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당 드라알(Adam de la Halle, Adam de la Halle프랑스어, 1245년~1250년경 출생, 1285년~1288년경 또는 1306년 이후 사망)은 13세기 프랑스의 중요한 음유시인(trouvère)이자 작곡가이다. 그는 단선율 음악과 다성 음악을 모두 작곡한 몇 안 되는 중세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이 점에서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작곡가로 평가받으며 복합적인 유산을 남겼다. 그는 기존 음유시인의 장르를 훌륭하게 계승하는 동시에 새로운 음악극 작품을 실험했다. 아당 드라알은 음유시인 전통의 마지막 세대를 대표하며, "13세기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 및 문학 인물 중 한 명"으로 오랫동안 인정받아 왔다.
그의 문학 및 음악 작품에는 음유시인 양식의 샹송chanson프랑스어과 주 파르티jeux-partis프랑스어(시적 논쟁)가 포함된다. 또한 초기 전례 다성 음악 양식의 다성 롱도rondel프랑스어와 모테트motet프랑스어를 작곡했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속 음악극으로 평가받는 음악극인 《로뱅과 마리옹의 장난Jeu de Robin et Marion프랑스어》(1282년~1283년경)을 남겼다. 그는 아라스의 음유시인 및 부르주아 연합Confrérie des jongleurs et bourgeois d'Arras프랑스어의 일원이었다.
2. 생애
아당 드라알의 생애는 그의 작품과 동시대 기록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 그는 13세기 프랑스 북부 아르투아 지방의 중심지인 아라스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으며, 유력한 후원자들의 궁정에서 활동하며 당대 최고의 음악가이자 시인으로 명성을 떨쳤다.
2.1. 출생 및 어린 시절
아당 드라알은 프랑스 아라스 태생으로, 그의 별명인 "아라스의 아당"(Adam d'Arras프랑스어)과 "아라스의 곱추"(Adam le Bossu프랑스어 또는 Bossu d'Arras프랑스어)에서 그 연고를 짐작할 수 있다. "곱추"라는 별명은 아마도 가문의 이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당 자신은 미완성 작품인 《시칠리아의 왕Le roi de Sicile프랑스어》의 헌정사에서 "보시다시피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언급하며 자신이 곱추가 아님을 시사했다. 그의 아버지 앙리 드라알(Henri de la Halle프랑스어)은 아라스의 저명한 시민이자 관료였다. 아라스는 당시 모직물 산업과 무역으로 번성했던 도시다. 아당과 그의 아버지는 아라스의 시민 분쟁에 휘말려 잠시 두에로 피신하기도 했다.
2.2. 교육
아당은 캉브레 근처 보셀Vaucelles프랑스어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에서 문법, 신학, 음악을 공부하며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원래 성직자가 될 예정이었으나, 이 뜻을 포기하고 마리(Marie프랑스어)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또한 1262년경 파리 대학교에서 성직자 교육을 받았다는 설도 있으며, 이 설이 사실이라면 그는 이 대학을 중심으로 확산되던 아르스 안티콰Ars Antiqua라틴어의 복잡한 폴리포니 음악을 직접 접할 기회를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2.3. 경력 및 후원
교육을 마친 후 아당은 아라스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1270년대부터 그는 아라스의 영주인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Robert II, Count of Artois프랑스어를 위해 음유시인(minstrel)으로 봉사했다. 아라스에는 부유한 시민 계급이 많았기 때문에 큰 가요 조합(피위Puy프랑스어)이 있었고, 아당은 이곳에 소속되어 음악적 기량을 연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사용된 언어의 방언으로 미루어 볼 때 아라스에서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아당은 로베르 2세 백작을 따라 1276년 또는 1277년에 파리로 이동했으며, 1283년에는 루이 9세의 동생이자 나폴리 왕국의 왕인 앙주 백작 샤를 1세Charles I of Anjou프랑스어의 궁정에 합류했다. 그는 샤를 1세의 행보를 따라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탈리아 등을 여행했다. 샤를 1세가 나폴리 왕이 된 후 그의 궁정에서 아당은 자신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로뱅과 마리옹의 장난》을 집필했다.
2.4. 개인 생활
아당은 마리(Marie프랑스어)와 결혼했으며, 마리는 그의 많은 샹송, 롱도, 모테트, 주 파르티 등 여러 작품에 등장한다. 그녀는 그의 창작 활동에 영감을 준 중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2.5. 사망
아당 드라알의 사망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가장 유력한 설은 그가 1287년 또는 1288년경 나폴리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304년경 아라스에서 사망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3. 주요 활동 및 업적
아당 드라알은 다양한 음악 장르와 극 작품을 통해 중세 음악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그의 극음악 작품은 후대 음악극 발전에 중요한 선구적 역할을 했다.
3.1. 음악 장르 및 형식
아당 드라알은 다양한 형식의 음악을 작곡하며 그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다. 그의 알려진 작품으로는 36곡의 샹송(chanson프랑스어), 46곡의 롱데 드 카롤(rondets de carole프랑스어), 18곡의 주 파르티(jeux-partis프랑스어), 14곡의 롱도(rondeaux프랑스어), 5곡의 모테트(motets프랑스어), 1곡의 롱도-비렐라이(rondeau-virelai프랑스어), 1곡의 발라타(ballette프랑스어), 1곡의 디트 다무르(dit d'amour프랑스어), 그리고 1곡의 콩제(congé프랑스어)가 있다. 콩제는 아라스 시에 대한 풍자적인 작별 인사였다.
3.2. 극음악 작품

아당 드라알은 두 편의 중요한 극 작품을 남겼으며, 이들은 중세 세속 음악극의 발전에 있어 이정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3.2.1. 로뱅과 마리옹의 장난 (Jeu de Robin et Marion)
《로뱅과 마리옹의 장난》은 아당 드라알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속 프랑스 음악극으로 꼽힌다. 1275년경 아라스에서 작곡되었다는 설과 1284년경 나폴리에서 작곡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샤를 1세의 궁정에서 공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에서 보편적인 목가극pastoral프랑스어을 바탕으로 한다.
이야기는 양치기 소녀 마리옹에게 반한 기사가 그녀를 자신의 연인인 농부 로뱅으로부터 빼앗으려 하지만, 마리옹은 기사에게 넘어가지 않고 완강히 저항하며 로뱅에게 충실함을 지키는 내용이다. 결국 마리옹은 풀려나고, 친구들은 파티를 열어 이를 축하한다. 이 작품은 오래된 샹송인 "로뱅은 나를 사랑해, 로뱅이 나를 가졌네"(Robin m'aime, Robin m'a프랑스어)를 기반으로 하며, 대화와 당시 유행하던 민요풍의 후렴구로 구성된다. 이 후렴구에 붙은 멜로디는 민요적인 성격을 띠며, 그의 다른 샹송이나 모테트의 정교한 음악보다 더 자발적이고 선율적이다. 프랑수아 조제프 페티스(François-Joseph Fétis프랑스어)는 이 작품을 오페라 코미크의 선구자로 평가했다. 1896년 아라스에서 열린 아당 드라알 기념 축제에서는 쥘리앵 티에르소Julien Tiersot프랑스어가 각색한 《로뱅과 마리옹의 장난》이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단에 의해 공연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소박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현대에도 종종 공연된다. 제7장에서 제9장까지는 줄거리가 거의 없고 음악, 춤, 코믹한 대화를 위주로 하는 다소 장황한 부분이어서 종종 생략되기도 한다.
구성 | 출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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