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Overview
발지르 페헤이라(Waldyr Pereira포르투갈어, 1928년 10월 8일 ~ 2001년 5월 12일)는 흔히 지지(Didi포르투갈어)로 알려진 브라질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미드필더 또는 포워드로 활약했으며, 우아하고 기술적인 플레이와 넓은 패싱 능력, 뛰어난 체력, 그리고 독창적인 프리킥 기술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폴랴 세카'(마른 잎)로 불리는 무회전 프리킥 기술은 그가 개발하여 유명해진 것으로, 현대 축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지지는 1954년, 1958년, 1962년 세 차례의 FIFA 월드컵에 브라질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하여 1958년 스웨덴 월드컵과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연속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특히 1958년 대회에서는 뛰어난 활약으로 골든 볼을 수상했으며, 이 우승은 남미 팀이 유럽에서 개최된 월드컵에서 우승한 유일한 사례로 남아 있다. 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극심한 부상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한 그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레알 마드리드 시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의 갈등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겪었던 경험은 그의 선수 생활에 어려움을 더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브라질 축구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선수 은퇴 후에는 감독으로서도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 1970년 페루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월드컵 8강에 진출시키는 등 지도자로서의 역량도 입증했다.
2. Early Life and Background
지지는 1928년 10월 8일 리우데자네이루주 북부의 캄푸스두스고이타카지스에서 가난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을 돕기 위해 땅콩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으며, 축구는 주로 거리에서 즐겼다.
2.1. Childhood and Early Challenges
그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 14세 때는 무릎 부상으로 인한 심각한 감염으로 인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며 부상에서 벗어났고, 이를 계기로 독특한 축구 기술을 개발하게 되었다. 부상당한 다리를 보호하려는 본능에서 시작된 그의 노력은 후에 '폴랴 세카'로 불리는 강력한 프리킥 기술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회복 후 지지는 고향의 지역 클럽에서 축구를 시작하며 프로 선수로서의 꿈을 키웠다.
3. Playing Career
지지는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브라질에서 보냈으며, 단 2년 동안만 유럽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었다. 하지만 이 짧은 유럽 생활 동안 그는 유러피언컵 우승을 경험하며 세계적인 선수로서의 위상을 굳혔다.
3.1. Club Career
지지는 브라질과 스페인, 페루, 멕시코 등 여러 클럽을 거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3.1.1. Early Professional Years (Fluminense)
지지는 1948년 마두레이라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49년 플루미넨시에 입단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1949년부터 1956년까지 플루미넨시에서 가장 오랫동안 연속으로 활약하며 298경기에 출전하여 91골을 기록했다. 그는 1951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와 1952년 코파 리우 우승의 주역이었다. 특히 1950년 6월 16일, 21세의 나이로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열린 리우데자네이루주 청소년 대표팀과 상파울루주 청소년 대표팀 간의 친선 경기에서 마라카낭 스타디움 역사상 첫 골을 기록하는 영예를 안았다. 또한 1952년 칠레에서 열린 1952년 팬아메리칸 챔피언십에서 브라질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해외에서 처음으로 주요 업적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그는 자우마 산투스, 카를루스 카스틸류, 와우두 마샤두, 텔레 산타나 등과 함께 뛰었다.
3.1.2. Botafogo and Real Madrid
1954년 FIFA 월드컵 이후 지지는 보타포구로 이적하여 1957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지지는 보타포구가 우승하면 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자신의 집이 있는 라란제이라스 지역까지 유니폼을 입고 걸어가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팀이 우승하자 약 9.4 km의 거리를 걸어갔는데, 5,000여 명의 보타포구 팬들이 그와 함께 행진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1958년 FIFA 월드컵에서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은 그는 1959년 스페인의 거대 클럽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페렌츠 푸스카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프란시스코 헨토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뛰었지만,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그는 19경기에서 6골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팀의 주축 선수였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팬들의 관심이 새로 온 지지에게 분산되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며 자주 갈등을 빚었다. 특히 페렌츠 푸스카시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로부터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그가 1960년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지지는 1959-60 유러피언컵 우승 캠페인에 참여하여 FIFA 월드컵과 유러피언컵을 모두 우승한 최초의 브라질 선수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
3.1.3. Later Club Teams and Retirement
레알 마드리드를 떠난 후 지지는 다시 보타포구로 돌아왔다. 1960년대 초반 가린샤, 닐통 산투스, 마리우 자갈루, 아마리우두, 콰렌칭야, 그리고 젊은 망가, 제르송, 히우두, 자이르지뉴 등 세계적인 선수들이 포진했던 보타포구는 당시 펠레가 이끌던 산투스와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었던 유일한 브라질 클럽이었다. 지지는 보타포구에서 총 313경기에 출전하여 114골을 기록하며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했고, 1961년과 1962년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1962년 토르네이우 리우-상파울루, 1962년 멕시코 펜타곤 클럽 토너먼트, 1963년 파리 토너먼트 우승에 기여했다.
1963년에는 페루의 스포르팅 크리스탈로 이적했고, 1964년에 다시 보타포구로 돌아왔다. 1965년에는 멕시코 리그의 CD 베라크루스에서 뛰었으며, 1966년 38세의 나이로 상파울루와 계약했지만 단 4경기에 출전한 후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감독으로 전향했다.
3.2. International Career (Brazil National Team)
지지는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총 68경기에 출전해 20골을 기록했다. 그의 국가대표팀 경력은 브라질 축구의 황금기를 상징한다.
3.2.1. World Cup Success
지지는 세 차례의 FIFA 월드컵에 출전하며 브라질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웠다.
- 1954년 FIFA 월드컵
1954년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지지는 멕시코와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득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브라질은 8강전에서 세계 최강으로 평가받던 헝가리에게 패배하며 탈락했다. 이 경기는 '베른의 전투'로 알려진 난폭한 경기로, 경기 후의 난투극에 지지도 연루되었다.
- 1958년 FIFA 월드컵
지지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이 대회에서 골든 볼을 수상하며 대회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미드필더로서 브라질의 플레이를 완벽하게 지휘하며 브라질의 첫 번째 FIFA 월드컵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브라질은 이 대회에서 남미 팀으로는 유일하게 유럽 대륙에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

- 1962년 FIFA 월드컵
지지는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도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하여 팀의 두 번째 월드컵 우승을 이끌며 브라질의 월드컵 2연패를 달성했다. 그는 이 대회에서도 팀의 중원을 책임지며 뛰어난 기여를 했다.
4. Playing Style and Characteristics
지지는 우아하고 기술적인 플레이 스타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한 정확한 패싱 능력과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겸비한 선수였다. 특히 그의 전술적 이해와 게임 메이킹 능력은 물리적인 약점을 보완하며 그를 당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그는 또한 프리킥 전문가로 명성을 날렸으며, '에티오피아의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4.1. The "Folha Seca" Technique
지지는 '폴랴 세카'(Folha Seca포르투갈어, '마른 잎'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독특한 프리킥 기술을 개발하고 유명하게 만든 선수이다. 이 기술은 볼이 마치 마른 잎처럼 불규칙하게 흔들리면서 갑자기 아래로 떨어지는 궤적을 그리며 골문으로 향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궤적은 마그누스 효과를 활용한 것으로, 골키퍼가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어 득점으로 이어질 확률을 높였다.
어린 시절 입은 심각한 다리 부상으로 인해 약해진 오른쪽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볼을 특정 방식으로 차는 연습을 하면서 이 기술을 우연히 터득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폴랴 세카' 기술은 후대에 많은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특히 브라질의 주니뉴 페르남부카누와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 현대 축구의 걸출한 프리킥 스페셜리스트들이 유사한 방식으로 골을 넣으면서 지지의 혁신적인 기술이 재조명되었다.
5. Managerial Career
선수 은퇴 후 지지는 곧바로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으며, 여러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성공적인 지도력을 선보였다.
5.1. Peru National Team and Club Coaching
지지는 선수 은퇴 후 스포르팅 크리스탈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지도자 경력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은 1970년 FIFA 월드컵에서 페루 국가대표팀을 이끈 것이었다. 그는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페루를 월드컵 본선으로 진출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1958년 월드컵 예선에서 페루가 탈락한 데 대한 일종의 '복수'로 여겨지기도 했다. 테오필로 쿠비야스와 엑토르 춤피타스 같은 스타 선수들이 포함된 페루 대표팀은 8강전에서 브라질에게 패배하며 아쉽게 탈락했지만, 지지는 페루 축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71년에는 아르헨티나의 명문 클럽 리버 플레이트 감독직을 수락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갔다. 이후 터키의 거대 클럽 페네르바체 감독으로 부임하여 1973-74 시즌과 1974-75 시즌 터키 쉬페르리그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지도자 경력의 정점을 찍었다.
5.2. Other Coaching Roles
페루 국가대표팀과 리버 플레이트, 페네르바체 외에도 지지는 다양한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다. 그는 방구, 플루미넨시, 보타포구, 크루제이루 등 브라질의 주요 클럽들을 지도했다. 또한 페루의 알리안사 리마, 쿠웨이트 국가대표팀, 그리고 알 아흘리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도 감독직을 수행했다.
6. Later Life and Death
2000년 10월, 지지는 FIF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이 시기 그는 이미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지지는 대장암 합병증으로 인한 폐렴으로 투병하다가 이듬해인 2001년 5월 12일, 72세의 나이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브라질 축구계와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큰 슬픔을 안겼다.
7. Honours and Legacy
지지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수많은 영예를 안았으며, 그의 업적은 브라질 축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7.1. Team Honours
지지는 선수로서 소속 클럽과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다음과 같은 우승 기록을 달성했다.
- 보타포구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1957, 1961, 1962
- 토르네이우 리우-상파울루: 1962
- 토너먼트 홈: 1961, 1962, 1963
- 콜롬비아 국제 토너먼트: 1960
- 멕시코 펜타곤 클럽: 1962
- 플루미넨시
- 코파 리우: 1952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1951
- 레알 마드리드
- 유러피언컵: 1959-60
- 라몬 데 카란사 트로피: 1959
- 브라질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58, 1962
- 코파 오스발도 크루즈: 1955, 1958, 1961, 1962
- 오이긴스컵: 1955, 1961
- 팬아메리칸 챔피언십: 1952
- 타사 두 아틀란치쿠: 1956
7.2. Individual Accolades
지지는 선수로서 다음과 같은 개인 수상 및 인정을 받았다.
- FIFA 월드컵 골든 볼: 1958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58
- IFFHS 선정 20세기 브라질 선수 7위
- IFFHS 선정 20세기 세계 선수 19위
- IFFHS 선정 남아메리카 역대 베스트 일레븐: 2021
- '더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 - 20세기 최고의 선수: Top 50
- 브라질 축구 박물관 명예의 전당 헌액
- 발롱도르 드림팀 (브론즈팀): 2020
- 월드 사커 (잡지) 선정 20세기 위대한 축구 선수 100인 중 39위: 1999
8. Career Statistics
8.1. International Goals
지지는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총 20골을 기록했다. 다음은 그의 국가대표팀 득점 내역이다.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 득점 |
---|---|---|---|
브라질 | 1952 | 5 | 1 |
1953 | 5 | 0 | |
1954 | 7 | 2 | |
1955 | 2 | 0 | |
1956 | 10 | 2 | |
1957 | 10 | 9 | |
1958 | 8 | 1 | |
1959 | 7 | 3 | |
1961 | 4 | 1 | |
1962 | 10 | 1 | |
합계 | 68 | 20 |
No. | 날짜 | 경기장 | 상대팀 | 점수 | 결과 | 대회 |
---|---|---|---|---|---|---|
1 | 1952년 4월 16일 |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산티아고, 칠레 | 우루과이 | 1-0 | 4-2 | 1952년 팬아메리칸 챔피언십 |
2 | 1954년 6월 16일 | 샤르미유 스타디움, 제네바, 스위스 | 멕시코 | 2-0 | 5-0 | 1954년 FIFA 월드컵 |
3 | 1954년 6월 19일 | 스타드 올랭피크 드 라 퐁테즈, 로잔, 스위스 | 유고슬라비아 | 1-1 | 1-1 | 1954년 FIFA 월드컵 |
4 | 1956년 4월 15일 | 프라터슈타디온, 빈, 오스트리아 | 오스트리아 | - | 3-2 | 친선 경기 |
5 | 1956년 5월 9일 | 웸블리 스타디움, 런던, 잉글랜드 | 잉글랜드 | 2-2 | 2-4 | 친선 경기 |
6 | 1957년 4월 13일 |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델 페루, 리마, 페루 | 칠레 | 1-1 | 4-2 | 1957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
7 | 2-1 | |||||
8 | 3-1 | |||||
9 | 1957년 3월 23일 |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델 페루, 리마, 페루 | 콜롬비아 | 5-0 | 9-0 | 1957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
10 | 6-0 | |||||
11 | 1957년 3월 28일 |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델 페루, 리마, 페루 | 우루과이 | 2-3 | 2-3 | 1957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
12 | 1957년 3월 31일 |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델 페루, 리마, 페루 | 페루 | 1-0 | 1-0 | 1957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
13 | 1957년 4월 21일 | 에스타디오 무니시팔,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 | 페루 | 1-0 | 1-0 | 1958년 FIFA 월드컵 예선 |
14 | 1957년 6월 11일 | 에스타디오 무니시팔,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 | 포르투갈 | - | 2-1 | 친선 경기 |
15 | 1958년 6월 24일 | 로순다 스타디움, 스톡홀름, 스웨덴 | 프랑스 | 2-1 | 5-2 | 1958년 FIFA 월드컵 |
16 | 1959년 3월 10일 | 에스타디오 모누멘탈,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 페루 | 1-0 | 2-2 | 1959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
17 | 1959년 3월 15일 | 에스타디오 모누멘탈,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 칠레 | 3-0 | 3-0 | 1959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
18 | 1959년 3월 21일 | 에스타디오 모누멘탈,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 볼리비아 | 4-2 | 4-2 | 1959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
19 | 1961년 5월 7일 |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산티아고, 칠레 | 칠레 | - | 2-1 | 1961년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컵 |
20 | 1962년 4월 21일 | 에스타디오 무니시팔,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 | 파라과이 | - | 6-0 | 1962년 타사 오스발도 크루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