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스 호터(Hans Hotter한스 호터독일어, 1909년 1월 19일 ~ 2003년 12월 6일)는 독일의 저명한 베이스바리톤 가수이자 오페라 연출가, 그리고 음악 교육자였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오페라 가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그는 특히 바그너 오페라의 주요 역할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으며, 리트 해석에 있어서도 깊은 통찰력으로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그의 경력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국제적 확장이 지연되었지만, 전쟁 이후 세계 주요 무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호터는 단순히 뛰어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나치 정권에 대한 열정적인 반대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자신의 예술적 진실성과 윤리적 신념을 지켜낸 인물로 기억된다. 그의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목소리와 압도적인 무대 장악력은 오페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수많은 후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2. 생애와 초기 경력
한스 호터는 뮌헨에서의 교육과 초기 경험을 통해 음악적 기반을 다졌으며, 오파바에서의 데뷔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2.1. 출생과 어린 시절
한스 호터는 1909년 1월 19일 독일 헤센주 오펜바흐암마인에서 태어났다. 그는 2003년 12월 6일 뮌헨에서 사망했다. 그의 큰 키(6피트 4인치, 약 193cm)와 당당한 외모는 어린 시절부터 인상적인 존재감을 주었다.
2.2. 교육과 음악 훈련
호터는 뮌헨에서 마태우스 뢰머에게 성악을 사사했다. 뮌헨 대학교에서 철학과 음향학을 공부했으며, 뮌헨 음악 대학교에서는 종교 음악가 지망생으로서 피아노와 오르간을 배웠다. 1929년 헨델의 《메시아》에서 베이스 독창 대역을 맡은 것을 계기로 뢰머에게 가수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본격적으로 성악에 집중하게 되었다.
2.3. 데뷔와 초기 활동
1930년 호터는 체코 오파바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의 변자를 맡아 오페라에 데뷔했다. 불과 22세의 나이로 바그너 오페라 《지크프리트》에서 '방랑자(보탄)' 역을 노래했다. 1932년에는 브레슬라우(현 폴란드 브로츠와프)와 프라하 국립극장에서 공연했으며, 1934년에는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에 출연했다. 1937년부터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와 계약하여 35년 이상 그곳에서 활동했으며, 50년 동안 실질적으로 무대에 섰다. 이곳에서 그는 바그너의 모든 바리톤 역할을 소화했을 뿐만 아니라, 모차르트와 베르디의 오페라에서도 수많은 역을 맡아 명성을 쌓았다.
3. 주요 경력 활동
한스 호터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와 업적은 국제적인 성공 이후의 활동과 그가 남긴 독보적인 연주들이다.
3.1. 나치 정권 시기 활동
호터는 나치 정권 시기(1933년~1945년)에도 뮌헨 국립 오페라를 포함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주요 극장에서 활동했다. 그는 공연자들에게 나치당 가입을 강요하는 압력에 저항하며, 브루노 발터의 지휘 아래 암스테르담 콘서트에 출연하는 등 해외 공연도 가졌다. 발터는 당시 호터에게 가족들을 떠날 수 없다면 독일에 남아 예술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조언했다. 호터는 나치 체제에 대한 혐오감을 표출하며 파티에서 히틀러를 조롱하는 등 반나치주의적인 입장을 공개적으로 견지했다. 이로 인해 그는 바이로이트 축제가 히틀러의 정치와 연관되면서 축제 참여를 거부하기도 했다. 전후 탈나치화 청문회에서 히틀러의 개인 소장품에 호터의 음반이 있었다는 질문을 받자, 그는 "교황도 제 음반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재치 있게 답하며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호터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가장 좋아하는 바리톤 중 한 명으로, 슈트라우스의 만년 오페라 여러 작품의 초연에 참여했다. 1938년 《평화의 날》에서 지휘관 역을, 1942년 《카프리치오》에서 올리비에 역을, 그리고 1944년 《다나에의 사랑》의 비공개 최종 리허설에서 주피터 역을 맡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카를 뵘이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말 없는 여인》에서 모로수스 경 역을 노래하기도 했다. 슈트라우스는 그의 가곡 "Erschaffen und beleben"을 호터에게 헌정했으며, 호터는 슈트라우스의 여러 가곡을 녹음으로 남겼다.
3.2. 국제적 성공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 호터는 코벤트 가든에 데뷔하면서 비로소 국제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이후 유럽의 모든 주요 오페라 극장에서 활발하게 공연했으며, 1950년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타이틀 롤로 데뷔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네 시즌 동안 13개의 역할로 총 35회의 공연을 가졌으며, 이 중 대부분은 바그너 오페라였다.
3.3. 오페라 레퍼토리와 주요 역할
호터의 가장 잘 알려진 업적은 바그너의 대작 《니벨룽의 반지》에서 보탄 역을 연기한 것이다. 그는 20대 초반 독일 지방에서 《라인의 황금》의 보탄과 《지크프리트》의 방랑자 역을 처음 맡았고, 이후 프라하의 독일 극장에서 《발퀴레》 역을 추가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이 역할들을 연기했으며, 잠시 심한 천식으로 인해 목소리에 위기를 겪기도 했다. 1951년 전후 바이로이트 축제 첫 시즌에는 불참했으나, 1952년부터 여러 해 동안 그곳에서 노래했다. 그의 보탄 해석은 1930년대 《발퀴레》 2막의 스튜디오 녹음에서 처음 기록되었고, 1960년대 초 데카 레코드의 유명한 《반지》 전곡 녹음(지휘 게오르크 솔티, 프로듀서 존 컬쇼)에서도 담겼다. 또한 1950년대 중반 클레멘스 크라우스와 요제프 카일베르트가 지휘한 바이로이트 축제의 실황 녹음에서도 그의 보탄 해석을 만날 수 있다.
호터는 바그너의 《파르지팔》에서 젊은 시절에는 바리톤 역할인 암포르타스를, 나이가 들어서는 베이스 역할인 구르네만츠를, 그리고 더 나이가 들어서는 더 낮은 베이스 역할인 티투렐을 불렀다.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의 한스 작스 역으로도 칭송받았으나, 후기 경력에는 그의 음역에 더 잘 맞는 더 작고 낮은 역할인 포그너를 선호했다. 이는 그가 만년에 만성적인 허리 부상으로 고통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베토벤의 《피델리오》에서 피차로 역으로도 유명했으며, 1960년대 코벤트 가든 실황 녹음은 2005년에 테스트먼트 레이블로 처음 발매되었다.
비록 그의 국제적인 명성이 거의 독일 레퍼토리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베르디의 오페라를 자국어로 부르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인기 있는 《팔스타프》였으며, 《돈 카를로스》에서는 강력한 대심문관 역을 맡았고, 이 역할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포함한 여러 극장에서 이탈리아어로도 공연했다. 그는 모차르트의 알마비바 백작, 무소륵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로시니의 돈 바질리오 등 비독일 오페라 역할들을 독일어 번역으로 공연하고 녹음하기도 했다.

3.4. 가곡과 종교 음악
호터는 뛰어난 리트 가수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그는 슈베르트의 가곡집 《겨울 나그네》와 《백조의 노래》를 비롯한 여러 슈베르트 가곡 녹음을 남겼다. 특히 1954년 제럴드 무어의 피아노 반주로 녹음한 《겨울 나그네》는 '세기의 녹음'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는 《겨울 나그네》를 127회나 공연하고 네 차례나 녹음했다. 1962년부터 일본에서도 자주 리사이틀을 개최하며 많은 청중의 지지를 얻었고, 1990년대까지도 높은 수준의 가창력을 유지하며 리사이틀을 이어갔다. 그는 엄청난 성량의 목소리를 섬세하게 통제하여 부드러운 소리를 내고 완벽한 레가토로 노래할 수 있는 능력으로 찬사를 받았다. 자신의 음역을 고려하여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같은 곡은 부르지 않았다. 그는 종교 음악에도 깊이 관여하여 바흐 칸타타 녹음을 여러 편 남겼고, 하이든의 《천지창조》에서는 낮은 베이스 역할인 대천사 라파엘과 부드럽고 높은 바리톤 역할인 아담 역을 모두 불렀다.
3.5. 축제 출연
호터는 주요 국제 음악 축제에 꾸준히 출연하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1952년부터 1966년까지 15년 연속으로 빌란트 바그너가 이끄는 바이로이트 축제에 참가했으며, 이 기간 동안 보탄, 네덜란드인, 암포르타스, 구르네만츠, 크루베날, 한스 작스, 포그너, 군터 등 수많은 바그너 역할들을 노래했다. 또한 잘츠부르크 축제에도 자주 출연하여 1942년 《피가로의 결혼》 알마비바 백작, 1943년 《마술피리》 변자, 1946년 《돈 조반니》 타이틀 롤, 1947년 《아라벨라》 만드리카, 1959년 《말 없는 여인》 모로수스, 1969년 《피델리오》 돈 페르난도(대신) 등을 맡았다. 이 외에도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에도 출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4. 후기 경력과 기타 활동
한스 호터는 말년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오페라 연출과 후학 양성에도 기여했다.
4.1. 오페라 연출 및 교육
호터는 오페라 연출 분야에서도 재능을 보였다. 그는 1961년부터 1964년까지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직접 연출했다. 또한 빈과 함부르크에서도 연출가로 활동했다. 1977년에는 빈 국립 음악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성악 교육에도 기여했다. 잘란트 방송은 1979년 뮌헨 가슈타이크의 소규모 홀에서 열린 그의 젊은 가수들을 위한 마스터클래스를 녹화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볼프-에버하르트 폰 레빈스키의 다큐멘터리 영화 《한스 호터》가 ARD에서 방영되었다.
4.2. 지속된 공연과 은퇴
호터는 1972년에 공식적으로 은퇴했지만, 무대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쇤베르크의 《구레의 노래》에서 낭독자 역할을 80대까지 이어갔으며, 알반 베르크의 12음 기법 오페라 《룰루》에서 시골히 역과 같은 비중 있는 성격 역할들을 90대까지 노래하며 여러 시즌 동안 무대에 섰다. 2001년 2월, 그는 리하르트 호이베르거의 오페레타 《오페라볼》에서 리젠트 왕자 역으로 마지막 공식 무대 출연을 가졌다.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노년에도 시골히와 같은 난해한 인물에게도 인상적인 존재감을 부여했다.
5. 예술적 양식과 철학
한스 호터의 성악 예술은 독특한 음색과 깊이 있는 해석으로 특징지어졌으며, 그의 윤리적 입장은 그의 예술을 더욱 빛나게 했다.
5.1. 음성적 특징 및 해석 양식
호터의 베이스-바리톤 음성은 힘차고 비할 데 없는 음색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악곡에 적합한 세련된 기교와 뛰어난 기량, 그리고 연주하는 음악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어두운 음색으로 대규모 작품의 영웅 배역과 잘 어울렸으며, 특히 바그너 오페라의 주요 인물들을 연기하는 데 있어서는 그를 능가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탁월한 지성과 상상력이 연주에 더해져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5.2. 정치적 및 윤리적 입장
한스 호터는 열정적인 반나치주의자였다. 그는 나치 정권 시기 동안 히틀러를 조롱하고, 바이로이트 축제가 히틀러의 정치와 연관되자 축제 참여를 거부하는 등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전후 탈나치화 청문회에서 히틀러의 개인 소장품에 그의 음반이 있었다는 질문을 받자 "교황도 제 음반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답한 일화는 그의 당당하고 흔들림 없는 윤리적 입장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굳건한 태도는 예술가로서의 진정성을 넘어선 그의 개인적 가치와 진실성을 증명한다.
6. 개인 생활
한스 호터의 개인 생활은 그의 가족 관계와 그가 받은 여러 표창으로 요약된다.
6.1. 가족과 관계
1962년 호터의 딸 가브리엘레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손자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주니어와 결혼하여, 호터는 슈트라우스 가문과 사돈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는 음악계의 두 거장 가문이 맺은 중요한 인연으로 평가받는다.
6.2. 자서전과 영예
1996년 한스 호터는 자서전 《5월은 나를 반겼다...》(Der Mai war mir gewogen ...5월은 나를 반겼다...독일어)를 킨들러 출판사를 통해 출판했다. 이 제목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오랜 경력 동안 여러 영예를 안았다. 1955년에는 바이에른주의 궁정가수 칭호를 받았으며, 1985년에는 남독일의 저명한 작가, 극작가, 비평가 등으로 구성된 뮌히너 투름슈라이버로부터 '바이에른 시인상'을 수상했다. 1998년에는 빈 시로부터 '빈 시 명예 반지'를 수여받았다.
7. 죽음
한스 호터는 2003년 12월 6일 독일 뮌헨에서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뮌헨의 졸른 발트프리트호프에 안장되었다.
8. 유산과 평가
한스 호터는 오페라 및 고전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예술성과 개성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8.1. 비평적 찬사와 영향
한스 호터는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오페라 가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의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목소리와 압도적인 무대 장악력은 바그너 오페라의 주요 인물들을 연기하는 데 있어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부여했으며, 그를 능가할 만한 가수가 거의 없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니벨룽의 반지》 보탄과 《파르지팔》 구르네만츠 해석은 후대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음악 비평가 어니스트 뉴먼은 호터에 대해 "실제로 무대에 올라 자신이 곧 신(神)임을 청중에게 확신시킬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그는 1990년대까지 높은 수준의 가창력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공연했으며, 그의 예술성은 오페라 및 고전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수많은 후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8.2. 일화
호터의 무대 위 카리스마와 유머러스한 개성을 보여주는 여러 일화가 있다.
1956년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된 《발퀴레》에서 일어난 일이다. 3막에 등장하는 보탄 역의 호터가 입장 시간을 조금 넘겨 무대 뒤에서 급하게 거대한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 "브륀힐트는 어디 있느냐?"는 분노에 찬 대사를 외치며 무대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의 등장은 관객들에게 웃음을 안겼는데, 그는 오페라가 끝날 때까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호터는 한 시간 넘게 성공적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그제야 자신의 어깨 위로 삐죽이 튀어나와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분홍색의 털이 달린 코트 걸이가 망토와 함께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엄 있는 태도로 무대를 활보했고, 관객들은 이내 "코트 걸이가 없는 보탄은 진정한 보탄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로, 1961년 코벤트 가든에서의 《발퀴레》 공연 마지막 장면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보탄이 브륀힐트의 바위를 때려 로게를 불러 불의 띠를 두르게 한 뒤 천천히 조용히 퇴장해야 하는데, 호터는 갑자기 쏟아진 조명에 눈이 멀어 발을 헛디뎌 무대에서 떨어졌다.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그는 마치 골판지 공장에 떨어진 폭탄처럼 요란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오페라는 그렇게 끝나면 안 되는 법. 호터는 가장 아끼는 딸에게 여신으로서의 지위를 박탈하고 잠재운 뒤 후회하여 산에서 뛰어내린 것처럼 관객들에게 비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음악이 계속되는 동안 호터는 용감하게 다시 무대에 올라와 자신이 살아있고 건강하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보여주었고, 음악은 마지막 코드까지 이어졌다.
9. 디스코그래피
한스 호터는 오페라, 콘서트, 오라토리오, 가곡 등 지극히 많은 녹음과 영상 자료를 남겼다. 그의 광범위한 음반 유산은 일본 아마존에서만 1,000개 이상의 아이템이 존재할 정도로 방대하다.
- 바흐: 칸타타 BWV 82 "Ich habe genug"
-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와 《백조의 노래》 (피아노: 제럴드 무어)
- 바그너: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지휘: 클레멘스 크라우스, 바이로이트, 1944년)
- 바그너: 《파르지팔》 (특히 1962년 한스 크나퍼츠부슈 지휘 바이로이트 축제 오케스트라 녹음, 또는 1964년 판 등)
-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전곡 (바이로이트에서 녹음한 여러 버전 존재)
- 브람스: 《독일 레퀴엠》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국립 오페라 합창단, 지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슈만: 《시인의 사랑》
10. 같이 보기
- 20세기 음악
- 바그너 가창자
- 성악
- 리트