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타게 프리티오프 엘란데르(Tage Fritjof Erlander스웨덴어, 1901년 6월 13일 ~ 1985년 6월 21일)는 스웨덴의 저명한 정치인이자 정치가로, 1946년부터 1969년까지 스웨덴 총리와 사회민주당 대표를 역임했다. 그의 23년간의 총리 재임 기간은 스웨덴 역사상 가장 길며, 현대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전례 없는 장기 집권 기록이다. 그는 키가 192 cm로 장신이었기 때문에, 스웨덴어 단어 'lång'이 '길다'와 '키가 크다'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어 '스웨덴에서 가장 긴 총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엘란데르의 재임 기간 동안 스웨덴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복지 국가 중 하나로 발전했으며, 이른바 '스웨덴 모델'은 그 명성과 인지도의 정점에 달했다. 그는 페르 알빈 한손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1946년 10월 예기치 않게 지도자로 부상했으며, 사회민주당이 스웨덴의 지배적인 정당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온건함, 실용주의, 그리고 자기 풍자로 잘 알려진 엘란데르는 광범위한 국유화 시도를 사실상 중단하면서도 보편적 건강 보험, 연금 추가 도입, 공공 부문 성장과 같은 개혁을 추진했다. 1960년대까지 스웨덴의 소득세는 미국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그는 재임 기간 대부분을 사회민주당의 소수 정부를 이끌었으며, 1951년부터 1957년까지는 중앙당(당시 농민연맹)과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외교 정책에서는 초기에 북유럽 국가 간 동맹을 모색했으나 실패했고, 대신 군사비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도 엄격한 중립 정책을 유지했다. 궁극적으로 핵무기 보유를 포기하고 1968년 핵확산 금지 조약에 서명했다. 그의 임기는 전후 경제 팽창기와 맞물려 스웨덴 경제가 세계 10대 강국 중 하나로 성장하는 시기였으며, 이후 G10에 가입했다. 1968년 총선거에서는 사회민주당이 하원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그의 재임 중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다. 엘란데르는 주요 헌법 개혁 과정 중이던 이듬해 총리직에서 사임했으며, 그의 오랜 제자이자 친구인 올로프 팔메가 뒤를 이었다. 그는 1973년까지 국회의원직을 유지했으며, 이후에도 정치적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회고록을 출판했다. 그는 1985년에 사망했다.
2. 생애와 교육
타게 엘란데르는 스웨덴의 복지 국가 건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그의 초기 삶과 교육은 그의 정치적 신념과 실용주의적 접근 방식의 토대가 되었다.
2.1. 어린 시절과 가족 배경

타게 프리티오프 엘란데르는 1901년 6월 13일 베름란드주 란세테르의 한 가정집 2층에서 태어났다. 이 집은 현재 Erlandergården스웨덴어이라는 이름의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그의 부모는 알마 닐손(Alma Nilsson)과 에릭 구스타프 엘란데르(Erik Gustaf Erlander)였다. 에릭 구스타프 엘란데르는 원래 에릭 구스타프 안데르손이라는 이름이었으나, 그의 아버지 안데르스 엘란데르손의 이름을 딴 부칭 성씨를 엘란데르로 변경했고, 그의 아들 타게와 후손들이 이 성씨를 사용했다. 그의 아버지 에릭 구스타프는 교사이자 성가대 지휘자였으며, 1893년 알마 닐손과 결혼했다.
엘란데르에게는 1893년에 태어난 형 얀네 구스타프 엘란데르, 1894년에 태어난 누나 안나 엘란데르, 그리고 1904년에 태어난 여동생 다그마르 엘란데르가 있었다. 그의 친할아버지 안데르스 엘란데르손은 철공소에서 대장장이로 일했으며, 외할아버지는 농부이자 지역 자치 단체의 공무원이었다. 외할머니 쪽으로는 17세기 사보니아 지방에서 베름란드로 이주해 온 숲의 핀란드인 후손이었다.
엘란데르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매우 종교적이었고, 보편적 참정권을 지지했으며, 자유 시장 경제를 옹호하고 노동조합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아버지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으며, 아들이 사회주의 정당 소속으로 의회에 당선된 것에 대해 아버지가 불만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엘란데르 가족은 처음에는 가난했지만, 그의 아버지 에릭 구스타프는 직접 만든 가구를 팔거나 링곤베리를 독일로 수출하여 돈을 벌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엘란데르는 Erlandergården스웨덴어의 2층에서 살았고, 1층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이후 칼스타드의 학교에 진학했으며, 성직자 자녀들을 위한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학업 성적이 우수했다고 전해진다.
2.2. 교육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엘란데르는 말름슬레트의 기관총 공장에서 의무 병역을 수행했다. 1920년 9월, 그의 아버지는 웁살라 대학교보다 학비가 저렴하다고 판단하여 그를 룬트 대학교에 입학시켰다. 룬트 대학교 학생 시절, 엘란데르는 학생 정치에 깊이 관여하며 많은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학생들을 만났다. 그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노출되면서 사회주의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1923년 가을부터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룬트 대학교에서 미래의 아내인 동료 학생 아이나 안데르손을 만났다. 두 사람은 1923년부터 화학과에서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다. 또한 동료 학생이자 미래의 물리학자 토르스텐 구스타프손과 자연 과학을 함께 공부했으며, 구스타프손은 훗날 엘란데르가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핵 문제에 대한 자문 역할을 맡게 된다. 엘란데르는 과학 연구 외에도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베름란드 네이션의 활동적인 회원이었고, 1922년에는 쿠라토르(수석 집행관)로 선출되었다. 1926년에는 룬드 전투 250주년 기념행사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28년 정치학과 경제학 학위를 취득하며 졸업했다.
1928년부터 1929년까지 그는 통신병과에서 의무 병역을 마쳤고, 예비역 중위가 되었다. 엘란데르의 첫 주요 직업은 1928년부터 1938년까지 백과사전 『Svensk uppslagsbok스웨덴어』의 편집진으로 활동한 것이었다. 1930년 타게와 아이나는 결혼했지만,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결혼 제도 자체에 반대했다고 한다. 결혼 후 첫 몇 년 동안 엘란데르는 룬트에서, 아이나는 칼스함에서 일하며 휴일에만 만나는 등 떨어져 지냈다. 그들의 첫째 아들 스벤 베르틸 엘란데르는 1934년 5월 25일 할름스타드에서 태어났고, 둘째 아들 보 군나르 엘란데르는 1937년 5월 16일 룬트에서 태어났다.
3. 초기 정치 경력
엘란데르는 총리직에 오르기 전 다양한 공직을 거치며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다.
3.1. 정치 입문 및 지방 정부 활동
엘란데르는 1928년 사회민주당에 입당했으며, 1930년 룬드 시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빈곤층 주택 개선, 실업률 감소, 새로운 목욕탕 설치 등 시정 개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1938년까지 시의회 의원으로 재직했다.
3.2. 국회의원 및 차관
1932년 총선거에서 그는 의회(Riksdag)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44년까지 피르스타츠크레트센 선거구를 대표했다. 그는 이 시기 동안 정치적 인맥을 쌓았고, 저명한 사회민주당 정치인이자 사회부 장관 구스타프 묄러의 주목을 받았다. 1938년 묄러는 엘란데르를 사회부의 국무비서관으로 임명했다. 엘란데르가 국무비서관이 된 후, 그와 아이나는 자녀들과 함께 스톡홀름으로 이주했다.
1941년, 스웨덴의 인구 위원회가 엘란데르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그는 이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으며, 위원회는 어린이집과 놀이학교에 대한 보조금 및 규제 제안을 내놓았다. 국무비서관으로서 엘란데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스웨덴 내 수용소 설립에 책임이 있는 고위 관리 중 한 명이었다. 이 캠프들은 주로 스웨덴으로 들어오는 난민과 외국인, 억류된 독일 및 연합군 군인(예: 스웨덴에 추락한 조종사)을 수용하고 억류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또한 친소련 공산주의자 및 스웨덴 정치 체제에 적대적이거나 신뢰할 수 없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을 위한 군사 징집을 대체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이들은 군대에 배치되는 대신 인프라 건설을 위한 노동 캠프에 징집되었다. 1970년대에 쓴 그의 회고록에서 엘란데르는 캠프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축소했지만, 언론인 니클라스 센네르테그에 따르면 엘란데르는 자신이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캠프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캠프의 설계와 기능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1942년, 엘란데르와 묄러는 노르웨이-스웨덴 여행자들(롬인의 한 지류)에 대한 전국적인 인구 조사를 시작했다. 이러한 등록 제도의 목적은 스웨덴 하층민들을 보호하여 좌파적 기반을 다지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르웨이에서는 나치 점령 기간에 이러한 리스트가 나치 손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3.3. 한손 내각의 장관
엘란데르는 1944년 페르 알빈 한손 총리의 제2차 세계 대전 연립 내각에 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했으며, 이 직책을 다음 해까지 유지했다. 1944년 총선거 이후, 그는 말뫼후스주를 대표하기 시작했다.
1945년 여름, 한손의 전후 내각의 일환으로 그는 교육 및 교회부 장관이 되었다. 엘란데르가 이 직책에 선택된 것은 교육 정책에 대한 그의 경험 부족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는 스웨덴 교육 시스템에 대한 논쟁에서 파벌적 분열과 연관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엘란데르는 처음에는 이 역할을 수락하는 것에 회의적이었으나, 비록 오래 재직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익숙해졌다.
엘란데르는 교회 관련 문제는 다른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대신 구체적인 교육 개혁에 집중했다. 룬트 대학교에서의 경험에 영향을 받아, 그는 연구 및 고등 교육에 대한 더 큰 투자를 제안했다. 그는 무상 급식과 교과서 제공 법안의 주요 추진자였다. 1945년 10월 29일, 오스트리아-스웨덴 핵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가 엘란데르를 방문하여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이후 스웨덴이 핵물리학 및 기술에 투자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1946년, 묄러는 모든 연금 수령자를 빈곤선 이상으로 끌어올릴 통일된 새로운 연금 제안을 내놓았는데, 엘란데르와 재무부 장관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는 이에 반대했지만,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1945년 사회민주당 당대회에서 페르 뉘스트룀은 스웨덴 학교 교육을 개편하는 동의안을 제출했다. 당대회는 의무 교육 기간을 초등학교까지만 연장해야 한다는 주장과 같이 의무 교육 기간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이러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당대회는 당 집행부에 학교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특별 위원회를 구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위원회는 학생들을 능력별로 분리하는 스트리밍(streaming) 관행에 대해 의견이 나뉘었다.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9년간의 보편적 의무 교육을 요구하는 새로운 학교 프로그램 초안을 완성했으나, 당에 제출되지는 않았다. 1946년, 교육부 장관으로서 엘란데르는 첫 번째 위원회가 여전히 활동 중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위원회인 학교 위원회를 설립했다. 엘란데르가 의장을 맡은 이 새로운 위원회는 주로 임명된 당원들로 구성되었다. 1948년, 엘란데르가 총리가 된 후, 두 번째 위원회 또한 9년간의 의무 교육을 제안했지만, 스트리밍 시작 시기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4. 총리 재임 및 당 대표직
엘란데르의 총리 재임 기간은 스웨덴 역사상 가장 긴 23년으로, 이 기간 동안 그는 스웨덴 복지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이끌었다.
4.1. 총리 및 당 대표직 승계

페르 알빈 한손 총리는 1946년 10월 6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외무부 장관 외스텐 운덴이 후임자가 선출될 때까지 임시 총리직을 맡았다. 한손이 사망했을 때 엘란데르와 그의 아내는 룬드에 있었고, 그랜드 호텔로 돌아왔을 때 국방부 장관 알란 보우트로부터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10월 6일, 한손 내각과 사회민주당 집행위원회는 회의를 열었고, 집행위원회는 10월 9일 전체 당 이사회 회의를 소집했다. 사회민주당 의회 의원단도 마찬가지였다. 엘란데르는 10월 7일에 자신이 총리 및 당 대표로 선출될 가능성을 처음 알게 되었다. 엘란데르 자신은 총리가 되는 것에 소극적이었고 관심이 거의 없었으며, 당의 바람이 충분히 강할 경우에만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10월 9일 회의에서 이사회는 엘란데르가 총리가 되는 것에 대해 15대 11로 찬성표를 던졌고, 의원단은 엘란데르를 당 대표로 선출하는 데 94대 72로 찬성표를 던졌다. 이 선택은 놀랍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일부는 72표를 얻은 구스타프 묄러가 한손의 명백한 후계자라고 믿었고, 묄러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엘란데르의 선택은 젊은 당원들이 젊은 세대의 리더십을 원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한 엘란데르는 사회 및 교육 정책과 같이 사회민주당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분야에서 경험이 있었고,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 간의 협력을 촉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큰 변화의 인물로 여겨졌다.
4.2. 제1차 내각 (1946-1951)
엘란데르는 총리직에 오른 후 첫 내각을 구성하고, 스웨덴 사회의 기반을 다지는 정책들을 추진했다.
4.2.1. 총리 취임과 초기 활동
엘란데르가 총리로 선출된 후, 한손 내각의 모든 각료들은 관례에 따라 사표를 제출했다. 구스타프 5세 국왕은 10월 13일 엘란데르를 만나 새 정부 구성을 요청했다. 엘란데르는 모든 각료들에게 사표를 철회해 줄 것을 요청했다.
드로트닝홀름에서 엘란데르를 만난 구스타프 5세는 그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며, 시대가 어렵고 젊은 남성이 총리직을 맡는 것이 스웨덴에 가장 좋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며, 이념적으로 공화주의자였던 페르 알빈 한손과는 초기에 약간의 의견 불일치가 있었지만, 두 사람(국왕과 엘란데르)은 잘 지낼 것이라고 엘란데르를 안심시켰다.
1948년 선거를 앞둔 2년 동안 엘란데르는 전국 각지의 사회민주당 조직을 방문하여 자신의 지지를 공고히 하고 당 정책을 설명했다. 취임 후 365일 이내에 그는 스톡홀름 외곽에서 70~80회에 달하는 공개 연설을 했다. 사회민주당 신문들은 엘란데르의 연설 행사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비사회주의 신문들은 엘란데르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는데, 처음에는 그를 무의미한 인물로, 그 다음에는 신뢰할 수 없고 영감을 주지 못하는 전술가로 묘사했다. 이러한 인식된 공격은 엘란데르를 당 내에서 더욱 인기 있게 만들었다.
4.2.2. 제1차 내각 구성

엘란데르는 한손으로부터 14명의 장관을 물려받았다. 전반적으로 엘란데르는 각료들에게 많은 자유를 주었으며, 일상적인 업무 조율에 과도하게 개입하기를 원치 않았지만, 그들을 감독했다.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한손의 각료들은 서서히 정부를 떠났다. 상업부 장관 군나르 뮈르달은 소련에 15년 신용으로 기계를 판매하고 스웨덴 크로나를 17% 평가절상하는 등의 정책을 시행했다. 전자의 정책은 전임자가 구상한 것으로, 전후 강력한 무역 파트너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덜 매력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후자의 정책은 스웨덴의 무역 적자를 악화시켰다. 이러한 반발로 인해 그는 1947년에 사임했으며, 엘란데르 정부에서 처음으로 장관직을 떠난 인물이 되었다.
엘란데르는 그의 후임으로 요세프 베이네를 교육 및 교회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1947년, 카린 코크는 스웨덴 역사상 최초로 내각 직책을 맡은 여성이 되었다. 그녀는 무임소 장관이 되었고, 1948년에는 물자부 장관이 되었다. 코크는 의회 의원 울라 볼린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볼린은 훗날 엘란데르의 제3차 내각에서 스웨덴의 세 번째 여성 각료로 재직하게 된다. 코크는 1949년에 장관직을 떠났고, 이듬해 해당 부서는 폐지되었다.
베이네는 1951년 재직 중 사망했으며, 엘란데르는 힐두르 뉘그렌을 그의 후임으로 임명하여 그녀를 스웨덴에서 두 번째로 각료가 된 여성으로 만들었다.
4.2.3. 1948년 총선거

1948년 총선거를 앞두고, 엘란데르가 당 대표이자 총리로서 처음 치르는 선거였기에, 엘란데르의 미래 제자이자 훗날 총리가 되는 잉바르 칼손을 비롯한 많은 사회민주당원들은 당이 패배할 것을 예상했다. 자유인민당은 새로운 지도자 베르틸 올린과 함께 주요 야당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연립 정부 시절, 올린은 한손 내각의 상업부 장관을 역임했지만, 한손의 여러 사회 정책 제안에 반대했다. 엘란데르 정부 기간 동안 그는 전반적으로 사회민주당의 많은 정책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린이 한손 정부에 반대했던 것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은 엘란데르는 자유인민당과 그 지도자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연설과 의회 토론에서 엘란데르는 무책임, 기회주의, 비타협적이라는 비난으로 자유인민당을 자주 공격했다. 엘란데르는 올린을 "뻣뻣하고, 독선적이며, 오만하고, 고압적이며, 원칙이 부족하다"고 보았고, 올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엘란데르를 "회피적이고, 인색하며, 불확실하고, 쉽게 화를 내며, 다소 불공정한 토론자"라고 썼다. 이들의 정치적 경쟁은 현대 스웨덴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우려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은 46.13%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의회(제2원)에서 사회민주당은 총 230석 중 112석을 확보했다. 자유인민당은 22.8%의 득표율로 2위를 차지하며, 가장 큰 승리 중 하나를 거두었다. 엘란데르 자신은 이제 4년간 말뫼후스 대표를 지낸 후 스톡홀름주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 이후 사회민주당은 계속 집권했지만, 장기적인 다수를 유지하기 위해 중앙당(1957년까지 농민연맹으로 불림)과 연립 정부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중앙당은 이를 거절했지만, 협상은 공개적이었으나 비공식적이었기 때문에 엘란데르가 제때 정부를 구성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4.3. 연립 내각 (1951-1957)
엘란데르는 중앙당과의 연립을 통해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도모했으나, 연금 문제로 인해 연립이 해체되는 과정을 겪었다.
4.3.1. 사회주의-중앙당 연립 내각

1951년, 엘란데르는 중앙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그는 그해 4명의 중앙당 인사를 내각에 추가했다. 중앙당 대표 군나르 헤들룬드와의 업무 관계는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엘란데르와 헤들룬드는 일부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달랐지만, 자유인민당과 온건당을 견제하려는 공통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두 당의 유권자 기반 또한 유사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연립 정부 하에서 헤들룬드는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중앙당이 자신들의 인사에게 맡겨야 한다고 요구했던 직책 중 하나는 교육부 장관이었다. 이 직책은 그해 초부터 힐두르 뉘그렌이 맡고 있었다. 엘란데르는 뉘그렌과 잘 지내지 못했고, 협상을 핑계 삼아 그녀를 해임했다. 연립 정부는 1951년 10월 1일에 구성되었다.
4.3.2. 1952년 총선거
1952년 총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46%를 득표하여 이전 선거보다 소폭 감소했다. 중앙당은 10.7%를 얻어 역시 득표율이 감소했다. 자유인민당은 24.4%를 얻어 이전보다 득표율이 증가했다.
4.3.3. 구스타프 6세 아돌프와 하이비 스캔들


엘란데르는 구스타프 5세 국왕 밑에서 4년간 재직했으며, 두 사람은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다. 88세의 구스타프 5세는 엘란데르가 총리직에 올랐을 때 정치적으로 그리 활동적이지 않았다. 1950년, 그의 아버지 사망 후 구스타프 6세 아돌프 황태자가 국왕이 되었다. 엘란데르는 구스타프 6세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때로는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보다 새로운 국왕이 정치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구스타프 6세가 황태자였던 시절, 엘란데르는 그를 "관점이 부족한 다소 뻣뻣한 인물"로 보았다.
1947년, 이전에 동성애 행위 의심으로 여러 차례 체포된 적이 있는 쿠르트 하이비는 구스타프 5세와 성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이전 주장을 포함한 자신의 경험에 대한 회고록을 썼다. 스톡홀름 경찰은 배포를 막기 위해 대부분의 재고를 사들였고, 정부가 이 사건을 담당했다. 엘란데르에 따르면, 내무부 장관 아이에 모스베리는 내각 회의를 "국왕은 동성애자입니다!"라고 시작했고, 이에 비그포르스는 "그 나이에? 얼마나 정력적인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유출된 단 한 권의 사본을 엘란데르가 읽었다. 그는 이 주장을 믿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인 마리아 쇼테니우스스웨덴어에 따르면, 엘란데르는 훗날 그녀에게 "하이비 스캔들"(Haijbyskiten스웨덴어) 때문에 수십 년 동안 고통받았다고 말했다.
4.3.4. 1956년 총선거
1956년 총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44.58%를 득표하여 이전 선거보다 더 큰 폭으로 감소했다. 엘란데르는 한때 이러한 후퇴가 "기독교적 반사회주의 선동" 때문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연립 파트너인 중앙당은 9.45%를 득표했다.
4.3.5. 연금 국민투표와 연립 해체

사회민주당과 중앙당 간의 이념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의 제안된 연금 시스템은 주요 쟁점이었다. 엘란데르는 모든 시민에게 의무적인 시스템을 원했지만, 헤들룬드는 연금이 자발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7년 국민투표에서는 사회민주당, 중앙당, 그리고 우파가 제안한 세 가지 연금 시스템 안이 포함되었다. 사회민주당의 제안이 45.8%의 득표율로 승리했으며, 우파는 35.3%, 중앙당은 15%를 얻었다.
연금 국민투표의 결과로 그해 연립 정부는 해체되었다. 이후 국왕은 정당 간 대화를 주선했으며, 특히 사회민주당이 세 비사회주의 정당과 연립을 구성할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엘란데르는 조각가/정보원으로 임명되었으나, 4당 연립 정부를 구성하는 것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국왕은 그 다음 자유인민당과 온건당을 조각가로 지정하고, 비사회주의 정부 구성을 모색하도록 요청했다. 중앙당은 다른 두 당과의 연립에 참여할 의사가 없다고 밝혀 계획은 실패했다. 따라서 엘란데르는 총리직을 유지하고 다음 선거까지 소수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4.4. 마지막 내각 (1957-1969)
엘란데르의 마지막 내각은 그의 장기 집권의 정점을 보여주며, ATP 연금 시스템 도입과 같은 주요 개혁, 그리고 우측통행 전환과 같은 사회적 변화를 이끌었다.
4.4.1. 제3차 내각과 "소년들"

한손 내각으로부터 물려받은 10개 부처 중 9개 부처는 엘란데르의 총리 재임 기간이 끝날 때까지 존재했다. 3개의 추가 부처가 신설되어, 1968년에는 엘란데르의 마지막 내각이 12개 부처를 갖게 되었다. 총 57명이 엘란데르의 내각에서 봉직했다.
1953년 8월, 엘란데르는 올로프 팔메를 자신의 개인 비서로 고용했다. 1963년, 팔메는 무임소 장관으로 내각에 입성했다. 팔메는 1965년 교통부 장관이 되었고, 1967년에는 교육부 장관이 되었다. 팔메를 시작으로 엘란데르는 타이피스트와 속기사를 포함한 더 많은 개인 비서진을 고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팔메, 잉바르 칼손, 벵트 K. Å. 요한손과 같은 젊은 사회민주당원들로 구성되었다. 1960년대에 엘란데르는 이 젊은 보좌관 그룹을 "소년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엘란데르는 자신이 할 연설에 대해 이 "소년들"과 자주 상의했지만, 올레 스벤닝스웨덴어에 따르면, 그들이 쓴 연설에 만족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4.4.2. 1958년 총선거와 ATP
보편적 연금 시스템을 위한 사회민주당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1958년, 67세 이상의 모든 스웨덴 국민에게 균일한 국가 관리 연금을 제공하는 법안이 제안되었다. 좌파 정당들은 이 법안을 지지했고, 우파 정당들은 반대했다. 이 법안은 117대 111로 부결되었다. 이 패배 후, 엘란데르는 국왕에게 의회를 일시적으로 해산해 줄 것을 요청하고 조기 총선을 요구했다. 이어지는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46.2%를 득표하여 1956년 선거보다 득표율이 증가했다. 이는 스웨덴 역사상 세 번째이자 2024년 현재 마지막 조기 총선이었다.
1959년 봄, 사회민주당의 연금 시스템은 다시 의회에서 표결에 부쳐졌다. 제2원에서는 찬성 115표, 반대 115표로 동수를 기록했다. 자유인민당 소속의 투레 쾨니손은 사회주의자들의 제안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쾨니손은 자신의 당의 연금 계획을 선호했지만, 스웨덴의 노년 노동자들을 위한 안정적인 미래를 원했고, 사회주의자들의 계획이 영구적인 정치적 교착 상태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그의 투표로, 가장 작은 표차로 연금 계획이 통과되었다. 이 시스템은 일반 보충 연금(Allmän tilläggspension스웨덴어) 또는 줄여서 ATP라고 불렸으며, 1960년에 성공적으로 시행되었다.
4.4.3. 1960년 총선거
1960년 총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의 득표율은 47.79%로, 이전 선거보다 또다시 증가했다. 엘란데르는 이 선거를 "이념적 돌파구"라고 묘사했으며, 이를 통해 사회민주당이 추가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4.4.4. 베네르스트룀 스캔들

1963년 6월 20일, 스티그 베네르스트룀 대령은 출근길에 체포되어 첩보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곧 15년 동안 소련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했음을 인정했으며, 나중에 그는 약 160건의 스웨덴 국방 비밀을 소련 정부에 팔아넘긴 것으로 추정되었다. 국방부 장관 스벤 안데르손은 4년 전부터 베네르스트룀에 대한 의심을 통보받았고, 2년 전부터는 개인적으로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외무부 장관 운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엘란데르는 베네르스트룀이 체포된 날까지 의심에 대해 알지 못했다. 운덴의 후임자인 외무부 장관 토르스텐 닐손은 엘란데르가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의 한 식당에서 휴가 중이던 날 전화로 그에게 체포 소식을 알리고 즉시 스웨덴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다.
스웨덴으로 돌아온 후, 정부의 협조 부족에 대한 비판에 대해 엘란데르는 텔레비전에서 "민주 사회에서는 정부가 의심받는 모든 사람에 대해 정보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조치를 취하기 전에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1962년에 베네르스트룀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두 차례 예정되었지만, 첫 번째는 법무부 장관의 병으로 취소되었고, 두 번째는 엘란데르의 일정이 꽉 차서 취소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야당은 의회 조사를 요구했고, 베르틸 올린은 안데르손과 외스텐 운덴의 태만에 대한 불신임안 추진을 이끌었다. 1964년, 의회에서 이틀간의 토론 끝에 안데르손은 중대한 태만 혐의에 대해 무죄로 판명되었고, 올린은 불신임 투표 계획을 철회했다. 동시에 하원은 116대 105로 운덴의 태만 혐의를 무죄로 선언했다. 엘란데르는 불신임 투표를 자신의 내각 전체에 대한 신임 문제로 간주할 것이며, 베네르스트룀의 체포와 재판이 정치적 쟁점이 된 것은 "비극"이라고 말했다.
또한 1964년, 베네르스트룀은 3건의 중대한 첩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계급이 박탈되었으며, 소련 정부로부터 받은 20.00 만 USD 중 9.80 만 USD를 정부에 지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베네르스트룀은 10년 후 가석방 자격이 주어졌고, 1974년에 사면되어 석방되었다. 전체 체포, 재판, 조사, 스캔들은 거의 1년 동안 엘란데르의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4.4.5. 1964년 총선거

1964년 총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47.27%를 득표하여 1960년보다 전체적으로 약간 감소했지만, 이제 제2원에서는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회민주당의 선거 구호는 "이보다 더 잘 살았던 적은 없다"였다. 좌파당(1967년까지 공산당으로 불렸고, 1990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은 그해 더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제2원에서 3석을 추가로 확보(이전 5석 외에)했고, 이전 선거보다 득표율을 높인 유일한 정당이었다.
4.4.6. 교통 전환 (Dagen H)
1955년 국민투표에서 스웨덴의 운전 방향을 좌측통행에서 우측통행으로 변경하는 제안이 나왔다. 국민투표 결과는 압도적으로 이 제안을 거부했으며, 82.9%의 유권자가 반대표를 던지고 15.5%만이 찬성했다. 비록 투표율은 낮았지만, 다음 10년 동안에도 이러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1963년, 의회는 1955년 국민투표에서 대중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우측통행으로 전환하는 데 다수결로 찬성했다. 이는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대해 엘란데르는 "국민투표는 결국 자문적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1963년 의회 투표 이후, 이 프로젝트는 진행되기 시작했다. 당시 교통부 장관이던 올로프 팔메가 이 프로젝트를 감독했으며, 이는 스웨덴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의 운전 표준에 맞추려는 시도로 자주 여겨졌다.
제안된 변경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고, 전환 찬성 정치인들은 이 변경이 교통사고 수를 줄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규모 광고 캠페인이 대중의 의견을 바꾸기 위해 진행되었다. 1967년 9월 3일, Dagen H로 알려진 사건이 발생하면서 스웨덴은 급진적인 변화를 시작했으며, 하룻밤 사이에 약 36만 개의 도로 표지판이 변경되어야 했다. 최종 비용은 8.00 억 KRW를 초과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초기에는 사고 수가 감소했지만, 1969년에는 사고 수가 1967년 이전 수준으로 돌아왔다.
4.4.7. 단원제 의회
1954년, 엘란데르는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을 만나 여러 선거 제도에 대해 논의했다. 처칠은 스웨덴에 소선거구 다수대표제가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엘란데르는 그 제도가 사회민주당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처칠은 "정치가는 자신의 당에 이롭더라도 옳은 일을 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1967년 3월, 스웨덴의 정당들은 마침내 양원제 의회를 직접 선출되는 단원제로 대체하는 데 합의했다. 제1원(상원)은 1968년 5월 17일 117대 13으로 자체 폐지에 찬성표를 던졌다. 의회는 엘란데르가 총리직에서 은퇴한 후인 1971년에 완전히 단원제가 되었다.
4.4.8. 옘틀란드 공화국
1963년, 배우 잉베 감린은 스웨덴 영토 내의 분리 독립 국가인 옘틀란드 공화국의 대통령을 유머러스하게 선언했다. 1967년, 엘란데르는 감린을 하르프순드로 초청했다. 그러나 논의가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자, 감린은 엘란데르의 배인 하르프순드세카스웨덴어의 마개를 훔쳤다.
4.4.9. 1968년 총선거
1968년 총선거는 엘란데르가 총리로서 치른 마지막 선거로, 그의 당은 50.1%를 득표하며 사회민주당이 그의 리더십 아래 거둔 가장 큰 승리를 기록했다. 그들은 또한 확실한 다수당이 되었다. 이 선거는 스웨덴의 마지막 양원제 선거였다.
4.5. 인기 및 대중적 이미지

엘란데르는 처음에는 다소 논란이 많았는데, 부분적으로는 그가 페르 알빈 한손의 명백한 후계자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총리가 되었을 때, 많은 스웨덴인들은 그가 누구인지 몰랐고, 총리 재임 초기에는 정치적으로 한손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것으로 자주 여겨졌다. 그는 처음에는 대학 졸업자라는 이유로 칭찬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비판론자들은 그가 한손만큼 성공하지 못했으며, 전통적인 노동자가 아니라고 보았다. 자유주의 신문들은 엘란데르가 한손보다 더 많은 교육과 행정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에 이로울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의 젊음 또한 칭찬과 우려를 동시에 불러왔다. 그는 젊음과 더 강한 좌파적 이념으로 당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는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는 내각의 여러 구성원들보다 젊었기 때문에 당의 단결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당의 불안정성에 대한 초기 우려에도 불구하고, 엘란데르는 총리 재임 기간 내내 당 내에서 통합적인 인물로 점차 알려졌다. 그는 때때로 좌파적 및 우파적 정책을 모두 활용하는 중도주의자로 여겨지게 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당은 더 좌파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엘란데르의 전국적인 지지는 1960년대에 가장 강했다. 라디오 방송을 할 때 그는 "불쾌한" 목소리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스웨덴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하면서 엘란데르의 상냥하고 유머러스한 성격이 더 잘 드러나 인기가 높아졌다. 역사가 딕 해리슨은 1962년 레나르트 힐란드의 인기 토크쇼 『힐란즈 회르나』에 출연하여 엘란데르가 사제에 대한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 스웨덴 대중 사이에서 그의 인기가 높아지기 시작한 계기라고 언급한다. 또한 그의 인기 상승에는 그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강조가 늘고 대학 시절에 대한 강조가 줄어들면서 "국민의 사람"으로서의 이미지가 개선된 것도 기여했다.
엘란데르의 토론 방식은 논란이 많았고, 작가 스티그 알그렌스웨덴어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비판받았다. 토론 중 엘란데르는 진지한 어조와 코믹한 어조를 오가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그와 토론하는 상대방은 종종 그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좌절감을 느꼈다.
1967년, 스웨덴에서 표준적인 여론조사가 시작되었다. 2월에는 사회민주당원의 65%가 그의 당 리더십을 지지했고, 25%는 불확실했으며, 10%는 그의 리더십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그의 지지율이 77%에 달했고, 1968년 5월에는 84%에 이르렀다. 1968년 총선거 이후, 당 내에서 그의 지지율은 95%에 달했다. 1969년에는 일반 국민의 54%가 그를 총리로서 지지했으며, 80%는 사회민주당 대표로서의 그의 리더십을 지지했다.
엘란데르는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여러 별명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신체적 키(192 cm)와 23년이라는 기록적인 재임 기간을 모두 지칭하는 "스웨덴에서 가장 긴 총리"로 알려졌다(스웨덴어 'lång'은 '길다'와 '키가 크다'는 의미를 모두 가짐). 정치 만화에서는 종종 그의 키를 과장하여 엘란데르를 조롱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그는 사회민주당 내에서 페르 알빈 한손이 "페르 알빈"으로 불렸던 것처럼 "타게"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4.6. 사임 및 의회 은퇴
1969년 10월 1일, 68세의 엘란데르는 총리직에서 사임했으며, 당시 사회민주당은 1968년 이후 제2원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엘란데르의 뒤는 42세의 올로프 팔메가 이었다. 팔메는 더 급진적이고 논란이 많은 인물이었지만, 여러 면에서 엘란데르의 제자이자 후계자였으며, 엘란데르의 지지를 받았다. 팔메는 나중에 엘란데르가 언제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했는지 질문받았을 때,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고 말했다. 팔메가 발표되기 전, 우르호 케코넨 핀란드 대통령은 엘란데르에게 자신의 후계자가 누구인지 물었고, 엘란데르는 구체적인 답을 주지 않았다. 케코넨이 팔메냐고 묻자, 엘란데르는 "절대 아니다, 그는 총리가 되기에는 너무 똑똑하다"고 답했다.
그는 의회가 단원제로 바뀐 후에도 몇 년 동안 의회 의원직을 유지했다. 1970년 총선거 이후, 그는 다시 선거구를 변경하여 22년간 스톡홀름 대표를 지낸 후 예테보리 대표가 되었다. 그는 40년 넘게 의원직을 유지한 후 1973년에 의회에서 은퇴했다.
4.7. 회고록 및 공적 활동
공직에서 물러난 후, 엘란데르와 그의 아내는 사회민주당이 그를 기리기 위해 봄메르스비크에 지은 집에 살았으며, 이 집은 스웨덴 사회민주청년동맹이 소유하고 있었다.
엘란데르는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난 후 개인 문서를 정리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회고록을 집필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1972년 『스벤스카 다그블라데트』에 자신의 동기를 설명하는 글을 기고했다. 회고록은 1972년부터 1982년까지 6권으로 출판되었다. 1980년대에 엘란데르는 작가 올로프 루인스웨덴어에게 자신의 일기장에 대한 무제한적인 접근을 허용했으며, 이는 루인의 엘란데르 전기 집필의 주요 자료가 되었다. 그는 또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 발언했다.
4.8. 사망 및 장례

엘란데르는 1985년 6월 21일 스톡홀름에서 폐렴과 심부전으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엘란데르의 관은 사회주의 깃발과 스웨덴 국기 색깔인 파란색과 노란색 꽃으로 덮였고, 스톡홀름 시내를 가로질러 운구되었다. 약 4만 5천 명의 스웨덴 국민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거리에 줄을 섰다. 스톡홀름에서는 대규모의 세속적인 추모식이 열렸고, 올로프 팔메가 엘란데르의 추도사를 낭독했다. 추모식 말미에는 참석자들이 사회주의 찬가인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스톡홀름 추모식 후, 그의 장례 행렬은 전국을 가로질러 그의 고향인 베름란드 란세테르로 돌아와 최종 안식을 취했다. 1990년에 사망한 그의 아내는 그의 옆에 묻혔다.
5. 국내 정책
엘란데르의 재임 기간 동안 스웨덴은 사회, 경제, 기반 시설 개발 전반에 걸쳐 중요한 정책적 변화를 겪으며 현대 복지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다.
5.1. 복지 국가 발전
엘란데르는 "강한 사회"라는 표현을 만들었는데, 이는 풍요로운 사회가 만들어내는 많은 서비스에 대한 증가하는 수요를 충족시키는 성장하는 공공 부문을 가진 사회를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공공 부문, 특히 복지 국가 기관들은 상당히 성장했지만, 국유화는 드물었다. 광범위한 유권자들의 고용을 유지하고 NATO 비회원국으로서 스웨덴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군대는 크게 확장되어 1960년대에는 인상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핵무기 보유는 특히 스웨덴 사회민주여성연맹의 반발 이후 궁극적으로 포기되었다.
엘란데르 재임 기간 중 스웨덴 복지 국가의 핵심 기둥은 1946년에서 1947년 사이에 제정되었는데, 이 시기는 사회민주당의 "수확기"로 알려져 있다. 1946년과 1947년에는 기본 연금, 일반 아동 수당, 질병 현금 급여를 도입하는 세 가지 주요 개혁이 시행되었다. 국립 주택 위원회는 보조금 대출과 임대료 통제를 제공하는 중앙 기관으로 설립되었으며, 국립 노동 시장 위원회는 국유화된 지역 고용 사무소를 조정하고 노조가 통제하지만 국가가 보조하는 실업 보험 기금을 감독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46년부터 고등 교육을 위한 광범위한 장학금 및 펠로우십 시스템이 제공되었고, 모든 초등 및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무상 급식, 교과서 및 필기구가 제공되었다.
5.2. 주택 정책 (백만 주택 프로그램)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웨덴은 대도시에서 주택 부족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1964년 사회민주당 당대회에서 10년 안에 100만 채의 주택을 건설하는 계획인 백만 주택 프로그램이 채택되었다. 이 제안은 1965년 의회에서 성공적으로 통과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모토는 "모두를 위한 좋은 집"이었다.
1966년, 프로젝트 초기 단계에 토론 중 한 젊은 부부가 스톡홀름에서 아파트를 사고 가정을 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받았다. 엘란데르는 "주택 대기 줄에 서라"고 답했다. 이는 솔직한 답변으로 의도되었지만, 스톡홀름의 아파트 대기 시간이 10년으로 밝혀지면서 인기가 없었고, 그해 지방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의 패배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비판론자들은 백만 주택 프로그램이 일종의 분리를 초래했다고 주장했으며, 최근 증거에 따르면 이러한 주택의 균일성을 만들고 더 고품질의 주택과 분리하는 것이 계획의 일부였다는 점이 드러났다. 1965년, 이러한 비판에 대해 엘란데르는 미국 인종 갈등과 분리가 스웨덴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재현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프로그램을 옹호했다. 엘란데르는 "우리 스웨덴인들은 훨씬 더 축복받은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인구는 인종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면에서도 동질적입니다"라고 말했다. 비판론자들은 또한 새로운 주택이 다소 못생기고 시각적으로 단조롭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만 채 주택 건설 목표는 1974년까지 성공적으로 달성되었으며, 총 1,006,000채의 주택이 건설되어 당시 주택 문제의 대부분을 해결했다. 사회민주당은 결국 지방 선거에서의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다.
5.3. 경제 정책
1947년, 저소득층의 소득세를 인하하고, 상속세를 도입하며, 고소득층의 한계세율을 인상하는 세금 개혁이 단행되었다. 또한 1947년에는 "노인 주택 건설 및 운영 원칙을 규정하는"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1959년, 엘란데르 정부는 최근의 복지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이전에 낮췄던 소득세를 인상할 것을 제안했다. 보수 정당들은 이 제안에 반대했고, 좌파당은 제2원에서 투표를 기권하여 이 제안이 법으로 통과되도록 허용했다.
1962년, 스웨덴은 G10에 가입했으며, 이는 IMF에 각각 60.00 억 USD의 추가 자금을 제공하기로 합의한 10개국 중 하나가 되었다.
1964년, 엘란데르 정부는 그해 7월 1일부터 시작될 새로운 예산을 제안했다. 총 예산은 (1964년 기준으로) 48.58 억 USD로, 이전 예산보다 4.75 억 USD 증가한 금액이었다. 예상 적자는 1.80 억 USD였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엘란데르 정부는 과세 소득에서 노령 연금 수수료 공제를 폐지할 것을 제안했다. 예산의 약 절반은 복지 관련 혜택 및 프로그램에 지출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평균적으로 엘란데르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스웨덴의 GNP는 연간 약 2.5% 증가했다. 1963년에는 5%, 1964년에는 6% 증가했다.
5.4. 사회 정책

엘란데르 재임 기간 동안 스웨덴 복지 국가의 핵심 기둥은 1946년과 1947년 사이에 제정되었는데, 이 시기는 사회민주당의 "수확기"로 알려져 있다. 1946년과 1947년에는 기본 연금, 일반 아동 수당, 질병 현금 급여를 도입하는 세 가지 주요 개혁이 시행되었다. 국립 주택 위원회는 보조금 대출과 임대료 통제를 제공하는 중앙 기관으로 설립되었으며, 국립 노동 시장 위원회는 국유화된 지역 고용 사무소를 조정하고 노조가 통제하지만 국가가 보조하는 실업 보험 기금을 감독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46년부터 고등 교육을 위한 광범위한 장학금 및 펠로우십 시스템이 제공되었고, 모든 초등 및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무상 급식, 교과서 및 필기구가 제공되었다.
1948년, 16세 미만의 자녀를 둔 스웨덴의 모든 사람에게 일반 아동 수당이 지급 가능하게 되었다. 1947년에는 자녀가 있는 가정을 위한 주택 수당이 도입되었다. 1954년에는 연금 수령자를 위한 주택 수당이 도입되었다. 1960년에는 아동 연금의 소득 심사가 폐지되었다. 1950년에는 기존의 병렬 시스템을 대체하는 9년 의무 종합 학교를 구축하기 위한 10년 실험 기간이 설정되었다. 1955년 법률은 시립 직업 학교에 대한 국가 보조금을 제공했으며, 1958년 법률은 성인 교육 센터에 대한 국가 보조금을 제공했다. 1962년에는 9년 종합 학교에 대한 최종 결정이 내려졌고, 10년 동안 시행되었다. 1964년 법률은 상급 중등 학교를 개정했으며, 고등학교(gymnasium)를 보완하기 위해 특별 직업 예비 학교(fackskola스웨덴어)를 도입했다. 1964년 법률은 고등 교육을 확대했으며, 새로운 분산형 대학과 단과대학을 설립했다. 1967년 법률은 시립 성인 교육(vuxenutbildning스웨덴어)을 제정했다. 1955년에는 소득 연동형 의료 보험이 도입되었고, 이듬해 사회민주당은 사회 서비스를 더욱 확대하는 "사회 지원"에 관한 법률을 후원했다. 1962년에는 신생아 어머니에게 6개월 유급 휴가를 제공하는 출산 수당이 도입되었고, 1968년에는 실업 수당 개혁으로 최대 수당 기간이 30주에서 60주로 두 배가 되었다. 또한 휴가, 근로자 안전, 근로 시간에 관한 여러 법률이 도입되었다.
5.5. 핵무기 정책
핵무기를 잠재적 공격을 억지하는 수단으로 삼을 것인가의 문제는 스웨덴 사회와 사회민주당 내에서 계속해서 분열을 일으키는 요인이었으며, 이는 침공 시 개입을 보장하는 미국과의 외교 협정으로 이어졌다. 엘란데르는 처음에는 방어 수단으로서 핵무기 획득을 찬성했지만, 이러한 입장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1954년, 중립 유지를 위해 스웨덴이 핵무기를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한 최고사령관 닐스 스베들룬드의 보고서 이후, 엘란데르는 당이 통일된 입장을 개발하고 야당과 협력할 수 있도록 이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논쟁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이 문제에 대해 분열되었고, 온건당은 핵무기 보유를 공개적으로 추진했다. 엘란데르 당 내에서 가장 큰 반대는 스웨덴 사회민주여성연맹에서 나왔다.
이 문제에 대한 첫 정부 회의는 1955년 11월에 열렸고, 사회민주당은 1956년 2월에 논의를 가졌다. 엘란데르는 반핵 외무부 장관 외스텐 운덴에게 진행 중인 유엔 핵 군축 회담에 대해 논의하도록 했다. 엘란데르는 또한 1958년까지 결정을 연기할 것을 제안했는데, 그에 따르면 정부가 핵무기 보유에 필요한 기술적 전제 조건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 시점에 핵무기를 생산함으로써 군축 회담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운덴의 발표 후, 사회민주여성연맹 의장 잉가 토르손은 자신의 조직이 핵무기에 공개적으로 반대한다고 선언했지만, 이사회는 궁극적으로 엘란데르의 연기 제안을 따랐다.
1959년 3월 의회 토론에서 엘란데르는 핵 정상회담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핵무기를 가진 "제한된 수의 국가들"에 추가되고 싶지 않다는 점을 시사했다. 스웨덴은 1968년 핵확산 금지 조약에 서명하며, 핵무기 개발에 대한 모든 가장을 포기했다. 그러나 일부 핵 원자로는 1994년까지 IAEA에 비밀로 유지되었고, 소규모 이론 물리학자 팀은 엘란데르의 총리 재임 이후에도 핵무기 연구를 계속했다. 일부 국제 관측통들은 엘란데르와 미래의 스웨덴 지도자들이 방어를 위한 가상의 핵 시스템에 대한 관심을 유지했지만, 개발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고 추측했다. 엘란데르의 회고록에 따르면, 스웨덴 군 수뇌부는 헨리 키신저의 정책 옹호에 영감을 받아 "작은 국가의 방어에 적합한 방어 전략"인 제한 핵전쟁을 믿었다고 한다.
6. 외교 정책
엘란데르 재임 기간 동안 스웨덴은 냉전 시대의 복잡한 국제 관계 속에서 중립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주요 국제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6.1. 냉전 시대의 중립과 동맹
엘란데르 재임 기간 동안 스웨덴은 냉전의 도전을 헤쳐나가야 했다. 스웨덴은 공식적으로 미국이나 소련 어느 쪽에도 편들지 않았지만, 스웨덴의 공식 입장은 "중립"이라기보다는 "비동맹"으로 묘사되었으며, 엘란데르는 한때 스웨덴이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과 이념적 친화성"을 공유한다고 언급했다. 스웨덴의 확고한 중립 입장은 엘란데르와 그의 외무부 장관 운덴이 지지했으며, 이들은 사회민주당의 두 주요 인물로 여겨졌다.
엘란데르는 1963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장례식과 1967년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의 장례식을 비롯하여 여러 외국 국가 원수들의 장례식에 스웨덴 대표로 참석했다.
스칸디나비아 방위 동맹을 위한 협상은 1948년에 시작되었으며, 엘란데르와 한스 헤토프트 덴마크 총리가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다. 이 제안은 노르웨이의 반대와 노르웨이가 NATO 가입을 수락하면서 1949년 1월에 무산되었다. 덴마크와 아이슬란드도 뒤를 따랐다. 1952년 엘란데르의 미국 순방 중 그는 스웨덴이 NATO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란데르는 전반적으로 친서방 지도자로 간주되었으며, 미국이 소련에 대한 방어를 위해 군비를 증강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유럽에 큰 봉사를 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1961년, 엘란데르와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서방이 유엔과 그 사무총장인 스웨덴 정치인 다그 함마르셸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엘란데르는 제안된 북유럽 경제 공동체인 노르덱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1969년 우르호 케코넨 핀란드 대통령 및 마우노 코이비스토 총리와 이 문제에 대해 회의를 가졌다.
6.2. 미국과의 관계
스웨덴-미국 관계
1952년, 엘란데르는 미국 순방의 일환으로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을 방문했는데, 이는 스웨덴 총리와 미국 대통령의 첫 만남이었다. 엘란데르는 이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그리고 린든 B. 존슨을 만났다.

1958년, 스웨덴은 남베트남을 인정했다. 1960년 사이공에 외교 관계를 수립했지만, 공식적인 대사를 파견하지는 않았다.
1960년대에 엘란데르와 스웨덴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엘란데르의 개인적인 전쟁 반대 입장과 당시 미국-스웨덴 관계의 불안정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린든 B. 존슨 행정부 시절 미국 대사 윌리엄 워맥 히스는 1967년부터 1968년 초까지 엘란데르가 "완전히 친미적"이었다고 평가했다.
1968년 2월 21일, 올로프 팔메는 스톡홀름에서 북베트남 모스크바 주재 대사 응우옌 토 짠과 함께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는 횃불 시위에 참여했는데, 이 사건은 스웨덴과 미국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전 세계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히스 대사는 "협의"를 위해 소환되었고, 즉시 후임자가 임명되지 않았다. 온건당 대표 잉베 홀름베리는 팔메의 내각 사임을 요구했지만, 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8년 3월까지 스웨덴은 미국에서 온 79명의 징병 기피자를 받아들였고, 엘란데르는 곧 야당 지도자들과 함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6.3. 소련과의 관계
러시아-스웨덴 관계
1950년, 엘란데르는 한국 전쟁을 "세계 평화를 위태롭게 할 폭력 행위"로 규정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략을 비난했다. 스웨덴은 이후 대한민국에 야전 병원을 파견했다. 1952년 6월, 전쟁 중 소련은 스웨덴 군용기 두 대를 격추했는데, 이 사건은 카탈리나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엘란데르와 헤들룬드는 긴장 완화를 위해 1956년 소련 방문을 계획했는데, 이는 스웨덴 총리의 첫 소련 방문이었다. 그러나 엘란데르는 스웨덴 정부가 라울 발렌베리에 대해 수집한 정보를 소련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방문을 취소할 의향이 있었다. 사업가이자 인도주의자인 발렌베리는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된 후 부다페스트 공방전 중 실종되었다. 1952년부터 스웨덴 정부는 발렌베리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소련은 그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방문 중 엘란데르는 소련 총리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발렌베리의 상태에 대해 질문했고, 소련이 발렌베리 실종에 연루되었음을 보여주는 방대한 증거 파일을 제시했다. 흐루쇼프는 이를 검토하고 발렌베리 사건이 종결되면 스웨덴-소련 관계가 긍정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소련 문서에는 발렌베리가 1947년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명시되어 있었지만, 엘란데르, 스웨덴 정부, 그리고 국제 관측통들은 회의적이었다. 발렌베리 전기 작가 잉그리드 칼베리는 소련 해체 후 기밀 해제된 발렌베리에 관한 소련 문서가 존재했으며, 흐루쇼프가 이를 부인했고, 발렌베리의 공식 소련 감옥 카드에는 그가 체포된 죄명이 명시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1959년, 흐루쇼프는 스칸디나비아와 핀란드를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스웨덴 언론과 야당이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여 흐루쇼프는 방문을 "연기"했다. 엘란데르와 운덴은 흐루쇼프의 결정에 실망을 표했고, 흐루쇼프는 모스크바 연설에서 스웨덴 정부가 부정적인 언론 보도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다고 답했다. 엘란데르는 정부가 이러한 의견에 대해 논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불필요하게 중요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이후 반흐루쇼프 성향의 보수당 대표 얄 흐얄마르손을 스웨덴 유엔 대표단에 임명하는 것을 피했다. 미국 방문을 위해 이동 중이던 흐루쇼프는 연기된 방문이 여전히 가능하도록 엘란데르에게 "우정"의 메시지를 보냈다.

1963년, 스티그 베네르스트룀 체포 후, 엘란데르는 이 사건이 스웨덴과 소련 간의 관계를 심각하게 교란했다고 말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1964년에 스칸디나비아 친선 방문을 계획했는데, 이는 베네르스트룀이 종신형을 선고받은 지 10일 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엘란데르는 이 선고가 흐루쇼프의 방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1964년 방문 중, 하르프순드에서 흐루쇼프를 맞이하면서 엘란데르는 흐루쇼프와 그의 통역사를 하르프순드세카라는 이름의 에카 노 젓는 배에 태워 근처 300 yd 길이의 호수를 건넜다. 이후 스웨덴 총리와 외국 국가 원수들이 하르프순드를 방문할 때 하르프순드세카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같은 방문에서 엘란데르는 라울 발렌베리와 관련된 정보를 흐루쇼프에게서 다시 얻어내지 못했다. 흐루쇼프는 발렌베리가 소련에 없다고 계속 부인했고, 엘란데르와 정부는 사건 진전 부족에 대해 "깊은 실망"을 표했다. 흐루쇼프의 방문에 대해 소련 망명자들의 반흐루쇼프 시위가 스웨덴에서 있었고, 스웨덴 언론은 발렌베리 관련 논의와 그를 둘러싼 엄격한 보안(그의 도착 시 경찰 3000명 배치)에 대해 그를 거짓말쟁이라고 비판했다. 흐루쇼프와 엘란데르 모두 방문에 만족했다고 밝혔고, 흐루쇼프는 6월 27일 스칸디나비아 친선 방문의 일환으로 노르웨이로 떠났다. 흐루쇼프는 고별 연설에서 발렌베리 논란이나 자신이 받은 부정적인 언론 보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1965년 소련 방문 후, 엘란데르는 이 사건이 종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 개혁 시행으로 체코슬로바키아와 소련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스웨덴 대중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정부의 반대 입장을 고려할 때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지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정부는 중립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7월, 소련 정치인 알렉세이 코시긴이 스톡홀름을 방문했는데, 이는 자유인민당 대표 스벤 베덴이 엘란데르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자결권을 소홀히 했다고 비난하는 연설을 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엘란데르와 외무부 장관 토르스텐 닐손은 자신들의 신중한 태도에 대한 이유로 베오그라드 주재 대사 아그다 뢰셀의 비밀 보고서를 인용했는데, 이 보고서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지도자들이 서방의 침묵을 원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비록 정부의 대응이 베트남 전쟁 때만큼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이 시작되자 엘란데르, 사회민주당, 그리고 모든 야당은 이를 비난했다. 사회민주당의 침공 반대 입장은 1968년 선거에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6.4. 국제 문제 및 관계
6.4.1.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남아프리카 공화국-스웨덴 관계
1960년대, 엘란데르가 룬트 대학교 학생들에게 연설을 마친 후,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룬트 대학 학생이자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 빌리 모디세는 엘란데르에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경제 제재를 부과해 줄 것을 직접 요청했다. 엘란데르는 자신에게 그럴 권한이 없다고 말했지만, 모디세에게 공개적으로 그 정책을 위해 로비할 것을 조언했다. 올로프 팔메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제재를 옹호했으며, 1963년 엘란데르 내각에 합류한 후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에 대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스웨덴 남아프리카 위원회는 1961년에 설립되었다. 1963년, 스웨덴 청소년 전국 위원회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시작했다. 엘란데르와 팔메는 이 위원회의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남아프리카 국제 방위 및 지원 기금(IDAF)에 대한 스웨덴의 기부금은 약 14.00 만 KRW 증가했다. 1964년 스웨덴이 IDAF에 공공 자금을 기부한 최초의 서방 산업 국가가 되면서(10.00 만 USD에 해당), 그 금액은 계속해서 증가했다. 결국 스웨덴은 단연코 가장 큰 기부국이었다.
6.4.2. 이스라엘과의 관계
이스라엘-스웨덴 관계
1947년, 스웨덴은 유엔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1948년, 스웨덴은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스웨덴은 1951년 이스라엘에 대사관을 설립했다.
1962년, 엘란데르는 이스라엘을 방문한 최초의 스웨덴 총리가 되었다. 그의 방문 중 엘란데르는 사해에서 수영하는 유명한 사진을 찍혔다. 그는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과 대화했다. 엘란데르에 따르면, 구체적인 정책은 논의되지 않았지만, 그는 이번 방문이 이스라엘-스웨덴 관계를 강화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엘란데르는 이 나라에 "매료되었다"고 말했으며, 벤구리온 총리를 스웨덴으로 초청했다. 벤구리온은 그해 말 스웨덴을 방문했다.
7. 말년과 사망
엘란데르는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스웨덴 사회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으며, 그의 회고록은 후대에 그의 삶과 업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7.1. 사임 및 의회 은퇴
사임 후, 엘란데르와 그의 아내는 사회민주당이 그를 기리기 위해 봄메르스비크에 건설한 집에 살았으며, 이 집은 스웨덴 사회민주청년동맹이 소유하고 있었다.
엘란데르는 의회가 단원제가 된 후에도 몇 년 동안 의회 의원직을 유지했다. 1970년 총선거 이후, 그는 다시 선거구를 변경하여 22년간 스톡홀름 대표를 지낸 후 예테보리 대표가 되었다. 그는 40년 넘게 의원직을 유지한 후 1973년에 의회에서 은퇴했다.
7.2. 회고록 및 공적 활동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난 후, 엘란데르는 자신의 개인 문서를 정리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회고록을 집필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1972년 『스벤스카 다그블라데트』에 자신의 동기를 설명하는 글을 기고했다. 회고록은 1972년부터 1982년까지 6권으로 출판되었다. 1980년대에 엘란데르는 작가 올로프 루인스웨덴어에게 자신의 일기장에 대한 무제한적인 접근을 허용했으며, 이는 루인의 엘란데르 전기 집필의 주요 자료가 되었다.
7.3. 사망 및 장례

엘란데르는 1985년 6월 21일 스톡홀름에서 폐렴과 심부전으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엘란데르의 관은 사회주의 깃발과 스웨덴 국기 색깔인 파란색과 노란색 꽃으로 덮였고, 스톡홀름 시내를 가로질러 운구되었다. 약 4만 5천 명의 스웨덴 국민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거리에 줄을 섰다. 스톡홀름에서는 대규모의 세속적인 추모식이 열렸고, 올로프 팔메가 엘란데르의 추도사를 낭독했다. 추모식 말미에는 참석자들이 사회주의 찬가인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스톡홀름 추모식 후, 그의 장례 행렬은 전국을 가로질러 그의 고향인 베름란드 란세테르로 돌아와 최종 안식을 취했다. 1990년에 사망한 그의 아내는 그의 옆에 묻혔다.
8. 이념 및 정치 철학
엘란데르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독특한 접근 방식을 통해 스웨덴의 복지 국가를 건설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의 실용주의적 정치 철학은 그의 리더십을 특징지었다.
8.1. 사회 민주주의와 경제적 견해
엘란데르는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에 익숙하고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마르크스주의를 따르지 않았고 국유화를 지지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잘 규제된 자본주의 하에서 강력한 공공 부문과 사회 복지 프로그램을 믿었다. 그의 대학 연구를 바탕으로, 엘란데르는 케인스주의 경제학과 스톡홀름 학파 경제학이 사회민주주의와 양립 가능하며, 경제 침체를 종식시키는 데 유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많은 좌파 지식인들과 달리, 엘란데르는 소련에 공감하지 않았지만, 스웨덴-소련 관계를 긍정적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8.2. 실용주의와 중도 노선
정치인의 역할에 대해 엘란데르는 "정치인의 임무는 춤추는 마루를 만드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원하는 대로 춤출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엘란데르는 여성이 정치에서 더 큰 역할을 하고 내각 직책을 맡아야 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자신의 내각에서 봉직했던 모든 여성들과 갈등이나 불만을 가졌다.
엘란데르는 온건당 대표 얄 흐얄마르손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흐얄마르손을 "정치적으로 미숙한 인물"로 보았다. 엘란데르는 1968년에 후임 온건당 대표 잉베 홀름베리가 야당의 무질서와 홀름베리의 "어설픔" 때문에 계속 재직하기를 바랐다. 엘란데르는 애들라이 스티븐슨 2세의 저작을 존경했는데, 스티븐슨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능숙하게 자신의 견해를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9. 사생활
엘란데르의 사생활은 그의 공적인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안정적이고 소박했으며, 그의 개인적인 습관과 관심사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9.1. 가족과 결혼

그는 룬트 대학교에서 동료 학생이던 아이나 안데르손을 만났다. 두 사람은 1930년에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깊이 화목하고" "상호 신뢰로 가득하며", 엘란데르의 가족 생활은 "놀랍도록 행복했다"고 묘사된다. 결혼 초 몇 년 동안은 엘란데르는 룬트에서, 아이나는 칼스함에서 일하며 떨어져 지냈고, 휴일에만 만났다. 그들의 첫째 아들 스벤 베르틸 엘란데르는 1934년 5월 25일 할름스타드에서 태어났고, 둘째 아들 보 군나르 엘란데르는 1937년 5월 16일 룬트에서 태어났다. 스벤은 수학자로, 2001년부터 아버지의 일기 내용 대부분을 출판했다. 엘란데르의 어머니 알마는 1961년, 아들이 총리로 재임 중이던 92세에 사망했다.
엘란데르는 그의 핀란드 조상 중 한 명인 시몬 라르손(본명 카우토이넨, 1605년경~1696년)을 통해 2014년부터 2021년까지 스웨덴 사회민주당 총리를 지낸 스테판 뢰벤과 먼 친척 관계이다.
칼 아우구스트 비칸데르는 1953년 하르프순드를 스웨덴 정부에 총리들을 위한 시골 휴양지로 기증했다. 엘란데르는 그해부터 이곳을 휴가용 별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모든 총리들이 이 관행을 이어오고 있다. 엘란데르와 그의 아내는 종종 크리스마스, 부활절, 주말, 그리고 여름 휴가를 하르프순드에서 보냈다. 그의 경력 대부분 동안 엘란데르 가족은 스톡홀름 브롬마의 한 아파트에 살다가 1964년 여름 스톡홀름의 감라 스탄 지구에 있는 고층 아파트 단지로 이사했다. 경력 초기에 엘란데르는 자동차를 이용하는 대신 지하철로 출퇴근했지만, 결국 그와 아이나는 자동차를 구입했다. 아이나는 보통 그를 직장까지 태워다 주었는데, 엘란데르는 운전면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나가 그를 태워다 줄 수 없을 때는 브롬마의 이웃들이 보통 그를 태워다 주었다. 엘란데르는 공식적인 의전 차량이 없었으며, 방문하는 외국 국가 원수들은 그가 보통 혼자 행사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놀라곤 했다.
엘란데르는 헌신적인 일기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종종 매일 일기를 썼고, 그의 일기는 회고록의 주요 자료가 되었다. 엘란데르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썼으며, 처음에는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일들, 예를 들어 사건, 논쟁, 결정 등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썼고, 논란이 될 만한 문제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기록했다. 그는 또한 가족, 당시 건강 상태, 본 연극과 읽은 책,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상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해 기록했다. 엘란데르는 나중에 자신의 일기에 과장이 많다고 자주 언급했다.
잉바르 칼손은 2023년에 "권력에 의해 완전히 타락하지 않은 사람을 그 외에는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권력은 쉽게 타락하고, 이득을 취하려 하지만, 타게는 대신 겸손하고 감사하며 일을 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엘란데르는 종종 "아버지 같은" 또는 "삼촌 같은" 인물로 묘사되었다. 잉바르 칼손은 엘란데르가 자신에게 제2의 아버지나 길잡이와 같았다고 말했다. 전기 작가 해리슨과 루인은 엘란데르가 다른 어떤 스웨덴 지도자보다 오래 집권했지만, 스스로 권력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언급하며, 칼손도 이를 인정했다.
엘란데르는 문학과 연극을 열렬히 사랑했으며, 이는 종종 오락의 원천이 되었다. 엘란데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존 스타인벡의 『캐너리 로』였다. 많은 동시대 스웨덴 작가들은 자신들의 총리가 자신들의 작품을 읽었다는 사실에 종종 놀라곤 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엘란데르는 종종 자신의 모교인 룬트 대학교를 방문하여 베름란드 학생회 회원들을 만났다. 이 회의 중 하나에서 학생회 회원인 올로프 루인스웨덴어과 라르스 베리크비스트스웨덴어는 엘란데르가 룬트 학생들에게 매년 연설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엘란데르는 이에 동의했다. 그는 총 14번의 학생 연설을 했다.
10. 유산과 평가
엘란데르의 장기 집권은 스웨덴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스웨덴 복지 국가의 설계자이자 국민적 통합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10.1. 스웨덴 복지 국가의 설계자
엘란데르는 23년 동안 총리직을 역임하며 스웨덴 역사상 최장수 총리가 되었다. 그의 중단 없는 정부 수장 재임 기간은 현대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가장 길다. 엘란데르의 가장 가까운 보좌관 중 두 명인 올로프 팔메와 잉바르 칼손 또한 스웨덴 총리가 되었으며, 이들의 재임 기간을 합하면 40년이 넘는다.


그의 사망 시, 『워싱턴 포스트』는 엘란데르를 "가장 인기 있는 정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묘사했다. 엘란데르는 스웨덴의 정치 지형을 변화시키고 국가를 통합시킨 "정치적 거인"으로 불린다. 그는 팔메, 다그 함마르셸드와 같은 다른 스웨덴의 주목할 만한 "정치적 거인"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전기 작가 딕 해리슨과 언론인 페르 올로프 엔크비스트는 엘란데르를 "국부"(landsfader스웨덴어)라고 묘사했다. 루인은 1970년대 스웨덴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향수가 때때로 엘란데르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지도자 시절이 스웨덴 역사의 "황금기"로 여겨지기도 했다고 언급한다.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특히 자유인민당과 온건당이 낮은 세금을 지지하는 등 정당 간 의견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의 주요 정당들은 스웨덴을 복지 국가로 발전시키는 목표에 대해 점점 더 동의하기 시작했다.
10.2. 비판과 역사적 평가
일부 보수 및 자유주의 분석가들은 엘란데르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스웨덴이 사실상 일당제 국가가 되었다는 인식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올로프 팔메의 비판론자들은 팔메가 총리직에 오르는 데 엘란데르가 역할을 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일반적으로 1970년대 스웨덴의 경제 위기 이후, 스웨덴 모델과 어느 정도는 엘란데르의 총리 재임 기간이 더 면밀히 조사되었다.
누시 다드고스타르 좌파당 대표는 2022년 엘란데르를 칭찬하며, 그를 스웨덴 복지 국가의 토대를 마련한 개혁을 통과시킨 영감의 원천으로 언급했다.
11. 기념 및 추모
엘란데르의 유산은 그의 이름을 딴 기관과 장소를 통해 스웨덴 사회에 계속해서 기억되고 있다.
11.1. 엘란데르가 박물관
엘란데르의 어린 시절 집이자 학교였던 란세테르의 건물은 현재 그와 그의 삶을 중심으로 한 엘란데르가든스웨덴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1.2. 타게 엘란데르 과학기술상
스웨덴 왕립 과학원이 수여하는 타게 엘란데르 과학기술상은 자연 과학, 기술, 수학 분야의 연구 업적에 수여되는 상으로, 엘란데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2. 수상 경력
엘란데르는 생전에 여러 중요한 영예를 받았으며, 국제적인 인정 또한 받았다.
엘란데르는 1971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수상하지는 못했다. 그는 1984년 일리스 쿼럼 훈장을 받았다.
13. 대중 문화
엘란데르는 스웨덴의 대중문화에서 여러 차례 묘사되며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 2013년 코미디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엘란데르는 스웨덴 배우 요한 레보리가 연기했다.
- 2021년 하이비 스캔들을 다룬 시리즈 『엔 쿵리 아파르스웨덴어』에서 엘란데르는 스웨덴 배우 에밀 알멘이 연기했다.
- 2022년 넷플릭스 시리즈 『클라크』에서 스웨덴 범죄자 클라크 올로프손의 삶을 다룰 때, 엘란데르는 스웨덴 배우 클라에스 말름베리가 연기했다.
14. 저작
- Levande stad스웨덴어 (1959)
- Arvet från Hammarskjöld스웨덴어 (1961)
- Tage Erlander 1901-1939스웨덴어 (1972)
- Tage Erlander 1940-1949스웨덴어 (1973)
- Tage Erlander 1949-1954스웨덴어 (1974)
- Tage Erlander 1955-1960스웨덴어 (1976)
- Tage Erlander 1960-talet스웨덴어 (1982)
- Tage Erlander Sjuttiotal스웨덴어 (1979)
- Dagböcker 1945-1949스웨덴어 (2001,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
- Dagböcker 1950-1951스웨덴어 (2001,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
- Dagböcker 1952스웨덴어 (2002,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
- Dagböcker 1953스웨덴어 (2003,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
- Dagböcker 1954스웨덴어 (2004,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
- Dagböcker 1955스웨덴어 (2005,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
- Dagböcker 1956스웨덴어 (2006,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
- Dagböcker 1957스웨덴어 (2007,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
- Dagböcker 1958스웨덴어 (2008,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
- Dagböcker 1959스웨덴어 (2009,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
- Dagböcker 1960스웨덴어 (2010,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
- Dagböcker 1961-1962스웨덴어 (2011,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
- Dagböcker 1963-1964스웨덴어 (2012,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
- Dagböcker 1965스웨덴어 (2013,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
- Dagböcker 1966-1967스웨덴어 (2014,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
- Dagböcker 1968스웨덴어 (2015,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
- Dagböcker 1969스웨덴어 (2016, 스벤 엘란데르와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