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키르기스스탄은 중앙아시아의 내륙국으로, 산악 지형이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공식 국명은 키르기스 공화국이며, 수도는 비슈케크이다. 키르기스인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며, 우즈베크인과 러시아인이 주요 소수 민족이다. 키르기스어와 러시아어가 공용어로 사용된다. 이슬람교가 주요 종교이다. 키르기스스탄의 역사는 고대 유목 민족으로부터 시작되어 몽골 제국, 코칸트 칸국,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거쳤으며, 20세기에는 소련의 구성 공화국이 되었다.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을 선언한 이후, 민주주의로의 전환 과정에서 튤립 혁명, 2010년 혁명, 2020년 시위 등 여러 차례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정치 체제는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이며, 경제는 농업과 광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풍부한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관광 산업 발전 잠재력도 가지고 있다. 전통 문화로는 영웅 서사시 《마나스》와 이동식 전통 가옥인 유르트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주변국과의 관계에서는 러시아, 중국 등 강대국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한편,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연대도 모색하고 있다.
2. 국명

키르기스스탄의 공식 국명은 키르기스 공화국(Кыргыз Республикасы크르그즈 레스푸블리카스키르기스어, Кыргызская Республика키르기스카야 레스푸블리카러시아어)이다. 일반적으로 키르기스스탄(Кыргызстан크르그즈스탄키르기스어, Кыргызстан키르기스탄러시아어)이라는 명칭이 통용되며, 이는 공식적으로도 인정되는 약칭이다. 과거 러시아어로는 Киргизия키르기지야러시아어로도 불렸다.
'키르기스'라는 명칭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튀르크어로 '40'을 의미하는 кырк크르크키르기스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이는 키르기스 민족의 영웅 서사시 《마나스》에 등장하는 40개의 부족 또는 씨족을 통합한 것을 상징한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키르기스'는 '40개의 부족' 또는 '우리는 40(의 부족)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석된다.
'-스탄'은 페르시아어 접미사로 '땅' 또는 '나라', '~이 많은 곳'을 의미한다. 따라서 키르기스스탄은 '키르기스인의 땅'이라는 뜻이 된다. 키르기스스탄 국기 중앙에 있는 40줄기의 햇살은 이 40개의 부족을 상징하며, 태양 중심부의 문양은 전통적인 이동식 가옥인 유르트의 꼭대기 나무 구조물인 түндүк툰두크키르기스어를 형상화한 것이다.
1991년 독립 당시 공식 국명은 키르기스어로 Кыргызстан Республикасы크르그즈스탄 레스푸블리카스키르기스어였으나, 1993년 헌법 개정을 통해 현재의 Кыргыз Республикасы크르그즈 레스푸블리카스키르기스어로 변경되었다. 한국어에서 '키르기스스탄' 또는 '키르기스'라는 명칭은 러시아어 발음 Киргиз키르기스러시아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3. 역사
키르기스스탄 지역의 역사는 고대 유목 민족의 활동부터 시작하여 여러 제국의 지배와 민족 이동을 거쳐 현대의 독립 국가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지리적으로 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하여 동서 문명의 교류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3.1. 고대와 중세

키르기스 민족의 조상은 고대부터 시베리아 남부 예니세이강 상류 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튀르크계 민족으로, 중국 문헌에서는 '견곤(堅昆)' 또는 '격곤(黠戛斯)' 등으로 기록되었다. 초기 키르기스인들은 흉노, 돌궐, 위구르 제국 등의 지배를 받으며 유목 생활을 영위했다. 특히 840년, 키르기스인들은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예니세이강 유역에 키르기스 카간국을 세워 일시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도 했다. 이 시기 키르기스인들은 중앙아시아의 톈산산맥 일대까지 진출하여 약 200년간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했다.
민족 서사시 《마나스》는 9세기에 흩어져 있던 부족들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한 영웅 마나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이는 키르기스 민족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서사시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키르기스 유목민들의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10세기 이후 키르기스인들은 점차 남하하기 시작했으며, 12세기에는 몽골족의 팽창으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어 알타이산맥과 사얀산맥 일대로 활동 범위가 축소되었다.
3.2. 몽골 제국과 그 이후

13세기에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이 부상하면서, 키르기스인들은 1207년 평화적으로 몽골 제국에 복속되었다. 이후 키르기스 지역은 몽골 제국의 여러 왕조와 그 후계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 이식쿨호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경유지로 동서양의 상인, 무역상, 여행자들이 거쳐 가는 교역로 역할을 했다.
몽골 제국의 세력이 약화된 후, 15세기에는 티무르 제국의 영향권에 속하기도 했다. 16세기경부터 키르기스 민족은 현재의 키르기스스탄 영토로 대거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7세기에는 몽골계 오이라트 부족, 18세기 중반에는 청나라의 만주족, 19세기 초에는 우즈베크계 코칸트 칸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으며 외부 세력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1842년, 키르기스 부족들은 코칸트 칸국으로부터 벗어나 오르몬 칸을 중심으로 카라-키르기스 칸국을 결성하기도 했으나, 1854년 오르몬 칸이 사망한 후 칸국은 해체되었다.
3.3.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시대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은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했다. 현재 키르기스스탄 영토의 동부, 주로 이식쿨주 지역은 타르바가타이 조약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러시아 제국에 할양되었다. 1876년, 키르기스 지역은 '키르기지야(Киргизия)'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제국에 공식 편입되었다. 러시아의 지배는 키르기스인들의 여러 차례 봉기를 야기했으며, 많은 키르기스인들이 파미르고원이나 아프가니스탄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특히 1916년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통치에 반발하여 일어난 1916년 봉기가 진압되면서 많은 키르기스인들이 중국으로 피난했다. 당시 국경이 유동적이었기 때문에, 목초지를 찾거나 압제를 피해 산을 넘어 인접 국가로 이동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1919년 이 지역에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고,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내에 카라-키르기스 자치주가 설립되었다. '카라-키르기스'라는 명칭은 1920년대 중반까지 러시아인들이 키르기스인을 카자흐인(당시 '키르기스'라고도 불림)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했다. 신경제정책(NEP) 시기를 거치며 소비에트 정부는 표준화된 조세 제도를 도입하려 했고, 유목 생활을 억제하기 위해 유목민에게 더 높은 세금을 부과했으며, 중앙아시아 지역을 5개 민족 공화국으로 분할했다.
1936년 12월 5일,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의 정식 구성 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소비에트 시대에 키르기스스탄은 문화, 교육, 사회생활 면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고, 문맹률이 크게 개선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에서는 키르기스 민족 정체성에 대한 강조가 있었으나, 동시에 전통적인 부족 중심의 사회 구조는 근대 국가 개념과 상충한다는 이유로 억압되기도 했다. 1920년대 말부터 시작된 5개년 계획은 산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추진했으며, 거대한 콜호스(집단 농장)가 설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 정착민들이 좋은 목초지를 차지하면서 기존 유목민들은 척박한 토지에 정착해야 했고, 이는 큰 고충을 야기했다. 이러한 변화는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1928년부터 1932년 사이에는 수동적 저항과 게릴라 반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지역은 집단화로 인해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사망자를 겪었다.
1980년대 후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 초기에는 키르기스스탄의 정치 환경에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언론은 다소 자유로운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되었고, 작가 동맹에 의해 '리테라투르니 키르기스스탄'이라는 새로운 출판물이 발행되기도 했다. 비공식 정치 단체는 금지되었으나, 1989년 심각한 주택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몇몇 단체는 활동이 허용되었다.
1989년 소련의 마지막 인구 조사에 따르면, 북부 도시 프룬제(현 비슈케크) 주민 중 키르기스인은 22%에 불과했고, 60% 이상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등 슬라브족이었다. 수도 인구의 거의 10%는 유대인이었다.
1990년 6월, 남부 오시주에서는 우즈베크인이 소수 민족을 이루는 지역에서 우즈베크인과 키르기스인 간의 민족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우즈베크 집단 농장을 주택 개발용으로 징발하려는 시도가 오시 폭동을 촉발하여 18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비상사태와 통행금지가 선포되었고, 같은 해 10월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키르기스 민주 운동(KDM)은 의회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는 정치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1990년 12월 15일, 최고 소비에트는 공화국 명칭을 키르기스스탄 공화국으로 변경하기로 의결했다. 이듬해 1월 아카예프는 새로운 정부 구조를 도입하고 젊은 개혁 성향의 정치인들로 구성된 새 내각을 임명했다. 1991년 2월, 수도 프룬제의 명칭은 혁명 이전 이름인 비슈케크로 환원되었다.
이러한 독립을 향한 정치적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현실은 소련으로부터의 분리독립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듯했다. 1991년 3월 소련 유지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88.7%가 소련을 "새로운 연방"으로 유지하는 제안을 승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독립 세력은 같은 해 8월 키르기스스탄의 독립을 강행했다.
1991년 8월 19일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모스크바에서 권력을 장악했을 때, 키르기스스탄에서 아카예프를 축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쿠데타가 일주일 후 실패하자 아카예프 대통령과 게르만 쿠즈네초프 부통령은 소련 공산당 탈당을 선언했고, 전체 정치국과 서기국도 사임했다. 이어 1991년 8월 31일 최고 소비에트는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국호를 키르기스스탄 공화국으로 정했다.

2013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키르기스 국민의 62%는 소련 붕괴가 자국에 해를 끼쳤다고 답했으며, 단지 16%만이 붕괴가 이익이 되었다고 답했다.
3.4. 독립과 현대
1991년 10월, 아스카르 아카예프는 단독 출마하여 직접 투표로 95%의 득표율을 얻어 신생 독립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다른 7개 공화국 대표들과 함께 경제 공동체 조약에 서명했다. 1991년 12월 8일,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은 벨라베자 조약에 서명하여 1922년 소련 창설 조약을 폐기하고 소련의 종식과 독립국가연합(CIS) 창설을 선언했다. 1991년 12월 21일, 키르기스스탄은 다른 4개 중앙아시아 공화국들과 함께 알마아타 의정서에 합의하여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몰도바, 우크라이나와 함께 CIS에 공식 가입했다. 마침내 키르기스스탄은 1991년 12월 25일 완전한 독립을 얻었고, 다음 날인 12월 26일 소련은 해체되었다. 1992년 키르기스스탄은 유엔(UN)과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에 가입했다. 1993년 5월 5일, 새 헌법 채택에 따라 공식 국호가 '키르기스스탄 공화국'에서 키르기스 공화국으로 변경되었다.
키르기스스탄은 매년 8월 31일을 1991년 독립 선언 기념일로 지정하여 독립기념일로 경축한다. 독립 이후 키르기스스탄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언론 매체를 만들고 적극적인 정치적 반대파를 육성하는 등의 발전을 이루었다.

2005년 3월 의회 선거 이후 "튤립 혁명"으로 알려진 봉기가 일어나 2005년 4월 4일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이 사임했다. 야당 지도자들은 연립 정부를 구성했고,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대통령과 펠릭스 쿨로프 총리 하에 새 정부가 수립되었다. 시위 과정에서 수도는 약탈당했다.
정치적 안정을 찾기는 어려웠으며, 조직범죄와 연계된 것으로 알려진 여러 집단과 파벌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했다. 2005년 3월에 선출된 75명의 의원 중 3명이 암살되었고, 또 다른 의원은 살해된 형의 의석을 보궐선거에서 차지한 직후인 2006년 5월 10일에 암살되었다. 이들 4명 모두 주요 불법 사업에 직접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2010년 4월 6일, 탈라스 시에서 정부 부패와 생활비 증가에 반대하는 시위 이후 시민 불안이 발생했다. 시위는 폭력적으로 변해 다음 날 비슈케크까지 확산되었다. 시위대는 바키예프 대통령의 사무실과 국영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국을 공격했다. 몰도무사 콩간티예프 내무장관이 구타당했다는 상반된 보도가 있었다. 2010년 4월 7일, 바키예프 대통령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경찰과 특수 부대는 많은 야당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이에 대응하여 시위대는 수도 비슈케크의 내부 보안 본부(구 KGB 본부)와 국영 텔레비전 채널을 장악했다. 키르기스스탄 정부 관리들의 보고에 따르면, 수도에서 경찰과의 유혈 충돌로 최소 75명이 사망하고 458명이 입원했다. 최소 80명이 경찰과의 충돌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전 외무장관 로자 오툰바예바(키르기스스탄 사회민주당)가 이끄는 과도 정부가 2010년 4월 8일까지 수도의 국영 언론과 정부 시설을 장악했지만, 바키예프는 사임하지 않았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잘랄아바트의 자택으로 돌아가 2010년 4월 13일 기자회견에서 사임 조건을 밝혔다. 2010년 4월 15일, 바키예프는 부인과 두 자녀와 함께 출국하여 이웃 국가인 카자흐스탄으로 망명했다. 국가 임시 지도자들은 바키예프가 출국 전에 공식 사임서에 서명했다고 발표했다.
다니아르 우세노프 총리는 러시아가 시위를 지원했다고 비난했으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이를 부인했다. 야당 의원들은 또한 미군이 통제하는 마나스 공군기지의 폐쇄를 요구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키르기스스탄 내 러시아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러시아 시설 주변의 보안을 강화하여 잠재적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지시했다.
2010년 남부 키르기스스탄 민족 분규는 2010년 6월 11일 국내 제2의 도시인 오시에서 주요 두 민족인 우즈베크인과 키르기스인 사이에 발생했다. 이 충돌은 국가가 내전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임시 지도자 오툰바예바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러시아 군대의 파병을 요청하여 국가 상황 통제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공보 비서관 나탈리야 티마코바는 서한에 대한 답변에서 "이는 내부 분쟁이며 현재로서는 러시아가 해결에 참여할 조건이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충돌로 인해 식량 및 기타 필수품 부족 사태가 발생했으며, 2010년 6월 12일 기준으로 2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685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어려움에 처한 국가에 인도적 지원을 보낼 것이라고 밝혔다.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두 지역 갱단 간의 충돌이 있었고 폭력 사태가 도시 전체로 확산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또한 군대가 도시에 진입하는 키르기스 민족 갱단을 지원했다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폭동은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정부는 남부 잘랄아바트 지역 전체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임시 정부는 보안군에게 특별 사살 권한을 부여했다.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오툰바예바는 바키예프 가족이 "폭동을 선동했다"고 비난했다. AFP 통신은 "연기 장막이 도시 전체를 뒤덮었다"고 보도했다. 이웃 국가인 우즈베키스탄 당국은 최소 3만 명의 우즈베크인이 폭동을 피해 국경을 넘었다고 밝혔다. 2010년 6월 14일 오시는 비교적 평온해졌지만, 잘랄아바트에서는 산발적인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우즈베크인들이 폭도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집을 떠나기를 꺼려하면서 전체 지역은 여전히 비상사태 하에 있었다. 유엔은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임시 정부의 부수장인 테미르 사리예프는 지역적 충돌이 있었으며 정부가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폭력을 억제할 충분한 보안군이 없다고 덧붙였다. 2010년 6월 14일 언론 기관들은 러시아 정부가 키르기스 정부의 요청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6월 14일)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긴급회의가 열려 폭력 종식을 돕는 데 있어 CSTO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논의했다.
키르기스 정부에 따르면 2010년 6월 15일까지 민족 폭력은 줄어들었고, 로자 오툰바예바 키르기스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폭력 진압을 위해 러시아가 군대를 파견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6월 15일까지 최소 170명이 사망했지만,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파스칼 메이게 바그너는 (공식적인) 사망자 수가 과소평가되었다고 말했다. 유엔 고등 판무관은 제네바에서 기자들에게 증거에 따르면 폭력이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우즈베크 민족은 보호 보장을 받지 못하면 오시의 석유 저장고를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 유엔은 이번 공격이 "조직적이고, 표적화되었으며, 잘 계획된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키르기스 관리들은 언론에 잘랄아바트 폭력 사태의 배후로 의심되는 인물이 구금되었다고 말했다.
2010년 8월 2일, 키르기스 정부 위원회는 충돌의 원인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전 국회의장 압디가니 에르케바예프가 이끄는 국가위원회 위원들은 오시 주 카라수 구의 마디, 샤르크, 키질키슈타크 등 주로 우즈베크 민족이 거주하는 마을 사람들을 만났다. 여러 민족 대표들을 포함한 이 국가위원회는 대통령령으로 설립되었다.

로자 오툰바예바 대통령은 또한 2010년 8월에 충돌을 조사하기 위해 국제위원회가 구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위원회는 광범위한 조사를 수행하고 보고서(2010년 6월 남부 키르기스스탄 사건에 대한 독립 국제 조사위원회(KIC))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사건 발생 두 달 전에 권력을 장악한 임시 정부는 남부 키르기스스탄의 민족 간 관계 악화를 인지하지 못했거나 과소평가했다"고 밝혔다. KIC는 "임시 정부는 보안군이 시민 불안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적절히 훈련되고 적절히 장비를 갖추도록 보장할 책임이 있었지만"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2021년 4월 말, 물 분쟁이 1991년 독립 이후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 사이의 가장 심각한 국경 충돌 중 하나로 확대되었다.
2022년 9월, 포격 사용을 포함한 무력 충돌이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 국경 대부분을 따라 발생했다.
2015년, 키르기스스탄은 카자흐스탄과의 국경에서 관세 통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한 후 유라시아 경제 연합(EAEU)의 정회원국이 되었다. 다른 회원국으로는 구소련 공화국인 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아르메니아가 있다.
2017년 10월, 현직 대통령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의 지지를 받은 전 총리 소론바이 젠베코프가 키르기스스탄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외교 정책에서 그는 크렘린을 국가의 "주요 전략적 파트너"로, 중국을 "중요한 전략적 및 무역 파트너"로 보았지만, 유럽 파트너들과 더 협력적인 양자 관계를 추구할 의향이 있었다. 2019년 8월 7일, 키르기스스탄 특수부대는 전 대통령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의 거주지에 대한 작전을 개시했는데, 이는 그에 대한 부패 혐의에 근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키르기스스탄 안보리 회의에서 젠베코프 대통령은 아탐바예프가 헌법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2020년 10월, 소론바이 젠베코프 대통령은 2020년 10월 4일 의회 선거의 부정으로 인한 시위 이후 사임했다.
2021년 1월,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한 사디르 자파로프가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21년 4월, 국민투표에서 대다수 유권자가 대통령에게 새로운 권한을 부여하여 대통령의 권력을 크게 강화하는 새 헌법을 승인했다.
4. 지리
키르기스스탄은 중앙아시아의 내륙국으로, 카자흐스탄, 중국,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을 접한다. 국토는 북위 39도에서 44도, 동경 69도에서 81도 사이에 위치한다. 바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나라 중 하나이며, 모든 강은 바다로 흘러가지 않는 내륙수계로 유입된다. 국토의 80% 이상이 톈산산맥의 산악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고도 불리며, 나머지는 계곡과 분지로 구성되어 있다.
4.1. 지형과 기후

키르기스스탄은 국토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 지형이다. 주요 산맥으로는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있는 톈산산맥과 남서부의 파미르-알라이산맥이 있다. 중국과의 국경을 이루는 칵샬-투 산맥에 위치한 젱이시 초쿠스(7439 m)가 최고봉이며, 지질학자들은 이 봉우리를 세계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7000 m 이상의 봉우리로 간주한다. 겨울철 폭설은 봄철 홍수로 이어져 하류 지역에 심각한 피해를 주기도 한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수력 발전에 이용된다. 경작지는 국토의 8% 미만으로 북부 저지대와 페르가나 분지 가장자리에 집중되어 있다.
기후는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남서부의 저지대인 페르가나 분지는 아열대 기후로 여름에는 매우 덥고 기온이 40 °C까지 올라간다. 북부 구릉지대는 온대 기후이며, 톈산산맥 지역은 고도에 따라 건조한 대륙성 기후에서 한대 기후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장 추운 지역에서는 겨울 기온이 약 40일 동안 영하로 떨어지며, 일부 사막 지역에서도 이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눈이 내린다. 저지대의 기온은 1월에 약 -6 °C에서 7월에 약 24 °C 사이이다.
키르기스스탄에는 7개의 육상 생태계가 있다: 톈산산맥 아고산 침엽수림, 알라이-서톈산 스텝, 기사르-알라이 소림, 톈산 구릉 건조 스텝, 파미르 고산 사막 및 툰드라, 톈산 아고산 스텝 및 초원, 중앙아시아 북부 사막. 2019년 산림경관 완전성 지수 평균 점수는 8.86/10으로, 172개국 중 세계 13위를 기록했다.
4.2. 주요 호수와 강

키르기스스탄 북동부 톈산산맥에 위치한 이식쿨호는 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큰 호수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산정호수이다(첫 번째는 티티카카호). 이식쿨은 키르기스어로 "따뜻한 호수"를 의미하며, 염분 때문에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주요 강으로는 나린강이 있으며, 이 강은 서쪽으로 흘러 페르가나 분지를 거쳐 우즈베키스탄으로 들어간다. 우즈베키스탄 국경을 넘으면 또 다른 주요 강인 카라다리야강과 합류하여 시르다리야강을 형성한다. 시르다리야강은 원래 아랄해로 흘러들었으나, 현재는 상류에서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남부 카자흐스탄의 목화밭 관개용으로 물을 끌어다 써서 바다에 이르지 못한다. 추강 또한 키르기스스탄을 잠시 거쳐 카자흐스탄으로 흘러 들어간다.
가장 낮은 지점은 카라다리야강으로 해발 132 m이다.
4.3. 월경지와 위요지
키르기스스탄에는 자국의 월경지와 타국의 위요지가 존재한다.
페르가나 분지 내에는 키르기스스탄의 작은 마을인 바라크(인구 약 627명)가 우즈베키스탄 영토에 둘러싸인 월경지 형태로 존재한다. 이 마을은 키르기스스탄 오시에서 우즈베키스탄 호자바드로 가는 길에 있으며, 키르기스-우즈베크 국경에서 북서쪽으로 약 4 km 떨어져 안디잔 방향에 위치한다. 바라크는 행정적으로 키르기스스탄 오시 주 카라수구에 속한다.
키르기스스탄 영토 내에는 4개의 우즈베키스탄 위요지가 있다. 그중 두 곳은 소흐구와 샤히마르단이다. 소흐는 면적이 325 km2이고 1993년 기준 인구는 42,800명(일부 추산으로는 70,000명까지 증가, 99%가 타지크인, 나머지는 우즈베크인)이다. 샤히마르단(샤이마르단, 쇼히마르돈 또는 샤이마르단으로도 알려짐)은 면적이 90 km2이고 1993년 기준 인구는 5,100명(91%가 우즈베크인, 나머지 9%는 키르기스인)이다. 나머지 두 곳은 총카라(길이 약 3 km, 폭 약 1 km)와 장기아일(겨우 2 km에서 3 km 너비의 작은 땅)이라는 작은 영토이다. 총카라는 소흐강 연안, 우즈베크 국경과 소흐 위요지 사이에 있다. 장기아일은 바트켄에서 동쪽으로 약 60 km 떨어진 할미온 근처 키르기스-우즈베크 국경의 북쪽 돌출부에 있다.
또한 키르기스-타지크 국경에는 타지키스탄에 속하는 두 개의 위요지, 즉 보루흐와 로라조르가 있다. 보루흐의 면적은 95 km2에서 130 km2 사이이며, 인구는 23,000명에서 29,000명 사이로 추정되며, 95%가 타지크인이고 5%가 키르기스인이다. 17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스파라에서 남쪽으로 약 45 km 떨어진 카라프신강 우안에 위치한다. 로라조르(서부 칼라차 또는 카이라가치)는 키르기스 철도역인 카이라가치 근처의 작은 정착지이다.
5. 정치
키르기스스탄의 정치 체제는 민주 공화국으로, 권력 분립 원칙에 따라 대통령, 의회, 사법부로 구성된다. 독립 이후 여러 차례의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정치 시스템에 변화가 있었다.
5.1. 정부 구조


1993년 채택된 초기 헌법은 키르기스스탄을 민주 공화국으로 규정했다. 행정부는 대통령과 총리로 구성되며, 의회는 단원제이다. 사법부는 대법원, 지방 법원, 검찰 총장으로 구성된다.
2002년 3월, 남부 악시구에서 야당 정치인의 자의적 체포에 항의하던 5명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면서 전국적인 시위가 촉발되었다.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은 광범위한 정부, 시민, 사회 대표들이 참여하는 공개 대화를 포함하는 헌법 개혁 과정을 시작했고, 이는 2003년 2월 투표 부정으로 얼룩진 국민투표로 이어졌다. 국민투표에서 승인된 헌법 개정안은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의회와 헌법재판소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2005년 2월 27일과 3월 13일에 75석의 새로운 단원제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의회 선거가 치러졌으나, 부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후의 시위는 2005년 3월 24일 유혈 사태 없는 쿠데타로 이어졌고, 아카예프는 가족과 함께 국외로 도피했으며 쿠르만베크 바키예프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2005년 7월 10일, 바키예프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통령 선거에서 88.9%의 득표율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8월 14일에 취임했다. 그러나 새 행정부에 대한 초기 대중의 지지는 이후 몇 달 동안 현저히 감소했는데, 이는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국가를 괴롭혔던 부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명백한 무능력과 여러 국회의원들의 살해 사건 때문이었다. 2006년 4월과 11월 비슈케크에서 바키예프 대통령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며, 야당 지도자들은 대통령이 헌법 개혁과 대통령 권한의 상당 부분을 의회로 이양하겠다는 선거 공약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2010년 4월 봉기로 다시 한번 혁명이 일어났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아들 막심 바키예프와 형제 자니시 바키예프 등 친척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도피한 후 벨라루스로 망명했다.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된 로자 오툰바예바는 201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11월에 치러진 선거에서 키르기스스탄 사회민주당의 당수인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 총리가 승리하여 2011년 12월 1일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오무르베크 바바노프는 같은 날 총리로 임명되어 2011년 12월 23일에 인준되었다.
2017년 10월, 현직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의 지지를 받은 전 총리 소론바이 젠베코프가 키르기스스탄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20년 10월, 소론바이 젠베코프 대통령은 2020년 10월 4일 의회 선거의 부정으로 인한 시위 이후 사임했다.
2021년 1월,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한 사디르 자파로프가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21년 4월, 국민투표에서 대다수 유권자가 대통령에게 새로운 권한을 부여하여 대통령의 권력을 크게 강화하는 새 헌법을 승인했다. 이로써 키르기스스탄은 대통령제 국가로 회귀하였다.
의회인 조고르쿠 케네시는 단원제로, 의석 수는 2021년 헌법 개정으로 120석에서 90석으로 줄었다.
5.2. 주요 정당 및 정치 동향

키르기스스탄은 다당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독립 이후 여러 정당들이 활동해왔다. 주요 정당으로는 키르기스스탄 사회민주당, 아타주르트 키르기스스탄당, 부툰 키르기스스탄당, 메켄칠당 등이 있다. 정치 지형은 유동적이며, 정당 간의 연합과 분열이 잦은 편이다.
최근 정치 동향은 사디르 자파로프 대통령 취임 이후 대통령 권한 강화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2021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 중심제로 회귀하였으며, 이는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우려를 낳기도 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이 발표하는 민주주의 지수에서 키르기스스탄은 2020년까지 "혼합 정치 체제"로 분류되었으나, 자파로프 대통령 취임 이후인 2021년부터는 순위가 하락하여 "권위주의 체제"로 분류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은 부패 인식 수준이 높은 국가 중 하나로, 2016년 부패인식지수는 100점 만점에 28점을 기록했다.
5.3. 인권
키르기스스탄은 민주주의 지수에서 "혼합 정권"으로 분류되며, 2020년 167개국 중 107위를 차지했다. 2021년 프리덤 하우스의 세계 자유 보고서에서는 100점 만점에 28점으로 "자유롭지 않음"으로 평가받았으며, 이는 2020년 39점으로 "부분적으로 자유로움"으로 평가받았던 것에서 하락한 수치이다.
보다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많은 인권 침해가 발생하고 있다. 2010년 남부 키르기스스탄 폭동 이후 수십 명의 저명한 우즈베크 종교 및 지역사회 지도자들이 보안군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이 중에는 언론인이자 인권운동가인 아짐잔 아스카로프도 포함되어 인권 단체들의 우려를 샀다. 아스카로프는 2010년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2017년 1월 키르기스 법원은 그의 종신형을 재확인했다.
2013년 6월에는 "도덕성 향상과 유전자 풀 보존"을 목적으로 23세 미만 여성이 부모나 보호자 없이 해외여행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이 키르기스 의회를 통과했다. 2014년 10월에는 키르기스 의원들이 동성애 권리 운동가와 "비전통적 성관계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조성하는 언론인 등에게 징역형을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미국 외교관들의 우려를 표명하게 했다.
2024년 2월, 독립 탐사보도 언론기관인 클룹이 키르기스 법원에 의해 폐쇄 명령을 받았다. 이 조치는 국내외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키르기스스탄은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회원국으로, OSCE 참여국으로서 국제적 약속은 미국 헬싱키 위원회의 권한 하에 감시를 받는다. 2008년 12월, 국영 방송 KTRK는 자유유럽방송 프로그램의 사전 제출을 요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KTRK는 2008년 10월 선거를 다룬 '불편한 질문들'이라는 RFE/RL 프로그램을 방송하지 못한 지 일주일 만에 RFE/RL 프로그램 재송신을 중단했으며, 누락된 자료를 분실했다고 주장했다. 바키예프 대통령은 2008년 9월 이 프로그램을 비판했고, KTRK는 RFE/RL에 프로그램 내용이 너무 부정적이라고 말했다. 국경 없는 기자회는 키르기스스탄을 언론 자유 지수 173개국 중 111위로 평가하며 이 결정을 강력히 비판했다.
6. 행정 구역
키르기스스탄은 7개의 주(облустар오블루스타르키르기스어)와 2개의 공화국 중요 도시(수도 비슈케크와 제2의 도시 오시)로 구성된다. 주는 다시 44개의 구(аймактар아이마크타르키르기스어)로 나뉜다. 구는 농촌 정착지(айыл өкмөтү)와 관련 지방 자치 단체가 없는 마을을 포함하는 최하위 행정 단위인 농촌 구역으로 더 세분화된다.
각 주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아킴(주지사)이 관할하며, 구의 아킴은 주지사가 임명한다.

주와 공화국 중요 도시는 다음과 같다. 각 주의 주도는 괄호 안에 표기했다.
# 비슈케크 (공화국 중요 도시)
## 레닌구
## 옥탸브르구
## 페르보마이구
## 스베르들로프구
# 밧켄주 (밧켄)
## 밧켄구
## 카담자이구
## 레일레크구
# 추이주 (비슈케크)
## 알라무둔구
## 추이구
## 자일구
## 케민구
## 모스크바구
## 판필로프구
## 소쿨루크구
## 이식아타구
# 잘랄아바트주 (잘랄아바트)
## 악시구
## 알라부카구
## 바자르코르곤구
## 찻칼구
## 노켄구
## 수자크구
## 토구즈토로구
## 톡토굴구
# 나린주 (나린)
## 악탈라구
## 앗바시구
## 줌갈구
## 코치코르구
## 나린구
# 오시주 (오시)
## 알라이구
## 아라반구
## 총알라이구
## 카라쿨자구
## 카라수구
## 노카트구
## 외즈괸구
# 탈라스주 (탈라스)
## 바카이아타구
## 카라부라구
## 마나스구
## 탈라스구
# 이식쿨주 (카라콜)
## 악수구
## 이식쿨구
## 제티외귀즈구
## 통구
## 튀프구
# 오시 (공화국 중요 도시)
7. 국방 및 치안
키르기스스탄의 국방은 키르기스 공화국군이 담당하며, 국내 치안은 내무부 소속 경찰과 국가보안위원회가 주도한다. 독립 이후 군 현대화와 국경 안보 강화에 주력하고 있으며, 주변국 및 국제기구와의 군사 협력도 진행하고 있다.
7.1. 군사
키르기스 공화국군은 소련 붕괴 이후 창설되었으며, 육군, 공군, 국내군, 국가방위군, 국경수비대로 구성된다. 과거에는 비슈케크 인근 마나스 국제공항의 마나스 환승센터를 미군이 2014년 6월까지 임대하여 사용했으나, 최근 몇 년간 러시아와의 관계를 발전시켜 11.00 억 USD 상당의 현대화 협정을 체결하고 러시아군과의 합동 훈련에 더 많이 참여하는 등 러시아와의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국가보안위원회(ГКНБ)는 군과 협력하며 소련 시절의 KGB와 유사한 임무를 수행한다. 산하에 "알파"로 알려진 정예 대테러 특수부대를 두고 있으며, 이는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등 다른 구소련 국가에서도 사용되는 명칭이다. 경찰은 국경수비대와 함께 내무부의 지휘를 받는다.
7.2. 치안
키르기스스탄의 치안 상황은 독립 이후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여러 도전에 직면해왔다. 주요 범죄 유형으로는 절도, 강도, 마약 밀매 등이 보고되며, 특히 국경 지역에서의 마약 밀매는 심각한 문제로 인식된다. 2010년 남부 민족 분규와 같은 사건들은 특정 지역의 치안 불안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부는 경찰력 강화, 범죄 예방 프로그램 운영, 국제 사회와의 협력을 통해 치안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부패 문제와 자원 부족은 여전히 효과적인 치안 유지의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최근에는 관광객 증가에 따라 관광 경찰 도입 등 관광객 안전 확보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8. 대외 관계
키르기스스탄은 독립 이후 지정학적 위치와 경제적 필요에 따라 다각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해왔다. 러시아, 중국 등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한편, 서방 국가 및 국제기구와의 협력도 모색하고 있다.
8.1. 주요 주변국 및 국제 관계


키르기스스탄은 전통적으로 러시아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러시아는 키르기스스탄의 주요 전략적 파트너로 간주되며,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와 유라시아 경제 연합(EAEU)의 회원국으로서 러시아 주도의 지역 안보 및 경제 협력 체제에 참여하고 있다. 러시아는 키르기스스탄에 군사 기지를 두고 있기도 하다.
중국은 키르기스스탄의 중요한 경제 파트너이자 이웃 국가이다. 중국은 일대일로 구상을 통해 키르기스스탄의 인프라 건설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으며, 양국 간 교역량도 상당하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 확대에 대한 경계심과 부채 문제 등이 제기되기도 한다.
중앙아시아 이웃 국가들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이들 국가와는 경제, 문화 교류뿐만 아니라 국경 문제, 수자원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안고 있다. 특히 타지키스탄과는 국경 미획정 지역에서 간헐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키르기스스탄은 유엔,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상하이 협력 기구(SCO), 이슬람 협력 기구(OIC), 튀르크 국가 기구 등 다양한 국제기구의 회원국으로 활동하며 국제 사회에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8.2. 대한민국과의 관계
대한민국과 키르기스스탄은 1992년 1월 31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양국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을 발전시켜왔다. 대한민국은 키르기스스탄에 정부개발원조(ODA)를 제공하며 경제 발전을 지원하고 있으며, 키르기스스탄에는 고려인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어 양국 관계의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주요 협력 분야로는 농업, 섬유, 관광, 정보통신기술(ICT) 등이 있으며, 교육 및 인적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비슈케크에는 주키르기스스탄 대한민국 대사관이, 서울에는 주한 키르기스 공화국 대사관이 각각 설치되어 있다.
9. 경제
키르기스스탄 경제는 독립 이후 시장 경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현재도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풍부한 광물 자원과 농업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내륙국이라는 지리적 한계와 정치적 불안정 등이 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9.1. 경제 구조 및 주요 산업
키르기스스탄 경제에서 농업은 여전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노동 인구의 상당수가 농업에 종사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밀, 보리, 감자, 사탕무, 목화, 담배, 과일 등이 있으며, 양, 소, 말 등 축산업도 활발하다. 특히 양모와 육류, 유제품은 주요 생산품이다.
광업은 키르기스스탄 경제의 핵심 동력 중 하나이다. 금 매장량이 풍부하여 금 수출이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쿰토르 금광은 세계적으로도 규모가 큰 금광 중 하나이다. 이 외에도 석탄, 안티모니, 수은, 우라늄 등 다양한 광물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야금 산업도 중요한 산업 부문이다.
제조업 부문은 상대적으로 발달이 미약하며, 주로 농산물 가공, 섬유, 의류 등이 중심을 이룬다. 서비스업, 특히 관광업은 성장 잠재력이 높은 분야로 평가받는다.
키르기스스탄은 구소련 국가 중 9번째로 가난한 나라였으며, 현재는 이웃 타지키스탄 다음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이다. 인구의 약 22.4%가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국제 통화 기금(IMF), 세계은행, 아시아 개발 은행 등 주요 서방 대출 기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독립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주로 소련 무역 블록의 해체와 그에 따른 시장 상실로 인해 공화국이 수요 경제로 전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출을 줄이고 대부분의 가격 보조금을 종료했으며 부가가치세를 도입했다. 전반적으로 정부는 시장 경제로의 전환에 전념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 안정과 개혁을 통해 정부는 장기적이고 일관된 성장 패턴을 확립하고자 한다. 이러한 개혁은 1998년 12월 20일 키르기스스탄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으로 이어졌다.
러시아에서 일하는 약 80만 명의 키르기스 이주 노동자들의 송금은 경제에 기여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송금액은 감소했다. 코로나19 범유행은 서비스, 송금,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키르기스 경제에 상당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9.2. 무역
키르기스스탄의 주요 수출품은 비철금속 및 광물(특히 금), 양모 제품 및 기타 농산물, 전력, 일부 공학 제품 등이다. 주요 수입품은 석유 및 천연가스, 철금속, 화학제품, 대부분의 기계류, 목재 및 종이 제품, 일부 식품, 일부 건설 자재 등이다.
주요 교역 상대국은 독일, 러시아, 중국,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이다. 2013년 중국이 일대일로 구상을 시작한 이후, 중국은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키르기스스탄에서 다수의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헤리티지 재단의 경제 자유 지수에서 키르기스스탄은 78위를 차지했다.
9.3. 관광업


키르기스스탄의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는 이식쿨호이다. 호수의 북쪽 해안을 따라 수많은 호텔, 리조트, 숙박 시설이 위치해 있다. 가장 인기 있는 해변 지역은 촐폰아타 시와 카라오이(돌린카), 보스테리, 코룸두와 같은 인근 정착지이다. 2006년과 2007년에는 호수를 찾는 관광객 수가 연간 백만 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 지역의 경제적,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최근 몇 년 동안 그 수가 감소했다.
이 외에도 톈산산맥과 파미르고원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한 산악 관광, 트레킹, 승마 관광 등이 발전 가능성이 높은 분야로 꼽힌다. 실크로드 유적지와 유목 문화 체험도 관광객들에게 매력적인 요소이다. 정부는 관광 산업을 국가 경제의 중요한 성장 동력으로 인식하고 인프라 개선 및 홍보에 노력하고 있다.
10. 교통
키르기스스탄의 교통은 국토 대부분이 산악 지형이라는 점 때문에 심각한 제약을 받는다. 도로는 가파른 계곡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며, 해발 3000 m 이상의 고개를 넘어야 하고, 잦은 산사태와 눈사태의 영향을 받는다. 외딴 고지대 지역의 겨울철 여행은 거의 불가능하다.
소련 시대에 건설된 많은 도로와 철도 노선이 현재 국경으로 단절되어 있어, 통과 시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국경 절차를 거쳐야 하거나 아예 폐쇄된 경우도 추가적인 문제이다. 말은 특히 농촌 지역에서 여전히 많이 사용되는 교통수단이다. 키르기스스탄의 도로 기반 시설이 광범위하지 않기 때문에 말은 자동차가 갈 수 없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으며, 비싼 수입 연료도 필요하지 않다.
10.1. 도로 교통

아시아 개발 은행의 지원으로 수도 비슈케크에서 남서부의 오시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가 최근 완공되었다. 이는 북부의 추이강 계곡과 남부의 페르가나 분지라는 두 주요 인구 중심지 간의 소통을 상당히 용이하게 했다. 이 도로의 한 지선은 3500 m 고개를 넘어 북서부의 탈라스 계곡으로 이어진다. 현재 오시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 건설 계획이 수립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의 총 도로 길이는 약 3.40 만 km이며, 이 중 포장 도로는 약 2.26 만 km(일부 전천후 자갈 포장 도로 포함), 비포장 도로는 약 7700 km(1990년 기준, 안정화되지 않은 흙길로 우천 시 통행 곤란)이다.
10.2. 철도 교통

북부의 추이 계곡과 남부의 페르가나 분지는 중앙아시아 소련 철도 시스템의 종착점이었다. 구소련 국가들의 독립 이후, 행정 경계에 관계없이 건설되었던 철도 노선들은 국경에 의해 단절되었고, 그로 인해 교통량이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키르기스스탄 내의 짧은 철도 노선(총 약 370 km, 1520 mm 광궤)은 타슈켄트, 알마티 및 러시아 도시들과 같은 중심지로 향하는 이전의 대량 화물 운송이 없어지면서 경제적 가치가 거의 없다.
2022년, 발릭치에서 카라케체까지 기존 철도를 186km 연장하는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주로 카라케체 탄광에서 비슈케크까지 석탄을 운반하기 위한 것이다. 2023년 6월에는 발릭치와 비슈케크를 잇는 철도가 공식 개통되었다.
2022년에는 중국-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 철도(CKU) 523km 건설 계획이 발표되었으며, 이는 중국 내 213 km, 키르기스스탄 내 260 km, 우즈베키스탄 내 50 km로 구성된다.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의 일환으로 구상된 이 철도는 카슈가르에서 토루가르트 고개를 거쳐 잘랄아바트로, 더 나아가 우즈베키스탄 도시 안디잔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건설은 2025년 7월에 시작될 예정이다.
주변 국가와의 철도 연결 현황
이웃 국가 | 철도 연결 여부 | 철도 연결 명칭 | 궤간 참고 |
---|---|---|---|
카자흐스탄 | 예 | 비슈케크 지선 | 동일 궤간 |
우즈베키스탄 | 예 | 오시 지선 | 동일 궤간 |
타지키스탄 | 아니요 | - | 동일 궤간 |
중국 | 아니요 | - | 궤간 변경: 1524 mm 대 1435 mm |
10.3. 항공 교통

소련 시대 말기 키르기스스탄에는 약 50개의 공항과 비행장이 있었으며, 그중 다수는 중국과 가까운 이 국경 지역에서 주로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현재는 소수만이 운영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항공은 중국, 러시아 및 기타 지역 국가로 항공편을 제공한다.
- 비슈케크 인근의 마나스 국제공항은 주요 국제공항으로, 모스크바, 타슈켄트, 알마티, 우루무치, 이스탄불, 바쿠, 두바이 등으로 가는 항공편을 운항한다.
- 오시 공항은 남부 지역의 주요 항공 터미널로, 비슈케크와 매일 연결되며 모스크바, 크라스노야르스크, 알마티 및 기타 국제 도시로 가는 항공편을 제공한다.
- 잘랄아바트 공항은 매일 비슈케크와 항공편으로 연결된다. 국영 항공사인 키르기스스탄 항공은 BAe-146 항공기로 운항한다. 여름철에는 매주 잘랄아바트와 이식쿨 지역을 연결하는 항공편이 운항된다.
- 소련 시대에 건설된 기타 시설들은 폐쇄되었거나, 가끔 사용되거나, 군사 용도로 제한되어 있다(예: 비슈케크 인근의 칸트 공군 기지, 러시아 공군이 사용).
키르기스스탄은 유럽 연합의 운항 금지 국가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에 등록된 어떤 항공사도 유럽 규정을 충족하지 못하는 안전 기준으로 인해 유럽 연합 내에서 어떤 종류의 서비스도 운영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11. 사회
키르기스스탄 사회는 유목 전통과 정주 문화가 혼합된 특징을 보이며, 다양한 민족과 언어,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독립 이후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으면서 교육, 보건, 대중 매체 등 여러 분야에서 발전과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11.1. 인구

2020년 8월 기준 키르기스스탄의 인구는 약 658만 6,600명으로 추산된다. 이 중 15세 미만 인구가 34.4%, 65세 이상 인구가 6.2%를 차지한다. 도시 인구는 전체 인구의 약 1/3에 불과하여 농촌 중심의 사회 구조를 보인다. 평균 인구 밀도는 km2당 25명이다.
2024년 세계 기아 지수(GHI)에서 키르기스스탄은 6.8점으로, 충분한 데이터가 있는 127개국 중 36위를 차지했다. 기아 수준은 낮음으로 분류된다.
11.1.1. 주요 도시
키르기스스탄의 주요 도시로는 수도인 비슈케크가 있으며, 2021년 기준 약 107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제2의 도시는 남부의 오시로 약 32만 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그 외 주요 도시들은 다음과 같다.
순위 | 도시 | 주 | 인구 (명) |
---|---|---|---|
1 | 비슈케크 (Bishkek) | 비슈케크 (특별지위시) | 1,074,075 |
2 | 오시 (Osh) | 오시주 | 322,164 |
3 | 잘랄아바트 (Jalal-Abad) | 잘랄아바트주 | 123,239 |
4 | 카라콜 (Karakol) | 이식쿨주 | 84,351 |
5 | 토크모크 (Tokmok) | 추이주 | 71,443 |
6 | 외즈괸 (Özgön) | 오시주 | 62,802 |
7 | 카라발타 (Kara-Balta) | 추이주 | 48,278 |
8 | 발릭치 (Balykchy) | 이식쿨주 | 42,875 |
9 | 나린 (Naryn) | 나린주 | 41,178 |
10 | 탈라스 (Talas) | 탈라스주 | 40,308 |
11.1.2. 민족 구성

키르기스스탄은 다민족 국가로, 80개 이상의 민족이 거주한다. 주요 민족은 키르기스인으로 전체 인구의 약 77.8% (2024년 추정)를 차지한다. 그 뒤를 이어 우즈베크인이 14.2%, 러시아인이 3.8%를 차지하며 주요 소수 민족을 이룬다. 이 외에도 둥간인(1.0%), 타지크인(0.9%), 위구르인(0.5%), 카자흐인(0.4%) 등 다양한 소수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키르기스인은 역사적으로 반유목 목축민으로, 유르트라는 둥근 천막에서 생활하며 양, 말, 야크 등을 길렀다. 이러한 유목 전통은 여름철 고산 목초지(자일루)로 이동하는 형태로 계절에 따라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정주 민족인 우즈베크인과 타지크인은 전통적으로 페르가나 분지의 저지대 관개지에서 농사를 지어왔다.
독립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민족 구성은 뚜렷한 변화를 겪었다. 키르기스인의 비율은 1979년 약 50%에서 2013년 70% 이상으로 증가한 반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독일인, 타타르인 등 유럽계 민족의 비율은 35%에서 약 7%로 감소했다. 1989년 약 10만 1천 명에 달했던 독일인 중 다수가 1991년 이후 독일로 이주했다.
키르기스인 | 우즈베크인 | 러시아인 | 우크라이나인 | ||
---|---|---|---|---|---|
1926년 조사 | 인구 | 661,171 | 110,463 | 116,436 | 64,128 |
% | 66.6% | 11.1% | 11.7% | 6.5% | |
1959년 조사 | 인구 | 836,831 | 218,640 | 623,562 | 137,031 |
% | 40.5% | 10.6% | 30.2% | 6.6% | |
1989년 조사 | 인구 | 2,229,663 | 550,096 | 916,558 | 108,027 |
% | 52.4% | 12.9% | 21.5% | 2.5% | |
1999년 조사 | 인구 | 3,128,147 | 664,950 | 603,201 | 50,442 |
% | 64.9% | 13.8% | 12.5% | 1.0% | |
2009년 조사 | 인구 | 3,804,788 | 768,405 | 419,583 | 21,924 |
% | 70.9% | 14.3% | 7.8% | 0.4% | |
2022년 조사 | 인구 | 5,379,020 | 986,881 | 282,777 | 3,875 |
% | 77.6% | 14.2% | 4.1% | 0.1% | |
2024년 추정 | 인구 | 5,570,910 | 1,017,658 | 274,940 | 2,783 |
% | 77.8% | 14.2% | 3.8% | 0.0% |
11.1.3. 언어

키르기스스탄의 국가 언어는 키르기스어이며, 러시아어는 공용어의 지위를 가진다. 키르기스스탄은 러시아,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과 함께 러시아어를 법적 공용어로 사용하는 구소련 셔섯 개 공화국 중 하나이다. 소련 해체 이후 1991년 키르기스어가 국가 언어로 채택되었으며, 2000년에는 러시아어가 공용어로 추가 지정되었다. 두 언어는 법적 지위가 다르다.
키르기스어는 튀르크어족 킵차크어파에 속하며, 카자흐어, 카라칼파크어, 노가이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20세기까지는 아랍 문자로 표기되었으나, 1928년 스탈린의 지시로 라틴 문자가 도입되었고, 1941년에는 키릴 문자로 대체되었다. 중국에서는 키르기스 지식인이자 과학자인 카심 티니스타노프가 만든 개량된 페르소-아랍 문자가 키르기스어의 공식 문자로 사용된다. 이웃 카자흐스탄의 문자 개혁이 진행 중이므로, 몇 년 후에는 키르기스스탄이 키릴 문자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유일한 독립 튀르크어권 국가가 될 것이다. 2023년 4월, 키르기스스탄 국가언어위원회 위원장 카니베크 오스모날리예프가 다른 튀르크어권 국가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공식 문자를 키릴 문자에서 라틴 문자로 변경할 것을 제안하자 러시아는 키르기스스탄으로의 유제품 수출을 중단했다. 오스모날리예프는 사디르 자파로프 대통령으로부터 질책을 받았고, 자파로프 대통령은 키르기스스탄이 키릴 문자를 대체할 계획이 없다고 해명했다.
러시아 TV 매체는 키르기스스탄, 특히 러시아화가 심화된 비슈케크와 추이주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오늘날 러시아인의 비율은 1989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2020년 세계 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비슈케크 인구의 55.6%가 가정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했으며, 키르기스어는 43.6%로 두 번째였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러시아어를 가정에서 사용하는 비율은 16.3%에 불과했고, 키르기스어는 70.9%였다. 우즈베크어는 같은 조사에서 10.7%로 세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가정 언어였다. 러시아 매체는 특히 인권 및 국제 정치 발전과 같은 분야에서 키르기스스탄 여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많은 사업 및 정치 업무가 러시아어로 수행된다. 최근까지 키르기스어는 주로 가정에서 사용되는 언어였으며 회의나 기타 행사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의회 회의는 키르기스어로 진행되며, 키르기스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동시통역이 제공된다. 2014년 RFE/RL 기사에 따르면, 키르기스어의 지위를 높이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매년 수천 명의 키르기스인(약 4만 명)이 주로 경력 전망을 위해, 그리고 다른 이름을 등록하여 러시아 블랙리스트(입국 시 추방 대상자)에서 자신을 제외하기 위해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바꾸고 있다. 또한 비슈케크 주재 러시아 대사관을 통해 러시아 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러시아어 교육 학교가 많이 있으며, 이들 학교는 키르기스어 교육 학교보다 자금 지원이 더 잘 이루어진다. 이로 인해 많은 키르기스 민족 학생들이 러시아어 교육 학교에 진학한다. 많은 고등학생들이 매년 성을 바꾸는데, 예를 들어 나린 지역에서는 고등학생 800명이 성을 변경한 사례가 기록되었다.
11.2. 종교



이슬람교는 키르기스스탄의 지배적인 종교이며, 대부분의 키르기스인이 이슬람교도이다. 2017년 CIA 월드 팩트북 추정에 따르면 인구의 90%가 이슬람교도이며, 대다수가 수니파이다. 7%는 기독교인이며, 이 중 3%는 러시아 정교회이고 나머지는 기타 종교이다. 2009년 퓨 리서치 센터 보고서에 따르면 키르기스스탄 인구의 86.3%가 이슬람교를 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다수의 이슬람교도는 수니파이며 하나피파 사상을 따르지만, 2012년 퓨 설문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설문 응답자의 23%만이 자신을 수니파라고 밝혔고, 64%는 자발적으로 "그냥 무슬림"이라고 답했다. 소수의 아흐마디야 이슬람교도도 있으나 국가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최근 수치에 따르면 국내 이슬람교도 수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소련 시대에는 국가 무신론이 장려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키르기스스탄은 세속 국가이지만, 이슬람교는 정치에 점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관리들이 세금 면제 협정에 따라 하즈(메카 순례)를 여행할 수 있도록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키르기스스탄의 이슬람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독실한 일상적 실천보다는 문화적 배경에 가깝지만, 공인들은 종교적 가치 회복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 왔다. 예를 들어, 인권 옴부즈맨 투르순바이 바키르울루는 "이 독립 시대에 키르기스스탄뿐만 아니라 다른 탈공산주의 공화국에서도 영적 뿌리로의 회귀가 일어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윤리적 차원 없이 시장 기반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은 부도덕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또한, 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아스카르 아카예프의 딸인 베르메트 아카예바는 2007년 7월 인터뷰에서 이슬람교가 전국적으로 점점 더 뿌리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최근 많은 모스크가 건설되었으며 키르기스인들이 이슬람교에 점점 더 헌신하고 있으며, 이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더 도덕적이고 깨끗하게 유지한다"고 강조했다. 정통 이슬람과는 다소 다른 형태의 이슬람을 따르는 현대적인 수피파 교단도 존재한다.
키르기스스탄에서 행해지는 다른 신앙으로는 주로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각각 실천하는 러시아 정교회와 우크라이나 정교회 버전의 기독교가 있다. 5,000명에서 10,000명에 이르는 여호와의 증인 공동체는 키르기스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회중뿐만 아니라 일부 중국어와 터키어를 사용하는 그룹에서도 모인다. 소수의 독일계 민족도 기독교인이며, 대부분 루터교와 재세례파이며, 약 600명의 로마 가톨릭 공동체도 있다.
역사적인 키르기스스탄 독일인 소수 민족의 일원으로 2022년 키르기스스탄에는 약 200명의 메노파 교인이 있었다. 하나의 메노파 공동체는 로트프론트 정착촌에서 계속되고 있다.
정령숭배 전통 몇 가지와 기도 깃발을 신성한 나무에 묶는 것과 같은 불교의 영향도 남아 있지만, 일부에서는 이 관행이 수피파 이슬람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또한 소수의 부하라 유대인이 키르기스스탄에 살고 있지만, 소련 붕괴 기간 동안 대부분 미국과 이스라엘 등 다른 나라로 도피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유럽에서 이 나라로 피난 온 소규모 아슈케나즈 유대인 공동체도 있다.
2008년 11월 6일, 키르기스스탄 의회는 종교를 인정하기 위한 최소 신자 수를 10명에서 200명으로 늘리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또한 "개종을 목적으로 하는 공격적인 행동"을 불법화하고, 학교에서의 종교 활동과 미등록 단체의 모든 활동을 금지했다. 이 법안은 2009년 1월 12일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대통령이 서명했다.
평화로운 소수 종교 집회에 대한 경찰의 급습이 여러 차례 보고되었으며, 관리들이 허위 증거를 조작했다는 보고도 있었지만, 소수 종교에 유리한 일부 법원 결정도 있었다.
11.3. 교육
키르기스스탄의 학제는 초등교육(1~4학년, 일부 학교는 선택적 0학년), 중등교육(5~9학년), 고등교육(10~11학년) 과정이 한 학교 내에 포함되어 있다. 아동은 보통 6세 또는 7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모든 아동은 9학년까지 마치고 수료증을 받아야 한다. 10~11학년은 선택 사항이지만, 졸업하고 국가 공인 학교 졸업장을 받으려면 이수해야 한다. 졸업하려면 학생은 11년제 학교 과정을 마치고 작문, 수학, 역사, 외국어 등 4개 필수 국가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2023년 기준, 국내에는 4,989개의 초중등학교가 있으며, 이 중 445개가 비슈케크에 있다. 이들 중 대다수(4,537개)는 공립학교이다. 또한 58개의 고등 교육 기관 및 대학교가 있으며, 이 중 42개는 공립, 16개는 사립이다.
2016년 9월, 키르기스스탄 나린에 중앙아시아 대학교가 개교했다.
비슈케크, 오시 및 기타 지역에는 다양한 러시아어 교육 학교가 있다. 키르기스 국립 학교에 비해 더 나은 자금 지원을 받기 때문에 많은 키르기스인들이 이 학교에 다닌다. 2021년 3월 러시아는 키르기스스탄에 약 30개의 새로운 러시아어 학교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러시아 교사들도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교의 존재는 비판을 받아왔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러시아어 교육이 국내 터키 및 미국 학교에 비해 결함이 있다는 점과, 비슈케크 주민에 따르면 1991년 키르기스 독립 이후 태어난 많은 키르기스 민족이 키르기스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러시아어만 구사한다는 점 등이다.
키르기스스탄에는 1,066개의 도서관이 있다. 키르기스 공화국 국립도서관은 1934년에 설립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이다. 키르기스 도서관들은 마라케시 VIP 조약 체결 및 오픈 액세스 포털과 같은 프로젝트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 사회에 대한 접근성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11.4. 보건
키르기스스탄의 주요 보건 지표는 독립 이후 개선되었으나 여전히 여러 과제를 안고 있다. 평균 기대 수명은 남성 약 67세, 여성 약 75세이다 (2021년 기준). 영유아 사망률과 모성 사망률은 중앙아시아 지역 평균보다 높은 편이다.
의료 서비스 시스템은 국가 주도로 운영되지만, 재정 부족과 의료 인프라 노후화, 의료 인력 부족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특히 농촌 지역의 의료 접근성이 낮다. 주요 공중 보건 문제로는 전염성 질환(결핵, HIV/AIDS 등)과 만성 질환(심혈관 질환, 당뇨병 등)의 증가가 있다. 정부는 국제기구 및 다른 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보건 시스템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1.5. 과학 기술
키르기스스탄의 과학 기술 연구는 주로 키르기스 과학 아카데미와 여러 연구 기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키르기스 연구자들은 폐수 정화를 위한 중금속 정화 기술과 같이 천연 제품을 기반으로 한 유용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은 2024년 세계 혁신 지수에서 99위를 차지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농업, 의학, 환경 과학, 지질학 등이며, 국제 협력을 통해 연구 역량 강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연구 개발 투자 부족과 연구 인력 유출 등은 과학 기술 발전에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ICT) 분야는 최근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며, 정부는 디지털 전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11.6. 대중 매체
키르기스스탄에는 다양한 형태의 대중 매체가 존재하며, 신문, 방송(TV, 라디오), 인터넷 기반 매체 등이 운영되고 있다. 국영 언론사와 민영 언론사가 공존하며, 러시아어와 키르기스어로 된 매체가 주를 이룬다.
독립 이후 언론 자유는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으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동성을 보여왔다. 정부의 언론 통제 시도나 언론인에 대한 압력 사례가 보고되기도 한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하는 세계 언론 자유 지수에서 키르기스스탄의 순위는 변동이 잦은 편이다. 최근에는 클룹(Kloop)과 같은 독립 언론 매체에 대한 정부의 압박이 국제적인 우려를 낳기도 했다.
인터넷 보급률이 증가하면서 온라인 뉴스 매체와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12. 문화
키르기스스탄 문화는 오랜 유목 생활의 전통과 이슬람 문화, 그리고 러시아 문화의 영향이 혼합되어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음악, 문학, 공예, 음식 등 다양한 분야에서 풍부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12.1. 전통 문화

키르기스스탄의 가장 중요한 전통 문화유산 중 하나는 구전 서사시 《마나스》이다. 이 서사시는 키르기스 민족의 영웅 마나스와 그의 아들, 손자의 업적을 노래한 것으로, 수십만 행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마나스치는 이 서사시를 전문적으로 암송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전통 가옥인 유르트(키르기스어: боз үй, boz üy)는 유목 생활에 적합하게 설계된 이동식 천막집으로, 키르기스 문화의 상징 중 하나이다. 유르트는 나무 골조에 양털로 만든 펠트를 덮어 만들며, 조립과 해체가 용이하다.
전통 수공예품으로는 펠트를 이용한 제품이 유명하다. 쉬르닥(шырдак)과 알라 키이즈(ала кийиз)는 화려한 문양의 펠트 카펫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투시키이즈(туш кийиз)는 정교하게 수놓은 대형 벽걸이 융단이다.
신부 납치(ала качуу, 알라 카추)는 키르기스스탄의 전통적인 결혼 형태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강제적인 경우가 많아 인권 문제로 지적받고 있다. 합의된 결혼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현재는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매사냥 또한 전통적인 수렵 방식 중 하나이다.
12.2. 음식

키르기스스탄의 전통 음식은 유목 생활과 중앙아시아의 지리적 특성을 반영한다. 주요 식재료는 양고기, 소고기, 말고기 등 육류와 유제품이며, 밀가루 음식도 흔하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베슈바르막(бешбармак, 다섯 손가락이라는 뜻으로 손으로 먹는 국수 요리), 라그만(лагман, 고기와 채소를 넣은 국수), 플로프(плов, 볶음밥의 일종), 만티(манты, 찐만두), 삼사(самса, 화덕에 구운 고기 파이) 등이 있다. 쿠미스(кымыз, 마유주)는 전통 발효 음료로 유명하다. 차는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이며, 손님 접대에도 중요하다.
12.3. 예술

키르기스스탄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서사시 《마나스》이며, 현대 문학에서는 칭기스 아이트마토프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이다.
전통 음악에서는 3현 악기인 코무즈(комуз) 연주가 대표적이다. '퀴(күү)'라고 불리는 기악 독주곡에는 각각 전설이 깃들어 있으며, 전통적으로는 전설을 이야기한 후 퀴를 연주했다. 다양한 전통 춤도 전해진다.
영화 산업은 소련 시절부터 발전해왔으며, 독립 이후에도 여러 감독들이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받기도 했다. 악탄 아브디칼리코프 등이 대표적인 영화감독이다.
12.4. 스포츠

축구는 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이다. 키르기스스탄 축구 연맹이 1992년 설립되어 키르기스스탄 축구 국가대표팀을 관리하고 있다.
레슬링 또한 매우 인기가 있으며, 2008년 하계 올림픽 이후 키르기스스탄 선수들은 그레코로만형 및 자유형 레슬링에서 여러 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아이스하키는 2009년 첫 아이스하키 선수권 대회가 조직되기 전까지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2011년 키르기스스탄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은 2011년 동계 아시안 게임 프리미어 디비전에서 6전 전승으로 우승했다. 이는 키르기스스탄 아이스하키팀이 참가한 최초의 주요 국제 대회였다. 키르기스스탄 남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은 2011년 7월 국제 아이스하키 연맹(IIHF)에 가입했다.
밴디는 국내에서 점점 인기를 얻고 있다. 키르기스 국가대표팀은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키르기스스탄 최초의 메달을 안겼다. 그들은 2012년 밴디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이 대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키르기스스탄 농구 국가대표팀은 공식 1995년 아시아 농구 선수권 대회에서 이란, 필리핀, 요르단과 같은 강호들을 제치고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2022년 9월 9일부터 17일까지 박투돌로노투 마을(이식쿨)에서 제21회 국제 이식쿨 스포츠 게임(SCO + CIS)이 개최되었다. 최초의 세 번의 세계 유목민 게임은 키르기스스탄 촐폰아타에서 개최되었다. 제6회 국제 스포츠 축제 '키르기스스탄의 진주'는 2022년 6월 15일부터 7월 3일까지 이식쿨 지역에서 열렸다.
전통 스포츠는 키르기스 문화에서 승마의 중요성을 반영한다.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매우 인기 있는 콕보루(көк-бөрү, 또는 울락 타르티시)는 두 팀의 기수들이 머리 없는 염소 사체를 차지하기 위해 씨름하며 상대 팀의 골라인을 넘거나 상대 팀의 골(큰 통이나 땅에 표시된 원)에 넣으려고 하는, 폴로와 럭비를 혼합한 듯한 단체 경기이다.
기타 인기 있는 승마 경기에는 다음이 있다:
- 앗 차비시(ат чабыш) - 장거리 경마로, 때로는 50 km 이상 거리에서 진행된다.
- 줌비 앗마이(жумбы атмай) - 귀금속으로 만든 큰 막대("줌비")를 실로 장대에 묶고 참가자들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아 실을 끊으려고 하는 경기이다.
- 키즈쿠마이(кыз куумай) - 남자가 여자에게 키스를 받기 위해 말을 타고 도망가는 여자를 쫓는 경기로, 만약 남자가 성공하지 못하면 여자가 다시 그를 쫓아 "캄치"(채찍)로 때리려고 할 수 있다.
- 오다리시(оодарыш) - 두 명의 참가자가 말 위에서 씨름을 하여 서로를 말에서 먼저 떨어뜨리려고 하는 경기이다.
- 틴 엠메이(тыйын эңмей) -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땅에서 동전을 줍는 경기이다.
12.5. 국가 상징
키르기스스탄을 대표하는 공식적인 상징물은 국기, 국장, 국가이다.
- 국기: 붉은색 바탕 중앙에 노란색 태양이 있고, 태양 안에는 40줄기의 햇살과 전통 가옥 유르트의 꼭대기 부분인 툰두크가 그려져 있다. 붉은색은 용기와 용맹을, 태양은 평화와 부를, 40줄기 햇살은 40개의 키르기스 부족을, 툰두크는 가정의 화목과 국가의 통일성을 상징한다.
- 국장: 원형 안에 흰 매가 날개를 펼치고 있고, 배경에는 이식쿨호와 톈산산맥의 봉우리들이 그려져 있다. 국장 위쪽에는 태양이 떠오르고 있으며, 주변은 밀 이삭과 목화로 장식되어 있다. "Кыргыз Республикасы"(키르기스 공화국)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 국가: 1992년에 제정되었으며, 작사가는 자밀 사디코프와 에슈맘베트 쿨루예프, 작곡가는 나시르 다블레소프와 칼리 몰도바사노프이다. 키르기스스탄의 아름다운 자연과 국민의 자유, 독립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2.6. 공휴일
키르기스스탄은 새해 첫날(1월 1일)을 기념하는 것 외에도, 춘분에 전통 새해 축제인 노루즈(Нооруз)를 지낸다. 이 봄 축제는 잔치와 콕보루(Ulak Tartish)와 같은 승마 경기 등의 축제로 기념된다.
키르기스스탄의 주요 공휴일은 다음과 같다:
- 1월 1일 - 새해 첫날
- 1월 7일 - 정교회 성탄절
- 2월 23일 - 조국 수호의 날
- 3월 8일 - 여성의 날
- 3월 21일~23일 - 노루즈 (봄 축제)
- 4월 7일 - 국민 혁명의 날
- 5월 1일 - 노동절
- 5월 5일 - 제헌절
- 5월 8일 - 추모의 날
- 5월 9일 - 승전 기념일
- 8월 31일 - 독립 기념일
- 11월 7일~8일 - 역사와 조상 추모의 날
두 개의 추가적인 이슬람 휴일인 오로조 아이트와 쿠르만 아이트는 음력으로 정해진다.
12.7. 세계유산
키르기스스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문화 및 자연 유산이 있다. 2024년 기준 총 3건의 세계유산이 등재되어 있으며, 이 중 문화유산은 2건, 자연유산은 1건이다.
- 술라이만투 성산 (2009년 등재, 문화유산): 오시 시에 위치한 이 산은 수천 년 동안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온 곳으로, 다양한 종교적 건축물과 암각화가 남아있다.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이슬람 이전 시대와 이슬람 시대의 신앙 체계를 보여주는 독특한 유산이다.
- 실크로드: 창안-톈산 회랑의 도로망 (2014년 등재, 문화유산): 중국, 카자흐스탄과 공동 등재된 유산으로, 고대 실크로드의 일부 구간을 포함한다. 키르기스스탄 내에는 수야브(Suyab, 악베쉼 유적), 발라사군(Balasagun, 부라나 유적), 네바켓(Nevaket, 크라스나야 레치카 유적) 등 3개의 유적지가 포함되어 동서 문명 교류의 중요한 증거를 보여준다.
- 서톈산산맥 (2016년 등재, 자연유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과 공동 등재된 유산으로, 톈산산맥의 서쪽 부분에 해당한다. 다양한 생물종과 독특한 생태계를 보유하고 있어 생물다양성 보존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