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background
도너번 베일리는 어린 시절 자메이카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았고, 이후 캐나다로 이주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육상 경력을 시작하기 전에는 다른 스포츠 활동과 사회 활동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1.1. Childhood and education
도너번 앤서니 베일리는 1967년 12월 16일 자메이카 맨체스터 교구에서 조지 베일리와 데이지 베일리의 다섯 아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마운트 올리벳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부터 가족이 키우는 닭, 염소, 돼지를 돌보는 일을 도왔다. 어린 시절부터 달리기에 재능을 보였으며, 그의 전 교사인 클라리스 램버트는 "그는 1학년 때부터 운동 실력을 보여주었다. 항상 경주에서 1등을 했다"고 회상했다. 캐나다로 이주하기 전, 베일리는 자메이카 맨체스터의 녹스 칼리지에서 1년간 ISSA 챔피언십에 참가했다.
베일리는 12세에 캐나다로 이주하여 온타리오주 오크빌의 퀸 엘리자베스 파크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농구를 했다. 고등학교 재학 중 그의 형인 오닐은 온타리오 주 멀리뛰기에서 4개의 주 타이틀을 획득했다. 베일리 또한 16세에 100m에서 10.65초를 기록할 정도로 매우 빨랐지만, 그의 주요 관심사는 농구였다. 1984년 6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베일리는 셰리든 칼리지에 입학하여 1986-1987학년도에 농구 선수로 활동했다. 그는 셰리든 칼리지에서 경영학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베일리는 의류 수입 및 수출 회사에서 부동산 및 마케팅 컨설턴트로 일했다.
1.2. Early career development
베일리는 1990년에 이르러서야 육상 선수로서 본격적인 경주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1990년 캐나다 육상 선수권 대회를 관전한 후, 그는 경쟁하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자신이 고등학교 때 이겼던 선수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주식 중개인으로 일하면서 100m 단거리 훈련을 파트타임으로 시작했다. 1991년에는 온타리오주 실내 선수권 대회 60m에서 우승했고, 1991년 팬아메리칸 게임에서는 캐나다 4x100m 계주팀의 마지막 주자로 나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1992년에는 전국 선수권 대회 100m에서 2위를 차지했다.
1993년부터 1994년까지 그는 페네르바체 육상팀 소속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1993년 전국 선수권 대회 100m에서 동메달, 200m에서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1994년 프랑코포니 경기 대회에서는 100m 은메달과 4x100m 계주 금메달을 따냈다. 또한 1994년 코먼웰스 게임 4x1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러한 국내 수준에서의 인상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93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4x100m 계주에서는 교체 선수로만 선발되었다. 당시 베일리의 고등학교 친구 글렌로이 길버트를 코치했던 미국인 코치 댄 파프는 베일리의 형편없는 자세와 체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상적인 성과에 감명받았다. 파프는 베일리에게 루이지애나 주립 대학교에서 자신 및 길버트와 함께 훈련할 것을 제안했고, 단 3개월의 훈련만으로 베일리는 100m 개인 최고 기록에서 0.3초를 단축했다. 이때 그가 기록한 10.03초는 캐나다 역사상 세 번째로 빠른 기록이었다.
2. Athletic career
도너번 베일리는 1995년 국제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육상계의 전설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마이클 존슨과의 세간의 이목을 끄는 대결과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의 활약을 이어갔다.
2.1. Breakthrough and first world titles (1995)
1995년 4월 22일, 베일리는 100m에서 9.99초를 기록하며 역사상 18번째로, 그리고 캐나다인으로는 두 번째로 합법적인 10초 벽을 돌파했다. 이 기록은 벤 존슨의 기록인 9.95초에 단 0.04초 부족한 기록이었다. 같은 해 7월, 그는 전국 선수권 대회에서 9.91초를 기록하며 벤 존슨의 캐나다 기록을 경신했고, 이 기록은 그 해 세계 최고 기록이 되어 그를 예테보리 세계 선수권 대회 100m 금메달 후보로 부상시켰다. 베일리는 이 대회에서 9.97초로 우승을 차지했고, 이어서 캐나다 4x100m 계주팀의 마지막 주자로 나서 캐나다 최초의 세계 선수권 금메달을 안겼다.
2.2. Olympic gold and world record (1996)
세계 선수권 타이틀을 획득한 베일리는 1996년 7월 애틀랜타 올림픽 챔피언십의 유력한 후보로 손꼽혔다. 올림픽을 앞두고 1996년 네바다주 리노에서 열린 대회에서 실내 50m 세계 기록을 5.56초로 경신했다. 이 기록은 1999년 모리스 그린이 다시 세웠지만, 세계 기록으로 공식 인정받지는 못했다.
베일리는 100m에서 세 번째 연속으로 전국 타이틀을 획득한 후 1996년 하계 올림픽에 캐나다 대표로 공식 선발되었다. 7월 27일, 매우 혼란스러운 출발에도 불구하고 베일리는 올림픽 100m 타이틀을 9.84초의 새로운 세계 기록으로 우승했다. 이 경주에서 그는 12.1 m/s의 최고 속도를 기록했으며, 이는 당시 인간이 기록한 가장 빠른 최고 속도였다. 많은 캐나다인들은 베일리의 승리가 벤 존슨의 도핑 이력 폭로 이후 실추되었던 캐나다 선수들의 이미지를 회복시켰다고 평가했다. 당시 베일리는 칼 루이스에 이어 100m의 모든 주요 타이틀(세계 챔피언, 올림픽 챔피언, 세계 기록 보유자)을 동시에 보유한 두 번째 선수였다. 6일 후, 그는 캐나다 팀의 마지막 주자로 나서 캐나다 최초의 올림픽 4x100m 타이틀을 37.69초의 캐나다 신기록으로 우승하며 100m/4x100m 더블을 다시 한번 달성했다.
2.3. Rivalry with Michael Johnson
1996년 하계 올림픽이 끝난 후, 미국 스포츠 캐스터 밥 코스타스는 200m 금메달리스트 마이클 존슨이 그의 200m 기록(19.32초)을 2로 나눈 값(9.66초)이 베일리의 100m 기록(9.84초)보다 짧기 때문에 존슨이 베일리보다 빠르다고 주장했다. 이는 존슨과 베일리 중 누가 진정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두 선수 간의 150m 경주로 진행되었다. 1997년 6월 1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에서 열린 이 대결에서 존슨이 햄스트링 부상을 주장하며 중간에 경기를 포기하면서 베일리가 승리했다.
2.4. World Championships and later career (1997-2001)
1997년 아테네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베일리는 100m 타이틀 방어에 나섰지만, 모리스 그린에게 패하여 9.91초로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캐나다 팀 동료들과 함께 4x100m 타이틀을 37.86초로 방어했으며, 이는 그 해 가장 빠른 기록이었다. 그 시즌의 마지막 경기 중 하나는 ISTAF 베를린 대회였다. 100m에서 2위를 차지한 후, 베일리는 칼 루이스의 선수 경력 마지막 경주였던 "드림 팀 II"의 4x100m 계주 첫 주자로 나섰다. 리로이 버렐이 두 번째 주자, 프랭키 프레더릭스가 세 번째 주자, 그리고 루이스가 마지막 주자로 나선 이 팀은 38.24초로 우승하며 대회 신기록을 세웠다.
1998년 굿윌 게임에서 베일리는 캐나다 4x100m 계주팀과 함께 38.23초로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98년 시즌 후 농구를 하던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었고, 이는 그의 육상 선수 경력의 사실상 종말을 알리는 시작점이 되었다.
1999년 위니펙에서 열린 1999년 팬아메리칸 게임에서 베일리는 캐나다 4x100m 계주팀과 함께 38.49초로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브라질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이 은메달은 8년 전인 1991년 팬아메리칸 게임 4x100m 계주에서 획득했던 그의 첫 국제 메달과 동률을 이루었으며, 그의 마지막 국제 메달이 되었다. 베일리는 1999년 세비야 세계 선수권 대회 4x100m 계주팀의 일원이었으나, 팀은 예선 라운드에서 실격 처리되었다.
그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두 번째 올림픽 출전을 시도했지만, 폐렴에 걸려 예선 라운드에서 중도 탈락했다. 베일리는 3차례의 세계 챔피언이자 2차례의 올림픽 챔피언으로서 2001년 에드먼턴 세계 선수권 대회 이후 육상에서 은퇴했다.
3. Post-retirement activities
은퇴 후 도너번 베일리는 스포츠계에서 자신의 경험을 활용하여 다양한 사업과 미디어 활동에 참여하며, 그의 뛰어난 업적에 대한 수많은 영예와 인정을 받았다.
3.1. Business and media career
선수 생활 은퇴 후, 베일리는 아마추어 선수들이 자신을 홍보하는 데 도움을 주는 'DBX 스포츠 매니지먼트'라는 자체 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온타리오주 오크빌에 스포츠 부상 클리닉을 개설했다.
그는 2008년 하계 올림픽부터 CBC 텔레비전의 육상 해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사인 볼트가 100m 경기 막판에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면 9.55초를 기록했을 수 있었다고 추정했다. 그는 2016년 하계 올림픽에서도 CBC의 육상 분석가로 복귀했다.
3.2. Honors and recognition
도너번 베일리는 2004년에 개인 자격으로, 2008년에는 1996년 하계 올림픽 4x100m 계주 팀의 일원으로 캐나다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두 차례 헌액되었다. 2005년에는 온타리오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2010년에는 캐나다 이민자 매거진이 수여하는 캐나다 상위 25인 이민자 상 수상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2016년에는 온타리오 훈장 회원으로 위촉되었으며, 2017년에는 캐나다 명예의 거리에서 그의 이름을 딴 별이 헌정되었다. 2022년에는 캐나다 훈장 장교로 임명되었다.
4. Personal life and controversies
도너번 베일리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정보는 제한적이지만, 그의 경력 후반에는 몇 가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4.1. Personal life
도너번 베일리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공개되지 않았다.
4.2. Controversies
2014년, 베일리는 2012년에 발생한 음주 운전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이는 베일리의 세 번째 운전 관련 사건이었다. 1998년에는 차를 콘크리트 전봇대에 들이받고 사고 미신고로 200 USD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2001년에는 토론토에서 시속 100 km/h 제한 도로에서 시속 200 km/h로 운전하여 975 USD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2018년에는 베일리가 그의 선수 신탁 자금인 375.00 만 USD 전체를 에어드 앤 벌리스 법률 사무소의 변호사 스튜어트 볼레퍼에게 맡겼고, 볼레퍼는 이 자금을 캐나다 정부가 탈세 계획으로 판단한 곳에 투자한 사실이 보도되었다. 베일리는 이 계획으로 인해 전체 금액을 잃었으나, 법원은 에어드 앤 벌리스의 과실로 인해 모든 미납 세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5. Records and achievements
도너번 베일리는 선수 경력 동안 여러 인상적인 기록을 세웠으며, 특히 100m에서 세계 기록을 수립하고 주요 국제 대회에서 다수의 메달을 획득하며 자신의 위상을 확립했다.
5.1. Personal bests
베일리의 개인 최고 기록은 다음과 같다.
5.2. Major competition results
도너번 베일리의 주요 국제 대회 성적은 다음과 같다.
년도 | 대회 | 장소 | 종목 | 결과 | 기록 |
---|---|---|---|---|---|
1995 |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 예테보리, 스웨덴 | 100m | 1위 | 9.97 |
1995 |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 예테보리, 스웨덴 | 4x100mR | 1위 | 38.31 |
1996 | 애틀랜타 올림픽 | 애틀랜타, 미국 | 100m | 1위 | 9.84 |
1996 | 애틀랜타 올림픽 | 애틀랜타, 미국 | 4x100mR | 1위 | 37.69 |
1997 |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 아테네, 그리스 | 100m | 2위 | 9.91 |
1997 |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 아테네, 그리스 | 4x100mR | 1위 | 37.86 |
1998 | 굿윌 게임 | 뉴욕주, 미국 | 4x100mR | 2위 | 38.23 |
1999 | 팬아메리칸 게임 | 위니펙, 캐나다 | 4x100mR | 2위 | 38.49 |
1999 |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 세비야, 스페인 | 4x100mR | 실격 | - |
2000 | 시드니 올림픽 | 시드니, 오스트레일리아 | 100m | 8위(예선) | 11.36 |
2001 |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 에드먼턴, 캐나다 | 100m | 6위(준결승) | 10.33 |
6. Legacy and evaluation
도너번 베일리는 캐나다 육상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그의 업적은 캐나다 스포츠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과 세계 신기록 수립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벤 존슨의 약물 복용 스캔들 이후 실추되었던 캐나다 육상과 스포츠 전반의 이미지를 회복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베일리는 단순한 기록 달성을 넘어, 정정당당한 스포츠 정신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100m에서 합법적으로 10초 벽을 돌파한 최초의 캐나다인으로서 캐나다 단거리 육상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으며, 후배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의 은퇴 후 활동, 특히 아마추어 선수들을 돕는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 설립과 스포츠 해설가로서의 역할은 그가 스포츠계에 대한 지속적인 헌신을 보여주는 증거다. 다양한 명예의 전당 헌액과 훈장 수여는 그가 캐나다 사회와 스포츠계에 남긴 공로와 유산을 입증한다. 그의 경력은 도전과 성공, 그리고 역경 극복의 상징으로 기억되며, 캐나다 스포츠의 자부심을 되살린 인물로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