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리 아우로빈도(본명: 아우로빈도 고시, Aurobindo Ghose영어, 1872년 8월 15일 - 1950년 12월 5일)는 인도의 철학자, 요기, 마하리시, 시인, 교육자이자 민족주의자이며, 저널리스트이자 영적 개혁가였다. 그는 영국 식민 통치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위한 운동에 참여하여 1910년까지 영향력 있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인간의 진보와 영적 진화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영적 개혁가가 되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신의 화신으로 여겼다.
아우로빈도는 영국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에서 인도 고등 문명국 시험을 준비했다. 인도 귀국 후에는 바로드라 마하라자의 밑에서 다양한 공무를 수행했으며, 인도 국민회의와 벵골 지역의 초기 혁명 운동인 아누실란 사미티에 점차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조직과 관련된 여러 폭탄 사건 이후 알리푸르 공모 사건으로 체포되어 반역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영국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기사를 작성한 혐의로만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 재판 중 검찰 측 증인인 나렌드라나트 고스와미가 살해되면서 그에 대한 증거가 부족해져 석방되었다. 수감 기간 동안 그는 신비롭고 영적인 경험을 겪었으며, 이후 정치를 떠나 영적 활동을 위해 퐁디셰리로 이주했다.
퐁디셰리에서 스리 아우로빈도는 그가 '통합 요가'라고 부르는 영적 수행법을 개발했다. 그의 비전의 핵심 주제는 인간의 삶이 신성한 몸 안에서 신성한 삶으로 진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 본성을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변형시켜 지구상에서 신성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 실현을 믿었다. 1926년, 그의 영적 협력자인 미라 알파사('마더'로 불림)의 도움으로 스리 아우로빈도 아쉬람이 설립되었다. 스리 아우로빈도는 1943년 노벨 문학상, 1950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두 차례 지명되었으나 수상하지는 못했다. 그의 주요 문학 작품으로는 통합 요가의 철학적 측면을 다룬 『신적인 생명』, 통합 요가의 원리와 방법을 다룬 『요가의 통합』, 그리고 서사시인 『사비트리』가 있다.
2. 생애
스리 아우로빈도의 생애는 그의 어린 시절과 영국에서의 교육, 그리고 인도 귀국 후의 정치 활동과 투옥, 영성으로의 전환, 그리고 퐁디셰리에서의 영적 탐구와 아쉬람의 발전으로 나뉜다.
2.1. 초기 생애
아우로빈도 고시는 1872년 8월 15일 벵골주 콜카타의 뱅골 카야스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현재 서벵골주 후글리구의 콘나가르 마을과 관련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크리슈나 둔 고시(Krishna Dhun Ghose)는 당시 벵골 랑푸르의 보조 외과 의사였으며, 후에 쿨나의 민간 외과 의사가 되었다. 그는 브라모 사마지 종교 개혁 운동의 전 회원이자 에든버러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중 당시 새로운 개념이었던 진화론에 매료된 인물이었다. 아우로빈도는 그의 아버지를 "엄청난 무신론자"라고 묘사했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를 불가지론자로 보기도 한다. 그의 어머니 스와르날라타 데비(Swarnalata Devi)의 아버지인 슈리 라지나라얀 보스(Shri Rajnarayan Bose)는 브라모 사마지의 주요 인물이었다. 스와르날라타 데비는 아우로빈도의 출산을 위해 더 건강한 환경인 콜카타로 보내졌다. 아우로빈도에게는 두 명의 형인 베노이부샨(Benoybhusan)과 만모한(Manmohan), 여동생 사로지니(Sarojini), 그리고 남동생 바린다 쿠마르(Barindra Kumar, 바린Barin으로도 불림)가 있었다.
어린 아우로빈도는 영어를 사용하며 자랐지만, 하인들과 소통할 때는 힌두스탄어를 사용했다. 그의 가족은 벵골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영국 문화가 우월하다고 믿었다. 그는 두 명의 형과 함께 다르질링에 있는 영어권 기숙학교인 로레토 하우스에 보내졌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언어 능력을 향상시키고, 부분적으로는 첫 아이 출산 직후 정신 질환을 앓게 된 어머니와 거리를 두기 위함이었다. 다르질링은 인도 내 앵글로-인도인의 중심지였으며, 학교는 아일랜드 수녀들이 운영하여 소년들은 기독교 종교 교육과 상징에 노출되었다.
2.2. 영국에서의 교육 (1879-1893)

크리슈나 둔 고시는 아들들이 약 1,000명으로 구성된 엘리트 조직인 인도 고등 문명국(ICS)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영국에서 공부해야 했고, 그래서 1879년 온 가족이 영국으로 이주했다. 크리슈나 둔 고시는 곧 인도으로 돌아갔고, 그의 아내는 런던의 의사에게 맡겨졌다. 바린드라는 1880년 1월 영국에서 태어났다. 세 형제는 맨체스터의 W. H. 드루엣 목사의 보살핌을 받았다. 드루엣은 크리슈나 둔 고시가 랑푸르의 영국인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된 회중교회 목사였다. 맨체스터에서 고시 형제는 처음에는 셰익스피어 스트리트 84번지에 살다가 1881년 인구 조사 당시에는 콜튼온메들록의 요크 플레이스 29번지로 이사했다. 아우로빈도는 인구 조사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아라빈다 고시(Aravinda Ghose)로 기록되었다.
소년들은 드루엣과 그의 아내에게 라틴어를 배웠다. 이것은 좋은 영국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었고, 2년 후인 1881년, 두 명의 형은 맨체스터 그래머 스쿨에 입학했다. 아우로빈도는 입학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여겨져 드루엣 부부와 계속 공부하며 역사, 라틴어, 프랑스어, 지리, 산수를 배웠다. 드루엣 부부는 종교를 가르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소년들은 불가피하게 기독교 교육과 행사에 노출되었고, 이는 대체로 아우로빈도를 지루하게 했으며 때로는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영국에 있는 동안 아버지와의 접촉은 거의 없었고,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몇 통의 편지만 보냈지만, 그 편지들은 그가 인도에 있는 영국인들에게 점차 덜 애착을 갖게 되었음을 보여주었고, 한 번은 영국 식민 정부를 "무정하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드루엣은 1884년 호주로 이민을 갔고, 이로 인해 소년들은 런던에 있는 드루엣의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면서 터전을 옮겼다。 그해 9월, 아우로빈도와 만모한은 세인트 폴 스쿨에 입학했다. 베노이부샨의 교육은 맨체스터에서 끝났다. 그는 그리스어를 배웠고, 마지막 3년 동안은 문학과 영국 시를 읽는 데 시간을 보냈으며, 독일어와 이탈리아어에도 익숙해졌다. 학자 피터 히스(Peter Heehs)는 그의 언어 능력을 요약하며 "세기 전환기에 그는 최소 12개 언어를 알았다. 영어, 프랑스어, 벵골어는 말하고, 읽고, 쓸 수 있었고, 라틴어,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는 읽고 쓸 수 있었으며, 구자라트어, 마라티어, 힌디어는 말하고 읽을 수 있었고, 이탈리아어, 독일어, 스페인어는 읽을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드루엣의 어머니의 복음주의적 환경에 노출되면서 그는 종교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고, 한때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불가지론자라고 판단했다. 2007년에 공개된 블루 플라크는 1884년부터 1887년까지 아우로빈도가 런던 셰퍼드 부시의 세인트 스티븐 애비뉴 49번지에 거주했음을 기념한다. 1887년, 세 형제는 아버지의 재정난으로 인해 사우스 켄싱턴의 리버럴 클럽에서 검소한 생활을 시작했다. 이 클럽의 비서는 아버지의 벵골 ICS 친구인 헨리 코튼의 형제인 제임스 코튼이었다.
1889년, 만모한은 문학 경력을 추구하기로 결정했고, 베노이부샨은 ICS 입학에 필요한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이는 아우로빈도만이 아버지의 열망을 이룰 수 있음을 의미했지만, 아버지가 돈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렇게 하려면 장학금을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ICS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경쟁 시험에 합격하고, 2년 동안 영국 대학에서 수습생으로 공부해야 했다. 아우로빈도는 오스카 브라우닝의 추천으로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그는 몇 달 만에 ICS 필기시험에 합격하여 250명의 경쟁자 중 11위를 차지했다. 그는 다음 2년을 킹스 칼리지에서 보냈다. 아우로빈도는 ICS에 관심이 없었고, 고의적으로 승마 실기 시험에 늦게 도착하여 서비스 자격을 박탈당했다. 1891년 스리 아우로빈도는 조국에 큰 격변기가 다가오고 있으며,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운명이라고 느꼈다. 그는 벵골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연꽃과 단검(Lotus and Dagger)'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비밀 결사에 가입하여 인도 독립을 위해 일하겠다고 맹세했다.
이때 바로드라의 마하라자 사야지라오 가이콰드 3세가 영국을 여행하고 있었다. 코튼은 그에게 바로드라 주 서비스 자리를 확보해 주었고, 그가 왕자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는 1893년 2월 인도로 떠났다. 인도에서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던 크리슈나 둔 고시는 봄베이 (현재 뭄바이)의 대리인으로부터 아우로빈도가 타고 있던 배가 포르투갈 해안에서 침몰했다는 잘못된 정보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이 소식을 듣고 사망했다.
2.3. 바라다와 콜카타 시절 (1893-1910)
바로드라에서 아우로빈도는 1893년 주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처음에는 측량 및 정착 부서에서 일했고, 나중에는 세입 부서와 비서실로 옮겨갔으며, 1897년까지 문법 교육과 마하라자 연설 작성 지원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1897년 바로드라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바로드라 칼리지(현재 마하라자 사야지라오 대학교 바로드라)에서 시간제 프랑스어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부교장으로 승진했다. 바로드라에서 아우로빈도는 산스크리트어와 벵골어를 독학했다.

바로드라에 머무는 동안 그는 『인더 프라카시(Indu Prakash)』에 많은 기사를 기고했으며, 바로드라 대학 이사회 의장으로 연설하기도 했다. 그는 영국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인도 독립 운동의 정치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바로드라 주 행정부에서의 직책 때문에 공개적인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배후에서 활동했다. 그는 벵골과 마디아프라데시를 여행하며 이들 주에 있는 저항 단체들과 연계했다. 아우로빈도는 로크마냐 틸락과 시스터 니베디타와 접촉을 시작했다.
아우로빈도는 처음에는 부모의 가족 및 여동생 사로지니와 남동생 바린을 포함한 다른 벵골 친척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나중에는 벵골 전역에 저항 단체를 설립하기 위해 바로드라와 벵골 사이를 자주 오갔다. 그는 벵골 분할 발표 후 1906년 공식적으로 콜카타로 이주했다. 1901년, 콜카타 방문 중 그는 정부 고위 관리 부팔 찬드라 보세(Bhupal Chandra Bose)의 14세 딸 므리날리니(Mrinalini)와 결혼했다. 당시 아우로빈도는 28세였다. 므리날리니는 17년 후인 1918년 12월 인플루엔자 팬데믹 중에 사망했다.
1906년, 아우로빈도는 인도 청년들에게 민족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콜카타에 설립된 국립 대학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정치 활동이 증가함에 따라 1907년 8월 이 직책에서 사임했다. 이 국립 대학은 현재 콜카타의 자다브푸르 대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아우로빈도는 중세 프랑스에서 영국에 대항한 반란과 미국 및 이탈리아의 반란에 대한 연구에 영향을 받았다. 그의 공개 활동에서 그는 비협력과 비폭력 저항을 지지했지만, 사적으로는 수동적 저항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한 공개적인 반란 준비로서 비밀 혁명 활동을 시작했다.

벵골에서 그는 바린의 도움으로 바가 자틴이나 자틴 무케르지(Jatin Mukherjee), 수렌드라나트 타고르와 같은 혁명가들과 접촉하고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1902년 콜카타의 아누실란 사미티를 포함한 일련의 청년 클럽 설립을 도왔다.
아우로빈도는 다다바이 나오로지가 이끄는 1906년 국민회의 회의에 참석하여 "스와라지(Swaraj), 스와데시(Swadeshi), 보이콧, 그리고 민족 교육"이라는 네 가지 목표를 설정하는 데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1907년 수라트에서 온건파와 극단파가 크게 대립했던 국민회의 회의에서 그는 발 강가다르 틸락과 함께 극단파를 이끌었다. 이 회의 이후 국민회의는 분열되었다. 1907-1908년 아우로빈도는 푸네, 뭄바이, 바로드라를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지지를 확고히 하고 연설을 하며 단체들과 만났다. 그는 1908년 5월 알리푸르 폭탄 사건과 관련하여 다시 체포되었다. 이어진 재판에서 그는 주요 검찰 증인인 나렌 고스와미가 감옥 내에서 살해된 후 무죄로 풀려났고, 그에 대한 사건은 결국 무너졌다. 아우로빈도는 1년의 독방 수감 후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 그는 영어로 된 『카르마요긴(Karmayogin)』과 벵골어로 된 『다르마(Dharma)』라는 두 개의 새로운 출판물을 시작했다. 그는 또한 우타르파라 연설을 통해 그의 초점이 영적인 문제로 전환되었음을 암시했다. 그의 새로운 저널에 실린 글들 때문에 영국 식민 정부의 탄압은 계속되었고, 1910년 4월 아우로빈도는 퐁디셰리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영국 식민지 비밀경찰은 그의 활동을 감시했다.
2.4. 정치 활동과 투옥
1905년 7월, 당시 인도 총독이었던 커즌 경은 벵골을 분할했다. 이는 영국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촉발시켰고, 아우로빈도를 포함한 혁명가 집단의 시민 불안과 민족주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1908년, 쿠디람 보세와 프라풀라 차키는 민족주의자들에게 특히 가혹한 형을 선고하는 것으로 알려진 판사 킹스포드(Kingsford)를 살해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마차에 던져진 폭탄은 목표물을 빗나가 다른 마차에 떨어져 변호사 프링글 케네디의 아내와 딸인 두 영국 여성들을 죽였다. 아우로빈도 또한 공격을 계획하고 감독한 혐의로 체포되어 알리푸르 감옥에 독방에 수감되었다. 알리푸르 폭탄 사건 재판은 1년 동안 계속되었지만, 결국 1909년 5월 6일 그는 무죄로 풀려났다. 그의 변호인은 치타란잔 다스였다.
2.5. 정치에서 영성으로의 전환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삶에 대한 관점은 영적인 경험과 깨달음로 인해 급진적으로 변화했다. 그 결과, 그의 목표는 조국의 봉사와 해방을 훨씬 넘어섰다.
아우로빈도는 알리푸르 감옥에서 비베카난다가 자신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나는 감옥에서 독방 명상 중 2주 동안 끊임없이 비베카난다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의 존재를 느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의 자서전적 기록에서 아우로빈도는 인도에 처음 돌아왔을 때 거대한 평온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설명할 수 없었고, 때때로 다양한 그러한 경험을 계속했다. 그는 당시 요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스승 없이 요가 수행을 시작했으며, 찬도드의 강가 마트(Ganga Math)의 스와미 브라흐마난다(Swami Brahmananda)의 제자였던 친구 데바다르(Mr. Devadhar)로부터 배운 몇 가지 규칙을 제외하고는 스승 없이 요가 수행을 시작했다. 1907년, 바린은 아우로빈도를 마하라슈트라 요기인 비슈누 바스카르 레레(Vishnu Bhaskar Lele)에게 소개했다. 아우로빈도는 요기로부터 받은 지침에 영향을 받았는데, 요기는 아우로빈도에게 내면의 안내자에게 의존해야 하며 어떤 종류의 외부 구루나 안내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시했다.
1910년 아우로빈도는 모든 정치 활동에서 물러나 찬다나가르의 모틸랄 로이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당시 영국 식민 정부는 『카르마요긴』에 실린 '내 동포들에게(To My Countrymen)'라는 제목의 기사를 근거로 그를 선동 혐의로 기소하려 했다. 아우로빈도가 사라지자 체포 영장은 보류되었고 기소는 연기되었다. 아우로빈도는 경찰을 공개적인 행동으로 유도했고, 1910년 4월 4일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지만, 그 날 그는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퐁디셰리에 도착했기 때문에 영장은 집행될 수 없었다. 아우로빈도에 대한 영장은 철회되었다.
2.6. 퐁디셰리에서의 삶과 영적 탐구 (1910-1950)
퐁디셰리에서 스리 아우로빈도는 영적, 철학적 추구에 전념했다. 1914년, 4년간의 은둔 요가 수행 후, 그는 『아리아』라는 월간 철학 잡지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1921년에 발행을 중단했다. 여러 해 후, 그는 이 작품들 중 일부를 책으로 출판하기 전에 수정했다. 이 출판물에서 파생된 책 시리즈 중에는 『신적인 생명』, 『요가의 통합』, 『기타에 대한 에세이』, 『베다의 비밀』, 『신비로운 불꽃에 대한 찬가』, 『우파니샤드』, 『인도의 르네상스』, 『전쟁과 자결』, 『인간의 순환』, 『인간 통합의 이상』, 『미래 시』가 이 잡지에 실렸다.
퐁디셰리에 머물기 시작할 때는 추종자가 거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수가 늘어나 1926년 스리 아우로빈도 아쉬람이 설립되었다. 1926년부터 그는 자신을 '스리 아우로빈도'라고 서명하기 시작했는데, '스리(Sri)'는 일반적으로 경칭으로 사용된다.
그 후 얼마 동안 그의 주요 문학적 성과는 제자들과의 방대한 서신 교환이었다. 대부분 1930년대에 작성된 그의 편지는 수천 통에 달했다. 많은 편지는 제자들의 질문과 영적 수행 보고에 대한 간략한 답변을 담은 노트의 여백에 쓰여진 것이었으며, 다른 편지들은 그의 가르침의 실제적인 측면을 신중하게 구성하여 설명하는 여러 페이지에 걸친 내용이었다. 이 편지들은 나중에 수집되어 『요가에 대한 편지』라는 세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1930년대 후반, 그는 이전에 시작했던 시 작업을 다시 시작했으며, 남은 생애 동안 이 시를 확장하고 수정했다. 이 시는 아마도 그의 가장 위대한 문학적 업적인 약 24,000행의 무운시로 된 서사 영적 시인 『사비트리』가 되었다.
1947년 8월 15일, 스리 아우로빈도는 인도 분할에 강력히 반대하며 "국가가 확정된 사실을 영원히 확정된 것으로, 또는 일시적인 방편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스리 아우로빈도는 1943년 노벨 문학상, 1950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두 차례 지명되었으나 수상하지는 못했다.
스리 아우로빈도는 1950년 12월 5일 요독증으로 사망했다. 약 60,000명의 사람들이 그의 평화롭게 누워있는 시신을 보기 위해 참석했다. 자와할랄 네루 인도 총리와 라젠드라 프라사드 대통령은 요가 철학과 독립 운동에 대한 그의 공헌을 칭송했다. 국내외 신문들은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맨체스터 가디언』의 한 기자는 그를 "현대 인도가 배출한 가장 거대한 철학 사상가"라고 불렀다.
2.7. 미라 알파사 (마더)와 아쉬람의 발전
스리 아우로빈도의 가까운 영적 협력자인 미라 알파사는 '마더(The Mother)'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는 프랑스인으로 1878년 2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20대에는 막스 테온과 함께 오컬트를 공부했다. 그녀는 남편 폴 리처드와 함께 1914년 3월 29일 퐁디셰리로 갔으며, 마침내 1920년에 그곳에 정착했다. 스리 아우로빈도는 그녀를 자신의 영적 동등자이자 협력자로 여겼다. 1926년 11월 24일 스리 아우로빈도가 은둔에 들어간 후, 그는 그녀에게 그들 주위에 모인 제자 공동체인 아쉬람을 계획하고 건설하고 운영하는 것을 맡겼다. 얼마 후, 아이들과 함께 가족들이 아쉬람에 합류하자, 그녀는 교육 분야의 실험과 함께 스리 아우로빈도 국제 교육 센터를 설립하고 감독했다. 그가 1950년에 사망하자, 그녀는 그들의 영적 작업을 계속하고 아쉬람을 지휘하며 제자들을 지도했다.
1960년대 중반, 그녀는 유네스코의 후원을 받아 인간의 단결을 촉진하는 국제 도시인 오로빌을 퐁디셰리 근처에 개설했다. 그곳은 모든 국가의 남녀가 모든 국적, 정치 사상, 신념을 초월한 평화와 점진적 조화 속에서 살 수 있는 이상향으로 의도되었다. 1968년 기념식이 열렸고, 121개국과 인도의 모든 주 대표들이 각자 한 줌의 흙을 오로빌 중심 근처의 항아리에 넣었다. 그 후 오로빌은 계속 발전하여 현재 35개국에서 약 1,700명의 회원을 수용하고 있다. 마더는 또한 인도 프랑스 식민지의 합병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했으며, 생전 아우로빈도의 요청에 따라 퐁디셰리를 인도와 프랑스 간의 문화 교류 중심지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마더는 1973년 11월 17일 사망할 때까지 퐁디셰리에 거주했다. 마더의 지구상에 새로운 최고 의식을 확립하려는 시도와 그녀가 육체적 변형을 이루기까지의 노력은 『마더스 아젠다』라는 13권의 저서에 서술되어 있다.

3. 철학과 영적 비전
스리 아우로빈도의 철학적, 영적 비전은 인간 의식의 진화와 신성한 삶의 실현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핵심 사상은 통합 요가를 통해 인간이 초정신(Supermind)의 단계로 진화하고, 이를 통해 물질 세계가 신성한 존재로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이다.
3.1. 통합 요가
스리 아우로빈도의 통합 요가 시스템은 그의 저서 『요가의 통합』과 『신적인 생명』에 설명되어 있다.
그의 비전의 핵심 주제는 인간의 삶이 신성한 몸 안에서 신성한 삶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 본성을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변형시켜 지구상에서 신성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 실현을 믿었다. 아우로빈도는 신성한 브라흐만이 '릴라', 즉 신성한 놀이를 통해 경험적 현실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환상(māyā)이라고 가정하는 대신, 아우로빈도는 인간 종이 동물 종 이후에 진화했듯이, 세계가 진화하여 인간 종을 훨씬 뛰어넘는 새로운 종과 새로운 세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영적 수행의 최종 목표가 단순히 세계로부터의 해방이나 사마디에 이르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를 신성한 존재로 변형시키기 위해 신성이 세계로 하강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통합 요가의 목적을 구성한다. 물질 속 의식의 퇴화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하강, 즉 신성한 영혼(Purusha)이 힘과 물질에 복종하여 그것들을 형성하고 비출 수 있도록 하는 이 희생은 무의식과 무지의 세계를 구원하는 씨앗이다."
스리 아우로빈도는 다윈주의가 물질이 생명으로 진화하는 현상만을 설명할 뿐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믿었다. 반면 그는 모든 존재가 브라흐만의 현현이기 때문에 생명이 이미 물질 속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자연(그가 신성하다고 해석한)이 물질에서 생명을, 생명에서 마음을 진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는 모든 존재가 초정신(supermind)의 수준으로 현현하려고 시도하며, 진화에는 목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실의 본질을 이해하는 작업이 어렵고 즉각적인 가시적 결과로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3.2. 슈퍼마인드와 진화
스리 아우로빈도 형이상학 체계의 중심에는 초정신(supermind)이 있는데, 이는 비현현 브라흐만과 현현 세계 사이의 중간적 힘이다. 스리 아우로빈도는 초정신이 우리에게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 아니며, 마음이 실제로는 초정신과 동일하고 잠재력으로 초정신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 안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스리 아우로빈도는 초정신을 자신의 독창적인 발명품으로 묘사하지 않으며, 베다에서 발견될 수 있고 베다 신들이 초정신의 힘을 나타낸다고 믿는다. 『통합 요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초정신이란 분열과 무지의 원리가 존재할 수 없는 신성한 본성의 완전한 진리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항상 모든 정신적 실체나 정신적 움직임을 능가하는 완전한 빛과 지식이다." 초정신은 사치다난다와 하위 현현 사이의 다리이며, 사치다난다를 통해서가 아니라 초정신을 통해서만 마음, 생명, 몸이 영적으로 변형될 수 있다. 초정신의 하강은 초정신적 종족의 창조를 의미할 것이다.
존재의 수준 | 발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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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외부 존재 | 내부 존재 | 정신적 존재 | ||
초정신 | 초정신 | 영지적 인간 | |||
초정신화 | |||||
정신 | 오버마인드 | 정신화 및 영성화 | |||
직관 | |||||
계몽된 정신 | |||||
고등 정신 | |||||
잠재의식 정신 | 본래 정신 | 잠재적 (내면) 정신 | 진화 | ||
생명 | 잠재의식 생명 | 생명 | 잠재적 (내면) 생명 | ||
육체 | 잠재의식 육체 | 육체 | 잠재적 (내면) 육체 | ||
무의식 | 무의식 |
3.3. 서양 철학과의 관련성
스리 아우로빈도는 자신의 저술, 강연, 서신에서 여러 유럽 철학자들의 기본 개념에 대해 언급하며 그들의 사상과 자신의 사상과의 유사성을 논했다. 그는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긴 에세이를 썼고, 특히 플라톤, 플로티노스, 니체, 베르그송을 더 직관적인 접근 방식을 가진 사상가로서 관심을 가졌다. 반면에 그는 칸트나 헤겔의 철학에는 거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여러 연구들은 스리 아우로빈도와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진화 사상 사이에 놀라운 유사성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우로빈도는 테이야르 드 샤르댕을 알지 못했지만, 테이야르 드 샤르댕은 나중에 스리 아우로빈도에 대해 알게 되었다. 『신적인 생명』의 일부 장을 읽은 후, 테이야르 드 샤르댕은 스리 아우로빈도의 진화 비전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것과 같지만 아시아 독자를 위해 서술되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몇몇 학자들은 스리 아우로빈도와 헤겔의 사상에서 중요한 유사점을 발견했다. 스티브 오딘(Steve Odin)은 비교 연구에서 이 주제를 포괄적으로 다루었다. 오딘은 스리 아우로빈도가 "헤겔의 절대 정신 개념을 차용하여 고대 힌두 베단타 체계의 건축학적 틀을 현대적 용어로 급진적으로 재구성했다"고 썼다. 오딘은 그의 분석에서 "두 철학자 모두 세계 창조를 보편 의식이 자기 실현을 향한 여정에서 점진적으로 스스로를 현현하고 진화적으로 상승하는 것으로 유사하게 구상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헤겔의 결정론적이고 연속적인 변증법적 전개와 대조적으로, "스리 아우로빈도는 창조적이고 출현적인 진화 방식을 주장한다"고 지적한다. 오딘은 그의 요약에서 스리 아우로빈도가 전통적인 힌두교의 비역사적인 세계관을 극복하고 진정한 진보와 새로움을 허용하는 개념을 제시했다고 말한다. 스리 아우로빈도 자신은 헤겔의 영향을 부정했다.
3.4. 우파니샤드에 대한 중요성
스리 아우로빈도는 서양 철학의 가장 중요한 사상 흐름에 익숙했지만, 자신의 저술에 대한 그들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처음에는 우파니샤드와 기타 연구를 통해 형성되었다. 그것들은 나의 첫 요가 수행의 기초였다"고 썼다. 그는 자신의 독서를 통해 실제 경험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했으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나중에 나의 철학을 세웠고, 아이디어 그 자체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우파니샤드의 선견자들이 기본적으로 동일한 접근 방식을 가졌다고 가정하며, 『인도의 르네상스』의 긴 구절에서 과거에 대한 자신의 비전의 일부 세부 사항을 제시한다. 그는 "우파니샤드는 수많은 심오한 철학과 종교의 인정된 원천이었다"고 썼다. 불교조차도 모든 발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용어로 "재진술"에 불과했다. 또한, 우파니샤드의 사상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의 많은 사상에서 재발견될 수 있으며, 신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의 심오한 부분을 형성한다." 마지막으로, 독일 형이상학의 대부분은 "본질적으로 이 고대 가르침에서 더 영적으로 본 위대한 현실의 지적 발전에 불과하다." 한 번 제자가 플라톤이 인도 서적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묻자, 그는 "피타고라스 등을 통해 인도의 철학 일부가 전달되었지만", 플라톤은 대부분의 아이디어를 직관에서 얻었다고 가정한다고 답했다.
스리 아우로빈도가 인도 전통에 빚지고 있음은 『신적인 생명』의 각 장 서두에 리그베다, 우파니샤드, 바가바드 기타에서 인용한 수많은 인용문을 배치하여 자신의 사상과 베다 및 베단타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도 명확해진다.
『이샤 우파니샤드』는 스리 아우로빈도의 가장 중요하고 접근하기 쉬운 저작 중 하나로 간주된다. 그는 최종 번역 및 분석을 출판하기 전에 10개의 미완성 주석을 작성했다。 핵심 구절에서 그는 브라흐만 또는 절대자가 안정적이면서도 움직이는 존재임을 지적한다. "우리는 그것을 영원하고 불변하는 영혼 속에서, 그리고 우주와 상대성의 모든 변화하는 현현 속에서 보아야 한다." 스리 아우로빈도의 전기 작가 K.R.S. 이옌가르(K.R.S. Iyengar)는 R.S. 무갈리(R.S. Mugali)의 말을 인용하여 스리 아우로빈도가 이 우파니샤드에서 나중에 『신적인 생명』으로 성장한 사상의 씨앗을 얻었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3.5. 통합과 조화
스리 아우로빈도 철학의 주요 주창자인 시시르 쿠마르 마이트라는 외부 영향 문제를 언급하며 스리 아우로빈도가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의 책을 읽으면 현재 시대의 위대한 서양 철학자들에 대한 그의 철저한 이해를 알 수밖에 없다"고 썼다. 그는 인도인이지만 "서양 사상이 그에게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 영향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스리 아우로빈도는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았다. 그는 서양 사상을 최대한 활용했지만, 자신의 체계를 구축하는 목적으로 활용했다." 따라서 마이트라는 스티브 오딘(Steve Odin)과 마찬가지로 스리 아우로빈도를 인도 철학뿐만 아니라 서양 철학의 전통과 맥락에서도 보며, 그가 자신의 통합을 위해 후자로부터 일부 요소를 채택했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R. 풀리간들라(R. Puligandla)는 그의 저서 『인도 철학의 기초(Fundamentals of Indian Philosophy)』에서 이 관점을 지지한다. 그는 스리 아우로빈도의 철학을 "인도와 서양 전통의 독창적인 통합"이라고 묘사한다. "그는 현대 서양의 위대한 사회적, 정치적, 과학적 성과를 고대 인도의 심오한 영적 통찰력과 독특한 방식으로 통합한다. 아우로빈도의 신성한 삶을 이끄는 비전은 다름 아닌 모든 존재의 통일성에 대한 우파니샤드적 비전이다."
풀리간들라는 또한 샹카라에 대한 스리 아우로빈도의 비판적 입장을 논한다. 스리 아우로빈도는 샹카라의 베단타가 세계를 부정하는 철학이라고 주장하며, 세계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라고 가르친다고 보았다. 풀리간들라의 관점에서 이는 샹카라의 입장에 대한 오해이며, 이는 스리 아우로빈도가 힌두교와 서양 사상을 통합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그는 샹카라의 마야바다를 조지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과 동일시했다.
그러나 스리 아우로빈도의 샹카라 비판은 U. C. 두베이(U. C. Dubey)의 논문 『통합주의: 스리 아우로빈도 철학의 독특한 특징(Integralism: The Distinctive Feature of Sri Aurobindo's Philosophy)』에 의해 지지된다. 그는 스리 아우로빈도의 체계가 현실에 대한 통합적 관점을 제시하며, 절대자와 그 창조력이 실제로는 하나이므로 그들 사이에 대립이 없다고 지적한다. 또한 그는 절대자와 유한한 세계 사이의 매개 원리로서 스리 아우로빈도의 초정신 개념을 언급하며, S.K. 마이트라의 말을 인용하여 이 개념이 "스리 아우로빈도 철학 전체가 움직이는 축"이라고 말한다.
두베이는 샹카라 학파의 접근 방식을 분석하며, 그들이 유한한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절대자의 문제를 다루는 데 적절하지 않은 종류의 논리를 따른다고 믿는다. 그는 유한한 이성의 도움으로는 "우리는 현실의 본질을 하나 또는 여럿, 존재 또는 생성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스리 아우로빈도의 통합적 아드바이타는 존재의 모든 겉보기에 다른 측면들을 절대자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통일성 속에서 조화시킨다." 다음으로 두베이는 스리 아우로빈도에게는 그의 통합주의가 뿌리내리고 있는 더 높은 이성, 즉 "무한의 논리"가 있다고 설명한다.
4. 저술과 문학
스리 아우로빈도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으며, 그의 사상과 영적 비전을 담은 이 작품들은 인도와 서양 모두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4.1. 인도 판본

스리 아우로빈도의 저작들은 크게 두 가지 주요 전집으로 출판되었다. 첫 번째 전집은 1972년에 30권으로 구성된 『스리 아우로빈도 탄생 백주년 기념 문고(Sri Aurobindo Birth Centenary Library, SABCL)』로 퐁디셰리의 스리 아우로빈도 아쉬람에서 출판되었다. 새로운 전집인 『스리 아우로빈도 전집(Complete Works of Sri Aurobindo, CWSA)』은 1995년에 시작되었으며, 현재 37권 중 36권이 출판되었다.
그의 주요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초기 문화 저작(Early Cultural Writings)』
- 『시집(Collected Poems)』
- 『희곡 및 이야기 전집(Collected Plays and Stories)』
- 『카르마요긴(Karmayogin)』
- 『요가 기록(Records of Yoga)』
- 『베다 및 문헌학 연구(Vedic and Philological Studies)』
- 『베다의 비밀(The Secrets of the Veda)』
- 『신비로운 불꽃에 대한 찬가(Hymns to the Mystic Fire)』
- 『이샤 우파니샤드(Isha Upanishad)』
- 『케나 및 기타 우파니샤드(Kena and Other Upanishads)』
- 『기타에 대한 에세이(Essays on the Gita)』
- 『인도의 르네상스와 인도 문화 옹호(The Renaissance of India with a Defence of Indian Culture)』
- 『신적인 생명』
- 『요가의 통합』
- 『인간의 순환 - 인간 통합의 이상 - 전쟁과 자결(The Human Cycle - The Ideal of Human Unity - War and Self-Determination)』
- 『미래 시(The Future Poetry)』
- 『시와 예술에 대한 편지(Letters on Poetry and Art)』
- 『요가에 대한 편지(Letters on Yoga)』
- 『마더(The Mother)』
- 『사비트리 - 전설과 상징(Savitri - A Legend and a Symbol)』
- 『자신과 아쉬람에 대한 편지(Letters on Himself and the Ashram)』
- 『자서전적 기록 및 기타 역사적 관심사 저작(Autobiographical Notes and Other Writings of Historical Interest)』
그의 많은 작품들은 원래 『아리아』라는 잡지에 연재 형식으로 출판되었다. 스리 아우로빈도의 대부분의 작품은 영어로 작성되었지만, 그의 주요 작품들은 나중에 힌디어, 벵골어, 오리야어, 구자라트어, 마라티어, 산스크리트어, 타밀어, 텔루구어, 칸나다어, 말라얄람어 등 인도 언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중국어, 포르투갈어, 슬로베니아어, 러시아어 등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방대한 러시아어 번역본은 온라인에서도 열람할 수 있다.
4.2. 미국 판본
미국에서는 스리 아우로빈도의 주요 작품들이 로터스 프레스(Lotus Press)를 통해 출판되었다.
주요 작품:
- 『스리 아우로빈도 기본 작품 세트 12권 미국판(Sri Aurobindo Primary Works Set 12 vol. US Edition)』
- 『스리 아우로빈도 선정 저작 소프트웨어 CD-ROM(Sri Aurobindo Selected Writings Software CD-ROM)』
- 『신적인 생명(The Life Divine)』
- 『사비트리: 전설과 상징(Savitri: A Legend and a Symbol)』
- 『요가의 통합(The Synthesis of Yoga)』
- 『기타에 대한 에세이(Essays on the Gita)』
- 『인간 통합의 이상(The Ideal of Human Unity)』
- 『인간의 순환: 사회 발전의 심리학(The Human Cycle: The Psychology of Social Development)』
- 『인간의 순환, 인간 통합의 이상, 전쟁과 자결(The Human Cycle, Ideal of Human Unity, War and Self Determination)』
- 『우파니샤드(The Upanishads)』
- 『베다의 비밀(Secret of the Veda)』
- 『신비로운 불꽃에 대한 찬가(Hymns to the Mystic Fire)』
- 『마더(The Mother)』
선집 및 2차 문헌:
- 『통합 요가: 스리 아우로빈도의 가르침과 수행 방법(The Integral Yoga: Sri Aurobindo's Teaching and Method of Practice)』
- 『인간의 미래 진화(The Future Evolution of Man)』
- 『필수 아우로빈도 - 스리 아우로빈도의 저작(The Essential Aurobindo - Writings of Sri Aurobindo)』
- 『바가바드 기타와 그 메시지(Bhagavad Gita and Its Message)』
- 『빛의 마음(The Mind of Light)』
- 『환생과 카르마(Rebirth and Karma)』
- 『신의 시간(Hour of God)』
- 『스리 아우로빈도 요가 사전(Dictionary of Sri Aurobindo's Yoga)』 (M. P. 판디트 편찬)
- 『베다 상징주의(Vedic Symbolism)』
- 『내면의 힘(The Powers Within)』
- 『스리 아우로빈도 읽기(Reading Sri Aurobindo)』
4.3. 비교 연구
스리 아우로빈도의 사상은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다른 철학자나 사상가들과 비교 연구되었다.
- 로드 헴셀(Rod Hemsell): 『진화의 철학(The Philosophy of Evolution)』, 『스리 아우로빈도와 무한의 논리: 새천년 에세이(Sri Aurobindo and the Logic of the Infinite: Essays for the New Millennium)』, 『의식의 철학: 헤겔과 스리 아우로빈도(The Philosophy of Consciousness: Hegel and Sri Aurobindo)』.
- 빌프리트 후츠마이어(Wilfried Huchzermeyer): 『스리 아우로빈도의 크리슈나, 붓다, 그리스도, 라마크리슈나 주석: 인류 진화에서의 역할(Sri Aurobindo's Commentaries on Krishna, Buddha, Christ and Ramakrishna. Their Role in the Evolution of Humanity)』.
- 데이비드 T. 존스턴(David T. Johnston): 『융의 세계적 비전: 서구 정신, 동양 정신, 스리 아우로빈도, 통합 요가, 마더에 대한 언급(Jung's Global Vision: Western Psyche, Eastern Mind, With References to Sri Aurobindo, Integral Yoga, The Mother)』, 『우리 가운데의 예언자들: 융, 톨킨, 겝서, 스리 아우로빈도와 마더(Prophets in Our Midst: Jung, Tolkien, Gebser, Sri Aurobindo and the Mother)』.
- 사티아 프라카시 싱(Satya Prakash Singh): 『신의 본성: 스리 아우로빈도와 화이트헤드 비교 연구(Nature of God. A Comparative Study in Sri Aurobindo and Whitehead)』, 『스리 아우로빈도, 융, 그리고 베다 요가(Sri Aurobindo, Jung and Vedic Yoga)』.
- 에릭 M. 바이스(Eric M. Weiss): 『미묘한 세계의 교리: 스리 아우로빈도의 우주론, 현대 과학, 그리고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The Doctrine of the Subtle Worlds. Sri Aurobindo's Cosmology, Modern Science and the Metaphysics of Alfred North Whitehead)』.
5. 유산과 평가
스리 아우로빈도는 인도의 민족주의자였지만, 인간 진화와 통합 요가에 대한 그의 철학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5.1. 영향력
그의 영향력은 광범위했다. 인도에서는 S. K. 마이트라, 아닐바란 로이, D. P. 차토파디아야가 스리 아우로빈도의 작품에 대해 논평했다. 서양 밀교와 전통 지혜에 대한 작가들, 예를 들어 미르체아 엘리아데, 폴 브런턴, 르네 게농은 모두 그를 인도 영적 전통의 진정한 대표자로 보았다. 르네 게농은 일부 추종자들이 그의 사상을 배신했고,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일부 작품이 전통적이지 않아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리다스 차우두리와 프레데릭 슈피겔베르그는 아우로빈도에게 영감을 받은 사람들 중 하나였으며, 샌프란시스코에 새로 설립된 미국 아시아 연구 학회에서 일했다. 얼마 후, 차우두리와 그의 아내 비나는 문화 통합 협회(Cultural Integration Fellowship)를 설립했고, 이 협회는 나중에 캘리포니아 통합 연구소로 발전했다.
스리 아우로빈도는 수바스 찬드라 보스가 인도 민족 운동에 전념하도록 영향을 주었다. 보스는 "아우로빈도 고시의 빛나는 예시가 내 눈앞에 크게 드리워져 있다. 나는 그 예시가 나에게 요구하는 희생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낀다"고 썼다.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은 1968년 5월 한 주 동안 사트프렘의 스리 아우로빈도에 대한 글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이 시기에 작곡가는 개인적인 위기를 겪고 있었고 스리 아우로빈도의 철학이 자신의 감정과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 경험 이후 슈토크하우젠의 음악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어, 그의 경력 끝까지 계속될 신비주의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장 겝서는 스리 아우로빈도가 자신의 작품에 미친 영향을 인정했으며, 자신의 저술에서 그를 여러 번 언급했다. 예를 들어, 『보이지 않는 기원(The Invisible Origin)』에서 그는 『요가의 통합』의 긴 구절을 인용했다. 겝서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스리 아우로빈도를 통해 방출되는 극도로 강력한 영적 힘의 장에 이끌렸다"고 믿었다. 그는 『아시아는 다르게 미소 짓는다(Asia Smiles Differently)』라는 제목의 책에서 스리 아우로빈도 아쉬람 방문과 '마더'와의 만남에 대해 보고하며 그녀를 "뛰어나게 재능 있는 인물"이라고 칭했다.
1915년 퐁디셰리에서 스리 아우로빈도를 만난 덴마크 작가이자 예술가인 요하네스 홀렌베르그는 유럽에서 최초의 요가 서적 중 하나를 출판했으며, 나중에 스리 아우로빈도에 대한 두 편의 에세이를 썼다. 그는 또한 『신적인 생명』의 일부 발췌문을 덴마크어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칠레의 노벨상 수상자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은 스리 아우로빈도를 "학자, 신학자, 그리고 깨달은 자의 독특한 종합"이라고 불렀다. "시민적 리더십의 선물, 영적 지도의 선물, 아름다운 표현의 선물: 이것이 스리 아우로빈도가 수많은 인도인들에게 도달한 삼위일체, 세 개의 빛의 창이다."
윌리엄 어윈 톰슨은 1972년 오로빌로 여행하여 '마더'를 만났다. 톰슨은 스리 아우로빈도의 영성에 대한 가르침을 "급진적 아나키즘"이자 "탈종교적 접근 방식"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작업이 "...선사 시대의 여신 문화로 거슬러 올라가, 마셜 매클루언의 용어로, 샤먼과 '현명한 여성(la sage femme)'의 원형을 '문화적으로 되찾았다'"고 평가했다. 톰슨은 또한 1973년 마더의 사망 밤에 그녀로부터 샤크티, 즉 영적 힘을 경험했다고 썼다.
스리 아우로빈도의 인간 능력의 추가 진화에 대한 아이디어는 마이클 머피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으며, 머피의 저술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간 잠재력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미국 철학자 켄 윌버는 스리 아우로빈도를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현대 철학자-현인"이라고 불렀으며, 그의 사상 중 일부를 자신의 철학적 비전에 통합했다. 윌버의 아우로빈도 해석은 로드 헴셀에 의해 비판받았다. 뉴에이지 작가 앤드루 하비 또한 스리 아우로빈도를 주요 영감의 원천으로 본다.
5.2. 추종자들
다음의 작가, 제자, 단체들은 스리 아우로빈도와 '마더'에게서 지적 유산을 물려받았거나 어떤 면에서 영향을 받았다.
- 놀리니 칸타 굽타(Nolini Kanta Gupta, 1889-1983): 스리 아우로빈도의 고참 제자 중 한 명으로, 스리 아우로빈도와 '마더'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철학, 신비주의, 영적 진화에 대해 광범위하게 저술했다.
- 니로바란(Nirodbaran, 1903-2006): 에든버러에서 의학 학위를 받은 의사. 스리 아우로빈도와의 길고 방대한 서신은 통합 요가의 여러 측면을 상세히 설명하며, 대화 기록은 수많은 주제에 대한 스리 아우로빈도의 사상을 보여준다.
- M. P. 판디트(M. P. Pandit, 1918-1993): '마더'와 아쉬람의 비서. 그의 방대한 저술과 강연은 요가, 베다, 탄트라, 스리 아우로빈도의 서사시 『사비트리』 등을 다룬다.
- 스리 친모이(Sri Chinmoy, 1931-2007): 1944년 아쉬람에 합류했다. 나중에 스리 아우로빈도의 삶에 대한 연극 『스리 아우로빈도: 푸른색의 하강(Sri Aurobindo: Descent of the Blue)』과 책 『무한: 스리 아우로빈도(Infinite: Sri Aurobindo)』를 썼다. 작가, 작곡가, 예술가, 운동선수로, 내면의 평화와 세계 조화(콘서트, 명상, 경주 등)를 주제로 한 공개 행사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 파비트라(Pavitra, 1894-1969): 초기 제자 중 한 명. 파리에서 필리프 바르비에 생틸레르(Philippe Barbier Saint-Hilaire)로 태어났다. 파비트라는 1925년과 1926년에 그들과의 대화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회고록을 남겼으며, 이는 『파비트라와의 대화(Conversations avec Pavitra)』로 출판되었다.
- 딜립쿠마르 로이(Dilipkumar Roy, 1897-1980): 인도 벵골 음악가, 음악학자, 소설가, 시인, 수필가.
- T.V. 카팔리 사스트리(T.V. Kapali Sastry, 1886-1953): 저명한 작가이자 산스크리트 학자. 1929년 스리 아우로빈도 아쉬람에 합류하여 4개 언어로 책과 기사를 썼으며, 특히 스리 아우로빈도의 베다 해석을 탐구했다.
- 사트프렘(Satprem, 1923-2007): 프랑스 작가이자 '마더'의 중요한 제자. 『마더스 아젠다(Mother's Agenda, 1982)』, 『스리 아우로빈도 또는 의식의 모험(Sri Aurobindo or the Adventure of Consciousness, 2000)』, 『초인성으로 가는 길(On the Way to Supermanhood, 2002)』 등을 출판했다.
- 인다라 센(Indra Sen, 1903-1994): 스리 아우로빈도의 또 다른 제자로, 서양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40년대와 1950년대에 통합 심리학과 통합 철학을 처음으로 명확히 제시했다. 그의 논문 모음집은 1986년 『통합 심리학(Integral Psychology)』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 K. D. 세트나(K. D. Sethna, 1904-2011): 인도 시인, 학자, 작가, 문화 비평가, 스리 아우로빈도의 제자. 수십 년 동안 아쉬람 저널 『마더 인디아(Mother India)』의 편집장을 지냈다.
- 마가렛 우드로 윌슨(Margaret Woodrow Wilson, '니스사(Nistha)', 1886-1944):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딸. 1938년 아쉬람에 와서 사망할 때까지 머물렀다. 『신적인 생명』 개정판 준비를 도왔다.
- 쉬 판청(Xu Fancheng, Hsu Hu, 1909-2000): 중국 산스크리트 학자. 1951년 아쉬람에 와서 스리 아우로빈도의 신봉자가 되었고 '마더'의 추종자가 되었다. 27년 동안(1951-1978) 퐁디셰리에서 거주하며 '마더'의 지도 아래 스리 아우로빈도 전집 번역에 전념했다.
5.3. 비판과 논란
스리 아우로빈도의 사상과 행동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논쟁도 존재한다.
- 아디 다(Adi Da): 스리 아우로빈도의 공헌은 단순히 문학적, 문화적이었으며, 그의 정치적 동기가 영성과 인간 진화로 확장되었다고 보았다.
- N. R. 말카니(N. R. Malkani): 스리 아우로빈도의 창조론은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이 이론은 일반적인 인간 경험을 초월하는 경험과 비전을 이야기하며, 어려운 문제에 대한 지적 반응일 뿐이고, 존재의 진실에 기반하지 않은 것들을 이론화하고 논의하는 데 예측 불가능성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말카니는 인식이 이미 현실이며, 인식에 종속된 창조적 활동을 검토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 켄 윌버의 스리 아우로빈도 철학 해석은 스리 아우로빈도가 『신적인 생명』에서 제안한 현실을 물질, 생명, 정신, 오버마인드, 초정신이라는 다른 수준으로 나누는 개념과 달랐다. 윌버는 이를 더 높거나 낮은 중첩된 홀론으로 지칭하며, 단지 네 가지 현실(그 자신이 만든 현실 체계)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 라즈니쉬(오쇼): 그의 신봉자들이 "스리 아우로빈도는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고 말한다"고 하자, 라즈니쉬는 스리 아우로빈도가 "깨달음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만, 그는 깨달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6. 개인적인 삶
아우로빈도 고시는 1901년 콜카타 방문 중 정부 공무원 부팔 찬드라 보세의 14세 딸 므리날리니(Mrinalini)와 결혼했다. 당시 아우로빈도는 28세였다. 므리날리니는 17년 후인 1918년 12월 인플루엔자 팬데믹 중에 사망했다.
7. 사망
스리 아우로빈도는 1950년 12월 5일 요독증으로 사망했다. 약 60,000명의 사람들이 그의 평화롭게 누워있는 시신을 보기 위해 참석했다. 자와할랄 네루 인도 총리와 라젠드라 프라사드 대통령은 요가 철학과 독립 운동에 대한 그의 공헌을 칭송했다. 국내외 신문들은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맨체스터 가디언』의 한 기자는 그를 "현대 인도가 배출한 가장 거대한 철학 사상가"라고 불렀다.
8. 외부 링크
- [http://www.sriaurobindoashram.org 스리 아우로빈도 아쉬람]
- [http://www.auroville.org 오로빌]
- [https://www.sriaurobindoashram.org/sriaurobindo/writings.php 스리 아우로빈도 전집]
- [http://www.aurobindo.ru/ САЙТ ШРИ АУРОБИНДО И МАТЕРИ (러시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