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career
마르틴 토리호스의 초기 생애와 경력은 그의 가족 배경, 교육, 그리고 정치 입문 전 활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1.1. Birth and family
마르틴 에라스토 토리호스 에스피노는 1963년 7월 18일 파나마 에레라주 치트레에서 태어났다. 그는 1968년부터 1981년까지 파나마의 사회 개혁가이자 군부 실권자였던 오마르 토리호스 헤레라의 사생아였다. 어린 시절에는 주로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으나, 십대 시절 아버지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1.2. Education
토리호스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위스콘신주 델라필드에 위치한 세인트 존스 노스웨스턴 군사 사관학교(St. John's Northwestern Military Academy)를 졸업했으며, 텍사스주 칼리지스테이션의 텍사스 A&M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미국 체류 기간 중에는 시카고의 맥도날드 레스토랑에서 매니저로 일하기도 했다.
1.3. Early career
에르네스토 페레스 바야다레스 대통령 재임 기간(1994년~1999년) 동안 토리호스는 내무 및 법무부 차관보로 재임했다. 차관보로서 그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파나마 수도 사업의 완전한 민영화를 법제화하는 법안에 서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법안은 대중의 강한 반발을 샀고, 결국 민주혁명당은 이전 시스템으로 되돌렸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무장 강도와 폭행 사건 발생률이 증가했으며, 노동조합인 SUNTRACS가 분노하여 여러 차례 돌팔매 시위를 벌인 사례도 보고되었다.
2. Presidential campaigns
토리호스는 1999년과 2004년에 두 차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2.1. 1999 Presidential campaign
에르네스토 페레스 바야다레스 현직 대통령의 연임을 허용하는 헌법 국민투표가 부결된 후, 토리호스는 1999년 파나마 총선에서 민주혁명당의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는 바야다레스의 민영화 및 노조 제한 정책 이후 좌파 유권자들의 지지를 되찾기 위해 부분적으로 선택되었다. 그의 주요 경쟁자는 아르눌피스타당 후보이자 전직 대통령 아르눌포 아리아스의 미망인인 미레야 모스코소였다. 아리아스는 토리호스의 아버지 오마르 토리호스 헤레라가 권력을 장악했던 1968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된 인물이었다. 모스코소는 대중주의적 공약을 내세우며 많은 연설을 아리아스가 사용했던 라틴어 문구인 "Vox populi, vox Dei국민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이다라틴어"로 시작했다. 그녀는 교육 지원, 빈곤 감소, 민영화 속도 조절을 약속했다.
토리호스는 "오마르는 살아있다"는 선거 구호를 사용하며 아버지의 유산을 강조했으나, 모스코소는 사망한 남편의 유산을 내세웠다. 이로 인해 파나마인들은 이번 선거를 "두 시체의 경주"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토리호스와 민주혁명당은 이전 행정부의 부패 스캔들과 더불어, 라 프렌사 신문이 보도한 토리호스 캠페인 구성원 두 명이 모빌로부터 전 미국 군사 기지 매각과 관련하여 뇌물을 받았다는 스캔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최종적으로 모스코소는 45%의 득표율로 37%를 얻은 토리호스를 누르고 승리했다.
2.2. 2004 Presidential campaign
토리호스는 2004년 파나마 총선에서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민주주의 강화와 미국과의 자유 무역 협정 협상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으며, 인기 음악가이자 정치인인 루벤 블레이즈의 지지를 받았다. 토리호스는 훗날 블레이즈를 국가 관광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토리호스의 주요 경쟁자는 1990년부터 1994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던 기예르모 엔다라였다. 엔다라는 연합당 후보로 출마하여 범죄 및 정부 부패 감소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엔다라와 다른 후보들은 민주혁명당이 전 군사 통치자 마누엘 노리에가와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부정적인 광고를 여러 차례 방영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토리호스는 47%의 득표율을 얻어 31%를 얻은 엔다라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토리호스가 취임하기 직전, 미레야 모스코소 전 대통령은 2000년 파나마 방문 중이었던 피델 카스트로 쿠바 주석 암살 음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4명(루이스 포사다 카릴레스, 가스파르 히메네스, 페드로 레몬, 기예르모 노보 삼폴)을 사면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쿠바는 파나마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고,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자국 대사를 소환했다. 모스코소는 토리호스에 대한 불신 때문에 사면을 결정했다고 밝히며, "이 사람들이 여기 남아있었다면 쿠바와 베네수엘라로 인도될 것이고, 그곳에서 분명히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3. Presidency (2004-2009)
토리호스는 2004년 9월 1일에 대통령으로서 취임하여 2009년까지 재임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주요 국내 정책, 파나마 운하 확장 프로젝트, 그리고 외교 활동을 펼쳤다.
3.1. Domestic policies and reforms
2005년 5월, 토리호스 정부는 국가의 증가하는 외채를 상환하기 위해 연금 기여금 인상과 은퇴 연령 상향 조정을 제안했다. 이 변화는 수주간의 시위, 파업, 그리고 파나마 대학교의 학생 주도 폐쇄를 야기했으며, 결국 은퇴 연령 인상 제안은 연기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토리호스는 사회 보장 개혁 계획을 처음에는 연기했지만, 재임 후반기에 성공적으로 개혁 조치를 통과시켰다. 토리호스 정부는 이 외에도 재정 개혁과 사회 보장 개혁과 같은 구체적인 프로그램들을 수립하고 이행했다.
3.2. Panama Canal expansion project

토리호스의 일시적인 비인기는 파나마 운하 확장을 2006년까지 연기하게 만들었다. 같은 해 4월, 그는 이 계획을 "아마도 이번 세대의 가장 중요한 결정"이라고 부르며 발표했다. 이 확장 계획은 운하의 선박 통과 용량을 두 배로 늘리고 유조선과 유람선을 처리할 수 있게 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총 50.00 억 USD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계획은 2006년 10월 22일 국민 투표를 통해 78%의 압도적인 찬성률로 승인되었다.
3.3. Foreign relations and trade
2006년 11월, 토리호스는 푸에르토리코 독립 지지 라틴 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연대 회의를 후원하며, 미국에 푸에르토리코의 독립을 인정하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그의 행정부는 콜롬비아 대통령 알바로 우리베가 미개발 다리엔 갭을 통해 국가들을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하자는 제안에 반대하며, 이는 지역 생태 관광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밝혔다.
2007년, 토리호스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파나마-미국 무역 진흥 협정을 협상했다. 이 협정은 파나마에서는 비준되었으나, 2007년 9월 동료 민주혁명당 소속인 페드로 미겔 곤살레스 핀손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되면서 미국 내 비준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곤살레스 핀손은 1992년 미 육군 병장 잭 에르난데스 살해 혐의로 미국 대배심에 의해 기소된 상태였고, 일부 미국 의원들은 곤살레스 핀손이 직위에서 물러날 때까지 협정을 반대하겠다고 맹세했다. 토리호스는 당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공개적으로 대립하기를 꺼려, 곤살레스 핀손에게 사임을 개인적으로 요청했지만 언론에서는 그를 비판하지 않았다. 이 협정은 최종적으로 토리호스의 후임자인 리카르도 마르티넬리 재임 기간에 비준되었다. 2008년 4월 말, 토리호스는 쿠바의 라울 카스트로와 만나 에너지 법안 서명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4. Post-presidency and later political activities
토리호스는 임기 말에 다시 인기를 얻었지만, 파나마 헌법은 대통령의 연속 재임을 금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민주혁명당은 2009년 선거에서 그를 이을 후임자로 발비나 에레라를 지명했으나, 에레라는 슈퍼마켓 체인 소유주이자 무소속 후보인 리카르도 마르티넬리에게 패배했다. 대통령 퇴임 후, 토리호스는 미주 대화(Inter-American Dialogue)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2024년 총선에서는 과거 자신의 정부를 지지하고 함께했던 기독민주주의 성향의 인민당 후보로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득표율 3위를 기록하며 낙선했다.
5. Legacy and reception
토리호스의 공적과 활동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평가는 긍정적 측면과 비판적 측면이 공존한다.
5.1. Positive reception
토리호스 재임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파나마 운하 확장 프로젝트의 추진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국민 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통과되었으며, 파나마의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지도력 아래 운하 확장은 국가의 미래 번영을 위한 중요한 기반을 다졌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5.2. Criticism and controversies
그러나 토리호스의 일부 정책은 상당한 비판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내무 및 법무부 차관보 시절 서명한 수도 사업의 완전 민영화 법안은 대중의 강한 반발에 직면하여 결국 철회되었다. 또한, 대통령 재임 초기 추진했던 연금 기여금 인상 및 은퇴 연령 상향 조정 등의 사회 보장 개혁 시도 역시 대규모 시위와 파업을 야기하며 국내의 광범위한 반대 여론에 부딪혔다. 1999년 대선 캠페인 중에는 그의 측근들이 모빌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으며, 차관보 재임 당시 무장 강도 및 폭행 사건 발생률이 증가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러한 논란들은 그의 행정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근거가 되었다.
6. Foreign honors
7. Election results
마르틴 토리호스가 출마했던 주요 선거의 상세한 투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
1999년 선거 | 파나마의 대통령 | 29대 | 민주혁명당 | 37.82% | 483,501표 | 낙선 |
2004년 선거 | 파나마의 대통령 | 30대 | 민주혁명당 | 47.44% | 711,164표 |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