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오자키 호쓰미(尾崎 秀実오자키 호쓰미일본어, 1901년 4월 29일 ~ 1944년 11월 7일)는 일본의 언론인이자 평론가, 공산주의자이며 소련의 정보원이었다. 그는 아사히 신문 기자로 활동했으며,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의 핵심 자문역으로서 일본 정계의 중추에 접근하여 국정에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리하르트 조르게가 이끄는 소련의 첩보 조직인 '조르게 첩보단'에 참여하여 일본의 외교 및 군사 기밀을 소련에 넘기는 활동을 했다.
그는 중일 전쟁의 확대를 주장하고 일본의 남진 정책을 유도하는 등 일본의 주요 정책 결정에 개입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져 일본의 국력 소모와 자멸을 초래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41년 10월 조르게 사건으로 체포되어 간첩 및 국가 반역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1944년 11월 7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오자키는 일본 제국 정부에 의해 대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진 유일한 일본인으로 기록된다. 사후 그의 옥중 서한이 《사랑은 별들의 소나기와 같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애국자와 매국노 사이에서 극명하게 엇갈리며 현재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오자키 호쓰미는 일본의 언론인이자 공산주의자, 소련의 정보원으로 활동하기 전, 대만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초기 탐구를 시작했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오자키 호쓰미는 1901년 4월 29일 도쿄도미나토구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호치 신문 기자이자 이후 대만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대만일일신보의 한문부 주필로 부임한 오자키 호쓰마였다. 오자키의 가족은 그가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일본 통치하의 대만으로 이주했고, 그는 타이베이에서 성장하며 타이베이 시립 젠궈 고급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의 부계인 오자키 가문은 기후현가모군시라카와정에 위치한 옛 나에기번 영지 출신으로, 메이지 시대 초기 폐불훼석으로 인해 불교가 폐지되고 신도만이 남은 지역이었다.
대만에서의 성장기는 오자키에게 중국 문화에 대한 깊은 존경과 애정을 심어주었으며, 그는 어린 시절을 보낸 이 섬을 매우 좋아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식민 정부에서 근무하며 아들에게 일본이 아시아 국가 중 가장 선진적이므로 대만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특별한 "문명화 사명"이 있다고 가르쳤다. 오자키는 이중 언어 구사자로 성장했으며, 중국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일본과 중국 고전 문학에 깊이 몰두했다. 그는 중국인을 단순히 "개미"로 여기며 노예로만 적합하다고 보는 일본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노골적인 반중 감정에 반대했으며,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가 조국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22년 일본으로 돌아와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그의 사상적 전환점은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 지진으로 인해 극우 단체들이 조선인과 좌익 인사들을 대상으로 자경단 살해를 자행했으며, 정부가 이러한 살해를 묵인하는 방식에 오자키는 크게 분노했고, 이를 계기로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 공산당 활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1925년 졸업하지 않고 학교를 떠났다. 이후 동경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오모리 요시타로 경제학부 교수의 부하린 '사적 유물론' 연구회에 참여하며 공산주의 연구에 몰두했고, 완전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비롯해 블라디미르 레닌의 《제국주의론》, 《국가와 혁명》 등을 읽었다. 중국 문제에 주목하게 된 것은 카를 비트포겔의 《눈뜨는 중국》을 읽은 후였다.
2.2. 초기 경력
1926년 5월, 오자키는 도쿄의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하여 사회부에 소속되었다. 당시 동기 입사자 중에는 훗날 조르게 사건으로 함께 체포된 다나카 신지로가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쿠사노 겐키치'라는 필명으로 사회주의 연구회와 간토 출판 조합 등에서 활동했다.
1927년 10월부터 이듬해까지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지나부(支那部)에 소속되었다. 오사카 근무 중 그는 제일고등학교 선배이자 일본 공산당원이었던 후유노 다케오를 만나 영향을 받았다. 상하이로 파견되기 직전에는 제일고등학교와 도쿄 제국대학 동기이자 독일 유학파인 하니 고로로부터 현지 신문 연구 및 분석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다. 이 무렵, 그는 형인 호나미의 아내였던 에이코와 결혼했다.
3. 상하이 시절
1928년 11월, 오자키는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 상하이 지국 특파원으로 파견되었다. 영어와 독일어에 능통했던 그는 오타 우노스케 지국장 밑에서 외교 분야를 담당하게 되었다. 오자키는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영국이 중국과 기생적인 경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중국 민족주의 운동이 주로 반영국적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시위대가 "일본을 추방하라!"와 "일본 상품 불매!"를 외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상하이 체류 중 오자키는 우치야마 서점에 자주 들러 서점 주인 우치야마 간조와 그곳을 드나들던 궈모뤄, 루쉰, 중국 좌익 작가 연맹의 샤옌 등과 교류했다. 또한 중국 공산당과도 교류했다. 그는 1928년 11월 이레네 바이트마이어가 운영하는 '차이트가이스트(독일어로 '시대정신')' 서점에서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만나 코민테른 본부 기관에 가담하여 간접적으로 첩보 활동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스메들리는 그를 1930년에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소개했다. 조르게는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의 특파원 '존슨'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오자키가 조르게를 만난 것은 미국 공산당원이자 당시 상하이에 파견되어 만철 산하 국제운수 회사에 잠입해 있던 키토 긴이치를 통해서였다. 오자키는 구체적으로 이를 진술했으나, 조르게가 키토 긴이치와의 연결을 강하게 부정하면서 조서에는 스메들리가 첫 소개자로 통일되었다. 오자키의 신문 기사들은 중국 민족주의와 "불평등 조약"을 철폐하려는 노력에 매우 동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는 난징 정부의 동향에 대한 보고서를 모스크바에 보냈고, 이 보고서가 높이 평가되면서 조르게로부터 자신이 코민테른의 일원임을 고백받고 협력을 요청받아 수락했다. 1931년 봄, 오자키는 '일지투쟁동맹' 회의에 참석했을 때 만철조사부 상하이 만철공처의 고마쓰 시게오의 소개로 가와이 사다키치를 만났다. 관동군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같은 해 6월 가와이를 만주로 파견했다.
1932년 오자키는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취재했는데, 일본군이 상하이 거리에서 중국인 전쟁 포로들을 단순한 "개미"에 불과하다며 인간 취급하지 않고 처형하는 것을 보고 깊은 트라우마를 겪었다.
4. 정치 참여 및 자문 역할
1932년 2월 말, 오사카 본사로부터 귀국 명령을 받아 일본으로 돌아와 외보부에 근무했다. 이 시기 오자키는 조르게에게 첩보 조직에 가담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수락하며 본격적으로 조르게 첩보단의 일원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암호명은 '오토'(Otto)였다. 또한 그는 키토 긴이치와 고베와 오사카에서 자주 만났다.
1934년 10월, 도쿄 아사히 신문사에 신설된 동아문제조사회에 근무하게 되면서 도쿄 아사히 신문으로 전근했다. 오자키는 저서와 기사를 통해 중일 관계 전문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1936년 미국 요세미티에서 개최된 태평양 문제 조사회에 중국 문제 전문가로 참여하여 사이온지 고이치를 만나 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때 사이온지 고이치의 통역이었던 우시바 도모히코와도 인연을 맺었다. 이 회의의 파티에 함께 참석한 조르게를 네덜란드령 동인도 대표인 네덜란드인으로부터 소개받았을 때, 오자키는 비로소 조르게의 본명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이때까지 오자키에게 조르게는 '존슨'이었다).
이듬해인 1937년 4월부터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측근인 고토 류노스케가 주재하는 정책 연구 단체인 쇼와 연구회에 사사 히로오의 소개로 참여했다. 같은 해 7월, 도쿄 아사히 신문을 퇴사하고 제1차 고노에 내각의 총리대신 비서관인 우시바 도모히코의 알선으로 내각 촉탁이 되었다. 동시에 고노에 총리가 주최하는 정치 공부 모임인 '조찬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 관계는 제2차 고노에 내각, 제3차 고노에 내각까지 이어졌다. 그는 1938년부터 고노에 총리의 핵심 측근인 '조찬 클럽'의 일원으로 초청받아 매주 아침 식사를 함께하며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이로써 오자키는 자신이 정보를 수집해야 할 의사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1939년 6월 1일, 만철조사부 촉탁 직원으로 도쿄 지사에 근무하게 되었으며, 조르게 사건으로 체포될 때까지 이 회사에 근무했다.
5. 정보 활동
오자키 호쓰미는 소련의 정보원으로서 일본의 외교 및 군사 정책 결정 과정에 깊이 개입하며 영향을 미쳤다. 그의 활동은 리하르트 조르게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일본의 대중국 강경책 유도와 남진 정책 추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5.1. 리하르트 조르게와의 관계
오자키는 1932년 2월 일본으로 돌아온 후 나라에서 조르게와 재회하여 첩보 활동에 전적으로 협력하기로 약속했고, 조르게 첩보단의 일원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의 암호명은 '오토'였다. 그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 및 다른 일본 고위 정치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비밀 문서를 복사할 수 있었다. 조르게의 수기(手記)에 따르면, 조르게 첩보단은 독소전쟁 발발로 일본의 대소련 참전 가능성이 높아진 1941년, 오자키의 제안에 따라 일본의 대외 정책을 남진론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공작을 펼쳤다고 한다.
오자키는 일본이 소련과의 전쟁을 피하려 한다는 정보를 조르게에게 전달했다. 이 정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역사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르게가 이 정보를 소련 사령부에 전달한 후, 모스크바는 모스크바 전투의 가장 위험한 시기에 시베리아와 극동에서 18개 사단, 1,700대의 전차, 1,500대 이상의 항공기를 나치 독일에 맞선 서부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5.2. 일본 정책에 대한 영향
오자키는 평론가로서 중국 문제에 대해 《아사히 신문》, 《주오고론》, 《카이조》 등에서 활발하게 논설을 펼쳤다.
5.2.1. 대중국 강경책 유도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주오고론》 9월호에 「난징 정부론」을 발표하여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반식민적·반봉건적 지나의 지배층, 국민 부르주아 정권"이자 "군벌 정치"라고 혹평하며 이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련의 중소 불가침 조약 체결과 재화소비에트군사고문단, 소련 공군 지원대 파견 전후로, 9월 23일자 《카이조》 임시 증간호에서도 국지적 해결이나 불확대 방침이 전혀 의미 없다고 주장하며 강화·불확대 방침에 반대하고 중일 전쟁 확대 방침을 주장했다(이는 코민테른 지령 1937년에 따른 것이었다). 11월호에서는 「패배 지나의 진로」를 발표하며 "지나에 있어서의 통일은 비자본주의적인 발전 방향과 결부된다"고 주장하여 중국의 공산화를 예견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폭지응징"의 표어 아래 고조된 반중 감정을 선동했으며, 이듬해인 1938년 1월 16일 제1차 고노에 성명에 영향을 미쳐 조기 평화를 목표로 한 트라우트만 공작마저 중단되었다. 같은 해 《카이조》 5월호에 「장기 항전의 행방」을 발표하며 일본 국민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은 싸움에서 이기는 것뿐이며 다른 방법은 절대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중국과 시작한 이 민족 전쟁의 결말을 짓기 위해서는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적 지도부의 중추를 섬멸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주오고론》 6월호에 발표한 「장기전 하의 제문제」에서도 중국과의 제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의견에 반대하며, 적대 세력이 존재하는 한 이를 완전히 타도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강화 조약 체결에 반대하고 장기전도 불사해야 한다며 철저 항전을 역설했다.
나아가 장제스 정권과의 강화를 완전히 단절하기 위해 난징에 왕징웨이를 수반으로 하는 신정권 수립과 동아신질서 건설을 주장하기도 했다(이는 아시아주의 및 동아협동체론과도 연관된다). 다만 오자키는 당시 장제스 정권(국민정부)의 중국과 중국 공산당이 지도하는 (훗날의) 중국의 모습을 구분했으며, 전자에 의해 중국이 통일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고 후자가 확립되어 (혁명 후의) 일본과 제휴하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일중 간의 강화를 방해하고 일본군을 중국에 묶어두어 국력 소모를 노린 것이었다(이는 코민테른의 패전혁명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5.2.2. 남진 정책으로의 유도
오자키는 조르게에게 일본 정부의 남북 병진론과 독소(獨蘇)에 대한 중립 결정 등의 국가 기밀을 유출했다. 오자키는 제1차 고노에 내각의 총리대신 비서관 우시바 도모히코의 추천으로 내각 촉탁이 되었고, '조찬회'에 참여하며 쇼와 연구회 등에 가입함으로써 일본 정부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자신의 조언과 제안을 통해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오자키의 지인이자 외무성 촉탁이었던 사이온지 고이치가 해군 군령부의 후지이 시게루와 친분이 있었던 덕분에, 고노에 후미마로의 측근으로서 군 수뇌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군부의 내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오자키가 참여한 쇼와 연구회는 국책의 이념적 뒷받침을 제공하고 대정익찬회 결성을 추진하여 일본의 정치 형태를 일국일당의 군부·관료 독재 조직으로 유도했다. 쇼와 연구회 멤버들이 동회에서 발전하는 형태로 독자적으로 결성한 '쇼와 학원' 멤버들은 오자키 등 공산주의자와 기획원 그룹의 '혁신 관료'로 구성되었으며, 그 이념적 뒷받침은 모두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1941년 7월 2일, 오자키는 '조찬 클럽'의 일원으로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싱가포르를 향한 일본의 확장과 히틀러의 시베리아 침공 요청에 반대하는 중요한 결정을 지지했다. 그는 1941년 9월 6일 어전회의에서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와 우려를 표명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무모한 태평양 전쟁을 개전하여 미국과 싸우다 자멸했다. 이는 레닌의 패전혁명론에 따른 것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서로 전쟁을 일으켜 부르주아 정부를 전복시키는 방침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6. 조르게 사건과 재판
1941년 10월 15일, 오자키는 조르게 사건의 수괴 중 한 명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심문에 적극적으로 응하여 28회에 걸친 검사·사법경찰관 심문 조서와 28회에 걸친 예심 판사 심문 조서 등 방대한 양의 자료를 남겼다. 당시 구치소에서 함께 있었던 이토 리쓰는 회고록에서 한때 건장했던 오자키가 야위어 있었고, 다른 사건 조사로 오자키를 면회한 예심 판사 고바야시 겐지는 그가 백발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기록했다. 또한 고노에 후미마로는 오자키의 정체를 알게 되자 경악하며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며,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고 깊이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라고 쇼와 천황에게 사죄했다.
체포 후 취조 과정에서 오자키는 "우리 그룹의 목적·임무는 좁은 의미에서 세계 공산주의 혁명 수행상 가장 중요한 지주인 소련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지키는 것"이라고 진술했다.
1944년 러시아 혁명 기념일인 11월 7일, 오자키는 국방보안법 위반, 군기보호법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스가모 구치소에서 리하르트 조르게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형 판결이 내려진 시기에 옥중에서 오자키를 만난 미타무라 다케오는 "무언가 큰일을 해냈다는 느낌으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한 태도였다"고 회고했다. 오자키의 묘는 도쿄도다마 묘원에 있다.

옥중에서 오자키가 아내와 딸에게 보낸 서신들은 전후에 모아져 《사랑은 별들의 소나기와 같다》라는 제목으로 1946년에 출판되어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7. 사상과 철학
오자키 호쓰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일본의 사회주의적 개조와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독자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그는 체포 후 검찰 심문 조서에서 다음과 같은 사상을 피력했다. "이후의 지구전에 있어서 일본은 본래부터 경제가 취약하고, 지나사변에 지나치게 많은 소모가 있어 치명적인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은 그러한 파국에 의해 불필요한 희생을 치르지 않고 기사회생하기 위해서, 그리고 영국과 미국에 일시적으로 압도되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소련과 제휴하여 원조를 받아 일본사회경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사회주의 국가로서 일본을 확고히 건설해 나가야 합니다."
오자키는 소련을 종주국으로 삼아 중국과 일본, 삼자가 긴밀한 제휴를 이루는 것이 미국과의 전면전을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후 서양 열강으로부터 해방된 인도, 미얀마,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필리핀 등 모든 민족을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묶고, 중심을 이루는 소련, 중국, 일본과 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나아가 민족 공동체로서 몽골, 회교, 조선, 만주 민족도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공산주의를 이념으로 한 세계 공산주의 대동사회를 위해 현재의 대동아공영권에 몰두하는 것이 옳지 않으며, 중국을 따라 사회주의 국가로 일본을 개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8. 사생활과 가족
오자키 호쓰미의 사생활은 그의 공적인 활동만큼이나 복잡했다. 그의 아내 에이코는 오자키의 형인 호나미의 배우자였으며, 동시에 오자키의 사촌(숙모의 딸)이기도 했다. 그는 형수이자 사촌인 에이코와 불륜 관계 끝에 결혼했다.
또한 오자키는 아그네스 스메들리와도 정교를 거듭했다. 1946년 2월, 미국에 거주하던 스메들리를 이시가키 아야코가 방문했을 때, 스메들리는 이시가키로부터 오자키가 1944년에 이미 사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 남편이 죽었단 말인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오자키의 아버지인 오자키 호쓰마(오자키 하쿠스이)는 문사이자 신문기자로 전전 대만에서 활약했다. 오자키의 딸 요코는 역사학자(일본 근현대사 연구자) 이마이 세이이치와 결혼했으며, 이마이 세이이치는 오자키의 '저작집' 등을 편찬했다. 작가이자 문예 평론가이며 일본 펜클럽 전 회장이었던 오자키 히데키는 오자키 호쓰미의 이복 동생으로, 형과 관련된 여러 저작을 집필했다.
9. 저술 및 출판
오자키 호쓰미는 언론인이자 사상가로서 다양한 서적, 논문, 번역서를 집필하여 중국 문제와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9.1. 단독 저서
- Recent developments in Sino-Japanese relations최근 중일 관계의 발전영어 (1936년, 일본 태평양 문제 조사회)
- 《현대 지나 비판》(現代支那批判겐다이 시나 히한일본어) (1936년, 주오고론샤)
- 《국제 관계에서 본 지나》(國際関係から見た支那고쿠사이 간케이카라 미타 시나일본어) (1937년, 제2국민회출판부)
- 《폭풍 속에 선 지나: 전환기 지나의 외교·정치·경제》(嵐に立つ支那 : 転換期支那の外交・政治・経済아라시니 다쓰 시나: 덴칸키 시나노 가이코·세이지·게이자이일본어) (1937년, 아리 서점)
- 《국민 사상 팸플릿》(國民思想パンフレツト고쿠민 시소 판푸렛토일본어) (1938년, 국민사상연구소)
- 《현대 지나론》(現代支那論겐다이 시나론일본어) (1939년, 이와나미 신서)
- 《지나 사회 경제론》(支那社会経済論시나 샤카이 게이자이론일본어) (1940년, 생활사)
- 《동아 민족 결합과 외국 세력》(東亜民族結合と外國勢力도아 민조쿠 게쓰고토 가이코쿠 세이료쿠일본어) (1941년, 주오고론샤)
9.2. 공동 저서
- 《난징 정부의 정체》(南京政府の正体난징 세이후노 쇼타이일본어) (1937년, 신일본동맹 편)
- 《교양 강좌 제1집》(教養講座 第1輯교요 고자 제1슈일본어) (1940년, 교육과학연구회 편)
- 《태평양 문제 자료 제7》(太平洋問題資料 第7다이헤이요 몬다이 시료 제7일본어) (1940년, 일본국제협회 태평양문제조사부 편)
- 《사변 처리와 국제 관계: 지나의 현상과 국제 정국》(事變處理と國際關係支那の現状と國際政局지헨 쇼리토 고쿠사이 간케이 시나노 겐조토 고쿠사이 세이쿄쿠일본어) (1940년, 마쓰모토 다다오·오자키 히데미 저)
- 《동아 민족 결합과 외국 세력》(東亜民族結合と外国勢力도아 민조쿠 게쓰고토 가이코쿠 세이료쿠일본어) (1941년, 만철홍보과 편)
9.3. 번역서
- 《여자 혼자 대지를 걷다》(女一人大地を行く온나 히토리 다이치오 유쿠일본어) (1934년, 아그네스 스메들리 저, 시라카와 지로 명의 번역)
- 《세계 정치와 동아》(世界政治と東亜세카이 세이지토 도아일본어) (1940년, G.F. 허드슨 저)
9.4. 사후 출판 저서
- 《사랑은 별들의 소나기와 같다: 옥중 통신》(愛情はふる星のごとく : 獄中通信아이조와 후루 호시노 고토쿠: 고쿠추 쓰신일본어) (1946년, 오자키 에이코 편저)
- 《오자키 호쓰미 선집 제1권: 중국 사회의 기본 문제 - 현대 중국론, 중국 사회 경제론》(尾崎秀實選集 第1巻 中國社會の基本問題-現代中國論、中國社会経済論오자키 호쓰미 센슈 제1권: 주고쿠 샤카이노 기혼 몬다이 - 겐다이 주고쿠론, 주고쿠 샤카이 게이자이론일본어) (1949년, 세계평론사)
- 《오자키 호쓰미 저작집》(尾崎秀実著作集오자키 호쓰미 초사쿠슈일본어) (전 5권, 1977년~1979년, 게이소 쇼보)
- 《개전 전야의 고노에 내각: 만철 '도쿄 시사 자료 월보'의 오자키 호쓰미 정치 정세 보고》(開戦前夜の近衛内閣 : 満鉄『東京時事資料月報』の尾崎秀実政治情勢報告가이센 젠야노 고노에 나이카쿠: 만테쓰 '도쿄 지지 시료 겟포'노 오자키 호쓰미 세이지 조세이 호코쿠일본어) (1994년, 이마이 세이이치 편저)
- 《조르게 사건 상신서》(ゾルゲ事件 上申書조르게 지켄 조신쇼일본어) (2003년, 이와나미 현대 문고)
- 《오자키 호쓰미 시평집: 중일 전쟁기 동아시아》(尾崎秀実時評集 : 日中戦争期の東アジア오자키 호쓰미 시효슈: 니추 센소키노 히가시 아시아일본어) (2004년, 요네타니 마사후미 편, 헤이본샤 동양문고)
10. 평가 및 유산
오자키 호쓰미의 사후, 일본 사회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애국자인가 매국노인가, 그의 사상은 민족주의인가 국제주의인가를 놓고 극명하게 갈리며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10.1. 긍정적 평가
오자키는 전후 일본에서 순교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1975년부터 매년 오자키 호쓰미와 리하르트 조르게의 묘소를 방문하는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동시대 경제학자 호리에 유이치는 오자키의 저서 《폭풍 속에 선 지나》의 서평에서 오자키의 중국 평론 전반을 "관찰의 예리함과 분석의 투철함"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했다.
오자키와 친분이 있었던 정치인이자 그가 체포될 당시 사법대신이었던 가자미 아키라는 사건 발각 후에도 오자키를 계속 신뢰했다. 그는 오자키-조르게 사건을 "비열한 스파이 사건으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며, 공정한 비평가라면 누구든 인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에도 시대에 탄압받았던 기독교인들, 도쿠가와 막부의 방침에 반하여 근황 사상을 설파하다 처형된 요시다 쇼인이나 히라노 구니오미 등 역사의 전환점에서 희생된 인물들을 언급하며, 오자키의 처형 또한 일본을 "새로운 시대로 이 민족을 이끌어야 할 진군 나팔이 아니었는가"라고 평가했다. 쓰루미 슌스케는 오자키를 "국사(國士)"라고 평하기도 했다.
10.2. 비판 및 논란
오자키 호쓰미는 일본 정부에 의해 국가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진 유일한 일본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행적은 간첩 행위와 국가 기밀 유출에 대한 비판과 논란의 중심에 있다. 그의 이복 동생인 오자키 히데키는 어린 시절부터 "스파이의 동생"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가족들은 협박 편지를 받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오자키의 활동은 코민테른의 패전혁명 전략에 따라 일본과 중국의 강화를 방해하고, 일본군을 중국에 묶어두며 국력 소모를 유도하여 궁극적으로 일본의 자멸을 노린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특히 태평양 전쟁으로의 유도에 그가 기여했다는 점은 일본의 국익을 해치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야기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주요 근거가 된다.
11. 영향
오자키 호쓰미의 사상, 활동, 그리고 조르게 사건은 후대 학계, 사회 운동, 그리고 특정 정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가 소련의 정보원으로서 일본의 대중국 강경책과 남진 정책에 영향을 미친 사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진행 과정과 결과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예를 들어, 그가 일본의 대소련 전쟁 의지 부재를 소련에 알림으로써 소련이 극동 주둔 병력을 독소전선으로 이동시켜 모스크바 전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그의 첩보 활동이 국제 정세에 미친 중요한 영향으로 꼽힌다.
그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비전은 전후 일본의 좌익 및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를 순교자로 보는 시각과 매국노로 보는 시각이 공존하며 일본 사회의 역사 인식과 이념 갈등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의 저술들은 여전히 중일 관계와 일본 제국주의 시기 아시아주의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12. 예술 및 매체에서의 묘사
오자키 호쓰미의 삶과 행적은 여러 영화와 연극 등 다양한 예술 작품에서 묘사되고 재해석되었다.
- 《내 청춘에 후회는 없다》(1946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일본 영화로, 오자키를 느슨하게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 《사랑은 별들의 저편에》(1956년): 닛카쓰 제작, 사이토 부이치 감독의 영화로, 모리 마사유키가 '사카자키 히데미'라는 이름의 역할로 출연했다.
- 《스파이 조르게/진주만 전야》(1961년): 프랑스와 일본의 합작 영화로, 이브 샹피 감독이 연출했으며 야마우치 아키마사가 오자키 역을 맡았다.
- 《스파이 조르게》(2003년):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의 영화로, 모토키 마사히로가 오자키 역을 연기했다.
- 기노시타 준지의 연극 《오토라 불리는 일본인》(オットーと呼ばれる日本人오토토 요바레루 니혼진일본어): 1962년 극단 민예에서 초연되었으며, 2008년에도 재연되는 등 여러 차례 공연되었다.
- 오타 나오키의 소설 《붉은 첩보원: 조르게, 오자키 호쓰미, 그리고 스메들리》(赤い諜報員 ゾルゲ、尾崎秀実、そしてスメドレー아카이 초호인: 조르게, 오자키 호쓰미, 소시테 스메도레일본어) (2007년, 고단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