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흐리스토스 사르체타키스는 어린 시절부터 법학 교육을 받으며 법조인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1.1. 어린 시절 및 교육
흐리스토스 사르체타키스는 1929년 4월 6일 테살로니키 네아폴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테살로니키에서 헌병대 장교로 복무했으며, 하니아의 칸다노스 출신 크레타인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플로리나의 스키트로 출신 그리스 마케도니아인이었습니다.
그는 테살로니키 아리스토텔레스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2. 법조계 경력
사르체타키스는 법조계에서 오랜 경력을 쌓았으며, 특히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1955년에 법조계에 입문하여, 카스토리아의 클레이수라에서 치안 판사로 근무했습니다. 이후 1963년에는 테살로니키 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했습니다.
2.1. 그리 고리스 람브라키스 암살 사건 조사 및 군사정권 하의 투옥
1963년 5월 27일, 좌파 국회의원 그리 고리스 람브라키스가 폭행당한 지 나흘 만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테살로니키 지방법원으로 이관되었고, 그리스 대법원 검사 콘스탄티노스 콜리아스는 사르체타키스를 수사 책임자로 지명했습니다. 1964년 3월, 사르체타키스는 당시 법무부 장관 폴리흐로니스 폴리흐로니디스에게 서한을 보내 경찰과 국가가 이 살인에 책임이 있다고 암시했습니다. 그는 검사 스틸리아노스 부티스와 함께 경찰관 4명에 대한 예방 구금 명령을 내렸습니다.
재판은 1966년 10월 3일 테살로니키 형사법원에서 시작되어 67일간 진행되었습니다. 사르체타키스와 검사 파블로스 델라포르타스는 조사를 계속하지 않고 사건을 신속히 종결하라는 강한 압력을 받았습니다. 두 달 후 판결이 발표되었는데, 21명의 피고인과 모든 공무원이 무죄 판결을 받아 검찰의 제안이 기각되었습니다. 단 두 명만이 가해자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이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정권에 의해 사면되었습니다. 군사정권 하에서 총리가 된 콜리아스는 사르체타키스에게 "사르체타키스는 나에게 대답할 것이다"라고 위협했습니다. 사르체타키스는 대통령직 퇴임 후 출간한 회고록에서 람브라키스의 죽음이 국가가 직접 개입한 명백한 정치적 암살임을 강조했습니다.
사르체타키스는 1968년 5월 28일 군사정권의 헌법 제정으로 "그의 직무 수행 과정에서 정치적 신념에 따라 차별적으로 행동하여 시민들의 그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를 훼손했다"는 명목으로 29명의 치안 판사와 함께 법조계에서 축출당했습니다.
람브라키스 사건에 대한 사르체타키스의 수사는 바실리스 바실리코스의 1966년 소설 《Z》의 주제가 되었으며, 코스타스 가브라스 감독의 1969년 동명 영화 《Z》에서는 장루이 트랭티냥이 사르체타키스를 모델로 한 인물을 연기했습니다.
람브라키스 사건 수사 이후, 사르체타키스는 상법과 유럽 공동체 법을 연구하기 위해 파리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군사정권에 의해 두 차례 체포되었는데, 첫 체포는 1970년 성탄절 전야였으며 그리스 군사경찰에 의해 고문을 당했습니다. 국제적인 비난이 잇따르자 그는 1971년 군사정권의 감옥에서 석방되었습니다.
2.2. 민주주의 복원 이후
1974년 9월,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그리스에 민주주의가 복원된 후 사르체타키스는 완전히 복권되었습니다. 1976년 항소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그는 독일이 테러리스트 롤프 폴레의 인도를 요청하자, 그의 범죄가 정치적이며 그리스 헌법이 그러한 경우 인도를 금지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대해 대법원 검사는 그와 해당 판결을 내린 다른 두 판사에 대해 징계 절차를 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81년에 항소법원장으로 임명되었고, 1982년에는 대법원 판사가 되었습니다.
3. 그리스 대통령 재임 (1985-1990)
사르체타키스는 1985년부터 1990년까지 그리스의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다양한 정치적 사건과 논란에 직면했습니다.
3.1. 대통령 선출 과정
1985년 대통령 선거 직전의 정치적 분위기는 특히 불안정했으며, 당시 언론과 정당들은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대통령의 재선을 확실시했습니다. 이때 당시 총리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던 판사 사르체타키스를 카라만리스의 후임 후보로 지명하는 파격적인 발표를 했습니다. 이 예상치 못한 발표와 사르체타키스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파판드레우의 전술은 헌법 위기를 야기했습니다. 1985년 3월 10일, 파판드레우의 발표 직후 카라만리스는 PASOK의 예상치 못한 재선 거부와 대통령의 소수 행정 권한을 총리에게 이관하려는 파판드레우의 1975년 헌법 개정 계획에 반대하여 사임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리스 의회 의장 요안니스 알레브라스가 그리스의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습니다.

그리스 의회에서의 첫 투표는 3월 17일에 진행되었고, 단일 후보였던 사르체타키스는 178표를 얻었습니다. 3월 23일에 진행된 두 번째 투표에서는 181명의 의원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 투표는 투표용지 색깔이 달라(사르체타키스의 용지는 파란색, 다른 용지는 흰색) 비밀 투표 원칙을 위반했다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3월 29일에 진행된 세 번째이자 격렬했던 투표에서 사르체타키스는 PASOK과 그리스 공산당 의원 180명의 지지로 5년 임기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선출 직후 그는 텔레비전 메시지를 통해 단합을 촉구하며 "우리나라는 국가적 분열이라는 사치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작다"고 재확인했습니다.
그는 3월 30일에 취임 선서를 했습니다. 당시 취임식은 보수 야당인 신민주주의당의 의원 112명이 보이콧했습니다. 이들은 당시 의회 의장이자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알레브라스가 투표에 참여한 것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3.2. 주요 정책 및 사건
1986년, 사르체타키스는 국내 낙태를 합법화하는 법안에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1987년에는 흐리스토스 루소스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1976년 살인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젊은 동성애자 흐리스토스 루소스는 자신을 매춘시키려던 남자를 살해했다고 주장하며 오심에 대한 재심을 요청하며 단식 투쟁에 돌입했습니다. 이에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정부는 루소스에 대한 사면을 승인했으나, 사르체타키스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 사실은 그에게 동성애 혐오자라는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파판드레우 총리와의 관계를 악화시켰습니다. 루소스에 대한 사면은 결국 1990년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1989년부터 1990년 사이, 그는 정당들이 정부를 구성하지 못해 전례 없는 3차례의 선거 반복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이는 주로 파판드레우를 연루시킨 코스코타스 스캔들과 야당이 다수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파판드레우의 선거법 변경 때문이었습니다.
3.3. 대통령으로서의 평가 및 비판
대통령으로서의 사르체타키스의 성격은 끊임없이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신문들이 자신을 대문자 'K'가 붙은 "경"(Κύριος키리오스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으로 지칭할 것을 요구했으며, 현대 그리스어의 보수적인 형태인 카타레부사어를 사용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는 엄격한 형식주의자이자 경직된 사고를 가졌으며, 국민과 동떨어져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코스타스 시미티스, 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와 같은 다른 총리들과 이후 대통령이 된 콘스탄티노스 스테파노풀로스에게도 동일한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는 중국 방문 후 귀국 시 당시 고가였던 에어컨을 구매하고 세관을 통과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공식 방문 중 보고된 이러한 구매가 전적으로 그에게만 귀속되어서는 안 되며, 수행원과 기자들의 구매도 포함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을 조롱한 코미디언들을 고소했습니다. 1986년에는 코미디언 하리 클린이 자신의 앨범 표지에서 성 아타나시우스의 철 십자가와 지팡이를 든 사르체타키스를 풍자했습니다. 사르체타키스는 종교적 상징물 모독 혐의로 그를 고소했으나, 클린은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듬해에는 코미디언 라키스 라조풀로스가 정치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게재한 후 체포되었으나, 그 역시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그는 그리스 저항운동 전사들을 7월 24일 기념 행사에 대통령궁으로 초청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임기는 1990년 5월 5일에 종료되었습니다. 그는 1990년 대통령 선거에서 두 번째 임기를 위한 충분한 지지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전날 의회에서 절대 다수표로 당선된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가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사르체타키스는 공직에서 은퇴했지만, 신문 칼럼과 자신의 웹사이트를 통해 계속해서 의견을 발표했습니다.
4. 사상 및 관점
흐리스토스 사르체타키스는 그의 정치적 경력 전반에 걸쳐 독특한 사상과 관점을 유지했으며, 특히 국가 재통합과 화해에 대한 깊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반공주의적 견해를 가졌으며, 1949년 민주군의 패배를 "국가적 승리"로 간주했습니다.
4.1. 국가 재통합 및 화해에 대한 관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체타키스는 기억에 기반한 진정한 국가적 화해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국군 전사자 추모식 중단과 교육에서 관련 주제를 금기시하는 처리에 반대하며 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1989년 정치 위기 동안 공산주의 지도자 하릴라오스 플로라키스와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2005년 플로라키스 사망 후 사르체타키스는 그를 "곧은 성품, 정직함, 정치적 올바름"을 가졌다고 칭찬하며 애도를 표했습니다.
5. 개인적인 삶
사르체타키스는 에피 아르기리우와 결혼하여 딸 한 명을 두었습니다.
6. 사망
2021년 12월 3일, 흐리스토스 사르체타키스는 급성 폐렴으로 인해 아테네의 라이코 병원에서 기관 삽관을 받았습니다. 그는 2022년 2월 3일 92세의 나이로 급성 호흡 부전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리스 정부는 그의 사망을 기려 2월 3일부터 5일까지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조기를 게양했습니다. 국장은 2월 7일 아테네 미트로폴리탄 대성당에서 엄수되었으며, 이후 그는 아테네 제1 공동묘지에 가족장으로 안장되었습니다.
7. 서훈
- 엔리크 항해왕자 훈장 대십자장 (포르투갈, 1990년)
8. 유산 및 평가
흐리스토스 사르체타키스의 삶과 업적은 그리스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의 공헌과 함께 여러 비판적 시각도 존재합니다.
8.1. 긍정적 평가
사르체타키스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그리 고리스 람브라키스 암살 사건 수사에서 보여준 그의 굳건한 태도와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입니다. 그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며 법치주의와 인권 수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민주주의 복원 이후, 그는 롤프 폴레 인도 거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헌법적 원칙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반공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재통합과 화해를 위해 노력하며 공산주의 세력과도 협력할 의지를 보여, 사회 통합적 관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퇴임 후에도 그는 공공 문제에 대한 의견을 지속적으로 개진하며 사회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습니다.
8.2. 비판 및 논란
대통령 재임 중 사르체타키스는 그의 엄격하고 형식적인 성격과 대중과 거리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신문사에 특정 호칭을 요구하거나, 보수적인 카타레부사어를 사용한 것은 대중의 비판을 야기했습니다. 또한 중국 방문 시 고가 에어컨 구매 및 세관 통과 논란이나, 자신을 풍자한 코미디언들을 고소한 사건들은 그의 대중적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흐리스토스 루소스 사건에서 그가 보여준 태도는 소수자 인권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