 CP
피구는 1990년 4월 1일, 1989-90 시즌 마리티무와의 홈 경기에서 말론 브란당과 교체 투입되며 스포르팅 CP 소속으로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이 경기는 스포르팅의 1-0 승리로 끝났다. 1991년 12월 7일, 그는 1991-92 시즌 토렌스와의 경기에서 동점골을 기록하며 프로 첫 골을 터뜨렸고, 팀은 2-1로 승리했다.
그는 1991년에 첫 성인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하기 전, 포르투갈 청소년 대표팀의 일원으로 후이 코스타 및 주앙 핀투와 함께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와 U-16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포르투갈의 "황금세대"의 핵심 멤버였다. 스포르팅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1994-95 시즌에는 타사 드 포르투갈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1994년에는 프리메이라리가 최우수 선수로, 1995년에는 포르투갈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며 뛰어난 활약을 인정받았다.
3.2. FC 바르셀로나
1995년, 피구는 유럽의 빅 클럽으로 이적할 기회를 모색했다. 그러나 유벤투스와 파르마 양쪽과 계약을 맺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두 클럽 간의 분쟁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피구는 2년 동안 이탈리아 클럽으로 이적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피구는 225.00 만 GBP의 이적료로 스페인의 거함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당시 포르투갈 선수들은 특정 기간 외에는 해외 클럽으로 이적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피구는 시즌 잔여 기간 동안 임대 신분으로 복귀해야 했다. 이 규정은 그의 전 스포르팅 감독 맬컴 앨리슨이 120.00 만 GBP의 이적료로 맨체스터 시티에 그를 추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적이 무산되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바르셀로나에서 피구의 경력은 비로소 꽃을 피웠다. 그는 호나우두와 함께 1996-97 UEFA 컵위너스컵 우승을 이끌었고, 이어서 라리가 2연패를 달성했다. 이 시기 그는 히바우두와 파트리크 클라위버르트와 함께 막강한 공격진을 구축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총 172번의 리그 경기에 출전하여 30골을 기록했다. 그의 존재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에게 외부로부터 인정받는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매우 존경받는 선수였다. 2000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올랐다.
3.3. 레알 마드리드 CF

2000년 7월, 피구는 바르셀로나의 오랜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로 6200.00 만 EUR의 이적료에 이적하며 축구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는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 기록을 경신하는 것이었으며, 그의 마드리드 입단은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의 갈락티코스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이적은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안겨주었고, 피구는 바르셀로나-레알 마드리드 라이벌리의 새로운 중심에 섰다. 바르셀로나 팬들은 그를 향해 "배신자", "유다", "쓰레기", "용병", 그리고 "페세테로"(돈에 눈이 먼 자)와 같은 격렬한 비난을 쏟아냈다.
2000년 10월 21일, 피구가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캄 노우에 돌아왔을 때, 경기장의 소음은 귀를 찢을 듯했다. 경기장 곳곳에는 그를 비난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피구가 터널에서 경기장으로 뛰어나오자 약 98,000명의 바르셀로나 팬들의 야유는 더욱 거세졌다. 눈에 띄게 충격받은 피구는 손가락으로 귀를 막기도 했다. 경기가 시작된 후, 피구가 공을 잡을 때마다 야유는 더욱 커졌고, 오렌지, 병, 담배 라이터, 휴대전화 등 온갖 투척물이 날아들었다. 평소 마드리드의 코너킥을 전담하던 피구는 팬들과의 근접 접촉을 피하기 위해 캄 노우에서는 코너킥을 차지 않았다. 바르셀로나는 이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했고, 플로렌티노 페레스 레알 마드리드 회장은 경기 후 "경기장 분위기가 우리 모두를 압도했다"고 말했다. 마드리드 수비수 이반 캄포는 "피구가 처음 돌아온 그날 밤은 믿을 수 없었다. 그런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루이스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는 바르셀로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미디어가 '배신자가 온다'고 선동했다. 아니다, 당신들에게 위대했던 루이스 피구가 오는 것이다. 그날 밤은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젠장, 내가 지난 시즌에 여기 있었는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 감정은 존경심이었다. 그는 배짱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미첼 살가도는 2002년 11월 23일 캄 노우에서 열린 두 번째 경기에서 피구에게 쏟아진 극심한 적대감을 회상하며, "두 번째나 세 번째 코너킥 때 나는 루이스 피구에게 돌아보며 '잊어버려, 친구. 너 혼자야'라고 말했다. 나는 루이스에게 짧은 코너킥을 차도록, 터치라인 근처로 다가가곤 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관중석에서는 동전, 칼, 유리 위스키 병 등 투척물들이 쏟아져 내렸다. 조니 워커였던 것 같다. 아니면 J&B.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짧은 코너킥? 사양한다."라고 언급했다. 증오나 상처는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고, 그가 바르셀로나 팬들의 사정권에 들어올 때마다 맥주 캔, 라이터, 병, 골프공이 날아들었다. 피구는 "어떤 미친 사람이 이성을 잃을까 봐 걱정했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피구가 코너킥과 스로인을 모두 맡기로 결정했고, 후반 중반 마드리드가 코너킥을 얻었다. 날아드는 물체들의 소나기 속에서 피구가 코너킥을 차기까지 2분이 걸렸다. 반대편에서 또 다른 코너킥이 이어졌고, 피구는 걸어가면서 투척물들을 주워들었고, 코너킥을 준비하면서 파편들을 치우는 동시에 비꼬는 듯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코너킥을 차기 위해 달려들 때마다 또 다른 투척물이 떨어지는 일이 반복되었고, 결국 루이스 메디나 칸탈레호 주심은 경기를 거의 20분 동안 중단시켰다. 경기 중단 중, 라이벌리의 결정적인 이미지인 돼지 머리가 코너 플래그 근처의 파편들 사이에서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첫 시즌, 피구는 2000-01 라리가 우승을 차지했으며, 모든 대회를 통틀어 14골을 기록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활약으로 그는 2001년 FIF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2001년 중반에는 지네딘 지단이 팀에 합류했고, 다음 시즌 마드리드는 2001-02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했다. 그는 부상과 징계로 바르셀로나와의 두 경기에 결장했다.
피구는 마드리드에서 5시즌을 보냈으며, 마지막 성공은 2002-03 라리가 우승이었다. 2013년 4월, 스포츠 신문 마르카는 피구를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선수 11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3.4.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피구는 2005년 중반 레알 마드리드와의 계약이 만료된 후 자유이적으로 이탈리아 클럽 인테르나치오날레에 합류했다. 이로써 피구는 바르셀로나 이적 전 유벤투스와 파르마 간의 분쟁으로 무산되었던 이탈리아 리그 진출의 꿈을 마침내 이루게 되었다. 2008년 중반, 피구의 동향인 주제 모리뉴가 인테르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는 피구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는데, 인테르에 머무는 동안 여러 포르투갈인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9년 5월 16일, 피구는 축구 선수로서의 은퇴를 선언했다. 같은 날 인테르는 2008-09 시즌 우승을 확정 지었고, 피구는 5월 30일에 은퇴를 재확인했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5월 31일 산 시로에서 열린 아탈란타와의 경기였다. 하비에르 사네티의 요청으로 피구는 마지막 경기에서 주장 완장을 찼다. 그는 다비데 산톤과 교체되어 나가면서 관중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로마와의 2006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연장전에서 터뜨린 프리킥 골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힌다.

피구는 은퇴하면서 "저는 축구를 떠나지만, 인테르는 떠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탈란타와의 마지막 경기 후 인테르 채널과의 인터뷰에서 "은퇴 후에도 이 클럽이 더욱 위대해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분명히 미래에 클럽 이사회에서 인테르를 위해 일할 것입니다. 제가 이곳에 이렇게 오랫동안 머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첫날부터 동료들과 마시모 모라티 회장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인테르는 저에게 비범한 사람들과 함께 우승의 사이클을 시작할 기회를 주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피구는 2010년 5월 22일 인테르가 2009-10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할 당시 벤치에 있었다.
4. 국가대표팀 경력
루이스 피구는 포르투갈 국가대표팀의 "황금세대"를 이끌며 주요 국제 대회에서 활약했다.
4.1. 포르투갈 청소년 대표팀
피구는 포르투갈의 "황금세대"의 리더로서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또한 1989년 UEFA U-16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도 우승을 경험했다. 이 시기 그는 후이 코스타와 주앙 핀투와 같은 동료들과 함께 포르투갈 축구의 미래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평가받았다.
4.2. 포르투갈 성인 대표팀

피구는 18세의 나이였던 1991년 10월 16일, 룩셈부르크와의 친선 경기에서 성인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이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1992년 11월 11일 파리에서 열린 불가리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동점골을 기록하며 2-1 승리에 기여, 자신의 국가대표팀 첫 골을 신고했다. 그는 UEFA 유로 1996 예선 8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포르투갈이 12년 만에 본선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본선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인 노팅엄의 시티 그라운드에서 열린 크로아티아전에서는 4분 만에 선제골을 터뜨려 3-0 승리를 이끌었고, 포르투갈은 조 1위로 8강에 진출했다.
UEFA 유로 2000 예선 10경기에 모두 출전하여 3골을 기록했다. 2000년 6월 12일 에인트호번에서 열린 대회 개막전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0-2로 뒤지던 상황에서 만회골을 넣으며 3-2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포르투갈은 다시 조 1위로 8강에 진출했으나 준결승에서 탈락했다.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은 로테르담에서 열린 독일과의 마지막 조별 리그 경기에서 피구에게 휴식을 주었고, 이로써 그의 32경기 연속 국가대표팀 출전 기록은 중단되었다. 2001년 8월 15일 파루의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에서 열린 몰도바와의 친선 경기에서는 혼자 3골을 넣으며 생애 첫 국가대표팀 해트트릭을 기록, 3-0 승리를 이끌었다.
9경기 6골로 피구는 포르투갈의 2002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을 도왔다. 2001년 6월 2일 더블린의 랜스던 로드에서 열린 아일랜드와의 예선전에서는 74번째 출전 만에 처음으로 주장 완장을 차고 동점골을 넣어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러나 1986년 이후 처음으로 진출한 월드컵 본선에서 포르투갈은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고, 피구는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다. 인천에서 열린 대한민국과의 첫 맞대결에서는 이영표 등에게 철저히 봉쇄당하며 팀의 탈락을 지켜봐야 했다.
2004년 2월 18일, 피구는 이스타디우 알가르브에서 잉글랜드와 1-1로 비긴 친선 경기에서 정주장 페르난두 코투가 결장한 가운데 주장으로 나서며 100번째 국가대표팀 출전을 기록했다. 그해 여름 자국에서 열린 UEFA 유로 2004에서는 코투가 명단에서 제외되면서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그리스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후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루이스 펠리피 스콜라리 감독과의 불화설이 제기되었으나 이는 부인되었다. 2005년 6월, 그는 은퇴 결정을 번복하고 스콜라리 감독의 지휘 아래 슬로바키아와 에스토니아와의 2006년 FIFA 월드컵 예선전에 복귀했다.

피구는 2006년 FIFA 월드컵에서도 주장을 맡아 팀을 준결승으로 이끌었다. 3승을 거둔 포르투갈은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으며, 멕시코와 함께 토너먼트 라운드에 진출했다. 16강에서 네덜란드를 꺾고 8강에서는 승부차기 끝에 잉글랜드를 물리쳤다. 피구는 엘데르 포스티가와 교체되어 승부차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준결승에서는 프랑스에 패했는데, 그의 전 클럽 동료이자 프랑스 주장인 지네딘 지단의 페널티킥이 결승골이었다. 이는 포르투갈이 40년 만에 기록한 최고의 월드컵 성적이었다. 3위 결정전에서는 피구가 선발 출전하지 않아 논란이 있었고, 파울레타가 주장 완장을 찼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개최국 독일에 0-2로 뒤지자, 피구는 77분에 파울레타와 교체 투입되었고, 파울레타는 그에게 주장 완장을 다시 넘겨주었다. 포르투갈과 독일 팬들 모두 피구에게 환호를 보냈다. 피구 투입 직후 독일이 한 골을 더 넣었지만, 그는 88분 누누 고메스의 헤딩 만회골을 어시스트하며 자신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를 유종의 미로 장식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등번호 7번 유니폼을 후계자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게 넘겨주었다.
"황금세대"는 단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피구는 에우제비우 시대의 1966년 이후 포르투갈의 최고 월드컵 성적을 이끌었으며, UEFA 유로 2016 우승 전까지 포르투갈의 역대 최고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성적에 기여했다. 그는 127경기 출전 32골로 국가대표팀 경력을 마쳤으며, 2016년 6월까지 포르투갈 국가대표팀 최다 출장 기록을 보유했다. 그는 또한 포르투갈 국가대표팀 역대 득점 4위에 올라 있다.
5. 플레이 스타일
피구는 그의 세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자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윙어 중 한 명으로 널리 평가받는다. 전성기 시절 피구는 빠르고 우아하며 매우 기술적인 선수였다. 그는 뛰어난 볼 컨트롤, 가속력, 그리고 드리블 능력을 바탕으로 1대1 상황에서 수비수를 자주 제치고 돌파했다. 그는 상대를 제치기 위해 가위딛기와 같은 페인트 동작을 자주 사용했다. 그는 선천적으로 오른발잡이였지만, 양발을 모두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피구는 경력 초기에 주로 윙어로 기용되었으며, 오른쪽 측면에서 동료들에게 감아차는 크로스를 제공하여 수많은 도움을 기록했다. 또한 안쪽으로 파고들거나 왼쪽으로 이동하여 미드필더들과 연계하며 득점 기회를 창출하기도 했다. 그는 리오넬 메시에 이어 라리가 역대 최다 도움 2위를 기록했다.
나이가 들면서 속도와 기동력이 줄어들자, 그는 특히 인테르 시절에 플레이메이커나 공격형 미드필더로 기용되었다. 이 역할에서 그는 뛰어난 시야, 지능, 그리고 다양한 패스 능력을 발휘하며 탁월한 모습을 보였다. 주로 창조적인 역할을 수행했지만, 강력한 중거리 슈팅 능력과 프리킥 및 페널티킥의 정확성을 바탕으로 득점에도 기여했다. 축구 실력 외에도 피구는 선수 경력 내내 뛰어난 리더십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6. 미디어 및 기타 활동
루이스 피구는 축구 외적으로도 다양한 미디어 활동과 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6.1. 광고 및 비디오 게임

피구는 스포츠웨어 회사 나이키의 광고에 여러 차례 출연했다. 1996년에는 로마 원형 경기장을 배경으로 한 검투사 게임 형식의 나이키 광고 "선 vs 악"에 출연했다. 이 광고에서 그는 호나우두, 파올로 말디니, 이안 라이트, 에리크 캉토나, 파트리크 클라위버르트, 호르헤 캄포스 등 세계적인 축구 선수들과 함께 "아름다운 경기"를 악마 전사들로부터 수호했고, 캉토나가 공을 차 악을 물리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었다.
2002년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열린 2002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전 세계적으로 방영된 나이키의 "비밀 토너먼트" (나이키는 "스콜피온 KO"로 명명) 광고에도 출연했다. 테리 질리엄 감독이 연출한 이 광고에서 피구는 티에리 앙리, 호나우지뉴, 프란체스코 토티, 로베르토 카를로스, 일본의 스타 나카타 히데토시 등과 함께 등장했으며, 전 선수인 에리크 캉토나가 토너먼트의 "심판" 역할을 맡았다.
피구는 EA 스포츠의 FIFA 비디오 게임 시리즈에도 등장한다. 그는 FIFA 14에서 얼티밋 팀 레전드 선수로 선정되었다. 2015년, 아케이드 게임 회사 코나미는 피구가 자사의 축구 비디오 게임 프로 에볼루션 사커 2016에 새로운 마이클럽 레전드 중 한 명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18년에는 FIFA 19의 얼티밋 팀 아이콘으로 추가되었다. 그는 또한 2018년 월드컵 조 추첨 기간 동안 하미드 에스틸리, 전 함부르크 선수 메흐디 마다비키아와 함께 이란의 TV 프로그램인 나바드 TV에 출연하기도 했다.
2022년 8월, 넷플릭스는 피구의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의 이적을 다룬 다큐멘터리 엘 카소 피구 (The Figo Affair)를 공개했다.
6.2. FIFA 회장 선거 출마
2015년 1월 28일, 피구는 당시 FIFA 회장이었던 제프 블라터에 맞서 FIFA 회장직에 출마할 의사를 밝혔다. 그의 출마는 주제 모리뉴와 데이비드 베컴 등의 지지를 받았다. 피구는 자신의 공약에서 월드컵 본선 참가국을 48개국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지지하고, 풀뿌리 축구와 각국 축구 협회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블라터와 다른 두 후보인 미하얼 판 프라흐 및 알리 요르단공에 비해 외부인으로 평가받던 피구는 5월 21일 선거 운동에서 철수했다. 그는 "절대 권력을 얻고 싶지 않다"고 철수 이유를 밝혔다.
6.3. 사업 및 자선 활동
피구는 결핵 퇴치 운동인 스톱 TB 파트너십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인테르나치오날레와 긴밀히 협력하며 유럽 전역에서 클럽의 홍보대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인테르나치오날레가 운영하는 자선 프로젝트인 인테르 캠퍼스의 이사회 멤버이기도 하다.
2003년, 피구는 포르투갈에 '루이스 피구 재단'을 설립했다. 리스본에 본부를 둔 이 자선 재단은 특수 교육이 필요한 아동과 빈곤에 시달리는 아동들을 지원한다.
그는 동향인 포르투갈 국가대표팀 전 감독이자 전 청소년 팀 감독인 카를루스 케이로스와 함께 2005-06 시즌 A1 그랑프리에서 포르투갈 A1 팀의 공동 지분 소유자였다.
루이스 피구는 호텔, 패션, 요식업, 광업, 와인 분야에서도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포르투갈 알가르브 지역의 빌라모라에 있는 고급 바와 카르보에이루에 있는 호텔의 공동 소유주이다. 2010년, 축구 선수 은퇴 1년 후 그는 세네갈 수도 다카르에서 열린 국제 광업 박람회에 참석했고, 이때 광업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알마다에 기반을 둔 '다마시 에셋'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사를 통해 그는 연간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그의 아내가 이 회사의 파트너이다.
피구는 프로 축구 산업을 위한 사설 회원 네트워킹 사이트인 '네트워크90'의 설립자이다.
7. 개인 생활

피구는 스웨덴 모델 헬렌 스베딘과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세 딸이 있다: 다니엘라 (1999년생), 마르티나 (2002년생), 그리고 스텔라 (2004년생). 피구 가족은 스웨덴 솔레프테오 근교에 집을 소유하고 있다.
8. 경력 통계
루이스 피구의 클럽 및 국가대표팀 경력 통계는 다음과 같다.
8.1. 클럽 통계
| 클럽 | 시즌 | 리그 | 컵 | 유럽 | 기타 | 합계 | ||||||
|---|---|---|---|---|---|---|---|---|---|---|---|---|
| 디비전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출장 | 골 | ||
| 스포르팅 CP | 1989-90 | 프리메이라 디비상 | 3 | 0 | - | - | - | 3 | 0 | |||
| 1990-91 | 프리메이라 디비상 | 0 | 0 | - | - | - | 0 | 0 | ||||
| 1991-92 | 프리메이라 디비상 | 34 | 1 | 2 | 0 | 2 | 0 | - | 38 | 1 | ||
| 1992-93 | 프리메이라 디비상 | 32 | 0 | 5 | 0 | 2 | 0 | - | 39 | 0 | ||
| 1993-94 | 프리메이라 디비상 | 31 | 8 | 6 | 3 | 5 | 0 | - | 42 | 11 | ||
| 1994-95 | 프리메이라 디비상 | 29 | 7 | 5 | 4 | 2 | 0 | - | 36 | 11 | ||
| 합계 | 129 | 16 | 18 | 7 | 11 | 0 | - | 158 | 23 | |||
| 바르셀로나 | 1995-96 | 라리가 | 35 | 5 | 7 | 0 | 10 | 3 | - | 52 | 8 | |
| 1996-97 | 라리가 | 36 | 4 | 5 | 3 | 8 | 1 | 1 | 0 | 50 | 8 | |
| 1997-98 | 라리가 | 35 | 5 | 6 | 1 | 7 | 1 | 3 | 0 | 51 | 7 | |
| 1998-99 | 라리가 | 34 | 7 | 4 | 0 | 6 | 1 | 1 | 0 | 45 | 8 | |
| 1999-2000 | 라리가 | 32 | 9 | 4 | 0 | 13 | 5 | 2 | 0 | 51 | 14 | |
| 합계 | 172 | 30 | 26 | 4 | 44 | 11 | 7 | 0 | 249 | 45 | ||
| 레알 마드리드 | 2000-01 | 라리가 | 34 | 9 | 0 | 0 | 14 | 5 | 2 | 0 | 50 | 14 |
| 2001-02 | 라리가 | 28 | 7 | 6 | 1 | 11 | 3 | 2 | 0 | 47 | 11 | |
| 2002-03 | 라리가 | 33 | 10 | 1 | 0 | 15 | 2 | 2 | 0 | 51 | 12 | |
| 2003-04 | 라리가 | 36 | 9 | 6 | 2 | 10 | 2 | 2 | 1 | 54 | 14 | |
| 2004-05 | 라리가 | 33 | 3 | 0 | 0 | 10 | 4 | - | 43 | 7 | ||
| 합계 | 164 | 38 | 13 | 3 | 60 | 16 | 8 | 1 | 245 | 58 | ||
| 인테르나치오날레 | 2005-06 | 세리에 A | 34 | 5 | 3 | 0 | 8 | 1 | - | 45 | 6 | |
| 2006-07 | 세리에 A | 32 | 2 | 7 | 0 | 7 | 0 | 1 | 1 | 47 | 3 | |
| 2007-08 | 세리에 A | 17 | 1 | 1 | 0 | 3 | 0 | 1 | 0 | 22 | 1 | |
| 2008-09 | 세리에 A | 22 | 1 | 0 | 0 | 3 | 0 | 1 | 0 | 26 | 1 | |
| 합계 | 105 | 9 | 11 | 0 | 21 | 1 | 3 | 1 | 140 | 11 | ||
| 커리어 총합 | 570 | 93 | 68 | 14 | 136 | 28 | 18 | 2 | 792 | 137 | ||
8.2. 국가대표팀 통계
|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장 | 골 |
|---|---|---|---|
| 포르투갈 | 1991 | 3 | 0 |
| 1992 | 7 | 1 | |
| 1993 | 5 | 0 | |
| 1994 | 5 | 2 | |
| 1995 | 6 | 1 | |
| 1996 | 9 | 2 | |
| 1997 | 7 | 2 | |
| 1998 | 6 | 0 | |
| 1999 | 9 | 4 | |
| 2000 | 13 | 6 | |
| 2001 | 9 | 9 | |
| 2002 | 10 | 0 | |
| 2003 | 10 | 3 | |
| 2004 | 11 | 1 | |
| 2005 | 7 | 0 | |
| 2006 | 10 | 1 | |
| 합계 | 127 | 32 | |
아래는 루이스 피구의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이다. 점수에서 왼쪽의 점수가 포르투갈의 점수이다.
| # | 날짜 | 장소 | 상대 | 점수 | 결과 | 대회 |
|---|---|---|---|---|---|---|
| 1 | 1992년 11월 11일 | 스타드 드 파리, 파리, 프랑스 | 불가리아 | 1-1 | 2-1 | 친선경기 |
| 2 | 1994년 10월 9일 | 다우가바 경기장, 리가, 라트비아 | 라트비아 | 3-0 | 3-1 | UEFA 유로 1996 예선 |
| 3 | 1994년 11월 13일 | 이스타디우 조제 알발라드, 리스본, 포르투갈 | 오스트리아 | 1-0 | 1-0 | UEFA 유로 1996 예선 |
| 4 | 1995년 6월 3일 |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포르투갈 | 라트비아 | 1-0 | 3-2 | UEFA 유로 1996 예선 |
| 5 | 1996년 6월 19일 | 시티 그라운드, 노팅엄, 잉글랜드 | 크로아티아 | 1-0 | 3-0 | UEFA 유로 1996 |
| 6 | 1996년 10월 9일 | 스타디우미 체말 스타파, 티라나, 알바니아 | 알바니아 | 1-0 | 3-0 | 1998년 FIFA 월드컵 예선 |
| 7 | 1997년 6월 7일 |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포르투갈 | 알바니아 | 2-0 | 2-0 | 1998년 FIFA 월드컵 예선 |
| 8 | 1997년 8월 20일 | 이스타디우 두 본핑, 세투발, 포르투갈 | 아르메니아 | 2-0 | 3-1 | 1998년 FIFA 월드컵 예선 |
| 9 | 1999년 3월 31일 | 라인파르크 슈타디온, 파두츠, 리히텐슈타인 | 리히텐슈타인 | 2-0 | 5-0 | UEFA 유로 2000 예선 |
| 10 | 1999년 8월 18일 | 이스타디우 나시오날, 리스본, 포르투갈 | 안도라 | 3-0 | 4-0 | 친선경기 |
| 11 | 1999년 9월 4일 | 토피크 바흐라모프 경기장, 바쿠, 아제르바이잔 | 아제르바이잔 | 1-1 | 1-1 | UEFA 유로 2000 예선 |
| 12 | 1999년 9월 8일 | 스타디오눌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루마니아 | 루마니아 | 1-1 | 1-1 | UEFA 유로 2000 예선 |
| 13 | 2000년 3월 29일 | 이스타디우 Dr. 마갈량이스 페소아, 레이리아, 포르투갈 | 덴마크 | 2-1 | 2-1 | 친선경기 |
| 14 | 2000년 6월 2일 | 이스타디우 무니시팔 드 샤베스, 샤베스, 포르투갈 | 웨일스 | 1-0 | 3-0 | 친선경기 |
| 15 | 2000년 6월 12일 | 필립스 스타디온, 에인트호번, 네덜란드 | 잉글랜드 | 1-2 | 3-2 | UEFA 유로 2000 |
| 16 | 2000년 8월 16일 | 이스타디우 두 폰텔루, 비제우, 포르투갈 | 리투아니아 | 1-0 | 5-1 | 친선경기 |
| 17 | 2000년 9월 3일 | 카드리오르그 경기장, 탈린, 에스토니아 | 에스토니아 | 2-0 | 3-1 | 2002년 FIFA 월드컵 예선 |
| 18 | 2000년 11월 15일 | 이스타디우 프리메이루 드 마이우, 브라가, 포르투갈 | 이스라엘 | 1-0 | 2-1 | 친선경기 |
| 19 | 2001년 2월 28일 | 이스타디우 두스 바헤이루스, 푼샬, 포르투갈 | 안도라 | 2-0 | 3-0 | 2002년 FIFA 월드컵 예선 |
| 20 | 3-0 | |||||
| 21 | 2001년 3월 28일 | 이스타디우 다스 안타스, 포르투, 포르투갈 | 네덜란드 | 2-2 | 2-2 | 2002년 FIFA 월드컵 예선 |
| 22 | 2001년 6월 2일 | 랜스던 로드, 더블린, 아일랜드 | 아일랜드 | 1-1 | 1-1 | 2002년 FIFA 월드컵 예선 |
| 23 | 2001년 8월 15일 | 이스타디우 드 상 루이스, 파루, 포르투갈 | 몰도바 | 1-0 | 3-0 | 친선경기 |
| 24 | 2-0 | |||||
| 25 | 3-0 | |||||
| 26 | 2001년 10월 6일 | 이스타디우 다 루스, 리스본, 포르투갈 | 에스토니아 | 5-0 | 5-0 | 2002년 FIFA 월드컵 예선 |
| 27 | 2001년 11월 14일 | 이스타디우 조제 알발라드, 리스본, 포르투갈 | 앙골라 | 1-1 | 5-1 | 친선경기 |
| 28 | 2003년 4월 2일 | 스타드 올랭피크 드 라 퐁테즈, 로잔, 스위스 | 북마케도니아 | 1-0 | 1-0 | 친선경기 |
| 29 | 2003년 10월 11일 | 이스타디우 두 헤스텔루, 리스본, 포르투갈 | 알바니아 | 1-0 | 5-3 | 친선경기 |
| 30 | 2003년 11월 19일 | 이스타디우 Dr. 마갈량이스 페소아, 레이리아, 포르투갈 | 쿠웨이트 | 3-0 | 8-0 | 친선경기 |
| 31 | 2004년 5월 29일 | 이스타디우 무니시팔 드 아게다, 아게다, 포르투갈 | 룩셈부르크 | 1-0 | 3-0 | 친선경기 |
| 32 | 2006년 6월 3일 | 스타드 생-싱포리앙, 메스, 프랑스 | 룩셈부르크 | 3-0 | 3-0 | 친선경기 |
9. 수상 경력
루이스 피구는 선수 경력을 통해 수많은 클럽 및 국가대표팀 타이틀과 개인상을 획득했다.
9.1. 클럽별 수상
- 스포르팅 CP
- 타사 드 포르투갈: 1994-95
- FC 바르셀로나
- 라리가: 1997-98, 1998-99
- 코파 델 레이: 1996-97, 1997-98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96
- UEFA 컵위너스컵: 1996-97
- UEFA 슈퍼컵: 1997
- 레알 마드리드 CF
- 라리가: 2000-01, 2002-03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1, 2003
- UEFA 챔피언스리그: 2001-02
- UEFA 슈퍼컵: 2002
- 인터콘티넨털컵: 2002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세리에 A: 2005-06, 2006-07, 2007-08, 2008-09
- 코파 이탈리아: 2005-06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2006, 2008
9.2. 국가대표팀 수상
- UEFA U-17 축구 선수권 대회: 1989
- FIFA U-20 월드컵: 1991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 2004
9.3. 개인 수상
- UEFA U-21 유럽 선수권 대회 골든 플레이어: 1994
- 포르투갈 골든볼: 1994
- 스포르팅 CP 올해의 선수: 1994
- 포르투갈 올해의 축구 선수: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 ESM 올해의 팀: 1997-98, 1999-00
- 라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 1999, 2000, 2001
- 라리가 최다 도움: 1996-97, 1998-99
- 돈 발론 최우수 외국인 선수: 1999
-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토너먼트 팀: 2000, 2004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2000
- 발롱도르: 2000
- 2000년 1위, 1999년 5위, 2001년 6위, 2002년 19위, 2004년 22위
- FIFA 올해의 선수: 2001
- 2001년 1위, 2000년 2위, 1999년 6위
- UEFA 올해의 팀: 2003
- UEFA 챔피언스리그 최다 도움: 2004-05
- FIFA 월드컵 올스타 팀: 2006
- 인테르나치오날레 올해의 선수: 2006
- FIFA 100
- 골든풋: 2011 (축구 전설 부문)
- IFFHS 레전드
훈장
엔히크 왕자 기사단 지휘관 약장 엔히크 왕자 기사단 지휘관
무결점안의 빌라 비수사 기사단 기사 약장 무결점안의 빌라 비수사 기사단 기사 (브라간사 가문)
10. 유산 및 평가
루이스 피구는 그의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이자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윙어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창조성, 뛰어난 드리블 기술, 그리고 경기장에서 보여준 리더십은 그를 포르투갈 축구의 "황금세대"의 상징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비록 "황금세대"는 주요 국제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지만, 피구는 1966년 에우제비우 시대 이후 포르투갈의 최고 월드컵 성적과 UEFA 유로 2016 우승 전까지의 최고 유럽 선수권 대회 성적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큰 논란은 2000년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의 이적이었다. 이 "금단의 이적"은 당시 축구 역사상 최고 이적료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깊은 배신감을 안겨주며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캄 노우에서 그에게 쏟아진 야유와 투척물, 심지어 돼지 머리까지 날아든 사건은 축구 라이벌리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다. 피구는 이 이적이 돈 때문이 아니라 클럽으로부터의 평가 부족 때문이었다고 해명했지만, 바르셀로나 팬들의 적대감은 은퇴 후에도 지속되어 UEFA 레전드 매치에서 바르셀로나가 그의 출전을 거부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피구는 라리가 통산 최다 도움 2위 기록, 발롱도르 및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등 개인적인 업적과 함께 소속 클럽에서 수많은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임을 입증했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기술적인 우아함과 효율성을 겸비했으며, 나이가 들면서도 플레이메이커로서의 시야와 패스 능력을 발전시켜 끊임없이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피구는 축구계에 미친 영향과 그의 위상으로 인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윙어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