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니콘의 본명은 니키타 미닌으로, 그의 유년기와 초기 종교 교육은 훗날 그의 삶과 개혁 의지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1. 탄생 및 유년기
니콘은 1605년 5월 7일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96 km 떨어진 벨데마노보 마을에서 모르드바 농부 미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고, 아버지는 재혼했다. 그의 계모는 그를 심하게 학대했으며, 심지어 세 번이나 그를 죽이려 했다고 한다. 그는 마을 사제로부터 읽고 쓰는 법과 성경을 배웠다. 12세에 그는 집을 떠나 마카리예프 수도원으로 가서 1624년까지 수련수사로 머물렀다.
1.2. 수도원 생활 시작

부모님의 간청으로 집으로 돌아온 니키타 미닌은 결혼하여 인근 마을의 본당 사제가 되었다. 하지만 1635년경에는 그의 세 어린 자녀가 모두 사망했다. 그는 이를 신의 섭리적인 징표로 여기고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먼저 아내를 설득하여 수도 서원을 하게 한 다음, 자신은 백해에 있는 안제르스키 섬의 황량한 암자로 들어갔다. 수도사가 되면서 그는 '니콘'이라는 이름을 취했다.
1639년, 그는 수도원장과 다투다가 배를 타고 수도원을 떠났다. 폭풍이 몰아쳐 그의 배는 훗날 그가 대규모 수도원을 세울 키이 섬에 표류하게 되었다. 그는 결국 노브고로드 교구의 코제오제르스키 수도원에 도착했고, 1643년 그곳의 수도원장이 되었다.
1.3. 초기 수도원 경력
총대주교로 선출되기 전, 니콘은 이미 종교적, 사회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수도원장으로서 그는 1646년에 공무를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당시의 관례에 따라 젊은 차르 알렉세이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경건했던 차르 알렉세이는 니콘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그를 로마노프 가문과 특별히 연관이 깊은 모스크바의 중요한 노보스파스키 수도원의 총원장으로 임명했다. 노보스파스키 수도원 총원장으로서 니콘은 자주 차르를 알현하며 깊은 대화를 나누었고, 이 시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는 자신의 입장을 차르에게 표명하기 시작했다. 1648년에는 니콘이 차르 알렉세이 1세의 측근 중 한 명이 되었다.
1649년, 니콘은 대 노브고로드의 대주교가 되었고, 그곳에서 몇 가지 특별한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 재임 기간 동안 노브고로드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니콘은 폭도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했으나, 종교 행렬을 이끌며 평화롭게 사태를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1649년 예루살렘 총대주교 파이시오스를 만났는데, 이는 그가 그리스 정교회 전통에 관심을 가지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만남은 또한 러시아 정교회의 전면적인 개혁을 촉구하는 스테판 보니파티예프, 그레고리 니에로노프, 표도르 르티셰프 등의 경건주의자 그룹의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니콘은 모스크바 총대주교로서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 개혁과 교회 권위 강화를 위한 핵심적인 종교적, 사회적 활동을 수행했다.
2.1. 차르 알렉세이 1세와의 관계 형성

니콘과 차르 알렉세이 1세의 관계는 1646년 니콘이 모스크바를 방문하며 시작되었다. 당시 젊고 신앙심 깊었던 차르는 니콘의 웅변과 경건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는 니콘이 노보스파스키 수도원의 총원장이 되는 발판이 되었다. 이 수도원은 로마노프 왕조와 특별한 인연이 있어, 니콘은 이곳에서 차르와 빈번히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1648년 무렵 니콘은 차르 알렉세이 1세의 최측근 중 한 명이 되었고, 차르는 자신의 모든 자녀의 대부가 되도록 하여 둘 사이의 유대감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러한 강력한 신임 관계는 니콘이 교회 개혁을 추진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2.2. 경건주의자 모임 및 개혁 의지
노보스파스키 수도원에 재직하는 동안 니콘은 '경건주의자들'(боголюбцы러시아어)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이 모임은 1630년대 후반부터 스테판 보니파티예프를 중심으로 모인 성직자 및 세속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동란 시대 이후의 사회 문제를 러시아인들의 종교성 부족에 대한 신의 진노의 표현으로 이해했다. 그룹은 러시아 정교회의 부흥과 대중의 종교적 경건함 회복을 주장했다. 이 모임에는 표도르 르티셰프, 카잔 대성당의 이반 네로노프 수도원장, 대사제 아바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건주의자들의 주장 중 핵심은 예배 시 다선율 금지와 설교 도입, 그리고 성직자 규율 개혁이었다. 노브고로드 대주교였던 니콘은 이미 자신의 교구에서 다선율을 금지하고 있었으며,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마다 차르 알렉세이에게 단선율 예배를 시연해 보였다. 1651년 차르가 소집한 교회 회의에서 단선율 도입이 결정되었는데, 이는 니콘의 예배 시연이 차르에게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니콘은 또한 1649년 예루살렘 총대주교 파이시오스를 만나면서 그리스 정교회 전통에 대한 관심을 심화시켰으며, 이는 경건주의자 그룹의 전면적인 교회 개혁 운동을 더욱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2.3. 모스크바 총대주교 선출
1652년 4월 15일, 모스크바에 없던 니콘이 필립 2세 성인의 유물 이전을 담당하던 중 총대주교 요셉이 사망했다. 니콘은 모스크바 총대주교직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는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지 않다는 점을 들어 몇 차례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차르와 보야르들이 무릎을 꿇고 간청하자, 그는 마지못해 수락했다. 다만, 그는 교회 교의, 교회법, 정교회의 의식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총대주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겠다는 엄숙한 맹세를 모든 회의 참석자에게 요구했다. 이는 그의 강력한 권위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니콘의 선출은 그가 소속된 개혁 지지 세력과 차르 알렉세이 1세의 지지에 의해 미리 결정된 측면이 강했다. 차르는 니콘을 자신의 지지자이자 친구로 보았다. 다른 유력 후보였던 보니파티예프가 거절하면서 니콘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또한, 니콘의 적수로는 니키타 오도옙스키와 이반 초반스키 등이 거론되었으나, 결국 1652년 7월 25일 니콘은 공식적으로 총대주교직에 착좌했다. 그는 자신이 숭배했던 필립 2세 성인의 서품일과 같은 날을 택하여 자신의 서품일을 기념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2.4. 니콘의 종교 개혁
총대주교 니콘은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 기도서, 성상화 등에 대한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가 동방 정교회의 본류인 그리스 정교회 전통에 맞춰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개혁은 당시 러시아 교회에 만연했던 오류와 불필요한 관습을 제거하고, 서유럽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보수적인 성직자들과 신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니콘은 개혁의 근거로 그리스 학자들의 자문을 구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키이우의 학자들은 모스크바의 전례서가 이단적이고, 당시 사용되던 성상들이 고대 콘스탄티노폴리스 모델에서 벗어나 대부분 서유럽의 바로크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의 연구에 따르면, 니콘 시대의 러시아 전례서는 당시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것과는 다른 판본에 속했으며, 수정되지 않은 러시아 전례서는 수세기 동안 여러 차례 수정된 그리스 전례서보다 실제로는 더 오래되고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개혁은 1654년의 대규모 전염병과 동시에 진행되어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니콘은 또한 텐트형 교회 건축을 엄격히 금지했고, 많은 오래된 비정경적 교회를 철거하고 "옛 비잔틴" 양식의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도록 했다. 이러한 무자비한 태도는 이후 '구파 신자'로 불리게 되는 반대자들의 니콘에 대한 깊은 증오의 원인이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차르에 의한 교회의 종속화를 막으려는 니콘의 의도 또한 개혁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는 교회를 사유 재산화하고 세속적인 권위로부터 교회를 분리하려 했으며, 교회가 국가에 굴복하는 것을 반대했다.
2.4.1. 전례 및 기도서 개혁
총대주교 니콘이 가장 먼저 착수한 과제는 기도서 통일이었다. 당시 러시아 각지의 기도서에는 상당한 이본(異本)이 존재했다. 니콘은 그리스 학자들에게 원본 기도서의 작성을 지시했다. 이어서 니콘은 봉신례 개혁에 착수하여, 러시아 고유의 전통 대신 그리스 정교회식 의례를 도입하고자 했다.
1653년 2월, 부활절 직전 니콘은 다음과 같은 지침을 발표했다.
- 성호 긋기: 기존의 두 손가락 대신, 그리스 정교회와 마찬가지로 세 손가락으로 행할 것. (참고로 16세기 이반 4세가 발표한 『백장령』에서는 두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 대재 기간 동안 에프렘 시린의 기도 시 궤배 횟수를 기존 16회에서 4회로 줄일 것.
니콘의 이러한 생각은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왕조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러시아가 전체 동방 정교회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병합으로 그리스 정교회의 영향을 받은 서 루시인들을 포용해야 했던 차르 알렉세이의 의도와도 일치했다.
1654년, 니콘은 전례서 개정을 재검토하기 위한 공의회를 소집했고, 공의회의 대다수는 "우리의 고대인들보다 그리스인들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정했다. 165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두 번째 공의회는 첫 번째 공의회가 제안한 전례서 개정을 승인하고, 대사제 아바쿰과 콜롬나의 파울로스 주교를 포함한 반대파를 파문했다. 니콘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으나, 그는 그리스 전례와 러시아 전례의 차이는 외형적인 것이지 신앙 교리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하며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기도서 개혁은 너무나 서둘러 진행되었으며, 그 근거로 사용된 그리스어 자료들은 비교적 최신 판본이었다. 특히 1602년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그리스어 『에우콜로기온』이 1655년에 출판된 러시아어 기도서 『슬루지에브니크』의 개정 자료로 사용되었다. 이로 인해 개혁이 서구의 영향을 "물들었다"는 비난이 나중에 제기되기도 했다.
2.4.2. 성상화 및 서구 영향 배제

니콘은 서유럽의 바로크 양식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양식의 성상화'에 대해 엄격히 비판했다. 그는 그러한 성상화들을 찾아 집집마다 수색을 명령했으며, 발견된 성상화들의 눈을 도려내고 조롱하며 마을을 돌게 했다. 또한 앞으로 그러한 성상화를 만들거나 사용하는 모든 이에게 엄중한 처벌을 가하겠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는 러시아 정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고 서구의 영향을 배제하려는 그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2.4.3. 개혁에 대한 반대와 라스콜
니콘의 개혁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봉신례를 중시하는 성직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니콘 자신도 속했던 경건주의자들 중 상당수는 이 봉신례 개혁을 단순한 '의례 수정'이 아닌, 러시아 정교회 전통을 파괴하는 행위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니콘을 '라틴파(가톨릭)의 앞잡이'이자 '이단자'라고 비난했다. 다른 사제들과 신자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의 거의 전부였던 의례를 바꾸는 것은 곧 신앙 그 자체의 변화를 요구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니콘은 반대파에 대해 교회법 위반을 명분으로 파문, 수도원 감금, 유배 등 강압적인 처벌을 가했다. 대표적으로 대사제 아바쿰은 시베리아의 토볼스크로 유배당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러시아 정교회의 대분열은 '라스콜'(Раскол러시아어)이라 불리며, 이후 두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는 이들은 정교회에서 '분리파'(라스콜니키)로 불리게 되었다. 분리파(구파 신자)의 저항과 교회 당국자들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차르 정부에 의한 구파 신자에 대한 탄압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2.5. 건축 및 수도원 사업

총대주교 니콘은 자신이 설립하고 후원했던 수많은 수도원들을 귀중한 도서관으로 풍요롭게 했다. 그의 사절들은 러시아와 동양 전역을 누비며 귀중한 그리스어 및 슬라브어 성경 필사본과 세속 필사본을 수집했다. 그가 세운 주요 수도원로는 발다이 이베르스키 수도원, 신 예루살렘 수도원, 그리고 키이 섬 수도원이 있다.
특히 신 예루살렘 수도원의 건설은 니콘의 핵심 사업이었다. 1656년 6월, 그는 보스크리예센스키 마을의 부지를 매입했는데, 이곳의 지형은 고대 팔레스타인의 풍경을 연상시켰다. 이 부지는 신약성경의 지명에 따라 구획이 나뉘고 이름이 붙여졌다. 1657년에 수도원 단지 내 첫 교회가 봉헌되었다. 니콘은 이 수도원을 예루살렘 성묘 교회의 복제판으로 건설하여 새로운 정교회 세계의 중심지로 삼으려 했다.
니콘은 자신의 수도원들을 강화하기 위해 다른 수도원과 교구로부터 토지를 확보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는 콜롬나 교구를 해산하고 그 상당 부분을 신 예루살렘 수도원에 할당했다. 그는 총 12개의 수도원과 45개의 교회를 설립했다. 또한, 보조금이나 매입을 통해 교구의 수입을 크게 늘렸으며, 심지어 자녀가 없는 영주의 토지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차르 알렉세이 1세는 이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니콘은 특별히 호화로운 의복을 착용했으며, 1655년에는 1000 RUB 상당의 총대주교관을 소유하기도 했다. 1652년에는 크렘린 내에 총대주교 궁전을 짓기 시작했고, 값비싼 가구들로 장식했다. 그는 그리스 문화에 매료되어 많은 그리스어 서적을 구입하고 그리스 수도사들을 주변에 모았다. 또한 아토스산에서 숭배되던 이베르스카 성모상의 숭배를 주도하기도 했다.
17세기 모스크바 궁정에서는 폴란드를 비롯한 서유럽과 라틴 문화가 유행했으며, 차르 알렉세이도 라틴어가 새겨진 폴란드풍 옥좌를 만들 정도였다. 니콘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 1652년, 서 루시의 키이우에서 온 성가대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니콘은 그들의 음악에 깊이 감동했다. 그는 로마 교황의 관을 닮은 보관(寶冠)을 착용하기도 했으며, 자신은 러시아인이지만 신앙의 면에서는 그리스인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종교 외에도 니콘은 지리학과 점성술에 관심을 가졌고, 러시아의 인쇄업 발전을 촉진했으며, 뛰어난 글쓰기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유작들은 매우 표현력이 풍부하고 감성적이며, 풍자적인 문체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자선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감옥을 방문하고 자신의 집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점심을 조직하기도 했다.
3. 정치적 영향력 및 권력 행사
총대주교 니콘은 러시아의 정치 무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는 차르 알렉세이 1세와의 특별한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의 강압적인 성향과 교회 우위 사상은 결국 차르와의 갈등을 초래했다.
3.1. 차르의 신임과 정치적 동반자

1652년부터 1658년까지 니콘은 차르의 장관이라기보다는 동료에 가까웠다. 그는 공문서와 사적인 서신에서 '대주권자'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는 차르가 군대와 함께 모스크바를 비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전쟁(1654-1667년) 기간 동안 특히 두드러졌다. 1654년, 차르는 대규모 군사 작전을 시작하면서 니콘을 모스크바의 최고 통치자로 남겨두었다. 이는 고위 보야르들 사이에서 상당한 불만을 야기했다.
니콘은 총대주교가 되자마자 차르 알렉세이 1세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그는 총대주교 필라레트에게만 주어졌던 '대주권자'(Великого Государя러시아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차르가 모스크바를 비울 때 그는 섭정을 맡아 정치적 권력을 장악했다. 1654년 모스크바에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차르는 니콘이 황태자와 마리야 밀로슬랍스카야 황후를 트로이체-세르기예바 라브라로 피신시키도록 허락했다.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니콘은 차르와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방역 조치를 지시했다. 이 시기는 니콘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1656년, 니콘은 차르 알렉세이 1세에게 스웨덴과의 전쟁을 조언하기도 했다. 1656년 무렵 니콘의 국가에 대한 영향력은 차르가 어떤 결정도 그의 자문 없이는 내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또한 차르 알렉세이 1세의 사적인 생활에도 개입하여, 차르가 사냥과 같은 세속적인 오락을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니콘의 모든 정치적 활동은 정교회의 확산과 영향력 강화를 목표로 했으며, 그는 '제3의 로마' 개념을 발전시켰다.
3.2. 교회 우위 사상 및 국가 정책 비판
니콘은 교회를 세속 권력으로부터 분리하고 교회와 국가를 영구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는 교회와 국가가 조화롭게 기능해야 하지만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권위에는 두 가지 검이 있는데, 곧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최고 주교가 차르보다 높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총대주교가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하는 방식으로 국가의 계층 구조와 유사하게 교회를 조직하고자 했다. 그는 차르를 '달'에, 총대주교를 '태양'에 비유하며 총대주교가 차르보다 상위의 존재라고 주장했다.
니콘은 특히 1649년의 소보르노예 울로제니예(러시아 법전)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 법전은 성직자의 지위를 낮추고 교회를 사실상 국가에 종속시키며, 수도원 토지세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법전을 "악마의 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니콘은 성직자들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으며, 차르는 교회 일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나 테오도로스 스투디테스와 같은 교부들의 저작과 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일부 학자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사상이 니콘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보지만, 니콘이 라틴어 또는 그리스어에 능통하여 인노첸시오 3세의 저작을 직접 읽고 이해할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니콘의 사상은 교회가 국가와 함께 진리(신의 진리)를 수호하는 공동의 임무를 가진다는 기독교 신앙의 원칙에 기반을 두었다. 따라서 차르와 총대주교는 긴밀하게 협력해야 했다. 니콘에게 교회 권력의 우월성은 교구민을 통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 정치보다 더 중요한 목표라는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했다. 그는 신정정치를 이상적인 정치적, 영적 형태로 제시하며 차르와 총대주교의 결합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니콘의 행동은 그에게 수많은 적들을 만들었으며, 1658년 여름에 이르러 그들은 알렉세이에게 총대주교가 차르를 능가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알렉세이는 그가 '절친한 친구'라고 불렀던 니콘에게 갑자기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치적 야심과 경직된 권위 체계는 그가 보야르와 성직자들의 지지를 잃게 했고, 결국 차르의 신뢰마저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4. 권력 투쟁과 몰락
니콘의 권력은 그의 오만함과 독단적인 개혁 추진으로 인해 차르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총대주교 직위에서 박탈당하고 유배를 떠나게 된다.
4.1. 차르와의 관계 악화

1655년부터 1658년까지 차르와 총대주교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첫 번째 공개적인 충돌은 1656년 성금요일에 발생했다. 정확한 경위는 불분명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니콘이 차르의 농민 출신 배경을 오만하게 모욕했다고 한다. 긴장은 1657년 니콘이 비난했던 세속적인 오락들을 차르가 다시 즐기기 시작하면서 고조되었다. 1658년, 알렉세이 1세는 부활절 예배를 포함하여 니콘이 주관하는 크렘린 내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중단했다.
결정적인 파열은 1658년 7월 6일에 일어났다. 조지아의 차르를 모스크바에서 맞이하는 의식 중, 보야르 보그단 히트로프가 니콘의 신하인 메셰르스키 공작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니콘은 범인 처벌을 요구했으나 차르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틀 뒤인 7월 8일, 알렉세이 1세는 카잔 성모상 예배에 불참했으며, 7월 10일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예수님의 옷 경배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차르와 총대주교 간의 관계가 회복 불능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4.2. 모스크바에서의 은퇴와 공의회
1658년 7월 10일, 니콘은 모스크바 크렘린의 성모승천 대성당에서 열린 예배 도중 공개적으로 총대주교 의복을 벗어놓고 수도생활을 위해 직위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날 그는 일반 수도사의 복장으로 자신이 설립한 모스크바 서쪽 40 km 떨어진 이스트라의 신 예루살렘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그는 총대주교직을 공식적으로 사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차르가 자신의 부재를 후회하고 자신을 다시 불러주기를 기대했으며, 166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디오니시오스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이러한 기대를 드러냈다.

니콘의 수도원 은퇴는 모스크바 내에 상당한 혼란을 야기했다. 보야르 알렉세이 트루베츠코이가 그를 찾아갔으나, 니콘은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차르에 대한 분노 때문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형식적으로 니콘은 여전히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이었으나, 실제적인 지도력은 행사하지 못했다.
거의 2년 동안 차르 알렉세이와 니콘은 소원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들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1660년 2월, 거의 2년 동안 공석이었던 총대주교좌의 새 인물을 선출하기 위한 공의회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이 공의회는 새로운 총대주교가 임명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니콘이 대주교 직위와 사제 서품을 모두 상실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위대한 교회 전문가 에피파니 슬라비네츠키는 이 결정의 두 번째 부분에 강력히 항의했고, 결국 전체 조사는 무산되었다. 차르는 공의회 결정의 교회법적 유효성을 확신하지 못하여 이를 강제 집행하기를 꺼려했다. 그 후 6년 동안 러시아 정교회는 총대주교 없이 지내야 했다. 니콘의 폐위 문제는 해마다 더욱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졌으며, 거의 모든 당대의 동방 정교회 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자문을 받았지만 일치된 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이 문제는 전 정교회 공의회에 회부되었다.
니콘은 공의회에서 자신의 직위를 되찾는 대신, 세 개의 수도원과 그 산하 분원을 자신에게 유지시켜 줄 것을 요구하며 후계자 선정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후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들을 확장하는 데 주력했고, 특히 예루살렘 성묘 교회를 본뜬 대성당을 건설하여 새로운 정교회의 중심지로 만들려 했다. 그는 수도원에서 고위 수도사의 규칙을 따라 기도, 금식, 정원 가꾸기, 성당 건축, 낚시 등 일상적인 수도생활에 전념하면서도 방문자들을 통해 국내 정세를 파악했다. 1659년 여름, 니콘은 차르와의 갈등이 끝났다고 믿고 모스크바로 돌아갔으나, 이는 차르와의 마지막 좋은 만남이었다. 그는 교회 재산 횡령과 '대주권자' 칭호 남용 혐의로 반대파들에게 고발당했다. 결국 그는 칼라진 수도원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는 더 이상 총대주교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660년 2월, 니콘의 운명을 결정하고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한 공의회 준비가 시작되었다. 이 공의회는 주로 세속 당국의 영향을 받았고, 그리스 주교들의 증언 또한 비객관적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결국 1660년 5월, 공의회는 니콘의 후계자가 그의 운명을 결정하고, 니콘은 더 이상 주교의 품위를 갖지 못하며 지정된 수도원 중 한 곳으로 가야 한다고 발표했다.
4.3. 총대주교 직위 박탈 및 추방

1662년 가자의 대주교 파이시오스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차르 알렉세이 1세에게 니콘을 직무 유기 혐의로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청했다. 파이시오스는 니콘에게 회개하고 수도로 돌아오라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1662년 12월, 차르와 보야르들은 니콘 사건을 종결시키기 위한 새로운 공의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차르 알렉세이는 표트르 살티코프에게 니콘의 교회 재산 유용 및 교회법 위반 행위에 대한 증거를 최대한 많이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공의회는 뱌트카의 알렉산드르 주교와 같은 니콘의 반대자들로부터 니콘을 이단자로 묘사하는 서신들을 받았다. 1663년 6월, 황실 모독 혐의로 고발된 니콘을 감시하기 위해 군대가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이 사건은 니콘이 공식적으로 구금되기 시작한 시점을 나타낸다.
마침내 1666년 12월, 니콘은 대 모스크바 공의회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 공의회는 "두 명의 외국 총대주교... 그리고 13명의 대주교, 9명의 대주교, 5명의 주교, 32명의 총원장"으로 구성되었다. 공의회를 주재한 두 명의 총대주교는 알렉산드리아의 파이시오스와 안티오키아의 마카리오스 3세였다. 폴로츠크의 시메온은 공의회 문서를 작성하는 데 중요한 신학자 중 한 명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니콘은 교회의 권위와 권력이 최고여야 한다고 굳건히 주장했지만, 이는 교회 문제에 한해서만 최고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667년 12월 12일, 공의회는 니콘이 차르와 모든 러시아 교회를 모욕하고, 교회법에 반하여 콜롬나의 파울로스 주교를 폐위했으며, 자신의 신하들을 구타하고 고문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 그의 형벌은 모든 성직의 박탈이었고, 이후 그는 단지 '수도사 니콘'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날 그는 썰매에 태워져 멀리 북쪽의 페라폰토프 수도원으로 죄수 신분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를 폐위시킨 바로 그 공의회는 그의 모든 개혁을 확인하고, 대사제 아바쿰처럼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모든 이들을 파문했다. 니콘에게 은혜를 입었던 그 어떤 주교도 공의회에서 그를 변호하지 않았다.
새로운 모스크바 총대주교 요아힘은 니콘이 추방된 후에도 여전히 세속에 영향을 미 미칠 수 있어 자신의 권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이에 1676년, 요아힘은 니콘을 키릴로프-벨로제르스키 수도원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4.4. 유배 생활

1666년 12월 21일, 니콘을 태운 수레 행렬은 페라폰토프 수도원에 도착했다. 니콘은 주교의 품위를 박탈당하고 감옥에 갇혔으며, 외부와의 서신 교환이 금지되었다. 그는 수도원장과만 접촉이 허용되었고, 끊임없이 감시를 받았다.
차르 알렉세이 1세의 말년에, 니콘의 상황은 점차 완화되었다. 차르의 새로운 측근인 알렉세이 마트베예프는 전 총대주교가 더 이상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고 설득했다. 그 결과 1672년부터 니콘은 수도원과 그 주변 지역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1674년부터는 22명의 시종을 두게 되었다. 그는 다른 수도사들처럼 정원과 숲에서 노동했지만, 더 편안한 환경에서 생활했다. 그는 방대한 서적 컬렉션, 개인 의복, 일상용품을 소유할 수 있었고, 방문객을 맞이하고 농민들이 그에게 병을 고치러 오는 것을 허용받았다. 그는 병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니콘의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1676년, 새로운 모스크바 총대주교 요아힘은 니콘이 유배 중에도 여전히 세속에 영향력을 미쳐 자신의 권력을 약화시킬 것을 우려했다. 이에 요아힘은 니콘을 키릴로프-벨로제르스키 수도원으로 이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새로운 유배지에서 니콘의 조건은 다시 강화되었다. 그는 수도원 내에서만 이동할 수 있었고, 항상 감시를 받았다. 기본적인 생활용품, 세 권의 책, 의복을 제외한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고, 시종도 세 명으로 줄었다. 또한 선동을 막기 위해 다른 수도사들과 자유로운 대화가 금지되었다.
5. 말년 및 죽음
유배 생활 중이던 니콘의 상황은 차르 알렉세이 1세의 사망 이후 변화를 맞이했으며, 새로운 차르의 호의 속에서 그의 생애는 비극적인 종말을 고했다.
1679년, 새로운 차르 표도르 3세(알렉세이의 아들)는 갑작스럽게 니콘에게 호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이는 러시아 정교회 발전을 위한 계획과 키이우 대주교구를 통제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표도르 3세는 니콘을 다시 교회의 수장으로 세우고 그의 직위와 명성을 완전히 회복시키려 했다. 차르의 고모인 체레브나 타티야나가 니콘을 높이 평가했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이러한 계획이 진행될 무렵 니콘은 이미 중병을 앓고 있었다. 그의 고해성사를 맡았던 키릴로프-벨로제르스키 수도원장 니키타의 증언에 따르면, 니콘은 죽음을 준비하며 자신의 옛 이름을 사용하여 대스히마 수도 서원을 했다고 한다. 1681년 7월, 니콘은 신 예루살렘 수도원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자마자 셰크스나강과 볼가강을 따라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1681년 8월 17일 야로슬라블 근처에서 사망했다.
1681년 8월 26일, 니콘의 시신은 신 예루살렘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당시 고위 성직자와 황족 모두가 총대주교 직무대행이었던 요아힘이 참석하는 가운데 총대주교급 예식으로 니콘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차르 표도르 3세는 직접 고인을 위해 기도했다. 1682년 9월 말, 표도르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니콘의 재안장을 위한 예식을 요청했다. 니콘은 성 요한 세례자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2013년, 소비에트 시대에 훼손된 신 예루살렘 수도원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니콘의 관이 열렸는데, 관은 비어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6. 유산과 평가
니콘의 개혁은 러시아 정교회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삶과 업적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극명하게 엇갈린다. 그의 행동은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고 러시아의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였으나, 동시에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6.1. 개혁의 영향과 라스콜의 지속

니콘의 개혁은 러시아 정교회의 분열로 이어졌고, 이는 러시아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구파 신자들에 대한 박해와 사회적, 종교적 갈등이 지속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니콘의 개혁이 교회를 통합하려 했으나 오히려 분열을 초래했고, 성직자 권력을 강화하려는 그의 노력이 간접적으로 차르 체제에 대한 종속을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이는 그의 결정 자체가 지닌 모순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6.2. 긍정적 평가
니콘의 업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주로 그의 개혁이 러시아 정교회의 질서 확립과 러시아의 위상 강화에 기여했다고 본다. 역사가 리처드 파이프스는 니콘의 태도가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 사이의 균형을 일시적으로 회복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바실리 클류쳅스키는 니콘을 17세기 러시아의 가장 뛰어난 위인으로 보았으며, 니콜라이 코스토마로프는 그를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았다. 폴란드 정교회 주교이자 신학자 예레미아시(Anchimiuk)는 니콘의 개혁이 "오늘날의 건강한 교회"에 흔적을 남겼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니콘이 사용한 방식이 당시 시대의 전형적인 잔혹성을 띠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안토니 (흐라포비츠키) 대주교는 니콘이 살아생전 직위가 복권되었으며 적절한 시점에 성인으로 시성될 것이라고 믿었고, 니콘을 러시아 역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간주했다. 러시아 역사가이자 역사철학자인 레프 구밀료프는 니콘이 우크라이나와 발칸반도 지역으로 러시아가 팽창할 수 있도록 개혁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6.3. 비판과 논란
니콘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 차르와의 갈등, 개혁 과정에서의 강압적인 태도는 많은 비판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세기 러시아 교회 역사가인 안톤 카르타쇼프는 니콘의 목표가 성직자들이 세속 권력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비톨트 야쿠보프스키는 니콘의 신념을 "교황주의의 한 형태"로 묘사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지지킨은 니콘이 국가와 교회 간의 권력 병행 원칙을 옹호했으며, 교회가 세속 국가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을 반대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니콘에 대한 권력욕과 오만함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은 대부분 반대파(예: 가자의 대주교 파이시오스)의 관점을 반복한 것이라고 한다.
니콜라이 카프테레프는 니콘이 교회와 국가의 균형을 회복하려 했으나, 그의 성격과 부하 주교들에 대한 불친절한 태도로 인해 교회에 권력을 부여하기보다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목표는 차르가 교회의 상당한 영향력이 국가에 이롭지 않다고 판단하면서 좌절되었다. 브와디스와프 세르치크는 니콘을 엄격하고 교조적이며 때로는 잔혹한 총대주교로 묘사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니콘의 개혁이 "러시아 정신의 파괴와 억압"의 시작이었다고 평가하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특히 구파 신자들, 특히 초기 세대에게 니콘은 극도로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아바쿰 페트로프와 그 후대 작가들의 작품에서 니콘은 모든 악의 화신, 심지어 지상에 현현한 악마로 그려지기도 했다.
6.4. 대중적 인식 및 전승
니콘은 총대주교직에서 박탈당하고 유배된 후에도 민중의 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1670년 스텐카 라진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라진의 세력을 지지하는 민중들은 라진의 선단 중 한 척에 유폐된 니콘 총대주교가 타고 있다고 믿기도 했다. 이는 반란에 가담한 이들조차 차르에 대한 경외심과 정교회 신앙을 근본에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