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디트리히 후고 헤르만 폰 콜티츠는 1894년 11월 9일, 당시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 주에 속했던 그레플리히 비제(Gräflich Wiese, 현재 폴란드 워운카프루드니츠카)에 위치한 가문의 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모라비아-슐레지엔 지역의 귀족 가문인 제들니츠키 폰 콜티츠 가문으로, 오랜 군 복무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한스 폰 콜티츠(1865~1935)는 프로이센 육군 소령이었고, 어머니는 게르트루트 폰 로젠베르크였다. 그에게는 한스와 욥이라는 두 명의 형제가 있었다. 그의 삼촌 헤르만 폰 콜티츠는 1907년부터 1920년까지 노이슈타트 O.S. 지역의 총독을 지냈다. 그의 가족은 프루드니크와 니미스와비체 사이에 숲을 소유하고 있었다.
1907년, 콜티츠는 드레스덴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 군 경력
콜티츠는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독일군의 주요 작전에 참여하며 경력을 쌓았다.
2.1.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몇 달 전인 1914년 3월, 콜티츠는 작센 왕국 육군 소속 제8 보병 연대 "프린츠 요한 게오르크 107호"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했다. 그의 부대는 서부 전선에서 복무했으며, 제1차 마른 전투, 제1차 이프르 전투, 솜 전투, 1914년 생캉탱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입대 1년 만에 소위로 진급했으며, 연대 제3대대의 부관이 되었다.
2.2.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콜티츠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방군에 남아 독일군의 재건을 도왔다. 1929년에는 기병 대위로 진급했고, 졸타우의 승마 학교로 전근하여 국내외 승마 대회에서 성공적으로 활약했다. 1935년 8월에는 소령으로 진급했으며, 1937년 2월에는 제16 보병 연대 "올덴부르크" 제3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연대는 제22 공수사단의 일부였다. 1938년 4월에는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에도 참여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콜티츠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다양한 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3.1.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8월 18일, 콜티츠는 폴란드 침공 준비의 일환인 '백색 작전'을 위해 자간에 주둔한 제16 공수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우치 전투 이후인 9월 12일, 그의 연대는 융커스 Ju 52 수송기를 통해 우치 공항으로 수송되었다. 9월 15일, 연대는 일시적으로 제10 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콜티츠의 부대는 브주라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 전투에서 그는 부상을 입었다. 9월 19일에는 폴란드군 3,000명과 다량의 군사 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2.3.2. 네덜란드 전투

1940년 5월, 콜티츠는 로테르담 전투에 참전하여 공수 작전을 통해 도시의 주요 교량들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제16 공수 연대 제3대대장으로서 그는 발하번 공군기지에 착륙한 후 병력을 재정비하고 로테르담의 교량으로 진격했다. 네덜란드군은 도시 남부에 많은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으나, 정육점 주인과 제빵사, 그리고 비행장에서 철수한 소총병 등 약 9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부대가 독일군 진격로 상의 가옥에 숨어 매복 공격을 감행했다. 양측 모두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독일군은 대전차포를 동원하여 네덜란드군의 저항을 돌파했다. 이후 독일군은 교량으로 진격했고, 제16 공수 연대 제9중대 주력 부대가 뒤를 따랐다.
한편, 제16 공수 연대 제3대대 본부는 광장에서 네덜란드군과 조우했다. 콜티츠 중령의 부관이 네덜란드군 진지에 대한 공격을 지휘했으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독일군이 네덜란드군 거점을 우회하여 교량으로 향하는 다른 경로를 모색하던 중, 부두를 따라 형성된 돌파구를 발견했다. 오전 9시경, 제3대대 주력 부대가 교량 방어 병력과 접촉했다.
네덜란드군이 도시 통제권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독일군은 지속적인 공격에 시달리며 양측 모두 사상자가 증가했다. 독일군 지휘부는 로테르담 중심부에 고립된 500여 명의 병력 상황에 대해 점점 더 우려하게 되었다. 쿠르트 슈투덴트 중장은 콜티츠 중령에게 작전 상황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북부 포위망에서 병력을 철수시킬 수 있도록 허락했다.

백커 대위가 콜티츠 중령의 호위 하에 마스 강 교량으로 돌아오던 중, 남쪽에서 독일 폭격기들이 나타났다. 슈미트 장군과 합류한 후비키 및 슈투덴트 장군은 비행기를 보고 "맙소사, 이건 재앙이 될 거야!"라고 외쳤다. 노르더아일란트의 독일 병사들은 대부분 양측 지휘관들 사이에 벌어지는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공황에 빠졌고, 자신들의 폭격기에게 공격받을 것을 두려워했다. 콜티츠는 붉은 조명탄을 발사하라고 명령했으나, 상공의 첫 세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했을 때 붉은 조명탄은 연기에 가려졌다. 다음 24대의 남부 편대 폭격기들은 폭탄창을 닫고 서쪽으로 선회했다.
로테르담 폭격 이후, 로테르담 주둔 네덜란드군의 항복 조건을 논의하던 중 쿠르트 슈투덴트 중장은 머리에 총상을 입었다. 슈투덴트 장군은 부대원들에게 매우 인기가 많았고, 독일군이 보복으로 항복하는 네덜란드 장교들을 처형하려 하자 콜티츠가 개입하여 학살을 막을 수 있었다. 로테르담 공격에서의 그의 활약으로 그는 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같은 해 9월, 그는 연대 지휘권을 부여받았고, 이듬해 봄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2.3.3. 동부 전선 (1941-1943)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될 무렵, 콜티츠의 연대는 루마니아에 주둔하며 남부 집단군의 일원으로 우크라이나로 진격했다. 그의 부대는 베사라비아를 거쳐 1941년 8월 30일 드네프르강을 건넜고, 10월 말에는 크림반도까지 진격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제11군 소속으로, 콜티츠의 연대는 세바스토폴 공방전에 참전했다. 이 공방전은 콜티츠의 연대에게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으며, 병력은 4,800명에서 349명으로 급감했다. 1941년 말에서 1942년 초의 혹독한 겨울 동안, 콜티츠는 심혈관 질환으로 고통받았고 만성 폐쇄성 폐질환 증상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소장으로 진급한 그는 1942년 제260 보병사단장 대행을 맡았다. 이듬해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11 기갑사단 지휘권을 부여받았고, 이 사단을 이끌고 쿠르스크 전투에 참전했다. 또한 1943년 5월 6일부터 8월 30일까지, 그리고 1943년 9월 30일부터 10월 21일까지 제48 기갑군단 사령관을 역임했다.
2.3.4. 서부 전선 (1944)
1944년 3월, 콜티츠는 이탈리아 전구로 전속되어 제76 기갑군단 부사령관을 맡았고, 안치오 전투와 몬테카시노 전투에 참여했다. 1944년 6월 서부 전선으로 전속된 그는 제84 군단 지휘권을 맡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연합군의 돌파에 맞서 싸웠다.
3. 파리 군정 장관


1944년 8월 1일, 콜티츠는 보병대장으로 진급했으며, 8월 7일에는 파리의 군정 장관으로 임명되어 "포위된 요새의 사령관"이 되었다. 8월 8일 파리에 도착한 그는 르 뫼리스 호텔에 사령부를 설치했으나, 가용 자원이 거의 없었고 병력도 대부분 의욕 없는 징집병 2만 명에 불과했다.
1944년 8월 15일, 파리 경찰이 파업에 돌입했고, 8월 19일에는 프랑스 공산당이 주도하는 총궐기가 뒤따랐다. 콜티츠 지휘 하의 독일군 수비대는 저항했으나 봉기를 진압하기에는 병력이 너무 적었고, 많은 공공건물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도로가 봉쇄되고 독일군 차량과 통신망이 손상되었다. 스웨덴 파리 총영사 라울 노르들링의 도움으로 8월 20일 봉기군과 휴전이 중재되었으나, 많은 프랑스 국내군 저항 그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음 날에도 일련의 교전이 계속되었다.
8월 23일, 히틀러는 "파리는 폐허가 된 상태로만 적의 손에 넘어가야 한다"(Paris darf nicht oder nur als Trümmerfeld in die Hand des Feindes fallen독일어)는 명령을 전보로 내렸다. 이후 여러 교량과 기념물에 폭발물이 설치되었고, 이는 나중에 해체되어야 했다.
다음 날 새벽인 8월 24일, 연합군이 파리 외곽에 도착하자 콜티츠는 도시를 파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8월 25일, 그는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아닌 자유 프랑스 임시정부 대표들에게 독일군 수비대를 항복시켰다. 히틀러의 지시가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콜티츠는 종종 "파리의 구세주"로 불린다.

히틀러는 파괴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8월 26일 루프트바페는 소이탄 공습을 감행했으며, 벨기에에서 발사된 V2 로켓은 광범위한 피해를 입혔다.
항복으로 이어진 사건들은 콜티츠 장군이 쓴 1951년 회고록(1960년대 프랑스어판 세바스토폴에서 파리까지: 병사 중의 병사로 출간)의 주제가 되었다. 이 회고록에서 그는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고 파리를 구한 공로를 주장했는데, 그 이유로 군사적 무용성, 프랑스 수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정, 그리고 히틀러가 그 시점에는 이미 미쳐버렸다는 자신의 믿음을 들었다. 그의 이러한 사건 버전은 1965년 책과 1966년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의 기반이 되었으며, 많은 자료에서 사실로 반복되었다. 그러나 도시를 파괴하지 않은 그의 동기는 무의미하고 파괴적인 제스처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항복 후 더 나은 대우를 보장받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회고록에는 또한 8월 24일 밤 노르들링과의 밤샘 회의를 통해 도시를 살리기로 설득되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 사건은 2014년 영화 디플로머시에서 노르들링이 콜티츠를 설득하여 그의 가족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대가로 도시를 살리도록 하는 장면으로 묘사되었지만, 이는 그의 회고록 출간 이후 일부 신문 기사에서 사실로 보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확증도 부족하다. 그는 노르들링과 시의회 의장 피에르 테탱제와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는데, 이는 유혈 사태와 도시 피해를 제한하고 일부 정치범을 석방하기 위함이었다.
4. 개인사
콜티츠는 1929년 8월 20일 기병대장 오토 폰 가르니에의 딸인 후베르타(1902~2001)와 프루드니크에서 결혼했다. 부부는 두 딸 마리아 안젤리카(1930~2016)와 안나 바르바라(1936년생), 그리고 아들 티모(1944년생)를 두었다. 그의 아들 티모는 2016년 프루드니크를 방문하여 콜티츠의 출생지였던 워운카프루드니츠카 성을 되찾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5. 포로 생활 및 전후

콜티츠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런던 북부의 트렌트 파크에서 다른 고위 독일 장교들과 함께 구금되었다. 이후 그는 미시시피주 캠프 클린턴으로 이송되었다. 그에게는 구체적인 혐의가 제기되지 않았으며, 1947년에 석방되었다. 1956년, 그는 파리의 르 뫼리스 호텔에 있는 자신의 전시 사령부를 방문했다. 호텔의 오랜 바텐더는 짧고 통통하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올바른 자세"를 가진 남자가 마치 멍한 상태로 바를 돌아다니는 것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호텔 지배인이 바에서 그를 만난 후, 그는 자신의 옛 방을 보고 싶다고 요청했다. 옛 숙소를 15분도 채 보지 않고 콜티츠는 지배인의 샴페인 제안을 거절하고 호텔을 떠나 피에르 테탱제를 만났다.

콜티츠는 1966년 11월 5일 바덴바덴 시립 병원에서 오랜 전쟁 질환(폐기종)으로 사망했다. 나흘 뒤, 그는 바덴바덴 시립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바덴바덴 군 사령관 바그너 대령, 라비넬 대령, 오메종 대령 등 고위 프랑스 장교들이 참석했다. 바덴바덴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 내 프랑스군 사령부였다.
6. 논란 및 평가
콜티츠의 파리에서의 결정과 전쟁 범죄 가담 의혹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6.1. "파리의 구세주" 서사
콜티츠는 히틀러의 파리 파괴 명령을 거부하고 도시를 구했다는 이유로 "파리의 구세주"라는 유명한 평가를 받았다. 이는 그의 회고록과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결정이 군사적으로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고, 파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정, 그리고 히틀러가 이미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콜티츠가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파리 시내에 대한 통제력이 거의 없었으며,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병력이나 수단(공군, 포병 부족, 소수의 전차만 보유)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명령을 따르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항복 후 자신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자기 보존의 동기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사령부 방어 태세를 굳건히 했으며, 항복 문서에 서명한 것도 포로가 된 이후였다.
스웨덴 총영사 라울 노르들링과의 협상이 파리 구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노르들링이 콜티츠를 설득하여 그의 가족 보호를 약속했다는 영화 디플로머시의 묘사는 확증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티츠가 노르들링 및 파리 시의회 의장 피에르 테탱제와 여러 차례 회담을 통해 유혈 사태와 도시 피해를 줄이려 노력하고 일부 정치범을 석방시킨 것은 사실로 인정된다.
6.2. 전쟁 범죄 가담 의혹
콜티츠는 나치 독일의 전쟁 범죄, 특히 유대인 학살에 대한 가담 또는 인지 여부와 관련하여 심각한 의혹에 직면했다. 그가 트렌트 파크에 억류되어 있을 때 영국 정보기관에 의해 비밀리에 녹음된 대화 내용이 공개되면서 이러한 의혹이 불거졌다.
1944년 8월 29일자 녹취록에서 콜티츠는 "내가 수행한 최악의 임무는 유대인 청산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임무를 철저하고 완벽하게 수행했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랜들 핸슨과 같은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발언에 대한 추가적인 확증은 부족하지만, 당시 많은 독일 장군들이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콜티츠가 유대인 학살을 명령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지적한다. 핸슨은 "콜티츠가 그의 나이, 계급, 직업을 고려할 때 예상할 수 있는, 반성하지 않는 반유대주의자였다고 믿는 것이 더 쉽다"고 언급했다.
2008년 히스토리 채널의 5부작 다큐멘터리 국방군 중 "범죄" 에피소드에서는 콜티츠가 1944년 10월에 다음과 같이 말한 내용이 인용되었다.
우리는 모두 죄를 공유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따랐고, 나치들을 반쯤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지옥에나 가라, 너희들의 어리석은 헛소리"라고 말하는 대신 말이다. 나는 내 병사들을 이 쓰레기를 믿도록 오도했다. 나는 내 자신에게 극도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마도 우리는 이 무식한 짐승들(히틀러와 그를 지지하는 나치 당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보다 훨씬 더 큰 죄를 지었을 것이다.
적어도 콜티츠는 나치 정권이 유대인에 대한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나치군이 세바스토폴에서 유대인 3만 6천 명을 총살했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다만, 콜티츠의 아들 티모 폰 콜티츠는 런던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자료를 조사한 결과, 해당 녹취록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혹과 증언들은 콜티츠의 역사적 평가에서 인권과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6.3. 역사적 재평가
콜티츠의 삶 전반에 대한 후대의 역사적 재평가는 파리에서의 결정과 전쟁 범죄 관련 의혹 사이에서 복잡하게 전개된다. 한편으로는 파리를 파괴로부터 구한 인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치 정권의 군인으로서 전쟁 범죄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끊이지 않는다. 학계에서는 그의 행동 동기, 파리에서의 실제 통제력, 그리고 전쟁 범죄 가담 여부에 대해 지속적인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한 인물의 행동이 지닌 다면성과 역사적 맥락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7. 수상 및 서훈
콜티츠는 군 복무 중 다음과 같은 주요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 계급 | 날짜 |
|---|---|
| 사관후보생 (Fähnrich) | 1914년 3월 6일 |
| 소위 (Leutnant) | 1914년 10월 16일 |
| 중위 (Oberleutnant) | 1924년 11월 1일 |
| 기병대위 (Rittmeister) | 1929년 4월 1일 |
| 소령 (Major) | 1935년 8월 1일 |
| 중령 (Oberstleutnant) | 1938년 4월 1일 |
| 대령 (Oberst) | 1941년 4월 1일 |
| 소장 (Generalmajor) | 1942년 9월 1일 |
| 중장 (Generalleutnant) | 1943년 3월 1일 |
| 보병대장 (General der Infanterie) | 1944년 8월 1일 |
- 철십자 훈장
- 1급 철십자 훈장 (2회)
- 2급 철십자 훈장 (2회)
- 기사철십자훈장 (1940년 5월 18일)
- 독일 십자장 (1942년 2월 8일)
- 제1차 세계 대전 명예 십자장
- 성 헨리 군사 훈장 (1917년 12월 26일)
- 루마니아 성성 훈장 (1943년)
- 전상장
- 은장 (1918년)
- 금장 (1943년 3월 25일)
- 보병 돌격장 (제2차 세계 대전)
- 알베르트 훈장 (작센)
- 작센 시민 훈장
- 미하일 용감 훈장 (루마니아, 1942년 10월 6일)
- 주데텐란트 기념 메달 (1938년)
- 크림 방어장 (1942년 7월)
8. 영향 및 대중문화
콜티츠의 삶과 특히 파리 해방과 관련된 그의 결정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으로 재현되었다.
-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1966년): 게르트 프뢰베가 콜티츠 역을 맡은 프랑스-미국 합작 영화이다. 이 영화는 콜티츠가 사망할 무렵 유럽과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 디플로머시 (2014년): 폴커 슐렌도르프 감독의 프랑스-독일 합작 영화로, 시릴 젤리의 연극 디플로마티를 원작으로 한다. 파리 해방 전날 밤 르 뫼리스 호텔의 사령부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묘사하며, 니엘스 아레스트뤼프가 콜티츠 역을 연기했다. 이 영화는 파리 사수를 명령받고 고뇌하는 콜티츠와 그를 설득하여 파리 파괴를 막으려는 스웨덴 총영사 라울 노르들링 간의 협상을 그린다.
- 죽음의 비밀: 히틀러의 병사들을 도청하다 (Secrets of the Dead: Bugging Hitler's Soldiers): PBS 다큐멘터리로, MI19가 독일 고위 전쟁 포로들을 어떻게 감시했는지 조사한다.
- 압박 속에서 (Pod presją) (2015년): 다그마라 스폴니아크 감독의 폴란드 다큐멘터리이다.
9. 관련 항목
- 파리 해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