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미클로시 네메트(Németh Miklós헝가리어, 1948년 1월 24일 ~ )는 헝가리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1988년 11월 24일부터 1990년 5월 23일까지 헝가리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동유럽과 중앙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붕괴되던 격동의 시기에 헝가리 사회노동당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헝가리의 마지막 공산주의 총리였다. 네메트 총리는 권위주의적 일당 체제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헝가리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하여 동독 주민들의 서독 이동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 해체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부총재로 재직하며 동유럽 국가들의 경제 전환을 지원하는 등 국제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2. 어린 시절과 배경
미클로시 네메트는 그의 가족 배경과 학업 여정을 통해 형성된 인물이다.
2.1. 어린 시절과 가족
네메트 미클로시는 1948년 1월 24일 모노크의 가난한 천주교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가인 슈타이츠 가문은 18세기 카로이 가문에 의해 재정착된 슈바벤인 혈통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1944년 가을 모노크에서 소련으로 강제 이주되었으나, 1951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 안드라시 네메트(András Németh)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1943년 초 보로네시 전투와 돈강 인근의 소련 공세에서 살아남아 1946년에 헝가리로 귀국했다. 이러한 가족 배경은 네메트의 정치 생활에서 이중적인 정체성으로 작용했다. 그는 공산당 경력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가족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71년 에르제베트 실라기(Erzsébet Szilágyi)와 결혼했을 때, 그들은 시민 결혼식 이후 교회 결혼식도 올렸다. 네메트는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8세였다. 그는 이 사건들에 대해 단편적인 경험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자유 유럽 라디오를 들었고, 마을의 중앙 광장에는 1848년 혁명 깃발이 세워졌으며, 지역 당 서기는 체포되어 혁명가들에 의해 주님의 기도를 암송하도록 강요받았다. 네메트는 미국 유학 전까지 국가 선전과 은폐로 인해 사건의 전체 진실을 알 수 없었다.
2.2. 교육
네메트는 세렌치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1962년 미슈콜츠에 있는 베르제비치 게르게이 상업 및 요식업 학교에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신학자이자 역사가인 가보르 데아크(Gábor Deák)가 그의 교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66년에 최종 시험을 치렀고, 이후 카를 마르크스 경제대학교에 입학했다. 공산주의 시대의 학문 시스템에서 독특하게도, 이 대학은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총장 칼만 사보(Kálmán Szabó) 덕분에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사보 총장은 1968년 신경제 메커니즘이라는 주요 경제 개혁의 준비 및 실행에 참여했으며, 이는 헝가리 경제 시스템에 일부 시장 및 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했다. 이러한 개혁 지향적인 리더십 아래, 정통 마르크스주의 전문가 대신 서구 주류 커리큘럼에 이미 익숙하고 해외 유학 기회를 가졌던 새로운 경제학자 지식인들이 등장했다. 네메트는 1971년에 졸업한 후 조교수가 되었고, 이후 정교수가 되었다. 그는 1975년부터 1976년까지 국제 연구 교류 위원회 장학금을 받아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의사 결정 이론, 비용-편익 분석, 상법을 배웠다. 이후 강경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그가 하버드 재학 시절 중앙정보국(CIA)에 의해 스카우트되었다고 비난했으나, 네메트는 이러한 혐의를 "터무니없다"고 일축했다.
3. 초기 경력
네메트는 대학 졸업 후 학계에서 직업 생활을 시작했으나, 곧 헝가리 사회노동당에 입당하여 경제 정책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3.1. 대학 및 초기 직업 생활
1971년 대학을 졸업한 후 조교수, 그리고 전임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77년부터는 경제대학을 떠나 국가 계획 사무소에서 근무했다. 1978년까지 이론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이후 사무소의 경제 부서로 전근되었다. 그곳에서 그의 역할은 산업, 농업,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조사 및 초안에 대한 단축된 계획 문서를 작성하여 장관평의회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네메트에 따르면, 그는 이 시기에 헝가리의 경제 현실과 막대한 공공 부채의 실제 규모를 파악하게 되었다. 당시 공산주의 정권과 헝가리 국립은행은 이중 장부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당 정치국의 대다수조차 실제 데이터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3.2. 당내 활동 및 경제 분야 역할
네메트는 1976년 또는 1977년경 헝가리 사회노동당에 입당했다. 1972년 귀국 후 헝가리 사회노동당 경제위원회 위원으로 부임하여 굴라시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 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1981년부터는 헝가리 사회노동당 경제 부서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1982년 국제 통화 기금(IMF) 대표단(앨런 휘톰, 자크 드 라로지에르)과 협상에 참여했으며, 소련을 우회하여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대출을 받기 위한 회의에도 참석했다. 이와 관련하여 1975년에는 특사 자격으로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기도 했다. 1982년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만났는데, 그는 고르바초프가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1980년대 헝가리 인민공화국은 막대한 부채에 시달렸고, 네메트는 특사 자격으로 부채 탕감 문제 중재에 주력했다. 1986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지도자가 되자 네메트는 경제 부서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새로운 서기장을 일찍이 알고 있었기에 사회, 정치, 경제 개혁의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을 예상했다. 1987년 6월, 네메트는 경제 정책을 담당하는 비서로 중앙위원회에 승진했다. 1988년 5월에는 정치국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장기 집권했던 서기장 카다르 야노시는 그로스 카로이 총리로 교체되었고, 그로스는 "기술 관료" 정부를 수립하려 했으며 네메트에게 도이체 방크와의 10.00 억 DEM 대출 협상을 위임했다.
4. 헝가리 총리
네메트 미클로시의 총리 재임 기간은 헝가리가 공산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시기였다.
4.1. 총리 임명 및 내각 구성
1988년 여름, 그로스 서기장은 당 조직에 전념하기 위해 총리직에서 사임할 의사를 밝혔다. 그는 이전 관행과는 달리, 지역 당 위원회, 노동조합, 애국 인민 전선과의 논의를 위해 레죄 녜르시, 임레 포즈가이, 일로나 타타이, 팔 이바니 등 네 명의 후보를 지명했다. 그로스는 재앙적인 경제 상황과 임박한 파산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경제 전문가로서 명성을 쌓은 네메트도 총리 후보로 지명되었다. 결국 고령의 녜르시는 네메트를 지지하며 후보직에서 물러났다. 네메트는 1988년 11월 24일 취임 선서를 했으며, 당시 그는 1988년 12월 베나지르 부토가 파키스탄 총리로 선출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젊은 정부 수반이었다.
네메트는 이전 정부에서 장관이나 국무장관직을 맡은 적이 없었기에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에서 총리가 되었다. 그는 또한 그로스 내각의 일부 영향력 있는 장관들(예: 프리제시 베레츠, 이슈트반 호르바트)을 "물려받았는데", 이는 당내에서 네메트가 몇 달 동안 그로스의 조수라는 추측을 낳았다. 다음 해 예산이 아직 편성되지 않았고, 네메트에 따르면 예산 삭감 없이는 시스템이 지속 불가능했다. 그로스의 목표는 자신의 권력과 공산주의 이념을 보호하기 위해 네메트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로스가 부다페스트 스포츠차르노크에서 연설하며 계급 투쟁의 심화를 언급하고 백색 테러의 재림 가능성을 암시하면서 강경파와 개혁파 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네메트는 점차 당 지도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했다. 자신의 후임자가 자율적으로 움직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그로스는 네메트의 전화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고, 네메트의 직원들은 나중에 총리 관저에서 도청 장치를 발견했다.
이후 몇 달 동안 강경파는 영구적으로 약화되었다. 정치국과 애국 인민 전선은 장관직 후보 지명권을 포기했으며, 1989년 5월 10일까지 네메트는 내각 구성을 완전히 개편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내각을 일당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수행할 "전문가 정부"로 변화시켰다. 당시 개혁파인 줄러 호른, 라슬로 베케시, 차바 휘테르, 페렌츠 글라츠, 페렌츠 호르바트가 내각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네메트 정부는 헝가리 사회노동당 대신 국회의 권한 아래 놓이게 되었다.
4.2. 민주주의로의 전환과 공산주의 붕괴
네메트 정부는 공산주의 체제를 해체하고 헝가리의 민주주의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4.2.1.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개방
1989년 5월, 네메트 내각은 오스트리아 국경과의 철조망 일부를 철거하여 "철의 장막"을 걷어냈다. 1989년 8월 19일, 민주화 세력에 의한 범유럽 피크닉이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개최되었는데, 네메트는 포즈가이 임레 정치국원 등 당내 급진 개혁파와 함께 이를 후원했다. 1989년 9월 11일, 네메트 내각은 동독 시민들이 오스트리아를 경유하여 서독으로 향할 때 헝가리를 통과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용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의 격렬한 항의를 받게 되었다.
4.2.2. 베를린 장벽 붕괴에서의 역할
네메트 내각의 동독 시민 자유 통과 허용 결정은 1989년 11월 9일부터 10일 사이에 일어난 베를린 장벽 붕괴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네메트는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비밀리에 회담을 가졌으며, 1956년 헝가리 혁명 때처럼 소련군이 헝가리 내정에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했다. 또한 서독 정부와도 비공식적으로 협력했다. 네메트는 베를린 장벽의 해체가 갑자기 일어난 일이지만, 1989년 3월 고르바초프가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 개방 이후 소련이 폭력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등 몇 달 동안 사건을 이끈 동력이 축적되었다고 언급했다.
4.2.3. 당과 국가의 전환
1989년 10월, 헌법 개정을 통해 헝가리 인민공화국은 헝가리 공화국으로 이행되었다. 동시에 헝가리 사회노동당 또한 새로운 중도 좌파 정당인 헝가리 사회당으로 전환되었으며, 네메트는 이 사회당의 창립 멤버였다. 1989년 10월 23일 의회에서 헌법의 공산주의적 성격을 제거하는 헌법 개정안이 통과된 후, 네메트는 제3헝가리 공화국의 초대 (임시) 총리이자 헝가리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5. 총리직 수행 이후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네메트는 국제 무대와 헝가리 국내 정치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5.1. 유럽부흥개발은행 (EBRD)
1990년 공산주의 붕괴 이후 헝가리에서 처음으로 치러진 자유 선거에서 언털 요제프에게 패배한 후, 네메트는 1990년 5월 23일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는 1991년 4월까지 세렌치의 무소속 의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네메트는 런던에 본부를 둔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의 부총재로 재직했다. EBRD는 동유럽 및 중앙유럽 국가들과 구 소련 국가들의 민주적 시장 경제로의 전환을 지원하기 위해 국제 사회가 설립한 금융 기관이다. 그는 2000년에 EBRD를 떠나 헝가리로 귀국했다.
5.2. 후기 정치 활동 및 UN 조사
헝가리로 돌아온 후, 네메트는 야당인 헝가리 사회당의 총리 후보로 지명되려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메제시 페테르가 그 역할에 임명되었고, 메제시는 이후 총리가 되었다. 2000년과 2006년에도 정계 복귀를 시도했으나, 헝가리 사회당이 그의 입당을 거부하면서 실패하기도 했다.
2007년, 네메트는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에 의해 유엔 개발 계획(UNDP)이 북한에 자금을 불법적으로 사용한 혐의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에 앞서 중앙정보국(CIA)은 케말 데르비시 행정관에게 북한 정권이 식량 원조의 일환으로 보내진 지폐를 위조하고 재인쇄했다고 통보했다. 네메트는 3인 조사 위원회를 이끌었으며, 이 위원회는 이러한 무단 자금 사용과 카이로 및 마카오에 있는 배포 지점의 존재를 확인했다. 2008년 6월, 38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5.3. 수상 및 인정
네메트는 1993년 헤리엇-와트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과 유럽의 통합에 기여한 공로로, 2014년 6월에는 포인트 알파 상을 수상했다. 네메트는 또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레흐 바웬사 및 독일 정치인들과 함께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6. 이념 및 정치적 견해
네메트 미클로시는 경제 개혁과 민주주의 전환이라는 맥락에서 그의 핵심 신념과 정치적 이념을 보여주었다. 그가 수학했던 카를 마르크스 경제대학교는 1968년 신경제 메커니즘을 도입하며 시장 및 자본주의 요소를 헝가리 경제 시스템에 반영하려는 개혁 지향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네메트 자신도 이 신경제 메커니즘 설계에 참여했으며, "굴라시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 연구를 수행하는 등 초기부터 개혁적 경제 사상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국가 계획 사무소와 당 경제 부서에서 근무하며 헝가리의 막대한 공공 부채와 이중 장부 운영의 실상을 파악하게 되었고, 이는 그가 경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국제 통화 기금(IMF)과의 협상을 주도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나 도이체 방크로부터 대출을 모색하는 등 서방과의 경제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는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헝가리 경제의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그의 실용주의적 접근을 보여준다.
총리 재임 중 그는 내각을 "전문가 정부"로 개편하고, 헝가리 사회노동당의 권한을 국회로 이전하는 등 일당 독재 체제를 해체하고 민주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제도적 변화를 이끌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국경 개방을 통해 동독 주민들의 서독 이동을 허용하고,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서독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여 철의 장막을 걷어낸 것은 그의 민주주의와 유럽 통합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사회적 형평성보다는 시장 경제 도입과 민주주의 체제 전환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는 헝가리의 미래를 위한 필수적인 단계로 여겨졌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단순한 공산주의 지도자가 아니라,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민주적 가치를 향해 나아간 개혁가였음을 보여준다.
7. 사생활
미클로시 네메트는 1971년 에르제베트 실라기(Erzsébet Szilágyi)와 결혼했으며, 시민 결혼식 이후 교회 결혼식도 올렸다.
8. 평가 및 유산
네메트 미클로시의 총리 재임 기간은 헝가리의 역사적 전환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그의 행동과 유산은 긍정적 평가와 함께 일부 비판도 받았다.
8.1. 긍정적 평가
네메트는 헝가리의 민주주의 전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의 정부가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하여 동독 주민들의 서독 이동을 허용한 결정은 베를린 장벽 붕괴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독일과 유럽의 통합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 공로로 2014년 포인트 알파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헝가리 사회노동당의 해체와 헝가리 사회당으로의 전환을 이끌고, 제3헝가리 공화국의 초대 총리가 됨으로써 헝가리의 평화로운 민주주의 이행을 성공적으로 관리했다는 찬사를 받는다. 그는 공산주의 체제의 마지막 총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주도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8.2. 비판과 논란
네메트의 경력은 여러 비판과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하버드 유학 시절 중앙정보국(CIA)에 의해 스카우트되었다는 강경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혐의를 받았으나, 그는 이를 "터무니없다"고 일축했다. 총리 재임 초기에는 그로스 카로이 전 총리에 의해 전화가 도청되는 등 당내 강경파와의 갈등을 겪기도 했다. 또한 동독 시민들의 자유 통과를 허용한 결정으로 인해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미국의 스파이"로, 반공주의자들에게는 "소련의 스파이"로 불리며 양측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이중적인 비판에 직면했다. 2000년과 2006년에 헝가리 사회당을 통해 정계 복귀를 시도했으나, 당이 그의 입당을 거부하면서 실패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이루어진 개혁과 전환은 헝가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