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넬송 지 제주스 시우바(Nélson de Jesus Silva포르투갈어), 일명 디다(Dida포르투갈어)는 1973년 10월 7일 브라질에서 태어난 전 축구 선수이자 골키퍼 코치이다. 그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간 AC 밀란에서 뛰며 세계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으며, 한 차례의 세리에 A 우승과 두 차례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포함해 여러 트로피를 획득했다. 특히 2003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유벤투스를 상대로 승부차기에서 세 개의 페널티킥을 막아내며 팀의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디다는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11년간 91경기에 출전하여 FIFA 월드컵과 올림픽 메달을 획득했으며,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199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반세기 만에 모아시르 바르보사 이후 브라질 대표팀의 첫 아프로 브라질인 선발 골키퍼가 되어 인종적 장벽을 허물었다. 2006년 FIFA 월드컵에서는 1950년 이후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에 선발 출전한 흑인 골키퍼가 되었다. 그는 또한 FIFPro 올해의 골키퍼의 첫 수상자로, 브라질 축구에서 흑인 골키퍼에 대한 편견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2. 어린 시절
넬송 지 제주스 시우바는 1973년 10월 7일 브라질 북동부 바이아주의 이라라시에서 태어났으며, 생후 3개월 만에 가족이 이주한 이웃의 작은 주 알라고아스주의 라고아 다 카노아에서 성장했다. 그의 첫 스포츠는 배구였으나, 풋살과 동네 축구를 통해 축구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디다"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이를 자신의 활동명으로 사용했다. 브라질 축구에서 골키퍼 포지션은 오랫동안 인기가 없었으며, 특히 흑인 선수들에 대한 차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골키퍼를 선호했다.
리우데자네이루를 기반으로 하는 플라멩구의 서포터였던 디다는 13세에 "플라멩기뉴"(Flamenguinho포르투갈어, "작은 플라멩구")라는 아마추어 팀을 결성하여 처음으로 조직적인 팀 경기를 경험했다. 그의 축구 우상은 골키퍼 리나트 다사예프와 미래의 브라질 대표팀 동료 클라우지우 타파레우였다. 타파레우는 이탈리아와 튀르키예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보냈으며, 디다는 타파레우를 유럽 클럽에서 브라질 골키퍼에 대한 수용도가 높아지는 데 기여한 선구자로 여겼다.
3. 클럽 경력
3.1. 브라질 초기 경력
1990년, 17세의 나이에 디다는 알라고아스주의 크루제이루 지 아라피라카에서 클럽 축구 데뷔를 했다. 2년 후, 그는 고향 팀이자 1992년 캄페오나투 바이아누 우승팀인 비토리아의 유소년 아카데미에 합류했다. 1993년, 브라질의 1993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에 주전으로 기여한 후, 디다는 비토리아 성인팀의 주전 골키퍼로 24경기에 출전하여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에 A에서 파우메이라스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20세의 나이로 브라질 축구 잡지 플라카르(Placar)의 연간 '볼라 지 프라타'(Bola de Prata포르투갈어) 상을 세리에 A 최고의 골키퍼에게 수여받은 최연소 선수가 되었다. 당시 비토리아의 전 팀 동료 주앙 마르셀루는 "바이아 축구팀은 많은 홈그로운 인재들을 배출했다. 비토리아는 디다, 밤페타, 줄리아노, 로드리고, 파울루 이시도루, 알렉스 아우베스 같은 선수들을 보유했다. 19세 골키퍼 디다는 흑인이었음에도 비토리아 같은 클럽을 지켰다. 브라질에서 흑인 골키퍼가 뛸 때마다 그는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고 회상했다.
디다는 1994년 크루제이루로 이적하여 5시즌 동안 4차례의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우승, 1996년 코파 두 브라질, 1997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차지했으며, 두 차례 더 볼라 지 프라타 골키퍼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1999년 1월, 그는 유럽에서 자신의 기량을 시험하고 브라질 국가대표팀 코치진의 주목을 받고 싶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으며, 유일하게 제안을 해온 AC 밀란과 계약하기 위해 계약 잔여 기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선수와 크루제이루 간의 법적 분쟁은 5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FIFA의 결정으로 디다는 스위스 클럽 FC 루가노로 임대되어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밀란으로의 이적은 1999년 5월 크루제이루에 27.00 억 ITL (520.00 만 BRL)의 이적료를 지불하면서 확정되었다.
밀란의 알베르토 자케로니 감독은 크리스티안 아비아티와 노련한 베테랑 세바스티아노 로시에 이어 디다를 세 번째 골키퍼로 배치했으며, 그는 정기적인 출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코린치앙스로 임대되며 브라질로 돌아왔다. 그의 페널티킥 선방 능력은 1999년 브라질레이루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당시 상파울루와의 준결승전에서 라이가 찬 두 번의 페널티킥을 모두 막아내며 코린치앙스의 3대2 승리에 기여했고, 이 활약으로 플라카르로부터 10점 만점을 받았다. 디다는 그 시즌 IFFHS 세계 최고의 골키퍼 상 후보에 처음으로 지명되어 8위를 기록했다. 그는 2000년 열린 초대 FIFA 클럽 월드컵에서 4경기 중 3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하고 단 2골만을 허용하며 코린치앙스의 우승을 이끌었다. 바스코 다 가마와의 결승전이 연장전 끝에 득점 없이 끝나자, 그는 승부차기에서 지우베르투 다 시우바 멜루의 페널티킥을 막아냈고, 바스코 공격수 이데우문두의 슛이 빗나가면서 코린치앙스는 4대3으로 승리했다. 코린치앙스 미드필더 히카르지뉴는 경기 후 기자들에게 "적어도 다섯 번 중 한 번은 막아줄 것을 알았기에" 팀이 연장전에서 승부차기로 경기를 끌고 가려 했다고 밝혔다. BBC 뉴스는 양 팀이 "두 시간 동안 경기하면서 득점할 것 같지 않았다"며 "형편없는 결승전"이라고 비판했고, 디다 자신도 승부차기가 "선수들과 팬들에게 고통을 준다"며 비판했다.
3.2. AC 밀란
3.2.1. 1999-2002: 밀란에서의 시작과 초기 난관
밀란은 디다를 다시 불러들여 이탈리아 대표팀 차출로 2000년 하계 올림픽에 출전한 주전 골키퍼 크리스티안 아비아티를 대신하여 2000-01 챔피언스리그의 주전으로 지명했다. 그의 AC 밀란 데뷔는 2000년 9월 13일 베식타시와의 조별 리그 4대1 승리였다. 그러나 6일 후 비에 젖은 엘런드 로드에서 열린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그는 리 보이어의 슛을 실수로 자신의 골대에 떨어뜨려 밀란이 0대1로 패배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슛의 힘을 흡수한 후 공을 잡으려 했지만, 공이 물웅덩이에 떨어져 골문으로 튀어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그는 나머지 조별 리그 경기에 선발 출전하여 9월 26일 바르셀로나와의 경기에서 2대0 승리를 거두며 밀란에서의 첫 무실점 경기를 기록했지만, 이후 2차 조별 리그에서는 아비아티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디다는 11월 파르마와의 0대2 패배 경기에서 세리에 A 첫 선발 출전을 기록했으며, 이는 그 해 유일한 리그 출전이었다. 2001년 3월 7일 갈라타사라이 (그의 우상인 타파레우가 골키퍼로 활약)와의 0대2 패배 이후 밀란이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하자 디다는 남은 시즌 동안 더 이상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디다는 2001-02 시즌에 밀란으로 복귀했지만, 위조 여권 스캔들에 연루되어 이탈리아 축구 연맹으로부터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고, 이에 따라 코린치앙스로 다시 임대되었다. 그는 주전 도니의 백업으로 단 8번의 세리에 A 경기에 출전했지만, 이후 토르네이우 리우-상파울루 우승과 2002년 코파 두 브라질 우승을 차지하며 꾸준히 좋은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3.2.2. 2002-2005: 명성과 챔피언스리그 성공
디다는 2002-03 시즌을 앞두고 밀란으로 다시 복귀하여 후보 선수로 대기했다. 2002년 8월 14일 슬로반 리베레츠와의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전 후반전에서 크리스티안 아비아티의 부상으로 교체 출전하며 시즌 데뷔전을 치렀다. 이 경기에서의 1대0 승리 및 이후 경기에서의 활약으로 2년차 감독 카를로 안첼로티는 그를 주전으로 승격시켰다. 그는 세리에 A에서 30경기에 선발 출전하며 커리어 최고 기록을 세웠고, 밀란은 리그 3위를 기록하며 리그에서 두 번째로 적은 30실점을 기록했다 (우승팀 유벤투스보다 1골 많음). 이 기간 동안 그는 밀란에서 유일한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차지했다.
디다는 챔피언스리그 14경기에 출전했으며, 인테르나치오날레와의 준결승 2차전에서 부상으로 결장한 것 외에는 모든 경기에 나섰다. 밀란은 결승전에서 유벤투스를 상대하게 되었는데, 이는 대회 역사상 유일한 이탈리아 팀 간의 결승전이었다. 그는 정규 시간과 연장전 내내 거의 시험받지 않았으며, 경기 막판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의 슛을 막아낸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활약은 없었다. 하지만 승부차기에서 다비드 트레제게, 마르셀로 살라예타, 파올로 몬테로의 슛을 막아냈고, 밀란의 안드리 셰우첸코가 결승골을 넣은 후 그는 디다의 품에 안겨 동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눴다. 유벤투스 감독 마르첼로 리피는 경기 후 자신의 선수들 중 "네다섯 명"이 승부차기 참여를 거부했다고 밝혔으며, 유벤투스 수비수 릴리앙 튀람은 디다의 페널티 선방 능력에 대한 명성 때문에 경기 전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다. 디다는 그 해 발롱도르 후보에 오른 첫 브라질 골키퍼가 되어 13위를 기록했다.
밀란이 2003-04 시즌에 17번째 스쿠데토를 획득하면서 디다는 스쿠데토를 차지한 최초의 비이탈리아인 골키퍼가 되었다. 그는 32번의 리그 출전에서 단 20골만을 허용하며 2004년 세리에 A 올해의 골키퍼 상에서 잔루이지 부폰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밀란의 챔피언스리그 2연패 도전은 8강에서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게 저지당했지만, 2003년 9월 16일 아약스와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디다는 연장전 막판 라파엘 판 데르 파르트의 근거리 슛을 막아내며 밀란의 1대0 승리를 지켜냈다. 안첼로티는 이 선방을 "골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밀란은 2004-05 시즌을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으로 시작했으며, 세리에 A 시즌 전반기 동안 디다는 골문에서 거의 막을 수 없는 모습을 보였다. 리보르노와의 시즌 개막전에서 퇴장당한 후, 그는 이후 18번의 리그 경기 중 17경기에서 무패를 기록하며 단 10골만을 허용했다. 이 기간에는 2004년 11월 28일 키에보와의 1대0 승리 경기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이 경기에서 로베르토 바리오니의 프리킥이 중간에 굴절된 후 방향을 바꾸어 날아오자 아크로바틱한 선방을 보여주었다. 안첼로티는 이 선방을 기자들에게 "골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비록 디다는 총 16번의 무실점 경기를 기록하고 36경기(38경기 중)에서 25골을 허용했지만, 밀란은 마지막 8경기 중 5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하며 스쿠데토 우승팀 유벤투스에 이어 준우승에 머물렀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디다가 밀란의 첫 10경기에서 단 3골만을 허용했으며, 2004년 11월 2일 바르셀로나와의 조별리그 1대2 패배 이후 5연속 무실점 행진을 이어갔다. 이 중 다섯 번째 무실점 경기는 2005년 4월 7일 라이벌 인테르나치오날레와의 8강전에서 기록되었는데, 디다는 여러 차례 선방으로 인테르 선수들을 막아냈으며, 특히 시니샤 미하일로비치의 코너킥 프리킥을 막아낸 것이 돋보였다. 4월 12일 2차전에서 밀란이 1대0으로 앞서고 있을 때, 인테르 미드필더 에스테반 캄비아소의 후반전 헤더가 훌리오 크루스가 디다에게 파울을 범했다는 이유로 심판 마르쿠스 메르크에 의해 취소되었다. 디다의 골대 뒤에 위치한 인테르 울트라스는 이 판정에 반응하여 병과 불타는 조명탄을 경기장으로 던졌다. 디다가 골 킥을 하기 위해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파편을 치우려 할 때, 조명탄이 그의 오른쪽 어깨를 강타하여 머리를 몇 인치 차이로 비켜갔다. 경기는 소방관들이 경기장을 정리하고 디다가 타박상과 1도 화상 치료를 받는 동안 중단되었다. 30분 지연 후 크리스티안 아비아티가 골문에 들어선 채 경기가 재개되었지만, 불과 1분도 채 되지 않아 더 많은 투척물이 쏟아지자 경기는 중단되었다. UEFA는 밀란에 3대0 승리를 공식적으로 부여했으며, 이로써 디다는 에드빈 판 데르 사르와 유제프 반직과 함께 챔피언스리그 6연속 무실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인테르는 이후 UEFA로부터 20.00 만 EUR의 벌금을 부과받았고, 다음 4번의 유럽 경기를 무관중으로 치르라는 명령을 받았다. PSV와의 준결승전에서 디다는 4월 26일 밀란의 2대0 1차전 승리에서 7연속 무실점이라는 대회 신기록을 세웠지만, 5월 4일 2차전 9분 박지성의 슛으로 무실점 행진이 총 623분에서 끝났다. PSV는 3대1로 승리했지만, 밀란은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2005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밀란은 이스탄불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전반에 3대0으로 앞서갔지만, 후반에 6분 만에 세 골을 내주며 동점을 허용했다. 리버풀 미드필더 블라디미르 슈미체르의 두 번째 골은 디다가 손을 댔지만 막을 수 없었다. 세 번째 골은 사비 알론소의 페널티킥을 디다가 막아냈지만 알론소가 리바운드 볼을 성공시키면서 나왔다. 정규 시간과 연장전이 3대3으로 끝나 승부차기로 이어졌을 때, 디다는 욘 아르네 리세의 슛만 막아냈고 리버풀은 승부차기에서 3대2로 승리했다. 그는 이후 슈미체르의 슛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았다는 언론의 비판에 직면했다. 디다는 시즌 말 FIFPro 월드 베스트 11에 선정된 5명의 밀란 선수 중 한 명이었으며, 2005년 IFFHS 세계 최고의 골키퍼 상에서는 페트르 체흐에 이어 경력 최고인 2위를 차지했다. 그는 또한 두 번째로 세리에 A 올해의 골키퍼 후보에 올랐지만 다시 한번 잔루이지 부폰에게 패했다. 그는 2005년 발롱도르 후보에도 올랐지만, 득표하지는 못했다.
3.2.3. 2005-2010: 부상, 기량 저하, 그리고 떠남
2005-06 시즌에 밀란은 2001-02 시즌 이후 처음으로 국내 및 유럽 대회에서 무관을 기록했다. 그들은 세리에 A에서 유벤투스에 이어 2위를 차지했지만, 이후 칼치오폴리 승부조작 스캔들에 연루되었다. 밀란은 시즌 전반기 19경기 동안 22골을 허용하며 지난 시즌 전체와 같은 수의 경기(5패)를 패했으며, 디다는 4라운드 라치오와의 2대0 승리까지 무실점 경기를 기록하지 못했다. 그의 기량도 눈에 띄게 하락하기 시작했으며, 2006년 1월 8일 파르마와의 4대3 승리 경기에서 크로스를 놓쳐 파올로 칸나바로가 빈볼을 득점하게 하여 파르마에 1대0의 리드를 내주는 등 눈에 띄는 실수를 범했다. 또한 1월 28일 안드레아 가스바르로니의 슛을 언더핸드로 잡으려다 팔에 맞아 골문으로 들어가게 하여 삼프도리아와의 1대1 무승부를 기록했으며, 이로 인해 밀란은 유벤투스에 9점 뒤지게 되었다。2006년 2월, 이전에 코린치앙스에서 디다를 지도했던 브라질 국가대표팀 감독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는 디다의 기량이 향상되지 않으면 다가오는 월드컵 주전 자리가 위태로울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밀란은 2006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서 바르셀로나에게 1대0 합계로 패하며 탈락했지만, 디다는 두 경기 모두에서 사무엘 에토, 호나우지뉴, 헨리크 라르손을 상대로 선방을 펼쳐 칭찬받았다. 그러나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7연속 무실점 기록은 아스널의 옌스 레만이 10연속 무실점 기록을 세우며 경신했다.

칼치오폴리 스캔들 연루에 대한 징계로 밀란은 2006-07 세리에 A 시즌을 승점 8점 감점 상태로 시작하여 인테르나치오날레, 로마, 라치오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 2006년 9월 10일 라치오의 스테펀 마킨와가 밀란의 2대1 시즌 개막전에서 골을 넣은 후, 디다는 다음 446분 동안 리그 골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9월 20일 아스콜리와의 1대0 승리 경기에서 밀란 소속으로 200번째 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2006-07 시즌은 그의 경력에서 처음으로 부상에 시달린 시즌이기도 했으며, 2006년 11월 21일 AEK 아테네와의 1대0 패배 경기에서 입은 무릎 인대 손상으로 그 해 남은 기간 동안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백업 골키퍼 젤리코 칼라치가 2007년 1월 21일 라치오와의 득점 없는 무승부 경기에서 디다가 복귀할 때까지 대신 출전했다. 그는 무릎과 어깨 문제 재발로 인해 총 13번의 세리에 A 경기에 결장했으며, 이전 세 시즌 동안 총 10경기에 결장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밀란은 또한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합계 점수로 꺾고 2006-07 챔피언스리그 본선에 진출했으며, 디다는 6경기 동안 4번의 무실점 경기를 기록하고 단 2골만을 허용하며 조 1위를 차지했다. 바이에른 뮌헨과의 8강전에서 그는 4월 3일 1차전에서 다니엘 판 바위턴에게 경기 막판 동점골을 허용하여 밀란이 홈에서 2대2 무승부를 기록한 것에 대해 비판받았다. 그러나 디다는 2차전에서 바이에른을 2대0으로 완봉하며 무실점 경기를 기록했고, 밀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웨인 루니의 골로 이어지는 실수로 인해 3대2 패배에서 다시 비판을 받았다. 패배 후, 한 밀란 팬은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 디다를 조롱하며 판매 상품으로 올리기도 했지만, 해당 게시물은 곧 삭제되었다. 디다의 출전 정지 징계는 1경기로 줄어들어 10월 24일 샤흐타르 도네츠크와의 4대1 1차전 승리에는 결장했지만, 11월 6일 3대0 2차전 승리에는 복귀했다. 디다의 시즌 마지막 경기는 12월 23일 인테르와의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 2대1 패배 경기였다. 그는 에스테반 캄비아소의 결승골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방향으로 몸을 날려 골을 허용했으며, 이로 인해 팬들과 언론의 맹비난을 받았다. 그는 2008년 1월 13일 나폴리와의 5대2 승리 경기에 선발 출전했지만, 다음 주 무릎 부상으로 인해 백업 젤리코 칼라치로 교체되었다. 칼라치는 이후 시즌 남은 기간 동안 좋은 활약을 펼쳐 주전 자리를 지켰고, 밀란은 아스널에게 패하며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탈락했다.
2008-09 시즌 초, 밀란 스쿼드에는 칼라치, 크리스티안 아비아티, 그리고 2007년에 영입된 마르코 스토라리를 포함한 많은 골키퍼들이 있었다. 그는 결국 아비아티에 이어 두 번째 골키퍼로 지명되었고, 칼라치는 8월 3일 첼시와의 러시아 철도컵 0대5 패배 경기에서 5골을 허용하며 세 번째 골키퍼로 강등되었으며, 스토라리는 피오렌티나로 임대되었다. 디다는 밀란의 UEFA컵 캠페인에 배정되었는데, 6경기에서 단 한 번의 무실점 경기만을 기록했으며, 밀란은 결국 결승에 진출한 베르더 브레멘에게 탈락했다. 2009년 3월 15일, 아비아티가 시에나와의 5대1 승리 경기에서 시즌 아웃 부상을 당하면서 디다는 1년여 만에 세리에 A 경기에 출전했다。그는 주전으로 시즌을 마쳤으며, 10번의 리그 출전에서 6번의 무실점 경기를 기록했다. 밀란은 인테르와 유벤투스에 이어 3위를 차지하며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획득했다.
2009-10 시즌에는 9년간 감독을 맡았던 카를로 안첼로티가 레오나르두로 교체되었다. 밀란은 세리에 A에서 인테르와 유벤투스에 이어 2년 연속 3위를 기록했으며,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7대2 합계 점수로 탈락했다. 디다는 부상으로 프리시즌에 참가하지 못해 주전 경쟁에 나서지 못했고, 스토라리의 백업으로 뛰다가 2009년 10월 18일 로마와의 2대1 승리 경기에서 밀란 경력에서 세 번째로 부상 교체 선수로 시즌 데뷔전을 치렀다. 10월 21일, 레알 마드리드와의 조별 리그에서 시즌 첫 챔피언스리그 경기에 출전한 디다는 전반 18분 에스테반 그라네로의 헤딩슛을 잡다가 공의 완전한 통제 없이 앞으로 보내려다가 무릎에 맞고 튕겨 나온 공을 라울이 빈 골대에 넣는 실수를 범했다. 그러나 이 실수는 치명적이지 않았다. 레알 마드리드 골키퍼 이케르 카시야스가 두 골에서 실수를 저지르면서 밀란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타디움에서 첫 승리(3대2)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디다는 스토라리가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전 자리를 유지했으며, 10월 25일 키에보와의 2대1 승리 경기에서 파블로 그라노체의 막판 선방과 10월 28일 나폴리 원정 2대2 무승부 경기에서 몇 분 간격으로 펼쳐진 더블 및 트리플 선방 등 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디다는 4번의 무실점 경기를 기록하고 경기당 평균 1골을 허용하며 밀란의 리그 8경기 무패 행진을 이끌었지만, 이 기록은 12월 13일 팔레르모와의 0대2 패배로 끝났다. 디다가 2010년에도 등번호 1번을 유지하고 아비아티가 부상에서 복귀하면서 스토라리는 1월 15일 삼프도리아로 임대되었다. 그러나 아비아티가 10개월 만에 1월 31일 리보르노와의 1대1 무승부 경기에 복귀했지만, 디다는 등 부상으로 결장했다. 이후 레오나르두 감독이 확실한 주전을 정하지 못하면서 두 골키퍼는 선발 라인업에서 번갈아 기용되었다. 하지만 2월 21일 바리와의 2대0 승리 경기에서 아비아티의 활약으로 디다는 벤치로 밀려났다. 아비아티가 3월 28일 건염으로 다시 결장하자 디다는 시즌 남은 기간 동안 선발 출전하며 4년 만에 가장 많은 세리에 A 출전(23경기)을 기록했다. 5월 1일, 그는 피오렌티나와의 1대0 승리 경기에서 밀란 소속으로 모든 대회 통틀어 300번째 경기를 치렀으며, 5월 15일 유벤투스와의 시즌 마지막 3대0 승리 경기 88분에는 아비아티와 교체되며 기립 박수를 받았다. 밀란에서의 그의 마지막 경기는 MLS 팀 시카고 파이어와의 시즌 후 친선 경기였다.
2010년 6월 30일 디다의 계약이 만료되면서 그는 10년간의 밀란 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밀란에서 총 302경기에 출전했으며, 이는 크리스티안 아비아티(380경기), 세바스티아노 로시(330경기)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기록이다. 그는 챔피언스리그에서 현재 6번째로 많은 무실점 경기(35경기)를 기록했으며, 경기당 무실점 비율은 두 번째로 높았다 (49%, 에드윈 판 데르 사르의 52%에 이어). 또한 그는 챔피언스리그 역사상 4번째로 긴 무패 기록(623분)을 보유하고 있다.
디다는 팀을 떠난 후에도 팀 관련 행사에 계속 참여했다. 그는 HJK 헬싱키와 벨레스 사르스피엘드와 같은 클럽의 다른 베테랑들과의 자선 친선 경기에서 밀란 글로리에 (졸업생 선발팀)에 합류했으며, 이 경기에서 종종 골키퍼 대신 공격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2012년 5월, 그는 밀라노 비치 사커를 대표하여 2012년 클럽 문디알리토 비치 사커 토너먼트에 참가했는데, 밀란은 3경기에서 무승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3.3. 브라질 복귀
3.3.1. 포르투게자 (2012)
2년간 유럽에서 계약을 확보하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던 디다는 선수 경력을 재개하기 위해 브라질로 돌아왔다. 2012년 5월 24일, 포르투게자는 떠나는 골키퍼 웨베르통의 대체자로 2012년 브라질레이루 시즌 잔여 기간 동안 그와 계약했다. 그는 6월 26일 상파울루와의 1대0 승리 경기에서 데뷔했으며, 7월 1일에는 산투스와의 무실점 무승부 경기에서 활약했다. 이 경기는 디다와 18세 어린 산투스의 젊은 스타 네이마르 간의 세대 대결로 홍보되었다。디다는 32경기에 선발 출전하여 31골을 허용했지만, 포르투게자가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1부 리그 강등을 피하는 데 기여했으며, 계약이 만료되면서 시즌 후 팀을 떠났다.
3.3.2. 그레미우 (2013)
2012년 12월 19일, 디다는 포르투 알레그리 기반의 그레미우에 합의되지 않은 기간 동안의 계약으로 합류했는데, 이는 그가 원래 요구했던 임금 인하를 수락한 후 확정되었다. 그는 주전 골키퍼 마르셀루 그로헤의 경험 많은 백업을 찾던 반데를레이 루셈부르구 감독의 요청으로 영입되었다. 2013년 1월까지 디다는 26세의 그로헤를 제치고 주전으로 자리 잡았고, 37번의 리그 선발 출전에서 34골을 허용하며 그레미우가 크루제이루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는 코파 두 브라질 준결승전에서 코린치앙스를 승부차기로 탈락시켰는데, 이 승부차기에서 디다는 세 번의 페널티킥을 막아냈으며, 특히 전 밀란 팀 동료 알렉상드르 파투의 파넨카 킥 시도를 막아낸 것이 돋보였다. 그레미우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6강에서 인데펜디엔테 산타페에게 원정 다득점으로 패했으며, 이로 인해 루셈부르구 감독은 6월 30일 경질되었다.
3.3.3. 인테르나시오나우 (2013-2015)
그레미우가 시즌 말 그의 계약 연장 요청을 거부하자, 디다는 2013년 12월 26일 라이벌 인테르나시오나우와 2년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가족적인 이유로 포르투 알레그리에 머물고 싶었다며 클럽 간의 라이벌 관계를 축소 평가했다. 부상으로 인해 디다는 2014년 2월 23일 베라노폴리스와의 0대1 패배 경기에서야 데뷔했지만, 알리송 베케르와 무리엘 형제를 제치고 주전 자리를 차지했으며, 총 27번의 1군 경기에 출전하여 인테르나시오나우가 세리에 A 3위를 기록하고 2014년 캄페오나투 가우슈에서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9월 10일 전 소속팀 비토리아와의 0대2 패배 경기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인 후, 디다는 나흘 뒤 보타포구와의 2대0 승리 경기에서 무리엘에게 주전 자리를 내줬지만, 후반전에 부상 교체로 출전했다. 무리엘이 허벅지 부상에서 회복하는 동안 디다는 6경기 연속 선발 출전했지만, 10월 5일 샤페코엔시에게 0대5로 대패한 경기에서 늦은 태클로 퇴장당하면서 주전 자리를 영구히 잃었다. 이후 베케르가 인테르나시오나우의 주전 골키퍼로 자리 잡았고, 디다는 세 번째 골키퍼로 강등되었다. 그의 마지막 출전은 2015년 4월 5일 파수 푼두와의 2대0 승리 경기였으며, 이 경기에서 그는 41세 6개월의 나이로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출전한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8월 25일, 디다가 팀 훈련 세션에서 일련의 아크로바틱한 선방을 하는 온라인 영상이 바이럴되었다. 2016년에는 연말까지 계속 뛸 새로운 클럽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은퇴했다.
4. 국가대표 경력
4.1. 유스 경력 및 초기 선발
디다는 이름이나 성 대신 별명으로 알려진 최초의 주요 브라질 골키퍼이다. 그는 1993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주전으로 U-20 대표팀을 처음으로 대표했으며, 6경기에서 4번의 무실점을 기록하고 단 2골만을 허용하며 브라질의 우승에 기여했다. 타파레우가 유니폼 규정 위반으로 1995년 코파 아메리카의 첫 두 경기에서 출전 정지 징계를 받자, 디다는 21세의 나이로 에콰도르와의 1대0 승리 경기에서 성인 대표팀 첫 캡을 기록했으며, 페루와의 2대0 승리 경기에도 선발 출전했다.
그는 마리우 자갈루 감독에 의해 1996년 CONCACAF 골드컵에 백업으로 발탁되었는데, 브라질은 이 대회에 U-23 대표팀을 파견했다. 그는 벤치를 떠나지 못했고, 브라질은 멕시코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다. 디다는 1996년 하계 올림픽 주전으로 지명되었지만, 브라질은 실망스러운 캠페인을 겪으며 동메달에 그쳤다. 그는 일본과의 0대1 패배 경기에서 동료 알다이르와 충돌하여 일본에 빈 골대를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유명세를 얻었다.
4.2. 주요 토너먼트 및 성공
디다는 1997년 코파 아메리카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되었지만, 그 해 열린 초대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주전으로 복귀하여 5번의 무실점 경기를 기록하고 총 2골만을 허용하며 브라질이 결승에서 오스트레일리아를 6대0으로 대파하고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데 기여했다. 비록 그는 1998년 월드컵에 발탁되었지만, 자갈루 감독은 타파레우를 3년간의 은퇴에서 설득하여 주전으로 삼았고, 디다는 백업 카를루스 제르마누에 이어 세 번째 골키퍼로 브라질이 개최국 프랑스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1998년 한 해 동안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으며, 이는 그가 이듬해 초 크루제이루를 떠나 밀란으로 이적하기로 결정한 요인이 되었다. 1999년, 새로운 감독 반데를레이 루셈부르구의 지휘 아래 디다는 199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루과이를 3대0으로 꺾고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는 대회에서 총 2골만을 허용했으며, 8강에서 라이벌 아르헨티나와의 2대1 승리 경기에서 로베르토 아얄라의 동점골 페널티킥을 막아냈다. 그는 그 해 두 번째로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출전하여 브라질이 조별리그에서 무실점을 기록하고 준결승에서 개최국 사우디아라비아를 8대2로 대파했지만, 결승에서 다시 한번 멕시코에게 3대4로 패배했다. 1999년 코파 아메리카 결승전 전 브라질의 전설적인 골키퍼 모아시르 바르보사는 디다에 대해 "그는 수년간 (골키퍼) 포지션을 지배할 것이다. 나는 신이 그를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디다는 2001년 세 번째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선발 출전하여 2년 연속으로 모든 조별리그 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했지만, 브라질은 일본에 이어 2위를 기록하며 1승 2무에 그쳤다. 이후 준결승에서 최종 우승팀 프랑스에 1대2로 패했고, 3위 결정전에서는 호주에 0대1로 패했다.
루이스 펠리피 스콜라리 감독이 코린치앙스에서의 그의 활약에 주목하면서, 디다는 2002년 월드컵에 마르쿠스의 백업으로 발탁되었다. 스콜라리 감독은 이전에 파우메이라스에서 마르쿠스를 지도한 바 있으며, 디다와 세 번째 골키퍼 호제리우 세니는 브라질이 다섯 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벤치를 떠나지 못했다. 결승전 당일 오후, 디다는 호나우두의 요청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며 1998년 결승전 전 호나우두가 겪었던 경련과 같은 사건의 재발을 피하려 했다. 그들은 요코하마 국제종합경기장으로 떠나기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골프를 쳤다. 호나우두는 독일과의 2대0 승리 경기에서 두 골을 모두 넣으며 대회 골든 슈를 수상했다.
디다는 2003년 네 번째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선발 출전했지만, 브라질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며 역대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는 2005년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컨페더레이션스컵에 출전했으며, 멕시코와의 조별리그 0대1 패배 경기에서 하레드 보르게티의 페널티킥을 막아냈는데, 이는 반복된 페널티 에어리어 침범으로 인해 두 번이나 재개되었다. 보르게티는 첫 시도에서는 득점했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는 크로스바를 맞혔다. 디다는 6월 22일 일본과의 2대2 무승부 경기에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감독에 의해 휴식을 취했고, 이 경기는 마르쿠스가 브라질 대표팀에서 마지막 캡을 기록한 경기가 되었다. 개최국 독일과의 준결승 3대2 승리 경기에서 그는 대회에서 두 번째 페널티킥을 맞닥뜨렸는데, 디다가 방향을 맞혔음에도 불구하고 미하엘 발라크가 성공시켰다. 그는 결승에서 아르헨티나를 4대1로 완파하며 브라질이 승리한 후 국제 경력의 마지막 트로피를 획득하면서 두 번의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자가 되었다.
4.3. 2006년 월드컵과 국가대표 은퇴
86번의 출전과 두 번의 월드컵에서 미출전 후보 선수로 보낸 후, 디다는 2006년 독일에서 열린 2006년 월드컵 본선에 선발 출전했다. 그는 32세 8개월의 나이로 지우마르 (1966년 35세)에 이어 브라질 역대 두 번째 최고령 월드컵 골키퍼가 되었다. 그는 루시우와 후안과 함께 크로아티아, 호주, 일본과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단 한 골만을 허용하는 브라질의 무명 수비진의 일원이었다. 16강전 가나와의 3대0 승리 경기에서 디다는 존 멘사의 근거리 슛을 다리로 막아냈고, 1970년 FIFA 월드컵 우승자인 토스탕의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브라질은 경기 내내 공격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8강에서 프랑스에게 0대1로 패하며 탈락했다. 디다와 수비진은 팀의 실망스러운 성과에 대한 언론의 비판을 피한 몇 안 되는 선수였다. 그는 카푸가 휴식을 취한 6월 22일 일본과의 4대1 승리 경기에서 1978년 에메르손 레앙 이후 처음으로 브라질의 주장 완장을 찬 골키퍼가 되었다。
디다는 2006년 7월 둥가가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후 다시는 브라질 대표팀에서 뛰지 않았고, 10월 1일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그는 총 91번의 출전을 기록했으며, 이는 타파레우(101회)와 지우마르(94회)에 이어 브라질 골키퍼 중 역대 세 번째로 많은 기록이다. 그는 70골을 허용했다. 디다는 컨페더레이션스컵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선수로, 출전 횟수(22회)와 총 무실점 경기(12회)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대회 5회 출전은 유일한 기록이다. 그는 국제 경력에서 총 8번의 페널티킥을 맞닥뜨려 그 중 6개를 막아냈다.
5. 코치 경력
2015년 인테르나시오나우와의 계약이 만료된 후, 디다는 코치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하면서 일시적으로 클럽에 인턴십 역할로 남아 있었다. 그는 2015년 12월 전 브라질 팀 동료인 타파레우와 히카르지뉴와 함께 브라질 축구 연맹이 요구하는 과정을 이수했다. 2016년 10월부터 11월까지 그는 전 밀란 팀 동료이자 당시 선전의 감독이었던 클라렌스 세도르프의 초청으로 중국 2부 리그 클럽 선전의 보조 코치 및 고문으로 활동했다. 2018년 8월, 디다는 이집트 프리미어리그의 피라미드 FC 기술 스태프에 합류하여 추가적인 골키퍼 훈련을 제공했으며, 1년 후에는 밀란으로 돌아와 팀의 유소년팀 골키퍼 코치를 맡았다. 2020년 8월, 그는 2020-21 시즌 성인팀의 골키퍼 코치로 승격되었다.
6. 플레이 스타일과 평가
디다는 여러 전문가들로부터 그의 세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이자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위대한 골키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 특히 밀란 시절 그의 플레이 스타일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그는 우수한 골키퍼를 배출하는 것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에서 브라질 골키퍼로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것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당시 밀란의 골키퍼 코치이자 이전에 파르마에서 잔루이지 부폰을 지도했던 빌리엄 베키와 함께 광범위하게 훈련했다. 베키는 디다를 경기에서 "더 사려 깊다"고 묘사한 반면, 부폰은 주로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고 말했다. 전성기 시절 디다는 슈팅 방어, 골 에어리어 장악, 그리고 그의 큰 체구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운동 능력과 반사 신경으로 인정받았으며, 과장된 동작 없이 아크로바틱한 "기적의" 선방을 펼칠 수 있었다. 전 감독들은 그가 실점 후에도 감정을 잘 조절하는 능력에 대해 칭찬했다. 디다의 가장 잘 알려진 강점은 페널티킥 선방 능력으로, 이는 특히 크루제이루와 코린치앙스에서의 업적으로 인해 브라질에서 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또한 경기장 안팎에서 절제된 성격과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며, 뛰어난 신체 조건과 직업 윤리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나 디다는 때때로 실수나 실점으로 이어지는 집중력 부족으로 비판에 직면했으며, 2000년 리즈전 실수가 가장 두드러진 예시로 남아 있다. 그는 풋워크, 골라인에서 벗어나는 데 망설임, 그리고 크로스 처리 능력에 대해 의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밀란에서 성공을 거둘 당시 그는 세계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여겨졌으며, 부폰과 세계 축구 최고의 골키퍼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하지만 2005년 4월 인테르나치오날레와의 조명탄 사건은 그의 뛰어난 활약이 끝나는 촉매제로 언급된다. 2006년 더 가디언은 디다를 1990년대 리버풀에서 골키퍼 실수로 악명 높았던 데이비드 제임스에 대한 "브라질의 답변"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또한 기량 하락으로 인해 전 밀란 골키퍼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파비오 쿠디치니는 2007년 디다의 실수가 심리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보았고, 엔리코 알베르토시는 2009년 디다가 "전성기 때조차도" 골문에서 "결코 보장이 되지 않았다"고 더욱 직설적으로 말했다.
6.1. 별명
디다는 클럽 경력 동안 많은 별명을 얻었다. 크루제이루 시절에는 아 무랄랴 아줄(A muralha azul포르투갈어, "푸른 벽")으로 불렸고, 코린치앙스에서는 상 디다(São Dida포르투갈어, "성 디다")와 오 헤이 두스 페날치스(O rei dos pênaltis포르투갈어, "페널티의 왕")로 불렸다. 밀란 채널 아나운서 카를로 펠레가티는 그의 아크로바틱한 선방 때문에 그에게 바게라 라 판테라(Baghera la pantera이탈리아어, 정글북의 바게라를 인용한 것)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밀란 서포터들은 그의 본명인 넬슨에서 따와 호레이쇼 넬슨 제독에 빗대어 람미랄리오(L'Ammiraglio이탈리아어, "제독")라고 불렀지만, 반대로 부진한 경기 후에는 이탈리아어로 "재앙"을 뜻하는 디사스트로(disastro)를 변형한 디다스트로(Didastro이탈리아어)라고 불리기도 했다. 플라카르는 그의 경기 중 무표정한 성격 때문에 그를 아 젤라데이라(a geladeira포르투갈어, "냉장고")와 오멘 지 젤루(homem de gelo포르투갈어, "아이스맨")라고 불렀다.
7. 유산과 영향
모아시르 바르보사는 바스코 다 가마에서 뛰었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17번의 경기에 출전했지만, 1950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우루과이의 결승골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고, 이후 브라질 축구에서 흑인 골키퍼에 대한 차별을 초래했다. 디다는 1995년 국가대표팀 데뷔 후, 1999년 코파 아메리카 선발 출전, 특히 2006년 56년 만에 처음으로 월드컵에서 선발 출전한 흑인 골키퍼가 되면서 이러한 장벽을 허물었다고 브라질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2006년 5월 27일 스위스 베기스에서 브라질 대표팀이 공개 훈련을 하던 중 열린 기자회견에서 디다는 동포들에게 바르보사를 용서하고, 대신 브라질 축구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기여를 기억해 달라고 촉구했다. 6월 11일, 브라질 대표팀이 크로아티아와의 개막전을 이틀 앞두고 폴랴 지 상파울루는 "흑인, 북동부 출신, 그리고 30대인 디다는 브라질 골키퍼에게 장벽을 허물 것"이라고 평했다. 이러한 찬사는 대회와 그의 국가대표팀 은퇴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디다와 바르보사는 여전히 월드컵 본선 경기에서 선발 출전한 유일한 아프로 브라질인 골키퍼로 남아 있다.
클럽 수준에서 디다의 밀란에서의 성공은 브라질 팀에서 흑인 골키퍼의 존재감을 높이는 요인으로 언급되며, 타파레우와 함께 유럽에서 브라질 골키퍼의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제로 오라는 디다가 2014년 1월 인테르나시오나우와 계약하면서 1971년 이후 처음으로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뛴 흑인 골키퍼가 되었다고 보도했다. 일부 골키퍼들은 존경의 표시로 그의 플레이 이름을 따르거나, 외모적 유사성 때문에 그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8. 축구 외 활동
디다는 2013년 12월 18일 이탈리아 시민권을 획득했다. 같은 해, 그의 고향인 라고아 다 카노아의 한 체육관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2014년 4월 그는 알바로 멜루 시장과 만나 청소년 스포츠 참여에 대해 논의했다. 2015년 9월 11일, 디다는 알라고아스 주의 명예 시민으로 임명되었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밀란에서 디다와 함께 뛰었던 전 레프트백 세르징요는 현재 그의 에이전트이자 매니저를 맡고 있다.
2014년 디다와 당시 인테르나시오나우 팀 동료였던 후안과 안드레스 달레산드로는 범아메리카 보건 기구를 위한 공익 광고를 촬영했는데, 이는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한 예방접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18년 10월 17일, 디다는 크루제이루와 코린치앙스 간의 코파 두 브라질 결승전 2차전 시작을 알리기 위해 아레나 코린치앙스에서 코파 두 브라질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그는 1996년 크루제이루, 2000년 코린치앙스에서 이 트로피를 모두 획득한 바 있다.
9. 경력 통계
9.1. 클럽
클럽 | 시즌 | 리그 | 컵대회 | 대륙 대회 | 기타 대회 | 총합 | |||||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비토리아 | 1992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1993 | 24 | 0 | 0 | 0 | 0 | 0 | 0 | 0 | 24 | 0 | |
총합 | 24 | 0 | 0 | 0 | 0 | 0 | 0 | 0 | 24 | 0 | |
크루제이루 | 1994 | 23 | 0 | 0 | 0 | 6 | 0 | 0 | 0 | 29 | 0 |
1995 | 20 | 0 | 3 | 0 | 8 | 0 | 0 | 0 | 31 | 0 | |
1996 | 22 | 0 | 9 | 0 | 0 | 0 | 0 | 0 | 31 | 0 | |
1997 | 25 | 0 | 2 | 0 | 20 | 0 | 1 | 0 | 48 | 0 | |
1998 | 30 | 0 | 5 | 0 | 14 | 0 | 0 | 0 | 49 | 0 | |
총합 | 120 | 0 | 19 | 0 | 48 | 0 | 1 | 0 | 188 | 0 | |
루가노 | 1998-99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코린치앙스 (임대) | 1999 | 25 | 0 | 0 | 0 | 0 | 0 | 0 | 0 | 25 | 0 |
2000 | 0 | 0 | 0 | 0 | 11 | 0 | 4 | 0 | 15 | 0 | |
총합 | 25 | 0 | 0 | 0 | 11 | 0 | 4 | 0 | 40 | 0 | |
AC 밀란 | 2000-01 | 1 | 0 | 0 | 0 | 6 | 0 | 0 | 0 | 7 | 0 |
2002-03 | 30 | 0 | 0 | 0 | 14 | 0 | 0 | 0 | 44 | 0 | |
2003-04 | 32 | 0 | 2 | 0 | 10 | 0 | 1 | 0 | 45 | 0 | |
2004-05 | 36 | 0 | 0 | 0 | 13 | 0 | 1 | 0 | 50 | 0 | |
2005-06 | 36 | 0 | 0 | 0 | 12 | 0 | 0 | 0 | 48 | 0 | |
2006-07 | 25 | 0 | 3 | 0 | 13 | 0 | 0 | 0 | 41 | 0 | |
2007-08 | 13 | 0 | 0 | 0 | 5 | 0 | 2 | 0 | 20 | 0 | |
2008-09 | 10 | 0 | 1 | 0 | 8 | 0 | 0 | 0 | 19 | 0 | |
2009-10 | 23 | 0 | 0 | 0 | 5 | 0 | 0 | 0 | 28 | 0 | |
총합 | 206 | 0 | 6 | 0 | 86 | 0 | 4 | 0 | 302 | 0 | |
코린치앙스 | 2001 | 8 | 0 | 0 | 0 | 0 | 0 | 0 | 0 | 8 | 0 |
2002 | 0 | 0 | 9 | 0 | 0 | 0 | 18 | 0 | 27 | 0 | |
포르투게자 | 2012 | 32 | 0 | 0 | 0 | 0 | 0 | 0 | 0 | 32 | 0 |
그레미우 | 2013 | 37 | 0 | 6 | 0 | 8 | 0 | 9 | 0 | 60 | 0 |
인테르나시오나우 | 2014 | 27 | 0 | 5 | 0 | 2 | 0 | 7 | 0 | 41 | 0 |
2015 | 0 | 0 | 0 | 0 | 0 | 0 | 1 | 0 | 1 | 0 | |
총합 | 27 | 0 | 5 | 0 | 2 | 0 | 8 | 0 | 42 | 0 | |
경력 총합 | 479 | 0 | 45 | 0 | 153 | 0 | 37 | 0 | 723 | 0 |
9.2. 국가대표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 득점 |
---|---|---|---|
브라질 | 1995 | 3 | 0 |
1996 | 6 | 0 | |
1997 | 6 | 0 | |
1998 | 0 | 0 | |
1999 | 17 | 0 | |
2000 | 10 | 0 | |
2001 | 6 | 0 | |
2002 | 5 | 0 | |
2003 | 11 | 0 | |
2004 | 9 | 0 | |
2005 | 12 | 0 | |
2006 | 6 | 0 | |
총합 | 91 | 0 |
10. 수상 경력
크루제이루
- 코파 데 오로: 1995
- 코파 두 브라질: 1996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97
코린치앙스
-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에 A: 1999
- 코파 두 브라질: 2002
- 토르네이우 리우-상파울루: 2002
- FIFA 클럽 월드컵: 2000
AC 밀란
- 세리에 A: 2003-04
- 코파 이탈리아: 2002-03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2004
- UEFA 챔피언스리그: 2002-03, 2006-07
- UEFA 슈퍼컵: 2003, 2007
- FIFA 클럽 월드컵: 2007
인테르나시오나우
- 캄페오나투 가우슈: 2014, 2015
브라질 유스
- 남미 유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1992
- FIFA U-20 월드컵: 1993
- CONMEBOL 남자 올림픽 예선 토너먼트: 1996
브라질
- FIFA 월드컵: 2002
- 코파 아메리카: 1999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1997, 2005
개인
- 플라카르 볼라 지 프라타: 1993 (비토리아), 1996, 1998 (크루제이루), 1999 (코린치앙스)
- IFFHS 세계 최고의 골키퍼 실버 볼: 2005
- IFFHS 세계 최고의 골키퍼 브론즈 볼: 2004
- FIFPro 월드 XI: 2005
- FIFPro 올해의 골키퍼: 2005
- IFFHS 21세기 최고의 브라질 골키퍼
- AC 밀란 명예의 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