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Overview
알렉산다르 "티르케" 티르나니치(Александар "Тирке" Тирнанић알렉산다르 "티르케" 티르나니치세르비아어; 1910년 7월 15일 ~ 1992년 12월 13일)는 세르비아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었다. 선수 시절 주로 오른쪽 윙어로 활약했으며,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1930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하여 4강 진출에 기여했다. 특히 1930년 월드컵에서는 당시 최연소 득점 기록을 세워 주목받았다. 클럽 경력의 대부분을 BSK 베오그라드에서 보내며 다수의 리그 우승과 컵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은퇴 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며 올림픽 축구 금메달과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준우승, FIFA 월드컵 8강 진출 등 국제 대회에서 뛰어난 성과를 이끌었다. 그의 삶과 업적은 영화 등의 미디어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유고슬라비아 축구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2. Early Life and Background
2.1. Childhood and Early Football Experience
알렉산다르 티르나니치는 1910년 7월 15일 세르비아 중부의 작은 마을 크르니예보(Крњево크르니예보세르비아어)에서 태어났다. 그의 노동 계급 가정은 티르나니치가 아직 유아였을 때 수도인 베오그라드로 이주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데, 그의 아버지는 금속 공장 노동자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세르비아 육군의 일원으로 1914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어린 티르나니치는 빠르게 축구에 대한 사랑을 키웠고, 사바강의 오른쪽 둑에 위치한 바라 베네치야(Бара Венеција바라 베네치야세르비아어) 경기장에서 끊임없이 축구를 했다. 그곳에서 재능 있는 그를 발견한 라덴코 미트로비치 코치가 그를 SK 유고슬라비아 유소년 팀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티르나니치는 곧 지역 라이벌이자 아치 라이벌이었던 BSK 베오그라드의 유소년 팀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빠르게 주목할 만한 오른쪽 윙어로 성장했다. 자신의 잠재력을 깨달은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축구에 완전히 몰두했다.
3. Playing Career
3.1. Club Career
알렉산다르 티르나니치는 17세의 나이로 성인 팀에 데뷔했으며, 뛰어난 기량을 가진 열정적인 선수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 그는 블라고예 마리야노비치와 함께 공격 진영에서 호흡을 맞추며 활약했다. 티르나니치는 프로 선수 경력의 대부분을 BSK 베오그라드에서 보냈다. 그는 BSK에서 500경기에 출전하여 527골을 기록했으며, 이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에서 4회 우승(1930년, 1931년, 1933년, 1935년)과 2회 준우승을 달성했고, 1934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컵 우승에도 크게 기여했다. BSK에서 뛰는 동안 티르나니치는 하이두크 스플리트의 레오 레메시치와 류보 벤치치와 같은 강력한 라이벌들과 경쟁하며 이름을 알렸다. 1937년, 그는 다시 SK 유고슬라비아로 이적하여 1938년까지 뛰었고, 이후 FK 바스크에 합류하여 1938년부터 1939년까지 활약했다. 그 후에는 베오그라드를 연고로 하는 예딘스트보 베오그라드 (1939년~1941년)와 슬로가 베오그라드 (1942년~1943년)에서 뛰면서 16년간의 프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3.2. International Career
티르나니치는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처음 발탁되었다. 이듬해인 1930년 4월 13일 불가리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국제 A매치 데뷔골을 기록하여 팀의 6대1 대승에 일조했다. 그는 또한 1930년 FIFA 월드컵에 출전하여 만 20세가 되기 하루 전인 7월 14일 브라질과의 조별 예선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했다. 이 골로 그는 당시 FIFA 월드컵 최연소 득점 기록을 세웠으나, 이후 1930년의 마누엘 로사스, 1958년의 펠레, 1998년의 마이클 오언, 2002년의 드미트리 시체프, 2006년의 리오넬 메시에 의해 기록이 경신되면서 월드컵 역대 6번째 최연소 득점자가 되었다. 그는 1940년까지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 총 50경기에 출전하여 12골을 기록했다.
1934-35년에 걸쳐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된 발칸컵에서, 티르나니치는 알렉산다르 토마셰비치와 함께 각각 3골을 기록하며 대회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유고슬라비아는 그 대회에서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제치고 발칸컵 우승을 차지했다.
티르나니치의 국제 경기 득점 기록은 다음과 같다. 유고슬라비아의 득점이 먼저 기재된다.
| # | 날짜 | 경기장 | 상대팀 | 득점 | 결과 | 대회 |
|---|---|---|---|---|---|---|
| 1. | 1930년 4월 13일 | 파르티잔 스타디움, 베오그라드, 유고슬라비아 | 불가리아 | 3-1 | 6-1 | 친선 경기 |
| 2. | 1930년 6월 15일 | 레프스키 필드, 소피아, 불가리아 | 불가리아 | 1-2 | 2-2 | 친선 경기 |
| 3. | 1930년 7월 14일 | 에스타디오 그란 파르케 센트랄, 몬테비데오, 우루과이 | 브라질 | 1-0 | 2-1 | 1930년 FIFA 월드컵 |
| 4. | 1931년 10월 4일 | 유나크 스타디움, 소피아, 불가리아 | 불가리아 | 1-0 | 2-3 | 1931 발칸컵 |
| 5. | 1932년 6월 26일 | 파르티잔 스타디움, 베오그라드, 유고슬라비아 | 그리스 | 1-1 | 7-1 | 1932 발칸컵 |
| 6. | 1933년 9월 10일 | 폴란드 육군 스타디움, 바르샤바, 폴란드 | 폴란드 | 3-4 | 3-4 | 친선 경기 |
| 7. | 1934년 6월 3일 | 파르티잔 스타디움, 베오그라드, 유고슬라비아 | 브라질 | 7-4 | 8-4 | 친선 경기 |
| 8. | 1934년 12월 25일 | 레오포로스 알렉산드라스 스타디움, 아테네, 그리스 | 불가리아 | 3-1 | 4-3 | 1934-35 발칸컵 |
| 9. | 1934년 12월 25일 | 레오포로스 알렉산드라스 스타디움, 아테네, 그리스 | 불가리아 | 4-1 | 4-3 | 1934-35 발칸컵 |
| 10. | 1935년 1월 1일 | 레오포로스 알렉산드라스 스타디움, 아테네, 그리스 | 루마니아 | 1-0 | 4-0 | 1934-35 발칸컵 |
| 11. | 1936년 7월 12일 | 탁심 스타디움, 이스탄불, 튀르키예 | 튀르키예 | 3-2 | 3-3 | 친선 경기 |
| 12. | 1936년 9월 6일 | 파르티잔 스타디움, 베오그라드, 유고슬라비아 | 폴란드 | 9-3 | 9-3 | 친선 경기 |
4. Managerial Career
4.1. National Team Management
알렉산다르 티르나니치는 선수 은퇴 후 성공적인 축구 감독 경력을 이어갔다. 티르나니치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동 감독을 역임했으며, 이 기간 동안 1948년 하계 올림픽에서 팀을 은메달로 이끌었다. 이후 1952년부터 1961년까지 다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공동 감독직을 맡아 다음과 같은 주요 국제 대회 성과를 달성했다.
- 1952년 하계 올림픽 은메달
- 1954년 FIFA 월드컵 8강 진출
- 1956년 하계 올림픽 은메달
- 1958년 FIFA 월드컵 8강 진출
- 1960년 하계 올림픽 금메달
- UEFA 유로 1960 (당시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준우승
5. Death
알렉산다르 티르나니치는 1992년 12월 13일, 향년 82세를 일기로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사망했다.
6. Legacy and Recognition
알렉산다르 티르나니치는 유고슬라비아 축구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의 선수 시절 활약과 감독으로서의 국제적 성공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6.1. Media Portrayals
티르나니치의 삶과 경력은 미디어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도 소개되었다. 그는 영화 몬테비데오, 신이여 축복하소서! (2010년)와 몬테비데오에서 만나요 (2014년)에서 배우 밀로시 비코비치에 의해 연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