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및 아마추어 스모 경력
데지마 다케하루는 어린 시절부터 학창 시절에 걸쳐 스모를 시작하고 성장했으며, 중앙대학교 재학 시절을 포함한 학생 스모 활동에서 아마추어 챔피언으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1.1. 어린 시절과 학업
데지마 다케하루는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 태어났다. 혈액형은 A형이며, 외동아들이다. 그는 겐몬지 유치원, 가나자와 시립 모리야마초 초등학교, 가나자와 시립 나루와 중학교, 가나자와 시립 공업 고등학교를 거쳐 중앙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스모가 성행하는 지역에서 자란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동네 대항 스모 대회에 출전하게 되면서 스모를 시작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감독의 권유로 스모부에 들어가면서 스모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전국 중학교 스모 선수권 대회 개인전에서 2위를 차지했다. 당시 그는 훈련이 너무 엄격해 항상 탈퇴서를 제출할 생각을 했지만, 결국 감독이 무서워 제출하지 못했다. 전국 대회 준우승 이후 여러 스모 헤야에서 제의가 있었으나, 당시 대스모에 대해 '무서운 세계'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 프로로 전향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후에 중학교 시절이 '꽃을 피우기 위한 밑작업'이었다고 회고했다.
1.2. 학생 스모 활동 및 주요 성과
고등학교 시절에는 7개의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고교 요코즈나뿐만 아니라 국민체육대회 개인전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중앙대학교 스모부 감독과 3년 선배이자 아마추어 요코즈나였던 구리모토(훗날의 무테쓰잔)의 권유로 중앙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교 1학년 때 선배인 구리모토와 마쓰모토(훗날의 다마카스가)의 지도를 받으며 힘든 훈련을 했지만, 고학년이 되면서 자신을 이길 만한 훈련 상대가 없어 슬럼프에 빠졌다. 강한 훈련 상대를 찾아 스모 헤야에서 훈련하려고 해도, 대학이 하치오지시에 위치하여 스모 헤야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도심 대학의 스모부원들처럼 리키시들의 지도를 받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전국 대학 스모 선수권 대회와 전일본 스모 선수권 대회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재학 중 이미 무사시가와 헤야에 입문했던 무테쓰잔으로부터 대스모 입문을 권유받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대스모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망설였다. 그러나 큰 타이틀을 놓친 아쉬움 때문에 4학년 11월이 되어서야 입문을 결심하고 무사시가와 헤야에 입문했다. 그의 취미는 도예이며, 가장 좋아하는 말은 "흘린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이다.
2. 프로 스모 경력
데지마는 프로 스모에 입문한 후 빠르게 승진하며 오제키까지 올랐으나, 부상과 압박감으로 인해 랭크를 잃은 뒤에도 꾸준히 활약하다가 최종적으로 은퇴했다.
2.1. 초창기 및 마쿠우치 승격
1996년 3월 바쇼에서 마쿠시타 쓰케다시 자격으로 하쓰도효를 밟았다. 당시 소속 헤야인 무사시가와 헤야에는 무사시마루와 무소야마와 같은 훌륭한 훈련 상대가 있었고, 본인이 "대학 4년간보다 프로에 들어와서 반년이 더 성장했다"고 말할 정도로 빠르게 반즈케를 올렸다. 입문 전에는 학생 스모 출신들에게 흔한 다치아이의 미숙함이 있었지만, 프로 입문 이후 무사시가와 오야카타의 엄격한 지도를 통해 다치아이에서의 날카로운 발놀림이 단련되었다.
입문 반년 만인 같은 해 9월 바쇼에서 첫 도효를 밟은 지 3개 바쇼 만에 주료로 승진했으며, 주료에서도 3개 바쇼를 거쳐 1997년 3월 바쇼에서 신뉴마쿠를 달성했다. 이때까지 단 한 번도 마케코시 없이 승진했다. 신뉴마쿠 바쇼에서는 11승 4패의 인상적인 성적을 거두며 감투상과 기능상을 동시에 획득했다. 이듬해 5월 바쇼에서는 7승 8패로 처음으로 마케코시를 기록했지만, 같은 해 9월 바쇼에서는 마에가시라 히라막으로서 당시 두 명의 요코즈나인 다카노하나와 아케보노를 쓰러뜨리고 2개의 금별을 획득하는 등 대활약을 펼치며 11승 4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이로 인해 다음 11월 바쇼에서는 고무스비를 건너뛰고 세키와케로 승진했다. 이 시기에는 아직 오이초마게조차 묶을 만큼 머리카락이 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차기 오제키 후보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11월 바쇼 7일차, 대학 선배인 다마카스가와의 경기에서 흙탕물 직전까지 몰아붙이다가 왼쪽 발목에 큰 부상을 입어 도중 휴장했으며, 한 달 이상 입원해야 했다. 이후 1998년 1월 바쇼와 3월 바쇼를 전휴한 뒤 5월 바쇼에 마에가시라 11매에서 복귀했고, 7월 바쇼에서는 다시 더블 금별을 따내며 요코즈나 2명과 오제키 1명을 꺾고 10승을 기록하여 수훈상을 받았다. 이후 순조롭게 반즈케를 올려 같은 해 9월 바쇼에서 산야쿠로 복귀하여 계속해서 가치코시를 기록했다.
2.2. 오제키 등극과 마쿠우치 우승
1999년 3월 바쇼에서 고무스비로서 9승 6패, 5월 바쇼에서 세키와케로서 11승 4패를 기록했지만, 스모 내용상 삼상 후보에서는 제외되었다. '준 홈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아이치현 체육관에서 열린 7월 바쇼는 처음에는 오제키 승진이 기대되는 바쇼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첫날부터 쾌진격하며 7일차에 아케보노를 스쿠이나게로 꺾고, 9일차에는 다카노하나를 호쾌한 하즈오시로 오시다오시시키며 승리했다. 9일차 지타쿠베야(선수 준비실)에서 다카노하나는 "데지마의 다치아이는 요코즈나급"이라고 칭찬하는 코멘트를 남겼다. 데지마는 4일차에 고토니시키와 11일차에 가이오에게 패하여, 데지마에게 패한 아케보노를 한 게임 차로 추격하는 형국이 되었다. 오제키 승진의 기운은 바쇼 종반에 들어서야 높아졌고, 가나자와에서 부모님을 비롯한 대규모 응원단이 찾아온 센슈라쿠에서는 세키와케 도치아즈마를 요리키리로 꺾고 마쿠우치 승진 후 개인 최고 기록인 13승 2패를 기록하며 맺음의 아케보노 경기 결과를 기다렸다. 그 맺음의 경기에서는 같은 헤야의 요코즈나 무사시마루가 스쿠이나게로 아케보노를 꺾었고, 아케보노와의 유쇼 결정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중요한 경기에서 데지마는 다치아이에서 왼쪽으로 피하는 주문 스모를 보여 아케보노를 꺾고 염원하던 마쿠우치 최고 우승을 달성했다. 이 경기에서 요코즈나에게 헨카를 사용한 것에 대해 일부 비판을 받았지만, 그는 훗날 "그때 '우승해서 오제키가 되겠다'고 생각했으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좋은 의미로 잡념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또한 이 바쇼에서는 1992년 1월 바쇼의 다카하나다(훗날 요코즈나 다카노하나) 이후 7년 만에 산쇼 트리플 수상을 달성했다. 바쇼 후 이사회와 반즈케 편성 회의에서 오제키 승진이 결정되었고, 쇼신 덴타쓰시키에서는 "힘의 무사(武士)를 목표로 정진,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그는 1983년 3월 바쇼 후의 아사시오 이후 16년 만에 4번째 학생 스모 출신 리키시의 오제키 승진이었다. 그의 헤야 동료인 무소야마와 미야비야마도 각각 2000년 3월과 5월에 오제키가 되었다. 요코즈나 무사시마루와 함께, 데지마는 헤야 내에 최고 두 랭크에 동료 3명을 두게 되었는데, 이는 스모 선수들이 플레이오프를 제외하고는 같은 헤야 소속 선수와 대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점이었다.
2.3. 오제키 재임 기간과 강등
데지마는 오제키 랭크를 2년간 유지했으며, 2000년 3월 바쇼에서 11승 4패가 최고 성적이었지만, 단 한 번도 최종 유쇼 경쟁에 참가하지 못했다. 2001년 1월 바쇼에서는 오제키로서 처음으로 7승 8패의 가이킨 마케코시를 기록했다. 이 바쇼에서는 연일 도효기와에서 하타키코미를 당하며 패배했다. 첫 가도반으로 맞은 3월 바쇼에서는 센슈라쿠에 아사쇼류를 꺾고 8승 7패로 가치코시하며 간신히 가도반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5월 바쇼에서는 10일차에 다마카스가에게 패하여 2승 8패로 다시 마케코시가 확정되었고, 이 바쇼를 5승 10패로 마쳤다. 두 번째 가도반으로 맞은 7월 바쇼에서는 첫날부터 3연승을 거두었으나 이후 2연패를 기록했고, 봉와직염으로 인한 발열로 응급 입원하게 되어 6일차부터 도중 휴장했다. 이 바쇼에 재출장은 불가능했고, 2개 바쇼 연속 마케코시로 인해 오제키에서 세키와케로 강등이 결정되었다. 이 봉와직염은 의사가 "일반인이라면 죽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으며, 한 달여간의 가료가 필요했다. 입원 중에는 최고 42도의 고열에 시달렸고, 퇴원 후에도 한동안 38도대의 고열에 시달렸다. 이 큰 병에 대해 그는 나중에 오제키 지위에 대한 '패배할 수 없다'는 정신적인 압박감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면역력이 약해졌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2.4. 오제키 강등 이후의 활동

1999년 7월 바쇼 이후 약 2년 만에 세키와케 지위로 내려앉은 2001년 9월 바쇼에서, 그는 10승 이상을 거두어 오제키로 특례 복귀할 것을 걸고 임했지만, 결국 5승 10패로 마케코시했다. 이후에도 2003년 3월 바쇼에서 고무스비, 5월 바쇼에서 세키와케로 복귀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는 거의 히라마쿠 상위에서 스모를 이어갔다. 오제키에서 강등된 후 한동안 봉와직염으로 손상된 다리가 고통스러웠고, 스모 자세에도 끈기가 부족했다.
이 무렵, 후원회 회원 수가 감소하는 등 슬픔도 겪었으며, 나중에 "인간의 냉정함, 무정함, '손바닥 뒤집기'를 배웠다"고 말할 정도였지만, 동시에 계속해서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진정한 팬이자 후원자라는 것을 다시금 배우며 "소중한 것을 재인식할 수 있었다"고도 밝혔다. 또한, 인터뷰 등에서 종종 "요코즈나, 오제키와 대결할 수 있는 반즈케에 있고 싶다"는 등 상위에서 스모를 하는 것에 대한 의욕을 자주 표명했다. 그는 요코즈나, 오제키와도 충분히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실력을 오랫동안 유지했으며, 전 오제키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2003년 1월 바쇼에서는 다카노하나를 꺾고 우승 경쟁에 참여했고, 2003년 3월 바쇼에서는 아사쇼류를 꺾으며 2개 바쇼 연속으로 요코즈나를 이겼다. 2003년 11월 바쇼에서는 주료 강등 위기였지만 힘의 차이를 보여주며 11승을 기록했다. 2004년 9월 바쇼에서는 첫날부터 5연승을 거두며 우승 경쟁에 참여하는 등 컨디션이 좋을 때는 활약하는 바쇼도 있었지만, 2002년 7월 바쇼에서 오른쪽 무릎 인대 손상과 외측 인대 손상으로 도중 휴장했고, 2003년 7월 바쇼에서는 오른쪽 무릎 반월판을 손상하여 전휴했으며, 2004년 11월 바쇼에서는 왼쪽 종아리 근육 파열로 도중 휴장하는 등 부상이 반복되었다. 2004년부터 2006년경에는 다카미사카리처럼 센슈라쿠를 7승 7패로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의 최고의 활약은 2007년에 나타났다. 이 해는 데지마의 활약이 두드러져 부활을 인상 깊게 했다. 서 마에가시라 필두로 맞이한 1월 바쇼는 초반에는 날카로운 발놀림이 돋보여 2일차에 오제키 하쿠호를 오시다시로 꺾었고, 3일차에는 요코즈나 아사쇼류를 도효 아래로 내던지며 압승하여 오제키 강등 후 두 번째, 아사쇼류에게는 첫 금별을 획득했다. 그러나 그 후 상황이 반전되어 두 차례 5연패를 겪으며 4승 11패로 크게 마케코시하여 수훈상을 놓쳤다. 다음 3월 바쇼도 7승 8패로 마케코시했지만, 마에가시라 두 자릿수로 떨어진 5월 바쇼에서는 첫날부터 8연승이라는 개인 최고 기록을 세우며 중일 가치코시를 확정했다. 이 바쇼에서는 12승 3패의 좋은 성적으로, 우승했던 바쇼 이후 무려 47개 바쇼 만에 감투상을 수상했다(전 오제키로서 미야비야마 이후 1년 반 만에 사상 6번째 삼상 수상). 11월 바쇼에서는 중일에 전승을 달리던 치요타이카이를 꺾는 등 활약을 보이며 서 마에가시라 2매에서 10승 5패로 가치코시했다. 삼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지만, 과반수에 단 1표가 부족하여 수상을 놓쳤다.
2008년 1월 바쇼에서는 27개 바쇼 만에 고무스비 복귀를 달성했지만, 3승 12패로 크게 패했다. 이것이 현역 마지막 산야쿠 바쇼가 되었다. 그 후에는 발놀림이 둔해져 하타키코미나 다치아이에서의 헨카가 늘었다. 같은 해 9월 바쇼에서의 가치코시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가치코시하지 못했다. 같은 해 11월 바쇼에서는 첫날부터 6연승을 거두었으나, 이후 9연패를 당하며 6승 9패로 마케코시했다. 2009년 3월 바쇼 첫날 고카이에게 가케나게를 당해 왼쪽 팔부터 떨어지며 팔꿈치를 다쳤다. 휴장하지는 않았지만 완치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스모 인생에 치명상이 되었다.
2.5. 현역 은퇴
마쿠우치 우승으로부터 정확히 10년이 지난 2009년 7월 바쇼에서, 데지마는 첫 11일 동안 9패를 기록한 후 주료 등급으로 강등될 위기에 처하자 현역 경쟁에서 은퇴를 발표했다. 그는 은퇴 기자회견에서 "수년 동안 부상과 고질병과 싸워왔다"고 언급했다. 그는 세키와케 강등 후 오제키로 재승진하지 못하고 만 8년간 48개 바쇼 동안 산야쿠 이하의 마쿠우치에서 스모를 계속했으며, 이는 당시 전 오제키로서는 역대 최장 기록이었다. 하지만 2009년 11월 바쇼에서 미야비야마가 오제키 강등 후 산야쿠 이하 마쿠우치 재임 기간이 49개 바쇼에 달하며 데지마의 48개 바쇼 기록을 깼고, 미야비야마는 이후 2013년 3월 바쇼에서 주료 지위로 은퇴하며 결과적으로 데지마의 기록을 20개 바쇼나 넘어선 68개 바쇼로 역대 최장 기록을 세웠다.
아케보노와는 상성이 좋아서 한때 유쇼 결정전을 포함하여 6연승을 거두는 등 본 시합에서는 6승 6패로 호각이었으며, 유쇼 결정전에서는 아케보노에게 1승을 거두어 총 7승 6패로 앞섰다.
3. 씨름 스타일
데지마는 오시즈모 전문 선수로, 마와시나 벨트를 잡고 싸우기보다는 쓰키오시 (밀치기 및 밀어내기) 기술을 선호했다. 그의 가장 흔한 승리 기술은 오시다시 (밀어내기)였고, 그 다음으로 요리키리 (몰아내기)가 뒤를 이었다. 이 두 기술이 그의 승리 중 약 70%를 차지했다. 그는 던지기 기술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가장 흔했던 기술은 벨트를 잡지 않는 스쿠이나게 (들어던지기)였는데, 이는 그의 승리 중 단 3%에 불과했다.
그는 다치아이에서의 폭발적인 시작으로 유명했으며, 종종 첫 돌진 시 헨카에 취약했다. 그가 요리키리 외에 가장 많이 패배한 기술은 옆으로 피하는 동작의 결과인 하타키코미 (내려치기)였다. 또한 히키오토시 (끌어당겨 쓰러뜨리기)에도 취약했다. 그는 말년에 무릎과 발목 문제로 고생하여 많은 속도와 기동성을 잃었다. 그는 은퇴 기자회견에서 "몇 년 동안 부상과 고질병과 싸워왔다"고 언급하며 이 점을 이야기했다. 그의 빠른 발놀림과 백색 피부는 '하얀 탄환'이라는 별명을 얻게 했으며, 출족이 날카로울 때는 그의 시키나를 따서 "나오는 나오는 데지마"라고 불리기도 했다. 본인도 이를 의식했는지, 2003년 3월 바쇼에서 요코즈나 아사쇼류를 꺾었을 때의 승리 리키시 인터뷰에서 "앞으로도 그렇게 불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다카토오리키는 데지마가 밀치기 스모라기보다는 파워에 의존하지 않는 슬라임처럼 찰랑찰랑한 체질을 활용한 아래에서 밀착하는 요쓰즈모(샅바잡이 스모) 선수였다고 증언했으며, 그런 스모를 당하면 상대방은 때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추적하는 듯한 밀치기가 효과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의 피부는 다른 리키시들에 비해 매우 희고, 앞서 언급된 스모 방식과 관련하여 '하얀 탄환'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미백 붐이 일었을 때는 '미백 리키시'라고도 불렸다. 당시 미용 연구가인 스즈키 소노코로부터 켄쇼를 받은 적도 있다. 그는 "피부가 하얗다고? 아마 스즈키 소노코 씨보다도 하얗겠죠. 미백 화장품 광고 섭외 안 오려나"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4. 개인 생활 및 인물상
데지마는 외동아들이며 취미는 도예, 좋아하는 말은 "흘린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이다. 그는 스모계 내외의 다양한 인물들과 관계를 맺었다. 같은 이시카와현 출신인 도치노나다는 그의 동기이자 어린 시절부터 좋은 라이벌이었다. 또한 학창 시절에는 야나가와도 라이벌로 여겨졌다.
그는 은퇴할 때까지 본명인 데지마 다케하루를 시키나로 계속 사용했다. 오제키 승진 당시 개명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그는 "이대로 갈 것이다. 여러분도 얼굴과 이름이 일치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며 개명을 부정했다. 그는 나가사키현의 데지마와는 무관하며, 현역 시절 자신의 시키나 때문에 나가사키현 출신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5. 은퇴 후 활동

은퇴 후, 데지마는 이미 소유하고 있던 도시요리인 오나루토를 습명하고, 무사시가와 헤야(2010년 9월 30일 후지시마 헤야로 명칭 변경)의 헤야쓰키 오야카타로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그의 공식 단파쓰시키는 2010년 5월 29일 료고쿠 고쿠기관에서 열렸다. 현재 그는 심판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카토오리키의 증언에 따르면, 도시요리 묘세키(명적)인 오나루토는 스승인 무사시가와 오야카타가 "모두가 사지 않으면 네가 사! "라고 말해 데지마가 구매한 것이라고 한다. 유력한 후원회도 없었던 데지마는 3억 엔3.00 억 JPY을 빌려서까지 명적을 구입했다고 한다. 다카토오리키는 "갚을 수 없을 것이다. 꾸준히 갚아도 (은행에서 빌린 구입 대금의) 금리도 높을 것이다"라며 그의 금전적인 어려움을 짐작했다. 이러한 경험은 데지마에게 큰 어려움이었지만, 그는 후에 "인간의 냉정함, 무정함을 배웠지만, 동시에 계속해서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진정한 팬이자 후원자라는 것을 다시금 배우며 '소중한 것을 재인식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며 개인적인 고난을 통해 얻은 교훈을 강조했다.
데지마는 오제키 승진 전달식의 사자로도 여러 차례 동행했다. 2014년 7월 30일 고에이도의 오제키 승진 전달식에서는 같은 이치몬(동문)의 데키야마 이사와 동행하여 사자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2018년 5월 30일 도치노신의 오제키 승진 전달식에서도 동문인 데와노우미 이사와 동행했으며, 2022년 1월 26일 미타케우미의 오제키 승진 전달식에서도 동문인 가스가노 이사와 동행했다. 2023년 7월 26일 호쇼류의 오제키 승진 전달식, 그리고 2025년 1월 29일 호쇼류의 요코즈나 승진 전달식에서도 동문인 사카이가와 이사와 동행하여 사자 역할을 수행했다.
2021년 3월 바쇼 중일 삼단메 경기 도중 낙하한 리키시에 직격당해 오른쪽 눈 부근을 다쳤고, 퇴장하여 료고쿠 고쿠기관 내 스모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는 다음 9일차 경기에는 참가할 예정이었으며, 다카다카와 심판부 부부장은 "본인은 '괜찮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2022년 2월 17일, 일본 스모 협회는 오나루토에게 코로나19 감염이 확인되었다고 발표했다. 시바타야마 홍보부장의 전화 취재에 따르면, 같은 날 발열과 콧물 증상이 있어 검사를 받았고 양성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 외 다른 양성 보고는 없었다.
6. 주요 성적 및 기록
데지마 다케하루는 스모 경력 동안 뛰어난 성적과 여러 우승 및 특별상을 기록했다.
6.1. 경력 통계
- 총 성적: 595승 495패 98휴 (승률 0.546)
- 마쿠우치 성적: 546승 478패 98휴 (승률 0.533)
- 오제키 성적: 100승 71패 9휴 (승률 0.585)
- 마쿠우치 재위 기간: 74개 바쇼
- 오제키 재위 기간: 12개 바쇼
- 산야쿠 재위 기간: 12개 바쇼 (세키와케 5개 바쇼, 고무스비 7개 바쇼)
- 총 (마쿠우치) 연속 가치코시 기록: 16개 바쇼 (1998년 5월 바쇼 ~ 2000년 11월 바쇼)
- 마쿠우치 연속 두 자릿수 승리 기록: 4개 바쇼 (1999년 5월 바쇼 ~ 1999년 11월 바쇼)
6.2. 각 등급 우승 및 특별상
- 마쿠우치 최고 우승: 1회 (1999년 7월 바쇼)
- 주료 우승: 1회 (1997년 1월 바쇼)
- 마쿠시타 우승: 1회 (1996년 5월 바쇼)
- 산쇼: 10회
- 수훈상: 3회 (1997년 9월 바쇼, 1998년 7월 바쇼, 1999년 7월 바쇼)
- 감투상: 4회 (1997년 3월 바쇼, 1998년 5월 바쇼, 1999년 7월 바쇼, 2007년 5월 바쇼)
- 기능상: 3회 (1997년 3월 바쇼, 1997년 9월 바쇼, 1999년 7월 바쇼)
- 금별: 6개
- 아케보노 2개
- 다카노하나 2개
- 와카노하나 1개
- 아사쇼류 1개
6.3. 주요 대결 및 상대 전적
리키시명 | 승수 | 패수 | 리키시명 | 승수 | 패수 | 리키시명 | 승수 | 패수 | 리키시명 | 승수 | 패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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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키야마 | 7 | 0 | 아키노시마 | 14 | 8 | 아케보노 | 6 | 6 | 아사쇼류 | 4 | 16 | |||
아사세키류 | 13 | 5 | 아사노쇼 | 3 | 1 | 아사노와카 | 7 | 1 | 아사히토요 | 3 | 0 | |||
아마 | 2 | 4 | 아미니시키 | 9 | 11 | 아란 | 2 | 1 | 이와키야마 | 8 | 8 | |||
시오마루 | 1 | 1 | 오지 | 4 | 2 | 오기니시키 | 4 | 3 | 가이오 | 15 | 25 | |||
가이호 | 12 | 6 | 가쿠류 | 2 | 4 | 가스가오 | 3 | 4 | 가스가니시키 | 3 | 2 | |||
이와오 | 4 | 0 | 기세노사토 | 6 | 4 | 호쿠토키 | 1 | 0 | 기타자쿠라 | 0 | 1 | |||
기타타이키 | 1 | 0 | 기무라야마 | 2 | 2 | 아사히야마 | 21 | 6 | 아사히텐포 | 10 | 14 | |||
가네카이야마 | 1 | 0 | 고에이도 | 1 | 2 | 고조로 | 1 | 0 | 코카이 | 7 | 9 | |||
고토이나즈마 | 3 | 0 | 코토오슈 | 5 | 9 | 고토카스가 | 0 | 1 | 고토쇼기쿠 | 6 | 6 | |||
고토니시키 | 7 | 3 | 고토노와카 | 19 | 7 | 고토미쓰키 | 9 | 16 | 고토류 | 11 | 6 | |||
사토야마 | 1 | 0 | 시키시마 | 3 | 2 | 시모후지 | 8 | 6 | 주몬지 | 7 | 3 | |||
다이젠 | 2 | 0 | 다이히쇼 | 1 | 0 | 다카토오리키 | 12 | 3 | 다카노쓰루 | 0 | 1 | |||
다카노나미 | 19 | 9 | 다카노하나 | 4 | 13 | 다카노와카 | 6 | 6 | 다카미사카리 | 9 | 7 | |||
고후 | 6 | 3 | 다마카스가 | 19 | 9 | 다마노시마 | 12 | 10 | 다마리키도 | 1 | 2 | |||
다마와시 | 2 | 1 | 치요타이카이 | 14 | 20 | 치요텐잔 | 7 | 3 | 치요하쿠호 | 1 | 3 | |||
테라오 | 3 | 0 | 토가 | 12 | 3 | 도키쓰우미 | 6 | 3 | 도키텐쿠 | 8 | 7 | |||
도사노우미 | 20 | 16 | 도사유타카 | 0 | 1 | 도치아즈마 | 9 | 25 | 도치오잔 | 1 | 2 | |||
도치사카에 | 3 | 5 | 도치노신 | 3 | 4 | 도치노나다 | 24 | 16 | 도치노하나 | 3 | 1 | |||
도치노와카 | 5 | 1 | 도요자쿠라 | 0 | 3 | 도요노시마 | 4 | 9 | 도요히비키 | 6 | 0 | |||
하쿠바 | 0 | 1 | 하쿠호 | 2 | 10 | 하쿠로잔 | 1 | 0 | 하마니시키 | 1 | 0 | |||
하마노시마 | 4 | 1 | 오이카제우미 | 4 | 2 | 바루토 | 0 | 5 | 히고노우미 | 4 | 4 | |||
후텐오 | 4 | 8 | 호치야마 | 1 | 0 | 호마쇼 | 3 | 5 | 호쿠토리키 | 7 | 9 | |||
쇼지 | 1 | 0 | 미스기사토 | 1 | 0 | 미토이즈미 | 1 | 1 | 미나토푸지 | 5 | 0 | |||
야마토 | 1 | 0 | 야마모토야마 | 1 | 2 | 요지 | 1 | 1 | 요시카제 | 4 | 1 | |||
류오 | 2 | 0 | 로호 | 1 | 10 | 와카기린 | 1 | 0 | 와카아라오 | 0 | 1 | |||
와카토바 | 0 | 1 | 와카노사토 | 14 | 18 | 와카노조 | 1 | 0 | 와카노하나 | 2 | 5 | |||
와카노호 | 1 | 0 |
7. 평가 및 유산
데지마 다케하루는 아마추어 챔피언 출신으로 프로 스모에 빠르게 적응하여 오제키까지 승진한 뛰어난 리키시로 평가받는다. 특히 다치아이에서의 날카로운 출족과 강력한 밀치기 스모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1999년 7월 바쇼에서의 마쿠우치 우승과 트리플 산쇼 수상은 그의 경력 중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의 경력은 부상과 오제키 강등 이후의 고난으로 점철되기도 했다. 특히 봉와직염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이로 인한 오제키 강등은 그에게 큰 시련이었다. 오제키 랭크에서 내려온 후 후원회가 감소하는 등 '인간의 냉정함'을 경험했지만, 그는 이를 통해 진정한 지지자를 재확인하고 '소중한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스모계의 후원 시스템과 리키시들의 불안정한 경제적 기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데지마 개인의 강인한 정신력과 인생의 교훈을 얻어내는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오제키 강등 이후에도 끈질기게 마쿠우치에서 활약하며 요코즈나를 꺾는 등 전 오제키로서의 자부심을 지켰다. 그의 오랜 선수 생활과 부상에도 굴하지 않는 투지는 많은 후배 리키시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일본 스모 역사에서 강인한 '밀치기 스모'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은퇴 후에도 오야카타로서 스모계에 헌신하며 후진 양성과 심판 활동을 통해 스모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