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background
최익규는 북한의 영화 및 선전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초기 삶은 이후 경력의 발판이 되었다.
1.1. Birth and education
최익규는 1934년 2월 26일 함경북도 화대군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54년 김형직사범대학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김일성종합대학 평양로동학원 러시아어 강사로 잠시 재직했다. 또한 그는 소련에서 유학했으며, 평양에 위치한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공식적인 예술 교육보다는 스탈린주의 영화 제작 모델에 대한 실질적인 경험을 통해 독학으로 영화 제작 기술을 익혔다.
1.2. Personal life
최익규는 결혼하여 아들 한 명과 딸 세 명을 두었다. 그의 맏딸인 최일심은 1988년부터 제작된 5부작 영화 시리즈 내가 본 나라의 시나리오를 집필한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다.
2. Career and major activities
최익규는 북한의 영화 산업과 선전 분야에서 폭넓고 중요한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김정일과의 긴밀한 협력 관계 속에서 북한 예술계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그의 경력은 여러 차례의 해임과 복귀를 겪으면서도 김정일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어졌다.
2.1. Early career in film
최익규는 1955년 조선영화소에 부감독으로 입사하며 영화계 경력을 시작했다. 1956년 22세의 나이로 조선영화소장이 되었으며, 이는 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그의 재능과 야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1963년에 개봉한 영화 백일홍이 꼽힌다.
2.2. Collaboration with Kim Jong-il
1968년, 당시 국가 영화 산업을 장악한 김정일은 영화 분야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기에 최익규와 긴밀히 협력하게 되었다. 최익규는 김정일의 "영화 가정교사"이자 가장 가까운 영화 분야 협력자가 되었다. 이들의 협력은 피바다(1968)와 꽃파는 처녀(1972)와 같은 "불후의 고전"으로 알려진 수많은 중요한 북한 영화를 탄생시켰으며, 이 작품들은 큰 대중적 성공을 거두며 북한 영화 산업을 깊이 있게 형성했다. 1960년대 말에는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영화 부문 지도원으로 임명되어 북한의 모든 영화 제작을 감독했다. 1972년에는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승진하며 영화 외 다른 형태의 선전 분야로 책임 범위를 넓혔다.
2.2.1. Abduction of Shin Sang-ok and Choi Eun-hee
최익규는 유명한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인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 부부의 납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상옥과 최은희가 비밀리에 녹음한 테이프에 따르면, 김정일은 최익규가 신상옥을 남한 최고의 감독으로 평가하여 납치를 조언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정일은 신상옥에게 납치 이유를 설명하며 "최익규 부부장은 우리 영화 산업의 변화를 이끌 적임자다. 그는 영화에 정통하며,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다... 하지만 보다시피 최익규 부부장 혼자서는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고 말했다.
1983년 3월 6일, 신상옥과 최은희가 김정일에 의해 재회했을 때 최익규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그는 이때부터 신상옥과 함께 김정일을 위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최익규는 김정일, 신상옥, 최은희 사이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최익규는 신상옥, 최은희와 함께 평양에서 모스크바,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오스트리아 빈까지 여행했다. 이 여행의 목적은 신상옥이 김정일을 위해 제작하기로 합의한 첫 영화인 돌아오지 않는 밀사의 촬영지를 물색하는 것이었다. 최익규는 신상옥의 연출에 불만을 표출하고 스태프들 앞에서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신상옥은 최익규의 행동을 김정일에게 보고하겠다고 위협하여 프로젝트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영화가 완성된 후 런던 영화제에 상영될 예정이었고, 신상옥이 참석할 계획이었다. 신상옥은 그곳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최익규와 경호원들이 이미 런던에 도착해 있었다.
1986년 신상옥과 최은희가 빈에서 탈출에 성공한 후, 최익규는 선전선동부 직위에서 강등되었고, 몇 년 동안 행방이 묘연한 상태로 시골로 보내졌다. 이는 그의 경력에 큰 오점으로 남았다.

2.3. Public and political roles
최익규는 1988년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복귀가 허용되었다. 그는 연극과 오페라 분야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으며, 그해 극찬을 받은 민족가극 춘향전 제작에 참여하여 연출가처럼 배우들을 지도했다. 1990년대 초부터 그는 가명인 최상근으로 활동하며 김정일이 개인적으로 지도한 마지막 작품으로 여겨지는 50부작 영화 시리즈 민족과 운명을 제작, 연출,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그는 2003년 9월 문화상으로 임명되었으나, 당뇨병 등 만성 질환으로 인해 약 2년 후 일시적으로 은퇴했다. 2006년에는 문화상 직위를 내려놓았다. 2009년 3월 8일에는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2009년에는 선전선동부 부장으로 최종 임명되어 북한의 선전 책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2010년 2월 초 강능수로 교체되었다.
최익규는 2011년 김정일 사망 때까지 김정일을 공식 행사에서 자주 수행했다. 그는 북한 외부에서 활동할 때는 최상근이라는 가명을 사용했으며, 2000년 남한 서울을 방문했을 때도 조선국립교향악단 고문 자격으로 이 가명을 사용했다.
2.4. Dismissals and reinstatements
최익규는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에서 여러 차례 해임과 복귀를 반복했다. 그는 총 다섯 차례 해임된 것으로 기록되는데, 1969년 첫 해임, 1977년 숙청의 일환으로 해임, 1986년 빈 사건 이후 해임, 1993년 해임,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0년 해임되었다. 이러한 해임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최익규의 건강 문제 치료를 위해 독일로의 여행을 허락하는 등 그에 대한 깊은 신뢰를 유지했다. 이는 김정일이 그의 재능과 충성도를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
3. Major works
최익규는 북한의 영화 및 오페라 분야에서 여러 중요한 작품을 감독하거나 제작에 참여하여 북한 예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1. Film
최익규가 감독하거나 제작에 참여한 주요 영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백일홍 (1963년)
- 피바다 (1968년)
- 다섯 명의 빨치산 형제 (1968년)
- 꽃파는 처녀 (1972년)
- 조선의 별 (1980년~1987년)
- 내가 본 나라 (1988년~)
- 민족과 운명 (1990년대 초~)
이 작품들은 북한 영화계에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선전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 북한의 이념 확립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3.2. Opera
최익규는 영화 외에도 북한의 혁명가극 및 연극 분야에서 예술적 지도를 제공했다.
- 피바다 (1971년): 영화 피바다를 각색한 오페라 작품.
- 춘향전 (1988년): 극찬을 받은 민족가극.
그는 이러한 오페라 작품을 통해 북한의 예술 형식 발전과 이념 선전에 기여했다.
4. Legacy and influence
최익규는 북한 사회와 예술, 그리고 역사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활동은 북한의 선전 체계와 권력 승계 과정에 깊이 관여되어 있다.
4.1. Role in North Korean propaganda
최익규는 김정일과 함께 북한의 대규모 선전 쇼를 개발하고 정교화하는 데 기여했다. 1972년에는 태양절 축하 행사와 광복절 행진과 같은 주요 행사들을 총괄했으며, 이후 아리랑 축전으로 발전하게 되는 집단체조를 개발했다. 그는 여전히 아리랑 축전의 조직을 감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활동은 북한의 이념적 단결과 통치를 위한 시각적 선전 도구를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작가 폴 피셔는 "현대 북한 국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연출이자 공연이며, 이는 김정일만큼이나 최익규의 취향과 재능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평가하며 최익규의 영향력을 강조했다.
4.2. Support for Kim Jong-un's succession
최익규는 2011년 김정일 사망 후, 김정은의 권력 승계가 아직 불확실했던 시기에 그의 지도자 등극을 지지하는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김정일 외에 김정일의 셋째 부인 고용희와 장성택을 도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지지는 김정은이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으며, 이는 그의 지속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준다.
5. Criticism and controversies
최익규의 경력은 북한의 선전 활동에 깊이 관여된 만큼 다양한 비판과 논란을 야기했다.
그의 가장 큰 논란은 신상옥과 최은희 납치 사건에 대한 그의 역할이다. 그는 이 부부가 북한에 강제로 억류되어 김정일의 지시 아래 영화를 제작하도록 강요받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김정일이 최익규의 조언을 받아 납치를 결정했다고 언급한 것은 그가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정권의 반인권적인 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최익규는 북한의 선전선동부에서 오랜 기간 고위직을 지내며 집단체조와 같은 대규모 선전 쇼의 개발에 기여했다. 이러한 선전 활동은 북한 체제를 찬양하고 주민들의 사상을 통제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는 비판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인권 탄압과 사상 통제의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의 영화와 오페라 작품 역시 북한의 이념적 메시지를 대중에게 주입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기에, 예술의 자유로운 표현보다는 정권의 도구로서 기능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의 여러 차례 해임과 복귀는 김정일과의 특별한 관계를 반영하는 동시에, 북한 정권 내의 복잡한 권력 역학 관계와 그 속에서 그가 처했던 위치를 드러내는 사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