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홍진(洪震한국어, 1877년 음력 8월 27일 ~ 1946년 9월 9일)은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지도자였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홍면희(洪冕憙한국어 또는 洪冕喜한국어), 아명은 봉근(鳳根한국어) 또는 우봉(又鳳한국어)이며, 호는 만오(晩悟한국어),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본관은 풍산 홍씨이다.
홍진은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후 검사와 판사를 역임하며 법조계에 몸담았으나, 경술국치 이후 변호사로서 애국지사들을 변론하는 등 법정 투쟁을 벌였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연락책임자로 활동했으며, 한성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한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장, 국무령(제5대), 외무총장, 내무총장, 고문 등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며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국무령 재임 시에는 중화민국, 프랑스, 폴란드로부터 임시정부의 인정을 받는 데 기여했으며, 독립운동 세력 간의 단결을 강조하며 한국독립당 등 주요 독립운동 정당의 창당과 통합을 주도했다.
광복 후 귀국하여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 활동하다 1946년 서거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으며,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홍진은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임시정부의 위상 강화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홍진은 법조계에서 경력을 쌓기 전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기까지의 초기 삶을 보냈다.
2.1. 출생 및 가족
홍진은 1877년 음력 8월 27일(양력 10월 3일) 조선 한성부 서소문에서 아버지 홍재식과 어머니 한수동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충청북도 영동군이라는 설도 있으며, 유아기에는 잠시 경기도 시흥시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주로 한성부에서 성장했다. 그의 본명은 홍면희(洪冕憙한국어 또는 洪冕喜한국어)이며, 어린 시절 이름은 봉근(鳳根한국어)과 우봉(又鳳한국어)이었다. 본관은 풍산 홍씨로, 그의 가문은 고려 시대의 홍지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양반 가문이었다. 1896년에는 의령 남씨 남숙희의 둘째 딸인 남상복(南相福한국어, 1876년생)과 결혼하여 아들 홍기택(洪起澤한국어, 1905년생)을 두었다. 현재 풍산 홍씨 족보에는 귀화한 미국 시민권자인 후손들이 남아있다고 알려져 있다.
2.2. 교육 및 법조계 경력
홍진은 1903년 2월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했다. 1904년 7월 21일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뒤, 7월 26일 법관양성소 박사로 임명되었으나 이틀 만에 면직되었다. 1906년 2월에는 한성평리원 주사로 근무했으며, 같은 해 12월 5일 법관전고소 시험에 합격했다. 12월 10일에는 충청북도 재판소 검사로 발령받아 활동했다.
1908년 5월 14일, 그는 의병 사건에 대한 논고를 거부하며 검사직에서 의원면직되었다. 이후 5월 29일 대한제국 법부로부터 변호사 인가장을 받아 변호사로 전향했다. 1909년 7월 14일 평양지방재판소 검사국에 변호사로 등록하고 평양에서 개업하여 활동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경성부와 평양 등지에서 애국지사들을 변론하는 법정 투쟁을 계속하며 독립운동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3. 독립운동 활동
홍진은 일제강점기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1. 3.1 운동 및 망명
1919년 3월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홍진은 충청북도 청주시 지역의 연락책임자로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3월 17일에는 한성오의 집에서 비밀리에 한성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데 가담했으며, 이 정부에서 법무차장직을 맡았다.
이후 4월 15일, 그는 이규갑과 함께 한성 임시정부의 각료 명단과 주요 문건을 가지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홍면희에서 홍진(洪震한국어 또는 洪鎭한국어)으로 개명하며 독립운동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3.2.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역할
상하이로 망명한 홍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과 운영에 깊이 관여하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3.2.1. 주요 직책 수행
홍진은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된 이래 임시정부 내에서 수많은 요직을 거쳤다. 1919년 9월 11일에는 취임을 미루던 이동휘 국무총리를 찾아가 취임을 종용하기도 했다. 11월에는 임시정부 국내조사위원 및 임시의정원 충청도 선거위원장에 임명되어 국내 독립운동과의 연계를 강화했다.
1920년 3월 19일 임시의정원 상임위원회 제4분과 위원, 3월 30일 임시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21년 4월 6일에는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에 당선되었고, 5월 6일에는 제3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4월 20일에는 상하이 대한교민단장에 선임되어 교민들의 권익 보호와 독립운동 지원에 힘썼으나, 5월 20일 교민단장직에서 면직되었다.
1923년에는 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되었으며, 1926년 7월 7일에는 임시의정원에서 제5대 국무령으로 선출되어 이튿날 취임했다. 8월 30일에는 홍진 정부를 공식 출범시켰고, 9월 27일에는 시정 방침 및 신 부서 조직 규정을 발표하며 임시정부의 체제를 정비했다. 이와 함께 국무령으로서 외무부장을 겸임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프랑스, 폴란드로부터 정부로서의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는 9월 27일 임시정부 시정방침 4대 강령을 발표했는데, 이는 비타협적 자주독립운동 진작, 전 민족 대당체(大黨體) 건립, 각 피압박민족과의 대연맹 체결 및 기타 우호 증진, 국교 증진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단체들 간의 분규가 계속되자, 그는 1926년 12월 9일 유일당 운동에 주력하기 위해 국무령직을 사임했다. 이후 12월 29일 임시의정원 의원에 재선되어 의정 활동을 이어갔다.
1939년 10월 15일 임시의정원 충청도 위원으로 다시 선출되었고, 10월 16일에는 두 번째로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10월 23일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10월 25일에는 내무부장으로 선임되며 다시 임시정부의 핵심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국무위원과 임시의정원 의장직의 겸직 불가 원칙에 따라 11월 5일 임시의정원 의장직을 사임했다.
1940년 10월 8일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1942년 10월 26일에는 세 번째로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국무위원회 고문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겸직하며 광복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44년 1월 3일에는 국무위원 선출 방식을 둘러싼 여야 대립에서 의장임에도 불구하고 야당 측이 주장한 무기명 투표안에 찬성하는 소신을 보여주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최동오 부의장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기도 했다.
3.2.2. 외교 및 통합 활동
홍진은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1년 8월 13일 상하이 교민단 사무소에서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를 발족하고 임시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8월 26일에는 대표인 간사장을 맡았다. 그는 이 회의를 통해 한국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고 일본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펼쳤으며, 임시의정원 의원 25명의 연서로 태평양회의 각국 대표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하기도 했다.
1922년 4월 3일 태평양회의에 대한 책임으로 국무원이 총사직하자 임시의정원 의장직에서 면직되었으나, 1923년 국민대표회의 문제를 둘러싸고 임시정부 내에서 의견 대립이 발생하자 여운형, 김구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독립운동 세력 간의 통합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1927년 4월 상하이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1월에는 베이징, 우창, 난징 등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과 연석회의를 열어 통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같은 해 말에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는 등 독립운동의 역량을 한데 모으는 데 헌신했다.
4. 정당 활동 및 노선
홍진은 독립운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독립운동 정당의 창당과 통합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4.1. 독립 정당 창당 및 참여
1928년, 홍진은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했으며, 1930년 7월 26일에는 한국독립당을 재조직하고 중앙위원장 및 군민회의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그는 한국독립당의 무장 부대로 한국독립군을 편성하고 중국과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대일 항전을 전개했다. 1934년 2월 25일에는 난징에서 신익희의 한국혁명당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선출되었으나, 곧 한국독립당을 재조직했다. 1935년 7월 5일에는 독립운동 계열의 단일 정당인 민족혁명당을 창당하는 데 기여했으며, 중앙검사위원을 맡았다.
1937년 8월 17일, 미주 지역 6개 단체가 참여하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38년 독립운동 단체들이 통합하여 한국광복진선이 결성되자 선전위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1940년 5월 9일, 그는 다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통합하여 새로운 한국독립당이 출범하자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어 한국광복군 창설에 크게 이바지했다.
1945년 2월 9일에는 신한민주당을 창당하고 유동렬, 김붕준과 함께 주석단에 선출되는 등 광복 직전까지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형성하기 위한 정당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4.2. 중국 및 만주에서의 활동
홍진은 중국 본토와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연대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1927년 말 만주로 직접 건너가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모색했으며,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여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펼치는 등 무장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은 독립운동의 역량을 결집하고 국제적인 지지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5. 개인적인 삶
홍진의 개인적인 삶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과정 속에서도 가족과 신앙을 지키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5.1. 결혼과 가족
홍진은 1896년 의령 남씨 남숙희의 둘째 딸인 남상복(南相福한국어, 1876년생)과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홍기택(洪起澤한국어, 1905년생)이 있었다. 그의 가족은 독립운동 기간 동안 그를 지지하며 함께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5.2. 종교
홍진은 1946년 7월 심장천식으로 입원했을 때, 남상철의 권유로 천주교 세례를 받고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는 그가 생애 마지막 순간에 신앙을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6. 서거 및 평가
홍진은 광복 직후 귀국하여 국가 재건에 참여했으나, 곧 서거하여 독립된 조국의 발전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공헌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다.
6.1. 서거와 장례
홍진은 1946년 7월 심장천식으로 입원한 뒤, 같은 해 9월 9일 향년 70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그의 장례는 9월 13일 명동성당에서 김구가 장례위원장을 맡아 집례하는 장례미사로 엄수되었으며, 처음에는 인천광역시 관교동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유해는 1984년 12월 15일 서울특별시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1994년 10월 6일에는 국립묘지 내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조성된 임정수반 묘소로 다시 이장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다른 주요 지도자들과 함께 영면하게 되었다.
6.2. 사후 서훈 및 기념
대한민국 정부는 홍진의 독립운동 공헌을 높이 평가하여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이는 그의 희생과 헌신이 국가적 차원에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그의 생애와 업적은 한시준 교수의 전기 등을 통해 상세히 연구되어 있으며, 이는 후대에게 그의 독립 정신을 기리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광복 후 1945년 11월 5일, 홍진은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 29명과 함께 충칭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했다. 같은 해 12월 1일에는 임시정부 제2진으로 22명과 함께 상하이를 출발했으나, 폭설로 인해 당초 예정했던 김포공항이 아닌 군산 비행장에 도착했다. 12월 24일에는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에 추대되기도 했다.
1946년 2월 1일, 그는 명동성당에서 비상국민회의 창립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에 선출되어 광복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같은 해 2월에는 미군 주둔군 사령관 존 하지와 면담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