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1797년 1월 22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2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었다. 어릴 때부터 폭넓고 다채로운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자연과학과 여러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1817년 포르투갈 왕세자 페드루와 정략적으로 결혼하며 브라질로 건너갔다. 브라질에 도착한 후, 그녀는 초기에는 남편의 복잡한 사생활과 브라질 궁정의 열악한 환경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곧 브라질의 정치 상황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특히 1822년 브라질 독립 과정에서 그녀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다시 식민지로 전락시키려는 시도에 맞서, 그녀는 남편 페드루를 설득하여 브라질에 남아 독립을 선언하도록 이끌었다. 페드루가 상파울루로 원정을 떠나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는 섭정으로서 1822년 9월 2일 브라질의 독립 법령에 서명하며 브라질의 독립을 공식화하는 데 중추적인 기여를 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독립 아메리카 국가에서 최초로 국가원수 역할을 수행한 여성이 되었다.
그녀의 이러한 활동은 입헌군주제와 자유주의적 이상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수적인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받은 교육과는 대조되는 혁신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브라질 국민들, 특히 최하층민과 노예들은 그녀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그녀를 '브라질인의 어머니'이자 '신생 제국의 수호천사'로 칭송했다.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또한 노예제도 폐지를 모색하고 유럽인들의 브라질 이민을 장려하는 등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으며, 남편 페드루 1세의 계속된 외도, 특히 산투스 후작부인 도미틸라 데 카스트루 이 칸투 이 멜루와의 스캔들로 인해 심각한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겪었다. 결국 1826년 12월 11일, 아홉 번째 임신 중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2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은 남편의 학대 때문이라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졌고, 이는 페드루 1세의 인기를 크게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그녀는 현재 상파울루의 브라질 독립 기념비에 안치되어 있으며, 브라질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2.1. 출생과 가계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1797년 1월 22일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수도 빈에 위치한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2세(1804년부터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번째 자녀이자 세 번째로 살아남은 자녀이며, 살아남은 딸 중에서는 둘째였다.
그녀의 친가 조부모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였고, 외가 조부모는 양시칠리아의 페르디난도 1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였다. 양 부모는 모두 겹사촌이었으며,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왕조 중 하나인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와 부르봉 왕가의 혈통을 이었다. 그녀가 태어날 당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는 1282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여러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으며, 부르봉 왕가는 스페인, 나폴리, 시칠리아, 파르마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카롤리네 요제파 레오폴디네 프란치스카 페르디난데'라는 이름을 받았지만, 세례 기록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브라질로 가는 여정에서부터 이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브라질에서는 '레오폴디나' 또는 '마리아'라는 이름으로만 서명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녀가 성모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앙심 때문에 '마리아'라는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마리아 레오폴디나가 태어난 시기는 유럽 역사상 격동기였다.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의 제1통령이 된 후, 그는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유럽 대륙의 국경을 재편하고 수많은 연합 전쟁을 벌였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맞서 나폴레옹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의 언니인 대공비 마리 루이즈는 1810년 나폴레옹과 결혼하여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의 유대를 강화하려 했다.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심각한 패배로 여겨졌으며, 특히 프랑스 혁명 중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으로 프랑스를 깊이 증오했던 외할머니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는 "내가 부족했던 것은 이제 악마의 할머니가 되는 것뿐이었다"며 사위의 태도를 비난했다.
2.2. 교육

1807년 4월 13일, 열 살의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산후 합병증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1년 후인 1808년 1월 6일, 그녀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에스테 대공비 마리아 루도비카와 재혼했는데,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훗날 그녀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남편의 사촌이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손녀였던 새 황후는 교양 있고 지적인 인물로, 마리아 레오폴디나에게 문학, 자연, 요제프 하이든과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음악에 대한 취향을 길러주었다. 친자녀가 없었던 마리아 루도비카는 전임 황후의 자녀들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새어머니를 평생 '정신적인 어머니'로 여겼다. 덕분에 그녀는 1810년과 1812년, 새어머니와 함께 카를로비 바리에 방문했을 때 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만날 기회를 가졌다.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 가지 원칙, 즉 규율, 경건, 의무감에 따라 양육되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엄격한 교육, 다양한 문화적 자극, 그리고 아버지의 영토를 위협하는 연속적인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녀와 형제자매들은 조부 레오폴트 2세가 정한 교육 원칙에 따라 자랐는데, 이 원칙은 사람 간의 평등, 모든 이를 정중하게 대할 필요성, 자선 실천의 필요성,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의 필요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희생하는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원칙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쓰는 것으로 글쓰기 연습을 하는 습관이었다: "가난한 자를 억압하지 말라. 자비를 베풀라. 신이 당신에게 준 것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습관을 개선하라. 우리는 진정으로 선하게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마리아 레오폴디나와 형제자매들의 학습 프로그램에는 읽기, 쓰기, 춤, 그림, 피아노, 승마, 사냥, 역사, 지리, 음악 등의 과목이 포함되었다. 고급 과정에서는 수학(산술과 기하학), 문학, 물리학, 노래, 공예 등을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자연과학 분야에 큰 흥미를 보였고, 특히 식물학과 광물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수집 취미를 물려받아 동전, 식물, 꽃, 광물, 조개껍데기 등을 수집했다. 1816년 10월부터 12월까지 그녀는 포르투갈어를 빠르게 익혔고, 12월에는 포르투갈 외교관들과 유창하게 대화하며 "브라질 지도와 이 왕국의 역사 또는 관련 기억들을 담은 책들에 둘러싸여" 지냈다. 언어 학습은 가문 교육의 일부였고, 레오폴디나는 모국어인 독일어 외에도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 7개 언어를 구사하는 뛰어난 다언어자가 되었다.
레오폴디나와 형제자매들은 박물관, 식물원, 공장, 농장 등을 자주 방문했다. 또한, 아이들이 의례와 대중 노출에 익숙해지도록 춤을 추거나 연극에 참여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대공과 대공비들은 대중 연설 능력, 명료한 발음, 웅변술을 개발하기 위해 연극 관람을 장려받았다.
3. 결혼 협상 및 브라질 도착
유럽에서 수세기 동안 왕실 결혼은 주로 정치적 동맹의 수단이었다. 결혼을 통해 유럽 대륙의 지정학적 지도는 왕실 가문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연대를 통해 형성되었다. 마리아 레오폴디나와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베스 연합 왕국의 왕세자 페드루 데 알칸타라 간의 결혼은 포르투갈과 오스트리아 군주국 간의 전략적 동맹이었다. 이 결합을 통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는 "다른 이들이 전쟁을 벌여라,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는 유명한 격언을 실현했다.

1816년 9월 24일, 프란츠 1세 황제는 페드루 데 알칸타라가 합스부르크 대공비를 아내로 맞이하기를 원한다고 발표했다.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공은 "이제 그녀가 아내가 될 차례"라며 마리아 레오폴디나가 결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마리알바 후작은 이 결혼 협상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조언을 받아 프랑스 미술사절단의 브라질 파견을 협상했던 인물이다. 주앙 6세 국왕은 브라간사 인판타 이사벨 마리아를 협상에 포함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마리알바 후작은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이 "스페인 식민지에서 진행되던 독립 전쟁의 불길에서 확실히 벗어났다"는 것이 입증되는 즉시 대륙으로 돌아갈 의지가 있다고 보장하며 오스트리아의 결혼 동의를 얻어냈다. 이 약속이 확보된 후, 1816년 11월 29일 빈에서 계약이 체결되었다.
두 척의 배가 준비되었고, 1817년 4월, 과학자, 화가, 정원사, 박제사 등 모든 보조 인력이 마리아 레오폴디나보다 먼저 리우데자네이루로 향했다. 그동안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미래의 거처가 될 곳의 역사와 지리를 공부하고 포르투갈어를 배웠다. 이 몇 주 동안 대공비는 그 어떤 합스부르크 공주도 만들어내지 못했던 독특한 문서인 안내서를 편찬하고 집필했다.
마리아 레오폴디나와 페드루 왕세자 간의 대리 결혼식은 1817년 5월 13일 빈의 빈 아우구스티너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신랑은 신부의 삼촌인 테셴 공작 카를 대공이 대리했다.
결혼식의 절정은 빈의 아우가르텐에서 6월 1일에 열린 마리알바 후작의 성대한 연회였다. 마리알바 후작은 포르투갈의 영광, 부, 환대를 드러낼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겨울 내내 준비했던 이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다. 결혼식 직전, 두 척의 오스트리아 프리깃함 '아우스트리아'와 '아우구스타'는 새로 설치될 오스트리아 대사관의 가구와 장식, 브라질 내륙 과학 탐사를 위한 장비, 그리고 수많은 오스트리아 상업 제품 전시물을 싣고 리우데자네이루로 출항했다.
이 결혼을 통해 주앙 6세 국왕은 새로운 동맹을 맺어 잉글랜드의 지나친 영향력을 견제할 기회를 보았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새로운 포르투갈-브라질 제국을 신성 동맹의 반동적, 절대주의적 이상과 완벽하게 부합하는 중요한 대서양 횡단 동맹으로 보았다. 이러한 방식으로 결혼은 순전히 정치적 행위였고, 감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3.1. 대서양 횡단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브라질행은 힘들고 오래 걸리는 여정이었다. 그녀는 1817년 6월 2일 빈을 떠나 피렌체로 향했고, 그곳에서 포르투갈 궁정의 추가 지시를 기다렸다. 당시 페르남부쿠 반란 이후 브라질의 군주제 권위는 여전히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1817년 8월 13일,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마침내 이탈리아 리보르노에서 포르투갈 함대에 승선할 허가를 받았다. 이 함대는 'D. 주앙 6세'와 '상 세바스티앙' 두 척의 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녀는 짐과 대규모 수행단과 함께 대서양을 횡단하는 86일간의 여정을 겪었다. 남자 키만큼 높이 쌓인 마흔 개의 상자에는 그녀의 혼수품, 책, 소장품, 그리고 미래의 가족을 위한 선물들이 담겨 있었다. 또한 궁녀들, 하녀, 집사, 여섯 명의 시녀, 네 명의 시종, 여섯 명의 헝가리 귀족, 여섯 명의 오스트리아 경호원, 여섯 명의 시종장, 한 명의 고해 신부, 한 명의 목사, 한 명의 개인 비서, 의사, 연주자, 광물학자, 그리고 그녀의 그림 선생을 포함한 인상적인 수행단이 동행했다. 8월 15일, 대공비는 브라질로 완전히 떠났다. 이미 승선 시기에 감지되었던 습관과 관습의 차이는 그녀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겪을 어려움을 예고했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 포르투갈 영토에 발을 디딘 곳은 브라질 땅이 아니라 9월 11일 마데이라섬이었다.
1817년 11월 5일,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하여 마침내 남편과 그의 가족을 만났다. 다음 날, 리우데자네이루 대성당의 왕실 예배당에서 성대한 도시 축제 속에 공식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도착 당시,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외모는 아름다운 대공비를 기대했던 포르투갈 왕실을 놀라게 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지만, 다소 과체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대에는 보기 드물게 뛰어난 교양을 지녔으며, 식물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녀의 도착은 장바티스트 드브레에게 첫 번째 위임을 안겨주었는데, 그는 12일 안에 도시를 장식해야 했다. 그는 카툼비 지역에 스튜디오를 운영했으며, 후에 자연주의자로서 마리아 레오폴디나를 위해 식물과 꽃 그림을 그렸다. 그는 "감사하게도 폐하가 부탁하신 몇몇 그림들을 그리는 일을 맡았다"고 말하며, "폐하의 언니이자 전 프랑스 황후의 이름으로 부탁하셨다"고 덧붙였다. 드브레는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법정의 화려한 녹색과 금색 예복, 새로운 국가의 장식들을 디자인했으며, 이전에 나폴레옹이 1806년 이탈리아 왕국을 위해 만들었던 왕관도 디자인했다。 드브레는 또한 남십자성 훈장의 휘장도 디자인했는데, 이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에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수년 후, 그는 페드루의 두 번째 아내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아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장미 훈장도 디자인했다.
처음에 포르투갈 왕세자는 새로운 아내에게 완벽하고 교양 있는 신사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매우 달랐다. 페드루는 마리아 레오폴디나보다 1살 어렸고, 중매인들이 묘사했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성격은 충동적이고 다혈질이었으며, 교육 수준은 보잘것없었다. 어린 부부 사이의 구두 의사소통조차 어려웠는데, 페드루는 프랑스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그의 포르투갈어는 상스럽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게다가 포르투갈 전통에 따라 18세의 페드루는 이미 수많은 연애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주로 경마와 연애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결혼 당시에는 프랑스 무용수 노에미 티에리와 동거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리아 레오폴디나가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 의해 궁정에서 쫓겨났다.
젊은 부부는 상크리스토방 궁전의 비교적 작은 6개 방에 거주하게 되었다. 안뜰과 마구간으로 가는 길은 포장되어 있지 않아 열대우림으로 인해 모든 것이 빠르게 진흙탕으로 변했다. 옷을 포함한 모든 곳에 곤충들이 들끓었고, 벨벳과 봉제사로 된 제복과 궁정 예복은 더위와 습기 속에 썩어 곰팡이가 피었다. 메테르니히 공은 빌헬름 루드비히 폰 에슈베게 남작이 빈의 파트너에게 보낸 편지를 가로챘는데, 거기에는 "왕세자는 천부적인 지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식 교육이 부족하다. 그는 말들 사이에서 자랐고, 공주는 조만간 그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게다가 리우 궁정은 유럽 궁정들에 비해 매우 지루하고 보잘것없다"고 쓰여 있었다.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도착과 함께 브라질로 첫 번째 이민 물결이 들어왔다. 스위스 정착민들은 궁정 근처에 정착하여 노바 프리부르구를 설립하고 훗날 황실 여름 별장이 될 페트로폴리스에 자리 잡았다. 1824년부터 게오르그 안톤 셰퍼 소령이 조직한 유럽 브라질 캠페인 덕분에 독일인들이 더 많이 도착하여 다시 노바 프리부르구와 산타카타리나주 및 히우그란지두술주의 온대 지역에 정착했으며, 그곳에는 새로운 왕세자비를 기리는 상 레오폴두 식민지가 세워졌다. 일부 포메라니아인들은 이스피리투산투주로 가서 1880년대까지 완벽하게 고립되어 포르투갈어조차 사용하지 않고 살았다.
3.2. 오스트리아 과학사절단

브라질은 다른 아메리카 국가들보다 훨씬 일찍 유럽의 일류 예술가와 과학자들에 의해 묘사되고 연구되는 특권을 누렸다. 17세기에도 네덜란드 브라질 점령 당시 요한 마우리츠 폰 나사우-지겐 공은 열대병을 연구하러 온 의사 빌렘 피소, 당시 20대 초반의 유명 화가 프란스 포스트, 역시 화가였던 알베르트 에카우트, 지도 제작자 코르넬리우스 골리아트, 천문학자 게오르그 마르그라프 등 상당한 수의 협력자들을 브라질로 데려왔다. 마르그라프는 피소와 함께 브라질 자연에 관한 최초의 과학 서적인 히스토리아 나투랄리스 브라질리아에(암스테르담, 1648)의 저자가 되었다. 나사우-지겐 공은 또한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의 정치적 사건들을 영원히 남기고자 카스파르 바를라에우스에게 브라질 통치 역사를 맡겼다.
네덜란드인이 추방된 후, 포르투갈은 영토 회복이 일련의 좋은 상황 덕분이었으며, 포르투갈령 아메리카 영토에 대한 새로운 침략이 발생할 경우 이러한 상황이 다시 반복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포르투갈은 자국의 해외 영토에 대한 모든 외국인의 접근을 금지하는 국가 정책을 채택했으며, 심지어 아메리카 땅에 대한 어떠한 소식이나 언급도 출판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국가 정책은 17세기 중반부터 왕실이 브라질에 도착하고, 섭정 왕자 주앙이 1808년 살바도르에 머무는 동안 서명한 첫 번째 법령인 '우방국 항구 개방 법령'으로 상징되는 브라질의 세계 개방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효과적으로 지켜졌다.
항구 개방과 브라질 땅에 외국인 상륙 금지령의 폐지는 유럽 자연주의자들에게 어려운 시기와 맞물렸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유럽 내 이동이 크게 방해받았으며, 지구의 이 거대한 부분에 대한 지식 부족이 유럽에서 엄청난 과학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세계적 배경과 병행하여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어린 시절부터 (약 14세경부터) 자연과학, 특히 지질학과 식물학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녀의 스승들과 아버지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에게도 주목받았다. 그들은 어린 대공비의 이러한 관심사에 놀랐지만 (자연스러운 경향이라면 오빠들 중 한 명에게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린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학업을 방해하지 않았다.
따라서 1817년, 마리아 레오폴디나와 페드루의 결혼 소식이 임박하자마자 오스트리아 궁정의 후원 아래 (하지만 바이에른 과학자들도 포함된) 당시 과학계에 미지의 영역이었던 브라질 땅으로의 주요 과학 탐험이 조직되었다. 1815년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는 이미 남아메리카를 통한 대규모 과학 탐험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여러 차질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다. 그래서 1817년 마리아 레오폴디나가 페드루와의 결혼을 위해 브라질로 떠날 때, 바이에른 군주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두 명의 신민을 보냈다: 의사이자 식물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필리프 폰 마르티우스와 동물학자 요한 바프티스트 폰 스픽스가 대공비의 수행단과 함께했다.
이들 외에도 빈 자연사 박물관의 관장인 카를 폰 슈라이버스는 메테르니히 공의 지시에 따라 대공비의 수행단에 저명한 과학자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준비시켰다。 이 과학자들 중에는 식물학자이자 곤충학자 요한 크리스티안 미칸, 의사이자 광물학자, 식물학자 요한 에마누엘 폴, 식물 화가 요한 부흐베르거, 동물학자 요한 나테러, 화가 토마스 엔더, 정원사 하인리히 빌헬름 쇼트, 그리고 이탈리아의 자연주의자 주세페 라디가 있었다. 이 그룹은 빈에 설립될 박물관을 위해 표본을 수집하고 인물과 풍경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가장 큰 관심사는 식물, 동물, 그리고 원주민을 연구함으로써 신세계를 탐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매력은 독일 지리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아메 봉플랑이 저술한 Le voyage aux régions equinoxiales du Nouveau Continent, fait en 1799-1804("1799-1804년에 이루어진 신대륙 적도 지역으로의 여행")의 첫 권이 출판되면서 비롯되었다. 훔볼트는 요한 모리츠 루게다스와 같은 여러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훔볼트 학파 예술가들의 연구의 특징은 그들이 본 모든 것을 백과사전 방식으로, 즉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과학에 대한 잘 알려진 관심은 1818년 그녀가 시아버지를 설득하여 왕립 박물관(현재의 브라질 국립박물관)을 설립하도록 영향을 미쳤을 때 주목받았다. 브라질에 도착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브라질 최초의 자연사 박물관도 설립되어 과학자들이 브라질을 탐험하도록 장려했다. 1824년 9월, 영국인 여행작가이자 출판가인 마리아 그레이엄이 보아 비스타에 도착하여 페드루와 마리아 레오폴디나로부터 우호적인 환영을 받았고, 당시 교육이 소홀히 되고 있던 장녀 마리아 다 글로리아의 양육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았다. 곧 마리아 레오폴디나와 딸의 가정교사는 다정한 친구 관계로 발전했으며, 특히 둘 다 과학에 대한 공통된 관심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6주 만에 마리아 그레이엄은 페드루에 의해 해고되었지만,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실망에도 불구하고 두 여성의 공통된 관심사는 마리아 레오폴디나가 사망할 때까지 서로 가깝게 지낼 수 있게 했다. 그들은 남성 중심의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얻을 수 없었던 정보를 얻고자 했다.
4. 브라질 독립 운동에서의 역할
4.1. 독립의 배경
1821년은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삶에서 결정적인 해였다.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오래 지속된 가문(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 출신인 그녀는 당시 절대 군주제의 틀에 기반한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1821년 6월, 겁에 질린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아버지에게 "내 남편은, 하느님 맙소사, 새로운 사상을 사랑한다"고 쓰면서, 새로운 입헌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정치적 가치에 대해 의심을 표했다. 그녀는 몇 년 전 유럽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체계적으로 대륙의 정치 권력을 바꾸는 사건들을 직접 목격했으며, 이는 그녀가 이러한 새로운 정치 개념을 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그녀가 훈련받았던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교육 또한 이 측면에 더해진다.

이전에 애정과 인정이 부족했던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빠르게 환상 없는 삶을 직시하는 성숙한 여성으로 변모했다. 포르투갈과 브라질 간의 마찰이 전개되면서 그녀는 브라질 독립에 앞선 정치적 격동에 점점 더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브라질 정치에 대한 그녀의 참여는 나중에 조제 보니파시우 데 안드라다와 함께 독립에 근본적인 역할을 하도록 이끌었다. 이 단계에서 그녀는 빈 궁정의 보수적인 (절대주의적) 사상에서 벗어나 브라질 대의를 지지하는 더욱 자유주의적인 (입헌주의적) 담론을 채택했다.
1820년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자유주의 혁명의 결과로, 1821년 4월 25일 왕실은 포르투갈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1척의 배로 구성된 함대가 주앙 6세 국왕, 궁정, 왕실 가족, 그리고 왕실 재정을 대륙으로 다시 데려갔고, 페드루 왕세자만이 브라질에 남아 섭정으로서 나라를 다스렸으며, 섭정 위원회의 견제를 받는 광범위한 권한을 가졌다. 처음에는 새로운 섭정이 혼란을 통제할 수 없었다. 상황은 무정부 상태의 포르투갈 군대가 지배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인과 브라질인 간의 대립은 점점 더 명확해졌다.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서신에서 그녀가 브라질 국민의 대의를 따뜻하게 지지하며 국가의 독립을 열망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4.2. 상크리스토방의 공모자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프랑스 혁명 중 단두대에서 처형된 외종조모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례 때문에 민중 혁명을 두려워하며 자랐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와 최근 1820년 포르투갈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민중 반란으로 군주의 권력을 약화시킬 혁명에 대한 두려움은 브라질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자율 운동과 그 뒤를 이은 독립 운동이 페드루와 레오폴디나를 주역으로 삼으면서, 브라질인들은 그들을 권력을 포기시키기 위해 물리쳐야 할 폭군이 아니라 처음으로 동맹자로 보았다."
절대 군주제에 대한 충절을 유지하도록 준비되었던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포르투갈과의 단절에 앞선 혼란스러운 시기에 섭정 역할을 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또한 그녀가 받은 교육에 명백히 반하여 페드루보다 먼저 브라질 독립을 옹호하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대공비는 항상 브라질 대의의 편에 섰고, 유럽의 친구들에게 보낸 여러 편지에서 포르투갈인과 브라질인을 구별하기 시작하며 식민지에 대한 포르투갈의 지배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분명히 했다. 궁정이 포르투갈로 돌아가고 페드루가 브라질의 왕세자 섭정으로 임명되면서(1821년 4월 25일),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아메리카에 머무는 것이 브라질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와 브라간사 왕가의 권력을 위협하는 자유주의적 과도함에 대한 왕조적 정통성을 방어하는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페드루는 정치 경험이 전혀 없고 현재의 불안정한 상황에 압도되어, 섭정직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가족과 함께 포르투갈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요청했다. 1821년 9월, 주앙 6세 국왕이 떠난 지 6개월 후 그는 "이 막중한 임무에서 저를 해방시켜 주시기를 폐하께 간곡히 청합니다"라고 썼다.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브라질 잔류 결정은 조제 보니파시우 데 안드라다의 지지 덕분에 더욱 확고해졌다. 그의 도움으로 그녀는 브라질의 영토 보전은 두 사람 모두 그곳에 남아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남편에게 단호하게 설득했다. 마침내 1822년 1월 9일, 페드루는 엄숙히 선언했다: "Fico!" (나는 머물 것이다!). 24세의 나이에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아메리카에 무기한 머물게 되고 남은 평생 동안 아버지, 형제자매, 그리고 다른 가족들과 떨어져 살게 되는 정치적 결정을 내렸다. 언니 마리 루이즈가 결혼을 통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제국 간의 정치적 관계를 더 가깝게 만들 의도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결혼했듯이,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언니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사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틀 후, 왕세자 섭정이 브라질에 남기로 한 결정은 코르테스(브라질 국민의 선출된 의회 대표들로, 왕실 가족 전체가 나라를 떠나고 브라질은 독립된 여러 지역으로 분할되기를 원했다) 사이에 격노를 불러일으켰다. 관청과 건물들이 불에 탔고 혁명이 일어났다. 페드루와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그 순간 극장에 있었다. 그가 군대를 이끌고 코르테스에 맞서는 동안,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진정하십시오, 제 남편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습니다!"라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환호와 함께 받아들여졌고, 그녀는 브라질 국민의 편에 확고히 섰다.
그러나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보아 비스타로 돌아갔다. 당시 임신 7개월이었던 그녀는 세 살 된 마리아 다 글로리아와 생후 11개월 된 주앙 카를루스 두 아이를 마차에 태우고 위험한 12시간의 여정 끝에 산타크루스로 도피했다. 정치적 상황은 곧 진정되었고,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보아 비스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 주앙 카를루스 왕자는 이 시련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1822년 2월 4일 사망했다.
1821년 말, 마리아 레오폴디나가 비서 셰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가 당시 페드루보다 브라질과 브라질인들을 위해 더 결단력 있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즉, 브라질에 머물며 포르투갈 궁정의 요구에 맞서야 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피쿠의 날'은 남편보다 빨랐다.
1822년 8월 6일 페드루가 서명한 우방국 선언문에서는 리스본 궁정의 브라질 문제에 대한 전제정치를 비난하고, 브라질의 우방국들이 더 이상 포르투갈 정부가 아닌 리우데자네이루와 직접 문제를 다룰 것을 촉구하며 브라질인의 관점에서 그 원인과 사건들을 설명했다. 그러나 같은 문서에서 독립 선언 전야에도 섭정 왕자는 포르투갈과 브라질 간의 유대를 해소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두 나라 간의 유대를 지킬 것을 약속하지도 않았다. 한 달 후 나라가 독립할 것이므로 이는 비효율적인 중립 조치였다. 여성이 정치 환경에서 잘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구체적인 조언과 남편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행동함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 있었다. 페드루는 처음에는 브라질 독립 사상과의 접촉을 피하고 중립을 유지하려 했으며, 궁정에 불복종할 경우 포르투갈 왕위 계승권을 잃을 가능성을 피하려 했다.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궁정이 지배하는 포르투갈은 이미 잃어버린 곳이며, 브라질은 아직 백지 상태와 같아서 구 대도시보다 훨씬 더 중요한 미래의 강국이 될 수 있다고 깨달았다. 궁정 명령이 시행될 경우, 브라질은 남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처럼 수십 개의 공화국으로 산산조각 날 것이었다. 에제키엘 라미레즈에 따르면, 남부 지방에서 독립 국가로서의 새로운 브라질 연합의 징후가 보였지만, 북부는 리스본 궁정을 지지하고 지역 독립을 요구했다. 만약 왕세자 섭정이 그 순간 나라를 떠났다면, 리스본 궁정이 식민지를 잃게 만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각 지방과 직접 접촉하려 했기 때문에 브라질은 포르투갈에 의해 상실되었을 것이다.
브라질의 이익을 옹호하는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태도는 브라질 독립 당시 페드루에게 보낸 편지에 유창하게 담겨 있다.
"가능한 한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당신의 즉각적인 존재를 그 어느 때보다 바라는 것은 사랑 때문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브라질이 처한 상황 때문임을 확신하십시오. 오직 당신의 존재, 많은 에너지와 엄격함만이 브라질을 파멸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수천 명의 서명이 섭정들이 브라질에 머물 것을 요구했다. "조제 보니파시우 데 안드라다의 포르투갈 오만에 대한 용감한 태도는 남부 지방, 특히 상파울루에 존재했던 통합 열망을 크게 고취시켰다. 고학력자들이 이 운동을 이끌었다." '피쿠의 날' 이후, 조제 보니파시우의 지도 아래 "엄격히 군주제적인" 새로운 내각이 조직되었고, 왕세자 섭정은 곧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 1822년 2월 15일, 포르투갈 군대가 리우데자네이루를 떠났고, 그들의 출발은 브라질과 본국 간의 유대 해체를 의미했다. 페드루는 미나스제라이스에서 승리자의 환영을 받았다.
4.3. 섭정

1822년 8월, 남편이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상파울루로 떠났을 때 (이는 9월 브라질 독립 선언으로 이어졌다),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그의 공식 대표, 즉 부재 시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녀의 지위는 1822년 8월 13일자 투자 문서로 확인되었는데, 이 문서에서 페드루는 그녀를 국무회의 의장이자 브라질 왕국의 임시 섭정 공주로 임명하여, 부재 시 필요한 모든 정치적 결정을 내릴 완전한 권한을 부여했다. 독립 과정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브라질인들은 포르투갈이 페드루를 다시 부르고 브라질을 포르투갈과 통합된 왕국이 아닌 단순한 식민지로 다시 강등시키려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상파울루주가 브라질의 나머지 지역과 분리될 것이라는 내전의 두려움도 있었다.
섭정 공주는 리스본의 새로운 요구 사항이 담긴 칙령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받았다. 페드루의 귀환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던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조제 보니파시우 데 안드라다의 조언을 받아 임시 정부 수장으로서의 권한을 사용하여 1822년 9월 2일 아침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독립 법령에 서명하며 브라질이 포르투갈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선언했다.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페드루에게 조제 보니파시우의 다른 편지와 함께 포르투갈이 남편과 주앙 6세 국왕의 행동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서 섭정 공주는 "과일은 익었으니 지금 따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썩을 것입니다" (O pomo está maduro, colha-o já, senão apodrece)라는 경고와 함께 남편에게 브라질 독립을 선포할 것을 제안했다.
페드루는 1822년 9월 7일 상파울루에서 아내의 편지를 받은 후 브라질 독립을 선언했다.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또한 리스본으로부터 받은 문서와 의회 의원 안토니우 카를루스 히베이루 데 안드라다의 논평을 보냈는데, 이를 통해 섭정 왕자는 본국에서 자신에 대한 비판을 알게 되었다. 궁정이 지배하는 주앙 6세와 그의 모든 각료의 입장은 어려웠다.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는 동안, 이미 독립 국가의 임시 통치자였던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브라질 국기를 구상했으며, 이 국기에 브라간사 왕가의 녹색과 합스부르크 왕가/로트링겐 왕가의 황금색을 혼합했다. 다른 저자들은 1820년대 브라질을 묘사했던 프랑스 화가 장바티스트 드브레가 구 체제의 억압 상징인 옛 포르투갈 궁전의 국기를 대체할 새로운 국가 국기를 고안했다고 말한다. 드브레는 조제 보니파시우 데 안드라다와 협력하여 아름다운 제국 국기를 디자인했는데, 이 국기에서 브라간사 왕가를 상징하는 녹색 직사각형은 숲을 나타내고,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의 색상인 노란색 마름모는 금을 나타냈다. 그 후,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새로 독립한 국가의 유럽 궁정들로부터의 자치권 인정을 위해 아버지 오스트리아 황제와 시아버지 포르투갈 국왕에게 편지를 쓰는 등 외교에 깊이 관여했다.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1822년 12월 1일, 남편 페드루 1세가 브라질의 입헌 황제이자 영구 수호자로 대관식을 치르고 즉위하면서 브라질의 첫 번째 황후 배우자로 추대되었다. 브라질이 당시 남아메리카에서 유일한 군주국이었기 때문에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신세계의 첫 번째 황후가 되었다。
4.4. 바이아의 독립 과정 참여
정부의 첫 번째 본부이자 대도시 정책의 중심지, 그리고 전략적인 항구였던 바이아주는 이스피리투산투주 세습 총독부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특권을 잃었다. 반데이란치들이 광맥을 발견한 지역은 해당 총독부에서 분할되어 미나스제라이스주로 바뀌었으며 (새로운 광맥이 발견될 때마다 이러한 분할이 반복되어 이스피리투산투 총독부는 금 밀수를 막기 위한 불운한 방어벽이 되어 미나스제라이스주에 의해 좁아졌다), 이후 1776년 수도가 리우데자네이루로 이전되었다. 사우바도르는 1808년처럼 일시적인 궁정의 방문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정착을 원했다. 포르투갈과의 분리 과정에서 바이아는 독립을 지지하는 내륙과 리스본 궁정에 충성하는 수도라는 상반된 흐름을 보였다. 1822년 9월 7일 이후 무력 투쟁이 벌어졌고, 1823년 7월 2일 제국 군대가 승리했다.
바이아 여성들은 애국적인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브라질 대의에 충성하는 병사로 비밀리에 입대했던 마리아 키테리아는 마리아 그레이엄에 의해 묘사되었고, 페드루 1세 황제로부터 남십자성 훈장을 받았다. 이타파리카섬의 구전 전통에는 40명 이상의 흑인 여성을 이끌고 섬을 방어한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마리아 펠리파 데 올리베이라의 역할도 기록되어 있다. 수녀 조아나 안젤리카는 라파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의 원장으로, 포르투갈 군대의 수도원 침입을 자신의 생명으로 막아냈다.
여성들의 정치적 의식은 "바이아 여인들이 폐하 레오폴디나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강조되는데, 이 편지는 남편과 국가를 위한 애국적인 결의에 참여한 섭정 공주를 축하하는 내용이다. 1822년 8월 직접 전달된 186명의 바이아 여인들의 편지에는 마리아 레오폴디나가 브라질에 머물러 준 것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었다. 섭정 공주는 남편에게 여성의 정치 참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며, 그 여인들의 태도가 "여성들이 더 명랑하고 좋은 대의에 더 충실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비록 바이아가 다시 정부를 유치하지는 못했지만, 브라질 제국을 지지하는 지역 정치 균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립 과정에서 얻은 지지를 인정하여 황제와 황후는 1826년 2월부터 3월 사이에 살바도르를 방문했다.
5. 브라질 황후 및 포르투갈 왕비


포르투갈의 주앙 6세 국왕이 1826년 3월 10일 사망하자, 페드루는 포르투갈 왕위를 페드루 4세로서 계승하는 동시에 브라질의 페드루 1세 황제로 남았다. 이에 따라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브라질의 황후와 포르투갈의 왕비를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브라질과 포르투갈의 재통합이 양국 국민에게 용납될 수 없음을 인지한 페드루는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5월 2일, 포르투갈 왕위를 장녀 마리아 다 글로리아에게 양위하여 그녀가 마리아 2세 여왕이 되게 했다.
황제의 산투스 후작부인 도미틸라 데 카스트루와의 추문적인 관계, 사생아의 공개적인 인정, 정부를 황후의 시녀로 임명한 것, 그리고 1826년 초 황실 부부가 산투스 후작부인과 함께 바이아주로 여행을 간 사건들은 마리아 레오폴디나를 완전히 굴욕스럽게 만들며 그녀의 도덕적, 심리적 상태를 뒤흔들었다. 황제가 1824년 5월에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황후도 불과 3개월 후에 출산했다)은 그에 의해 공식적으로 합법화되었고, 고이아스 공작부인 이사벨 마리아 데 알칸타라라는 이름과 함께 '존칭'과 '도나'라는 호칭을 사용할 권리가 부여되었다. 언니 마리 루이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황후는 "그 유혹적인 괴물이 내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라고 말했다. 고독하고 고립된 채, 오직 왕위 계승자(미래의 페드루 2세 황제)를 낳는 데만 전념하던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점점 더 우울해졌다. 1826년 11월 초부터 황후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경련, 구토, 출혈, 섬망이 생애 마지막 몇 주 동안 빈번하게 나타났고, 새로운 임신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6. 건강 악화 및 죽음
6.1. 대중의 동요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모든 브라질 국민에게 사랑받았으며, 그녀의 인기는 페드루 1세보다 훨씬 더 높고 강렬했다. 리우데자네이루 시민들은 황후의 병세 악화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프로이센 왕국의 대사 테레밈은 베를린 궁정에 황후에 대한 대중의 사랑 표현을 존경심을 담아 보고했다.
"사람들 사이의 혼란은 형언할 수 없었다. 이처럼 만장일치적인 감정은 전례가 없었다. 사람들은 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전능하신 신께 황후의 보전을 간청했으며, 교회는 텅 비는 일이 없었고 가정 예배당에서도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남자들은 행렬을 이루었는데, 보통 웃음을 유발하는 습관적인 행렬이 아니라 진정한 헌신의 행렬이었다. 한마디로, 이런 예상치 못한 애정, 꾸밈없이 드러난 애정은 병든 황후에게 진정한 만족감이었을 것이다."
1826년 12월 7일, 디아리오 플루미넨세지는 리우데자네이루 시민들이 황후의 "고통스러운 상태"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애타게 찾아다녔다고 보도했다.
"게시물에 관해서는, 이미 황궁에 직접 찾아가 크고 작은 사람, 국민, 외국인, 부자, 가난한 사람 모두가 눈물을 흘리고 얼굴은 침울하며 마음은 괴롭고 불안한 채로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황후는 어떠신가요?"
전날 오후(12월 6일), 같은 신문(그리고 나중에 삼파이오 신부의 설교로 확인됨)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각 교회의 성스러운 형상"을 동반한 여러 행렬이 리우데자네이루 대성당을 향했다. 삼파이오 신부에 따르면:
"상크리스토방 입구에는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인 적이 없었다. 마차들은 엉망이 되었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달려갔다. 그러나 시내 중심가에서는 기도 행렬이 이미지들과 함께, 그리고 모든 성직자들(정규직이든 세속직이든)의 동반을 받으며 돌고 있었다. 사람들은 평소 사원에서 떠난 적이 없는 노사 세뇨라 다 글로리아의 이미지를 비가 많이 오는 와중에도 황후를 방문하는 것처럼 공공연한 경건의 표시 없이는 볼 수 없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그녀의 제단 아래 나타났던 황후를 방문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마디로, 가장 헌신적인 성인들을 황실 예배당으로 데려가지 않은 형제회는 없었다."
6.2. 죽음의 원인
브라질 초대 황후의 실제 사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일부 저자들은 마리아 레오폴디나가 치스플라티나 전쟁 중 군대를 사찰하기 위해 남편이 히우그란지두술주에 머물고 있을 때 산욕 패혈증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마리아 레오폴디나가 남편의 분노 발작 중에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는 설은 가브리악, 카를 자이들러, 존 아미티지, 이사벨 루스토사와 같은 역사가들이 지지하는 널리 퍼진 이론이다. 실제 폭력이 사인이라는 인식은 최근 황후의 유해 발굴 결과 골절이 발견되지 않으면서 다소 후퇴했지만, 치명적인 폭행이 반드시 뼈에 골절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건은 1826년 11월 20일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황제가 우루과이와의 전쟁을 처리하기 위해 남부로 여행할 수 있도록 섭정직을 맡으려 했다. 남편은 자신의 혼외 관계와 황실 부부 간의 불화에 대한 소문이 거짓임을 증명하기 위해, 황후와 정부인 산투스 후작부인이 성직자 및 외교 사절들 앞에서 함께 나타나 의례적인 악수례를 치를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가 충족되면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남편의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므로, 그녀는 페드루 1세의 명령에 불복하고 연회에 나타나기를 거부했다.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알려진 황제는 아내와 심한 말다툼을 벌였고, 심지어 그녀를 궁전 안에서 끌고 다니며 말과 발길질로 공격하려 했다. 결국 그는 산투스 후작부인과 함께 악수례에 참석한 후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 채 전쟁터로 떠났다. 그 외에는 세 사람 외에 폭행의 목격자가 없으며, 폭행에 대한 의혹은 마리아 레오폴디나를 지지했던 시녀들과 의사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사실의 진실은 아마 달랐을 것이다.
"페드루가 그녀를 발로 찼고 이것이 그녀의 병의 원인이었다는 것은 과장되었다. 오스트리아 사절 [오스트리아 대사 필리프 레오폴트 벤첼 폰 마레샬 남작을 지칭]이 목격한 장면은 거친 말다툼이었다.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임신 중의 장애에 대한 이유가 부족했고, 그로 인해 그녀는 죽음에 이르렀다."
수개월 동안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임신 12주차였던 황후의 건강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그녀는 아기아르 후작부인에게 구술한 마지막 편지를 언니 마리 루이즈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에서 그녀는 남편의 정부 앞에서 남편에게 당한 끔찍한 공격을 언급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이 마지막 편지는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원본인 프랑스어 편지는 브라질이나 해외의 어떤 문서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페트로폴리스의 브라질 제국 박물관의 역사 기록 보관소에 있는 사본은 포르투갈어로 작성되었으며, 프랑스어로 된 한 문장이 1826년 12월 12일에 발행된 원본에 따라 전사되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현재까지 모든 학자들이 사용했던 이 사본은 1834년 8월 5일 (황후 사망 후 거의 8년 후)에야 리우데자네이루에 나타나 공증인 조아킴 조제 데 카스트루에게 등록되었다. 세자르 카돌리노, J. M. 플라흐, J. 부벨로트, 카를로스 하인드릭스가 편지의 출처를 증명하는 증인으로 나섰다. 이들 중 카돌리노와 플라흐 두 명은 마리아 레오폴디나에게 크게 빚을 지고 있었으며, 그들에게는 황후 자신이 "고백"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6.3. 반응
마리아 레오폴디나가 고통받는 동안, 황후가 킨타 다 보아 비스타에 감금되어 있었다거나, 산투스 후작부인의 지시에 따라 의사에게 독살당하고 있었다는 등의 온갖 소문이 퍼졌다. 이미 좋지 않던 도미틸라 데 카스트루의 인기는 더욱 악화되어, 그녀의 상크리스토방 집은 돌에 맞았고, 황후의 집사였던 그녀의 시동생은 두 발의 총상을 입었다. 후작부인이 황후의 시녀로서 진료를 주재할 권리는 거부되었고, 장관들과 궁정 관리들은 그녀가 더 이상 궁정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고 제안했다.
12월 11일 황제에게 발행된 아내의 사망 보고서는 발작, 고열, 섬망을 기록했다. 남편보다 훨씬 더 많은 국민의 존경을 받았던 그녀는,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국민에게 애도되었다.
이러한 사건의 이야기는 유럽으로 퍼져 나갔고, 페드루 1세의 명성은 심하게 손상되어 그의 두 번째 결혼은 매우 어려워졌다. 페드루 1세 훈장의 첫 수훈자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가 자신의 사위인 브라질 황제로부터 사과의 의미로 훈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2012년 3월부터 8월까지 황실 가족의 법의학 분석에 참여한 검시관 루이스 호베르투 폰테스는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유산과 사망은 심각한 질병 때문이었지, 리우데자네이루의 킨타 다 보아 비스타에서 황실 부부 간의 싸움 때문이 아니었다고 무시알(아돌푸 루츠 연구소 박물관) 강연에서 대중에게 밝혔다.
"우리가 오늘 말할 수 있는 것은 황후가 무엇 때문에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페드루 1세의 불륜 때문에 싸움이 있었더라도, 그것은 레오폴디나의 죽음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녀는 심각한 감염을 앓고 있었지만, 아직 그 질병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사망 원인을 찾기 위해 더 많은 분석이 필요하다. 단층촬영 결과 대퇴골이나 다른 뼈에 골절이 없었으며, 계단에서 떨어지거나 (페드루가 유발한) 사고라는 전설을 일축한다. 검사 결과, 그녀가 3주 동안 앓았던 심각한 감염이 원인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첫 유산 위협은 11월 19일 황후가 소량의 출혈을 보였을 때 발생했다. 일주일 동안 상태가 악화되면서 그녀는 또한 발열과 심한 설사를 앓았는데, 이는 임산부에게 위험한 장 출혈을 나타낸다. 11월 30일부터 섬망이 추가되었고, 의무 기록에 따르면 황후는 사망 며칠 전인 12월 2일에 약 3개월 된 남자 태아를 유산했다. 아기를 잃은 후에도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건강은 호전되지 않고 점점 더 섬망, 발열, 출혈이 심해졌다. 검시관은 "즉, 그녀는 명백한 패혈증, 죽음의 상태에 있었다"고 말했다.
6.4. 죽음과 기억의 보존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1826년 12월 11일, 30세 생일을 5주 앞두고 리우데자네이루 북부 상크리스토방 지역에 위치한 킨타 다 보아 비스타의 상크리스토방 궁전에서 사망했다. 장례식은 브라질 제국의 공식 설교사 프란시스쿠 두 몬치 알베르니가 주관했다.
그녀의 시신은 제국 망토로 덮여 세 개의 유골함에 안치되었다. 첫 번째는 포르투갈 소나무로, 두 번째는 납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위에 해골과 두 개의 교차된 경골이 새겨진 라틴어 비문이 있었고, 그 위에는 제국 문장이 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세 번째는 삼나무로 만들어졌다.

그녀는 1826년 12월 14일 아주다 수도원 교회(현재 시넬란지아)에 묻혔다. 1911년 수도원이 철거되면서 그녀의 유해는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산투 안토니우 수도원으로 옮겨졌고, 그곳에 그녀와 일부 황실 가족을 위한 영묘가 건설되었다. 1954년, 그녀의 유해는 상파울루 시의 이피랑가 기념비 아래 황실 묘실과 예배당에 있는 녹색 화강암 석관에 영구적으로 안치되었다.
7. 유산 및 영향력
비록 그녀가 페드루 1세의 추문과 혼외 관계에 의해 굴욕당한 우울한 여성으로 (삼각관계의 약한 고리로 묘사되며) 그려지기도 하지만, 최근의 역사 서술은 마리아 레오폴디나에게 국가 역사에서 덜 수동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다.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브라질 정치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포르투갈 궁정이 포르투갈로 돌아갔을 때나, 1822년 독립 순간까지 브라질과 포르투갈 간의 마찰의 배후에서였다. 페드루 1세가 여전히 포르투갈과의 연합 왕국 유지를 고려할 때,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이미 본국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 가장 현명한 길임을 깨달았다.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지적, 정치적 교육은 국가를 위한 강한 의무감과 희생 정신과 결합하여 브라질에 매우 중요했다. 특히 주앙 6세 국왕이 포르투갈의 압력으로 리스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후 더욱 그러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대공비이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의 일원으로서 귀족적이고 절대주의적인 체제 아래서 교육받았지만, 자유주의와 입헌주의의 영향을 받아 브라질을 위한 이상과 더욱 대표적인 형태의 정부를 옹호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브라질 국민들은 마리아 레오폴디나가 브라질 땅에 발을 디딘 첫 순간부터 그녀에게 큰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가난한 이들과 노예들 사이에서 더욱 강렬했던) 매우 인기 있던 그녀는 사망한 순간부터 "브라질인의 어머니"로 불리기 시작했다. 황후에게 "이 신생 제국의 수호천사"라는 칭호를 부여해야 한다는 청원도 있었다. 그녀가 생애 마지막 날들에 병을 앓는 동안, 리우데자네이루 거리에서는 행렬이 이어졌고, 교회와 예배당은 깊은 슬픔에 잠긴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녀의 사망 소식은 도시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노예들이 "우리 어머니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될까? 누가 흑인 편에 설까?"라며 울부짖었다는 보고도 있다. 그녀의 죽음과 더불어 페드루 1세의 인기와 초대 통치기의 문제들은 크게 감소했다. 그녀의 전기 작가 카를로스 H. 오버라커 주니어는 "그녀처럼 국민들에게 그렇게 사랑받고 인정받은 외국인은 드물다"고 말한다.
생전에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노예제도를 종식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브라질의 노동 방식을 바꾸려는 시도로, 황후는 유럽인의 브라질 이민을 장려했다.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브라질 도착은 독일인들의 브라질 이민의 시작을 촉진했는데, 처음에는 스위스인들이 리우데자네이루에 정착하여 노바 프리부르구 시를 설립했다。 그리고 남부 브라질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황후는 독일인들의 이민을 장려했다. 남아메리카에서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존재는 독일계 환경에서 브라질을 "선전"하는 방법으로 주목받았다.
브라질 땅에서 황후의 중요성과 관련성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그녀의 여정을 동반했던 유럽 화가, 과학자, 식물학자로 구성된 과학 사절단 때문이기도 하다. 마리아 레오폴디나가 식물학과 지질학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식물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필리프 폰 마르티우스와 동물학자 요한 바프티스트 폰 스픽스라는 19세기의 저명한 자연과학자 두 명과 여행 화가 토마스 엔더가 그녀와 함께 왔다. 이 사절단의 연구는 Viagem pelo Brasil과 Flora Brasiliensis라는 저작으로 이어졌는데, 이 책은 약 2만 페이지에 달하는 수천 종의 자생 식물 분류 및 삽화를 담은 개요서이다. 과학자들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페루와 콜롬비아 국경까지 추가로 1.00 만 km를 여행했다.
포르투갈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입장은 여전히 의견이 나뉘는데, 일부 작가들에게는 혁명적인 태도였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대공비가 단지 전략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귀족 여성 교육 전문가이자 UERJ 교수인 마리아 셀리 샤베스 바스콘셀로스는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어떤 글이나 그녀에 대한 글에서도 반란의 흔적은 전혀 없다고 말한다. "그녀가 독립 선언에서 페드루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혁명적인 인물일까? 저는 거기에 어떤 혁명적인 특성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녀는 당시 상황과 독립에 얼마나 유리한지 올바르게 판단할 만큼 정치 역사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연구자는 주장한다. 이에 대해 역사가 파울루 헤주치는 "마리아 레오폴디나가 브라질에 머물게 된 이유가 무엇이든, 황후는 브라질 의사 결정의 최고위층에서 정치를 한 첫 여성으로서 혁명적인 여성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8. 대중 문화 속 묘사
마리아 레오폴디나 황후는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여러 차례 등장인물로 묘사되었다. 1972년 영화 Independência ou Morte에서는 케이트 한센이, 1984년 미니시리즈 Marquesa de Santos에서는 마리아 파딜랴가, 2002년 미니시리즈 O Quinto dos Infernos에서는 에리카 에반티니가 그녀를 연기했다.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삶은 1996년 임페라트리스 레오폴지넨세 삼바 학교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이 학교의 이름은 간접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딴 레오폴디나 철도에서 유래했다. 당시 카니발 디자이너이자 교수였던 로자 마갈량이스는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퍼레이드 지원을 받았다.
2007년, 배우 에스테르 엘리아스는 미게우 팔라벨라의 뮤지컬 Império에서 마리아 레오폴디나 역을 맡아 브라질 제국 역사의 일부를 다루었다.
2017년, 배우 레티시아 콜린은 텔레노벨라 노부 문두에서 마리아 레오폴디나 황후 역을 연기했다.
2018년, 마리아 레오폴디나와 임페라트리스 레오폴지넨세는 상파울루 카니발에서 토메 마이오르 삼바 학교에 의해 기려졌다.
9. 작위 및 영예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생전에 다음과 같은 국내외 작위와 훈장을 받았다.
-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베스 연합 왕국:
- 성 이사벨 훈장 대수녀원장
- 빌라 비소사 무염시태 훈장 대십자장
- 브라질 제국:
- 페드루 1세 훈장 대십자장
- 남십자성 훈장 대십자장
- 오스트리아 제국: 성성 십자 훈장 기사
- 스페인 왕국: 마리아 루이사 왕비 훈장 기사
- 바이에른 왕국: 성 엘리자베스 훈장 기사
10. 자녀

1818년 6월,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임신했고, 1819년 4월 4일 난산 끝에 첫째 자녀인 마리아 다 글로리아를 낳았다. 다음 임신은 1819년 11월 유산으로 끝났고, 1820년 4월 26일에는 두 번째 유산을 겪었다. 이때의 아이는 아들이었으며, 숙부 미겔을 기리기 위해 미겔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거의 즉시 사망했다. 이러한 실패한 임신은 마리아 레오폴디나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브라간사 왕가의 후계자를 낳아야 하는 자신의 주요 의무를 의식했던 그녀는 우울증에 빠져 한동안 사회생활을 중단했다. 그녀의 첫 살아있는 아들 베이라 공 주앙 카를루스는 1821년 3월 6일 궁정과 국민의 기쁨 속에 태어났지만, 11개월 만인 1822년 2월 4일 사망했다. 그녀의 다음 세 번의 임신은 세 명의 딸, 즉 자누아리아(1822년 3월 11일 출생), 파울라(1823년 2월 17일 출생), 프란시스카(1824년 8월 2일 출생)로 이어졌고, 마침내 1825년 12월 2일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들이자 후계자, 미래의 페드루 2세 황제가 태어났다. 그녀의 아홉 번째이자 마지막 임신은 그녀에게 치명적이었는데, 유산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이름 | 초상화 | 생존 기간 | 비고 |
---|---|---|---|
마리아 2세 | ![]() | 1819년 4월 4일 - | 1826년부터 1853년까지 포르투갈의 여왕. 마리아 2세의 첫 남편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아우구스테는 결혼 몇 달 후 사망했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페르디난드 왕자로, 첫 자녀 출생 후 페르난두 2세 국왕이 되었다. 이 결혼에서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마리아 2세는 1835년 10월 30일 법률 91호에 의해 브라질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될 때까지 오빠 페드루 2세의 황태녀였다. |
미겔, 베이라 공 | 1820년 4월 26일 | 출생부터 사망까지 베이라 공이었다. | |
주앙 카를루스, 베이라 공 | 1821년 3월 6일 - | 출생부터 사망까지 베이라 공이었다. | |
자누아리아 공주 | ![]() | 1822년 3월 11일 - | 프란치스코 1세의 아들인 아퀼라 백작 루이지 왕자와 결혼했다. 이 결혼에서 4명의 자녀를 두었다. 1822년 6월 4일 포르투갈의 공식 인판타로 인정받았으나, 브라질 독립 후 포르투갈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다. |
파울라 공주 | ![]() | 1823년 2월 17일 - | 9세에 사망했으며, 아마도 뇌수막염 때문으로 추정된다. 브라질 독립 후 브라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포르투갈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다. |
프란시스카 공주 | ![]() | 1824년 8월 2일 - | 루이 필리프 1세의 아들인 조앙빌 공작 프랑수아 왕자와 결혼했다. 이 결혼에서 3명의 자녀를 두었다. 브라질 독립 후 브라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포르투갈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다. |
페드루 2세 | ![]() | 1825년 12월 2일 - | 1831년부터 1889년까지 브라질의 황제였다. 양시칠리아의 테레사 크리스티나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양시칠리아의 프란치스코 1세의 딸이었다. 이 결혼에서 4명의 자녀를 두었다. 브라질 독립 후 브라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포르투갈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으며, 아버지의 양위 시 포르투갈의 페드루 5세 국왕이 되지 못했다. |
11. 가계
마리아 레오폴디나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1.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디나
- 2. 아버지: 프란츠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황제)
- 4. 친조부: 레오폴트 2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8. 친증조부: 프란츠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9. 친증조모: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여대공)
- 5. 친조모: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 10. 친증조부: 카를로스 3세 (스페인 국왕)
- 11. 친증조모: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 4. 친조부: 레오폴트 2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3. 어머니: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 6. 외조부: 페르디난도 1세 (양시칠리아 국왕)
- 12. 외증조부: 카를로스 3세 (스페인 국왕)
- 13. 외증조모: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 7. 외조모: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 14. 외증조부: 프란츠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15. 외증조모: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여대공)
- 6. 외조부: 페르디난도 1세 (양시칠리아 국왕)
- 2. 아버지: 프란츠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