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가쿠류 리키사부로는 몽골에서 태어나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으며, 스모에 입문하기 전 다양한 경험을 통해 그의 성장 기반을 다졌다.
1.1. 몽골에서의 어린 시절과 교육
가쿠류 리키사부로는 1985년 8월 10일 만갈잘라빈 아난드라는 이름으로 몽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학교수였으며, 유복한 가정 환경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당시 서민 자녀들에게는 접하기 어려웠던 테니스와 농구 같은 스포츠를 즐길 수 있었다. 또한 레슬링에도 열중했으며, 부모님의 영향으로 학업에도 충실한 우등생이었다.
그는 자택에서 NHK 스모 중계를 시청하며 당시 몽골에서 일고 있던 스모 붐에 영향을 받았고, 동향 선배인 아사세키류 등의 활약에 동경심을 품고 스모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하나카고베야의 선발 시험에 참여했지만 불합격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잡지 '그래프 NHK'의 광고를 통해 일본스모진흥회(日本相撲振興会)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직장 동료이자 일본어를 가르치던 교수에게 자신의 결심을 담은 편지를 일본어로 번역해달라고 부탁했고, 이 편지를 진흥회 회장인 도키타 가즈히로에게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도키타 회장은 동료인 스즈키 겐이치와 상의한 후, 15대 이즈츠베야 오야카타(전 세키와케 사카호코 노부시게)에게 의뢰하여 이즈츠베야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는 2001년 9월 일본에 입국하여 같은 해 11월 바쇼에서 첫 도효를 밟았다. 그의 가족은 몽골 씨름 배경이 없었으며, 일본에 오기 전에는 씨름 경험이 전혀 없었다.
1.2. 스모 입문 과정
2001년 9월 이즈츠베야에 입문할 당시 가쿠류의 체중은 겨우 65 kg에 불과했다. 15대 이즈츠 오야카타는 처음에는 그가 스모 선수보다는 헤야의 헤어드레서(도코야마)에 더 적합하다고 농담할 정도였다. 그러나 가쿠류는 3개월 만에 체중을 82 kg까지 늘려 신인 검사에 합격했다. 15대 이즈츠 오야카타는 합격 후 밝게 웃는 가쿠류를 보고 "이 아이를 키우지 않으면 불쌍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는 입문 초기부터 배우는 속도가 빨라, 마와시를 잡는 법을 한 번에 익혔고, 일본어는 일본에 온 지 1년 만에 능숙해졌다. 또한 낫토도 아무렇지 않게 먹는 등 일본 음식에도 처음부터 잘 적응했다. 동기들에 따르면, 스모 교습소 시절부터 준비 운동인 달리기에서 항상 선두를 달리는 등 높은 향상심을 보였다고 한다. 동기였던 전 마쿠우치 다카노야마 슌타로는 은퇴 기자회견에서 "매일 아침 둘이서 선두를 달리며 '추우니까 빨리 달려서 안에서 몸을 녹이자'고 서툰 일본어로 이야기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스모계의 몽골인 그룹에서는 당시 정점에 있던 아사쇼류 아키노리의 심부름꾼처럼 취급받았고, 훈련장에서 아사쇼류에게 철저히 단련받으면서도 묵묵히 견디며 힘을 키워나갔다. 2002년경에는 현역 말기의 테라오 츠네후시의 츠케비토(수행원)를 맡으며 많은 것을 배웠다.
2. 스모 경력
가쿠류의 프로 스모 경력은 하위 등급에서의 고난을 극복하고 최고 등급인 요코즈나에 오르기까지의 꾸준한 노력을 보여준다.
2.1. 데뷔와 초기 경력
가쿠류는 꾸준히 반즈케를 올렸지만, 생선을 싫어하여 체중이 잘 늘지 않아 산단메 하위에서 고생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생선 혐오를 극복한 후 점차 체중이 늘어 산단메 상위에서도 가치코시(승월)할 수 있게 되었다.
2004년 7월 바쇼에서는 7전 전승으로 산단메 우승을 차지하며, 다음 9월 바쇼에는 단숨에 마쿠시타 14매목까지 반즈케를 올렸다. 이 바쇼에서는 1승 6패로 좌절했지만, 센슈라쿠(마지막 날) 밤에 눈물을 흘리던 그에게 헤야의 행사인 9대 기무라 쇼노스케가 "내일도 시코(스모 기본 동작)를 밟으면 혼나지 않을 거야"라고 귀띔해주었다. 바쇼 후 1주일간의 훈련 휴식 기간 동안에도 요노키치의 말대로 다음 날부터 훈련장에서 땀을 흘리며 시코를 밟아 정진했다.
이후 2004년 11월 바쇼부터 2005년 9월 바쇼까지 6개 바쇼 연속으로 가치코시를 기록했다. 2005년 9월 바쇼에서는 마쿠시타 히가시(동) 5매목에서 5승 2패의 성적을 거두며 다음 11월 바쇼에 주료로 승격하여 첫 세키토리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주료에서는 가벼운 체중이 불리하게 작용했는지 성적이 좋지 않아 5승 10패를 기록하며 한 바쇼 만에 마쿠시타로 강등되었다.
2006년 1월 바쇼에서 히가시 마쿠시타 3매목에서 5승 2패로 가치코시를 기록하며 주료로 복귀했다。 3월 바쇼에서는 3승 6패에서 6연승을 거두며 9승 6패로 세키토리로서 첫 가치코시를 달성했다. 이후 계속해서 가치코시를 이어갔고, 2006년 9월 바쇼에서는 니시(서) 주료 잇토(필두)에서 9승을 거두며 다음 11월 바쇼에 첫 마쿠우치에 진출했다. 그는 교쿠슈잔, 교쿠텐호, 아사쇼류 아키노리, 아사세키류, 하쿠호 쇼, 하루마후지 고헤이, 도키텐쿠 요시아키에 이어 8번째로 마쿠우치에 진출한 몽골 출신 리키시가 되었다. 또한 현재의 오야카타가 1994년 헤야를 맡은 이래 처음으로 마쿠우치에 진출한 리키시였다. 이 바쇼에서 마쿠우치로 승격한 7명의 리키시 중 한 명이었던 그는 마에가시라 8매목이라는 높은 등급에서 데뷔했으며, 이는 1999년 3월 미야비야마가 마에가시라 7매목으로 시작한 이래 가장 높은 등급이었다. 그는 견고한 8승 7패의 기록으로 바쇼를 마쳤다.
2.2. 세키토리 및 마쿠우치 진출
가쿠류는 2005년 11월 주료로 승격하며 세키토리 지위를 획득했으나, 5승 10패로 한 바쇼 만에 마쿠시타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2006년 3월 주료로 복귀한 후 꾸준히 승리를 쌓아, 2006년 11월 마쿠우치에 진출하며 최고 등급에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2.3. 산야쿠 및 오제키 시절
2008년 1월 바쇼에서 11승 4패의 좋은 성적을 거두며 첫 산쇼인 기노쇼를 획득하고 마에가시라 잇토로 승격했다. 2008년 11월 바쇼에서는 무릎 염좌로 인해 도중에 기권하며 처음으로 경기를 결장했다. 2009년 3월 바쇼에서는 마에가시라 잇토에서 7일차까지 2승 5패였으나, 중반부터 8연승을 거두며 10승 5패를 기록하고 3명의 오제키를 꺾는 등 두 번째 기노쇼를 수상했다.
2009년 5월 바쇼에서는 고무스비로 승격하며 첫 산야쿠 데뷔를 했다. 이전 바쇼와 비슷하게 2승 5패에서 7연승을 거두며 최종적으로 9승 6패로 가치코시했고, 두 바쇼 연속으로 세 번째 기노쇼를 수상했다. 2009년 7월 바쇼에서는 세키와케로 승격했지만, 5승 10패로 마케코시(패월)하며 한 바쇼 만에 히라마쿠(평막)로 강등되었다. 9월 바쇼에서는 11승 4패의 좋은 성적을 거두며 4번째 기노쇼를 수상했다. 11월 바쇼에는 니시 세키와케로 복귀했지만, 7승 8패로 마케코시하며 산야쿠 등급에 머물렀다. 이후 세 바쇼에서 실망스러운 성적을 보이며 마에가시라 6매목까지 떨어졌지만, 2010년 7월 바쇼에서 11승을 거두며 준우승을 차지하고 5번째 기노쇼를 수상했다. 2010년 9월 고무스비로 복귀했고, 11월에는 세키와케로 승격했다. 이 바쇼의 마지막 날에는 동료 세키와케인 도치오잔 유이치로에게 패하며 7승 8패로 마쳤다.
2011년 5월 '기량 심사 바쇼'에서는 니시 고무스비로 출전하여 우승한 요코즈나 하쿠호의 13승 2패에 이어 자신 최고 기록인 12승 3패를 기록하며 6번째 기노쇼를 수상했다. 7월 바쇼에서는 세키와케로 승격하여 3명의 오제키를 꺾는 활약을 보이며 10승 5패를 기록, 산야쿠에서 두 바쇼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9월 바쇼에서는 히가시 세키와케로서 고토쇼기쿠 가즈히로와 함께 첫 오제키 승격을 노렸지만, 부진하여 7일차에 이미 4패를 기록했다. 종반 4연승으로 가치코시했지만 9승 6패에 그쳐 오제키 승격에는 실패했다.
2012년 1월 바쇼 10일차에는 2007년 9월 첫 대결 이후 20연패를 기록했던 요코즈나 하쿠호를 요리키리(밀어내기)로 꺾고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 바쇼에서 10승 5패를 기록하며 첫 슈쿤쇼를 획득했고, 산야쿠에서 두 바쇼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어 다음 3월 바쇼에서 오제키 승격이 걸리게 되었다(자신에게는 두 번째 기회).
2.4. 요코즈나 승격과 활동
2012년 3월 오사카에서 열린 바쇼에서 가쿠류는 9일차에 하쿠호를 두 바쇼 연속으로 꺾고, 바쇼 마지막 날에는 13승 1패로 요코즈나보다 한 승리 앞서 단독 선두를 달렸다. 유일한 패배는 8일차 기세노사토 유타카에게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센슈라쿠 혼와리(본경기)에서 고에이도 고타로에게 패하며 2패로 물러섰고, 하쿠호가 바루토 가이토를 꺾으면서 두 몽골인 요코즈나 간의 우승 결정전이 성사되었다. 결정전에서는 하쿠호가 가쿠류에게 설욕하며 22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첫 우승을 놓쳤지만, 가쿠류는 슈쿤쇼와 기노쇼를 동시에 수상했다. 가쿠류는 하쿠호와의 결정전에서 경험 부족이 패배의 원인이었다며 "나에게는 아직 우승이 너무 일렀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 바쇼에 걸쳐 총 33승(10승-10승-13승)을 기록한 가쿠류는 오제키 승격에 충분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 승격으로 동시에 6명의 오제키가 활동하는 것은 스모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프로 데뷔 후 오제키가 되기까지 62개 바쇼가 걸렸는데, 이는 스모 역사상 10번째로 느린 기록이자, 오제키에 오른 9명의 외국인 리키시 중 가장 느린 기록이었다. 2012년 3월 28일, 만장일치로 가쿠류의 오제키 승격이 결정되었다. 승격 전승식에서 그는 "앞으로도 훈련에 정진하여 손님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스모를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신오제키가 된 5월 바쇼에서는 나카비(중간 날)까지 1패였지만, 8승 7패로 마쳤다. 7월 바쇼에서는 4연패를 겪었지만, 14일차 고에이도의 기권으로 부전승을 얻어 가치코시를 확정했고, 센슈라쿠에 고토쇼기쿠를 시타테나게(아래팔 던지기)로 꺾고 9승 6패로 마쳤다. 9월 바쇼에서는 12일차까지 2패를 유지했지만, 13일차에 하쿠호, 14일차에 하루마후지에게 연속으로 패하며 우승 경쟁에서 탈락했다. 센슈라쿠에는 7연패 중이던 기세노사토에게 승리하며 11승 4패를 기록, 오제키 승격 후 첫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다.
2013년은 눈에 띄는 활약이 없었으며, 6개 바쇼 중 어느 바쇼에서도 10승 이상을 기록하지 못했다. 1월 바쇼에서는 종반에 4연패를 당하며 8승 7패로 마쳤다. 2월 일본 오즈모 토너먼트에서는 결승에서 도요노시마 다이키를 꺾고 첫 우승을 차지했다. 3월 바쇼는 8승 7패로 세 바쇼 연속 한 자릿수 승리에 그쳤다. 5월 바쇼에서는 첫날부터 8연승을 거두며 오제키 승격 후 처음으로 나카비 가치코시를 확정했지만, 9일차에 고토쇼기쿠에게 패하며 첫 흑점을 기록했다. 이후 요코즈나, 오제키 전에서 전패하며 10승 5패로 마쳤다. 7월 바쇼는 10승 5패로 오제키 승격 후 자신 최초로 두 바쇼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9월 바쇼는 7일차까지 6승 1패였지만, 나카비 이후 연패가 이어지며 9승 6패로 마쳤다. 11월 바쇼는 2일차부터 연패를 기록했고, 이후 11일차까지 2패였지만, 종반 4연패로 9승 6패에 그쳤다.

2014년 1월 바쇼에서 가쿠류는 첫날 동갑내기인 오키노우미 아유미에게 패했지만, 2일차부터 승리를 거듭하여 13승 1패를 기록했다. 센슈라쿠에는 14전 전승을 기록 중이던 하쿠호와 직접 대결에 나섰다. 혼와리에서 하쿠호를 요리타오시(밀어 넘어뜨리기)로 꺾었지만, 우승 결정전에서는 하쿠호에게 패하며 첫 우승을 놓쳤다. 이는 그의 경력에서 네 번째 준우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타노우미 도시미츠 이사장(당시)은 "결정전까지 갔고, 우승에 준한다"며 하쿠호를 꺾고 14승 1패로 우승 동률을 이룬 성적을 높이 평가하며 3월 바쇼를 요코즈나 승격 도전 바쇼로 삼겠다는 견해를 시사했다. 그는 기준에 대해 "최소 13승. (최근에는) 두 자릿수 승리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높은 수준의 우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시 가쿠류는 마쿠우치 우승 경험이 없었고, 오제키 11개 바쇼 중 7개 바쇼에서 9승 이하를 기록했으며, 특히 하쿠호를 비롯한 상위권 선수들과의 직접 대결 성적이 좋지 않아 스모계 내부에서는 일부 신중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2014년 3월 바쇼에서는 3일차에 그동안 2연패를 기록했던 오키노우미에게 오시다시(밀어내기)로 패하며 1패를 기록했지만, 이후 연승을 거듭했다. 12일차에는 요코즈나 하루마후지를 오쿠리다시(뒤로 밀어내기)로 꺾었고, 14일차에는 1패로 동률이던 요코즈나 하쿠호를 꺾고 단독 선두에 올랐다. 센슈라쿠에서 고토쇼기쿠를 요리키리(밀어내기)로 꺾고 14승 1패로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 우승은 1909년 (메이지 42년) 개인 우승 제도가 제정된 이래 통산 100번째 마쿠우치 최고 우승 리키시가 되는 기념비적인 우승이었다.
3월 바쇼 센슈라쿠 후, 기타노우미 이사장은 가쿠류의 요코즈나 승격을 요코즈나 심의회에 자문하기로 결정했고, 같은 달 24일 열린 심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추천되었다. 같은 달 26일 열린 나츠 바쇼 반즈케 편성 회의와 임시 이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제71대 요코즈나로 승격이 결정되었다. 그는 외국인 리키시로는 역사상 6번째, 몽골인으로는 4번째 요코즈나가 되었다. 도키츠카제 이치몬 출신 요코즈나 승격은 52년 6개월 만의 일이었다. 또한 두 바쇼 연속 우승 없이 요코즈나로 승격한 것은 오노쿠니 야스시 이래 27년 만이자 헤이세이 시대(1989년 ~ 2019년)에는 처음이었다. 요코즈나 전승식에서 그는 "삼가 받아들이겠습니다. 앞으로 더욱 훈련에 정진하여 요코즈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고 구상(口上)을 밝혔다.
요코즈나 도효이리(링 입장 의식)는 운류가타를 선택했으며, 다카노하나 고지 (제65대 요코즈나, 이치다이 도시요리)가 지도를 맡았다. 원래는 같은 헤야 또는 같은 이치몬의 스승이 지도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도키츠카제 이치몬에는 가시와도 쓰요시 은퇴 이후 가쿠류 승격까지 45년간 요코즈나가 없었으며, 그들 모두 고인이 되었기에 다카노하나가 대신 지도 역할을 맡았다. 이 도효이리 지도자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가쿠류 - 다카노하나 - 2대 와카노하나 간지 - 초대 와카노하나 간지 - 12대 다츠타가와 (후타바야마 사다지 이사장의 명령에 따름)로 이어지며, 다른 이치몬에 전해지던 도효이리가 뿌리인 도키츠카제 이치몬으로 돌아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전승이 되었다.
그의 첫 요코즈나 바쇼는 9승 6패로 실망스럽게 끝났다. 4일차에 엔도 쇼타에게 긴보시를 내주었고, 마지막 세 경기를 패했다. 2014년 이후 바쇼에서는 최소 11승을 기록하며 선전했고, 2014년 11월 바쇼 우승 경쟁에 참여했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하쿠호에게 패했다. 이는 그의 경력에서 다섯 번째 준우승이었다.
2015년 3월 바쇼 전날, 가쿠류는 왼쪽 어깨의 회전근개 파열로 인해 기권해야 했다. 이는 요코즈나로서 첫 결장이었으며, 너무 늦게 결정되어 첫 경기가 이미 배정되어 있었고 부전패 처리되었다. 그는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5월 나츠 바쇼도 결장했는데, 요코즈나가 2003년 무사시마루 고요가 세 바쇼 연속 결장한 이후 처음으로 두 바쇼 연속 결장한 사례였다. 7월 바쇼에서는 12승 3패로 준수한 복귀전을 치렀고, 센슈라쿠에 하쿠호에게 패하기 전까지 우승 경쟁에 참여했다. 하루마후지가 결장하고 하쿠호가 3일차에 기권하면서, 가쿠류는 9월 바쇼 대부분 동안 유일한 요코즈나였다. 2일차 요시카제와 10일차 묘기류 야스나리에게 패했지만, 12승 2패로 마지막 날에 진입하며 오제키 테루노후지 하루오보다 한 승리 앞섰다. 바쇼의 마지막 예정 경기에서 테루노후지에게 패했지만, 이어진 결정전에서 우와테다시나게로 승리하며 두 번째 우승이자 요코즈나 승격 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 결정전 후 그는 "오랫동안 우승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나를 짓눌렀다. 힘들었다... 다시 우승을 놓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내 스모 스타일을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좌절하지 않고 계속 열심히 노력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바쇼 중, 특히 전날 기세노사토를 상대로 헨카 (측면 회피 기술)를 사용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11월에는 우승 가능성이 낮았지만, 마지막 날 하쿠호를 꺾고 9승 6패로 마쳤다.
2016년에는 1월과 3월 바쇼에서 10승 5패를 기록했고, 5월에는 11승 4패로 약간 더 나은 성적을 거두었다. 7월 나고야 바쇼에서는 허리 통증과 왼쪽 발목 부상으로 기권했다. 9월에 복귀하여 10승을 기록했다. 11월 바쇼에서는 첫 10경기를 모두 이겼지만, 11일차에 기세노사토에게 패했다. 그러나 고토쇼기쿠와 하쿠호를 꺾고 14일차에 고에이도를 상대로 승리하며 세 번째 우승을 확정했다. 센슈라쿠에 하루마후지를 꺾으며 바쇼를 마무리한 후 그는 "정말 기쁘다. 지난 1, 2년간 부상으로 고생했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들었지만, 나는 침울해하지 않았고 이렇게 잘 풀려서 좋다. 드디어 내 방식대로 편안하게 스모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지금 이 기분을 잊지 않고 계속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2017년은 실망스럽게 시작되었다. 가쿠류는 첫 10일 동안 5패를 당했는데, 이 중 3패는 마에가시라 등급의 리키시들에게 긴보시를 내준 것이었다. 가쿠류는 10일차 이후 오른쪽 다리 부상으로 바쇼에서 기권했다. 그는 3월 오사카 바쇼에서 10승을 기록하며 복귀했다. 2017년 5월 바쇼에서는 첫 4일 동안 3패를 기록한 후 왼쪽 발목 부상을 이유로 기권했다. 그는 다음 7월 바쇼에서도 4일차에 기권했는데, 이번에는 오른쪽 발 부상 때문이었다. 그의 스승인 이즈츠 오야카타는 가쿠류가 복귀 후에는 바쇼 도중에 기권하지 않고 은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번에 도효에 오르면 이기지 못할 경우 도중에 기권할 선택지는 없을 것이다. 남자답게 (스모에서 은퇴할)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2017년 9월 7일, 이즈츠 오야카타는 가쿠류가 오른쪽 발 부상에서 아직 회복되지 않아 아키 바쇼를 결장할 것이라고 확인했다. 11월에는 다시 바쇼 직전에 기권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발목 부상 외에 허리 문제도 있었다. 2017년 12월 20일, 스모 협회는 10월 돗토리의 한 식당에서 몽골 리키시 다카노이와가 하루마후지에게 부상을 입었을 때 행동하지 않은 책임을 물어 가쿠류에게 2018년 1월 급여를 삭감하는 징계를 내렸다. 동료 요코즈나 하쿠호는 한 달 반치 급여가 삭감되었다. 요코즈나 심의회 위원장은 "하쿠호와 가쿠류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막거나 너무 심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들의 책임은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강력한 경고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쿠류는 2018년 1월 바쇼에 복귀했다. 첫 10경기를 모두 이겼지만, 이후 4연패를 당했고, 마지막 날 승리하며 11승 4패로 3위를 차지했다. 하쿠호와 기세노사토가 부상으로 기권한 후 그는 유일하게 바쇼를 완주한 요코즈나였다. 바쇼 막바지에 왼쪽 발목에 통증을 느낀 그는 2월 초에 유리 연골 제거 수술을 받았다. 2018년 3월 바쇼에서도 가쿠류는 유일하게 출전한 요코즈나였다. 그는 11연승을 거두었지만, 12일차에 도치노신 고시에게 첫 패배를 당했다. 이후 두 경기를 더 이겼고, 14일차에 고에이도를 꺾으며 우승을 확정했다. 15일차에는 다카야스 아키라와 대결했는데, 처음에는 가쿠류가 이긴 것으로 판정되었으나, 심판진 회의를 통해 판정을 검토한 결과 가쿠류의 발뒤꿈치가 다카야스의 발끝이 링에 닿는 동시에 밖으로 나갔다고 판단되어 재경기가 결정되었다. 재경기에서는 다카야스가 승리했다. 가쿠류는 13승 2패로 바쇼를 마쳤으며, 이는 그의 네 번째 우승이었다. 2018년 5월 바쇼에서 가쿠류는 처음으로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마에가시라 쇼호잔 유야에게만 패했고, 도치노신보다 한 승리 앞선 14승 1패로 바쇼를 마쳤다. 그러나 다음 7월 바쇼에서는 6일차에 부상으로 기권했다. 9월에는 첫 10경기를 모두 이기는 등 훌륭한 컨디션을 보였지만, 11일차에 도치노신에게 패한 후 다시는 승리하지 못하고 10승 5패로 마쳤다. 2017년 7월에 처음 겪었던 오른쪽 발목 부상으로 인해 2018년 11월 바쇼를 앞두고 훈련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는 11월 8일 바쇼에서 기권할 것이라고 확인했다. 같은 부상으로 인해 2019년 1월 바쇼에서도 2승 3패의 기록으로 6일차에 기권했다. 3월과 5월 바쇼에서 각각 10승 5패와 11승 4패를 기록한 후, 가쿠류는 7월 바쇼에서 14승 1패로 여섯 번째 마쿠우치 우승을 차지했다. 가쿠류는 마지막 날 동료 요코즈나 하쿠호를 꺾고 우승을 확정했다.
2019년 9월 바쇼에서는 첫 4경기를 이겼지만, 마에가시라 아사노야마 히로키, 다이에이쇼 히로토, 도모카제 유타에게 3연패를 당했고, 왼쪽 무릎 내측측부인대 손상으로 8일차에 기권했다. 바쇼 후 스승인 이즈츠 오야카타(전 사카호코)의 사망으로 미치노쿠베야로 이적했다. 11월 규슈 바쇼 개막일 아침에는 훈련 중 허리 부상으로 기권했다. 2020년 1월 바쇼에서는 1승 3패의 기록으로 5일차에 기권했는데, 이는 세 바쇼 연속으로 완주하지 못한 것이었다.
가쿠류는 2020년 3월 반즈케에서 요코즈나 오제키로 지정되었다. 오제키 등급에 다른 리키시가 한 명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코즈나 오제키 지정은 38년 만에 처음 사용된 것이었다. 그는 이 바쇼에서 12승 3패로 여덟 번째 준우승을 차지했다.
2020년 7월 바쇼에서는 첫 경기에서 엔도에게 패한 후 팔꿈치 부상으로 2일차에 기권했다. 이 경기가 그의 현역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그는 다음 9월 바쇼에도 결장했으며, 그의 스승은 "은퇴 문제를 피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그는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인해 11월 바쇼에도 결장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 7개 바쇼 중 6번째 기권이었다. 2020년 11월 바쇼 이후, 가쿠류는 동료 요코즈나 하쿠호와 함께 최근 스모 바쇼 불참으로 인해 스모 협회의 요코즈나 심의회로부터 "주의" 경고를 받았다. 이는 심의회가 발령할 수 있는 세 가지 통지(격려 서한, 경고, 은퇴 권고) 중 중간 단계였다. 경고 통지가 발령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2.5. 주요 수상 경력
- 마쿠우치 최고 우승 (유쇼): 6회
- 2014년 3월 바쇼
- 2015년 9월 바쇼
- 2016년 11월 바쇼
- 2018년 3월 바쇼, 5월 바쇼
- 2019년 7월 바쇼
- 산단메 우승: 1회 (2004년 7월 바쇼)
- 산쇼 (특별상): 9회
- 슈쿤쇼 (殊勲賞): 2회 (2012년 1월 바쇼, 2012년 3월 바쇼)
- 기노쇼 (技能賞): 7회 (역대 4위 타이)
- 2008년 1월 바쇼
- 2009년 3월 바쇼
- 2009년 5월 바쇼
- 2009년 9월 바쇼
- 2010년 7월 바쇼
- 2011년 5월 기량 심사 바쇼
- 2012년 3월 바쇼
- 마쿠우치 준우승: 8회
- 긴보시 (요코즈나 격파): 없음 (히라마쿠 시절 요코즈나를 이긴 적이 없어 긴보시를 획득하지 못했다.)
3. 은퇴 및 은퇴 후 활동
가쿠류는 잦은 부상과 스모 협회의 경고 끝에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이후 스모계에서 지도자로서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다.
3.1. 은퇴 배경 및 결정
이전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쿠류는 허리 문제로 2021년 1월 바쇼에서도 기권했다. 그의 스승인 미치노쿠 오야카타에 따르면, 가쿠류는 다음 바쇼에서 자신의 경력을 걸겠다고 말하며 가능한 한 빨리 훈련을 재개하여 컨디션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네 바쇼 연속 기권 후, 가쿠류는 처음에는 3월에 출전할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말했지만, 다음 주 왼쪽 다리 근육 염좌로 인해 기권했다. 그의 스승은 그가 은퇴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요코즈나 심의회의 추가 비난 가능성에 직면하여, 가쿠류는 2021년 3월 24일 일본 스모 협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는 6개의 천황배(우승)와 645승 394패의 마쿠우치 기록을 남기고 은퇴했다. 그는 전 요코즈나로서 영구 지분을 취득할 때까지 5년간 도시요리로서 자신의 시코나(리키시 이름)를 유지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가쿠류는 기자들에게 은퇴 결정으로 인해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3.2. 은퇴식 및 장로로서의 활동
가쿠류는 은퇴 후 미치노쿠베야에서 도시요리 가쿠류로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또한 NHK와 ABEMA의 스모 중계 해설자로 출연하여 정확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해설을 선보였다. 신인 오야카타로서 경기장 경비 업무를 수행하는 한편, 협회 공식 상품 판매점에서 점원으로 돕기도 했다.
가쿠류의 단파츠시키(은퇴식)는 2023년 6월 3일 료고쿠 국기관에서 열렸다. 가쿠류는 전 오제키 쇼다이 나오야가 츠유하라이(이슬 닦는 사람)를, 새로 승격한 오제키 기리시마 테츠오가 타치모치(칼잡이)를 맡은 가운데 마지막 요코즈나 도효이리(링 입장 의식)를 선보였다. 약 380명이 가쿠류의 오이초마게(상투)를 자르는 데 참여했으며, 몽골 출신 다른 세 요코즈나인 아사쇼류 아키노리, 하루마후지 고헤이, 하쿠호 쇼도 포함되었다. 단파츠시키에 참석한 전 아사쇼류는 "성실한 가쿠류의 인간성을 칭찬하며 "잘 노력해서 요코즈나까지 올랐다. 내 후임 요코즈나 중에는 시라누이형이 많았지만, 나와 같은 운류형이어서 뭔가 가까운 느낌이 있었다. 그 정도의 성실함으로 열심히 정점까지 갔다는 것은 본인의 진지한 노력이다. 훌륭한 활약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극찬했다.
3.3. 오토와야마 헤야 창설
2020년 12월, 가쿠류는 일본 국적을 취득했는데, 이는 은퇴 후 스모 협회에 도시요리(장로)로 남기 위한 필수 요건이었다. 그는 2년 반에 걸친 복잡한 절차 끝에 일본 국적을 취득했으며, 일본 이름은 만갈잘라부 아난다로 변경했다. 그는 귀화 이유로 "스모 협회에 대한 보은"을 꼽았다.
2023년 12월 15일, 가쿠류는 소속된 미치노쿠베야에서 장래에 독립할 의향을 밝혔다. 그는 독립 시기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독립하여 내 헤야를 세워 운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달 27일, 스모 협회는 가쿠류가 오토와야마 도시요리 주식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주식은 그해 초 전 마에가시라 텐카이호 다카유키가 비워둔 것이었다. 또한 그는 미치노쿠베야에서 분리하여 자신의 헤야인 오토와야마 헤야를 창설하는 것을 승인받았으며, 두 명의 리키시와 스모 협회 최고참 도코야마 한 명이 함께 이적했다. 헤야는 도쿄 스미다구에 위치한 3층 건물로, 이전에 지방 정부가 사용하다가 스모 선수들을 위해 개조된 곳이다.
2024년 3월에는 5월 바쇼부터 도효 심판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다음 달, 그의 헤야는 미치노쿠베야의 폐쇄에 따라 미치노쿠베야의 사범과 최고 등급 리키시(오제키 기리시마 테츠오)를 맞이했다.
4. 경기 스타일
가쿠류는 모로자시와 시타테나게를 주체로 하는 스모에 능숙했으며, 미기요츠 자세에서도 강점을 보였다. 그는 요츠 스모 일변도가 아니라 츠파리(밀치기)나 히키와자(끌어당기기) 기술도 가지고 있어, 기본적으로 잡고 싸우든 떨어져 싸우든 능숙한 올라운더였다. 특히 마키카에에서 모로자시로 이어지는 기술은 그의 대사범인 츠루가미네 아키오부터 스승인 15대 이즈츠를 거쳐 자신에게 전해진 전통적인 기술이었다. 츠파리 기술은 현역 말기 테라오 츠네후시의 츠케비토로 일하며 테라오의 츠파리를 보고 배웠다고 한다. 요코즈나 시절에도 컨디션이 좋을 때는 다치아이(시작 자세) 등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히키쿠세(끌어당기는 습관)는 요코즈나답지 않은 경기 스타일로 종종 부정적인 시선을 받았다. 치요오토리 유키나 묘기류 야스나리처럼 히키와자에 넘어지지 않는 강한 하체를 가진 리키시들에게는 오히려 자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 15대 이즈츠는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와 같은, 다른 리키시에게는 없는 스피드"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기동력 자체는 높이 평가받았는데, 2014년 3월 바쇼 전 좌담회에서 오자키 유키(전 세키와케 다카노와카)는 "도효를 둥글게 사용하는 것이 탁월한 리키시로, 능숙하게 돌아들어와서 하타키코미(손바닥으로 때려 넘어뜨리기)를 당하기도 했다"고 현역 시절 대전 경험을 회상했다. 오오시 노부유키(전 마쿠우치)도 같은 좌담회에서 "몸집이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저력을 느낀다. 츠파리도 거칠다"고 평했다. 2016년 11월 바쇼 전 좌담회에서 15대 나루토(전 오제키 고토오슈 가츠노리)는 "실제로 붙어본 경험으로는 좌우 발 움직임이 빠르다"고 말했다. 2018년 3월 바쇼 전에는 마이노우미 슈헤이가 밀리거나 상체가 들렸을 때 대처 방식이 좋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요코즈나 시절에도 한결같이 "자신감 없어 보임", "너무 온순함"이라는 뉘앙스의 지적이 있었다. 요코즈나 시절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경기 스타일이 수비적으로 변했다", "특기인 츠파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받았다.
요코즈나로서는 휴장이 매우 잦았으며, 2020년 7월 바쇼 도중 기권했을 때는 기타노후지 가츠아키에게 "기가 막혀 할 말이 없다", "실로 자주 쉬는구나. 아마도 휴장을 요코즈나의 특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혹평을 받기도 했다. 은퇴 당시 18대 후지시마(전 오제키 무소야마 마사시)는 칼럼에서 "몸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지만 스모는 잘했다. 돌아가신 스승(전 세키와케 사카호코)에게 물려받은 모로자시나 츠파리, 히키와자 등 다채롭고 기교가 뛰어났다. 요코즈나로서는 이렇다 할 정형이 없었다. 그만큼 다양한 스모를 할 수 있었고, 앞으로 나아가는 압력도 있었다"고 평가했다.
5. 개인 생활
가쿠류는 스모 선수로서의 삶 외에도 개인적인 면모와 일본 국적 취득이라는 중요한 결정을 통해 그의 삶의 폭을 넓혔다.

그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가라오케를 통해 일본어를 익혔다. 또한 영어와 러시아어도 구사할 수 있다. 그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성격이며, 온화하고 예의 바르다.
그의 츠케비토(수행원)를 지낸 리키시들은 한결같이 "그처럼 상냥한 요코즈나는 없다"고 말한다. 츠케비토가 주료로 승격하면 하카마를 선물하기도 했다. 츠케비토 중 4명이 세키토리가 되었지만, 가쿠류는 "본인들의 노력 때문"이라고 답했다. 훈련을 위해 방문한 도키츠카제베야에 그의 스승인 15대 이즈츠가 찾아와 가쿠류가 타고 온 차를 타고 돌아가 버렸을 때도, 그는 "어쩔 수 없지"라며 쓴웃음을 지으며 훈련 마와시 차림으로 헤야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도요야마나 쇼다이 등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아, 저 요코즈나라서 다행이지", "화도 안 내고, 훌륭해"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요코즈나가 되면 택시나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을 선호했으며, 자택에서 헤야나 국기관까지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는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매우 성실하여, 자신의 경기를 비디오로 보며 반성할 점을 노트에 적고 과제를 정하여 훈련에 임했다.
2012년 3월 바쇼 센슈라쿠에서 우승하면 그 자리에서 우승이 확정되는 고에이도와의 경기에서 패했을 때, 그는 직후 탈의실에서 분한 나머지 욕실에서 드물게 신음 소리를 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채 임한 하쿠호와의 우승 결정전에서도 패하면서 평정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2014년 1월 바쇼 우승 결정전에서 하쿠호에게 패했을 때도 "이것으로 분하지 않으면 그만두는 게 낫다"고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다. 2014년 9월 바쇼 13일차에 신입 마쿠우치 리키시인 이치노조 슌에게 긴보시를 내주었을 때는 입술을 떨 정도로 분노에 찬 표정으로 경기 후 취재를 거부할 정도였다.
스모 팬으로 알려진 아이돌 야마네 치카는 그를 "평소에는 칠복신처럼 온화하지만, 스모에서는 의외로 도발적인 면도 있어 그 갭이 매력적이다"라고 평했다. 작은 헤야 출신이었기 때문에 세키토리로 승격한 후에도 한동안 찬코방(스모 선수들의 식사 준비)이나 가사 등을 직접 했다. 협회 내에서는 노래를 잘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유튜브 협회 공식 채널에서는 마이 웨이를 부르는 모습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하쿠호의 전성기를 여러 차례 경험하며 높은 수준의 우승을 달성했기 때문에, 2024년 5월 바쇼 후에는 '데일리 신초' 칼럼에서 "마쿠우치 최고 우승이 11승 4패라는 것은 부끄러운 수준"이라며 "내 현역 시절에는 우승은 최소 13승 이상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6. 평가 및 영향
가쿠류의 경력은 그의 꾸준한 노력과 성실함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몽골 출신 요코즈나로서 스모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잦은 부상으로 인한 비판과 논란도 피할 수 없었다.
6.1. 경력에 대한 평가
헤이세이 시대(1989년 ~ 2019년) 이후 승격한 8명의 요코즈나가 모두 두 바쇼 연속 우승을 달성한 반면, 가쿠류는 요코즈나 승격 바쇼였던 2014년 3월 바쇼가 첫 우승이었다. 또한 승격 3바쇼 전인 2013년 11월 바쇼에서 9승 6패를 기록했으며, 2019년 7월 바쇼 종료 시점까지 연 6바쇼 제도가 정착된 이후 직전 3바쇼 전이 한 자릿수 승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연패 없이 요코즈나에 오른 유일한 리키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년 3월 바쇼 후 요코즈나 심의회에서는 아무런 이견 없이 10분 남짓한 시간 만에 신속하게 추천되었다. 결정적인 요인은 가쿠류의 성실한 인품과 한결같은 자세였다. 요코즈나 심의회에서는 단 한 가지의 주문도 나오지 않았고, 각 위원들은 가쿠류의 인간성을 극찬했다. 미야타 료헤이 위원은 가쿠류를 "머리가 좋다. 언어와 예의범절이 확실하다"고 칭찬했고, 다카무라 마사히코 위원은 "일본인 이상으로 일본인다운 리키시"라고 높이 평가했다. 오시마 도라오 위원은 "행동도 좋고, 잘 생각하는 스모를 한다. 품격 있는 요코즈나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3월 바쇼는 운이 좋았는데, 마쿠우치에서는 11개 바쇼 중 8번 가치코시를 기록했으며, 더블 수상 포함 산쇼 2회, 마쿠우치 우승 2회도 기록했다. 7월 바쇼는 2015년까지 마쿠우치 마케코시가 한 번뿐이었지만, 2016년부터 3년 연속으로 도중 기권을 겪었다.
6.2. 스모계에 미친 영향
가쿠류는 몽골 출신 요코즈나로서 스모계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성실하고 겸손한 인품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특히 요코즈나 심의회에서는 그를 "일본인 이상으로 일본인다운 리키시"라고 평가할 정도로 그의 행동과 태도를 높이 샀다. 그는 후진 양성에도 적극적이었으며, 훈련장에서 후배들에게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2017년 4월 순업(지방 순회)에서는 후배 쇼다이 나오야에게 혹독한 훈련을 시키며 "힘을 내지 않으니까. 쇼다이가 잘못한 거야. 허리가 높다. 하쿠호(요코즈나 하쿠호)가 없으니 내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며 후배들의 분발을 촉구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2019년 5월 1일, 2018년부터 안전상의 이유로 폐지된 세키토리의 아기 안고 도효이리나 어린이 스모의 부활을 요구하는 개혁안을 리키시회 회장으로서 순업부에 제출하겠다는 의향을 밝혔다. 가쿠류는 "역시 순업에서 가장 많은 요구가 있다. 손님들과 교류하는 것과 스모계의 미래를 생각하면 그렇다"고 말하며 스모의 대중적 접근성 향상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6.3. 비판 및 논란
가쿠류는 요코즈나로서 매우 잦은 부상과 그로 인한 휴장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2017년에는 한 해 동안 단 한 번의 바쇼만 완주할 수 있을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다. 특히 2020년 11월 바쇼 이후에는 동료 요코즈나 하쿠호와 함께 요코즈나 심의회로부터 "주의" 경고를 받았다. 이는 요코즈나가 결장하는 바쇼가 너무 길어지는 것에 대한 경고였으며, 스모 역사상 요코즈나에게 경고가 발령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잦은 휴장은 그의 품격과 책임감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2015년 9월 바쇼 14일차 기세노사토와의 경기에서 두 차례나 다치아이에서 헨카(측면 회피 기술)를 사용하여 승리한 것에 대해 비판이 집중되었다. 요코즈나로서 정면 승부를 피하고 상대를 속이는 기술을 사용한 것이 요코즈나의 품격에 어긋난다는 지적이었다. 2017년 12월에는 하루마후지의 다카노이와 폭행 사건 현장에 있었음에도 이를 막지 못한 책임으로 2018년 1월 급여가 삭감되는 징계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의 경력에 오점으로 남았다.
7. 경기 기록 요약
가쿠류 리키사부로는 2001년 11월에 데뷔하여 2021년 3월에 은퇴하기까지 총 115개 바쇼에 출전했다.
- 총 전적: 785승 497패 231휴 (승률 0.612)
- 마쿠우치 전적: 645승 394패 231휴 (85개 바쇼, 승률 0.621)
- 요코즈나 전적: 266승 117패 227휴 (41개 바쇼, 승률 0.695)
- 요코즈나 오제키 전적: 12승 3패 (1개 바쇼, 승률 0.800)
- 오제키 전적: 119승 61패 (12개 바쇼, 승률 0.661)
- 세키와케 전적: 71승 49패 (8개 바쇼, 승률 0.592)
- 고무스비 전적: 45승 30패 (5개 바쇼, 승률 0.600)
- 마에가시라 전적: 144승 137패 4휴 (19개 바쇼, 승률 0.513)
- 마쿠우치 전적: 645승 394패 231휴 (85개 바쇼, 승률 0.621)
- 통산 (마쿠우치) 연속 가치코시: 24개 바쇼 (2011년 1월 바쇼 ~ 2015년 1월 바쇼)
- 마쿠우치 연속 두 자릿수 승리 기록: 4개 바쇼 (2014년 7월 바쇼 ~ 2015년 1월 바쇼)
- 요코즈나로서의 휴장 일수: 227일 (역대 2위)
7.1. 주요 연승 기록
순위 | 연승 수 | 기간 | 연승을 끊은 리키시 | 당시 리키시의 반즈케 |
---|---|---|---|---|
1 | 16 | 2014년 1월 바쇼 2일차 ~ 2014년 3월 바쇼 2일차 | 오키노우미 | 히가시 마에가시라 2매목 |
2 | 14 | 2018년 5월 바쇼 5일차 ~ 2018년 7월 바쇼 3일차 | 이키오이 | 히가시 마에가시라 2매목 |
3 | 13 | 2019년 5월 바쇼 센슈라쿠 ~ 2019년 7월 바쇼 12일차 | 도모카제 | 니시 마에가시라 7매목 |
4 | 12 | 2018년 1월 바쇼 센슈라쿠 ~ 2018년 3월 바쇼 11일차 | 도치노신 | 니시 세키와케 |
5 | 10 | 2016년 11월 바쇼 첫날 ~ 2016년 11월 바쇼 10일차 | 기세노사토 | 니시 오제키 |
2018년 1월 바쇼 첫날 ~ 2018년 1월 바쇼 10일차 | 다마와시 | 니시 세키와케 |
7.2. 마쿠우치 대전 성적
리키시명 | 승수 | 패수 | 리키시명 | 승수 | 패수 | 리키시명 | 승수 | 패수 | 리키시명 | 승수 | 패수 | |||||
---|---|---|---|---|---|---|---|---|---|---|---|---|---|---|---|---|
아오이야마 | 20 | 1 | 아사쇼류 | 0 | 7 | 아사세키류 | 5 | 5 | 아사노야마 | 2 | 2(1) | |||||
안소후지 | 0 | 1 | 아비 | 5 | 1 | 아미니시키 | 17 | 15 | 아라와시 | 2 | 1 | |||||
아란 | 12 | 1 | 이키오이 | 10 | 4 | 이치노조 | 13 | 3(1) | 이와키야마 | 5(1) | 2 | |||||
시오마루 | 0 | 1 | 엔도 | 13 | 4 | 엔호 | 1 | 0 | 오지 | 1 | 0 | |||||
오스나아라시 | 2 | 1 | 오키노우미 | 16 | 6(1) | 가이오 | 10 | 6 | 가이세이 | 15 | 0 | |||||
가이호 | 1 | 0 | 가가마루 | 5 | 0 | 가키조에 | 5 | 3 | 가스가오 | 1 | 4 | |||||
가스가니시키 | 1 | 1 | 가타야마 | 1 | 0 | 기세노사토 | 18 | 32 | 기타타이키 | 4 | 0 | |||||
교쿠텐호 | 15 | 3 | 고에이도 | 28(1) | 14 | 고쿠카이 | 6 | 2 | 고토오슈 | 18 | 12 | |||||
고토쇼기쿠 | 30 | 22(1) | 고토미츠키 | 4 | 10(1) | 고토유키 | 2 | 1 | 사다노우미 | 2 | 0 | |||||
사다노후지 | 1 | 0 | 사토야마 | 1 | 0 | 시모토리 | 1 | 1 | 주몬지 | 1 | 0 | |||||
조코류 | 1 | 0 | 쇼다이 | 13 | 0 | 쇼텐로 | 1 | 0 | 쇼호잔 | 13 | 2 | |||||
소코쿠라이 | 1 | 0 | 다이에이쇼 | 5 | 2(1) | 다카케이쇼 | 4 | 1 | 다카미사카리 | 2 | 5 | |||||
다카야스 | 13 | 10(1) | 다카라후지 | 13 | 1 | 고후 | 20 | 0 | 다마하루히 | 3 | 1 | |||||
다마노시마 | 2 | 3 | 다마와시 | 10 | 6(1) | 치요오토리 | 0 | 1 | 치요타이카이 | 3 | 6 | |||||
치요타이류 | 12 | 0 | 치요노쿠니 | 0 | 2(1) | 치요하쿠호 | 0 | 2 | 치요마루 | 1 | 0 | |||||
데지마 | 4 | 2 | 테루노후지 | 7* | 4 | 도키츠우미 | 2 | 1 | 도키텐쿠 | 9 | 4 | |||||
도쿠쇼류 | 0 | 1 | 도쿠세가와 | 0 | 1 | 도사노우미 | 4 | 0 | 도사유타카 | 3 | 1 | |||||
도치오잔 | 24 | 21 | 도치노신 | 23 | 4 | 도치노나다 | 5 | 2 | 도치노하나 | 2 | 1 | |||||
도치노와카 | 3 | 0 | 도모카제 | 0 | 2 | 도요자쿠라 | 0 | 1 | 도요노시마 | 16 | 9 | |||||
도요히비키 | 6 | 2 | 니시키기 | 1 | 1 | 하쿠바 | 1 | 0 | 하쿠호 | 8 | 42** | |||||
하쿠로잔 | 1 | 1 | 바루토 | 12 | 13 | 하루마후지 | 17 | 27 | 부슈야마 | 2 | 0 | |||||
후텐오 | 4 | 1 | 호마쇼 | 12(1) | 8 | 호쿠토리키 | 4 | 0 | 호쿠토후지 | 5 | 4(1) | |||||
쇼지 | 3 | 0 | 미타케우미 | 8 | 6(1) | 미야비야마 | 6 | 2 | 묘기류 | 11 | 10 | |||||
메이세이 | 1 | 0 | 모코나미 | 1 | 0 | 도요야마 | 3 | 0 | 요시카제 | 11 | 7(1) | |||||
류덴 | 3 | 0 | 로호 | 1 | 1 | 와카키린 | 1 | 0 | 와카아라시오 | 2 | 1 | |||||
와카노사토 | 6 | 4 | 와카노호 | 0 | 2 | |||||||||||
- 우승 결정전에서 테루노후지에게 1승, 하쿠호에게 2패가 있다.
- 괄호 안의 숫자는 승수, 패수 중 부전승, 부전패의 수이다.
8. 관련 항목
- 요코즈나 목록
- 요코즈나 오제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