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디오스다도 팡간 마카파갈(Diosdado Pangan Macapagal, djosˈdado makapaˈɡal타갈로그어)은 1910년 9월 28일 팜팡가주 루바오에서 태어나 1997년 4월 21일 사망한 필리핀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제6대 필리핀의 부통령을 지냈고,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제9대 필리핀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또한 필리핀 하원 의원을 지냈으며, 1970년 필리핀 헌법 제정 회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그의 딸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는 2001년부터 2010년까지 필리핀 대통령을 지내며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마카파갈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루바오의 가난한 소년(The Poor Boy From Lubao)"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 그는 필리핀 대학교와 산토토마스 대학교를 졸업한 후 정부 변호사로 일했다. 1949년 팜팡가주 제1선거구 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고, 1957년에는 카를로스 P. 가르시아 대통령의 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1961년 대선에서 가르시아를 꺾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으로서 마카파갈은 부패 척결과 필리핀 경제 성장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필리핀 최초의 농지 개혁법을 도입하고, 필리핀 페소화를 자유 변동 환율 시장에 맡겼으며, 외환 및 수입 통제를 자유화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 중 상당수는 경쟁 정당인 국민당이 장악한 의회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는 또한 필리핀 독립 기념일을 기존의 7월 4일에서 6월 12일로 변경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1898년 에밀리오 아기날도 대통령이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필리핀 제1공화국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포한 날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1965년 재선에 도전했지만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에게 패배했다.
마르코스 집권기인 1971년, 마카파갈은 1973년 필리핀 헌법을 초안한 헌법 제정 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헌법이 비준되고 수정된 방식에 대해 그는 나중에 그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부패하지 않은 자(The Incorruptable)" 또는 "최초의 남자들의 챔피언(Juara Lelaki Pertama)"으로 불리며,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려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997년 86세의 나이로 심부전, 폐렴, 신장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은 1910년 9월 28일 팜팡가주 루바오의 산 니콜라스 1번지 마을에서 가난한 가정의 다섯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2.1. 어린 시절과 가정 환경

그의 아버지 우르바노 로메로 마카파갈은 지역 언어인 팜팡가어로 시를 쓰는 시인이었고, 어머니 로마나 팡간 마카파갈은 아타나시오 미겔 팡간(전 바랑가이 촌장)과 로렌자 수잉 안티베로스의 딸이었다. 그의 친할머니 에스콜라스티카 로메로 마카파갈은 조산사이자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마카파갈의 가족은 돼지를 키우고 하숙생을 받아 추가 수입을 얻었다. 이러한 가난한 배경 때문에 마카파갈은 나중에 "루바오의 가난한 소년"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스페인어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었지만, 그의 시적 업적은 정치 경력에 가려졌다.
2.2. 가계 및 혈통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은 톤도의 왕자이자 톤도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라칸 둘라의 증손자인 돈 후안 마카파갈의 먼 후손이다. 그는 또한 그의 어머니 로마나를 통해 부유한 리카드 가문과도 관련이 있다. 로마나는 유명한 피아니스트 세실 리카드의 할머니인 마리아 비투그 리카드의 이종사촌이었다. 로마나의 친할머니 제노베바 미겔 팡간과 마리아의 할머니 셀레스티나 미겔 마카스팍은 자매였다. 이들의 어머니인 마리아 콘셉시온 링가드 미겔은 호세 핑굴 링가드와 그레고리아 말릿 바르톨로의 딸이었다.
3. 교육
마카파갈은 어린 시절부터 학업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며 학문적 배경을 쌓았다.
3.1. 학업 성취

마카파갈은 지역 공립학교에서 학업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루바오 초등학교를 수석 졸업했고, 팜팡가 고등학교를 차석 졸업했다. 그는 필리핀 대학교 마닐라 캠퍼스에서 법률 예비 과정을 마친 후, 1932년 필리핀 법학대학에 입학하여 장학금을 받으며 회계사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법학대학 재학 중 그는 웅변가이자 토론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건강 악화와 재정난으로 인해 2년 만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팜팡가로 돌아온 그는 어린 시절 친구인 로헬리오 데 라 로사와 함께 고전 스페인 사르수엘라를 본뜬 타갈로그어 오페레타를 제작하고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 시기에 그는 1938년 친구의 여동생 푸리타 데 라 로사와 결혼하여 시엘로와 아르투로 두 자녀를 두었다.
3.2. 학위 및 전문 연구
마카파갈은 충분한 돈을 모아 산토토마스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자선가 돈 오노리오 벤투라의 도움을 받아 교육비를 지원받기도 했다. 또한 어머니의 친척들, 특히 팜팡가주 루바오의 산타 마리아 마을에 넓은 땅을 소유했던 마카스팍 가문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 1936년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그는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는데, 1936년 변호사 시험에서 89.95%의 점수로 수석을 차지했다. 그는 나중에 모교로 돌아와 1941년 법학 석사, 1947년 민법 박사, 1957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 제목은 "필리핀 경제 개발의 필수 요소(Imperatives of Economic Development in the Philippines)"였다.
4. 초기 경력
정치에 입문하기 전,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은 법률 및 공직 분야에서 다양한 직업적 활동과 사회 참여 경험을 쌓았다.
4.1. 법률 활동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마카파갈은 당시 필리핀인에게는 특별한 영예였던 미국 법률 회사에 변호사로 합류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는 말라카냥궁에서 마누엘 L. 케손 대통령의 법률 보좌관으로 배정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필리핀 점령 시기에도 마카파갈은 호세 P. 라우렐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말라카냥궁에서 계속 근무하면서, 동시에 일본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를 비밀리에 도왔다.
전쟁 후, 마카파갈은 국내 최대 법률 회사 중 하나인 '로스, 로렌스, 셀프 앤 카라스코소(Ross, Lawrence, Selph and Carrascoso)'에서 보조 변호사로 일했다.
4.2. 공직 입문 및 외교 활동
1946년 독립적인 필리핀 제3공화국이 수립되자, 그는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이 그를 필리핀 외교부의 법률 부서장으로 임명하면서 다시 정부 공직에 합류했다. 1948년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은 마카파갈을 술루해의 터틀 제도를 영국에서 필리핀으로 성공적으로 이양하는 수석 협상가로 임명했다. 같은 해 그는 주미 필리핀 대사관의 2등 서기관으로 워싱턴 D.C.에 파견되었다. 1949년에는 법률 및 조약 담당 고문으로 승진했는데, 이는 당시 필리핀 외교부에서 네 번째로 높은 직위였다.
그는 유엔 총회에 여러 차례 필리핀 대표로 참석하여 소련의 안드레이 비신스키 및 야코프 말리크와 함께 공산주의 침략에 대한 토론에 참여했다. 또한 미국-필리핀 상호방위조약, 로렐-랭글리 협정,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협상에도 참여했다. 그는 필리핀 외교관을 재편하고 강화하는 외교 서비스법을 입안했다.
4.3. 하원 의원 활동

팜팡가주 지역 정치 지도자들의 요청으로 키리노 대통령은 마카파갈을 워싱턴 직위에서 소환하여 필리핀 하원의 팜팡가주 제1선거구 의원직에 출마하도록 했다. 현직 의원이었던 아마도 유존은 마카파갈의 친구였지만, 공산주의 단체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행정부의 반대에 부딪혔다. 마카파갈이 "화기애애하고 인신공격 없는" 선거 운동이라고 묘사한 끝에, 그는 1949년 필리핀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1953년 필리핀 총선에서 재선되었고, 필리핀 제2대 의회와 필리핀 제3대 의회에서 의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입법 회기가 시작될 때, 하원 의원들은 마카파갈을 외교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했고, 그는 여러 해외 임무를 맡았다. 그는 여러 차례 유엔 총회에 필리핀 대표로 참석하여 소련의 안드레이 비신스키 및 야코프 말리크와 함께 공산주의 침략에 대한 토론에 참여했다. 그는 또한 미국-필리핀 상호방위조약, 로렐-랭글리 협정,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협상에도 참여했다. 그는 필리핀 외교관을 재편하고 강화하는 외교 서비스법을 입안했다.
하원 의원으로서 마카파갈은 특히 농촌 지역과 빈곤층에 혜택을 주기 위한 여러 사회경제적 중요 법안을 입안하고 후원했다. 마카파갈이 추진한 법안 중에는 최저임금법, 농촌 보건법, 농촌 은행법, 바랑가이 의회법, 바랑가이 산업화법, 그리고 쌀과 옥수수 산업의 국유화 법안이 있었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의회 기자 클럽에 의해 꾸준히 '가장 뛰어난 의원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두 번째 임기에는 제3대 의회에서 가장 뛰어난 입법가로 지명되기도 했다.
5. 부통령 재임 (1957-1961)
마카파갈은 1957년 5월 총선에서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카를로스 P. 가르시아 행정부 하에서 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5.1. 자유당 지도부
1957년 5월 총선에서 자유당은 호세 Y. 율로 전 하원 의장과 함께 마카파갈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마카파갈의 지명은 특히 자유당 총재 유제니오 페레스가 당의 부통령 후보가 청렴하고 정직한 기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율로는 국민당의 카를로스 P. 가르시아에게 패했지만, 마카파갈은 놀라운 승리를 거두며 국민당 후보 호세 라우렐 주니어를 8%포인트 이상으로 꺾고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선거 한 달 후, 그는 자유당의 총재로 선출되었다.
5.2. 야당 지도자로서의 역할
마카파갈은 필리핀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과 다른 당에서 선출된 부통령으로서 4년간의 부통령 임기를 야당 지도자로 보냈다. 집권당인 국민당은 전통을 깨고 가르시아 행정부에서 그에게 내각 직위를 주기를 거부했다. 그는 집권 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길 경우에만 내각 직위를 제안받았지만, 그 제안을 거절하고 대신 행정부 정책과 성과에 대한 비판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그가 가르시아 행정부의 증가하는 비인기에 편승할 수 있게 해주었다. 부통령으로서 의례적인 의무만을 수행하도록 배정된 그는 유권자들과 친분을 쌓고 자유당의 이미지를 홍보하기 위해 시골 지역을 자주 방문하며 시간을 보냈다.
6. 대통령 재임 (1961-1965)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은 필리핀 제9대 대통령으로서 경제 개혁, 농지 개혁, 반부패 정책, 독립기념일 변경 등 중요한 국내 정책을 추진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북보르네오 영유권 주장, MAPHILINDO 구상, 베트남 전쟁 관련 입장 등 다양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6.1. 선거 및 취임
1961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카파갈은 가르시아의 재선 도전에 맞서 출마하여 부패 종식을 약속하고 겸손한 배경을 가진 서민으로서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현직 대통령을 55% 대 45%의 득표율로 꺾고 승리했다. 그의 필리핀 대통령 취임은 1961년 12월 30일에 이루어졌다. 필리핀 대법원의 대법원장이 취임 선서를 주관했다. 마카파갈이 사용한 성경은 나중에 그의 딸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가 1998년 부통령으로, 2004년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사용되었다.
6.2. 행정 및 내각
마카파갈은 대통령으로서 행정부를 구성하고 주요 정책 결정을 내렸다. 그의 행정부는 경제 발전과 사회 개혁에 중점을 두었으며, 특히 자유 기업 체제와 농지 개혁을 통해 필리핀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6.3. 국내 정책
마카파갈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추진된 주요 국내 정책들은 경제 안정화, 농지 개혁, 부패 척결, 그리고 국가 정체성 확립에 초점을 맞췄다.
6.3.1. 경제 정책
마카파갈은 취임 연설에서 "자유 기업과 사기업으로의 복귀"에 기반한 사회경제 프로그램을 약속하며, 경제 개발을 최소한의 정부 개입으로 민간 기업가들의 손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취임 20일 후, 외환 통제가 해제되었고 필리핀 페소는 자유 변동 환율 시장에서 거래되도록 허용되었다. 외환 통제는 원래 엘피디오 키리노 행정부가 임시 조치로 채택했지만, 후속 행정부에서도 계속 유지되었다. 페소 가치는 미화 1달러당 2.64 PHP에서 3.8 PHP로 평가절하되었으며, 국제 통화 기금의 3.00 억 USD 안정화 기금의 지원을 받아 안정화되었다.
경제 및 사회 발전을 통해 대중에게 번영이 도달하는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 방법이 있었다. 첫째, 민주주의 체제와 독재 체제 사이의 선택이 있었는데, 후자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우세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필리핀인들이 오랫동안 민주적 방식을 고수해왔기 때문에 선택이 쉬웠다. 그러나 민주적 메커니즘 내에서는 자유 기업과 통제 시스템 유지 사이의 선택이 있었다. 마카파갈은 1962년 1월 22일 의회에서 "경제 개발의 과제는 주로 민간 기업에 속하며 정부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자유 기업의 본질을 평이한 말로 설명했다.

독립 이전에는 마누엘 케손, 세르히오 오스메냐,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 하에서 필리핀에 자유 기업이 존재했다. 1950년,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은 임시 비상 조치로 환율 및 수입 통제 시스템을 도입하며 자유 기업에서 벗어났다. 이 통제 시스템은 막사이사이와 가르시아 대통령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마카파갈이 내려야 할 첫 번째 근본적인 결정은 키리노, 막사이사이, 가르시아의 환율 통제 시스템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케손, 오스메냐, 로하스의 자유 기업으로 돌아갈 것인지였다. 그는 8년간 하원 의원으로 재직하면서 필리핀인에게 적합한 경제 시스템은 자유 기업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1962년 1월 21일, 20시간 연속 근무 끝에 그는 외환 통제를 폐지하고 국가를 자유 기업 체제로 되돌리는 중앙은행 법령에 서명했다.
대통령 취임부터 의회 개원까지 20일 동안 통제와 자유 기업 중 선택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마카파갈의 주요 고문은 필리핀 중앙은행 총재 안드레스 카스티요였다.
마카파갈의 추가 개혁 노력은 당시 하원과 상원을 장악하고 있던 국민당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카파갈은 꾸준한 경제 발전을 달성할 수 있었고,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연간 GDP 성장은 평균 5.53%를 기록했다.
6.3.2. 농지 개혁

라몬 막사이사이처럼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대통령도 대중 출신이었다. 그는 자신을 "루바오의 가난한 소년"이라고 부르기를 즐겼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지 않았다. 이는 그의 딱딱한 성격으로 인한 카리스마 부족에 기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카파갈은 몇 가지 업적을 남겼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963년 농지 개혁법(공화국법 제3844호)으로, 이는 사유 농지를 매입하여 땅 없는 소작농에게 쉬운 지불 조건으로 작은 필지로 분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는 필리핀의 농지 개혁 역사에서 중요한 발전이었다.
이전의 농업 법안과 비교하여 이 법은 개인이나 기업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 보유 한도를 75 ha로 낮췄다. 또한 "인접한"이라는 용어를 삭제하고 임대차 시스템을 확립했다. 공유 소작 제도 또는 카사마(kasama) 시스템은 금지되었다. 이 법은 농업 노동자들에게 자율 조직 및 최저 임금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권리장전을 명시했다. 또한 농지 취득 및 분배를 위한 사무소와 이를 위한 금융 기관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 법의 주요 결함은 여러 예외 조항이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스페인 제국과 미국의 필리핀 지배 시기에 설립된 대규모 농장; 양어장, 염전, 그리고 주로 감귤, 코코넛, 카카오, 커피, 두리안 및 기타 유사한 영구 나무가 심어진 토지; 주거용, 상업용, 산업용 또는 기타 유사한 비농업 목적으로 전환된 토지 등이 해당되었다.
75 ha의 토지 보유 한도는 증가하는 인구 밀도에 비해 너무 높다는 견해가 있었다. 더욱이 이 법은 지주권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단순히 이전되는 것을 허용할 뿐이었다. 이는 지주들이 채권으로 보상받았고, 이 채권을 사용하여 다른 농지를 구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농민은 자발적으로 지주에게 토지를 포기할 경우 임대차 계약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법이 시행된 지 2년 이내에 농민들이 토지를 구매할 능력이 없어 조건에 따라 토지가 전혀 구매되지 않았다. 게다가 필리핀 정부는 이 법안의 시행을 위해 의회가 100.00 만 PHP만을 할당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강력한 정치적 의지가 부족해 보였다. 프로그램이 성공하려면 법안 제정 및 시행 후 1년 이내에 최소 2.00 억 PHP가 필요했고, 다음 3년 동안 3.00 억 PHP가 필요했다. 그러나 1972년까지 이 법안은 정부에 5700.00 만 PHP의 비용으로 68개 농지의 4,500명의 농민에게만 혜택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1970년대에는 농민들이 경작하는 토지가 줄어들었고, 농지에서 얻는 수입도 감소했다. 그들은 지주, 채권자, 벼 구매자에게 더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실제로 마카파갈 행정부 동안 농민들의 생산성은 더욱 하락했다.
6.3.3. 반부패 정책
마카파갈의 주요 선거 공약 중 하나는 카를로스 P. 가르시아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만연했던 정부 부패를 척결하는 것이었다. 행정부는 또한 여러 대기업에 지배적인 이권을 가진 형제인 필리핀 사업가 페르난도 로페스와 유제니오 로페스 시니어와 공개적으로 대립했다. 행정부는 이 형제들을 "정치적 권력, 정치인 및 기타 공무원의 부패를 통해 사업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필리핀 스톤힐(Stonehills)"이라고 언급했다. 1965년 필리핀 총선에서 로페스 형제는 마카파갈의 라이벌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지지했으며, 페르난도 로페스는 마르코스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했다.
- 스톤힐 논란**
마카파갈 행정부의 반부패 캠페인은 필리핀에서 5000.00 만 USD 규모의 사업 제국을 운영하던 미국인 해리 스톤힐에 의해 시험대에 올랐다. 마카파갈의 법무부 장관 호세 W. 디오크노는 스톤힐을 탈세, 밀수, 수입 허위 신고, 공무원 부패 혐의로 조사했다. 디오크노의 조사는 스톤힐이 정부 내 부패와 연루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그러나 마카파갈은 스톤힐을 추방하고 디오크노를 내각에서 해임함으로써 디오크노가 스톤힐을 기소하는 것을 막았다. 디오크노는 마카파갈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하며 "정부가 부패를 저지른 자를 보내줬는데 어떻게 부패한 자들을 기소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디오크노는 나중에 상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6.3.4. 독립기념일 변경
마카파갈은 필리핀 독립 기념일 기념일을 변경하여 민족주의적 정서에 호소했다. 1962년 5월 12일, 그는 1898년 6월 12일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선언을 기념하는 특별 공휴일로 1962년 6월 12일 화요일을 선포하는 포고령에 서명했다. 이 변경은 1964년 공화국법 제4166호가 서명되면서 영구화되었다. 1962년 포고령을 발표한 공로로 마카파갈은 일반적으로 독립 기념일의 기념일을 옮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몇 년 후, 마카파갈은 언론인 스탠리 카노에게 변경의 진짜 이유를 말했다. "제가 외교관으로 있을 때, 7월 4일에는 아무도 우리 리셉션에 오지 않고 대신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경쟁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공휴일이 필요하다고 결정했습니다."
인도네시아어 자료에 따르면, 마카파갈은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점령군에 의해 필리핀 대통령이 된 호세 P. 라우렐을 국가의 공식 대통령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이전에는 전후 필리핀 정부가 라우렐 정권을 법적 지위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6.4. 대외 정책
마카파갈 행정부의 대외 정책은 지역 협력 강화와 영토 주권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두었다.
6.4.1. 북보르네오 영유권 주장

1962년 9월 12일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대통령 행정부 시절, 동부 북보르네오(현재 사바주) 영토와 그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 소유권 및 지배권은 술루 술탄국의 상속인 술탄 무함마드 이스마일 E. 키람 1세에 의해 필리핀 공화국에 양도되었다. 이 양도는 필리핀 정부가 국제 법원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추구할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부여했다. 필리핀은 1963년 말레이시아 연방이 사바를 포함시킨 후 말레이시아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이 주장은 1989년 후속 필리핀 행정부가 쿠알라룸푸르와의 우호적인 경제 및 안보 관계를 추구하기 위해 후순위로 미루면서 철회되었다. 현재까지 말레이시아는 사바의 관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려는 필리핀의 요구를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다. 사바는 필리핀 모로 지도자 누르 미수아리(Nur Misuari)가 사바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려는 주장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고 기각했다.
6.4.2. MAPHILINDO 구상
1963년 7월,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대통령은 마닐라에서 정상 회담을 소집하여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간의 비정치적 연합체인 MAPHILINDO를 제안했다. 이는 식민지 경계로 인위적으로 분리된 말레이족을 통합하려는 호세 리살의 꿈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MAPHILINDO는 공통 관심사를 합의 정신으로 다룰 지역 협회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는 자카르타와 마닐라가 말레이시아 연방의 형성을 지연시키거나 심지어 방해하려는 전술로도 인식되었다. 마닐라는 사바 (이전 영국 북보르네오)에 대한 자체 주장을 가지고 있었고, 자카르타는 말레이시아의 형성을 영국 제국주의 음모로 항의했다. 이 계획은 수카르노가 말레이시아와의 "콘프론타시" 계획을 채택하면서 실패했다. 콘프론타시, 즉 대결은 기본적으로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막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아이디어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에 의해 수카르노 대통령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 정당은 수카르노 대통령에게 말레이시아의 형성이 신식민주의의 한 형태이며 인도네시아의 평온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 후 ASEAN의 발전은 이 프로젝트가 부활할 가능성을 거의 확실히 배제한다.
6.4.3. 베트남 전쟁 관련 입장

1965년 임기 만료 전,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대통령은 의회를 설득하여 남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하려 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자유당을 탈당하고 국민당으로 이적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상원 의장이 이끄는 야당에 의해 저지되었다.
미국 정부가 다른 국가들을 전쟁에 참여시키려는 적극적인 관심은 이미 1961년부터 미국 정책 논의의 일부였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4년 4월 23일 "더 많은 깃발(More Flags)" 프로그램이라고 불리는 계획에서 다른 국가들에게 남베트남을 지원해 달라고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호소했다. 전 백악관 아시아 담당 국장 체스터 쿠퍼는 왜 이러한 추진력이 남베트남 공화국이 아닌 미국에서 나왔는지 설명했다. "'더 많은 깃발' 캠페인은 워싱턴이 의미 있는 약속을 이끌어내기 위해 상당한 압력을 가해야 했다. 탐색의 가장 짜증나는 측면 중 하나는 사이공 정부의 무기력이었다. 부분적으로 남베트남 지도자들은 정치적 경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이공은 이 프로그램이 미국 국민을 대상으로 한 홍보 캠페인이라고 믿는 듯했다."
6.5. 1965년 대선 캠페인 및 결과
임기 말에 마카파갈은 의회의 "지배적이고 비협조적인 야당"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주장하는 개혁을 계속 추구하기 위해 재선을 모색하기로 결정했다. 자유당의 동료 의원이자 상원 의장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마카파갈의 재선 출마로 인해 당의 지명을 얻을 수 없게 되자, 마카파갈에 맞서기 위해 경쟁 정당인 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현직 행정부에 제기된 쟁점 중에는 뇌물과 부패, 소비자 물가 상승, 그리고 지속되는 치안 문제가 있었다. 마카파갈은 1965년 11월 총선에서 마르코스에게 패배했다.

7. 퇴임 이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은 헌법 제정 회의 의장으로 활동하고 마르코스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치며 필리핀 정치에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7.1. 헌법 제정 회의
마카파갈은 1965년 마르코스에게 패배한 후 정치 은퇴를 선언했다. 1971년, 그는 1973년 필리핀 헌법을 초안한 헌법 제정 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헌법이 비준되고 나중에 수정된 방식 때문에 그는 나중에 그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7.2. 마르코스 정권 반대 활동
1979년, 그는 마르코스 정권에 반대하기 위해 자유를 위한 국민 연합이라는 정당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7.3. 원로 정치인으로서의 활동
1986년 민주주의가 회복된 후, 마카파갈은 원로 정치인의 역할을 맡았고 필리핀 국무회의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또한 국가 백주년 기념 위원회의 명예 의장이자 CAP 라이프 이사회 의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 마카파갈은 독서와 글쓰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자신의 대통령 회고록을 출판했고, 정부와 경제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마닐라 불레틴 신문에 주간 칼럼을 썼다.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은 1997년 4월 21일 마카티 의료 센터에서 심부전, 폐렴, 신장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1997년 4월 27일 리빙안 응 마가 바야니에 안장되었다.
8. 개인사
마카파갈의 사생활은 두 번의 결혼과 자녀들을 통해 형성되었다.
8.1. 첫 번째 결혼
1938년, 마카파갈은 푸리타 데 라 로사와 결혼했다. 그들은 시엘로 마카파갈-살가도(나중에 팜팡가주 부지사가 됨)와 아르투로 마카파갈 두 자녀를 두었다. 푸리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3년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호세 에두아르도 디오스다도 살가도 야네스(Jose Eduardo Diosdado Salgado Llanes)는 마카파갈의 가장 나이 많은 증손자이다.
8.2. 두 번째 결혼 및 자녀
1946년 5월 5일, 마카파갈은 에반젤리나 마카레그 박사와 재혼했다. 그들은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나중에 필리핀 대통령이 됨)와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주니어 두 자녀를 두었다.
9. 업적 및 평가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정치적 유산은 그의 개혁 정책과 국가적 기념을 통해 필리핀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9.1. 국가적 기념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은 필리핀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며, 그의 업적은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적 기념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9년 9월 28일, 마카파갈의 딸인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은 그의 고향인 팜팡가주 루바오에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대통령 박물관 및 도서관을 개관했다. 이 박물관과 도서관에는 마카파갈의 개인 서적과 기념품이 소장되어 있다.


그는 필리핀 200페소 지폐의 신규 디자인 시리즈(2002년 6월 12일 ~ 2013년)와 신세대 통화(2010년 12월 16일 ~ 현재)에 등장하며, 필리핀의 주요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대통령은 마카파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2010년 9월 28일을 그의 고향인 팜팡가주에서 특별 비근무 공휴일로 선포하기도 했다.
마카파갈의 이름을 딴 주요 시설물로는 2003년부터 2012년까지 클라크 국제공항의 명칭이었던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국제공항,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대로, 그리고 마카파갈 다리 등이 있으며, 팜팡가 주청사 내에는 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생가는 필리핀의 중요한 역사적 장소로 보존되어 있으며, 박물관과 도서관은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박물관 내부에는 마카파갈의 유화 초상화 등 다양한 전시물이 있으며, 방문객들은 그의 생애와 정치적 유산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박물관 2층에는 그의 개인 서적과 기념품이 전시되어 있어 그의 학문적 열정과 소박한 삶을 엿볼 수 있다.
9.2. 영향력
마카파갈은 "루바오의 가난한 소년"으로 불리며 서민적 이미지를 강조했고, "부패하지 않은 자" 또는 "최초의 남자들의 챔피언"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청렴함을 강조했다. 그의 주요 정책인 자유 기업 체제 도입, 농지 개혁 추진, 그리고 부패 척결 노력은 필리핀 경제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자 했다. 특히 독립기념일을 6월 12일로 변경한 것은 필리핀 민족주의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상징적 조치였다. 비록 그의 개혁 중 상당수가 의회의 반대로 좌절되었지만, 그의 노력은 후대 필리핀 정치인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특히 딸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옹호한 원로 정치인으로서 필리핀 정치사에 긍정적인 유산을 남겼다.
10. 선거 이력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이 출마했던 주요 선거의 결과와 득표율은 다음과 같다.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57년 선거 | 필리핀 부통령 | 6대 | 자유당 | 46.55% | 2,189,197표 | 1위 | 당선 |
1961년 선거 | 필리핀 대통령 | 9대 | 자유당 | 55.00% | 3,554,840표 | 1위 | 당선 |
1965년 선거 | 필리핀 대통령 | 10대 | 자유당 | 42.88% | 3,187,752표 | 2위 | 낙선 |
11. 훈장 및 표창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은 국내외에서 다양한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 필리핀:
- 가와드 마비니 대십자 훈장(GCrM) - (1994년)
- 호세 리살 기사단 대십자 기사(KGCR)
- 대만:
- 경성훈장 대수 (1960년 5월 2일)
- 일본:
- 대훈위 국화대수장 (1962년)
- 스페인:
- 이사벨라 카톨릭 훈장 목걸이 기사 (1962년 6월 30일)
- 이탈리아: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목걸이 대십자 기사 (1962년 7월)
- 바티칸:
- 비오 9세 훈장 목걸이 기사 (1962년 7월 9일)
- 파키스탄:
- 니샨-에-파키스탄 (1962년 7월 11일)
- 몰타 주권 군사 훈장:
- 프로 메리토 멜리텐시 훈장 목걸이
- 태국:
- 라차밋뜨라폰 훈장 (1963년 7월 9일)
- 서독:
- 독일연방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 특수 등급 (1963년 11월)
12. 저술 활동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은 대통령 재임 기간과 퇴임 후에도 다양한 연설집, 회고록, 저서를 남겼다.
- 대통령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연설집 (Speeches of President Diosdado Macapagal). 마닐라: 인쇄국, 1961.
- 서민을 위한 새로운 희망: 대통령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연설 및 성명 (New Hope for the Common Man: Speeches and Statements of President Diosdado Macapagal). 마닐라: 말라카냥궁 언론실, 1962.
- 필리핀을 위한 5개년 통합 사회경제 프로그램 (Five Year Integrated Socio-economic Program for the Philippines). 마닐라: [s.n.], 1963.
- 자유의 충만함: 대통령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연설 및 성명 (Fullness of Freedom: Speeches and Statements of President Diosdado Macapagal). 마닐라: 인쇄국, 1965.
- 남미를 바라보는 아시아인 (An Asian looks at South America). 케손 시티: 맥 출판사, 1966.
- 동쪽으로 향하는 필리핀 (The Philippines Turns East). 케손 시티: 맥 출판사, 1966.
- 건물을 위한 돌: 대통령의 회고록 (A Stone for the Edifice: Memoirs of a President). 케손 시티: 맥 출판사, 1968.
- 필리핀을 위한 새로운 헌법 (A New Constitution for the Philippines). 케손 시티: 맥 출판사, 1970.
- 필리핀의 민주주의 (Democracy in the Philippines). 마닐라: [s.n.], 1976.
- 세계의 입헌 민주주의 (Constitutional Democracy in the World). 마닐라: 산토토마스 대학교 출판부, 1993.
- 니파 오두막에서 대통령궁까지: 디오스다도 P. 마카파갈 대통령의 자서전 (From Nipa Hut to Presidential Palace: Autobiography of President Diosdado P. Macapagal). 케손 시티: 필리핀 평생 교육 및 연구 아카데미, 2002.
13. 관련 항목
- 필리핀의 역사 (1946년-1965년)
- 필리핀의 역사
-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 농지 개혁법 (필리핀)
- MAPHILINDO
-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대로
- 마카파갈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