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반데를레이 코르데이루 지 리마는 브라질의 육상 선수로, 어린 시절부터 육상에 대한 열정을 키워왔다.
1.1. 출생 및 유년 시절
반데를레이 코르데이루 지 리마는 1969년 7월 4일 파라나주 크루제이루두오에스치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다. 1973년 가족과 함께 같은 주의 타피라로 이주했다. 어린 시절 그의 꿈은 프로 축구 선수였으며, 농장에서 작은 일을 도우며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었다. 14세 때 지역 체육 교사의 권유로 육상 경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주 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1.2. 초기 육상 경력
리마는 처음에는 크로스컨트리 선수로 경력을 시작했다. 1992년 육상 코치인 리카르두 단젤로를 만나 그에게 사사하게 되었다. 마라톤에 전념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1994년 프랑스의 랭스 마라톤에 '페이스메이커'로 참가했는데, 레이스 중반에 너무 기분이 좋아 그대로 계속 달리기로 결심했고, 결국 2시간 11분 6초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2. 주요 활동 및 성과
리마는 크로스컨트리 선수로서의 시작을 넘어 마라톤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2.1. 크로스컨트리 경력
리마는 크로스컨트리 선수로서 1989년과 1992년 세계 크로스컨트리 선수권 대회에 브라질 대표로 출전했다. 1989년 3월 노르웨이 스타방에르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42분 28초의 기록으로 71위에 올랐다. 1992년 3월 미국 보스턴 대회에서는 132위, 1993년 3월 스페인 아모레비에타에특사노 대회에서는 115위를 기록했다. 그는 1993년 남아메리카 크로스컨트리 선수권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했으며, 1995년에는 같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94년 3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세계 크로스컨트리 선수권 대회에서는 63위에 올랐다.
2.2. 마라톤 경력
리마는 1994년 10월 프랑스 랭스 마라톤에서 2시간 11분 06초의 기록으로 우승하며 첫 마라톤 우승을 차지했다. 1996년 2월 도쿄 국제 마라톤에서는 당시 남미 기록인 2시간 8분 38초로 우승하며 대회 최초의 남미 출신 우승자가 되었다. 1998년 도쿄 국제 마라톤에서는 2시간 8분 31초로 자신의 남미 기록을 경신하며 2위를 차지했고, 같은 해 뉴욕 시티 마라톤에서는 5위에 올랐다. 2000년 4월 로테르담 마라톤에서 2시간 8분 34초로 3위를 기록했다. 2001년 2월 벳푸 오이타 마이니치 마라톤에서 2시간 10분 2초로 2위, 2002년 상파울루 국제 마라톤에서 2시간 11분 19초로 우승했다. 2004년에는 함부르크 마라톤에서 2시간 9분 39초로 우승하며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좋은 컨디션을 보였다.
2.3. 올림픽 참가
리마는 세 차례의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여 브라질을 대표했다.
2.3.1.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1996년 8월 애틀랜타에서 열린 1996년 하계 올림픽 마라톤 종목에 처음으로 참가하여 2시간 21분 1초의 기록으로 47위를 차지했다. 그는 당시 "분명히 훌륭한 경험이었지만, 레이스 도중 신발에 문제가 생겼다"고 언급했다.
2.3.2.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0년 시드니에서 열린 2000년 하계 올림픽은 그의 두 번째 올림픽 참가였다. 하지만 발의 염증 등 컨디션 난조가 겹쳐 레이스 도중 세 차례나 멈춰야 했고, 2시간 37분 8초의 기록으로 75위에 그쳤다.
2.4. 팬아메리칸 게임
리마는 팬아메리칸 게임에서 두 차례 금메달을 획득하며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1999년 캐나다 위니펙에서 열린 대회 마라톤에서 2시간 17분 20초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며 주요 국제 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2003년 산토도밍고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고온다습한 힘든 레이스 환경 속에서도 2시간 19분 8초로 두 번째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는 이 레이스에 대해 "어떻게 완주했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레이스였다. 그토록 기권을 생각한 적은 없었다. 완주한 사람들은 모두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랩을 달릴 힘도 없었고, 결국 몇 분 동안 의식을 잃었다고 들었다. 그 레이스는 아버지의 추억에 바치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3.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마라톤 사건
2004년 8월 29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2004년 하계 올림픽 남자 마라톤 경기에서 반데를레이 코르데이루 지 리마는 브라질 선수 최초로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약 35 km 지점까지 25초가량 선두를 유지하며 순조롭게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아일랜드 출신의 전직 성직자인 닐 호런이 갑자기 길가에서 난입하여 리마를 붙잡고 코스 밖으로 밀어냈다. 호런은 이전에 2003년 포뮬러 원 영국 그랑프리 경기 중에도 실버스톤 서킷 트랙에 난입하여 경기를 방해한 전력이 있었다.
그리스인 관중인 폴리비오스 코시바스가 재빨리 리마를 호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었고, 리마는 곧바로 레이스를 재개했다. 호런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장난으로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재림을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리마는 약 5~10초를 손실했으며, 집중력을 잃고 페이스가 흐트러졌다. 결국 그는 약 38 km 지점에서 이탈리아의 스테파노 발디니와 미국의 멥 케플레지기에게 추월당했다. 리마는 최종적으로 2시간 12분 11초의 기록으로 3위를 차지하며 동메달을 획득했다.
브라질 육상 연맹은 리마를 대신하여 항의를 제기했으며, 연맹 회장인 로베르투 제스타 지 멜루는 "누군가가 우리 선수를 경기에서 제외시켰다. 우리는 우리 선수에게 금메달을 요구한다. 과거에도 다른 종목에서 그러한 해결책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항의는 기각되었다.
4. 올림픽 이후 경력 및 은퇴
아테네 올림픽 이후에도 리마는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나, 35세가 넘은 나이와 부상이 겹치면서 기권하는 레이스가 많아졌다. 그는 2005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마라톤에 참가했지만 완주하지 못했다. 같은 해 상 실베스트르 로드 레이스에 참가하여 14위에 그쳤다. 2007년 팬아메리칸 게임에서 타이틀 방어를 시도했으나, 37 km 지점에서 근육 문제로 기권했다. 같은 해 2월 열린 제1회 도쿄 마라톤에서는 외국 초청 선수로 출전하여 2시간 16분 8초로 6위를 기록했다. 그는 2009년 4월 파리 마라톤을 마지막으로 프로 마라토너로서의 경력을 마감하고 은퇴했다.
리마의 전기는 2007년 헤나타 아드리아웅 당젤루가 저술한 반데를레이 지 리마 - 인생의 마라톤 (Vanderlei de Lima - A Maratona de uma Vida)이라는 제목으로 브라질에서 출판되었다.
5. 수상 및 영예
반데를레이 코르데이루 지 리마는 선수 경력 동안 여러 중요한 상과 영예를 얻었으며, 특히 그의 스포츠맨십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5.1. 피에르 드 쿠베르탱 메달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마라톤 사건 직후,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는 리마가 보여준 탁월한 페어플레이 정신과 올림픽 가치를 인정하여 특별상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 메달을 수여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이 메달을 받은 유일한 남미 출신 선수이다. 메달은 같은 해 12월 7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브라질 올림픽 위원회(COB)가 매년 주최하는 '프레미우 브라질 올림피쿠' 시상식에서 공식적으로 수여되었다. 이 시상식에는 리마를 도와준 그리스인 관중 폴리비오스 코시바스도 초청되어 참석했다.

5.2. 브라질 올해의 선수
리마는 2004년 브라질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 상은 피에르 드 쿠베르탱 메달과 같은 시상식에서 수여되었으며, 수상자는 온라인 대중 투표로 선정된 첫 사례였다.
5.3. 올림픽 성화 점화
2016년 8월, 리마는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2016년 하계 올림픽 성화 봉송에 참여했다. 그리고 같은 달 5일, 자국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2016년 하계 올림픽 개막식에서 올림픽 성화대에 불을 밝히는 최종 주자라는 영예를 안았다. 이 역할은 그의 스포츠맨십과 브라질 스포츠에 대한 기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6. 평가 및 영향
반데를레이 코르데이루 지 리마는 그의 스포츠 활동과 특히 아테네 올림픽에서의 사건을 통해 전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6.1. 스포츠맨십으로서의 평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마라톤 사건에서 리마가 보여준 침착함과 의연한 태도는 전 세계 스포츠계에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레이스 방해에도 불구하고 완주에 집중하고,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완주해서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 "이 동메달은 '아직 내가 금메달을 따서는 안 된다'는 신의 시련이다"라고 말하며 방해자를 비난하는 발언을 일절 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스포츠맨십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는 모범 사례로 평가받았으며, 그에게 수여된 피에르 드 쿠베르탱 메달은 이러한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의 행동은 단순한 메달 색깔을 넘어선 올림픽 정신의 승리로 기억되고 있다.
6.2. 일본과의 관계
리마는 일본의 마라톤 대회에 자주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며 일본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1996년과 1998년 도쿄 국제 마라톤에서 각각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1999년 후쿠오카 국제 마라톤에서는 3위에 입상했다. 2001년 벳푸 오이타 마이니치 마라톤에서 2위를 기록했고, 은퇴를 앞둔 2007년에는 제1회 도쿄 마라톤에 초청 선수로 출전하여 6위를 기록했다. 또한 그는 TBS의 예능 프로그램인 '올스타 감사제'의 '아카사카 5초메 미니 마라톤'에 2005년 봄과 가을 두 차례 게스트 러너로 출연하기도 했다.
7. 주요 마라톤 성적
연월 | 대회명 | 시간 | 순위 | 비고 |
---|---|---|---|---|
1996.02 | 도쿄 국제 마라톤 | 2:08:38 | 우승 | 당시 남미 기록, 대회 최초 남미 출신 우승자 |
1996.08 | 애틀랜타 올림픽 | 2:21:01 | 47위 | |
1997.08 | 아테네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 2:21:48 | 23위 | |
1998.02 | 도쿄 국제 마라톤 | 2:08:31 | 2위 | 자신의 남미 기록 경신 |
1998.11 | 뉴욕 시티 마라톤 | 2:10:42 | 5위 | |
1999.07 | 팬아메리칸 게임 | 2:17:20 | 우승 | |
1999.12 | 후쿠오카 국제 마라톤 | 2:08:40 | 3위 | |
2000.04 | 로테르담 마라톤 | 2:08:34 | 3위 | |
2000.08 | 시드니 올림픽 | 2:37:08 | 75위 | |
2001.02 | 벳푸 오이타 마이니치 마라톤 | 2:10:02 | 2위 | |
2002.07 | 상파울루 국제 마라톤 | 2:11:19 | 우승 | |
2003.08 | 팬아메리칸 게임 | 2:19:08 | 우승 | |
2004.04 | 함부르크 마라톤 | 2:09:39 | 우승 | |
2004.08 | 아테네 올림픽 | 2:12:11 | 3위 | 관중의 방해를 받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