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가타 캄스키(Gata Kamsky, Гата Камский가타 캄스키타타르어; Гата Камский가타 캄스키러시아어; 1974년 6월 2일 출생)는 소련에서 태어난 미국의 체스 그랜드마스터이자 다섯 차례의 미국 챔피언이다. 그는 체스 신동으로 알려져 있으며, 22세의 나이에 1996년 FIDE 세계 체스 선수권대회 결승에 진출했고, 1995년에는 세계 랭킹 4위에 올랐다.
캄스키는 1997년부터 2004년 말까지 FIDE 레이팅 게임에 거의 참여하지 않으며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2004년 이후 체스계로 복귀하여 2007년 체스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다시 주목받았다. 이 우승으로 베세린 토팔로프와의 세계 챔피언십 도전자 결정전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으나 패배했다. 또한 2011년 도전자 결정전에도 참가했으나 보리스 겔판드에게 패하며 최종 도전자 등극에는 실패했다. 그는 오랜 경력 동안 뛰어난 체스 실력과 역경을 딛고 재기한 모습으로 체스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그의 아버지와 관련된 논란도 있었다.
2. 초기 삶과 배경
가타 캄스키의 어린 시절과 가족 배경, 그리고 그가 체스 신동으로 성장하는 과정 및 미국 이주 후의 초기 경력은 그의 삶과 체스 커리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1. 어린 시절과 초기 체스 경력
캄스키는 1974년 6월 2일 러시아 노보쿠즈네츠크의 타타르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 '캄스키'는 카잔에 타타르 드라마 극장을 설립한 그의 할아버지 가타울라 "캄스키" 사비로프의 무대 예명에서 유래했다.
그는 12세에 베테랑 그랜드마스터 마르크 타이마노프를 토너먼트 경기에서 꺾었고, 같은 해에 내셔널 마스터 타이틀을 획득하며 체스 신동으로서의 재능을 일찍이 드러냈다. 캄스키는 1987년과 1988년에 소련 U-20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그의 아버지 루스탐(Röstäm 또는 Rustam으로도 표기)은 전직 복서였으며, 캄스키의 체스 훈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캄스키를 엄격하게 지도하며 거의 체스에만 전념하게 했고, 그의 코치이자 매니저 역할을 수행했다.
2.2. 미국 이주와 그랜드마스터 칭호
1989년, 캄스키는 아버지 루스탐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들의 미국 정착은 아메리칸 체스 재단의 전무이사였던 앨런 카우프만이 지원을 주선했고, 사업가 제임스 케인이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면서 이루어졌다.
미국으로 건너간 1989년, 캄스키는 뉴욕에서 열린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며 가리 카스파로프와의 2게임 매치 도전권을 획득했으나, 그 매치에서는 0-2로 패배했다. 1990년, 16세의 나이에 아직 타이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계 체스 선수권대회를 향한 첫 단계인 마닐라에서 열린 64인 인터조널 토너먼트에 참가하여 13경기에서 5.5점을 기록했다. 같은 해, FIDE는 캄스키에게 그랜드마스터 칭호를 수여했다. 이듬해인 1991년에는 미국 체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미국 무대에서의 첫 주요 타이틀을 획득했다. 캄스키는 또한 다른 권위 있는 체스 토너먼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1994년 라스팔마스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
3. 전성기: 세계 챔피언십 도전자 (1993-1996)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캄스키는 세계 챔피언 타이틀에 도전하며 전성기를 보냈으며, 여러 중요한 대국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3.1. FIDE 및 PCA 후보 결정전
1993년, 당시 라이벌 관계였던 FIDE와 PCA는 각각 인터조널 토너먼트를 개최했다. 캄스키는 두 대회 모두에 참가하여 각 기구의 후보 결정전에 진출할 자격을 얻었다. 이 두 후보 결정전은 주로 캄스키와 비스와나탄 아난드가 주도했다.
1994년-1995년 FIDE 후보 결정전의 첫 라운드에서 캄스키는 파울 판 더 스테런을 3승 3무 1패로 꺾었다. 1994년 7월과 8월 인도 산기 나가르에서 열린 캄스키와 아난드의 2라운드 (준결승) 경기는 더욱 극적이었다. 첫 두 게임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후, 아난드가 다음 두 게임을 이겨 3-1로 크게 앞서나갔다. 5번째 게임은 무승부였다. 이후 캄스키는 남은 세 게임에서 2.5-0.5를 기록하며 4-4 (2승 4무 2패)로 경기를 동점으로 만들었고, 이어진 두 번의 쾌속 체스 플레이오프 게임에서 승리하며 매치에 승리했다. 1995년 2월 산기 나가르에서 열린 3라운드 (결승)에서는 발레리 살로프를 5.5-1.5 (4승 3무 0패)로 완파했다.
1994년-1995년 PCA 후보 결정전에서는 캄스키가 1994년 6월 뉴욕에서 열린 8강전에서 블라디미르 크람니크를 꺾었다. 1994년 9월에는 스페인 리나레스에서 열린 준결승에서 나이절 쇼트에게 승리했다. 그러나 1995년 3월 라스팔마스에서 아난드와의 결승전에서는 FIDE 때와는 달리 캄스키가 패배했다 (1승 7무 3패). 1994년 9월 쇼트와의 경기에서는 캄스키의 아버지 루스탐 캄스키와 쇼트 사이에 공개적인 대립이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3.2. 1996년 FIDE 세계 체스 선수권대회
1996년, 캄스키는 칼미키야의 엘리스타에서 열린 FIDE 세계 체스 선수권대회 타이틀을 놓고 아나톨리 카르포프와 20경기 매치를 펼쳤다. 이 경기에서 캄스키는 7.5-10.5 (3승 9무 6패)로 패배하며 세계 챔피언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다.
4. 일시적 은퇴와 학업 (1996-2004)
카르포프와의 세계 챔피언십 매치에서 패배한 후, 캄스키는 프로 체스 활동을 중단하고 학업에 집중하는 시기를 가졌다.
4.1. 학업
캄스키는 카르포프에게 패배한 후 프로 체스를 그만두었다. 그는 1999년 브루클린 칼리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며 졸업했다. 이후 뉴욕의 투로 로스쿨에 진학하여 법학을 공부하고 졸업했다.
4.2. 체스계의 잠시 복귀
캄스키가 카르포프에게 패배한 후 처음으로 레이팅이 매겨진 경기를 치른 것은 1999년이었다. 그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FIDE 녹아웃 월드 챔피언십 이벤트에 참가하여, 결국 토너먼트 우승자가 된 알렉산더 칼리프만과 1라운드 2게임 매치를 가졌다. 캄스키는 첫 게임을 이겼지만 두 번째 게임에서 패했고, 이어진 쾌속 체스 플레이오프에서도 패배했다. 이 짧은 복귀 외에는 1997년부터 2004년까지 거의 모든 FIDE 레이팅 게임에 참여하지 않았다.
5. 복귀 및 후기 경력 (2004-현재)
캄스키는 2004년 프로 체스계로 복귀한 이후, 여러 주요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며 다시금 세계 최고 수준의 기량을 선보였다.
5.1. 경쟁 체스 복귀
캄스키는 1999년의 짧은 2게임 매치를 제외하고 8년 동안 체스계에서 은퇴해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중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04년 3월 체스베이스가 샘 슬론이 그와 대화했다고 보도했을 때였다.
캄스키는 2004년 6월 15일 제106회 뉴욕 마스터스에 참가할 때까지 공개적으로 경기를 하지 않았다. 이 대회에서 그는 하루에 네 경기를 치렀고, 모든 수에 30분의 시간 제한이 있었다. 그는 2승 2무를 기록하여 다른 네 명의 선수와 함께 1위를 차지했다. 이후 그는 주간으로 열리는 이 이벤트에 몇 차례 더 참가하여 다양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2004년 11월부터 12월에 열린 2005년 미국 챔피언십에서 정식 체스계로 복귀하여 5.5-3.5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2005년 4월 FIDE 엘로 레이팅 목록에서 2700점의 레이팅으로 세계 랭킹 19위에 올랐다. 그는 2005년 5월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2005년 HB 글로벌 챌린지 토너먼트에서 무패의 좋은 성적을 거둔 후, 2005년 7월 목록에서도 이 레이팅을 유지하며 18위로 올라섰다.
이후 그는 국제 체스계로 돌아와 베세린 토팔로프에 이어 M-텔 마스터스 이벤트에서 2위를 차지하는 등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직후 캄스키는 토리노에서 열린 2006년 체스 올림피아드에서 미국 팀을 동메달로 이끌었다. 2006년 7월 4일, 그는 필라델피아 월드 오픈에서 다른 아홉 명의 선수와 함께 1위를 차지한 후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약 7000 USD의 상금을 획득했다. 2007년에 거둔 여러 성공은 그의 은퇴 이전의 기량 수준으로 돌아왔음을 시사하며, 세계 체스계 최고위층의 도전자가 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5.2. 월드컵 우승 및 후보 결정전
캄스키는 2005년 체스 월드컵에 참가했고, 2007년 5월-6월에 열린 2007년 세계 체스 선수권대회의 후보 결정전에 진출할 자격을 얻었다. 그는 1라운드에서 에티엔 바크로를 3승 0패 1무로 이겼지만, 2라운드에서 보리스 겔판드에게 0승 2패 3무로 패배하며 탈락했다.
2007년 11월-12월, 캄스키는 2007년 체스 월드컵에 참가했다. 11번 시드를 받은 그는 첫 세 라운드를 통과한 후 표트르 스비들레르, 전 FIDE 세계 챔피언 루슬란 포노마료프, 그리고 미래의 세계 1위 망누스 칼센을 차례로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는 알렉세이 시로프를 1승 0패 3무로 이기며 우승을 차지하여 체스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캄스키의 월드컵 우승으로 그는 2009년 세계 1위 베세린 토팔로프와 2010년 세계 체스 선수권대회 챔피언인 비스와나탄 아난드에게 도전할 권리를 놓고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이 경기는 2009년 2월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열렸다. 캄스키는 4번째 게임에서 승리하여 매치 스코어를 2-2로 만들었지만, 토팔로프가 마지막 3게임에서 2승을 추가하여 (프랑스 디펜스의 백으로 흥미로운 마지막 라운드 승리 포함) 4.5-2.5로 매치에서 승리했다.
캄스키는 2008년 11월 독일 드레스덴에서 열린 2008년 체스 올림피아드에서 미국 팀의 1번 보드로 출전했다. 미국 팀은 이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캄스키는 2009년 체스 월드컵에도 참가했지만, 3라운드에서 웨슬리 소에게 패하며 탈락했다.
5.3. 다회 미국 챔피언십 및 기타 우승
2010년 1월, 캄스키는 제52회 레지오 에밀리아 체스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 그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졸탄 알마시를 꺾었으나 점수는 동점이었고, 부흐홀츠 타이 브레이크에서 앞서며 우승을 확정 지었다. 2010년 5월에는 바쿠에서 열린 대통령 컵에서 블라디미르 크람니크와 샤흐리야르 마메디아로프와 함께 1위-3위를 기록했다.
2010년 5월 25일, 캄스키는 2위 유리 슐만과의 쾌속 플레이오프 게임에서 승리하며 미국 챔피언이 되었다. 캄스키의 두 번째 미국 챔피언십 우승은 첫 우승 이후 19년 만이었다.
2010년 8월, 캄스키는 마인츠 체스 클래식의 일부인 오픈 그렌케 쾌속 세계 챔피언십에서 11점 만점에 10점을 기록하며 단독 1위를 차지했다. 이 쾌속 체스 토너먼트에서 그는 세계 5위이자 디펜딩 챔피언인 레본 아로냔, 2004년 FIDE 챔피언인 루스탐 카심자노프, 세르게이 카랴킨을 꺾었고, 알렉산더 그리슈크, 알렉세이 시로프를 포함한 다른 강력한 그랜드마스터들을 제치고 타이틀을 획득했다.
2010년 8월 23일부터 8월 31일까지 캄스키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바쿠 오픈에 참가했으며, 그는 최고 시드 선수였다. 그는 마지막 세 게임에서 승리하며 9점 만점에 7.5점으로 단독 1위를 차지했다.
2011년 4월 13일부터 4월 18일까지 캄스키는 미국 챔피언십에 참가했으며, 그는 최고 시드 선수였다。 그는 2년 연속으로 대회에서 우승하며, 1985년 레프 알부르트 이후 처음으로 미국 챔피언십에서 연속 우승한 선수가 되었다. 이 타이틀은 그의 세 번째 미국 챔피언십 우승이었다.
2010년 세계 챔피언십 사이클의 결승 진출자로서, 캄스키는 2012년 세계 체스 선수권대회의 도전자 결정전을 위한 8인 후보 결정전에 자동 진출했다. 후보 결정전은 2011년 5월 카잔에서 4게임 매치 형식으로 시작되었으며, 캄스키는 8강전에서 베세린 토팔로프와 맞붙었다. 2번째 게임에서 그륀펠트 디펜스의 흑으로 승리하며, 캄스키는 최고 시드의 토팔로프를 2.5-1.5로 꺾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는 2009년 체스 월드컵 챔피언인 보리스 겔판드와 대결했는데, 이는 겔판드가 승리했던 2007년 후보 결정전의 재대결이었다. 네 게임 후 매치는 2-2 동점이 되었고, 5월 16일 쾌속 타이 브레이크로 승자가 결정되었다. 쾌속 타이 브레이크에서 캄스키는 3번째 게임을 흑으로 승리하며 2-1로 앞서갔고, 마지막 쾌속 게임에서 백으로 무승부만 기록하면 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겔판드가 흑으로 승리하여 블리츠 플레이오프를 강제했고, 겔판드가 2-0으로 승리하며 캄스키를 탈락시키고 후보 결정전 결승에 진출했다.
2012년 5월, 캄스키는 2012년 미국 체스 챔피언십에 참가했으며, 그는 디펜딩 챔피언 히카루 나카무라에 이어 두 번째 시드였다. 그는 7점 만점에 5점을 기록하여 나카무라, 2006년 챔피언 알렉산더 오니슈크, 2008년 챔피언 유리 슐만과의 라운드 로빈 단계에 진출했다. 라운드 로빈 단계에서 그는 흑으로 나카무라와 무승부를 기록했고, 루이 로페스의 백으로 오니슈크를 꺾었다. 2013년과 2014년에도 그는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2014년의 타이틀은 그의 다섯 번째 미국 챔피언십 우승이었다. 2016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치고린 기념 토너먼트에서 3위를 차지했다. 또한 2021년에는 제54회 비엘 체스 페스티벌 체스 트라이애슬론에서 우승했다.
6. 플레이 스타일과 주목할 만한 게임
캄스키는 공격적이고 전술적인 플레이를 선호하며, 그의 중요한 대국들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6.1. 플레이 스타일
캄스키의 플레이 스타일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제공되지 않으나, 그는 전술적으로 날카롭고 공격적인 기풍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경기를 통해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강력한 공격을 펼치는 경향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6.2. 주목할 만한 게임 분석
다음은 캄스키가 1994년 뉴욕에서 열린 세계 체스 선수권대회 8강전에서 블라디미르 크람니크를 상대로 흑으로 승리한 경기이다. 이 경기는 캄스키의 전술적 역량과 강력한 압박 능력을 잘 보여준다.
: 크람니크 대 캄스키, 세계 챔피언십 8강전, 뉴욕 1994
: 1. Nf3 Nf6 2. c4 e6 3. Nc3 Bb4 4. g3 0-0 5. Bg2 c5 6. 0-0 Nc6 7. d4 cxd4 8. Nxd4 Qe7 9. Nc2 백은 흑이 자신의 폰 구조를 망가뜨리도록 허용하며, 곧이어 약한 c폰 중 하나를 희생한다. 백은 두 주교가 충분한 보상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9... Bxc3 10. bxc3 Rd8 11. Ba3 d6 12. Rb1 Qc7 13. Nd4 Nxd4 14. cxd4 Qxc4 15. Qd2 Qa6 16. Rb3 Rb8 17. e4 Bd7 18. Rf3 백은 킹사이드에서 플레이하려고 하지만, 캄스키의 기물들이 퀸사이드를 압도한다. 18... Ba4! 18...Nxe4 19.Qf4 f5 20.g4를 무시하고 백의 기물을 위한 라인을 연다. 19. Re1 Rbc8 20. Bf1 Bb5 21. Bh3 Qa4 22. d5 Rc2 23. Qe3? exd5 백은 깊은 곤경에 빠진다. 만약 24.exd5? 라면 Re8으로 흑이 승리한다. 24. e5 d4! 25. Qg5 Re2! 백의 약한 백 랭크를 이용한다. 이제 백은 g7에 대한 무서워 보이는 공격을 위해 희생하지만, 캄스키는 정확히 계산했다. 26. exf6 Rxe1+ 27. Bf1 27.Kg2? Bf1+ 28.Kg1 Bxh3# 27... Rxf1+ 28. Kg2 Rg1+! 29. Kh3 만약 29.Kxg1? 라면 Qd1+ 30.Kg2 Qf1# 29... Bd7+ 30. Kh4 g6 31. Qh6 d3+ 32. Rf4 만약 32.Kg5? 라면 Qg4# 32... Qxf4+! 33. Qxf4 만약 33.gxf4 라면 Rg4+ 34.Kh3 Rg5+! 35.Kh4 Rh5+로 퀸을 잡는다. 33... Rh1! 34. g4 h6! 이제 백의 공격은 끝났고 흑의 폰들이 백의 킹을 공격하는 데 합류하며 ...g5+를 위협한다. 35. Kh3 만약 35.Qxh6? 라면 Rxh2+ 35... g5! 36. Qd4 d2! 37. Qxd2 Rg1 38. f3 Bb5! 0-1 39...Bf1+로 백의 퀸을 잡게 된다.
7. 업적 및 기록
캄스키는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수많은 주요 토너먼트에서 우승하고 세계 챔피언십 사이클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다.
7.1. 주요 토너먼트 우승
연도 | 대회명 |
---|---|
1989 | 버팔로 오픈 |
1990 | 틸뷔르흐 |
1991 | 월드 오픈 |
1991 | 미국 체스 챔피언십 |
1993 | 부에노스아이레스 |
1994 | 라스팔마스 |
1995 | 도스 에르마나스 |
2006 | 뉴욕 |
2006 | 월드 오픈 |
2007 | 마샨터켓 |
2007 | 체스 월드컵, 한티만시스크 |
2008 | 내셔널 오픈, 라스베이거스 |
2010 | 레지오 에밀리아 |
2010 | 필라델피아 오픈 |
2010 | 미국 체스 챔피언십 |
2010 | 쾌속 세계 챔피언십, 마인츠 |
2010 | 바쿠 오픈 |
2011 | 월드 오픈 |
2011 | 미국 체스 챔피언십 |
2013 | 미국 체스 챔피언십 |
2014 | 필라델피아 오픈 |
2014 | 미국 체스 챔피언십 |
2015 | 제8회 뉴욕 국제 대회 |
2016 | 카펠라그랑드 |
2021 | 제54회 비엘 체스 페스티벌 체스 트라이애슬론 |
7.2. 세계 챔피언십 사이클 성과
연도 | 대회명 | 결과 |
---|---|---|
1994 | FIDE 세계 챔피언십 후보 결정전 매치, 바이크 안 제이 | 캄스키-판 더 스테런 (4.5-2.5) 승리 |
1994 | FIDE 세계 챔피언십 후보 결정전 매치, 산기 나가르 | 캄스키-아난드 (6-4) 승리 |
1994 | PCA 세계 챔피언십 후보 결정전 매치, 뉴욕 | 캄스키-크람니크 (4.5-1.5) 승리 |
1994 | PCA 세계 챔피언십 후보 결정전 매치, 리나레스 | 캄스키-쇼트 (5.5-1.5) 승리 |
1995 | FIDE 세계 챔피언십 후보 결정전 매치, 산기 나가르 | 캄스키-살로프 (5.5-1.5) 승리 |
1995 | PCA 세계 챔피언십 후보 결정전 매치, 라스팔마스 | 캄스키-아난드 (4.5-6.5) 패배 |
1996 | FIDE 세계 체스 선수권대회, 엘리스타 | 캄스키-카르포프 (7.5-10.5) 패배 |
1999 | FIDE 세계 챔피언십 녹아웃 2라운드, 라스베이거스 | 캄스키-칼리프만 (1.5-2.5) 패배 |
2007 | 세계 챔피언십 후보 결정전 매치 1라운드, 엘리스타 | 캄스키-바크로 (3.5-0.5) 승리 |
2007 | 세계 챔피언십 후보 결정전 매치 2라운드, 엘리스타 | 캄스키-겔판드 (1.5-3.5) 패배 |
2007 | 체스 월드컵 8강전, 한티만시스크 | 캄스키-포노마료프 (1.5-0.5) 승리 |
2007 | 체스 월드컵 준결승, 한티만시스크 | 캄스키-칼센 (1.5-0.5) 승리 |
2007 | 체스 월드컵 챔피언십 매치, 한티만시스크 | 캄스키-시로프 (2.5-1.5) 승리 |
2009 | 세계 챔피언십 후보 결정전 매치, 소피아 | 캄스키-토팔로프 (2.5-4.5) 패배 |
2011 | 세계 챔피언십 후보 결정전 매치 8강전, 카잔 | 캄스키-토팔로프 (2.5-1.5) 승리 |
2011 | 세계 챔피언십 후보 결정전 매치 준결승, 카잔 | 캄스키-겔판드 (2-2 (2-4)) 패배 (타이브레이크) |
월드컵 성적
년도 | 2005 | 2007 | 2009 | 2011 | 2013 | 2015 |
---|---|---|---|---|---|---|
Chess World Cup | 4라운드 | 우승 | 3라운드 | 4라운드 | 8강 | 1라운드 |
8. 개인 삶
캄스키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체스 경력만큼이나 아버지의 영향이 지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8.1. 가족과 관계
캄스키의 아버지 루스탐(Röstäm 또는 Rustam)은 전직 복서였으며, 캄스키의 코치이자 매니저 역할을 수행했다. 루스탐은 캄스키의 체스 훈련에 있어 매우 지배적인 역할을 했고, 그가 거의 체스에만 전념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할아버지 가타울라 "캄스키" 사비로프는 카잔에 타타르 드라마 극장을 설립했으며, 그의 성 "캄스키"는 여기서 유래했다. 1989년 캄스키가 미국으로 이주할 당시, 아메리칸 체스 재단의 전무이사 앨런 카우프만과 사업가 제임스 케인이 이들의 정착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9. 유산과 평가
가타 캄스키는 체스 신동으로 떠올라 세계 챔피언 타이틀에 근접하고, 오랜 공백 후 성공적인 복귀를 이루는 등 체스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와 관련된 논란도 그의 경력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9.1. 영향과 긍정적 평가
캄스키는 어린 나이에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체스 신동으로 평가받는다. 22세에 1996년 FIDE 세계 체스 선수권대회 결승에 진출하고 1995년 세계 랭킹 4위에 오르는 등 짧은 기간 동안 세계 체스계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97년부터 2004년까지의 긴 공백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2004년 성공적으로 복귀하여 2007년 체스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여러 차례 미국 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하는 등 장수하는 경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복귀 스토리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는 뛰어난 전술 능력과 강인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체스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9.2. 논란
캄스키의 경력에는 그의 아버지 루스탐 캄스키와 관련된 몇 가지 논란이 존재한다. 특히 1994년 PCA 후보 결정전 매치 중에는 캄스키의 아버지 루스탐 캄스키와 나이절 쇼트 사이에 공개적인 대립이 발생하여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루스탐은 캄스키의 코치이자 매니저로서 그의 체스 경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나, 그의 지배적인 양육 방식은 때때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아버지의 개입이 캄스키의 체스 활동 중단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