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1771-1799)

영국의 조지 3세 국왕과 샤를로테 왕비의 다섯째 아들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1771년 6월 5일 런던 버킹엄 하우스 (현 버킹엄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는 1771년 7월 1일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대부모는 외삼촌인 메클렌부르크의 에른스트 공작, 친척인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모리츠 공작 (하트퍼드 백작이 대리), 그리고 아버지의 사촌인 헤센카셀의 세습 공주 (에그리몽 백작부인이 대리)였다. 유아기를 보낸 후, 그는 두 동생인 아돌푸스 왕자 (후일 케임브리지 공작)와 아우구스투스 왕자 (후일 서식스 공작)와 함께 큐 팰리스 근처 큐 그린의 한 집에서 가정교사와 함께 살았다.
조지 3세는 평생 영국을 떠나지 않았지만, 어린 아들들을 청소년기에 독일로 보냈다. 역사가 존 반 데르 키스테에 따르면, 이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던 에른스트의 큰형 웨일스 공 조지가 동생들에게 미칠 영향을 제한하기 위함이었다. 15세가 되던 해, 에른스트와 두 동생은 아버지의 하노버 영지에 위치한 괴팅겐 대학교로 보내졌다. 에른스트는 열성적인 학생이었으며, 1년간 개인 교습을 받으며 독일어를 배운 후 대학 강의를 수강했다. 조지 3세는 왕자들의 가정을 군대식으로 운영하고 대학 규칙을 따르도록 지시했지만, 선제후국의 상인들은 왕자들에게 기꺼이 신용을 제공했고 세 왕자 모두 빚을 지게 되었다.

1790년, 에른스트는 아버지에게 프로이센 육군에서 훈련받을 허락을 요청했다. 대신 1791년 1월, 그와 아돌푸스 왕자는 하노버로 보내져 빌헬름 폰 프라이탁 원수의 감독 아래 군사 훈련을 받았다. 괴팅겐을 떠나기 전, 에른스트는 대학에 공식적인 감사 편지를 쓰고 아버지에게 "괴팅겐과 그 교수들에게 빚진 모든 것을 잊는다면, 저는 가장 배은망덕한 사람 중 한 명이 될 것입니다"라고 썼다. 하노버 육군의 중위로 임관한 에른스트는 제9 (여왕) 경용기병대 카를 폰 린징겐 대위 밑에서 기병 훈련과 전술을 배웠고, 뛰어난 기수이자 명사수임을 증명했다. 불과 두 달간의 훈련 후, 프라이탁은 왕자의 진보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를 연대 대위로 임명했다. 에른스트는 보병 훈련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아들의 능력을 인상 깊게 본 국왕은 그가 기병으로 남도록 허락했다.
1792년 3월, 조지 3세는 에른스트를 제9 (여왕) 경용기병대 대령으로 임명했다. 왕자는 프랑스 혁명 전쟁 중 저지대 국가에서 그의 형인 요크 공작 휘하의 영국, 하노버, 오스트리아 연합군에서 복무했다. 1793년 8월 투르네 근처에서 프랑스 혁명군과의 교전 중 머리에 칼을 맞아 흉터가 남는 부상을 입었다. 1794년 5월 18일 투르쿠앵 전투에서는 프랑스군 포탄이 가까이 지나가면서 왼쪽 팔에 부상을 입었다. 전투 후 며칠 동안 왼쪽 눈의 시력이 흐려졌다. 6월, 그는 요양을 위해 영국으로 보내졌는데, 이는 1786년 이후 첫 영국 체류였다.
에른스트는 11월 초에 복귀했으며, 이때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새로운 계급이 군단 또는 여단 지휘를 가져다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연합군이 네덜란드를 거쳐 독일로 천천히 후퇴하는 동안 아무런 지휘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1795년 2월까지 그들은 하노버에 도착했다. 에른스트는 다음 해 동안 하노버에 머물며 몇몇 중요하지 않은 직책을 맡았다. 그는 눈 치료를 위해 귀국을 요청했으나, 1796년 초에야 국왕이 동의하여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에른스트는 안과 의사 조너선 워슨 월러에게 진찰을 받았지만, 월러는 그의 상태가 수술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수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국에서 에른스트는 대륙의 연합군에 합류할 수 있도록 여러 차례 요청했으며, 심지어 요먼 기병대에 사병으로 입대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지만, 국왕과 요크 공작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에른스트는 당시 전투에 참여하지 않던 하노버군에 재입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한, 프라이탁이 중병에 걸려 있었고 에른스트는 그의 후임이 될 가능성이 높은 요한 루트비히 폰 발모덴김보른 백작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꺼렸다.
2. 컴벌랜드 공작으로서의 활동

### 군 지휘관
1799년 4월 23일, 조지 3세 국왕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왕자를 컴벌랜드와 테비오트데일 공작 및 아마 백작으로 서임했으며, 에른스트에게는 연간 1.20 만 GBP의 수당이 지급되었다. 이는 2023년 기준으로 약 149.00 만 GBP에 해당한다. 그는 영국 육군과 하노버 육군에서 중장으로 진급했지만, 영국에 머물며 영국 상원 의석을 통해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하이 토리로서 곧 토리당 우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조지 3세는 에른스트가 그의 형들처럼 휘그당 성향을 보일까 우려했지만, 그러한 우려가 불식되자 1801년에는 에른스트에게 애딩턴 내각 구성 협상을 맡겼다. 1802년 2월, 조지 3세는 아들에게 제27 경용기병대의 연대장직을 부여했는데, 이 직책은 공석이 생길 경우 제15 경용기병대 연대장으로 전보될 수 있는 선택권을 제공했다. 곧 공석이 발생하여 공작은 1802년 3월에 제15 경용기병대의 연대장이 되었다. 비록 이 직책이 한직일 수도 있었지만, 에른스트는 연대의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동 훈련을 지휘했다.
1803년 초, 요크 공작은 에른스트를 세번 강 어귀 안팎의 군대를 책임지는 세번 지구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아미앵 조약 체결 1년 후 영국이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자, 요크 공작은 에른스트를 햄프셔, 도싯, 윌트셔를 포함하는 더 중요한 남서부 지구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에른스트는 프랑스 점령 하의 하노버 출신 망명자들로 구성된 국왕 독일 군단의 지휘를 선호했지만, 이 직책을 수락했다. 컴벌랜드 공작은 남해안의 방어 시설을 강화했으며, 특히 그의 아버지가 여름에 자주 머물던 웨이머스 주변을 집중적으로 강화했다.

1800년 연합법은 아일랜드에 의회 대표권을 부여했지만, 기존 법률은 종교적인 이유로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의 의회 진출을 막았다. 가톨릭 해방은 19세기 초의 주요 정치적 쟁점이었다. 컴벌랜드 공작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했으며, 해방이 영국 성공회를 지지하겠다는 국왕의 대관식 선서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믿고 영국 상원에서 해방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아일랜드의 개신교 단체들은 공작을 지지했으며, 그는 1805년 더블린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2년 후에는 오렌지 로지의 대사(Grand Master)가 되었다.
공작은 프랑스와 싸우는 연합군에 합류하기 위해 여러 차례 직책을 요청했지만, 대륙에는 단지 관찰자로만 파견되었다. 1807년, 그는 영국군을 파견하여 프랑스와 그 동맹국들이 스웨덴령 슈트랄준트를 점령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재능 내각은 병력 파견을 거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각이 붕괴되자 새로운 총리 포틀랜드 공작은 에른스트와 2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 늦게 파견되었고, 에른스트와 그의 병력이 도시에 도착하기도 전에 프랑스군이 슈트랄준트를 스웨덴으로부터 점령했다. 에른스트는 1808년에 영국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이는 1805년으로 소급 적용되었다.
### 셀리스 사건과 웨이머스 논란
1810년 5월 31일 새벽, 에른스트는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침대에서 자고 있던 중 머리를 여러 차례 맞아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문으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칼에 다리를 다쳤다. 그는 도움을 요청했고, 그의 하인 중 한 명인 코넬리우스 닐이 응답하여 그를 도왔다. 닐이 경보를 울리자 집안 사람들은 곧 에른스트의 다른 하인인 조지프 셀리스가 그들 중에 없으며 셀리스의 방 문이 잠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긴 문을 강제로 열자 셀리스가 목이 막 잘린 채 발견되었는데, 이는 명백히 자해로 인한 상처였다. 에른스트는 이 명백한 공격으로 여러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회복하는 데 한 달 이상이 걸렸다. 사회 개혁가이자 반군주주의자 프랜시스 플레이스는 검시 배심원으로 합류하여 배심장으로 활동했다. 플레이스는 변호사 친구의 사무실로 가서 검시법을 연구하고 증인들을 적극적으로 심문했다. 플레이스는 또한 검시를 대중과 언론에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검시관을 위협하여 사실상 자신이 검시를 주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단은 셀리스의 자살이라는 만장일치 평결을 내렸다.

대부분의 대중은 셀리스의 죽음에 대해 에른스트를 비난했다. 더 극단적인 휘그당 신문, 반왕실 전단지, 그리고 풍자화가들은 모두 셀리스의 죽음에 대한 사악한 설명을 제시했으며, 그 속에서 공작이 비난받았다. 일부 이야기에서는 공작이 셀리스의 아내와 간통하여 공격이 보복 행위였거나, 에른스트와 셀리스의 아내가 함께 침대에 있는 것을 셀리스가 발견하여 살해당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공작이 셀리스나 닐의 연인이었으며, 협박이 죽음에 한몫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조지 3세의 자녀들에 대한 책을 쓴 로저 풀포드와 존 반 데르 키스테는 공작에 대한 적대감과 두려움의 일부를 그가 형들처럼 공개적으로 연애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들에 따르면, 대중은 공작의 집 문 뒤에서 어떤 악행이 벌어지고 있을지 두려워했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1813년 초, 에른스트는 전년도 총선 이후 웨이머스 선거에서 정치적 스캔들에 연루되었다. 공작은 웨이머스를 의회에 대표할 인물을 지명할 수 있는 세 명의 수탁자 중 한 명으로 드러났다. 귀족이 영국 하원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상당한 논란이 있었고, 정부는 에른스트를 유럽으로 보내 하노버군을 동반한 관찰자 역할을 맡겼는데, 하노버군은 다시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다. 그는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연합군의 주요 승리였던 라이프치히 전투에 참전했다. 이어서 에른스트는 1813년 11월 26일 영국 육군 원수로 최종 진급했다.
### 결혼
1813년 중반, 에른스트는 그의 사촌이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졸름스브라운펠스 공작의 아내이며 프로이센의 루이 왕자의 미망인인 프리데리케 폰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프리데리케가 결혼할 수 있게 되면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프리데리케와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결혼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녀의 남편은 결혼이 가망 없다고 보고 이혼에 동의했지만, 1814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혼의 필요성이 사라졌다. 일부는 이 죽음이 너무 편리하다고 생각하며 프리데리케가 남편을 독살했다고 의심했다. 샤를로테 왕비는 이 결혼에 반대했다. 프리데리케가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결혼하기 전에, 그녀는 약혼 발표 후 에른스트의 동생인 아돌푸스 왕자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1815년 5월 29일 독일에서 결혼식이 거행된 후, 샤를로테 왕비는 새 며느리를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왕비는 에른스트의 네 형이 참석한 큐에서의 재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섭정이었던 웨일스 공 조지 (후일 조지 4세)는 컴벌랜드 부부의 영국 체류를 당혹스럽게 여겼고, 그들이 대륙으로 떠나면 돈과 하노버 총독직을 제안했다. 에른스트는 거절했고, 컴벌랜드 부부는 다음 3년 동안 큐와 세인트 제임스 궁전을 오가며 지냈다. 왕비는 프리데리케를 만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러한 가족 문제에도 불구하고, 컴벌랜드 부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 리버풀 경 정부는 1815년 의회에 공작의 수당을 연간 6000 GBP (오늘날 약 56.10 만 GBP에 해당) 증액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는 그의 결혼으로 인한 지출 증가를 충당하기 위함이었다. 공작의 웨이머스 선거 개입이 쟁점이 되어 법안은 한 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리버풀은 1817년에 다시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일곱 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1815년 공작의 결혼 당시, 이는 영국 왕실 계승에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웨일스 공주 샬럿은 섭정의 유일한 자녀이자 국왕의 유일한 적법한 손녀였다. 어린 공주는 아이들을 낳아 영국 왕위 계승을 확고히 할 것으로 기대되었으며, 특히 1816년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레오폴트 왕자와 결혼한 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섭정과 요크 공작은 결혼했지만 아내와 소원한 관계였고, 다음 두 형제인 클래런스 공작 윌리엄 왕자와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는 미혼이었다. 1817년 11월 6일, 샬럿 공주는 사산아를 낳은 후 사망했다. 조지 3세는 열두 명의 살아남은 자녀를 두었지만, 살아남은 적법한 손주는 없었다. 미혼인 대부분의 왕실 공작들은 서둘러 적합한 신부를 찾아 결혼하여 다음 세대의 왕위 계승을 확보하려 했다.
왕비가 며느리를 받아들일 가망이 거의 없다고 판단한 컴벌랜드 부부는 1818년 독일로 이주했다. 그들은 영국에서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독일에서는 생활비가 훨씬 저렴했다. 샤를로테 왕비는 1818년 11월 17일에 사망했지만, 컴벌랜드 부부는 독일에 머물렀으며, 주로 베를린에서 살았는데, 그곳에는 공작부인의 친척들이 있었다. 1817년, 공작부인은 사산아를 낳았고, 1819년에는 아들 컴벌랜드 공자 조지를 낳았다. 공작은 가끔 영국을 방문하여 그의 큰형과 함께 머물렀는데, 큰형은 1820년에 조지 4세로서 영국과 하노버 왕위를 계승했다. 조지 3세의 넷째 아들인 켄트 공작은 아버지보다 6일 먼저 사망했지만, 딸 켄트의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공주를 남겼다. 조지 3세의 사망으로 에른스트는 요크 공작 (1827년에 적법한 자녀 없이 사망), 클래런스 공작, 그리고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공주에 이어 영국 왕위 계승 서열 4위가 되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어 정치적 영향력이 다시 상당해졌다.
### 정치 및 인기 하락

1826년, 의회는 마침내 에른스트의 수당 인상을 의결했다. 리버풀 정부는 공작이 조지 공자의 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해 수당 인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휘그당 의원들이 반대했다. 영국 하원에서 120대 97로 통과된 이 법안은 에른스트가 돈을 받으려면 조지가 영국에 거주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1828년, 에른스트는 윈저 성에서 국왕과 함께 머물고 있었는데, 아일랜드에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심각한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공작은 아일랜드의 개신교 대의를 열렬히 지지했으며,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정부가 아일랜드 문제에 단호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믿으며 8월에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1829년 1월, 웰링턴 정부는 아일랜드인들을 달래기 위해 가톨릭 해방 법안을 도입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웰링턴이 해외에 머물러 달라는 요청을 무시하고 에른스트는 런던으로 돌아와 1829년 로마 가톨릭 구제법의 주요 반대자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조지 4세에게 법안에 반대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그가 도착한 지 며칠 만에 국왕은 그의 궁내관들에게 법안에 반대 투표를 하도록 지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웰링턴은 국왕에게 완전한 지지를 확신할 수 없다면 총리직을 사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왕은 처음에는 웰링턴의 사임을 수락했고 에른스트는 가톨릭 해방에 반대하는 정부를 구성하려 했다. 그러한 정부는 영국 상원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았겠지만, 하원에서는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 것이고 에른스트는 시도를 포기했다. 국왕은 웰링턴을 다시 불러들였다. 법안은 상원을 통과하여 법률이 되었다.
웰링턴 정부는 에른스트가 독일로 돌아가기를 바랐지만, 그는 1829년에 아내와 아들을 영국으로 데려왔다. 더 타임스는 그들이 윈저의 "악마의 탑"에서 살 것이라고 보도했지만, 대신 공작은 큐에 있는 자신의 집을 다시 열었다. 그들이 그곳에 정착하자, 에른스트의 누이 소피아 공주의 사생아로 여겨지는 토머스 가스가 에른스트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또한 에른스트가 이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하여 국왕을 협박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존 반 데르 키스테는 에른스트가 폭로되면 자신을 파멸시킬 비밀로 협박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소문들은 에른스트가 가톨릭 해방에 맞서 싸우기 위해 런던으로 가는 동안 퍼졌다. 휘그당 정치인이자 일기 작가인 토머스 크리비는 2월 중순에 가스 루머에 대해 썼으며, 이 소문이 러시아 대사의 아내인 도로테아 리벤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일부 증거가 있다.
신문들은 또한 1829년 7월, 공작이 린드허스트 경의 아내 사라를 폭행하여 그의 집에서 쫓겨났다고 보도했다. 1830년 초, 여러 신문들은 에른스트가 15명의 자녀를 둔 50대 초반의 그레이브스 부인과 불륜 관계에 있다는 기사를 실었다. 1830년 2월, 에른스트의 시종이자 궁내관이었던 그레이브스 경은 아내에게 그녀의 결백을 확신하는 내용의 편지를 쓴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레이브스 경의 사망 이틀 후 (그리고 검시 다음 날), 더 타임스는 그레이브스 경의 죽음과 셀리스의 죽음을 연관 짓는 기사를 실었다. 유서가 공개된 후, 더 타임스는 두 죽음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는 암시를 철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공작이 자살의 책임이 있거나 두 번째 살인죄를 저질렀다고 믿었다. 공작은 나중에 자신이 "십계명의 모든 죄목으로 고발당했다"고 진술했다. 에른스트의 전기 작가 앤서니 버드는 증거는 없지만, 공작에 대한 소문이 정치적 목적으로 휘그당에 의해 퍼졌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또 다른 전기 작가인 제프리 윌리스는 공작이 독일에 거주했던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어떤 스캔들도 그에게 붙지 않았으며, 그가 영국으로 돌아오겠다는 의사를 밝힌 후에야 "비할 데 없는 악의적인 캠페인"이 그를 상대로 시작되었다고 지적했다. 웰링턴 공작은 한때 찰스 그레빌에게 조지 4세가 에른스트의 인기 없음에 대해 "아들과 잘 지내는 아버지, 아내와 잘 지내는 남편, 연인과 잘 지내는 애인, 친구와 잘 지내는 친구가 없었으며, 그가 그들 사이에 문제를 일으키려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버드에 따르면, 에른스트는 영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인물이었다.

공작의 궁정 내 영향력은 1830년 6월 조지 4세의 사망과 클래런스 공작이 윌리엄 4세로 즉위하면서 끝났다. 웰링턴은 "국왕의 죽음의 효과는... 이 나라에서 컴벌랜드 공작의 정치적 성격과 권력을 완전히 종식시킬 것"이라고 썼다. 윌리엄 국왕은 적법한 자녀가 없었고 (두 딸은 유아기에 사망), 에른스트는 이제 하노버의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영국 왕위 추정 상속인인 빅토리아 공주는 여성으로서 하노버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윌리엄은 공작이 윈저에 권력 기반을 유지하는 한, 원치 않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작은 궁정 기병대의 수장으로서 골드 스틱 직책을 맡고 있었다. 윌리엄은 공작의 직책을 국왕이 아닌 총사령관에게 책임지도록 변경했고, 자신보다 하급 장교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생각에 모욕감을 느낀 에른스트는 사임했다.
새로운 왕비 아델레이드 왕비가 왕비가 관례적으로 사용하던 마구간에 자신의 말을 두기를 원했지만, 그 마구간은 당시 에른스트의 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에른스트는 처음에는 말들을 치우라는 국왕의 명령을 거부했지만, 에른스트가 자발적으로 옮기지 않으면 윌리엄의 마부들이 말들을 치울 것이라는 말을 듣고 양보했다. 그러나 에른스트와 윌리엄은 윌리엄의 7년간의 통치 기간 내내 친분을 유지했다. 에른스트의 큐에 있는 집은 그의 가족에게 너무 작았다. 국왕은 공작 부부에게 큐 가든 입구 근처의 더 큰 집에서 평생 거주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시민적, 종교적 자유의 확대에 반대했던 에른스트는 1832년 개혁법에 반대했으며, 대부분의 토리당 의원들이 휘그당 귀족들로 상원이 넘쳐날 것이라는 위협 때문에 기권한 최종 독회에서 법안에 반대 투표한 "강경파" 귀족 중 한 명이었다. 군대에 오렌지 로지를 설립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그의 인기는 더욱 떨어졌다.
1832년, 에른스트는 더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두 젊은 여성이 그가 해머스미스 근처를 걷던 자신들을 말을 타고 덮치려 했다고 비난했다. 공작은 해당일에 큐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떠나지 않았으며, 그 말을 탄 사람이 자신의 시종 무관 중 한 명이었고, 그 시종 무관은 여성들을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들은 계속해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에른스트가 여성들이 주장한 행동을 했고 비겁하게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고 암시했다。 같은 해, 공작은 자신의 하인 닐이 셀리스를 살해했다고 비난하는 책이 출간되자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했고, 배심원단은 저자에게 불리한 평결을 내렸다. 컴벌랜드 부부는 어린 조지 공자가 실명하는 비극을 겪었다. 공자는 몇 년 동안 한쪽 눈이 실명 상태였는데, 13세 때의 사고로 다른 쪽 눈의 시력까지 잃었다. 에른스트는 아들이 빅토리아 공주와 결혼하여 영국과 하노버 왕위를 통합된 상태로 유지하기를 바랐지만, 이러한 장애는 조지가 빅토리아의 마음을 얻기 어렵게 만들었고, 그가 하노버 왕위를 계승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공작은 윌리엄 4세의 재위 기간 동안 영국 상원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꾸준히 출석했다. 신문 편집자 제임스 그랜트는 "그는 문자 그대로-물론 문지기는 제외하고-의회에 가장 먼저 들어와 가장 늦게 나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적으로뿐만 아니라 매일 밤 그랬다"고 썼다. 그랜트는 상원의 주요 구성원들에 대한 관찰에서 공작이 연설로 유명하지 않았고 (5분보다 긴 연설은 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의 태도는 매우 온화하고 화해적"이었다고 밝혔다. 그랜트는 공작의 지성과 영향력을 폄하했지만, 공작이 여러 의원들에게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는 상대방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전술가는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1836년 오렌지 로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불거졌다. 반가톨릭 성향의 이 로지들은 윌리엄 국왕 사망 후 컴벌랜드 공작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봉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려졌다. 조지프 흄은 영국 하원에서 빅토리아는 나이, 성별, 무능력 때문에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원은 로지 해체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문제가 상원에 이르자 공작은 자신을 변호하며 빅토리아 공주에 대해 "나는 조카를 위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작은 오렌지 로지 회원들이 충성스러웠으며 영국 내 로지를 해체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버드에 따르면, 이 사건은 에른스트가 빅토리아를 살해하고 영국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는 광범위한 소문의 근원이라고 한다.
3. 하노버 국왕 (1837-1851)
### 즉위와 동군연합의 종료

1837년 6월 20일, 윌리엄 4세가 사망했다. 빅토리아는 영국의 여왕으로 즉위했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하노버 국왕이 되었다. 1837년 6월 28일, 에른스트는 개선문을 통과하며 새로운 영지에 입성했다. 1세기 이상 만에 하노버는 그곳에 거주하는 통치자를 갖게 되었다. 많은 하노버인들은 자유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인기 있는 부왕이었던 아돌푸스 왕자가 국왕이 되기를 선호했지만, 서식스 공작과 케임브리지 공작은 자신들이 형보다 먼저 왕이 되는 어떠한 움직임에도 관여하기를 거부했다. 조지 3세의 어린 아들들에 대한 로저 풀포드의 연구 로열 공작들에 따르면, "1837년, 에른스트 국왕은 하노버와의 관계를 계속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조지 3세의 유일한 남성 후손이었다."
### 국내 정치 및 헌법 논란
하노버는 1819년 섭정에 의해 부여된 첫 헌법을 받았다. 이 헌법은 빈 회의에 의해 보장된 하노버의 선제후국에서 왕국으로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 이상은 아니었다. 케임브리지 공작은 윌리엄 4세의 하노버 부왕으로서 하노버 정부의 전면적인 재편을 권고했다. 윌리엄 4세는 1833년에 새로운 헌법에 동의했지만, 컴벌랜드 공작의 동의는 구하지도 받지도 않았으며, 그는 자신의 동의 없이 헌법이 채택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헌법의 한 조항은 하노버 영지 (영국 왕실 영지와 동등한 것)를 주권자로부터 국가로 이전하여 군주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하노버에 도착하자마자 국왕은 논란이 된 헌법에 따라 소집된 하노버 의회를 해산했다. 7월 5일, 그는 자신의 동의가 구하지 않았고 왕국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헌법 정지를 선포했다. 1837년 11월 1일, 국왕은 칙령을 발표하여 헌법을 무효화했지만, 그 아래에서 통과된 모든 법률은 유효하다고 선언했다. 1819년 헌법이 복원되었다. 그의 아들 게오르크 왕세자는 이 조치를 지지했다.
국왕의 칙령을 시행하기 위해 내각은 모든 공직자 (괴팅겐 대학교 교수 포함)에게 국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갱신하도록 요구했다. 7명의 교수 (두 그림 형제 포함)는 맹세하기를 거부하고 국왕의 칙령에 항의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선동했다. 그들은 맹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위를 잃었고, 국왕은 가장 책임이 큰 세 명 (야코프 그림 포함)을 하노버에서 추방했다. 7명 중 오직 한 명, 동양학자 하인리히 에발트만이 하노버 시민이었고, 그는 추방되지 않았다. 국왕 통치 말년에, 세 명은 돌아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에른스트는 이 사건에 대해 그의 처남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이 일곱 신사들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담은 편지를 나에게 보냈다면, 나는 그들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그들의 항의를 받기도 전에 회의를 소집하고 그들의 의견을 발표하는 것-그것이 그들이 한 일이며,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썼다. 에른스트는 학생 소요를 우려한 괴팅겐 시민 대표단을 맞이했으며, 그들은 해임을 환영했다. 그러나 그는 유럽, 특히 영국에서 널리 비판받았다. 영국 하원의 토머스 페로네트 톰슨 의원은 아직 자녀가 없는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여 에른스트가 영국 국왕이 될 경우, 의회가 에른스트 국왕이 자신의 행동으로 영국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했음을 선언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833년 헌법 철회에 대한 더 중요한 항의는 여러 도시들이 의회 대표를 임명하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그러나 1840년까지 충분한 수의 대표가 임명되어 국왕은 의회를 소집할 수 있었고, 의회는 8월에 2주 동안 회의를 열어 1819년 헌법의 수정된 버전을 승인하고 예산을 통과시키며 국왕에게 감사 결의를 보냈다. 의회는 다음 해에 다시 회의를 열어 3년 예산을 통과시키고 다시 휴회했다.
### 국가 발전 및 무역
에른스트가 왕위에 올랐을 당시, 하노버 시는 밀집된 주거 도시였으며 많은 독일 수도들의 웅장한 양식에 미치지 못했다. 즉위 초기의 정치적 위기가 가라앉자, 그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에른스트의 지원으로 하노버 시 거리에는 가스등이 설치되었고, 최신 위생 시설이 갖춰졌으며, 새로운 주거 지구가 개발되었다. 그는 1841년 프리데리케 왕비가 사망한 후, 하노버에 도착한 이래 두 사람이 살았던 알테스 팔레를 그대로 두도록 계획을 변경했다. 에른스트의 철도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하노버를 주요 철도 교차점으로 만들었고, 이는 국가에 큰 이익이 되었다. 그러나 1837년 궁정 건축가 게오르크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라베스가 하노버에 오페라 극장 건설을 제안했을 때, 국왕은 처음에는 "이 푸른 들판 한가운데 궁정 극장을 짓겠다는 이 완전히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며 거부했다. 국왕은 마침내 1844년에 동의했고, 하노버 국립 오페라 극장은 국왕 사망 1년 후인 1852년에 개관했다.
매주 국왕은 비서와 함께 왕국의 여러 지역을 여행했으며, 누구든지 그에게 청원을 제출할 수 있었다. 에른스트는 사소한 불만을 처리하지 않기 위해 비서가 청원을 미리 검토하도록 했다. 에른스트는 고위 장관직을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개방하여, 이러한 개혁이 없었다면 자격이 없었을 여러 장관들의 봉사를 확보했다. 국왕은 컴벌랜드 공작 시절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가톨릭 해방에 반대했지만, 하노버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의 정부 근무에 반대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들의 교회를 방문하기도 했다. 에른스트는 이를 영국에서와 달리 하노버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을 제한할 역사적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영국 의회에 유대인 입회를 계속 반대했지만, 하노버의 유대인들에게는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국왕은 독일 국가들 간의 우편 연합과 공통 통화를 지지했지만,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관세 동맹인 촐페라인에 반대했다. 이는 프로이센의 지배와 하노버의 독립 국가로서의 종말을 초래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대신 국왕은 하노버와 다른 서부 독일 국가들이 1834년에 결성한 슈토이어페라인을 지지했다. 1841년 슈토이어페라인 조약 갱신 시기가 되자, 브라운슈바이크는 연합에서 탈퇴하여 촐페라인에 가입했고, 이는 하노버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다. 특히 브라운슈바이크는 하노버 내에 월경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른스트는 월경지의 촐페라인 가입을 연기할 수 있었고, 무역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브라운슈바이크보다 오래 버틸 수 있었다. 1845년, 브라운슈바이크, 하노버, 프로이센은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 1850년, 에른스트는 마지못해 하노버가 촐페라인에 가입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이는 유리한 조건으로 이루어졌다. 에른스트의 프로이센에 대한 불길한 예감은 옳았다. 그가 사망한 지 15년 후인 1866년, 하노버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을 택했다가 패배하여 프로이센에 합병되었다.
### 1848년 혁명과 사회적 영향
하노버는 1848년 혁명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몇몇 작은 소요 사태는 기병대에 의해 유혈 사태 없이 진압되었다. 1848년 5월 말 베를린에서 선동가들이 도착하여 국왕 궁전 밖에서 시위가 벌어지자, 에른스트는 총리를 보냈다. 총리는 시위대가 국왕에게 부적절한 요구를 할 경우, 에른스트가 짐을 싸서 왕세자와 함께 영국으로 떠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국가를 팽창주의적인 프로이센의 자비에 맡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었고, 이 위협은 선동을 종식시켰다. 이후 국왕은 1819년 문서보다 다소 자유주의적인 새로운 헌법을 부여했다.
### 영국과의 관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빅토리아의 즉위 후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웰링턴 공작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전해지며, 웰링턴은 "돌팔매질당하기 전에 가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앤서니 버드는 웰링턴의 왕족에 대한 통상적인 존경심과 에른스트가 할 수 있는 선택지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 (가능한 한 빨리 자신의 왕국으로 가야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고 일축한다. 새 국왕이 내려야 할 한 가지 결정은 컴벌랜드 공작으로서 영국 상원에서 빅토리아에게 충성 맹세를 할 것인지 여부였다. 윌리엄 사망 직후, 에른스트는 린드허스트 경으로부터 코튼햄 경 (당시 대법관)이 외국 군주인 국왕에게 충성 맹세를 집행하는 것을 거부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국왕은 하노버로 떠나기 전 서둘러 상원에 나타나 수석 서기관 앞에서 일상적인 절차로 맹세에 서명했다. 에른스트는 1840년 11월 빅토리아의 딸 빅토리아 공주가 태어날 때까지 빅토리아 여왕의 추정 상속인이었다. 클래런던 경 (당시 왕실 인장 경)은 "나라가 신경 쓰는 것은 왕위 계승과 하노버 국왕 사이에 남성 또는 여성의 생명이 하나 더 있는 것"이라고 썼다.
하노버로 간 직후, 국왕은 조카와 분쟁에 휘말렸다.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과 긴장된 관계였고, 체면을 위해 어머니에게 가까운 곳에 숙소를 마련해 주고 싶었지만, 너무 가깝지는 않게 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여왕은 국왕에게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자신의 아파트를 공작부인을 위해 양보해 달라고 요청했다. 국왕은 잦은 영국 방문을 예상하여 런던에 아파트를 유지하고 싶었고, 자신의 형 윌리엄 국왕과 자주 다투던 여성을 위해 양보하기를 꺼려 거절했다. 여왕은 화가 나서 어머니를 위해 다른 집을 빌렸다. 여왕이 아버지의 빚을 갚으려 노력하던 시기에, 그녀는 이를 불필요한 지출로 여겼다. 그가 거절하고, 남아있는 두 형제에게도 자신의 미래 남편인 앨버트 공자에게 우선권을 주지 말라고 조언하면서, 국왕에 대한 그녀의 불쾌감은 커졌다. 에른스트는 빈 회의에서 여러 왕실의 지위가 결정되었으며, 하노버 국왕이 자신이 "종이 왕족"이라고 묘사한 사람에게 양보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앨버트를 영국 신민으로 귀화시킨 법안은 그의 우선권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남겨두었다.
문제는 에른스트가 하노버 국왕으로서 유일하게 영국을 방문한 1843년에 절정에 달했다. 그는 궁전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케임브리지의 어거스타 공주의 결혼식에서 그는 앨버트 공자보다 우월한 자리를 고집하려 했다. 앨버트 공자는 에른스트보다 48세 어렸는데, 앨버트가 "강하게 밀어붙였다"고 묘사한 행동으로 상황을 정리했으며, 자신의 이름을 여왕의 서명 바로 아래에, 왕의 서명이 들어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아내의 서명에 가깝게 조심스럽게 기입했다. 국왕은 앙심을 품지 않은 듯 공자를 공원 산책에 초대했다. 앨버트가 군중에게 밀릴 수 있다는 이유로 주저하자, 국왕은 "내가 여기 살 때도 너만큼 인기가 없었지만, 그들은 나를 귀찮게 한 적이 없었다"고 답했다. 결혼식 직후, 국왕은 넘어져 부상을 입었고, 앨버트는 자신의 형제에게 "다행히 큐의 돌밭에서 넘어져 갈비뼈를 다쳤다"고 썼다. 이 부상으로 그는 빅토리아와 앨버트와의 추가적인 접촉을 피할 수 있었다. 방문 기간 동안 국왕은 컴벌랜드 공작으로서 영국 상원에 참석할 시간을 가졌다. 빅토리아는 자신의 일기장에 국왕이 상원에서 연설할 것인지 묻자 "아니요, 악마가 저를 부추기지 않는 한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여왕은 또한 국왕이 토론을 듣는 것을 매우 즐겼지만, 직접 연설하지는 않았다고 기록했다. 국왕은 하노버를 방문하는 영국인들을 환영하는 데 신경을 썼고, 한 영국 여성이 도시에서 길을 잃었다고 말하자, 국왕은 "온 나라가 4펜스짜리 동전보다 크지 않다"며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했다.
군주들은 샤를로테 왕비가 남긴 보석을 놓고 한 번 더 싸움을 벌였다. 이 보석을 소유하고 있던 빅토리아 여왕은 그것이 영국 왕실의 소유라고 주장했다. 에른스트 국왕은 그것이 남성 상속인, 즉 자신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중재에 부쳐졌고, 중재자들이 하노버에 유리한 결정을 발표하려던 순간, 중재자 중 한 명이 사망하여 결정이 무효화되었다. 국왕이 새로운 패널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는 국왕의 생전에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모든 기회에 그 보석들을 착용하여 국왕이 친구인 스트랭퍼드 경에게 다음과 같이 쓰게 만들었다.
"작은 여왕은 내 다이아몬드로 잔뜩 치장하고 아주 멋져 보였다고 들었다." 국왕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게오르크 5세는 이 문제를 계속 주장했고, 1858년 하노버에 유리한 또 다른 결정이 내려진 후, 보석들은 하노버 대사에게 넘겨졌다.
4. 말년, 사망 및 기념
1851년, 국왕은 독일 전역을 여러 차례 여행했다. 그는 프로이센 왕비의 초대를 받아 베를린 근처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을 방문했다. 그는 메클렌부르크를 방문하여 대공의 아들 세례식에 참석했고, 뤼네부르크를 방문하여 자신의 옛 연대를 사찰했다. 6월, 에른스트는 프로이센 국왕을 초청하여 80세 생일을 축하했다. 그해 늦여름, 그는 괴팅겐을 방문하여 새 병원을 개원하고 횃불 행진을 받았다.
국왕은 영국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계속 유지했으며, 1851년 대박람회에 대해 스트랭퍼드 경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여왕이 이 하찮은 것을 허락한 어리석음과 터무니없음은 모든 분별 있고 사려 깊은 사람의 마음에 와닿을 것이며, 박람회 기간 동안 최소한 오스본으로 가라고 장관들조차 주장하지 않는 것에 놀랐다. 그 경우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모든 정직하고 선량한 영국인에게 충격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우리를 유럽의 눈에 낮추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 같다."

국왕은 약 한 달간의 투병 끝에 1851년 11월 18일 사망했다. 그는 하노버에서 크게 애도되었지만, 영국에서는 덜했다. 더 타임스는 관례적인 전면 검은색 테두리를 생략하고 "왕실 고인에 대해 좋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또는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그와 프리데리케 왕비는 모두 헤렌하우젠 정원의 베르크가르텐에 있는 묘지에 안장되었다.
하노버 중앙역 앞의 그의 이름을 딴 광장에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국왕의 거대한 기마상이 있으며, 그의 이름과 (독일어로) "충성스러운 백성으로부터 국가의 아버지에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인기 있는 만남의 장소이며, 현지에서는 사람들이 unterm Schwanz독일어 또는 "꼬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더 타임스는 에른스트의 컴벌랜드 공작으로서의 경력을 폄하했지만, 하노버 국왕으로서의 그의 통치와 1848년에 하노버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한 것에 대해서는 좋게 평가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단호한 결단력을 지녔으며, 이는 다른 조건에서는 불행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대륙 왕좌의 위기 속에서 비범한 장점으로 나타났다. 혁명의 소음에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움과 분노, 저항과 양보 사이를 수치스럽게 오락가락했던 왕관을 쓴 자들은 적어도 자신의 뜻을 알고 의견을 고수할 준비가 된 군주와 대조되어 크게 고통받았다. 따라서 유럽의 격변 속에서 에른스트 국왕은 혁명이나 반동으로 인한 손상 없이 왕좌의 안정과 백성의 평온을 유지했다. 실제로 대륙에서 평가되는 왕들로 볼 때, 그는 유능하고 심지어 인기 있는 군주였으며, 그의 기억은 그의 조상 영토에서 공감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성인기나 출생지인 영국에서는 헛된 일일 것이다."
5. 작위, 스타일 및 영예
### 작위 및 호칭
- 1771년 6월 5일 - 1799년 4월 23일: 전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왕자
- 1799년 4월 23일 - 1837년 6월 20일: 전하 컴벌랜드와 테비오트데일 공작
- 1837년 6월 20일 - 1851년 11월 18일: 폐하 하노버 국왕
### 영예
국가 | 훈장 | 날짜 |
---|---|---|
영국 및 하노버 왕국 | 가터 훈장 기사 (KG) | 1786년 6월 2일 |
영국 | 대영제국 추밀원 (PC) | 1799년 6월 5일 (1847년부터 사망 시까지 영국 최고위 추밀원 의원) |
영국 | 시슬 훈장 기사 (KT) | (날짜 미상) |
영국 | 바스 훈장 대십자 기사 (GCB) | 1815년 1월 2일 |
하노버 왕국 | 로열 구엘프 훈장 대십자 기사 (GCH) | 1815년 8월 12일 (1837년 6월 20일 하노버 왕위 계승 후 훈장의 주권자가 됨) |
영국 | 성 파트리치오 훈장 기사 (KP) | 1821년 8월 20일 |
하노버 왕국 | 성 조지 훈장 | 1839년 4월 23일 (훈장 창립자 및 주권자) |
영국 | 왕립학회 회원 (FRS) | 1828년 4월 24일 |
안할트 공국 | 알베르트 곰 훈장 대십자 | 1839년 1월 13일 |
오스트리아 제국 | 성 스테판 훈장 대십자 | 1839년 |
바덴 대공국 | 충성 가문 훈장 대십자 | 1829년 |
덴마크 | 코끼리 훈장 기사 | 1838년 7월 7일 |
에른스트계 공국 | 작센에른스트 가문 훈장 대십자 | 1839년 8월 |
프로이센 왕국 | 흑수리 훈장 기사 | 1815년 5월 21일 |
프로이센 왕국 | 적수리 훈장 대십자 | (날짜 미상) |
헤센 대공국 | 루트비히 훈장 대십자 | (날짜 미상) |
헤센 선제후국 | 황금 사자 가문 훈장 대십자 | 1818년 9월 20일 |
바이에른 왕국 | 성 후베르트 훈장 기사 | 1826년 |
네덜란드 | 빌럼 군사 훈장 대십자 | 1849년 7월 3일 |
러시아 제국 | 성 안드레이 훈장 기사 | 1819년 9월 |
6. 조상
세대 | 이름 | 관계 |
---|---|---|
1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하노버 국왕 | |
2 | 조지 3세 | 부 |
3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 모 |
4 | 웨일스 공 프레데릭 | 친조부 |
5 |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 | 친조모 |
6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카를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 외조부 |
7 |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 | 외조모 |
8 | 조지 2세 | 친증조부 |
9 | 안스바흐의 카롤리네 | 친증조모 |
10 |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 친외증조부 |
11 | 안할트체르프스트의 막달레나 아우구스타 | 친외증조모 |
12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아돌프 프리드리히 2세 | 외증조부 |
13 | 슈바르츠부르크존더스하우젠의 크리스티아네 에밀리에 | 외증조모 |
14 |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작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1세 | 외외증조부 |
15 | 에르바흐에르바흐의 소피아 알베르티네 백작부인 | 외외증조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