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구와타 마스미는 어린 시절부터 야구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거치며 일본 야구계의 주목받는 유망주로 성장했다.
1.1. 어린 시절 및 가족
구와타 마스미는 1968년 4월 1일 오사카부야오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로 골퍼인 이즈미 구와타이며, 어머니는 토시에이다. 남동생 또한 프로 골퍼인 구와타 이즈미이다. 그는 아내 마키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구와타 마사키는 프로 야구 선수로 활동했으며, 차남 맷 구와타는 탤런트이자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다.
구와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마을의 '하야부사 어린이회 소프트볼 팀'에서 소프트볼을 시작하여 4월 1일생으로 같은 학년 중 가장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6학년 위주의 A팀에서 유격수 주전으로 활약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보이스 리그 팀인 '야오 프렌즈'에 소속되어 경식 야구를 시작했으며, 그의 아버지 타이시(泰次)가 고안한 연습과 특훈 등을 받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는 팀의 주전급 투수로 활약했다. 어린 시절에는 가난한 가정 환경을 인지하지 못했으나, 가족들과 초밥을 먹으러 갔을 때 자신과 동생은 많이 먹는 반면 어머니와 누나는 거의 먹지 않는 것을 보고 나중에 누나로부터 "가난해서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이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2010년 1월 17일 주택 화재로 사망했는데, 구와타는 아버지가 던진 공을 마지막으로 받아보고 싶었고, 자신이 던진 공을 아버지가 받아주기를 바랐다고 슬픔을 표했다.
1.2. 중학교 시절
1980년 4월, 구와타는 야오 시립 다이쇼 중학교에 입학하여 야구부에 소속되었다. 그는 입학 직후 외야수 겸 1루수로 주전 자리를 꿰찼으며, 중학교 1학년 가을부터는 주전급 투수로 활약했다.
중학교 2학년이던 1981년, 그는 제32회 오사카 중학교 우승 야구 대회에서 모리구치 시립 야쿠모 중학교에 0대1로 아쉽게 패했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이던 1982년에는 출전한 봄 지구 대회, 오사카부 대회, 야오시 대회, 제33회 오사카 중학교 우승 야구 대회를 모두 제패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이쇼 중학교 시절, 구와타는 훗날 프로에서 활약할 니시야마 슈지와 배터리를 이뤘다. 니시야마는 당시 구와타의 투구에 대해 "중학생 때부터 약 140 km/h 정도의 공을 던졌고, 미트를 놓는 곳에 정확히 공이 왔다"며 뛰어난 제구력을 칭찬했다. 또한 "아무도 그의 공을 칠 수 없었다. 고등학교 야구에서 1학년부터 우승하는 것이 당연했고, 프로에서도 활약하는 것이 당연한 그런 공이었다"고 회상하며 구와타를 역대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당시 오사카 중학교 우승 야구 대회 50주년 기념지에는 "구와타의 공은 파울로 만드는 것도 겨우였고, 간혹 출루해도 멋진 픽오프 플레이에 당해 완패했다. 지는 것보다도 압도적인 실력 차이에 아연실색할 뿐이었다"는 일화가 실려 그의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주었다. 준경식 야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다이쇼 중학교에 구와타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진로 문제로 학교 측과 갈등을 겪은 그는 중학교 3학년 3학기에 야오 시립 세이호 중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했다. 이는 구와타가 PL 학원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의지를 학교 측이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1.3. 고등학교 시절
1983년 4월, 구와타는 야구 명문인 PL 학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동기인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함께 'KK 콤비'로 불리며 일본 고교 야구의 전설이 되었다. PL 학원 입학 초기, 구와타는 "4번은 기요하라, 에이스는 다구치"라는 기정 노선에 따라 약 172 cm의 작은 체구 때문에 "너는 저쪽으로 가 있어라"는 취급을 받으며 공 줍기를 담당했다. 중학교 시절의 실적을 고려하여 사립학교 대회 등에서 몇 차례 등판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난타당했고, 감독으로부터 외야수 전향을 통보받기도 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어머니에게 학교를 그만둘까 고민을 털어놓았으나, 어머니는 "후보 선수라도 좋으니 투수로서 3년간 PL에서 끝까지 해내라"고 격려했고, 이는 그가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었다.
구와타가 입학하기 전 PL 학원 고등학교는 1981년과 1982년 봄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를 연패했지만, 여름 고시엔 대회는 4년 연속(1979년 ~ 1982년) 출전에 실패하여 1983년 여름 우승 탈환이 지상 과제였다. 이 해 PL 학원은 투수진이 불안정하자 나카무라 준지 감독은 고베 시립 신코 고등학교와 호토쿠가쿠엔 고등학교 감독으로 고시엔 8회 출전 및 고베 제강소 감독으로 도시 대항 야구 대회 우승 경력이 있는 시미즈 가즈오를 임시 투수 코치로 초빙했다. 시미즈는 구와타의 외야 송구를 보고 공의 회전력에 감탄하며 "대단한 선수가 있다. 학년은 관계없다. 내가 여름까지 훌륭한 투수로 만들겠다"고 말하며 구와타를 투수로 복귀시켰고, 이후 구와타는 시미즈 코치로부터 1대1 집중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이 지도는 하체 단련, 손가락 끝 단련(마사지, 타일 닦기), 섀도 피칭, 팔꿈치 스트레칭, 그리고 경기 상황 판단, 투구 배합, 타자 심리 읽기 등 정신적인 부분까지 아우르는 강도 높은 훈련이었다. 시미즈는 구와타의 타고난 팔 스윙과 강한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1983년 6월, 구와타는 레귤러 팀에 승격되었다. 여름 고시엔 오사카부 대회에서 구와타는 등번호 17번을 달고 기요하라, 다구치와 함께 1학년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선발 명단에 들었다. 타격 재능도 인정받아 투수 겸 외야수로 등록되었다. 오사카 대회에서 불안정한 팀 상황을 보던 시미즈 코치는 4차전 오사카 스타디움에서 열린 스이타 고등학교와의 경기 전, 나카무라 감독에게 구와타의 선발 등판을 강력히 주장했다. 감독은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지만, 시미즈의 확신에 찬 태도에 따라 구와타를 선발로 기용했다. 경기 전, 상급생들은 구와타에게 "네가 있어서 망했다", "3년간의 고교 야구는 끝났다"며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기요하라가 첫 공식전 홈런으로 구와타를 지원했고, 구와타는 상대 타선을 2안타로 막아내며 완봉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는 상급생들의 비난을 잠재우고 구와타의 무서운 기세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승전 선발은 다구치였으나, 경기 중 부상으로 퇴장하자 구와타가 급히 마운드에 올라 상대 타선을 막아내며 팀을 고시엔 출전으로 이끌었다. 이후 다구치는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했고, 구와타가 에이스로 자리 잡았다.

1983년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구와타는 1학년임에도 등번호 '11'을 달고 사실상 PL 학원 고등학교의 에이스로 출전했다. 1차전 사이타마 현립 도코로자와 상업고등학교전에서 고시엔 데뷔를 했고, 2차전 오이타 현립 나카쓰 공업고등학교전에서는 3안타 완봉승을 기록하며 첫 홈런도 기록했다. 준결승에서는 미즈노 요시히토가 이끄는 '메아리 타선'의 도쿠시마 현립 이케다 고등학교를 7대0으로 완봉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 구와타는 1-0으로 앞선 2회말 2사 2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서 "홈런 외의 출루로 스태미나를 소모하기보다, 삼진이라도 좋으니 풀 스윙으로 홈런을 노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좌익수 스탠드에 2점 홈런을 날리며 고시엔에서 미즈노로부터 처음으로 홈런을 친 선수가 되었다(이 대회에서 2개의 홈런을 기록). 결승에서는 요코하마 상업고등학교를 3대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학제 개혁 이후 최연소 우승 투수(15세) 기록을 세웠다. 결승전이 끝난 후 "앞으로 4회는 고시엔에 들어와서 전부 이기고 싶다"라고 말하면서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1학년 투수가 여름 고시엔 결승에 진출한 사례는 있었으나 모두 준우승에 그쳤던 징크스를 구와타가 깼다. 고시엔에서의 활약으로 1학년으로서는 유일하게 전일본 고교 선발팀에 발탁되어 미국 원정을 경험했다. 귀국 후 그는 1학년으로 우승하며 수뇌부의 신뢰를 얻었고, 나카무라 준지 감독에게 전체 연습 시간 단축(약 3시간)과 개인 연습 강화, 대회 후 투수들의 노스윙 조정을 제안했고, 감독이 이를 받아들면서 이후 PL 학원 고등학교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2학년이던 1984년에는 봄과 여름 고시엔 대회 결승에서 모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는 여름 결승 상대였던 이바라키 현립 도리데 제2 고등학교를 방문하여 야구를 즐기는 스포츠의 본질을 재확인하고 이를 이후의 활동에 적용했다. 3학년이 된 1985년에는 봄 대회에서 4강에 진출했고, 여름 고시엔 결승전에서는 야마구치 현립 우베 상업고등학교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구와타는 고교 야구의 격전지인 오사카에서 고시엔 대회 출전이 가능한 5차례 모두 출전했으며, 그 중 4차례 결승에 진출하여 1학년 여름과 3학년 여름에 두 번 우승하는 기록을 기요하라와 함께 세웠다. 고시엔 대회 통산 승리 수는 요시다 마사오에 이어 역대 2위이자 학제 개혁 이후에는 1위(20승 3패)이다. 또한 고시엔 통산 탈삼진 기록(150개)과 통산 등판 수(25경기), 통산 투구 이닝(197.2이닝)에서도 모두 단독 1위를 기록하며 수많은 기록을 세웠다. 당시 "여름 고시엔 우승 투수는 프로에서 대성하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있었지만, 구와타가 프로에서 173승을 기록하면서 이 징크스를 깼다. 그는 프로 선수로서의 성공을 위해 고등학교 3년간 스트레이트와 커브만으로 투구했다. 한번은 경기에서 스트레이트와 커브만 던지는 구와타에게 기요하라가 "더 쉽게 이길 수 있는데, 슬라이더나 슈트도 잘 던지면서 왜 던지지 않느냐?"고 묻자, 구와타는 상술한 이유를 말했고, 기요하라는 "터무니없는 녀석과 함께 야구했구나"라며 놀랐다고 한다. 타자로서의 재능도 뛰어나 고시엔 통산 홈런 개수도 기요하라에 이어 역대 2위인 6개이며(고1 여름 2개, 고2 봄 2개, 고2 여름 1개, 고3 여름 1개), 고교 통산 25홈런을 기록했다. 5차례 출전한 대회 중 구와타와 기요하라가 소속된 PL 학원 고등학교를 1실점 이내로 막아낸 투수(2학년 봄 준결승에서 연장 11회 0대1로 패한 다구치 류지, 같은 결승전에서 1-0으로 승리한 야마구치 시게유키, 3학년 봄 준결승에서 3대1로 승리한 와타나베 도미오)는 모두 프로에 입단했다.
구와타는 고등학교 졸업 후 와세다 대학(교육학부) 진학을 희망했다. 그는 스포츠 추천 입학이 아닌 학업 실력으로 합격하고 싶다는 신념을 가지고 밤늦게까지 학과 공부에 매진했으며, 야구부 기숙사의 '학습실'을 자주 이용하며 거의 혼자서 사용했다고 한다.
1.4. 드래프트 지명 및 프로 입단
1985년 일본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구와타는 드래프트 이전에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고, 이로 인해 다른 구단들은 구와타 지명을 회피했다. 유일하게 요미우리만이 그를 지명했고, 추첨 없이 구와타를 영입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구와타와 요미우리 사이에 밀약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이를 'KK 드래프트 사건'이라고 부른다. 드래프트 후 구와타의 본가에는 항의와 괴롭힘이 빗발쳐 경비를 요청해야 할 정도였다.
구와타 본인은 밀약을 부인하며 "요미우리에 가지 않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 봄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가 끝난 시점에서 요미우리가 1순위로 지명해 준다면 프로에 가기로 결정했다"고 해명했다. 그는 당시 드래프트에서 진학을 시사하면서도 프로에 입단한 선수가 자신 외에도 많았다고 덧붙였다. 훗날 2020년에는 "요미우리로부터 뒷돈을 받은 적은 프로 입단 후에도 한 번도 없다. 지명은 예상 밖이었고, 당시 나는 체격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대학을 거쳐 프로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학을 위해 공부를 계속했다"고 밝혔다. 그는 평소 요미우리 팬이었지만, "PL, 와세다, 요미우리"라는 경력이 목표였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기요하라와 함께 요미우리에 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고 언급했다.
드래프트 당일, 요미우리 외의 3개 구단이 구와타의 아버지에게 "구와타를 1순위로 지명할 예정"이라고 통보했으나, 구와타는 아버지에게 "와세다에 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드래프트에서는 이 3개 구단 모두 기요하라를 1순위로 지명했고, 결과적으로 요미우리만이 구와타를 1순위로 지명하게 되었다고 구와타는 훗날 밝혔다. 2008년 말 TBS 계열에서 방영된 '카리스마 백서'에서도 이 내용이 다뤄졌다. 드래프트 당일 인터뷰에서 요미우리의 오 사다하루 감독은 "팀 상황을 고려하면 보강 포인트는 투수이고, 투수라면 구와타"라며, 지명이 드래프트 당일의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음을 밝혔다. 왕 감독은 구와타의 "상황에 따른 투구 능력"을 높이 평가했으며, 1985년 봄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의 덴리 고등학교전에서 삼중살을 성공시킨 장면을 인상 깊은 플레이로 꼽았다.
2. 프로 경력
구와타 마스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일본 프로 야구의 전성기를 보냈고, 선수 생활 말년에는 메이저 리그에 도전하며 자신의 야구 인생을 완성했다.
2.1.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프로 입단 전후로 투구뿐만 아니라 타격과 수비 능력도 뛰어났던 구와타에게 야수 전향을 권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구단과 구와타의 의지에 따라 투수로서의 길을 걸었다.

- 오 사다하루 감독 시대 (1986년 ~ 1988년)**
- 1986년 5월 25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프로 첫 등판을 가졌고, 6월 5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첫 승리를 첫 완투로 장식했다.
- 2년차인 1987년 7월 8일 삿포로시 마루야마 구장에서 열린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자신의 3점 홈런과 적시타로 팀의 모든 4득점을 이끌어내며 프로 첫 완봉승을 거두었다. 9월 1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전에서는 이전 대결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던 곤도 신이치로부터 솔로 홈런을 때려냈다. 근도에게는 프로 5경기(선발 4경기) 만에 첫 피홈런이자 5실점으로 첫 패전 투수가 되었다(구와타는 승패가 기록되지 않았다). 이 시즌 15승 6패, 평균자책점 2.17로 리그 최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수상했다. 또한 호리우치 쓰네오 이후 20년 만에 10대 선수로서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했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과 5차전에 선발 등판했으나, 모두 자신의 실책으로 자멸하며 초반에 강판되었다.
- 1988년에는 구단 역사상 최연소인 20세 0개월의 나이로 개막전 선발 투수로 발탁되었다.
- 후지타 모토시 감독 시대 (1989년 ~ 1992년)**
- 1989년부터 후지타 모토시 감독의 선발 이론에 따라 사이토 마사키, 마키하라 히로미와 함께 '세 기둥'으로 불리며 선발진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2년 연속 개막전 선발로 지명된 1989년에는 개막 이후 5연승을 기록하며 개인 최다인 17승을 올렸다.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2차전에서 패전 투수가 되었지만, 6차전에서 승리 투수가 되어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 1989년 여름부터 주간지에서 스캔들이 보도되었고, 이듬해 1990년 2월에는 나카마키 쇼지가 스포츠 용품 업체와의 관계를 폭로하는 서적 『안녕 구와타 마스미, 안녕 프로 야구』를 출판했다. 이 책에는 구와타가 친분이 있는 회원제 클럽 사장에게 등판일을 알려주거나 회원 유치 성공의 대가로 현금을 받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해당 사장이 과거 상습 도박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구와타가 야구 도박에 연루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샀다. 처음 구와타는 등판일 유출과 금품 수수 사실을 모두 부인했으나, 후에 이것이 거짓임이 밝혀졌다. 이에 요미우리 구단은 3월 30일, 구와타에게 금품 수수 등이 통일 계약서 17조(모범 행위)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시즌 시작 후 1개월 등판 금지 및 벌금 1000.00 만 JPY의 징계를 내렸다. 이 사건은 국회에서도 다루어지는 등 사회 문제로 확대되었다. 중마키와의 관계에서는 야구 도박에 관여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 1990년 시즌에는 1개월의 근신 후 2경기 연속 완봉승으로 복귀하는 등, 공백에도 불구하고 승리 수와 평균자책점 모두 팀 동료 사이토에 이어 리그 2위를 기록하며 활약했다. 올스타 팬 투표에서도 요다 쓰요시에 이어 투수 부문 2위를 차지했으나, 감독 추천에서 제외되어 출전하지 못했다. 일본 시리즈 3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처음으로 완투(8이닝)했으나, 7실점으로 난타당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 1991년에는 전년도 6명의 선발 투수가 80승을 합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부진에 빠진 가운데 홀로 분투하며 모든 부문에서 팀 내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 1992년에는 6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으나 부진에 빠져, 6월부터 7월까지 팀의 10연승, 4연승, 7연승을 모두 구와타가 끊어버려 언론에서 '연승 스토퍼'라는 별명이 붙었다.
-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시대 (1993년 ~ 2001년)**
- 나가시마 시게오가 두 번째 요미우리 감독으로 부임한 1993년에도 전년에 이어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해 부진했고, 다시 야수 전향론이 불거졌다. 당시 센트럴 리그 심판이었던 다나카 도시유키의 저서에 따르면, 이 시기 구와타의 부진은 "낮은 공에 힘이 없어 스트라이크로 콜되던 공들이 볼이 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나타났다.
- 1994년 시즌은 14승 11패, 평균자책점 2.52, 185 탈삼진을 기록하며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획득했다. 시즌 내내 활약하며 센트럴 리그 MVP에 선정되었다. 8월 13일 도쿄 돔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인 16탈삼진(매 이닝 탈삼진도 기록)으로 완봉승을 거두었다.
- 10.8 결전:** 1994년 10월 5일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전에서 8회 2사까지 노히트 노런에 묶었으나, 8일의 10.8 결전에 대비하기 위해 투수 코치 호리우치 쓰네오의 지시로 9회 완봉을 포기하고 강판되었다. 7일 밤, 숙소에서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으로부터 "긴장되는 상황에서 너를 투입하겠다"는 말을 듣고 의욕적으로 경기에 임했다. 8일 당일, 경기 전 연습 시 구와타가 요미우리 투수진의 핵심이라고 본 팬들의 열렬한 응원에 15분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불펜에 들어갔지만, 몸은 피로로 굳어 있었다. 7회 3점 리드 상황에서 등판했으며, "솔직히 무서웠다"고 회고했다. 8회 선두 타자인 PL 학원 후배 다쓰나미 가즈요시가 1루 베이스에 혼신의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내야 안타를 만들며 부상으로 퇴장하는 장면에 감동했다고 밝혔다. 9회말 2사 고모리 데쓰야를 큰 커브로 삼진 처리하며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세이브를 기록했고, 팀의 우승을 확정 짓는 우승 투수가 되었다. 『베이스볼 매거진』 2009년 3월호는 "마지막 타자가 삼진당한 직후 구와타의 가슴팍을 치는 동작은 많은 야구팬들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라고 기술했다. 경기 전 계속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경기 종료 후에는 특별히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1994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에서 초반에 무너졌으나, 3차전에서 종반 구원 등판으로 세이브를 기록했고, 5차전에서는 선발 등판하여 완투승을 거두며 1승 1패 1세이브를 기록했다. 구와타는 이로써 진정한 요미우리의 에이스로 인정받았지만, 1994년 후반의 혹사로 인해 아래의 팔꿈치 수술로 이어지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 오른쪽 팔꿈치 부상과 재기:**
- 1995년 5월 24일 한신전에서 3회초 유부네 도시로의 3루 선상 번트 플라이를 잡으려다 다이빙 캐치 중 오른쪽 팔꿈치를 강타했다. 이후에도 6회 도중 강판될 때까지 큰 문제 없이 투구했지만, 만약을 위해 2군으로 조정되었다(이 기간 동안 팔꿈치 정밀 검사는 받지 않았다). 6월 15일 한신과의 11차전에서 약 3주 만에 1군 선발로 복귀했으나, 1회부터 실점하는 등 부진했고 5회에는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상대 투수에게 볼넷을 내준 뒤 다음 타자를 처리하고 직접 강판을 요청했다. 훗날 팔꿈치 정밀 검사 결과 측부인대 파열이라는 중상을 입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는 치료를 위해 자신의 왼 손목에서 건강한 인대를 이식하는 토미 존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 1995년 잔여 시즌과 1996년 시즌 전체를 재활에 매달렸고, 1997년 4월 6일 661일 만에 1군에 복귀했다. 수술 후 공을 던질 수 없는 기간이 계속되었지만 "공을 던지지 못해도 하체는 단련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장 외야를 계속 달렸고, 그가 달린 부분은 잔디가 벗겨져 '구와타 로드'라고 불리게 되었다. 복귀 당시 마운드에 무릎을 꿇고 플레이트에 오른쪽 팔꿈치를 대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 복귀한 그 해에는 투구 수 제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완투는 없었지만, 2년 만에 규정 투구 이닝을 채웠고 10승을 거두었다.
- 1998년 야쿠르트와의 개막전에서 9년 만에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아 9회 2사까지 던진 후 가네이시 아키히토의 구원을 받아 완투는 놓쳤지만 승리를 기록했다. 이 해에는 최다승 경쟁에 가세하며 16승을 올렸으나, 1승 차이로 가와사키 겐지로에게 미치지 못했다. 전년도에는 100구 한정 등판이었지만, 이 해에는 투구 수 제한 없이 복귀 후 첫 완봉승을 포함한 7완투를 기록했다.
- 1999년에는 개막전 선발로 예정되었으나 직전에 감기에 걸려 등판을 회피했다(대신 팀 최초의 외국인 개막전 선발인 발비노 갈베스가 등판). 구와타는 2차전에 등판했으나 2회 도중 보크와 엮여 6실점하며 강판되었고, 다음 등판까지 14일이나 쉬었다. 이후 로테이션을 지켰지만 승운이 따르지 않아 선발로서 7승 9패 평균자책점 4.23의 성적에 그쳤다. 리그 종반에는 마무리 투수 마키하라 히로미의 구원 실패가 두드러지면서 10.8 결전 이후 처음으로 공식전 구원 등판을 맡았다. 구원 투수로서는 9경기 등판하여 1승 0패 5세이브, 평균자책점 0.00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 2000년에도 개막 로테이션에 들었으나 부진으로 6월부터 선발에서 제외되어 남은 시즌은 구원 등판했다. 마키하라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다시 마무리 투수를 맡았지만 전년도와 같은 안정감은 없었고, 오카지마 히데키가 교체로 마무리 투수에 정착했다. 팀은 4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000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2차전에서 팀이 대량 리드한 8회부터 등판하여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으나 이 등판이 유일했다.
- 2001년에도 개막 로테이션에 들었으나 부진하여 이후 선발의 틈새와 중간 계투 등판을 오가며 4승 5패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이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이토, 마키하라, 무라타 신이치 등 베테랑 선수들이 은퇴했고, 나가시마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 하라 다쓰노리 및 호리우치 쓰네오 감독 시대 (2002년 ~ 2005년)**
- 2002년부터 하라 다쓰노리가 요미우리 감독으로 취임했고, 구와타는 전년도 오프 시즌에 은퇴를 결심했으나 하라 감독의 설득으로 현역 생활을 이어갔다. 이 해에는 고무술을 응용한 훈련과 투구 폼을 도입한 것이 주효하여 4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했다. 15년 만에 최고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규정 투구 이닝에 도달하며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것은 1994년 이후 8년 만이었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2002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2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7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며 1994년 일본 시리즈 5차전 이후 처음으로 승리 투수가 되었다. 팀은 4연승으로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 해는 구와타에게 마지막 리그 우승이자 일본 시리즈 우승이었다. 9월 18일 요코하마전(도쿄 돔)에서는 3실점 완투승을 거두었고, 타격에서는 셰인 바워스로부터 8년 만에 솔로 홈런을 때려냈다(도쿄 돔에서는 10년 만의 2번째 홈런). 완투와 홈런 모두 현역 마지막 기록이었다. 그의 타격 성적은 타율 .294(51타수 15안타)로, 규정 투구 이닝을 달성한 시즌 중 개인 최고 기록이었다.
- 2003년에는 발목을 삐끗하여 전년도와 같은 투구를 보여주지 못하고 5승 3패, 평균자책점 5.93으로 불안정한 성적을 기록했다.
- 2004년에는 3승 5패, 평균자책점 6.47의 성적에 그쳤고, 이 해부터 취임한 호리우치 쓰네오 감독으로부터 "나는 말년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은퇴 권고성 발언을 들었다.
- 2005년에는 승리 없이 12경기 선발 등판하여 0승 7패, 평균자책점 7.14에 그쳤지만, 2006년에도 현역 생활을 이어가기로 결정되었다.
- 하라 다쓰노리 감독 시대 (2006년)**
- 2006년 4월 13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600일 만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 경기에서 주루 중 오른쪽 발목을 삐끗했다. 그의 1군 마지막 등판은 같은 달 27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히로시마전으로, 3회 도중 6실점하며 강판되어 패전 투수가 되었다. 그 이틀 뒤 그는 등록 말소되었다.
- 한동안 2군에서 조정 훈련을 계속했고, 하라 감독이 시찰한 8월 21일 이스턴 리그 야쿠르트전에 선발 등판했으나 2회 도중 강판되었다. 이후 구단 수뇌부로부터 일절 연락이 없자, 그는 요시무라 사다아키 2군 감독에게 수도권에서의 마지막 등판 기회인 9월 24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장 2군 경기에 자신을 등판시켜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구단이 처우를 명확히 해주지 않아, 신세 진 팬들에게 요미우리에서의 마지막 등판을 알릴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고 밝히며, 9월 23일 구단 공식 홈페이지의 자신의 페이지에 퇴단과 2군 등판을 시사하는 글을 게재했다.
- 2006년 11월 2일, 그는 2007년 시즌부터 메이저 리그에 도전할 것임을 표명했고, 결국 '은퇴 경기'는 팬 감사 행사에서 '작별회'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11월 23일 도쿄 돔에서 열린 '자이언츠 팬 페스타 2006'에서 그는 "18번 구와타 마스미의 야구는 마음의 야구입니다. 지금은 그저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 안녕히, 그리고 21년간 정말 감사했습니다"라고 인사하며 요미우리에서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2.2.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시절
2006년 12월 20일, 구와타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는다고 발표되었다. 그는 일본인 선수 최초로 파이리츠(및 산하 구단)와 계약한 선수가 되었다.
2007년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청 선수로 참가하여 캠프 종반까지 메이저 캠프에 남아 개막 로스터 진입을 목표로 했다. 3월 26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시범 경기에서 중전 안타를 맞고 3루 베이스 커버에 들어가던 중 주심 월리 벨과 충돌하여 오른쪽 발목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다. 이 경기는 3심제로 진행되었고, 벨 주심은 3루에서의 판정을 위해 3루로 달려가던 중 구와타와 교차하게 되었다. 그는 당분간 부상 회복과 재활에 전념해야 했다.
파이리츠는 구와타를 해고하지 않고 3A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언스 소속 마이너 선수로 남겨 3A 부상자 명단에 올렸다. 그는 플로리다에서 재활을 계속했고, 5월 19일 자유 타격 연습, 5월 24일 연습 경기 등판을 거쳐 3A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언스에 합류했다. 6월 2일에는 3A 공식 경기에 첫 등판했다.
파이리츠의 불펜진이 붕괴 상태에 있었던 팀 사정 덕분에, 6월 9일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었고, 6월 10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양키스전에서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당시 39세 70일의 나이로, 일본인 선수 최고령 데뷔 기록(현재는 다카하시 겐에 이어 2위)이자, 메이저 리그 전체에서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새첼 페이지의 42세, 디오메데스 올리보의 41세에 이어 세 번째 최고령 기록이었다. 그는 2이닝 동안 알렉스 로드리게스에게 홈런을 허용하며 2실점을 기록했다.
승격 초기에는 패전 처리 등판이 계속되었으나, 짐 트레이시 감독으로부터 "중요한 상황에서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아 중간 계투로서 중요한 상황에 등판하는 기회가 늘어났다. 그러나 난타당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1승도 올리지 못한 채 8월 14일(일본 시간 15일) 전력외 통보를 받았다. 그는 퇴단 당시 "아무런 후회도 없다", "메이저리거가 된 충만감으로 가득하다"고 밝히며 은퇴를 시사했다.
2008년 1월 8일, 구와타는 다시 파이리츠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청 선수로 참가할 것임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공표했다. 시범 경기에서는 호투를 보였으나,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려는 구단의 구상에서 벗어나 메이저 승격이 좌절되자 3월 26일 블로그를 통해 은퇴 의사를 밝히고 귀국했다. 은퇴 발표 당시 파이리츠는 구와타에게 코치직을 제안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같은 해 6월에는 고베 종합 운동 공원 야구장에서 요미우리 시절 동료였던 요시하라 고스케를 포함하여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타격 투수를 맡았고, 9월 23일 이바라키 골든 골즈 주최로 은퇴 경기를 가졌다.
3. 은퇴 후 활동
구와타 마스미는 선수 은퇴 후 야구 해설가, 학자, 지도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 야구계에 큰 영향을 미 미쳤다.
3.1. 은퇴 및 미디어 활동
은퇴 후 구와타는 일본 TV와 스포츠 호치의 전속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 TBS의 메이저 리그 객원 해설가 등으로 활동했다. 또한 탤런트로서도 방송에 출연했다.
3.2. 학업 및 연구 활동
구와타는 은퇴 후 학업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2009년 1월 28일, 40세의 나이로 와세다 대학원 스포츠 과학 연구과 석사 1년 과정에 합격했다. 그는 히라타 다케오 교수의 지도를 받았고, 2010년 3월 25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의 석사 논문은 "『야구도』의 재정의를 통한 일본 야구계의 발전 방안에 관한 연구"였으며,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구와타의 와세다 대학 진학 꿈은 외할아버지가 와세다 대학 출신이었고, 어릴 적 할머니가 와세다 대학 교가인 "미야코노 니시 기타"를 자주 불러주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와세다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2014년 3월에는 도쿄 대학에서 도쿄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대학원 연구생으로 합격했다. 그는 이곳에서 투수와 야수의 동작 분석 연구를 수행했으며, 2019년 현재 생명환경과학계 신체운동과학 연구실에 소속되어 있었다.
3.3. 지도자 경력
- 2013년: 도쿄 대학 야구부 특별 코치로 부임했다.
- 2016년 3월: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의 시나노 그란세로스에서 임시 코치로 지도에 나섰다. 이는 PL 학원 시절 동기이자 당시 감독이었던 이마쿠루스 나리유키와의 인연, 그리고 장남 구와타 마사키가 시나노로 이적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 2021년 1월 1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군 투수 치프 코치 보좌로 현장에 복귀했다. 이는 전년도에 이미 2021년 시즌 코칭 스태프가 발표된 상태였으나,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제안으로 연초에 입각이 타진된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임시 코치라고 생각했으며, 현역 은퇴 후 10년 정도는 현장에 돌아오지 않고 야구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 2022년: 투수 치프 코치로 승격되었다.
- 2023년: 팜 총감독으로 배치 전환되었다.
- 2024년: 2군 감독으로 배치 전환되었다.
3.4. 기타 활동 및 역할
구와타는 은퇴 후 다양한 사회적 활동과 역할을 수행했다.
- 특정 비영리 활동 법인 '아미치 델 쿠오레'(Amici del Cuore이탈리아어, 이탈리아어로 '마음의 친구들'이라는 뜻)의 이사장으로, 지도자 강습회를 주최한다.
- 보이스 리그의 아소 자이언츠 회장을 맡고 있다.
- NPB의 '통일구 문제에 관한 유식자에 의한 제3자 조사·검증 위원회'에 '특별 어드바이저' 자격으로 야구 관계자 중 유일하게 참여했다.
- 2019년 1월 12일, PL 학원 경식 야구부 OB회 회장에 취임했다.
- 2019년 2월 22일, 스포츠청 자문위원으로 취임했으며, 임기는 2020년 3월 31일까지였다.
- 다수의 광고에 출연했다. 히사미쓰 제약의 '에어 살롱파스'(1991년), 후코쿠 생명, 나이키의 '이 시련에 감사합니다'(1997년), 영화 '수호신'(2007년, 목소리 출연), 괌 정부 관광국(2008년 ~ 2009년), 산토리 '보스' 사치스러운 미당 '좋은 점 드립'편(2009년, 우에노 유키코, 이토 아쓰시와 공동 출연), 스카파! - '스카파! 야구 왕도 전국'편(2012년,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공동 출연), 일본 중고 자동차 판매 협회 연합회 '중고 자동차 판매사' 'Life'편(2013년, 피아노 연주만 출연), 소프트뱅크 '와이모바일' '부모와 자녀 댄스'편(2019년 11월 29일 ~ , 아들 맷 구와타와 공동 출연), 리크루트 '에어페이'(2021년, 마키하라 히로미, 사이토 마사키와 공동 출연), 이시다 (2022년, 아들 맷 구와타와 공동 출연) 등이 있다.
- TV 프로그램(각종 프로 야구 중계, J-SPO, BS 재팬의 '구와타식 스포츠 K영학')과 라디오 프로그램(TBS 라디오 '잊혀진 고시엔, 잊혀진 전쟁', 닛폰 방송 쇼업 나이터)에도 출연했다.
- 2021년 게임 '하치 가쓰노 신데렐라 나인'에 등장했다.
- 라이즈 도쿄 주식회사의 프로젝트 파트너, 주르네 뒤 뱅의 특별 앰배서더로 활동했다.
4. 철학 및 사상
구와타 마스미는 야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일본 스포츠 문화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4.1. 스포츠 문화에 대한 비판
구와타는 일본 스포츠계의 체벌, 과도한 훈련량, 그리고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들의 그라운드 내 음주 및 흡연, 연장자 및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 지도 중 또는 패배 시의 철권 제재(체벌) 등 일본 야구계 특유의 체육회계 사상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스포츠 뉴스나 야구 중계 해설 등에서 자신의 소신을 자주 밝혔다.
특히 체벌에 대해 "나는 체벌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절대 보복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하 관계 구도에서 일어나는 것이 체벌이다. 감독이 작전 미스를 했다고 선수에게 맞을 수 있는가? 스포츠로서 가장 부끄럽고 비겁한 행위이다"라고 말하며, 이를 "지도자가 게으른 증거"라고 비판했다. 체벌이 사회 문제로 불거졌을 때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폭력 절대 금지를 주장한 인물은 구와타와 오치아이 히로미쓰였다.
4.2. 야구에 대한 접근 방식
구와타는 '마음의 야구'(心の野球고코로노 야큐일본어)와 '야구를 학문처럼'(野球を学問する야큐오 가쿠몬스루일본어)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야구에 접근했다. 그는 "투수가 연습으로 몸을 망가뜨리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서 비교적 부드러운 훈련 방식을 선호했으며, 지도자들이 "구와타는 엄청나게 연습한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질색했다고 한다.
그는 타석에 선 투수에게 체력 소모를 이유로 배트를 휘두르지 못하게 하는 지시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2, 3회 타석에서 배트를 휘두를 체력도 없다면 좋은 투구를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아이싱으로 팔꿈치를 보호하는 등 신인 시절부터 관례를 무시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성격이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슈트가 어깨나 팔꿈치에 부담을 준다고 알려져 있지만, "가장 부담이 가는 공은 커브와 슬라이더"이며 "슈트는 몸에 부담이 가지 않는다", "해부학과 운동심리학을 공부하면 당연한 이야기"라고 말하며 기존의 통념을 부정했다.
5. 개인적인 삶
구와타 마스미는 공개된 개인적인 측면에서도 독특한 면모를 보였다.
5.1. 가족 관계
구와타는 아내 마키와 두 아들, 장남 구와타 마사키와 차남 맷 구와타를 두었다. 그의 남동생은 프로 골퍼인 구와타 이즈미이다.
5.2. 개인적 배경 및 신념
구와타는 어린 시절 가정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어느 날 가족들과 초밥을 먹으러 갔을 때 자신과 동생은 많이 먹는데 어머니와 누나는 전혀 먹지 않는 것을 보고 "여성들은 원래 많이 먹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누나로부터 "가난해서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가난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2010년 1월 17일 주택 화재로 사망했다. 사고 다음 날인 18일 밤 빈소에서 구와타는 여러 차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는 취재진에게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던진 공을 받아보고 싶었고, 내가 던진 공을 아버지가 받아주셨으면 했다"고 말했다. 구와타의 아버지는 말년에 시즈오카현하마마쓰시에서 찻집을 운영하며 지역 소년 야구팀을 지도했다.
어머니 쪽 할아버지가 와세다 대학 출신이었던 덕분에, 어릴 적 할머니가 와세다 대학 교가인 "미야코노 니시 기타"를 자주 불러주셨고, 이로 인해 중학생 때부터 와세다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중학교 시절과 고등학교 시절 모두 3년간 연인이 있었다. 교제 상대가 있었던 것이 "여자친구를 위해서라도 에이스가 되어 고시엔에서 우승하고 싶다"는 동기가 되었고, 여자친구의 표정을 관찰함으로써 상대 타자를 관찰하는 능력이 길러졌다고 말하며, 야구를 위해서도 연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구와타는 하우스식품의 '후루체'를 매우 좋아한다. PL 학원 시절에는 구와타를 위해 매일 후루체를 만드는 담당 후배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비흡연자이자 혐연가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재적 시절에는 자신을 포함한 비흡연자들이 간접흡연에 노출되는 것에 분노하여 구단 직원들에게 요청하여 '이동용 버스는 금연차와 흡연차로 분승', '라커룸은 금연, 식당은 흡연'으로 팀의 분연화를 달성했고, 봄 캠프에서는 금연실을 설치할 수 없어 전면 금연화를 달성시켰다.
2016년 2월 2일,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자택에서 각성제 소지 단속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자, 구와타는 "그저 놀랐을 뿐이다. 거짓이기를 바라고, 꿈이기를 바라는 것이 지금의 솔직한 심정이다. 만약 보도대로라면, 사람으로서, 야구인으로서, 함께 싸워온 동료로서 매우 유감스럽다"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구와타는 기요하라가 체포되기 약 3년 전부터 전혀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전까지 "스포츠맨이라면 폭력이나 약물과는 가장 거리가 먼 존재여야 한다"고 기요하라에게 충고했지만, 어느 날 기요하라 쪽에서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고 선을 그은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결별 선언'을 했다고 말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오래된 2021년에도 그는 훈련을 계속하고 있으며, OB전이나 시구에서는 과거와 같은 투구를 선보이고 있다. 연습임에도 불구하고 52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공으로 타자들의 배트를 부러뜨리는 장면도 있었다.
6. 선수로서의 특징
구와타 마스미는 뛰어난 투구 및 타격 능력, 그리고 탁월한 수비 능력을 겸비한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6.1. 투구 및 타격 능력
고등학교 시절에는 스트레이트와 커브만으로 투구하는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으로 삼았다. 그러나 프로 입단 2년차인 1987년에는 슬라이더를 습득하여 투구의 폭을 넓혔고, 1988년에는 스플리터 (통칭 '선더볼') 습득에 힘썼다.
일반적으로 슈트는 어깨나 팔꿈치에 부담을 준다고 알려져 있지만, 구와타는 "가장 부담이 가는 공은 커브와 슬라이더"이며 "슈트는 몸에 부담이 가지 않는다", "해부학과 운동심리학을 공부하면 당연한 이야기"라고 말하며 슈트가 어깨나 팔꿈치를 다치게 한다는 기존의 통념을 부정했다.
이와모토 쓰토무에 따르면, 구와타는 한 인터뷰에서 "일부러 3볼을 만들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와모토는 3볼에서 볼넷을 노리고 지켜보는 타자의 심리를 이용한 투구 설계에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구와타의 제구력과 투구 철학에 감탄했다고 한다.
타자로서의 재능도 매우 뛰어났다. 다쓰카와 미쓰오는 자신의 칼럼에서 "구와타라는 선수는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선수였다. 투수로서의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견제구도 잘하고, 수비도 잘하고, 타격도 야수 못지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위기 상황에서 8번 타자 무라타 신이치를 고의 사구로 거르고 구와타와 승부하라는 투수 코치의 지시에 "아니, 무라타보다 구와타가 더 좋은 타자이니 다시 한번 벤치에서 생각해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시엔 통산 홈런 개수도 기요하라에 이어 역대 2위인 6개이며, 고교 통산 25홈런을 기록했다. 프로 통산 타율 .216은 1951년 이후 프로에 입단하여 통산 500타수 이상을 기록한 투수 중 역대 최고 기록이다.
6.2. 수비 능력
구와타는 수비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는 골든 글러브상을 8차례 수상하여 니시모토 세이와 함께 투수 최다 수상 기록을 가지고 있다. 구와타 본인도 "수비가 가장 자신 있었고, 2위가 타격, 가장 서툰 것이 피칭"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7. 평가 및 영향
구와타 마스미는 일본 야구사에 큰 족적을 남긴 선수이자, 은퇴 후에도 야구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이다.
7.1. 주요 업적 및 긍정적 평가
구와타는 사와무라 에이지상, MVP, 베스트 나인 1회, 골든 글러브상 8회 등 수많은 개인 타이틀과 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선수임을 입증했다. 특히 골든 글러브 8회 수상은 투수 부문 최다 타이 기록이다.
그는 경기 중 플레이뿐만 아니라 경기 전 준비, 연습에 임하는 자세, 그리고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프로페셔널로서의 태도를 오치아이 히로미쓰를 비롯한 야구계 관계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오치아이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마운드 위에서 공에 무언가 말을 거는 듯한 당돌한 태도.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금욕적인 삶의 방식. (중략, 요미우리에 이적하여 가까이서 보니) 12개 구단 어디에 가도 에이스가 될 수 있는 존재라고 느꼈다"고 평했다.
프로 야구 선수로서는 특별히 뛰어나지 않은 체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인 투구 폼과 야구에 임하는 진지한 태도 덕분에 그를 모범으로 삼는 선수들이 프로와 아마추어를 막론하고 여전히 많다. 일례로 마쓰자카 다이스케는 고등학생 시절 구와타의 저서 『구와타 마스미 투수 바이블』을 직접 서점에 가서 사 읽었다고 한다.
7.2. 비판 및 논란
구와타는 프로 입단 전후로 잦은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KK 드래프트 사건은 그와 요미우리 간의 '밀약' 의혹을 불러일으키며 대중의 비판을 받았다. 이로 인해 그는 한때 '던지는 부동산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집에는 항의와 괴롭힘이 쏟아져 경비를 고용해야 할 정도였다. 그는 직접적인 불법 행위에는 연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시선 속에서 '문제아'와 같은 이미지로 비춰지는 갭에 선수 생활 내내 시달렸다. 1990년에는 스포츠 용품 업체와의 금품 수수 의혹이 제기되었고, 처음에는 부인했으나 거짓임이 드러나면서 구단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7.3. 후대에 미친 영향
구와타의 야구 철학, 특히 체벌과 과도한 훈련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일본 스포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체벌은 지도자가 게으른 증거"라고 강조하며, 선수 인권과 합리적인 훈련 방식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일본 스포츠계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공론화하고 개선 방향을 제시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의 야구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 방식과 끊임없는 자기 계발은 후배 선수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와세다 대학원 진학 및 수석 졸업, 도쿄 대학원에서의 연구 활동은 선수들이 은퇴 후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프로페셔널한 태도와 야구에 대한 진지한 자세는 많은 젊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어, 그를 목표로 하는 선수들이 많아지는 데 영향을 미쳤다.
8. 통산 성적
8.1. 연도별 투수 성적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볼넷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회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86년 | 요미우리 | 15 | 12 | 1 | 0 | 0 | 2 | 1 | 0 | -- | .667 | 261 | 61.1 | 64 | 13 | 17 | 1 | 1 | 57 | 2 | 0 | 36 | 35 | 5.14 | 1.32 |
1987년 | 28 | 27 | 14 | 2 | 4 | 15 | 6 | 0 | -- | .714 | 823 | 207.2 | 177 | 16 | 43 | 4 | 5 | 151 | 1 | 0 | 59 | 50 | 2.17 | 1.06 | |
1988년 | 27 | 27 | 5 | 1 | 0 | 10 | 11 | 0 | -- | .476 | 806 | 198.1 | 174 | 19 | 53 | 13 | 5 | 139 | 4 | 0 | 80 | 75 | 3.40 | 1.14 | |
1989년 | 30 | 30 | 20 | 5 | 4 | 17 | 9 | 0 | -- | .654 | 995 | 249.0 | 214 | 18 | 54 | 3 | 9 | 155 | 6 | 1 | 77 | 72 | 2.60 | 1.08 | |
1990년 | 23 | 22 | 17 | 2 | 2 | 14 | 7 | 0 | -- | .667 | 748 | 186.1 | 161 | 12 | 40 | 1 | 1 | 115 | 2 | 1 | 58 | 52 | 2.51 | 1.08 | |
1991년 | 28 | 27 | 17 | 3 | 0 | 16 | 8 | 1 | -- | .667 | 934 | 227.2 | 192 | 17 | 58 | 4 | 5 | 175 | 8 | 0 | 89 | 80 | 3.16 | 1.10 | |
1992년 | 29 | 29 | 11 | 3 | 0 | 10 | 14 | 0 | -- | .417 | 912 | 210.1 | 235 | 24 | 64 | 3 | 5 | 152 | 9 | 1 | 112 | 103 | 4.41 | 1.42 | |
1993년 | 26 | 26 | 8 | 1 | 0 | 8 | 15 | 0 | -- | .348 | 745 | 178.0 | 162 | 15 | 61 | 6 | 6 | 158 | 5 | 0 | 85 | 79 | 3.99 | 1.25 | |
1994년 | 28 | 27 | 10 | 1 | 3 | 14 | 11 | 1 | -- | .560 | 836 | 207.1 | 175 | 16 | 51 | 8 | 4 | 185 | 6 | 0 | 65 | 58 | 2.52 | 1.09 | |
1995년 | 9 | 9 | 3 | 1 | 0 | 3 | 3 | 0 | -- | .500 | 265 | 65.1 | 53 | 2 | 18 | 1 | 2 | 61 | 2 | 0 | 22 | 18 | 2.48 | 1.09 | |
1997년 | 26 | 26 | 0 | 0 | 0 | 10 | 7 | 0 | -- | .588 | 580 | 141.0 | 127 | 15 | 37 | 1 | 5 | 104 | 1 | 0 | 68 | 59 | 3.77 | 1.16 | |
1998년 | 27 | 27 | 7 | 1 | 0 | 16 | 5 | 0 | -- | .762 | 779 | 181.0 | 197 | 17 | 46 | 0 | 6 | 116 | 4 | 1 | 88 | 82 | 4.08 | 1.34 | |
1999년 | 32 | 22 | 2 | 0 | 0 | 8 | 9 | 5 | -- | .471 | 608 | 141.2 | 137 | 17 | 57 | 2 | 4 | 100 | 6 | 1 | 69 | 64 | 4.07 | 1.37 | |
2000년 | 30 | 10 | 0 | 0 | 0 | 5 | 8 | 5 | -- | .385 | 385 | 86.0 | 103 | 6 | 28 | 5 | 3 | 49 | 0 | 1 | 43 | 43 | 4.50 | 1.52 | |
2001년 | 16 | 8 | 0 | 0 | 0 | 4 | 5 | 2 | -- | .444 | 226 | 50.1 | 56 | 4 | 19 | 4 | 0 | 31 | 0 | 0 | 29 | 27 | 4.83 | 1.49 | |
2002년 | 23 | 23 | 3 | 1 | 0 | 12 | 6 | 0 | -- | .667 | 640 | 158.1 | 138 | 13 | 38 | 2 | 3 | 108 | 3 | 0 | 51 | 39 | 2.22 | 1.11 | |
2003년 | 14 | 13 | 0 | 0 | 0 | 5 | 3 | 0 | -- | .625 | 314 | 71.1 | 92 | 13 | 16 | 1 | 3 | 46 | 1 | 1 | 48 | 47 | 5.93 | 1.51 | |
2004년 | 16 | 16 | 0 | 0 | 0 | 3 | 5 | 0 | -- | .375 | 357 | 79.1 | 100 | 16 | 28 | 1 | 4 | 39 | 4 | 0 | 58 | 57 | 6.47 | 1.61 | |
2005년 | 12 | 12 | 0 | 0 | 0 | 0 | 7 | 0 | 0 | .000 | 238 | 49.2 | 65 | 7 | 23 | 2 | 5 | 34 | 4 | 0 | 43 | 40 | 7.25 | 1.77 | |
2006년 | 3 | 3 | 0 | 0 | 0 | 1 | 1 | 0 | 0 | .500 | 55 | 11.2 | 19 | 4 | 1 | 0 | 0 | 5 | 0 | 0 | 11 | 9 | 6.94 | 1.71 | |
2007년 | PIT | 19 | 0 | 0 | 0 | 0 | 0 | 1 | 0 | 3 | .000 | 103 | 21.0 | 25 | 6 | 15 | 4 | 1 | 12 | 0 | 0 | 23 | 22 | 9.43 | 1.90 |
NPB 통산 (20년) | 442 | 396 | 118 | 21 | 13 | 173 | 141 | 14 | 0 | .551 | 11507 | 2761.2 | 2641 | 264 | 752 | 62 | 76 | 1980 | 68 | 7 | 1191 | 1089 | 3.55 | 1.23 | |
MLB 통산 (1년) | 19 | 0 | 0 | 0 | 0 | 0 | 1 | 0 | 3 | .000 | 103 | 21.0 | 25 | 6 | 15 | 4 | 1 | 12 | 0 | 0 | 23 | 22 | 9.43 | 1.90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성적.
- 1996년은 1군 출장 없음.
8.2. 연도별 수비 성적
연도 | 구단 | 투수 (P) | |||||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
1986 | 요미우리 | 15 | 2 | 11 | 0 | 1 | 1.000 |
1987 | 28 | 11 | 51 | 0 | 3 | 1.000 | |
1988 | 27 | 23 | 43 | 1 | 4 | .985 | |
1989 | 30 | 15 | 52 | 4 | 1 | .944 | |
1990 | 23 | 13 | 40 | 3 | 1 | .946 | |
1991 | 28 | 24 | 58 | 1 | 1 | .988 | |
1992 | 29 | 15 | 49 | 3 | 6 | .955 | |
1993 | 26 | 10 | 42 | 1 | 2 | .981 | |
1994 | 28 | 14 | 39 | 4 | 3 | .930 | |
1995 | 9 | 5 | 13 | 1 | 0 | .947 | |
1997 | 26 | 10 | 28 | 3 | 1 | .927 | |
1998 | 27 | 12 | 40 | 3 | 5 | .945 | |
1999 | 32 | 15 | 25 | 0 | 1 | 1.000 | |
2000 | 30 | 9 | 12 | 2 | 1 | .913 | |
2001 | 16 | 5 | 12 | 0 | 1 | 1.000 | |
2002 | 23 | 15 | 32 | 1 | 3 | .979 | |
2003 | 14 | 6 | 17 | 0 | 2 | 1.000 | |
2004 | 16 | 8 | 18 | 0 | 1 | 1.000 | |
2005 | 12 | 7 | 10 | 0 | 0 | 1.000 | |
2006 | 3 | 3 | 2 | 0 | 0 | 1.000 | |
2007 | PIT | 19 | 1 | 4 | 0 | 1 | 1.000 |
NPB 통산 | 442 | 222 | 594 | 27 | 37 | .968 | |
MLB 통산 | 19 | 1 | 4 | 0 | 1 | 1.000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성적.
- 굵은 글씨 연도는 골든 글러브상 수상.
8.3. 통산 타격 성적
경기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
NPB 통산 | 478 | 890 | 75 | 192 | 34 | 5 | 7 | 257 | 79 | 0 | 110 | 8 | 41 | 0 | 0 | 265 | 12 | .216 | .248 | .289 | .537 |
- 메이저 리그 재적 시에는 타석에 서지 않았다.
-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는 통산 38홈런의 가네다 마사이치 (타율 .198, 출루율 .238, 장타율 .287, OPS .524)나 통산 21홈런의 호리우치 쓰네오 (타율 .172, 출루율 .196, 장타율 .262, OPS .459)보다 높다. 통산 타율 .216은 1951년 이후 프로에 입단하여 통산 500타수 이상을 기록한 투수 중 역대 최고 기록이다.
8.4. 타이틀
- 최고 평균자책점**: 2회 (1987년, 2002년)
- 2002년 수상은 15년 만의 수상으로, 연맹 표창 타이틀 중 가장 긴 공백 기록이다.
- 최다 탈삼진**: 1회 (1994년)
- 최고 승률**: 1회 (1998년)
- 당시에는 연맹 표창 타이틀이 아니었다. 센트럴 리그에서는 1972년까지와 2013년 이후에 표창한다.
8.5. 표창
- 사와무라 에이지상: 1회 (1987년)
- 최우수 선수: 1회 (1994년)
- 베스트 나인: 1회 (1987년)
- 골든 글러브상: 8회 (1987년, 1988년, 1991년, 1993년, 1994년, 1997년, 1998년, 2002년)
- 투수 최다 타이 기록 (다른 선수: 니시모토 세이)
- 미쓰이 골든 글러브 레전드 (투수 부문)
- 최우수 투수: 1회 (1987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1회 (1994년 일본 시리즈)
- 최우수 배터리상: 1회 (1994년, 포수: 무라타 신이치)
- 월간 MVP: 4회 (1987년 7월, 1991년 4월, 1993년 5월, 1998년 8월)
- 우수 JCB·MEP상: 1회 (1991년)
-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2회 (1987년, 1994년)
- 야나세·자이언츠 MVP상: 1회 (1994년)
- 유모아 대상: 1회 (2008년)
8.6. 주요 기록
- 첫 기록**
- 첫 등판: 1986년 5월 25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7차전(나고야 구장), 8회말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이닝 1실점.
- 첫 탈삼진: 상동, 8회말 스즈키 야스토모로부터.
- 첫 선발: 1986년 5월 28일, 대 한신 타이거스 10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3과 1/3이닝 4실점.
- 첫 승리·첫 완투 승리: 1986년 6월 5일, 대 한신 타이거스 10차전(고라쿠엔 구장), 9이닝 2실점.
- 첫 완봉 승리: 1987년 7월 8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1차전(삿포로시 마루야마 구장).
- 첫 세이브: 1991년 4월 14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3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8회말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1이닝 무실점.
- 첫 안타: 1986년 6월 5일, 대 한신 타이거스 10차전(고라쿠엔 구장), 5회말 사토 히데아키로부터 단타.
- 첫 타점: 1987년 4월 28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4차전(나고야 구장), 2회초 스즈키 다카마사로부터 선제 2점 적시타.
- 첫 홈런: 1987년 7월 8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1차전(삿포로시 마루야마 구장), 4회말 기타벳푸 마나부로부터 선제 결승 3점 홈런.
- 이정표 기록**
- 통산 1000투구회: 1991년 6월 21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3차전(도쿄 돔), 2회초 3사구에서 달성 (역대 242번째).
- 통산 1000탈삼진: 1993년 6월 12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0차전(나고야 구장), 1회말 알론조 파웰로부터 (역대 89번째).
- 통산 1500투구회: 1993년 9월 29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22차전(나고야 구장), 2회말 1사구에서 달성 (역대 137번째).
- 통산 100승: 1994년 7월 6일, 대 한신 타이거스 15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9이닝 1실점 완투승 (역대 111번째).
- 통산 1500탈삼진: 1998년 6월 17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3차전(도쿄 돔), 4회초 야마자키 다케시로부터 (역대 42번째).
- 통산 2000투구회: 상동, 9회초 3사구 미나미부치 도키타카를 우익수 플라이로 처리하며 달성 (역대 78번째).
- 통산 150승: 2001년 8월 10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0차전(도쿄 돔), 선발 등판하여 7이닝 1실점 (역대 44번째).
- 통산 2500투구회: 2002년 8월 13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0차전(도쿄 돔), 3회초 3사구 사토 신이치를 유격수 땅볼로 처리하며 달성 (역대 42번째).
- 기타 기록**
- 위험구 퇴장: 3회 (아사오 다쿠야, 우쓰미 데쓰야와 함께 NPB 역대 2위 타이)
- 1995년 4월 8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차전(도쿄 돔), 9회초 이이다 데쓰야에게.
- 1999년 9월 12일, 대 한신 타이거스 24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9회말 야기 유타카에게.
- 2005년 8월 14일, 대 한신 타이거스 15차전(도쿄 돔), 1회초 야노 아키히로에게.
- 올스타전 선출: 8회 (1987년 ~ 1989년, 1991년 ~ 1994년, 1997년).
- 위험구 퇴장: 3회 (아사오 다쿠야, 우쓰미 데쓰야와 함께 NPB 역대 2위 타이)
8.7. 등번호
- 18 (1986년 ~ 2007년)
- 52 (2007년 스프링 트레이닝)
- 73 (2021년 ~ )
9. 관련 항목
- KK 콤비
- 기요하라 가즈히로
- 요미우리 자이언츠
- 피츠버그 파이리츠
- 사와무라 에이지상
- 골든 글러브상
- 토미 존 수술
- 야구도
10. 외부 링크
- [http://life-is-art-18.com/ Life is Art] - 공식 웹사이트
- [https://www.japanesebaseballplayers.com/en/player.php?id=mkuwata 일본 야구 선수 데이터베이스 - 구와타 마스미]
- [https://npb.jp/bis/players/41143862.html 일본 야구 기구 - 구와타 마스미]
- [https://www.mlb.com/player/masumi-kuwata-506555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 구와타 마스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