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년기 및 아마추어 경력
무라타 신이치의 프로 데뷔 전 배경과 야구 경력은 그가 프로 선수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1. 유년기 및 고등학교 시절
무라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본인은 포수 포지션을 꺼렸지만, 6학년 때부터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포수를 맡았다. 그는 타키가와 고등학교에서 강타자 포수로 이름을 알렸다. 고등학교 시절, 원정 경기에서 훗날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팀 동료가 될 가와이 마사히로와 처음 만났으며, 이시모토 타카아키는 그의 고등학교 1년 선배였다.
1.2. 프로 야구 입단
1981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5순위로 지명받아 입단했다. 당시 동기 입단 선수로는 마키하라 히로키, 같은 포수 포지션의 야마모토 고지, 그리고 요시무라 사다노리가 있었다. 무라타는 이 세 명의 동기에게는 지고 싶지 않다는 강한 승부욕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2. 선수 경력 (1982-2001)
무라타 신이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20년간의 선수 생활을 보냈으며, 이는 부상과 경쟁 속에서도 주전 포수로서 팀의 성공에 기여한 시기였다.
2.1. 초기와 부상 (1982-1989)
1982년 프로 첫 시즌, 1군 포수가 병에 걸리면서 무라타가 대신 승격되었으나, 당시 야마쿠라 가즈히로가 전성기였던 점과 2군 주전 포수를 올리면 팀의 경기 운영이 어려워진다는 이유로 출전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다. 1984년 시즌에 1군에 처음 출장하여 9개의 안타 중 6개를 장타로 기록하며 파워를 과시했다. 하지만 1985년에는 1군 출장이 없었으며, 이 무렵부터 어깨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1986년 시즌 오프에 스도 유타카의 권유로 미국으로 건너가 오른쪽 어깨 수술을 받았다. 이로 인해 이듬해 1987년 1월에는 지배하 선수 등록이 말소되어 연습생 신분으로 전환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 기간 동안 아리타 슈조나 고등학교 선배인 나카오 다카요시 등 다른 구단에서 검증된 베테랑 포수들이 입단하면서 무라타의 출전 기회는 더욱 줄어들었다. 한때 1루수로 포지션을 전향하라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포수에 대한 강한 집념으로 이를 거절했다. 따라서 그는 공식 경기에서 포수 이외의 수비 포지션을 맡은 적은 없다. 다만 1988년 3월 18일 도쿄 돔 개장 기념 오픈전에서는 도중에 1루를 지키다가 오카다 아키노부와 충돌하여 함께 다음 날 스포츠 신문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2.2. 주전 포수 자리 확립 (1990-1995)
1990년 시즌에 마침내 주전 포수 자리를 확립하며 팀의 2년 연속 우승에 크게 기여했고,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는 활약을 보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좌투수와 고시엔에서 열리는 한신 타이거스전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간 기록한 33개의 홈런 중 24개를 좌투수를 상대로 때려냈으며, 고시엔에서 열린 한신전에서는 72타수 27안타, 타율 0.375 6홈런으로 맹타를 휘둘렀다. 반면, 도쿄 돔에서의 한신전에서는 62타수 16안타, 타율 0.258 3홈런을 기록했다.
1991년에는 개인 최다인 17홈런을 기록했지만, 8월 13일 요코하마 다이요전에서 한 경기 8도루를 허용하는 등 약한 어깨가 지적되어 도루 저지율이 0.162에 그쳤다. 시즌 막판에는 신인 요시하라 고스케에게 주전 자리를 빼앗기며 규정 타석 도달에 실패했다. 같은 해부터 입단 초기부터 달았던 등번호 '56'번에서 '9'번으로 변경했다. 1992년 시즌에는 시즌 도중 나카오 다카요시와의 트레이드로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이적해 온 오쿠보 히로모토에게 주전 포수 자리를 빼앗겼다. 5월 31일 이후 오랫동안 선발 출장이 없었고, 대부분 2군에서 뛰었으나(37경기, 타율 0.336, 10홈런, 39타점), 9월 16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는 좌완 야마모토 마사의 선발이 예상되자 3개월 반 만에 선발 출장하여 본인 유일의 3번 타자로 나서 2홈런을 터뜨리는 등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34경기 출장에 그쳤다.
1993년 시즌에는 오쿠보가 몸에 맞는 공으로 인한 골절로 이탈하는 동안 주전 포수 자리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1994년 시즌에는 5월 18일 히로시마전에서 동기인 마키하라 히로키와 배터리 호흡을 맞춰 마키하라의 퍼펙트 게임을 이끌어냈다. 경기 6회쯤부터 아무도 마키하라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친했던 무라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번 노려봐라"고 말했다고 한다.
2.3. 말년과 은퇴 (1996-2001)
무라타는 1996년에도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99년 4월 9일 요코하마전에서 사이토 다카시의 사구에 얼굴을 맞고 쓰러졌다. 당시 요코하마의 포수였던 다니시게 모토노부에 따르면 쓰러진 무라타는 "시게, 믿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안면 골절로 입원한 무라타는 빨리 회복하기 위해 위험은 적지만 회복에 시간이 걸리는 전신 마취를 통한 성형 수술 대신, 격렬한 통증을 동반하는 국소 마취로 골절 치료만을 선택했다. 이때 그는 "내 얼굴은 파는 물건이 아니니까"라고 말했지만, 나중에 얼굴 뼈를 드릴로 깎는 소리와 국소 마취의 효과를 넘어선 극심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다음에 다시 하게 된다면 전신 마취를 해달라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후유증으로 무라타는 얼굴 부위 근육 일부를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2000년 시즌에는 리그 우승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우수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공수 양면에서 팀의 일본 제일에 크게 공헌했다. 2001년 시즌에는 즉시 전력감 신인 아베 신노스케가 입단했다. 무라타는 실질적으로 아베의 '교육 담당'이 되었고, 출전 기회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같은 해 시즌을 끝으로 사이토 마사키, 마키하라 히로키와 함께 현역에서 은퇴했다.
스타 선수가 많은 요미우리에서 비교적 존재감이 약했던 무라타는 통산 11년간 주전 포수로 활약하면서도, 앞서 언급된 아리타 슈조, 나카오 다카요시, 오쿠보 히로모토와 같은 이적생뿐만 아니라 요시하라 고스케, 무라타 요시노리, 스기야마 나오키와 같은 자체 육성 라이벌들이 많아 단 한 번도 규정 타석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투수진의 절대적인 신뢰, 안정적인 리드, 그리고 낮은 타율에도 불구하고 펀치력 있는 타격을 바탕으로 2000년 시즌까지 마스크를 쓰고 제2차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체제의 중심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팀은 1990년, 1994년, 1996년, 2000년 총 4차례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1994년과 2000년에는 일본 제일에 등극했다. 특히 2000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우수 선수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규정 타석에 도달하지 않고도 연봉 1.00 억 JPY 이상을 받은 최초의 야수이다. 포수로서의 통산 출장 경기수 '1087'경기는 모리 마사아키, 아베 신노스케, 야마쿠라 가즈히로에 이어 구단 역대 4위 기록이다.
3. 선수 특징 및 인물
무라타 신이치는 강한 승부 근성과 뛰어난 리더십으로 팀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포수였다.
3.1. 타격 및 수비
그는 펀치력 있는 승부 근성 강한 타격과 투수들이 편안하게 던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안정적인 리드에 정평이 나 있는 포수였다. 현역 시절 199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사령탑으로 활약했으며, 비록 타율은 낮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펀치력 있는 타격을 선보였다. 수비에서는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고생한 영향으로 통산 도루 저지율이 0.267로 낮은 편이었다. 포수로서 그는 비록 자신의 리드대로 공이 오지 않아 안타를 맞더라도 투수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고 항상 "내 책임이다"라고 말하는 인물이었다.
3.2. 리더십 및 팀 내 영향력
무라타는 포지션을 두고 경쟁 관계에 있던 오쿠보 히로모토 등 다른 포수들에게도 아낌없이 조언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팀 내에서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다. 미야모토 가즈토모는 자신의 저서에서 무라타의 인품을 극찬하며 "당시 에이스 투수들도 결정적인 경기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무라타를 파트너로 지명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그의 리더십과 팀 내에서의 영향력은 투수진의 안정적인 운영과 팀워크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3.3. 주요 사건 및 부상
무라타는 선수 생활 중 사구를 맞아 부상당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1994년 5월 11일 야쿠르트전에서 투수 니시무라 류지의 공에 머리를 맞고 격분하여 니시무라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몇 걸음 걷다가 쓰러져 들것에 실려 퇴장하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 사건 이후 니시무라에 대한 보복성 사구와 댄 글래든에 대한 빈볼 등으로 연속적인 대규모 난투극이 발생했으며, 이 일이 일본 프로 야구의 위험구 퇴장 규칙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99년 4월 9일 요코하마전에서는 사이토 다카시의 사구에 얼굴을 맞아 안면 골절상을 입는 심각한 부상을 겪었다.
3.4. 동료들과의 관계
마키하라 히로키와는 같은 학년, 같은 해에 입단한 동기로, 20년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함께 재직했다. 이는 은퇴 당시 '같은 나이, 같은 해에 입단하여 같은 구단에 가장 오래 함께 재직한 콤비'의 최장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훗날 지바 롯데 마린즈의 후쿠우라 가즈야와 오노 신고 (1994년 입단부터 오노가 은퇴한 2013년까지 20년간)가 동률을 이루었고,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의 나카무라 다케야와 구리야마 다쿠미 (2002년 입단 이후 현재까지 계속 중)가 갱신했다. 또한 오쿠보 히로모토, 요시하라 고스케, 스기야마 나오키, 야나기사와 유이치, 무라타 요시노리 등 다른 포수들과는 주전 경쟁 관계이면서도 서로에게 아낌없이 조언하며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4. 은퇴 후 경력
무라타 신이치는 선수 은퇴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야구계에 기여했다.
4.1. 코치 경력
2002년부터 2003년까지 2년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군 배터리 코치를 맡았다. 이후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다시 2년간 1군 배터리 코치로 복귀했다. 2008년부터는 원래 타격 우선형 포수였던 경험을 인정받아 1군 타격 코치를 역임했다. 2011년 시즌에는 다시 1군 배터리 코치로 부임했으며, 배터리 코치로서는 투수를 리드하는 데 있어 필요 이상으로 허를 찌르는 방식보다는 투수의 특성을 파악하고 의존하여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리드를 가르쳤다. 2012년부터는 다시 1군 타격 코치로 돌아왔으며, 2014년 5월 20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부터는 배터리 코치 역할까지 겸임했다. 당시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코치 자체는 전혀 변함이 없다. 팀의 승리를 위해 배치를 바꾼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2015년 시즌에는 1군 종합 코치로 취임했다. 2016년 시즌부터 감독이 다카하시 요시노부로 교체되면서 2017년까지 2년간 1군 헤드 코치를 맡았다. 2018년 시즌에는 1군 헤드 겸 배터리 코치로 취임했으며, 2018년 10월 22일 다카하시 감독의 사임에 뒤이어 코치직을 사퇴한다고 발표되었다.
4.2. 미디어 활동
2004년부터는 TV 아사히와 스포츠 호치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TV 아사히에서는 주로 백넷 뒤에서 해설을 담당했으며, 간사이 지역 계열 방송국인 아사히 방송 (ABC TV)의 전국 네트워크 한신 타이거스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중계에서도 당시에는 자사 해설자만 기용하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지만, 요미우리 OB이자 간사이 사람이라는 점이 고려되어 해설에 기용되는 경우가 있었다. 2019년부터는 닛폰 TV와 TV 아사히 (TV 아사히는 건별 계약)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는 한편, 14년 만에 스포츠 호치 야구 평론가로 다시 취임했다. 그는 현재 연예 기획사 아빙에 소속되어 있다. 또한, 드라마 《아스트로 구단》의 스페셜 어드바이저를 맡기도 했다.
4.3. 코치로서의 평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로 재임하던 시절, 무라타의 코치 능력에 대해 외부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요미우리 OB인 구로에 쓰기노리는 그의 코치 능력을 평론에서 혹평한 바 있으며, 가도 미쓰오 또한 잡지 기획에서 그의 코치 능력에 대한 의문스러운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러한 비판은 주로 그가 팀의 성과에 미치는 영향과 지도 방식에 대한 의구심에서 비롯되었다.
5. 수상 및 기록
무라타 신이치는 프로 야구 경력 동안 다양한 개인상과 주목할 만한 기록들을 남겼다.
5.1. 주요 수상
- 베스트 나인: 1회 (포수 부문: 1990년)
- 최우수 배터리상: 2회 (1994년 투수: 구와타 마스미, 1996년 투수: 사이토 마사키)
- 일본 시리즈 우수선수상: 1회 (2000년)
5.2. 이정표 및 독특한 기록
무라타는 선수 경력 동안 다음과 같은 이정표와 독특한 기록들을 세웠다.
첫 기록
- 첫 출장: 1984년 5월 12일, 대 한신 타이거스 8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5회 말 야마쿠라 가즈히로를 대신하여 포수로 출장
- 첫 선발 출장: 1984년 8월 7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5차전 (고라쿠엔 구장), 8번·포수로 선발 출장
- 첫 안타: 상동, 2회 말 다카기 노리히로로부터 2루타
- 첫 타점: 1984년 8월 19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20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9회 초 다케시타 고지로부터 희생 플라이
- 첫 홈런: 1984년 9월 26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4차전 (고라쿠엔 구장), 5회 말 야마네 가즈오로부터 동점 솔로 홈런
이정표 기록
- 1000경기 출장: 2000년 5월 10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6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8번·포수로 선발 출장 (역사상 359번째)
기타 기록
- 올스타 게임 출장: 2회 (1994년, 1995년)
- 규정 타석에 도달하지 않은 야수 중 최초로 연봉 1.00 억 JPY 달성.
-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 역대 포수 출장 경기수 4위 (총 1087경기).
등번호
- 56 (1982년 ~ 1990년)
- 9 (1991년 ~ 2001년)
- 89 (2002년 ~ 2003년, 2006년 ~ 2018년)
연도 | 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실패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4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84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7 | 41 | 40 | 7 | 9 | 3 | 1 | 2 | 20 | 5 | 0 | 0 | 0 | 1 | 0 | 0 | 0 | 8 | 0 | 0.225 | 0.220 | 0.500 | 0.720 |
1988 | 25 | 34 | 33 | 0 | 5 | 1 | 0 | 0 | 6 | 0 | 0 | 0 | 1 | 0 | 0 | 0 | 0 | 12 | 2 | 0.152 | 0.152 | 0.182 | 0.333 | |
1989 | 12 | 31 | 29 | 1 | 4 | 0 | 0 | 1 | 7 | 5 | 0 | 0 | 1 | 0 | 1 | 0 | 0 | 10 | 1 | 0.138 | 0.167 | 0.241 | 0.408 | |
1990 | 84 | 243 | 209 | 23 | 57 | 15 | 1 | 13 | 113 | 44 | 0 | 1 | 0 | 4 | 29 | 5 | 1 | 63 | 5 | 0.273 | 0.358 | 0.541 | 0.899 | |
1991 | 111 | 369 | 320 | 43 | 79 | 18 | 0 | 17 | 148 | 42 | 1 | 0 | 3 | 3 | 40 | 8 | 3 | 88 | 14 | 0.247 | 0.333 | 0.463 | 0.796 | |
1992 | 34 | 92 | 86 | 9 | 20 | 6 | 0 | 3 | 35 | 9 | 0 | 1 | 0 | 0 | 5 | 0 | 1 | 28 | 0 | 0.233 | 0.283 | 0.407 | 0.690 | |
1993 | 88 | 283 | 258 | 23 | 61 | 13 | 0 | 6 | 92 | 28 | 0 | 3 | 2 | 0 | 21 | 6 | 2 | 61 | 10 | 0.236 | 0.299 | 0.357 | 0.656 | |
1994 | 120 | 380 | 330 | 29 | 82 | 12 | 0 | 10 | 124 | 41 | 1 | 1 | 5 | 3 | 36 | 2 | 6 | 88 | 5 | 0.248 | 0.331 | 0.376 | 0.706 | |
1995 | 116 | 387 | 339 | 29 | 90 | 16 | 0 | 13 | 145 | 38 | 0 | 0 | 6 | 1 | 38 | 7 | 3 | 77 | 12 | 0.265 | 0.344 | 0.428 | 0.772 | |
1996 | 99 | 305 | 265 | 15 | 55 | 14 | 2 | 5 | 88 | 26 | 0 | 0 | 9 | 2 | 26 | 5 | 3 | 62 | 8 | 0.208 | 0.284 | 0.332 | 0.616 | |
1997 | 75 | 148 | 128 | 9 | 21 | 5 | 0 | 1 | 29 | 6 | 0 | 0 | 1 | 0 | 17 | 4 | 2 | 32 | 4 | 0.164 | 0.272 | 0.227 | 0.499 | |
1998 | 107 | 339 | 298 | 26 | 80 | 9 | 1 | 7 | 112 | 47 | 0 | 0 | 5 | 5 | 29 | 8 | 2 | 60 | 11 | 0.268 | 0.332 | 0.376 | 0.708 | |
1999 | 91 | 277 | 237 | 23 | 49 | 5 | 0 | 9 | 81 | 28 | 0 | 0 | 7 | 5 | 24 | 1 | 4 | 53 | 6 | 0.207 | 0.285 | 0.342 | 0.627 | |
2000 | 101 | 252 | 225 | 17 | 46 | 7 | 0 | 7 | 74 | 34 | 0 | 0 | 9 | 1 | 15 | 2 | 2 | 65 | 5 | 0.204 | 0.259 | 0.329 | 0.588 | |
2001 | 54 | 96 | 84 | 6 | 15 | 2 | 0 | 4 | 29 | 14 | 0 | 0 | 2 | 1 | 9 | 2 | 0 | 30 | 1 | 0.179 | 0.255 | 0.345 | 0.601 | |
NPB: 15년 | 1134 | 3277 | 2881 | 260 | 673 | 126 | 5 | 98 | 1103 | 367 | 2 | 6 | 51 | 26 | 290 | 50 | 29 | 737 | 84 | 0.234 | 0.308 | 0.383 | 0.690 |
연도 | 팀 | 포수 | ||||
---|---|---|---|---|---|---|
경기 | 시도수 | 허용도루 | 도루저지 | 저지율 | ||
1984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7 | 16 | 14 | 2 | 0.125 |
1988 | 20 | 3 | 3 | 0 | 0.000 | |
1989 | 11 | 12 | 8 | 4 | 0.333 | |
1990 | 82 | 36 | 25 | 11 | 0.306 | |
1991 | 110 | 68 | 57 | 11 | 0.162 | |
1992 | 27 | 23 | 17 | 6 | 0.261 | |
1993 | 82 | 52 | 36 | 16 | 0.308 | |
1994 | 119 | 52 | 34 | 18 | 0.346 | |
1995 | 115 | 91 | 65 | 26 | 0.286 | |
1996 | 95 | 54 | 38 | 16 | 0.296 | |
1997 | 73 | 36 | 27 | 9 | 0.250 | |
1998 | 106 | 63 | 43 | 20 | 0.317 | |
1999 | 91 | 55 | 44 | 11 | 0.200 | |
2000 | 98 | 51 | 38 | 13 | 0.255 | |
2001 | 41 | 32 | 23 | 9 | 0.281 | |
통산 | 1087 | 644 | 472 | 172 | 0.267 |
6. 영향력
무라타 신이치는 일본 프로 야구의 규칙 변화와 후배 선수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심각한 부상 경험은 중요한 규칙 제정의 계기가 되었다.
1994년 5월 11일 야쿠르트전에서 투수 니시무라 류지의 공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사건은 일본 프로 야구에서 위험구 퇴장 규칙이 제정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발생한 대규모 난투극은 안전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높였으며, 선수 보호를 위한 규정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는 경기 중 선수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된다.
또한, 그는 2001년 신인으로 입단한 아베 신노스케의 '교육 담당' 역할을 수행하며 후배 포수의 성장에 중요한 멘토 역할을 했다. 비록 자신의 출전 기회는 줄었지만, 아베가 요미우리의 차세대 주전 포수로 성장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며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했다.
그는 마키하라 히로키와 함께 20년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함께 몸담으며 '같은 나이, 같은 해 입단, 같은 구단 최장 재직 콤비'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한 팀에서 오랜 기간 동고동락한 두 선수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록으로, 야구계에서 동료 간의 유대와 팀워크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사례로 회자된다.
7. 외부 링크
- [https://irving.co.jp/talents/shinichi-murata/ 무라타 신이치 | 탤런트 | 아빙 연예 프로덕션]
- [https://www.baseball-reference.com/register/player.fcgi?id=murata001shi000 무라타 신이치 - Baseball-Reference.com (Mino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