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반니 파피니(Giovanni Papini, 1881년 1월 9일 ~ 1956년 7월 8일)는 이탈리아의 언론인, 수필가, 소설가, 단편소설 작가, 시인, 문학 평론가, 철학자이다. 20세기 초중반의 논란이 많은 문학계 인물이었던 그는 이탈리아 실용주의의 가장 초기이자 가장 열정적인 대표자이자 주창자였다. 그의 글쓰기 스타일은 널리 칭송받았으며, 그는 뜨거운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파피니는 미래주의, 탈데카당스주의와 같은 아방가르드 운동에 깊이 관여했으며, 끊임없이 불만족스럽고 불안정한 상태로 하나의 정치적, 철학적 입장에서 다른 입장으로 변화했다. 그는 반성직자주의와 무신론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1915년 이전의 확고한 개입주의자에서 전쟁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1930년대에는 개인주의에서 보수주의로, 최종적으로는 파시즘으로 전향했지만, 나치즘에 대한 혐오감은 유지했다.
그는 잡지 『레오나르도』(1903년)와 『라체르바』(1913년)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문학을 "행동"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글에 웅변적이고 불경한 어조를 부여했다. 독학으로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향력 있는 인습 타파적인 편집자이자 작가였으며, 이탈리아 미래주의와 초기 청년 문학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피렌체에서 활동하며 앙리 베르그송의 프랑스 직관주의와 찰스 샌더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의 미국-영국 실용주의와 같은 해외 문학, 철학, 정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삶과 예술에 대한 개인주의적이고 몽환적인 개념으로 이탈리아 문화와 생활의 발전을 촉진하며 로마 가톨릭교의 종교적 신념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파피니의 문학적 성공은 1906년 출판된 『사양의 철학자』(Il crepuscolo dei filosofi이탈리아어)와 1913년 출판된 자서전적 소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사나이』(Un uomo finito이탈리아어)로 시작되었다. 그의 이념적 선택으로 인해 파피니의 작품은 사후 거의 잊혔지만, 이후 재평가되고 다시 인정받았다. 1975년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그를 "부당하게 잊힌" 작가라고 칭했다.
2. 생애
조반니 파피니는 19세기 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독특한 성장 과정을 거치며 20세기 이탈리아 문학 및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사상적 변화와 다양한 문학 활동으로 점철되어 있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조반니 파피니는 1881년 1월 9일 피렌체의 보르고 델리 알비치에서 가구 소매상(전 주세페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 단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공격적인 반성직자주의를 피하기 위해 그를 비밀리에 세례시켰다. 그는 거의 전적으로 독학으로 공부했으며, 정식 대학 학위는 받지 못했고, 최고 학력은 교사 자격증이었다. 파피니는 소박하고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모든 신념과 교회, 그리고 모든 형태의 예속(그가 종교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던)에 강한 혐오감을 느꼈다. 그는 모든 문화를 요약한 백과사전을 쓰는 아이디어에 매료되었다.
1900년부터 1902년까지 이탈리아어로 Istituto di Studi Superiori이탈리아어에서 훈련을 받았고, 이후 1년간 영-이탈리아 학교에서 가르쳤다. 1902년부터 1904년까지는 인류학 박물관의 사서로 일했다.
2.2. 초기 활동
파피니는 문학계에 매료되어 1903년 잡지 『일 레오나르도』(Il Leonardo이탈리아어)를 창간하고 "지안 팔코"(Gian Falco이탈리아어)라는 필명으로 기고했다. 이 잡지에는 주세페 프레촐리니, 보르게세, 바일라티, 코스테티, 칼데로니 등이 공동으로 참여했다. 파피니와 그의 동료들은 『일 레오나르도』를 통해 쇠렌 키르케고르, 찰스 샌더스 퍼스, 프리드리히 니체, 조지 산타야나, 앙리 푸앵카레와 같은 중요한 사상가들을 이탈리아에 소개했다. 이후 그는 엔리코 코라디니가 이끌던 국수주의 출판물 『일 레뇨』(Il Regno이탈리아어)의 직원으로 합류하여 이탈리아의 식민 확장주의를 지지했다.
파피니는 윌리엄 제임스와 앙리 베르그송을 만났고, 이들은 그의 초기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06년 『일상이 비극적이다』(Il Tragico Quotidiano이탈리아어), 1907년 『눈먼 조종사』(Il Pilota Cieco이탈리아어)와 『사양의 철학자』(Il crepuscolo dei filosofi이탈리아어) 등의 단편 소설과 에세이를 출판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양의 철학자』는 임마누엘 칸트,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오귀스트 콩트, 허버트 스펜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니체와 같은 기존의 다양한 지식인들과 논쟁을 벌였다. 파피니는 철학의 죽음과 사유 자체의 해체를 선언했다. 그는 잠시 미래주의와 다른 폭력적이고 해방적인 형태의 모더니즘에 경도되기도 했다.
1907년 파피니는 자킨타 조바뇰리(Giacinta Giovagnoli이탈리아어)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3. 주요 활동 및 업적
조반니 파피니의 생애는 그의 끊임없는 사상적 변천과 다양한 문학적, 철학적 탐구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이탈리아 문학계와 지성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그의 종교적 개종은 그의 삶과 작품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3.1. 문학 및 비평 활동
1907년 『일 레오나르도』를 떠난 후, 조반니 파피니는 여러 다른 잡지를 창간했다. 1908년 『라 보체』(La Voce이탈리아어)를 발행했고, 이어서 조반니 아멘돌라와 주세페 프레촐리니와 함께 『란니마』(L'Anima이탈리아어)를 창간했다. 1913년(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직전)에는 『라체르바』(Lacerba이탈리아어, 1913~1915년)를 창간했다. 3년 동안 파피니는 『메르퀴르 드 프랑스』(Mercure de France프랑스어)의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나중에는 『라 나치오네』(La Nazione이탈리아어)의 문학 평론가로 활동했다. 1918년경에는 아르덴고 소피치와 함께 또 다른 평론지 『라 브레 이탈리에』(La Vraie Italie프랑스어)를 창간했다.
그의 펜에서 여러 책이 나왔다. 『말과 피』(Parole e Sangue이탈리아어)는 그의 근본적인 무신론을 보여주었다. 또한 파피니는 예수와 사도 요한이 동성애 관계를 가졌다는 추측을 통해 스캔들을 일으키려 했다. 1912년에는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자서전적 소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사나이』(Un Uomo Finito이탈리아어)를 출판했다.
1915년 시적 산문집 『백 페이지의 시』(Cento Pagine di Poesia이탈리아어)를 출판했으며, 이어서 『익살』(Buffonate이탈리아어), 『남성성』(Maschilità이탈리아어), 『비판』(Stroncature이탈리아어)을 출판했다. 이 작품에서 파피니는 조반니 보카치오, 윌리엄 셰익스피어, 요한 볼프강 폰 괴테뿐만 아니라 베네데토 크로체와 조반니 젠틸레 같은 동시대 인물, 그리고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덜 유명한 제자들과도 대면했다. 한 평론가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조반니 파피니는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지성 중 한 명이다. 그는 진실을 향한 현대의 끊임없는 탐구를 훌륭하게 대표하며, 그의 작품은 과거에 대한 무지가 아니라 과거에 대한 연구와 이해에 기반을 둔 상쾌한 독립성을 보여준다."
1917년에는 『첫 작품』(Opera Prima이탈리아어)이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출판했다. 1921년에는 새로 발견한 로마 가톨릭 신앙을 선언하며 『그리스도전』(Storia di Cristo이탈리아어)을 출판했다. 이 책은 23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은 그의 가톨릭 개종을 상징하는 작품이었다. 피란델로는 이 책에 대해 "파피니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그의 자랑스러운 영적 충동, 끊임없는 열정, 새롭고 도발적인 아이디어의 풍부함, 그리고 강력한 비판은 젊은 세대에게 강력한 자극이 되었으며, 심지어 진정한 독립성을 가진 작가들까지도 일시적으로 그의 편으로 끌어들였다."고 평가했다.

이후에도 그는 시 작품을 더 발표했으며, 1931년에는 풍자 소설 『고그』(Gog이탈리아어)를, 1933년에는 에세이 『살아있는 단테』(Dante Vivo이탈리아어)를 출판했다.
3.2. 사상적 변천과 철학적 탐구
파피니의 사상적 여정은 끊임없는 탐색과 변화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이탈리아 실용주의의 초기 주창자였으며, 아방가르드 운동, 특히 미래주의와 탈데카당스주의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항상 불만족스럽고 불안정한 상태로 하나의 정치적, 철학적 입장에서 다른 입장으로 옮겨갔다.
초기에는 반성직자주의와 무신론의 입장을 취했으나, 이후 가톨릭으로 개종하며 그의 사상에 큰 전환점을 맞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확고한 개입주의자였으나, 전쟁을 겪으면서 전쟁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1930년대에는 개인주의에서 보수주의로, 최종적으로는 파시즘으로 전향하는 복잡한 사상적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나치즘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유지했다. 이러한 사상적 변천은 그의 작품과 삶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핵심적인 특징이다.
3.3. 종교적 저술 및 개종
파피니는 1921년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의 개종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 개종은 그의 삶과 문학 활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개종 이후 그는 종교적 주제에 대한 여러 중요한 저작을 남겼다.
그의 가장 유명한 종교적 저작은 1921년에 출판된 『그리스도전』(Storia di Cristo이탈리아어)이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23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작품은 파피니의 깊어진 신앙심과 그리스도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며, 그의 문학적 명성을 더욱 공고히 했다. 또한 그는 1931년에 『성 아우구스티누스』(Sant'Agostino이탈리아어)를 저술하며 가톨릭 신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종교적 저술들은 그의 사상적 변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문학적 스펙트럼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정치적 입장 및 역사적 사건과의 관계
조반니 파피니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격동적인 정치적, 역사적 사건 속에서 다양한 입장을 취하며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과 파시즘 시대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의 복잡한 사상적 변천을 잘 보여준다.
4.1. 제1차 세계대전과 개입주의
파피니는 1913년부터 1915년까지 발행된 잡지 『라체르바』(Lacerba이탈리아어)를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직전에 창간했다. 그는 전쟁 이전에 확고한 개입주의자로서 이탈리아의 전쟁 참여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그는 점차 전쟁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의 태도는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사상적 유동성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4.2. 파시즘과의 관계 및 비판
1930년대에 파피니는 파시즘으로 전향했으며, 나치즘에 대한 혐오감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과 협력했다. 1935년, 파시스트 당국은 그의 "흠잡을 데 없는 평판"을 인정하며 그를 볼로냐 대학교의 교수로 임명했다. 1937년, 파피니는 자신의 『이탈리아 문학사』(Storia della Letteratura Italiana이탈리아어) 단행본을 무솔리니에게 헌정하며 "시와 시인들의 친구인 두체에게"라고 썼다. 이로 인해 그는 학계에서,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 연구 분야에서 최고 직위를 받았다. 1940년 파피니의 『이탈리아 문학사』는 나치 독일에서 『영원한 이탈리아: 문학 제국의 위인들』({{deu|Ewiges Italien - Die Großen im Reich seiner Dichtung}})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1941년에서 1942년 사이에 요제프 괴벨스가 설립한 유럽 작가 연맹({{deu|Europäische Schriftstellervereinigung}})의 부회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파시스트 정권과의 긴밀한 협력은 그의 생애 후반에 큰 비판을 받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1943년 파시스트 정권이 붕괴하자, 파피니는 "프라 보나벤투라"({{ita|Fra' Bonaventura}})라는 이름으로 라 베르나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의 파시즘과의 협력은 그의 지적, 예술적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판단력의 부재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된다.
5. 개인적인 삶
조반니 파피니는 1907년 자킨타 조바뇰리(Giacinta Giovagnoli이탈리아어)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그의 사생활에 대한 공개된 정보는 많지 않지만, 그의 결혼 생활은 그의 복잡한 지적 여정 속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6. 말년과 죽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파피니는 대체로 명성을 잃었지만, 가톨릭 우익 세력에 의해 옹호되었다. 그의 말년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전기와 같은 다양한 주제에 집중되었으며, 그는 계속해서 어둡고 비극적인 에세이를 출판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주요 일간지인 『코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이탈리아어)와 협력하여 기사를 기고했으며, 이 기사들은 그의 사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파피니는 말년에 운동신경병으로 인한 진행성 마비와 실명으로 고통받았다. 그는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묘비는 피렌체의 산테 문 공동묘지(Cimitero delle Porte Sante이탈리아어)에 안치되어 있다.

7. 평가 및 유산
조반니 파피니는 20세기 이탈리아 문학 및 사상계에서 가장 논란이 많고 복합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의 생애와 작품은 극심한 사상적 변화와 정치적 입장의 변동으로 특징지어지며, 이는 후대에 대한 평가에서도 긍정적 측면과 비판적 측면이 공존하게 만들었다.
7.1. 긍정적 평가
파피니는 그의 뛰어난 글쓰기 스타일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다. 그는 영향력 있는 인습 타파적인 편집자이자 작가로서, 이탈리아 미래주의와 초기 청년 문학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루이지 피란델로는 파피니의 영향력이 "엄청났다"고 평가하며, 그의 "자랑스러운 영적 충동, 끊임없는 열정, 새롭고 도발적인 아이디어의 풍부함, 그리고 강력한 비판"이 젊은 세대에게 "강력한 자극"이 되었다고 언급했다. 확률의 주관적 이론을 창시한 브루노 데 피네티도 그를 존경했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파피니를 "부당하게 잊힌" 작가라고 칭하며, 그의 일부 단편 소설을 자신의 작품인 『바벨의 도서관』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평가는 파피니의 문학적 성취와 독창적인 사상이 여전히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7.2. 비판과 논란
파피니는 그의 생애 동안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사상적 전향, 특히 무신론에서 가톨릭으로의 개종과 파시즘과의 협력은 끊임없는 비판을 불러왔다. 그는 뜨거운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예수와 사도 요한의 동성애 관계를 추측하는 등 도발적인 발언으로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는 파시즘 정권과의 협력으로 인해 크게 명성을 잃었다. 특히 1951년 소설 『검은 책』(Il libro nero이탈리아어)에 실린 그의 가상 인터뷰 시리즈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과 NATO에 의해 파블로 피카소의 친공산주의 이미지를 훼손하기 위한 선전 도구로 사용되었다. 1962년 피카소는 자신의 전기 작가인 피에르 데익스에게 이 가상 인터뷰가 조작된 것임을 폭로해 달라고 요청했고, 데익스는 『레 레트르 프랑세즈』(Les Lettres Françaises프랑스어)를 통해 이를 폭로했다. 이는 파피니의 작품이 정치적 목적에 이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자, 그의 작품의 진정성에 대한 논란을 야기했다.
7.3. 후대에 미친 영향
파피니의 작품과 사상은 후대 문학, 사상, 문화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의 끊임없는 사상적 탐구와 문학적 실험은 많은 젊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특히 그의 실용주의 도입과 아방가르드 운동 참여는 이탈리아 현대 문학의 흐름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종교적 개종과 『그리스도전』과 같은 종교적 저작들은 이탈리아 가톨릭 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록 그의 파시즘과의 연관성으로 인해 사후 한동안 잊혔지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같은 후대 작가들의 재평가를 통해 그의 문학적 가치는 다시금 인정받았다. 그의 복잡한 사상적 여정과 논쟁적인 삶은 오늘날까지도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20세기 이탈리아 지성사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8. 저작
조반니 파피니는 평생 동안 다양한 장르의 수많은 작품을 저술했다. 다음은 그의 주요 저작 목록이다.
- 『예측의 심리학 이론』(La Teoria Psicologica della Previsione이탈리아어) (1902)
- 『행동 없이 느끼고 느낌 없이 행동하기』(Sentire Senza Agire e Agire Senza Sentire이탈리아어) (1905)
- 『사양의 철학자』(Il crepuscolo dei filosofi이탈리아어) (1906)
- 『도망치는 거울』(Lo specchio che fugge이탈리아어) (1906)
- 『일상이 비극적이다』(Il Tragico Quotidiano이탈리아어) (1906)
- 『이탈리아 문화』(La Coltura Italiana이탈리아어) (주세페 프레촐리니 공저, 1906)
- 『눈먼 조종사』(Il Pilota Cieco이탈리아어) (1907)
- 『신의 기억』(Le Memorie d'Iddio이탈리아어) (1911)
- 『다른 절반』(L'Altra Metà이탈리아어) (1911)
- 『아무도 없는 삶』(La Vita di Nessuno이탈리아어) (1912)
- 『말과 피』(Parole e Sangue이탈리아어) (1912)
-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사나이』(Un Uomo Finito이탈리아어) (1913)
- 『스물네 개의 뇌』(Ventiquattro Cervelli이탈리아어) (1913)
- 『실용주의에 대하여: 에세이 및 연구, 1903-1911』(Sul Pragmatismo: Saggi e Ricerche, 1903-1911이탈리아어) (1913)
- 『정화 연감 1914』(Almanacco Purgativo 1914이탈리아어) (아르덴고 소피치 외 공저, 1913)
- 『익살』(Buffonate이탈리아어) (1914)
- 『오래된 그리고 새로운 국수주의』(Vecchio e Nuovo Nazionalismo이탈리아어) (주세페 프레촐리니 공저, 1914)
- 『백 페이지의 시』(Cento Pagine di Poesia이탈리아어) (1915)
- 『남성성』(Maschilità이탈리아어) (1915)
- 『토요일의 급여』(La Paga del Sabato이탈리아어) (1915)
- 『비판』(Stroncature이탈리아어) (1916)
- 『첫 작품』(Opera Prima이탈리아어) (1917)
- 『종교 논쟁』(Polemiche Religiose이탈리아어) (1917)
- 『증언』(Testimonianze이탈리아어) (1918)
- 『카르두치 인간』(L'Uomo Carducci이탈리아어) (1918)
- 『중앙 유럽에 대항하는 서유럽』(L'Europa Occidentale Contro la Mittel-Europa이탈리아어) (1918)
- 『학교를 닫자』(Chiudiamo le Scuole이탈리아어) (1918)
- 『축제의 날들』(Giorni di Festa이탈리아어) (1918)
- 『미래주의 경험』(L'Esperienza Futurista이탈리아어) (1919)
- 『오늘의 시인들』(Poeti d'Oggi이탈리아어) (피에트로 판크라치 공저, 1920)
- 『그리스도전』(Storia di Cristo이탈리아어) (1921)
- 『이탈리아 종교 시 선집』(Antologia della Poesia Religiosa Italiana이탈리아어) (1923)
- 『야만인의 사전』(Dizionario dell'Omo Salvatico이탈리아어) (도메니코 줄리오티 공저, 1923)
- 『성스러운 해와 네 가지 평화』(L'Anno Santo e le Quattro Paci이탈리아어) (1925)
- 『빵과 와인』(Pane e Vino이탈리아어) (1926)
- 『포도원의 일꾼들』(Gli Operai della Vigna이탈리아어) (1929)
- 『성 아우구스티누스』(Sant'Agostino이탈리아어) (1931)
- 『고그』(Gog이탈리아어) (1931)
- 『야곱의 사다리』(La Scala di Giacobbe이탈리아어) (1932)
- 『피렌체』(Firenze이탈리아어) (1932)
- 『오크 괴물의 자루』(Il Sacco dell'Orco이탈리아어) (1933)
- 『살아있는 단테』(Dante Vivo이탈리아어) (1933)
- 『아르덴고 소피치』(Ardengo Soffici이탈리아어) (1933)
- 『지옥의 돌』(La Pietra Infernale이탈리아어) (1934)
- 『카르두치의 위대함』(Grandezze di Carducci이탈리아어) (1935)
- 『수난의 증인들』(I Testimoni della Passione이탈리아어) (1937)
- 『이탈리아 문학사』(Storia della Letteratura Italiana이탈리아어) (1937)
- 『나의 이탈리아』(Italia Mia이탈리아어) (1939)
- 『인간의 형상』(Figure Umane이탈리아어) (1940)
- 『메다르도 로소』(Medardo Rosso이탈리아어) (1940)
- 『은관』(La Corona d'Argento이탈리아어) (1941)
- 『개인전』(Mostra Personale이탈리아어) (1941)
- 『모든 세기의 이탈리아 가톨릭 산문』(Prose di Cattolici Italiani d'Ogni Secolo이탈리아어) (주세페 데 루카 공저, 1941)
- 『아버지의 모방: 르네상스에 대한 에세이』(L'Imitazione del Padre. Saggi sul Rinascimento이탈리아어) (1942)
- 『젊음의 이야기』(Racconti di Gioventù이탈리아어) (1943)
- 『하늘과 땅』(Cielo e Terra이탈리아어) (1943)
- 『숲의 잎사귀』(Foglie della Foresta이탈리아어) (1946)
- 『교황 첼레스티노 6세의 인류에게 보내는 편지』(Lettere agli Uomini di Papa Celestino VI이탈리아어) (1946)
- 『프리모 콘티』(Primo Conti이탈리아어) (1947)
- 『성인과 시인』(Santi e Poeti이탈리아어) (1948)
- 『먼 과거』(Passato Remoto이탈리아어) (1948)
- 『미켈란젤로의 생애』(Vita di Michelangiolo이탈리아어) (1949)
- 『시인의 광기』(Le Pazzie del Poeta이탈리아어) (1950)
- 『피렌체, 세계의 꽃』(Firenze Fiore del Mondo이탈리아어) (아르덴고 소피치, 피에로 바르젤리니, 조반니 스파돌리니 공저, 1950)
- 『검은 책』(Il libro nero이탈리아어) (1951)
- 『악마』(Il Diavolo이탈리아어) (1953)
- 『아름다운 여행』(Il Bel Viaggio이탈리아어) (엔초 팔메리 공저, 1954)
- 『환상적인 콘서트』(Concerto Fantastico이탈리아어) (1954)
- 『이상한 이야기』(Strane Storie이탈리아어) (1954)
- 『세상의 스파이』(La Spia del Mondo이탈리아어) (1955)
- 『흉상들의 로지아』(La Loggia dei Busti이탈리아어) (1955)
- 『불행한 자의 행복』(Le Felicità dell'Infelice이탈리아어) (1956)
사후 출판작
- 『이탈리아 문학의 새벽: 야코포네 다 토디에서 프랑코 사케티까지』(L'Aurora della Letteratura Italiana: Da Jacopone da Todi a Franco Sacchetti이탈리아어) (1956)
- 『재스민 벽: 어린 시절의 기억』(Il Muro dei Gelsomini: Ricordi di Fanciullezza이탈리아어) (1957)
- 『최후의 심판』(Giudizio Universale이탈리아어) (1957)
- 『두 번째 탄생』(La Seconda Nascita이탈리아어) (1958)
- 『인쇄업자에게 보내는 선언』(Dichiarazione al Tipografo이탈리아어) (1958)
- 『행복의 도시』(Città Felicità이탈리아어) (1960)
- 『일기』(Diario이탈리아어) (1962)
- 『조각들』(Schegge이탈리아어) (코리에레 델라 세라 기고문, 1971)
- 『인간에 대한 보고서』(Rapporto sugli Uomini이탈리아어) (1978)
전집
- 『조반니 파피니 전집』(Tutte le Opere di Giovanni Papini이탈리아어), 11권. 밀라노: 몬다도리 (1958-66).
영어 번역본
- 『스물네 개의 마음』(Four and Twenty Minds영어) (1922)
- 『그리스도 이야기』(The Story of Christ영어) (1923), 『그리스도의 삶』(Life of Christ영어)으로 재출판 (1923)
- 『실패자』(The Failure영어) (1924)
- 『끝난 남자』(A Man - Finished영어) (1924)
- 『신의 회고록』(The Memoirs of God영어) (1926)
- 『지성에 대한 찬가』(A Hymn to Intelligence영어) (1928)
- 『바보들을 위한 기도, 특히 미술관, 응접실, 극장에서 보는 바보들을 위한 기도』(A Prayer for Fools, Particularly Those we See in Art Galleries, Drawing-rooms and Theatres영어) (1929)
- 『포도원의 일꾼들』(Laborers in the Vineyard영어) (1930)
- 『삶과 나 자신』(Life and Myself영어) (도로시 엠리치 번역, 1930)
-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영어) (1930)
- 『고그』(Gog영어) (메리 프리처드 아그네티 번역, 1931)
- 『살아있는 단테』(Dante Vivo영어) (1935)
- 『교황 첼레스티노 6세의 모든 인류에게 보내는 편지』(The Letters of Pope Celestine VI to All Mankind영어) (1948)
- 『피렌체: 세계의 꽃』(Florence: Flower of the World영어) (아르덴고 소피치, 피에로 바르젤리니 공저, 1952)
- 『미켈란젤로, 그의 생애와 시대』(Michelangelo, his Life and his Era영어) (1952)
- 『악마; 미래의 악마학을 위한 노트』(The Devil; Notes for Future Diabology영어) (1954)
- 『니체: 에세이』(Nietzsche: An Essay영어) (1966)
- 『원이 닫히고 있다』(The Circle is Closing영어) (로렌스 레이니 편집, 『미래주의: 선집』 중, 2009)
선택된 논문
- "이탈리아의 철학"(Philosophy in Italy영어), 『모니스트』(The Monist영어) 8 (4), 1903년 7월, pp. 553-585.
- "실용주의는 어떤가"(What Pragmatism is Like영어), 『인기 과학 월간』(Popular Science Monthly영어), 71권, 1907년 10월, pp. 351-358.
- "역사극"(The Historical Play영어), 『리틀 리뷰』(The Little Review영어) 6 (2), pp. 49-51.
- "이그노토"(Ignoto영어), 『뉴 에이지』(The New Age영어) 26 (6), 1919, p. 95.
- "붓다"(Buddha영어), 『뉴 에이지』(The New Age영어) 26 (13), 1920, pp. 200-201.
- "루돌프 오이켄"(Rudolph Eucken영어), 『오픈 코트』(The Open Court영어), 38 (5), 1924년 5월, pp. 257-261.
단편 소설
- "어느 날의 빚"(The Debt of a Day영어), 『인터내셔널』(The International영어) 9 (4), 1915, pp. 105-107.
- "대리 자살"(The Substitute Suicide영어), 『인터내셔널』(The International영어) 10 (5), 1916, pp. 148-149.
- "사백오십삼 통의 연애편지"(Four-Hundred and Fifty-Three Love Letters영어), 『스트랫퍼드 저널』(The Stratford Journal영어) 3 (1), 1918, pp. 9-12.
- "영혼의 거지"(The Beggar of Souls영어), 『스트랫퍼드 저널』(The Stratford Journal영어) 4, 1919, pp. 59-64.
- "삶: 사라지는 거울"(Life: The Vanishing Mirror영어), 『배니티 페어』(Vanity Fair영어) 13 (6), 1920, p. 53.
- "돈 후안의 한탄"(Don Juan's Lament영어), 『배니티 페어』(Vanity Fair영어) 13 (10), 1920, p. 43.
- "내성적인 모험"(An Adventure in Introspection영어), 『배니티 페어』(Vanity Fair영어) 13 (10), 1920, p. 65.
- "사랑과 기억에 관한 것"(Having to do with Love - and Memory영어), 『배니티 페어』(Vanity Fair영어) 14 (2), 1920, p. 69.
- "이유 없이"(For no Reason영어), 『배니티 페어』(Vanity Fair영어) 14 (3), 1920, pp. 71, 116.
- "예언적 초상화"(The Prophetic Portrait영어), 『배니티 페어』(Vanity Fair영어) 14 (4), 1920, p. 73.
- "자신을 잃은 남자"(The Man who Lost Himself영어), 『배니티 페어』(Vanity Fair영어) 14 (5), 1920, p. 35.
- "희망"(Hope영어), 『배니티 페어』(Vanity Fair영어) 14 (6), 1920, p. 57.
- "관대한 자살"(The Magnanimous Suicide영어), 『배니티 페어』(Vanity Fair영어) 15 (1), 1920, p. 73.
- "잃어버린 날"(The Lost Day영어), 『배니티 페어』(Vanity Fair영어) 15 (3), 1920, pp. 79, 106.
- "우물 속의 두 얼굴"(Two Faces in the Well영어), 『배니티 페어』(Vanity Fair영어) 15 (4), 1920, p. 41.
- "악마와의 두 인터뷰"(Two Interviews with the Devil영어), 『배니티 페어』(Vanity Fair영어) 15 (5), 1921, pp. 59, 94.
- "물물교환된 영혼들"(The Bartered Souls영어), 『배니티 페어』(Vanity Fair영어) 15 (6), 1921, p. 57.
- "황제가 될 수 없었던 남자"(The Man Who Could Not be Emperor영어), 『배니티 페어』(Vanity Fair영어) 16 (1), 1921, p. 41.
- "사람들 중 한 남자 - 더 이상은 없어"(A Man Among Men - No More영어), 『배니티 페어』(Vanity Fair영어) 16 (2), 1921, p. 71.
- "그 자신의 간수"(His Own Jailer영어), 『리빙 에이지』(The Living Age영어), 1922년 12월 9일.
- "팔라스와 켄타우로스"(Pallas and the Centaur영어), 『이탈리아 문학 다이제스트』(Italian Literary Digest영어) 1 (1), 1947년 4월.
9. 대중문화에서의 언급
조반니 파피니는 그의 영향력과 논란 많은 삶으로 인해 여러 문학 작품과 대중문화에서 언급되거나 등장했다.
- 시인 미나 로이는 파피니와 연애 관계를 가졌으며, 그녀의 여러 시에 파피니가 등장인물로 언급된다.
-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는 "파피니에게 보내는 답장"(Reply to Papini영어)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자신의 연설에서 파피니를 반복적으로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