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과 배경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는 1947년 4월 5일 필리핀 마닐라 에르미타의 세인트 루크 의료센터 확장 클리닉에서 변호사 디오스다도 마카파갈과 그의 아내 에반젤리나 기코 마카라에그 마카파갈 사이에서 마리아 글로리아 마카라에그 마카파갈로 태어났다. 그녀는 디오스다도 "보보이" 마카파갈 주니어의 여동생이다. 그녀에게는 아버지의 첫 결혼에서 얻은 두 명의 이복 형제인 아르투로 마카파갈과 시엘로 마카파갈 살가도도 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아로요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팜팡가주 루바오에서 보냈으며, 여름 방학 동안에는 일리가나시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서 지냈다. 1961년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자 그녀는 가족과 함께 마닐라의 말라카냥궁으로 이주했다. 그녀의 이름을 따서 글로리아, 오리엔탈 민도로라는 지자체가 명명되기도 했다.
그녀는 어섬션 수녀원에서 초등 및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1964년 수석 졸업했다. 이후 워싱턴 D.C.의 조지타운 대학교 월시 국제관계대학원에서 2년간 공부했으며, 이곳에서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빌 클린턴과 동급생이었다. 1968년에는 어섬션 칼리지 산 로렌조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마그나 쿰 라우데로 졸업했다.
1968년 아로요는 네그로스 옥시덴탈주 비날바간 출신의 변호사이자 사업가인 호세 미겔 아로요와 결혼했다. 그들은 후안 미겔(1969년생), 에반젤리나 루르데스(1971년생), 디오스다도 이그나시오 호세 마리아(1974년생) 등 세 자녀를 두었다. 그녀는 아테네오 데 마닐라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1978년)를, 필리핀 대학교 딜리만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1985년)를 취득했다. 1977년부터 1987년까지 필리핀 대학교와 아테네오 데 마닐라 대학교를 포함한 여러 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어섬션 칼리지 경제학과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 초기 경력 및 정치 입문
1987년, 그녀는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의 초청으로 무역산업부 차관보로 정부에 합류했다. 2년 후에는 차관으로 승진했다. 동시에 의류 및 섬유 수출 위원회 집행 이사직을 맡아 1980년대 후반 의류 산업의 급속한 성장을 감독했다.
3. 상원의원 (1992-1998)
아로요는 1992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1987년 헌법에 따른 첫 총선에서 상위 12명의 득표자는 6년 임기를, 다음 12명은 3년 임기를 얻게 되었다. 아로요는 선거에서 13위를 차지하여 3년 임기를 얻었다. 그녀는 1995년에 재선되었으며, 거의 1,600만 표를 얻어 상원의원 선거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의원으로서 아로요는 상원의원 재임 기간 동안 400개 이상의 법안을 제출하고 55개의 법률을 발의하거나 후원했으며, 여기에는 성희롱 방지법, 원주민 권리법, 수출 개발법 등이 포함된다. 1995년 광업법은 필리핀 광산의 100% 외국인 소유를 허용하는 내용으로 좌파 정치 단체들의 비판을 받았다. 아로요는 또한 국내 사형제도 시행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상원의원 재임 중에는 더 나은 범죄자 재활을 옹호했다.
4. 부통령 (1998-2001)
아로요는 1998년 선거에서 대통령 출마를 고려했으나, 피델 V. 라모스 대통령과 집권당 라카스-CMD 지도자들의 설득으로 호세 데 베네시아 주니어 하원의장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직에 출마했다. 데 베네시아는 인기 배우 출신인 조셉 에스트라다에게 패했지만, 아로요는 에스트라다의 러닝메이트인 에드가르도 앙가라 상원의원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표를 얻어 큰 차이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로요는 1998년 6월 30일 부통령 임기를 시작했으며, 이로써 최초의 여성 부통령이 되었다. 그녀는 에스트라다에 의해 사회복지개발부 장관으로 겸직 임명되었다. 부통령으로서 그녀는 정부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정치 관찰자들에게 주목받았다.
2000년 10월, 아로요는 전 정치적 지지자였던 일로코스수르주 차비트 싱손 주지사가 에스트라다를 부패 혐의로 고발하자 내각에서 사임하며 에스트라다와 거리를 두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동맹국들의 에스트라다에 대한 비난 압력에 저항했지만, 결국 에스트라다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동참했다.
5. 대통령 재임 (2001-2010)
2000년 마지막 분기부터 2001년 1월 첫째 주까지 필리핀은 정치적, 경제적 불확실성의 시기를 겪었다. 2001년 1월 16일, 탄핵 재판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에스트라다 지지 상원의원들이 에스트라다 대통령 소유로 의심되는 은행 기록이 담긴 증거(갈색 봉투)의 개봉을 막자, 민간 검사들은 재판에서 퇴장했다. 이 퇴장으로 탄핵 재판은 완료되지 않았고, 필리핀 국민들은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사임을 계속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5.1. 승계 및 EDSA II
2001년 1월 17일부터 20일까지 수십만 명의 필리핀 국민들이 원래 인민 권력 혁명의 현장이었던 에피파니오 데 로스 산토스 애비뉴(EDSA)에 모였다. 제2차 EDSA 혁명으로 알려지게 된 이 시위에는 전문가, 학생, 예술가, 정치인, 좌파 및 우파 단체 등 필리핀 사회의 다양한 부문이 참여하면서 대통령 교체 요구가 탄력을 받았다. 필리핀군과 필리핀 국가경찰의 고위 관계자들도 에스트라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말라카냥궁을 떠난 며칠 후,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변호인과 동맹국들은 아로요의 대통령직 합법성에 대해 대법원에 이의를 제기했으며, 미리암 데펜소르 산티아고 상원의원 등은 에스트라다의 대통령 복귀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에스트라다는 자신이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지 않았으며, 아로요는 기껏해야 대행 역할만 수행하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아로요의 승계 합법성을 만장일치로 지지했다. 그 결과 에스트라다는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에 대한 면책 특권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2001년 4월 마지막 주, 산디간바얀(Sandiganbayan)은 에스트라다와 그의 아들인 당시 시장 징고이 에스트라다를 횡령 혐의로 체포 명령을 내렸다. 며칠 후, 에스트라다 지지자들은 그의 체포에 항의하며 EDSA 신전에 모여 EDSA III를 조직했다. 이는 1986년과 2001년 1월의 인민 권력 혁명에 자신들의 행동을 비유한 것이었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에스트라다의 석방을 요구했다. 결국 그들은 아로요의 퇴진과 전 대통령의 복귀를 요구했다. 2001년 5월 1일, 그들은 말라카냥궁으로 행진하여 아로요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강요했다. 시위대가 대통령궁을 습격하려 하자 폭력이 발생했고, 군과 경찰은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무기를 사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로요는 폭력 사태로 인해 반란 상태를 선포했으며, 에스트라다와 연관된 저명한 정치 인사들이 기소되고 체포되었다. 소위 EDSA III는 아로요 대통령직에 대한 첫 번째 심각한 정치적 도전이었다.
5.2. 제1기 (2001-2004)

5.2.1. 주요 사건 및 정책
오크우드 반란은 2003년 7월 27일 필리핀에서 발생했다. 육군 대위 헤라르도 감발라와 해군 중위 안토니오 트릴라네스 4세가 이끄는 "바공 카티푸네로스"라고 불리는 321명의 무장 군인 그룹은 마카티의 오크우드 프리미어 아얄라 센터(현 아스코트 마카티) 서비스 아파트 타워를 점거하여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행정부의 부패를 폭로하고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고 믿었다.
2002년 12월 29일, 아로요는 200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녀는 남은 임기 동안 국민을 섬기고 필리핀 경제를 개선하는 데 전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2003년 10월, 아로요는 마음을 바꿔 2004년 5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국민으로부터 직접적인 위임을 받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녀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더 높은 목표가 있다... 우리의 미래를 번영하게 만드는 방식으로"라고 설명했다. 그녀의 결정에 대해 아로요에 대한 초기 비판은 그녀의 신의 부족에 집중되었다.
SWS 출구 조사에서 예측했듯이, 아로요는 포에를 100만 표 이상 차이로 이기고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의회 개표는 매우 논란이 많았는데, 전국 개표 위원회의 야당 의원들은 선거 결과에 많은 불일치가 있으며 부정 선거 의혹이 제기되었다고 주장했다. 2004년 6월 23일, 의회는 아로요와 놀리 데 카스트로를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선포했다.
5.3. 제2기 (2004-2010)

5.3.1. 2004년 대통령 선거 및 의혹
2004년 6월 30일, 아로요는 전통을 깨고 마닐라의 키리노 그랜드스탠드에서 먼저 취임 연설을 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취임 선서를 위해 세부시로 떠났는데, 이는 필리핀 대통령이 루손섬 밖에서 취임 선서를 한 첫 사례였다.
아로요에 대한 부정 선거 의혹은 2004년 5월 선거 후 1년 만에 탄력을 받았다. 2005년 6월 10일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국가수사국(NBI)의 전 부국장 사무엘 옹은 아로요와 선거관리위원회(COMELEC) 관계자 간의 도청된 대화 녹음 파일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비르힐리오 가르실라노 전 COMELEC 위원이 아로요와 대화한 관계자로 밝혀졌다. 옹에 따르면, 녹음 파일은 아로요가 포에를 약 100만 표 차이로 이기기 위해 전국 선거 조작을 지시했음을 증명한다고 한다.
옹의 녹음 파일은 헬로 가르시 스캔들로 알려지게 되었고, 아로요에 대한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켰다. 그녀의 내각 핵심 구성원들은 각자의 직책에서 사임하고 아로요에게도 같은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2005년 6월 27일, 아로요는 COMELEC 관계자와 부적절하게 대화했음을 인정하며 "판단의 실수"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녀는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자신이 선거에서 공정하게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아로요는 사회 각계각층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사임하지 않았다.
헬로 가르시 논란은 2005년 아로요에 대해 제기된 탄핵 소송의 근거가 되었지만, 그해 말 아로요에 대한 탄핵 시도는 실패했다. 2006년에도 아로요에 대한 또 다른 탄핵 소송이 제기되었지만, 이 역시 하원에서 부결되었다.
2007년 10월, 변호사 앨런 파기아는 뇌물 수수 문제와 관련하여 아로요에 대한 탄핵 소송을 제기했다. 파기아의 소송은 팜팡가 주지사 에드 판릴리오의 폭로에 근거한 것으로, 여러 주지사들이 말라카냥궁에서 50만 페소씩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탄핵 소송은 2007년 10월 중순 현재 하원 사법 위원회에 회부되었다.
5.3.2. 경제
경제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한 아로요는 필리핀 경제를 자신의 대통령직의 핵심으로 삼았다. 아로요 행정부 동안 필리핀의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4.5%를 기록했으며, 재임 기간 내내 매 분기마다 성장했다. 이는 그녀의 직전 세 대통령인 코라손 아키노(3.8%), 피델 라모스(3.7%), 조셉 에스트라다(3.7%)의 행정부보다 높은 수치이다. 필리핀 경제는 2007년에 30년 만에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했으며, 실질 GDP 성장률은 7%를 초과했다. 필리핀 경제는 2007-2008년 세계 금융 위기 동안 침체를 피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였는데, 이는 문제 있는 국제 증권에 대한 노출이 적고, 수출 의존도가 낮으며, 상대적으로 탄력적인 국내 소비, 400만~500만 명의 해외 필리핀 노동자로부터의 막대한 송금, 그리고 성장하는 비즈니스 프로세스 아웃소싱 산업 덕분이었다. 아로요의 경제 운용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는데, 그는 필리핀 경제를 회복시킨 그녀의 "과감한 결정"을 언급했다. 이러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소득 불균형으로 인해 빈곤율은 정체 상태를 유지했다.
아로요 행정부의 경제 개혁 의제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확대 부가가치세(e-VAT) 법안은 2005년 11월에 시행되었는데, 이는 국가의 막대한 재정 적자를 메울 수 있는 세수 증대 노력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의 행정부는 원래 2010년까지 국가 예산 균형을 맞추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세금 조치는 정부의 재정 능력에 대한 신뢰를 높였고, 필리핀 페소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여 2005-2006년 동아시아에서 가장 실적이 좋은 통화가 되었다. 페소는 2007년에 거의 20% 강화되어 그해 아시아에서 가장 좋은 실적을 보인 통화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는 해외 필리핀 노동자들의 송금 증가와 강력한 국내 경제가 결합된 결과로 평가된다.
재임 초기, 아로요는 국내 관광을 활성화하고 필리핀 국민들이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공휴일을 조정하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휴일 경제학' 정책을 시행했다.
5.3.3. 국내 정책
아로요 행정부의 주요 국내 정책 및 이니셔티브에는 K-12 교육 과정 도입 및 헌법 개정 제안, 국가 비상사태 대응 등이 있었다.
5.3.4. 외교 정책
아로요는 2003년 3월 시작된 이라크 전쟁에 대해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이 반대하는 가운데 몇 안 되는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5.3.5. 행정부 및 내각
아로요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사회복지개발부 장관을, 2002년에는 외교부 장관을 겸임했다. 또한 2003년과 2006년부터 2007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기도 했다.
5.3.6. 비상사태 (2006)

2006년 2월 24일, 다닐로 림 장군과 다른 우익 군사 모험가들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정부 전복 음모가 당국에 의해 발각되었다. 림 장군과 그의 일부 부하들은 체포되었다. 국가의 적들이 제기하는 위협에 맞서기 위해 아로요는 대통령 포고령 1017호를 발표하고 이를 근거로 필리핀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아로요에 따르면, 이 선포는 군사 반란을 진압하고, 무법 폭력을 막으며, 평화와 안정을 증진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대통령 포고령 1017호는 또한 정부가 영장 없는 체포를 시행하고 전략적 민간 공공 시설을 장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프랭클린 드릴론, 프랜시스 팡길리난, 피아 카예타노를 포함한 여러 상원의원들은 이 포고령이 "헌법의 기본 보장, 특히 그 안에 명시된 기본 시민 자유에 위배된다"고 비난했다.
비상사태는 필리핀 전역의 추가 폭력, 불법 집회 및 공공 질서 교란을 억제하기 위해 약 일주일 동안 지속되었다. 경찰과 군은 시위대와 시위자들을 해산시켰는데, 특히 EDSA를 따라 모인 이들을 해산시켰다. 림 장군 외에도 정부 전복 시도에 연루된 혐의로 저명한 인사들도 체포되었다.
대통령 포고령 1017호는 2006년 3월 3일에 해제되었지만, 야당 구성원, 민간 변호사 및 관련 시민들은 그 위헌성을 대법원에 제기했다. 5월 4일, 대법원은 이 포고령이 합헌이라고 선언했지만, 정부가 영장 없는 체포를 시행하고 민간 기관 및 기업을 압수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5.3.7. 헌법 개정
아로요는 현재의 양원제를 가진 단일 대통령제 공화국을 단원제를 가진 연방 의원내각제 정부로 전환하기 위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헌법 개정 계획을 주도했다.

5.3.8. K-12 교육 과정 도입
1925년 미국 시대의 먼로 조사(Monroe Survey)부터 시작된 수십 년간의 조사, 협의 및 연구 끝에, K-12 교육 과정의 9년 간의 시행 과정은 2008년 5월 20일 아로요 행정부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마르 록사스 상원의원이 2008년 옴니버스 교육 개혁법(상원 법안 2294호)을 제출하여 교사의 질, 사용되는 교육 매체, 학생 적성 평가 등 여러 측면에서 시기적절한 개입을 통해 필리핀 교육 시스템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 법안은 4년 후인 2012년 4월 24일 베니그노 아키노 3세 행정부에서 K-12의 효력을 의무화하며, 이는 국제 기준에 맞춰 기초 교육 연수를 10년에서 12년으로 늘리는 것을 포함한다.
2010년 1월 7일, 상원의원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베니그노 아키노 3세는 상원 법안 2294호의 입장을 채택하며,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성공할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양질의 교육과 수익성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5.3.9. 대중 인식 및 지지율

사회 기상 관측소 여론 조사 기관은 아로요 대통령의 순 만족도(만족도에서 불만족도를 뺀 값)를 추적하는 분기별 조사를 실시했다. 그녀는 2001년 1분기에 +24의 순 만족도로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지지율은 2003년 1분기에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는데, 이는 SWS 여론 조사에서 마이너스 순 만족도를 달성한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다. 그녀의 지지율은 2004년 대통령 선거 시기에 다시 플러스로 반등하여 새로운 6년 임기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순 만족도는 2004년 4분기에 다시 마이너스 영역으로 떨어졌고, 이후 계속해서 마이너스를 유지하며 2008년 2분기에는 최저 -38을 기록했다. 2009년 1분기 그녀의 순 만족도는 -32였다. 2008년 7월, SWS는 아로요가 6월 마지막 주에 실시된 조사에서 -38의 순 만족도를 기록하여 1986년 민주주의가 회복된 이래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되었다고 밝혔다.
날짜 | 등급 |
---|---|
2001년 3월 | +24 |
2001년 4월 | +17 |
2001년 5월 | +18 |
2001년 7월 | +16 |
2001년 9월 | +15 |
2001년 11월 | +27 |
2002년 3월 | +16 |
2002년 5월 | +4 |
2002년 8월 | +28 |
2002년 9월 | +18 |
2002년 11월 | +6 |
2003년 3월 | -14 |
2003년 6월 | +14 |
2003년 9월 | +2 |
2003년 11월 | -3 |
2004년 1월 | +8 |
2004년 2월 | +15 |
2004년 3월 | +30 |
2004년 6월 | +26 |
2004년 8월 | +12 |
2004년 10월 | -6 |
2004년 12월 | -5 |
2005년 3월 | -12 |
2005년 5월 | -33 |
2005년 8월 | -23 |
2005년 12월 | -30 |
2006년 3월 | -25 |
2006년 6월 | -13 |
2006년 9월 | -11 |
2006년 11월 | -13 |
2007년 2월 | -4 |
2007년 6월 | -3 |
2007년 9월 | -11 |
2007년 12월 | -16 |
2008년 3월 | -26 |
2008년 6월 | -38 |
2008년 7월 | -50 |
2008년 9월 | -27 |
2008년 12월 | -24 |
2009년 2월 | -32 |
2009년 6월 | -34 |
2009년 9월 | -38 |
2009년 12월 | -38 |
2010년 3월 | -53 |
2010년 6월 | -17 |
평균 | -7 |

6. 대통령 퇴임 이후
6.1. 하원의원 (2010-2019)
2009년 11월, 아로요는 팜팡가주 제2선거구를 대표하는 하원의원직에 출마할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로써 그녀는 호세 P. 라우렐에 이어 두 번째로 대통령 임기 만료 후 하위 직책을 추구한 필리핀 대통령이 되었다. 아로요의 출마 자격 박탈을 요구하는 청원은 COMELEC에 의해 기각되었고, 이 결정은 나중에 대법원에 의해 확정되었다. 심각한 경쟁 없이, 그녀는 2010년 5월 압도적인 승리로 의회에 당선되었다. 베니그노 아키노 3세 신임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마지막 군사적 경의를 표한 후, 그녀는 곧바로 산 페르난도로 향해 하원의원으로서 자신의 취임 선서를 했다.
아로요는 하원의장직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직책을 추구하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그녀는 당의 수장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소니아 간디와 유사한 역할을 맡기를 희망했다. 의원으로서 첫날, 아로요와 그녀의 아들 다토는 기존 헌법 개정을 제안하기 위한 헌법 제정 회의 소집을 의회에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재향군인 기념 의료 센터에 병원 구금된 상태에서도 아로요는 2013년 5월 13일 2013년 필리핀 중간 선거에서 팜팡가 제2선거구 하원의원으로서 두 번째 임기를 성공적으로 얻어냈다. 그녀는 전 에드 판릴리오 주지사 밑에서 주 행정관이었던 집권 자유당의 비비안 다부를 물리쳤다. 그녀는 2016년에 세 번째 연속 임기로 재선되었으며, 무경쟁으로 출마했다.
6.2. 하원의장 (2018-2019)

아로요는 필리핀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으로 선출되었다. 2018년 7월 23일 판탈레온 알바레즈를 축출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다수당 선언과 투표로 선거가 진행되었다. 2018년 8월, 그녀가 하원에서 추진하던 제안된 연방 정부 하에서 총리가 되려고 한다는 소문 속에서, 아로요는 2019년 5월 선거 이후 어떤 직책도 추구하지 않고 정치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9년 1월, 그녀의 하원의장직은 형사 책임 연령을 12세로 낮추는 하원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녀는 2018년 9월에 -4의 순 만족도를 기록했으며, 2019년 1월에는 -21로 더욱 하락하여 필리핀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하원의장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녀의 지도부는 또한 국회의원들의 자산·부채·순자산 신고서(SALN) 접근에 관한 하원 규칙을 변경하여 접근에 300 PHP의 수수료를 요구하게 했는데, 이는 하원 291명 전원의 SALN에 접근하려면 8.73 만 PHP에 달하는 금액이 필요하여 빈곤층이 하원의 부패를 감시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2019년 2월, 판필로 락손 상원의원은 아로요가 국가 예산에 6000.00 만 PHP에서 1.60 억 PHP의 추가 포크 배럴을 추가했다고 비난했다.
6.3. 법적 문제 및 체포
2011년 초, 아로요는 경추 척추증 또는 경추 척수병증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베니그노 아키노 3세의 국정 연설 직후인 2011년 7월 25일, 타기그의 세인트 루크 의료 센터로 급히 이송되었다. 의사들은 2011년 7월 29일 5시간에 걸친 척추 수술을 시행했다. 2011년 8월에 두 번 더 수술이 진행되었고, 이는 그녀의 부갑상선 기능 저하증을 악화시켰다. 펠리시아노 벨몬테 주니어 하원의장이 이끄는 하원은 법무부의 출국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독일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여행 허가를 내주었다.
아로요는 2011년 11월 18일, COMELEC이 선거 사보타주 혐의로 고발한 후 파사이 법원이 그녀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하면서 체포되었다. 체포 영장은 아로요가 입원 중이던 타기그의 세인트 루크 의료 센터에서 집행되었다. 며칠 전, 대법원은 법무부가 그녀의 해외 의료 치료를 위한 필리핀 출국을 막으려는 시도를 금지하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그녀는 2011년 12월 9일 케손시티의 재향군인 기념 의료 센터로 이송되었다. 아로요는 2012년 7월 25일 보석으로 병원 구금에서 풀려났다.
2012년 10월 29일, 그녀는 재임 기간 동안 880만 달러의 국영 복권 자금을 유용한 혐의에 대해 어떤 답변도 거부했다. 2013년 12월 현재, 그녀는 여전히 재향군인 기념 의료 센터에 구금되어 있었다. 2016년 7월 19일, 대법원은 아로요에 대한 횡령 혐의를 기각하고 2011년부터 구금되어 있던 병원에서의 석방을 명령했다.
2014년 5월과 6월에 의료 사고가 발생한 후 아로요는 검사와 치료를 위해 세인트 루크 의료 센터로 이송되었다가 재향군인 기념 의료 센터로 다시 구금되었다. 6월에 두 번째 의료 사고 후, 그녀의 변호인들은 다시 보석 신청을 했다. 9월에는 세 번째 의료 사고로 인해 그녀는 다시 세인트 루크로 급히 이송되어 치료를 받은 후 재향군인 기념 의료 센터로 돌아왔다.
아말 클루니 인권 변호사가 제기한 사건에서, 유엔 자의적 구금 실무 그룹은 아로요의 병원 구금을 자의적이며 국제 인권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아로요에 대한 혐의가 정부 참여 권리 행사의 결과로 구금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동기가 있었으며, 산디간바얀 법원이 그녀의 보석 신청을 반복적으로 거부할 때 그녀의 개별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금이 국제법상 자의적이고 불법적이라고 인정했다.
2016년 7월 19일, 두테르테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몇 주 후, 대법원은 아로요에 대한 횡령 사건 기각을 찬성하는 판결을 내렸으며, 테오도르 테 대변인이 낭독한 11대 4의 표결로 이루어졌다.
아로요의 횡령 사건 기각 동의에 대한 대법원 결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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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 (11) | 반대 (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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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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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선거 | 필리핀 부통령 | 10대 | 라카스 기독교 이슬람교 민주당 | 49.56% | 12,667,252표 | 1위 | 당선 |
2004년 선거 | 필리핀 대통령 | 14대 | 라카스 기독교 이슬람교 민주당 | 39.99% | 12,905,808표 | 1위 | 당선 |
2010년 선거 | 하원의원(팜팡가 제2선거구) | 15대 | 라카스 기독교 이슬람교 민주당 | 84.23% | 169,109표 | 1위 | 당선 |
2013년 선거 | 하원의원(팜팡가 제2선거구) | 16대 | 라카스 기독교 이슬람교 민주당 | 78.24% | 149,344표 | 1위 | 당선 |
2016년 선거 | 하원의원(팜팡가 제2선거구) | 17대 | 라카스 기독교 이슬람교 민주당 | -% | 190,631표 | 1위 | 당선 |
12. 관련 항목
- 코라손 아키노
-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 조셉 에스트라다
- 베니그노 아키노 3세
- 필리핀의 대통령
- 필리핀의 부통령
- 필리핀 하원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