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과 배경
나이젤 데이비드 쇼트는 1965년 6월 1일 랭커셔주 리에서 데이비드 쇼트와 진 쇼트 부부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언론인이었고 어머니는 학교 비서였다. 그는 그레이터 맨체스터의 애서턴에서 성장했으며, 볼턴 올드 로드에 위치한 세인트 필립 초등학교에 다녔다. 이후 사립 학교인 볼턴 스쿨과 리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쇼트는 다섯 살 때 아버지가 형 마틴에게 체스를 가르치는 것을 보고 체스를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가 설립한 애서턴 체스 클럽과 이후 볼턴 체스 클럽의 회원이었다. 볼턴 체스 클럽은 그가 일곱 살 때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그를 거부했었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13세 때 이혼했다. 쇼트는 17세에 네 과목의 O-레벨을 마친 후 체스에 전념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2. 체스 신동으로서의 성장과 그랜드마스터 달성

쇼트는 다섯 살 때 아버지로부터 체스를 배웠다. 그는 체스 신동으로, 열 살 때 런던에서 열린 31개 보드 동시 시범 경기에서 당시 세계 랭킹 2위였던 빅토르 코르치노이를 유일하게 꺾으며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거의 독학으로 체스를 익혔다. 1977년에는 12세 생일을 사흘 앞두고 노스 웨스트 존을 통과하여 영국 체스 선수권 대회 역사상 최연소 참가자가 되었다. 이 대회에서 그는 10회 영국 챔피언인 조너선 펜로즈를 꺾었으며, 데뷔 선수로는 뛰어난 성적인 5/11을 기록했다.
이 시기 동안 쇼트는 영국 유소년 체스를 압도했으며, 1977년 영국 결승전에서의 활약으로 마스터 레이팅을 획득했다. 1978년에는 13세 5개월 11일의 나이로 영국 라이트닝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첫 성인 국내 타이틀을 획득했고, 1980년에도 다시 우승했다. 1979년 체스터에서 열린 영국 선수권 대회에서 존 넌과 로버트 벨린과 공동 1위를 차지하며 첫 국제 마스터 노름을 획득했다. 타이 브레이크에서는 벨린이 우승했다. 1979년 후반에는 프랑스 벨포르에서 열린 16세 이하 세계 선수권 대회인 세계 카데트 챔피언십에서 공동 1위를 차지했으나, 타이 브레이크에서 아르헨티나의 마르셀로 템포네에게 패했다. 그는 1979/80년 헤이스팅스 프리미어에서 8/15를 기록하며 당시 바비 피셔가 1958년에 세운 기록을 깨고 체스 역사상 최연소 국제 마스터가 되었다.
네 차례의 세계 주니어 체스 선수권 대회 (1980~1983년)에 참가했으며, 1980년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첫 대회에서 가리 카스파로프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쇼트는 1983년 플로브디프에서 열린 유럽 팀 결승전에서 처음으로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국제 팀 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1984년 19세의 나이로 그랜드마스터 타이틀을 획득하며 당시 세계 최연소 그랜드마스터가 되었다. 이 기록은 이후 시멘 아그데스테인에 의해 경신되었다.
3. 세계 챔피언십 도전
나이젤 쇼트는 세계 챔피언십 타이틀 도전을 위해 여러 차례 도전자 결정전에 참여하며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쇼트의 세계 체스 선수권 대회 타이틀 도전은 1985년 비엘 인터조널에서 간신히 예선을 통과하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존 판 데르 빌과 에우헤니오 토레와 공동 3위를 기록한 후 마지막 진출권을 위해 플레이오프를 거쳐 도전자 결정전에 진출한 영국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몽펠리에 도전자 결정전에서는 7/15를 기록하며 10위에 그쳐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다음 사이클에서는 1987년 수보티차 인터조널에서 존 스필먼과 함께 우승하며 다시 예선을 통과했다. 이때 도전자 결정전은 전통적인 매치 형식으로 돌아왔다. 쇼트는 1988년 캐나다 세인트존에서 줄라 삭스를 꺾었으나 (+2=3), 런던에서 스필먼에게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했다 (-2=3).
쇼트의 다음 도전은 가장 성공적이었다. 그는 마닐라 인터조널 마지막 라운드에서 미하일 구레비치를 꺾고 바실리 이반추크와 보리스 겔판트에 이어 비스와나탄 아난드와 공동 3위를 차지하며 세 번째 연속으로 도전자 결정전에 진출했다. 8강전에서 다시 스필먼을 만나 런던에서 접전 끝에 (+2-2=4) 무승부를 기록한 후 타이 브레이크에서 1.5-0.5로 승리했다. 브뤼셀에서 열린 4강전에서는 겔판트를 상대로 치열한 혈투 끝에 (+4-2=2) 승리했다. 1992년 준결승에서는 전 세계 챔피언 아나톨리 카르포프를 꺾었다 (+4-2=4). 이 경기는 "한 시대의 종말"로 묘사되었다. 스페인 산로렌소데엘에스코리알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네덜란드의 얀 팀만을 꺾고 (+5-3=5) 디펜딩 세계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와 대결할 권리를 얻었다. 특히 1991년 틸뷔르흐에서 얀 팀만을 상대로 쇼트가 승리한 경기에서 보여준 킹 워크는 최근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경기 중 하나로 손꼽히며, FM 그레이엄 버지스, GM 존 넌, 존 엠스가 선정한 100대 체스 경기 목록에 포함되었다.
3.1. 세계 타이틀 매치, 런던 1993
쇼트와 카스파로프에 따르면, 당시 체스 세계 기구인 FIDE의 수장인 플로렌시오 캄포마네스는 FIDE 규칙을 위반하여 선수들과 협의 없이 매치 장소(맨체스터)와 상금을 결정했다. 영국의 WIM이자 작가인 캐시 포브스는 자신의 저서 『나이젤 쇼트: 왕관을 향한 탐구』(1993)에서 1993년 입찰 과정에서 FIDE가 세계 챔피언십 매치에 대한 적합한 입찰을 실제로 받은 적이 없다고 기술했다. 이에 쇼트와 카스파로프는 즉시 경쟁 단체인 PCA를 결성했다. 그 결과 더 타임스 신문사의 후원으로 1993년 9월부터 10월까지 런던에서 PCA 주최로 세계 챔피언십 매치가 개최되었다. 이 경기에서 카스파로프는 (+6-1=13)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미하일 보트비니크가 1961년 미하일 탈을 꺾은 이후 세계 타이틀전에서 가장 큰 승리 마진이었다.
3.2. 논란
카스파로프와 쇼트가 주도한 전례 없는 반란으로 인해 FIDE는 자체적으로 평행한 세계 챔피언십 사이클을 조직했으며, 1993년 후반 아나톨리 카르포프와 얀 팀만이 타이틀 매치를 치러 카르포프가 승리했다. 쇼트와 카스파로프는 모두 FIDE로부터 징계를 받았으며, 이 상황은 이후 몇 년 동안 체스계에 엄청난 논란과 혼란을 야기했다.
4. 주요 대회 결과

나이젤 쇼트는 다수의 국내 및 국제 체스 대회에서 우승하며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쇼트는 영국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 1984년, 1987년, 1998년에 우승했으며, 1991년(이 대회가 개최된 유일한 해)에는 잉글랜드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는 영연방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 2004년(뭄바이), 2006년(뭄바이), 2008년(나그푸르)에 챔피언에 올랐다. 2006년 리버풀에서 열린 EU 개인 오픈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고, 2008년 같은 장소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공동 2위를 차지했다.
그는 이 외에도 수십 개의 다른 국제 토너먼트에서 단독 1위 또는 공동 1위를 차지했다.
- 1979년 제네바, 벨포르 (16세 이하 세계 선수권 대회)
- 1981년 BBC 마스터 게임
- 1982년 암스테르담 OHRA
- 1983년 바쿠
- 1984년 에스비에르
- 1986년 영국 래피드 플레이 체스 선수권 대회
- 1986년, 1987년 베이크안제이
- 1987년 레이캬비크
- 1988년, 1991년, 1992년, 1993년 암스테르담 VSB
- 1987/88년, 1988/89년 헤이스팅스
- 1996년 패르누, 흐로닝언
- 1998년 탈린/패르누, 맨섬 모나크 어슈어런스
- 1999년 다카 유나이티드 인슈어런스, 심켄트
- 1999/2000년 팜플로나
- 2000년 리나레스 오픈, 베이징 탄 친 남 컵
- 2002년, 2009년, 2013년 시게만 앤 코 말뫼 (2013년에는 리하르트 라포르트 및 닐스 그란델리우스와 공동 1위)
- 2003년, 2004년, 2012년 지브롤터
- 2003년 부다페스트 헝게스트 호텔, 삼바 컵 스칸데르보르
- 2004년 타이위안
- 2006년 폴리티켄 컵
- 2008년 바즈나
- 2009년 스톤턴 기념 대회
- 2011년, 2012년, 2015년, 2017년 방콕 체스 클럽 오픈
- 2011년 루안다
- 2012년 제7회 에드먼턴 국제 대회, 번래티 (2012년, 2016년, 2017년, 2020년에도 우승), RA 클럽 오타와, 퓌하얘르베 래피드 체스 토너먼트
- 2013년 스파이스넷 탄자니아 오픈
- 2014년 포커스타즈 맨섬, 자우 윈 레이 기념 양곤
- 2015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오픈
- 2016년 제1회 스타스 컵 안잘리, 영국 녹아웃 챔피언십
- 2017년 바콜로드 네그로스 오픈
- 2018년 캄팔라 프리-리그 블리츠 오픈, GM 나이젤 쇼트 블리츠 라고스
- 2022년 킴벌리 모자 GM 토너먼트
2013년 오타와에서 열린 제50회 캐나다 오픈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 캐나다 그랜드마스터 에릭 한센과 7.5/9의 무패 기록으로 공동 1위를 차지한 후 타이 브레이크에서 승리하며 우승했다. 쇼트의 가장 뛰어난 토너먼트 성과는 1991년 암스테르담 VSB 토너먼트에서 나왔다. 이 대회에서 그는 발레리 살로프와 공동 1위를 차지했으며, 가리 카스파로프와 아나톨리 카르포프를 모두 앞섰다.
5. 주요 매치 결과
나이젤 쇼트는 세계 챔피언십 사이클 외에도 여러 주목할 만한 매치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 1985년 매사추세츠주 폭스버러에서 미국 챔피언 레브 알부르트를 7-1 (+6=2)로 꺾었다.
- 1995년 자카르타에서 우투트 아디안토를 꺾었다 (+3=3).
- 2000년 알베르트에서 에티엔 바크로를 꺾었다 (+3-1=2).
- 2002년 레이캬비크에서 한네스 스테판손을 꺾었다 (+4-1=1).
- 2003년 테헤란에서 에산 가엠 마가미를 꺾었다 (+2=4).
- 2009년 무카체보에서 자하르 예피멘코를 꺾었다 (+2-1=3).
- 2016년 호게벤에서 허우이판을 꺾었다 (+2-1=3).
그는 1983년 런던에서 조엘 벤저민에게 2.5-1.5로 패배했고, 1988년 마닐라에서 에우헤니오 토레와 무승부 (+1-1=4)를 기록했다. 1989년 힐베르쉼에서 열린 시범 경기에서는 팀만과 3-3 무승부를 기록했다. 1994년 뉴욕에서 열린 PCA 도전자 결정전 8강전에서 보리스 굴코를 추가 경기 끝에 꺾었다. 1995년 리나레스에서 열린 PCA 준결승에서는 가타 캄스키에게 5.5-1.5로 패배했다. 2010년 암스테르담에서 아니시 기리와 무승부 (+1-1=2)를 기록했다.
2013년 3월 테헤란에서 이란 선수 에산 가엠 마가미와 두 번째 매치를 치렀다. '토킹 체스(Talking Chess)'라고 불린 이 대결은 클래식 타임 컨트롤 4경기, 래피드 체스 4경기, 블리츠 체스 8경기로 구성되었다. 클래식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선수들은 라이브 및 TV 시청자들이 선수들의 생각과 평가를 비교하고 대조할 수 있도록 간헐적인 실시간 해설을 제공했다. 쇼트는 클래식 경기 (+2=2), 래피드 경기 (+3-1), 블리츠 경기 (+3-2=3)에서 모두 승리했다.
6. 국제 팀 대회 기록
나이젤 쇼트는 잉글랜드 국가대표로서 수많은 국제 팀 대회에 참가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쇼트는 17세의 나이로 1983년 플로브디프에서 열린 유럽 팀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 국제 팀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1984년부터 2016년까지 17회 연속 체스 올림피아드에서 잉글랜드 대표로 출전했다.
쇼트의 주요 성과는 다음과 같다.
- 팀 은메달: 1984년 테살로니키, 1986년 두바이 (이 대회에서 3번 보드 개인 최고 성적으로 금메달도 획득), 1988년 테살로니키 올림피아드.
- 팀 동메달: 1990년 노비사드 올림피아드.
- 4위: 1994년 모스크바와 1996년 예레반 올림피아드에서 잉글랜드 팀을 4위로 이끌었다.
- 1997년 풀라에서 열린 유로팀 대회에서 잉글랜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 1992년 동메달 획득 팀의 일원이었으며, 1983년과 2001년 4위 팀의 일원이었다.
- 세계 팀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는 1985년 (팀 동메달), 1989년 (팀 동메달), 1997년 (팀 4위) 세 차례 잉글랜드 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 1984년 제26회 체스 올림피아드에서 태국 선수 프리차 신프라윤과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가 주요 국제 팀 대회에서 잉글랜드 대표로 출전한 전체 기록은 다음과 같다.
대회 | 연도 | 보드 | 점수 | 결과 | 팀 메달 | 개인 메달 |
---|---|---|---|---|---|---|
올림피아드 | ||||||
테살로니키 | 1984 | 2번 예비 | 3/6 (+1-1=4) | 은메달 | ||
두바이 | 1986 | 3번 | 10/13 (+8-1=4) | 은메달 | 금메달 | |
테살로니키 | 1988 | 1번 | 7/12 (+3-1=8) | 은메달 | ||
노비사드 | 1990 | 1번 | 6/12 (+2-2=8) | 동메달 | ||
마닐라 | 1992 | 1번 | 6/11 (+3-2=6) | |||
모스크바 | 1994 | 1번 | 8.5/13 (+6-2=5) | |||
예레반 | 1996 | 1번 | 7/12 (+3-1=8) | |||
엘리스타 | 1998 | 2번 | 6.5/11 (+2-0=9) | |||
이스탄불 | 2000 | 2번 | 7/12 (+3-1=8) | |||
블레드 | 2002 | 2번 | 8.5/13 (+5-1=7) | |||
칼비아 | 2004 | 2번 | 1.5/4 (+1-2=1) | |||
토리노 | 2006 | 2번 | 8/11 (+5-0=6) | |||
드레스덴 | 2008 | 2번 | 7/10 (+6-2=2) | |||
한티만시스크 | 2010 | 2번 | 4/8 (+2-2=4) | |||
이스탄불 | 2012 | 3번 | 7.5/10 (+6-1=3) | |||
트롬쇠 | 2014 | 3번 | 1.5/5 (+1-3=1) | |||
바쿠 | 2016 | 예비 | 6.5/9 (+5-1=3) | |||
유럽 팀 선수권 대회 | ||||||
플로브디프 | 1983 | 7번 | 4.5/7 (+3-1=3) | 4위 | ||
데브레첸 | 1992 | 1번 | 5.5/8 (+4-1=3) | 동메달 | 동메달 | |
풀라 | 1997 | 1번 | 4/7 (+2-1=4) | 금메달 | ||
바투미 | 1999 | 1번 | 5/8 (+3-1=4) | |||
레온 | 2001 | 2번 | 6/9 (+3-0=6) | 4위 | ||
포르토 카라스 | 2011 | 2번 | 3/7 (+2-3=2) | |||
바르샤바 | 2013 | 3번 | 4.5/7 (+2-0=5) | |||
레이캬비크 | 2015 | 4번 | 3/5 (+2-1=2) | |||
헤르소니소스 | 2017 | 2번 | 3.5/7 (+2-2=3) | |||
세계 팀 선수권 대회 | ||||||
루체른 | 1985 | 4번 | 4/8 (+1-1=6) | 동메달 | ||
루체른 | 1989 | 1번 | 4.5/8 (+3-2=3) | 동메달 | 은메달 | |
루체른 | 1997 | 1번 | 4/8 (+0-0=8) | 4위 | ||
세계 시니어 팀 선수권 대회 | ||||||
드레스덴 | 2015 | 1번 | 7/8 (+6-0=2) | 동메달 | 금메달 | |
헤르소니소스 | 2017 | 1번 | 8/9 (+7-0=2) | 동메달 | 금메달 |
7. 체스 스타일과 철학
쇼트가 백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오프닝은 다음과 같다.
- 시실리안 디펜스 (561회): B90, B23, B40, B33, B32
- 루이 로페즈 (218회): C84, C92, C78, C86, C77
- 프렌치 디펜스 (155회): C11, C18, C10, C19, C01
- 카로칸 디펜스 (113회): B12, B10, B17, B11, B18
- 루이 로페즈, 클로즈드 (109회): C84, C92, C86, C90, C95
- 시실리안 나이도르프 (106회): B90, B92, B93, B91, B97 (포이즌드 폰 변화)
흑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오프닝은 다음과 같다.
- 프렌치 디펜스 (233회): C11, C05, C18, C03, C02
- 루이 로페즈 (153회): C92, C72, C69, C95, C84
- 퀸즈 폰 게임 (124회): E00, D02, A40, A46, A45
- 퀸즈 갬빗 디클라인드 (113회): D37, D35, D30, D36, D31
- 님조인디언 디펜스 (104회): E34, E21, E42, E32, E41
- 프렌치 타라시 (91회): C05, C03, C07, C09, C04
8. 기타 활동 및 역할
나이젤 쇼트는 선수 활동 외에도 체스계의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쇼트는 2018년 10월 FIDE의 여러 부회장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2022년 9월부터는 FIDE 체스 개발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영국의 신문인 더 선데이 타임스, 데일리 텔레그래프, 데일리 메일, 더 스펙테이터에 체스 칼럼과 서평을 기고했다. 그는 10년 동안 더 선데이 텔레그래프에 기고했으며, 2005년부터 2006년 10월 19일까지는 더 가디언에 글을 썼다. 그는 체스베이스 웹사이트에 2005년 FIDE 세계 체스 선수권 대회에 대해 보도했다. 2011년 1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뉴 인 체스(New in Chess)』 잡지에 "쇼트 스토리(Short Stories)"라는 칼럼을 연재했다. 2013년 세계 체스 선수권 대회 기간 동안에는 『인디언 익스프레스』에 일련의 기사를 기고했다. 2014년에는 『파이낸셜 타임스』에 칼럼을 쓰기 시작했으며, 첫 기사에서는 솔 캠벨을 인터뷰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젊은 신동들인 펜탈라 하리크리슈나, 세르게이 카랴킨, 데이비드 하웰, 파리마르잔 네기를 코치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국가 대표팀 코치로 일했다. 그의 첫 임무는 2006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서 이란 팀이 예상치 못하게 동메달을 획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2007년 마카오에서 열린 아시아 실내 경기대회의 9개 체스 종목에서 이란은 은메달 1개와 동메달 2개를 획득했다.
쇼트는 1993년 당시 볼턴 고등 교육 기관의 명예 펠로우로 임명되었으며, 2010년에는 볼턴 대학교에서 명예 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9년 체스 업적을 인정받아 MBE를 수훈했다. 2005년 8월에는 만장일치로 영연방 체스 협회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고, 2006년 6월에는 회장이 되었으며, 2008년 1월에 사임했다. 그는 2009년부터 2014년까지 ECF의 FIDE 대표를 역임했다.
최근 몇 년간 중요한 체스 대회에서 쇼트는 종종 인터넷 생중계의 해설자로 참여했다. 체스 역사가 에드워드 윈터는 그를 5대 인터넷 방송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2021년 출간된 그의 저서 『위닝(Winning)』의 서문에서 쇼트는 "이것은 저의 첫 책이며, 전 세계적인 팬데믹이 저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만들었습니다"라고 밝혔고, "제 이름이 표지에 있는 모든 책들은 - 그리고 그것을 구매하신 분들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 모두 대필된 것이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라고 언급했다. 2021년 10월 체스닷컴 블로그 게시물에서는 익명의 그랜드마스터 플레이어 "honestgirl"이 사실은 나이젤 쇼트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들의 게임 변형에 대한 유사한 선호도와 "honestgirl"이 "Nigel Short"의 아나그램이라는 사실에 기반한 것이었다.
9. 논란 및 공개 발언

나이젤 쇼트는 체스계 내외에서 여러 논란과 공개 발언으로 주목받았다.
2001년 쇼트는 더 선데이 텔레그래프 체스 칼럼에 자신이 인터넷 체스 클럽 온라인 체스 플랫폼에서 은둔해 있던 전 체스 챔피언 바비 피셔와 스피드 체스 경기를 비밀리에 플레이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피셔는 해당 계정의 소유권을 부인했다.
2007년 1월 쇼트는 인도 신문 『DNA』와의 인터뷰에서 베셀린 토팔로프가 산 루이스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주장을 조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같은 『DNA』 인터뷰에서 쇼트는 2005년과 2006년 세계 선수권 대회의 항소 위원회 위원들의 역할, 특히 FIDE 부회장 주랍 아즈마이파라슈빌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아즈마이파라슈빌리를 "자신이 2003년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부정행위를 통해 우승했음을 스스로 인정한 점을 고려할 때, 그러한 업무에 전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묘사했다. 아즈마이파라슈빌리는 FIDE 윤리 위원회에 공식 불만을 제기했고, 윤리 위원회는 2007년 7월에 소집되었다. 위원회는 쇼트에 대한 주요 불만 사항은 기각했지만, 그가 "멍청이(dunderhead)"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FIDE 윤리 강령의 경미한 위반으로 징계했다.
2015년 쇼트는 남성이 여성보다 체스에 생물학적으로 더 적합하며, 여성은 다른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아내의 뛰어난 감성 지능을 예로 들었다. 이러한 발언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에 대해 쇼트는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하며, 한 인터뷰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상당히 큰 격차가 있음을 입증하기는 아주 쉽다"고 주장했고, 유디트 폴가르에게 반복적으로 패배한 것은 "무관하다"고 일축했다.
10. 개인적인 삶
쇼트는 그리스에 거주하며 1987년 드라마 치료사 레아 아르기로 카라게오르기우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명의 자녀가 있다. 그는 무신론자이다.
11. 저작
나이젤 쇼트가 직접 저술하거나 공동 저술한 주요 서적은 다음과 같다.
- 『나이젤 쇼트의 체스 기술(Nigel Short's Chess Skills)』 (1989년, 햄린)
- 『체스 기초(Chess Basics)』 (1993년, 스털링 퍼블리싱)
- 『위닝(Winning)』 (2021년, 퀄리티 체스)
12. 평가 및 영향
나이젤 쇼트는 19세에 그랜드마스터 타이틀을 획득하고 세계 랭킹 3위에 오르는 등 뛰어난 재능으로 영국 체스계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특히 1993년 가리 카스파로프와의 세계 챔피언십 매치는 영국 선수로는 최초의 도전이었으며, 이는 체스 역사상 큰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 매치는 FIDE의 독단적인 결정에 반발하여 PCA를 설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체스계에 큰 논란과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수많은 국제 대회에서 우승하며 꾸준히 최정상급 기량을 유지했으며, 체스 올림피아드 등 국제 팀 대회에서 잉글랜드 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여러 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선수 활동 외에도 FIDE 부회장 및 체스 개발국장으로서 행정적 역할, 신문 칼럼니스트 및 온라인 해설가로서 언론 활동, 그리고 젊은 신동들을 지도하는 코치로서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특히 이란 국가대표팀 코치로서 아시안 게임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데 기여하며 개발도상국 체스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만, 여성 체스 선수에 대한 공개 발언 등 일부 논란은 그의 평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트는 영국 체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경력과 활동은 체스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체스 발전에 다방면으로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