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1.1. 출생과 어린 시절
데반 네어는 1923년 8월 5일 영국 해협 식민지 믈라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혈통은 말라얄리족이며, 아버지는 영국령 인도 제국 케랄라주 탈라세리 출신의 고무 농장 사무원 I. V. 카루나카란 네어였다. 네어의 가족은 그가 10세였던 1933년에 싱가포르로 이주했다. 그의 종교는 힌두교였다.
1.2. 교육
네어는 싱가포르의 랑군 로드 초등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고, 이후 빅토리아 스쿨에서 중등 교육을 마쳤으며, 1940년 시니어 케임브리지 시험에 합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는 세인트 조셉 기관과 세인트 앤드루스 스쿨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1949년에는 싱가포르 교사 연합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는 식민 통치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번은 영국 고위 인사가 참석한 학교 합창단 공연에서 "룰 브리타니아!"의 가사를 반영국적인 내용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또한, 그는 말라야 대학교에서 노동행정학과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2. 정치 경력 및 활동
네어는 젊은 시절부터 반제국주의 신념을 바탕으로 정치 및 노동 운동에 활발히 참여했으며,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양국에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2.1. 반제국주의 활동 및 초기 정치 참여
네어는 초기에 친공산주의 성향의 반영국 동맹의 일원이었다. 그는 1951년 반식민주의 활동으로 영국 당국에 의해 구금되었다. 1954년에는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에 가입했다. 1955년 싱가포르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여, 당시 인민행동당 후보 중 유일하게 당선되지 못한 인물이 되었다.
1956년에는 중국인 중학교 폭동 이후 공공 보안 유지법에 따라 림 친 시옹, 제임스 푸투체리 등 노동조합원들과 함께 공산주의 전복 혐의로 다시 구금되었다. 그는 인민행동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1959년 싱가포르 총선 이후에 석방되었다. 석방 후 그는 교육부 장관의 정치 비서로 임명되었으나, 1년 뒤 교직으로 복귀했다. 1960년에는 교도소 조사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고, 성인 교육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2.2. 노동 운동 및 NTUC 설립
네어는 싱가포르 노동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1961년 싱가포르 전국무역연합회의(NTUC) 설립을 도왔으며, 1965년까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1970년부터 1979년까지 다시 NTUC 사무총장을 맡아 노동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P. P. 나라야난과 함께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CFTU)에서 개발도상국의 노동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선진국에 편향된 경제 및 사회 정책 문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자국 내의 극심한 빈곤, 실업, 저개발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제안들은 받아들여져 이후 ICFTU의 경제 및 사회 위원회 활동에 반영되었다. 그는 1976년부터 1982년까지 ICFTU 아시아 지역 기구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3. 말레이시아 및 싱가포르에서의 정치 활동
네어는 1964년 말레이시아 총선에서 쿠알라룸푸르 근처의 방사르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된 유일한 인민행동당 소속 의원이었다. 이는 1955년 선거에서의 낙선과는 대조적인 결과였다. 1965년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된 후에도 그는 말레이시아에 남아 민주행동당(DAP)을 창당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969년 싱가포르로 돌아와 자신이 설립에 기여했던 싱가포르 전국무역연합회의(NTUC)를 다시 이끌게 되었다.
1979년에는 안손 선거구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여 싱가포르 의회에 입성했으며, 1980년 싱가포르 총선에서도 이 지역구 의원직을 유지했다.
3. 싱가포르 대통령 재임
3.1. 대통령 취임
1981년 네어는 당시 주로 의례적인 국가 원수직인 대통령직을 수락하기 위해 안손 선거구 의원직을 사임했다. 그는 1981년 10월 23일 제3대 싱가포르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1985년 3월 28일까지 재임했다. 그의 전임자는 벤저민 헨리 시어스 대통령이었다.
네어가 안손 의원직을 사임하면서 1981년 안손 보궐선거가 치러졌는데, 이 선거에서는 노동자당의 야당 지도자 J. B. 제야레트남이 승리했다. 이는 1963년 이후 싱가포르에서 인민행동당 소속이 아닌 정당 후보가 의회 의석을 확보한 첫 사례로, 싱가포르 정치사에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3.2. 사임 및 논란
1985년 3월 28일, 네어는 불분명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당시 고촉통 부총리는 의회에서 네어가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해 사임했다고 발표했으나, 네어는 이 주장을 강력히 부인했다. 네어의 반박에 따르면, 그는 정치적 견해 충돌로 인해 압력을 받아 사임했으며, 고촉통이 체스 게임 중 자신을 대통령직에서 축출하겠다고 위협했다고 주장했다. 네어는 또한 자신을 혼란스럽게 보이게 하려고 약물을 투여받았으며,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사생활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네어의 주장은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다. 1999년 캐나다 신문 더 글로브 앤드 메일에 이 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리자, 고촉통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네어의 반소 제기 후 법원에서 기각되었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2004년 7월 1일 더 글로브 앤드 메일에 보도된 네어의 두 아들의 성명서에 따르면, 네어가 더 이상 법정에서 증언할 정신적 능력이 없다고 밝히자 고촉통이 소송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 있다. 네어의 아들들은 성명서에서 "기록을 검토하고, 1985년 3월 네어 씨의 싱가포르 대통령 사임으로 이어진 상황에 대한 가족의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는 (네어 씨가 약물을 투여받았다는) 이 주장에 근거가 없음을 선언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4. 개인 생활 및 사망
대통령직 사임 후, 데반 네어와 그의 아내는 1988년 처음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메릴랜드주 게이더스버그에 정착했다. 이후 인디애나주 블루밍턴으로 옮겼다가, 1995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해밀턴으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의 아내 아바다이 다남 락시미는 2005년 4월 18일 해밀턴에서 사망했다. 심한 치매를 앓던 네어는 같은 해 12월 6일 해밀턴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화장되었고, 그의 유해는 아내와 함께 화이트 채플 기념 공원에 안장되었다.
네어는 딸 한 명, 아들 세 명, 그리고 다섯 명의 손주를 남겼다. 그의 장남 자나다스 데반은 더 스트레이츠 타임스의 선임 편집자였으며, 현재 싱가포르 정보통신부의 정부 커뮤니케이션 최고 책임자이자 공공 정책 싱크탱크인 정책 연구소(IPS)의 이사로 재직 중이다. 자나다스 데반은 문학 학자 제럴딘 헹과 결혼했다. 차남 자나미트라 데반은 국제금융공사와 세계은행 그룹의 전 부총재를 역임했다. 삼남 자나프라카시 데반은 2009년에 사망했다. 그의 외동딸 비자야 쿠마리 데반은 현재 온타리오주 해밀턴에 거주하고 있다. 손주들로는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기타안잘리 데반, 미국에서 대학생인 프리얀잘리 데반과 키란 데반, 워싱턴 대학교 시애틀 캠퍼스에 재학 중인 자나아비나시 데반, 그리고 텍사스에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자나샨 헹-데반이 있다.
네어는 네덜란드 경제학자 알베르트 윈세미우스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그를 위해 "양쯔강의 역사를 통한 항해"라는 시를 지었다. 또한 그는 1950년대 싱가포르에서 정치 활동 중 영국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을 때 스리 오로빈도의 작품, 특히 "신성한 삶"을 읽고 그를 우상으로 삼았다. 그는 푸두체리와 그 근처의 오로빌을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스리 오로빈도의 비전에 대해 글을 쓰고 강연했다.
5. 평가 및 영향력
5.1. 노동 운동에서의 역할
데반 네어의 유산은 싱가포르에서 특히 노동 운동과의 연관성으로 인해 매우 존경받고 있다. 그는 싱가포르 전국무역연합회의(NTUC)의 설립자이자 오랜 사무총장으로서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리더십 아래 NTUC는 싱가포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싱가포르의 사회적 안정과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그는 국제 무대에서도 개발도상국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국제 노동 정책이 보다 포괄적이고 공정하게 수립되도록 영향을 미쳤다.
5.2. 데반 네어 고용 및 고용가능성 연구소
네어의 노동 운동에 대한 공헌을 기리기 위해 2014년 5월 1일 싱가포르 주롱 이스트에 데반 네어 고용 및 고용가능성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이 연구소는 당시 리셴룽 총리에 의해 개소되었으며, 싱가포르의 노동자와 고용주를 위한 고용 및 고용가능성 솔루션을 제공하는 네트워크 구축을 목표로 한다. 이는 네어의 노동 운동에 대한 헌신과 그가 추구했던 노동자 복지 증진의 가치를 기리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5.3. 역사적 평가
데반 네어의 생애는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노동 운동의 발전,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초기 공산주의와의 연관성 및 영국 당국에 의한 구금 경험은 그가 식민 통치에 맞서 싱가포르의 자결권을 옹호했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는 인민행동당과 민주행동당에서 활동하며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양국에서 의회 민주주의에 기여했다. 특히 싱가포르 전국무역연합회의(NTUC)를 설립하고 이끌면서 노동자들의 권익 신장과 사회적 약자 보호에 힘썼으며, 이는 그의 사회적 자유주의적 신념을 실천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대통령직 사임과 관련된 논란은 그의 공적 이미지에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그가 제기한 의혹들과 가족의 해명은 권력 관계의 복잡성과 개인의 명예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네어는 싱가포르의 정치적 독립과 사회적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활동은 특히 노동자의 권리 옹호, 인권 증진, 그리고 다당제 민주주의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싱가포르 사회의 소수자 및 취약 계층에 대한 관심과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유산으로 남아있다.
6. 관련 항목
- 싱가포르의 대통령
- 싱가포르 전국무역연합회의
- 인민행동당
- 민주행동당 (말레이시아)
- 리콴유
- 고촉통
- J. B. 제야레트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